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11. 7. 12:17

 

자본이나 수출입 물건의 자유로운 이동은 보장하지만 정적 자본과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이동을 제한하는 국가 사이의 협약이 FTA. NAFTA는 멕시코를 포함한 북미 3개국의 자유무역협상을 말한다. NAFTA를 체결하기 전에 미국은 멕시코 사이의 국경선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멕시코 인의 밀입국을 철저히 차단하기보다 엄선하려는 목적이었다. NAFTA가 효력을 발생해 미국의 기업이 티후아나와 같은 멕시코 국경 도시에 공장을 열면 밀입국자가 늘어날 거로 미국 당국이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헐값으로 홍수처럼 밀려드는 미국산 옥수수 탓에 자급기반을 잃자 멕시코 농민들은 국경 도시에 마련된 일종의 수출자유지역, 마킬라도라에 모여들었다. 농민일 때 몰랐던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미국 기업에 취직해 일하면 목말랐던 현금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던 건데, 그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농사로 자급할 때 유용했던 현금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도시에 나오자 자신을 구속하고 말았다. 물려받은 화덕을 버린 농민은 노동자가 되어 옥수수가 아니라 옥수수로 빚은 또띨라를 구해야 했는데, 옥수수 자본이 독점하는 또띨라의 가격은 해가 갈수록 오르기만 한다.


일자리 찾는 농민이 늘어나면서 임금은 줄어드는데 식료품 가격은 상승한다. 밤낮 없이 혹독한 노동에 지친 마낄라도라의 잉여 노동자들은 국경선을 넘으려 들었다. 복지나 고용 보장과 관계없는 저임금 노동자를 원하는 미국 국경도시의 쇠고기 가공업체들이 월경하는 멕시코 인을 원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서 혹사당하는 멕시코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자리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을 순한 양으로 만들면서 임금을 깎아냈고, 저항하는 노동자를 잉여인간으로 쫓아낸 것이다. 그만큼 돈을 더 벌어들이는 양국의 자본가는 늘어난 잉여인간을 마음껏 부려먹으며 내칠 권리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카리브 연안의 멕시코 휴양도시 칸쿤은 부서진 조개껍질이 만든 순백의 해안을 자랑한다. 완만하고 따뜻한 칸쿤 해안은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가진 호텔들이 저마다 화려함을 뽐내는데, 그 화려함은 고단한 원주민이 그 곳에 있기에 가능하다. 몇 푼의 현금을 위해 막대하게 발생하는 쓰레기를 청소하고 위험한 일을 마야족 원주민들이 떠맡지 않는다면 칸쿤의 화려한 명성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서울 강남의 휘황찬란한 건물도 마찬가지다.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강북의 고단한 노동력이 아니라면 건물은 광채를 잃었을 것이다. 그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잉여인간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헐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잉여인간이 없으면 기득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기득권은 잉여인간 스스로 자신의 신세를 인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기득권 눈치를 살피며 일감을 감지덕지 얻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기득권에 대들면 어렵사리 구한 일감도 빼앗길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 길들여야 한다. 그를 위해 부려먹을 인간은 일감의 수보다 언제나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득권이 펼치는 정책은 길들어지는 잉여인간의 유지를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한다. 교육도 그 일환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실패자를 양산하는 교육은 잉여인간을 보급하는데 유용하다. 1986년 일선 교육청에 돌아다닌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게 있었다며 그 구체 사항이 인터넷에 소개되었다. 20여 가지 중에 지나치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치려는 교사”, “학생들에게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려는 교사”,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사고뭉치 학생과 상담을 자주하는 교사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 인기가 많은 교사를 경계하라고 했다는데, 실패하는 학생이 없도록 개개의 인격과 개성을 배려하는 교육을 하지 말라는 지시로 들린다.


잉여인간을 줄이려는 교육에 당시 기득권이 아연 긴장했던 모양인데,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된 요즘 시국이 1986년 상황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교육계뿐이 아니다. 잉여인간이 늘어나는 사회 현실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기득권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실패자를 요구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늘어나는 소비에 비해 채굴되는 석유가 부족하진 상황에서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일자리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텐데, 대학은 터무니없이 늘었다. 대학 입학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비슷한 현실에서 대학교수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대학생 정원은 늘었지만, 졸업한 대학생들을 위한 일자리는 위축되기만 한다.


수도권의 일부 대학 졸업생에게 자리를 조금 허락하는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엄두도 내지 못할 연봉을 주며 신입사원 혹사시킨다. 무슨 까닭일까. 일자리를 확대하면서 임금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외면해야 잉여인간으로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존심 포기를 감당하면서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경쟁은 대학입사만큼 눈물겹다. 번듯한 대학에 들어가도록 아이 키우기에 벅찬 시대에 정부는 아이를 더 넣으라고 가임 여성들을 들들볶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짐짓 고령사회를 걱정하지만, 혹사시킬 잉여인간이 부족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23퍼센트를 밑도는 식량자급은 처참한데 그린벨트와 들판에 공업단지와 아파트단지의 허가를 남발하는 정부는 미국에 이어 중국과 FTA협정을 서두른다. 자급기반을 잃어 식량주권을 상실하면 수입식량은 가격이 오른다. 수입 농산물에 의존해야 하는 잉여인간의 삶은 멕시코에서 보듯 더욱 초라해진다. 잉여인간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지 않는 한, 기득권의 변덕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부초가 될 텐데,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만이라도 부초 신세에서 헤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방법은 무엇일까. 애초 기득권의 꾐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지만,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다면 저항할 수단을 찾아내 보자. 다소 힘겹더라도 길들어지지 않는 자신의 길을 능동적으로 찾는 거다.


멕시코 농민이 고향을 버리지 않았다면 한 조각의 또띨라를 위해 마킬라도라와 미국의 쇠고기 가공공장에서 혹사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가 과감하게 농촌으로 돌아간다면 대기업의 횡포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의지에 맞는 중소기업에 도전할 수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못했다. 대기업의 부당한 요구를 중소기업이 마음 모아 거부하면 푸대접 받는 잉여 업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입사 또는 입시경쟁에서 밀려났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대기업이나 대학 이외의 분야애서 하고 싶었던 일과 공부를 적극 찾아 나선다면 기득권이 부려먹을 잉여인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의 실패자를 양산하는 체계에서 잉여인간은 필연이다. 고단한 입사와 입시경쟁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찾아 나선다면 입사를 위한 대학은 줄어들고 개성 있는 중소기업은 기죽지 않을 것이다. 농촌으로 가는 젊은이가 늘어난다면 식량주권이 그만큼 회복되고 농촌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다. 유기농산물을 자급하고 남는 물량만 시장에 내놓는다면 농민은 지금보다 존중되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다면 석유위기로 경기가 후퇴해도 잉여인간으로 홀대되지 않을 것이다. 잉여인간은 기득권이 만들었으니 기득권의 유혹에 더는 넋을 잃지 않아야 한다. (지금여기, 2013.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