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9. 5. 10. 18:52

유전자조작농산물 엘레지

 

 

1.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GMO의 유전자

 

생물종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공간이 이 자리에 없지만 이어지는 글의 이해를 위해 유전자와 관계되는 부분을 간단하게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두 종은 자연에서 만날 기회가 거의 없지만 만나도 전혀 짝짓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는 곳이나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며 나누어진 두 집단은 처해진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진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이전과 다른 유전자를 차별적으로 축적하는 과정을 거친 두 집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전자 구성이 달라지고 결국 형태마저 구별되면서 이윽고 새로운 생물종으로 분화하게 된다.

 

진화된 지 오래되고 개체수가 많은 상태로 안정된 생물종은 다양한 유전자가 집단 내에 축적되지만 그렇지 못한 생물종의 유전적 다양성은 적은 편이다. 오래된 생물종이라 해도 서식처에서 겪은 환경변화가 심해 여러 차례 개체를 잃었다면 유전적 다양성은 위축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유성생식은 그 생물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집단 내에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넓을수록 환경변화에 대한 충격에 이겨내는 개체들이 많다. 따라서 환경변화에 견뎌낼 능력이 크지만 반대일 경우, 환경변화는 생물종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조상과 같은 환경에 살 때 가장 유리하게 발현된다. 그렇게 적응된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집단의 일부 개체들이 낯선 환경으로 들어간다면, 적응될 때까지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가 초래되지 않는 한 생물종 내의 개체들은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생물종은 자신의 고유 환경에서 안정될 테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환경은 바뀐다. 환경변화는 격렬할수록 생물종에게 치명적인데, 환경변화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에 대처할 방법도 찾기 어렵다.

 

격렬한 지진과 화산폭발을 유발시키는 지각의 급작스런 움직임이나 거대한 운석, 그리고 지구 자전축의 변화는 안정되었던 많은 생물종을 대멸종으로 휩쓸리게 만들었는데, 지구온난화도 비슷한 결과를 빚을 것으로 학자들은 염려하고, 환경운동가들은 그 사태는 반드시 막자며 시민사회에 호소한다.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유전자는 지구온난화처럼 격하게 바뀌는 환경에서 치명적으로 불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인데, 유전자조작은 어떨까. 사람의 의도로 엉뚱한 유전자를 갖게 된 생물종은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의 힘과 과학기술로 일정하게 통제하는 환경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는 경험적 사실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수한 개체끼리 짝짓기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품종을 개량하는 이른바 ‘육종’은 좋은 것일까. 우리는 당연한 듯 그리 생각해왔다. 덕분에 우리가 먹는 농작물 대부분을 얻었고 가축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해졌으며 애완동물도 사람들의 변덕만큼이나 다채로워졌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입장만 고려한 이기적인 평가다. 육종된 생물의 처지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양지바르고 건조한 남쪽 사면에서 따는 딸기와 햇빛이 적어 춥고 습기가 많은 북측 사면에 자라는 딸기가 있다고 하자. 남쪽 사면의 딸기는 빛깔이 곱지만 맛이 없고 북측 사면의 딸기는 보기에 칙칙해도 맛이 기막히다면 사람들은 빛깔도 좋고 맛도 그만인 딸기를 얻고자 두 사면의 딸기를 교배시키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4가지 품종의 딸기를 구할 수 있었다고 가정하자. 원래의 두 품종과 칙칙하며 맛도 없는 품종은 버릴 테고 원하던 품종만을 선택할 텐데 그 품종에 맞는 환경은 어떤 사면에도 없다. 새로운 품종에 맞는 환경을 만든 다음 그 환경을 억지로 유지해야 하는 까닭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그 품종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재배하는 농작물과 대부분의 가축들이 그렇다.

 

조상들이 농사를 지면서 개량해 물려준 씨앗들은 품종에 따라 심는 시기와 장소가 제각각이다. 재배하는 방식도 달라 신참 농부는 동네 어른이나 선배에서 물으며 배워야 했다. 심는 씨앗의 종류가 많았을 때, 몸이 좀 고달프더라도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풍수해에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소출이 줄어드는 씨앗이 있더라도 다른 씨앗이 잘 돼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거다. 다만 자급자족하고 남은 농작물만 장에 나가 팔았으므로 큰돈은 벌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농부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육종한 전통 씨앗을 여기저기 아기자기하게 심는 소박한 시대가 아니다. 씨앗을 판매하는 기업에서 산업적으로 육종한 종자를 드넓게 파종한다. 체계적인 연구로 한층 새로워진 품종은 소출이 만족스럽거나 소비자에게 인기가 높아 돈을 더 벌어들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품종을 심기 위해 전통 씨앗을 없앤 작금의 농촌에서 자급자족은 옛이야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

 

녹색혁명 이후 농촌은 한 가지 농작물을 넓게 심기 시작해 전에 비해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만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다. 그 씨앗에 맞는 환경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종이 거듭될수록 농작물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다양성은 줄어든다. 유전적 다양성이 작으면 작을수록, 재배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농부는 농장을 관리 운영하는 비용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몇 안 되는 품종으로 전문화된 농장은 소득이 보전될 만큼 충분히 넓어야 하고 재배 면적이 넓은 만큼 농기계를 사용해야 하며 이웃은 그만큼 멀어졌다.

 

자급자족을 포기한 요즘 농촌에서 농업은 투기가 되었다.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현저하게 좁은 농작물의 소출은 운에 맡겨야 한다. 풍수해가 없는 해에 풍작일 얻을 수 있지만 기상이변이라도 오면 망치기 십상인 까닭이다. 동네에서 소비자를 만나 조금씩 거래하던 시절에서 까다로운 유통시장에 대량으로 납품해야 하는 시대로 개편된 오늘, 농부들은 몸과 마음이 지치지만, 고달픔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농작물을 심어 어떻게 재배해야 할지, 누구에서 어느 가격으로 얼마나 팔아야 할지 농민이 결정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 땅에서 내가 농사짓지만 결정은 내 농작물을 구입할 자본이 내린다.

 

녹색혁명 이후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농민의 권리는 초국적기업이 육종해 독점 판매하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심으면서 거의 무너졌다. 노예 신세나 다름없게 되었다. “잡초가 없다!”, “해충을 죽인다!”,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감언이설에 끌려 심은 씨앗에 구속되고 말기 때문인데, 예상되는 수확을 확보하려면 농민은 파종에서 판매까지 대기업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천재지해로 피해가 발생해도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전자가 조작된 씨앗은 물려받은 유전적 다양성을 거의 잃었기에 환경변화에 매우 약할 뿐 아니라 엉뚱한 유전자가 들어온 까닭에 장차 무슨 변고가 생길지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재배 환경이 달라지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나마 감당할 수 있지만 팔려나간 뒤 문제가 발생한다면 일은 걷잡지 못하게 커질 수 있다.

 

사람은 왜 생물종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까. 미국의 문명 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은 《바이오테크 시대》(민음사, 1999)에서 창조주가 되려는 인간의 탐욕을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유전자를 추가하면 형질이 새롭게 더해지리라 편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유전자는 그리 단순하게 형질이 발현되는 게 아니다. 유전자와 유전자 사이의 관계, 개체와 유전자의 관계, 환경과 개체의 관계에 따라 발현되거나 억제되며, 하나의 형질을 발현하기 위해 여러 개의 유전자가 조화를 이뤄야 할 경우가 많다. 때로 돌연변이 유전자의 엉뚱한 개입으로 형질 발현이 교란되거나 변성될 수 있다.

 

조작된 유전자는 안정된 유전자 환경을 뒤죽박죽 어지럽힐 수 있다. 연구 과정에서 짐작할 수 없었던 문제가 뜻하지 않은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조작된 유전자를 다른 유전자 사이에 끼워 넣는 생명공학 기술은 대단히 어렵다. 무수히 많은 실패를 전제로 이루어질 따름이다. 자연에서 쉽게 이루어진다면 세상의 생물종은 종간 격리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게 아닌가. 한데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에디슨의 경구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과학기술은 연구비만 넉넉히 제공된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성공이 보장할 수익을 연구비 제공자에게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GMO, 다시 말해 영어로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은 그런 연유로 탄생했다. 직역하면 ‘유전적으로 변형된 생물’이라는 뜻인데 환경운동단체는 ‘유전자조작 생물’로 번역한다. modify는 조작보다 변형으로 해석해야 옳겠지만 굳이 조작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GMO를 genetically manipulated organism의 약칭이라 했다 바꿨기 때문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조작’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부정적 느낌이 싫었던 모양이다. GMO는 주로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농산물을 직접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을 먹는다. 따라서 줄여서 GM food와 GM feed와 같이 유전자조작식품과 유전자조작사료를 따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흔히 GMO라 하면 유전자조작식품도 포함하고 다국적 식품회사의 가공식품도 GMO 원료를 조금이라도 사용했다면 예외일 수 없다.

 

이미 일반명사가 된 GMO 대신 LMO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살아있다는 의미를 담아 living을 modified organism에 앞세웠기 때문으로, 시판되는 GMO의 대부분을 재배하는 미국에서 그런 용어를 사용하고 우리 환경부도 따른다. 살아 있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까닭에 그런 표현이 잘 못 되었다고 지적하기 어렵지만, 시민들은 자칫 씨앗이나 가공식품은 LMO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LMO라는 생소한 용어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농산물을 관리하는 우리 농림수산식품부는 GMO를 ‘유전자변형 농산물’이라 칭하고 식품을 감시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유전자재조합식품’이라고 고집한다. 식물을 주로 연구하는 어떤 생명공학자는 ‘분자육종’이라 주장하고 동물은 대상으로 연구하는 생명공학자는 ‘트렌스제닉 transgenic’이라 강조한 바 있는데 ‘GMO표시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식품회사 사장은 뜻밖에 “차라리 ‘개선’으로 부르자!”고 제안해 참석자를 놀라게 했다. 헷갈린다. 헷갈리게 하는 게 GMO의 정체처럼 보이는데, 사실상 GMO는 돌연변이 생물체다. 자연이든 인공이든, 유전자가 바뀌지 않았던가.

 

유전자가 바뀌면 그 생물체는 현재의 환경에 불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GMO도 마찬가지다. 체세포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암이 발생하고 생식세포에 생기면 유전병을 물려줄 수 있기에 우리는 돌연변이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피로나 스트레스를 최대한 피하고 깨끗한 공기에서 안전한 물과 음식을 먹으려 노력한다. 한데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개발한 GMO는 예외일 수 있는가. 우리의 유전자는 물려받은 고유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된 상태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땅에서 연구 목적이 아닌 GMO는 농촌에서 공식적으로 재배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GMO는 사료나 가공식품의 원료로 적지 않은 양이 수입된다. 1996년 170헥타르에서 시작한 이래 2007년 현재 세계적으로 18개 국가에서 1억 1430헥타르에 GMO를 재배하고 있으며 허용된 184품종 중 옥수수, 감자, 유채, 목화, 콩, 토마토가 주로 유통된다고 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에서 발간한 《2008 바이오안전성백서》는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GMO는 식품이나 사료 목적으로 승인을 받지만 현재 국내의 연구 추세로 볼 때, GMO들이 재배용으로 승인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우리를 포함한 국제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GMO는 농작물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곤충이나 가축도 포함되고 화훼나 잔디, 미생물과 나무도 연구하고 있는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모든 생물종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장밋빛 상상력이야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사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이언스올, 2009년 5월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