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말살정책으로 억압된 우리의 한국한의학 역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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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공모전 활동/한국한의학 KIOM

2010. 8. 22.

 

 

 

 

< 일제시대의 한국한의학 말살정책, 그 아픔에 대한 고찰..>

 

 

 

오랜 시간동안 한반도와 한민족을 위해 발전해 오던 한국한의학..

그러나 일제시대엔 과연 어떻게 겪어왔을까?

 

 

 

대구 약령시 문화관 건물 3층에서 찍은 사진이다.

일본 군인인듯한 사람이 한약재료를 들고 가는 이를 감시하며 쫓아가고 있다.

일제시대의 대구약령시장의 한 모습을 담은 모형이었는데 이 장면을 보고 문득 일제시대엔

한의학이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떻게 변화했을지가 궁금해졌다.

 

 

1910년 한일합방되면서  의사제도도 일본의 제도가 들어 오게 된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침략한뒤 서양의료만 인정하고 전통의료( 침,뜸,한약기술)를 말살하고  전통의료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조취를 취한다.
1914년...전통의료인들..( 지금의 한의사에 해당함)  이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이 심해지자
의생에 대한 규칙을 만들어 내고 조선의 전통의료인에 대해 지역제한, 시기 제한적으로 면허를 제한하게 된다.

이름도 의사가 아닌 의생이라고 격하시켜 칭하게 한다.

반면 침사,구사(뜸사)는 처음 생기고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의료제도를 없애기 위해  이론적 배경이 같은 침구술도 침사, 뜸사로 갈기 갈기 찢어 놓으면서, 접골사라는 제도를 강제로 만들어 조선의 의생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침,2뜸,3약으로 지칭하는 민족의학을 갈기 갈기 찢어좋는 조취를 취하게 된다.  
 
동양3국중 의학이 가장 뒤떨어져있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의 전통의사제도를  없애고 (일본국회에서 과반수 겨우 넘김으로 제도 없어짐)

 서양식 의사제도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침이나 뜸은 자격제도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침, 뜸을 장애인들도  다소 사용하고 있음에 그들에 대한 호구책으로 안마등과 함께 침뜸을 시술하게 함이였다.
당시 일본은 침,뜸, 한약에 대한 천시가 대단했다.

조선에서도 같은 제도의 시행을 기존의 조선 의술을 담당하던 조선의사(당시 한의사 )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칼로 밀어 부쳤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침사, 뜸사, 접골사 등의 제도는 실지 도지사가 자격을 인정하게 하였지만
실지로 일본인 경찰서장, 군수의 추천을 받아서 자격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침술과 뜸술과는  연관이 없는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려 들었던것이다. 
                                                                                                  - 글 인용 http://blog.naver.com/jiyunisalang/10035860953

 

 


일제는 이렇게 우리의 한국한의학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쳐 위긱가 찾아왔다.

일제강점기 때의 대구약령시는 일제의 감시로 인한 생산자·상인들 의 활동 제약과 1914년에 발동한 〈조선시장규칙〉에 의한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대구의 유력한 한약종상 양익순(梁翼淳)이 주동이 되어, 1923년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를 조직하여 공정거래 · 상업금융 · 운임 특혜 · 여관 접대시설 개선 등 일대 부흥운동을 전 개하였다. 그 결과 총 거래액이 1914년에는 6만 8,000원(圓)에 불과하던 것이 1925년과 1926년 두 해 에는 각각 77만 5,000원, 83만 8,000원으로 11∼12년 사이에 10여 배로 증대되었고, 1940년에는 161 만 원에 달하였다.

약령시가 발흥하여 번창함에 따라 국내외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과 재화·용역에 의 하여 지역 사회경제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비단 약령시 자체뿐만 아니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 련되는 경제사회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멀리 일본 · 중국 · 몽고 · 동남아 여러 나라 · 중 동 및 서유럽 각국에까지

영향을 줄 만큼 국제화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지닌 대구약령시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의 가혹한 통제경제하에서도 지속되었으며,

1949년까지 추령시가 개시되기도 하였으 나 그것은 유습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을 계기로 약령시는 개시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약전골목 에서 상설 한약종상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1978년부터 대구한약협회 등이 대구약령시 부활운동을 벌여 매년 10월 문화의 달 행사 가운데 한 종목으로 약령시를 개설하고 있다.

 

 

 

 

일제시대의 고비를 꿋꿋이 이겨내 온 한국한의학을 보면서

그걸 지켜내 온 선조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더욱 발전시키는 모습에 나도 한국한의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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