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도심이 2020. 5. 19. 01:16

한글을 만든 승지권채(權採)세력은 이렇게 몰락했다

 

 

승지 권채(權採)가 대답하기를,

“전시(殿試)에는 글(漢文)짓는 것은 파하고 외우는 것으로 등급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종 한글창조시대 승지 영능에 안치했으나 반대파가 소멸, 용비어천가를 지은 안지' 최항의 인접 마을에 권채의 제단을 설치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미리 설치한 사가독서당과 집현전의 주인공 권채(權採)가 한글 기안을 비밀리 하엿다

고려 홍건적을 격퇴한 설악산 권금성의 주인공 권희의 아들 권근과 권우(權近 權遇) 형제가 조선 학문의 근본이다(용재총화)

여기의 이색의 제자 권근과 정몽주의 제자 권우는 배움이 다르다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와 권우의 아들 권채(權採)는 사촌간이 사위 한명회와 처조카 유자광의 대결이 조선역사중심이였다

그런데 태종과 세종, 세조대왕은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에게 자주 권우와 그 아들 권채(權採) 학문을 극구 칭찬하는 말을 자주했다(왕조실록기록문) 권근 가문의 스트레스 거슬림이 한글과 문화 음악의 소멸을 초래한다

변계량 정인지등 72인과 세종대왕의 교육을 권우가 맡았다고 족보에 전한다

한글창조를 반대하는 최만리 황희 김종서 신인손 등 모두가 권근 권제(權踶, 1387년 ∼ 1445년) 권람 친인척 한명회 인수대비 권율장군 계보로 지금까지의 문화장악 세력이다

한글반대세력이 세종실록을 기록하여 한글창조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 동부승지 권채와 권채의 친구 허종과 같이 어려운 한문쓰기 과거시험을 한글을 읽는 모양의 경서(책읽기)로 바꾸자고 하였다

이미 이는 한글반포 직전임을 느낀다

 

세종대왕 드라마 '강채윤' 은 권채 매제 '채윤'으로 보이며 채윤의 외손 조윤무와 대장금. 정걸(이순신스승)을 길러 한글과 국방의 기본이 된다

 

권근-권제는 한문쓰기 --권채는 장차 만들 한글외우기 과거시험 요구하다가 의문사 매제 채윤과 외손 조윤무가 망국시대 조국을 수호하려고 했다

 

세종 78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9월 3일(경인) 1번째기사

과거 볼 때에 글을 외우게 하여 임금이 친히 심사하기로 하다

 

정사를 보았다.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국학의 유생들은 전혀 한문쓰기 사장(詞章)만 익히고 경서(經書)는 읽지 않으니 폐단이 실로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과거에서 강경(講經)하지 않는 까닭이오니, 강경법을 시행하게 되면 자연히 실학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항상 이것을 염려하였으되 아직도 결정짓지를 못했다. 태조 때에 처음으로 과장에서 경서를 외우게 하는 법을 세웠더니, 태종 때에 권근 양촌(權근.陽村)이 번번이 강경을 파하기를 청함을 나도 자세히 들었는데, 그것이 어찌 살피지 않고 한 말이겠는가. 그 뒤에 변계량도 또한 강경하는 법이 잘못이라고 역설하여 임금의 말로서 그만두었다는 것을 내가 들었고, 그 강경을 할 때에는 사정을 끼는 폐단이 없지가 않아 심한 자는 혹 비밀히 수험생(擧子) 에게 알려 주는 자도 있었다 하니, 이것도 인정으로써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한때의 정승이었다든가, 집정 대신(執政大臣)이었다든가, 혹은 친구의 자제라면 어찌 그 사이에 사정을 쓰지 않겠느냐. 강경하는 법이 마침내 폐단이 있게 되어 선비들을 뽑을 때에 쓰지 않았으나, 그 과거에 응하는 거자들이 어찌 미리 사정이 용납될 줄 알고 글을 읽지 않겠느냐. 이제 강경으로 선비를 뽑게 되면 반드시 글 읽는 실적이 있을 것이다. 대저 경서에 익숙한 것이 귀하고, 그 문장같은 따위는 국가에 아무 이로움이 없고 다만 외교 문서에만 이를 버리지 못할 따름이다. 만약에 대체를 알고 예의에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문장에 소활(疏闊)하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권제(權踶)가 아뢰기를,

“지금의 학자로서 심한 것은 글을 읽지 않을 뿐 아니오라, 또한 문선(文選)도 과거보는 데 맞지 않다 하고, 예사로 이 한때 학우(제배齊輩) 가 지은 글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여 외우기를 맞지 않습니다. 이로써 풍습이 되면 학술(學術)이 날로 낮아짐이 오늘날보다 심할 때는 없을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옳겠는가. 학문을 일으키는 방법은 전혀 경 등에게 위임하겠으니, 가히 대신들과 더불어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면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

하였다. 찬성사 신개가 아뢰기를,

(신개는 = 권제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다. 신개는 신상의 증조부이며,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권제 후손 권율장군 사위 신립의 5대조 신개는 한글을 반대한자 당파였다 .)

 

“신 등이 일찍이 사관(史官)을 시험보일 때에, 경서와 사기를 외우게 하고 함께 그 말하는 바를 들으니, 의향(意向)이 각각 달라서 혹은 통(通)이라 하고 혹은 약(略)이라 하며 혹은 조(粗)라고 〈평정을〉 하오나, 그 조(粗)와 통(通)과는 진실로 간격이 있는 것인데도 듣는 자가 한결같지 아니하니, 강경으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어 말하기를,

“내가 무과(武科)를 친강(親講)하였을 때에도 조와 약의 사이를 정하기 어려웠는데, 그것은 일정한 법규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권제(權踶)가 또 아뢰기를,

“강경하게 되면 폐단이 있게 되오니 진실로 과장에 쓸 수가 없고, 보통 때에 성균관이나 예조·대성(臺省)과 더불어 여러 유생들이 경서를 읽고 외우게 하여, 《대학》으로부터 오경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문서를 두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통하는 자를 다시 물어서 과연 모두 통하고 깨우쳤다면 천거해서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사서와 오경을 모두 통한 뒤에 쓸 것이 아니라, 사서와 이경(二經)이나 삼경의 대의(줄거리)만 통해도 좋으니, 경 등은 함께 학문을 일으킬 방법을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조 등이 나가니, 임금이 여러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과거보는 해마다 먼저 제술(製述)로서 취하되, 궐정(闕庭)에 나아가 내가 친히 글을 외우게 하여 그 학문을 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승지 권채(權採)가 대답하기를,

“전시(殿試)에는 글짓는 것(漢文)은 파하고 외우는 것으로 등급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글제정하여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단지 등급만 하리오. 그 통하지 못한 자는 뽑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인손이 아뢰기를,

“전하의 건강에 피로하실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이 피로하겠느냐. 하룻 동안을 한정할 것이 아니라, 비록 5, 6일이라도 좋을 것이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경연에 나아가고자 하나 집현전 관원이 다른 곳에 나누어서 사진(仕進)함으로 오랫동안 강의를 정지했었다. 만약에 네 사람만 되게 되면 두 사람씩 서로 교대해서 입시(入侍)하여도 경연에 나아갈 수 있겠다.”

하였다.

 

(신인손은 세종 16년 병조참의로 . 세종 20년(1438년) 권채가 죽자 즉시 병조참판(종2품)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신인손은 병조참판으로 오랫동안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세종의 북방 개척을 실무적으로 도왔고 세종 26년 마침내 형조판서에 오른다).

세조의 김종서 세력 제거로 권채의 처조카 유자광이 권채(權採)의 한글사용 처럼 쉬운 한글로 경서읽기 과거제도를 시도하려고 한글시, 민속음악을 세조대왕이 한글시(월인천강지곡)를 짓고 유자광이 한글시 정읍사. 동동. 만전춘.등을 악학괘범에 사용하는 한글사용 혁명이 이루어진다

전라도 군사세력과 임진난에서 동학군 항일군 그 모체는 한문을 버리고 한글창조 그 긴세월 이루어진 숙련이 우리소리 판소리로 내려왔는데 서울 홍제동 중국사신맞이 터 출신 신재효가 서울식 한문을 주로 많이 사용하는 판소리가 되어 있다

 

 

 

양촌 매헌 형제 (권근 권우) 조선학문 근본이라는 용제총화글

 

최초로 한글 '용비어천가'를 지은 안지와 최항이 권채(세종의 승지) 정읍 옹동면에 살앗고 세종의 장녀 정의공주 시댁 주변 정읍시 산내면 사람이 이였고 한글 반대세력 최만리를 가장 미워하고 축출한 사람은 수양대군이였다

세조대왕 수양대군이 한글 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세조대왕의 제갈공명 같은 책사 유자광이 승지 권채의 처조카로 권채가 지은 향약집성방을 보고 음악책 악학괘범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를 시기한 한명회 한문 고수파들이 동래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유자광은 그곳에서 도공들에게 한글 ‘가갸거겨’ 문자를 가르처서 그 백자 조각이 유자광의 유배지 동래 기장현에서 최근 발견되였다

성종대왕이 유자광을 석방하려고 하자 유자광을 죽이라고 상소문을 올린 성현과 함께 악학괘범에 한글노래 정읍사와 동동가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자광이 등용한 고향친구 정극인이 한글노래 상춘곡을 지었다

연산군시대까지 한글을 사용햇으나 중종반정 즉시 중종이 한글 언문청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유자광계열 한글 창조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 숙청을 미리 알고 낙향한 이항이 태산이 높다하되 시조를 일제 이항문집에 기록하고 이를 정읍사람 양사언이 시집에 실었다

한글소설 홍길동전 역시 정의공주의 시댁 안맹담 마을로서 정읍 태인현 대장금마을(옛 누평현. 굴돌현청지)에서 실제 이 마을 사람유자광이 마을 친구 유자광이 조종한 홍길동의 이야기를 허균이 이마을 에서 쓴 것이다()

 

 

이런 내용을 한글반대세력이 알고 이듬해 권채는 급사(의문사)를 하여 세종대왕이 긴히 스려하였는데...하고 3일동안 일을 멈추었고 세종의 왕능 예정지 영능을 하사 죽어서도 측근에 두려고 하였다

그 여주 영능의 권채의 무덤도 세조때 권람 한명회 친구 이제진이 차지하였고 없애버렷다

이를 권채의 조카 유자광 세력시대 예종 1년에 세종대왕의 묘를 영능에 이전시키고 무령군 칭호를 받는다

권채(權採)의 장례식장에서

한글 반대파들이 권채(權採)-가 없어도 이색 -권근- 권제(權踶)있는데 뭐!

라는 즐기는 내용 글이 고전 어면순 고금소총책과 안동권씨 족보에 아래기록이 있다

 

조선 세종 때 승지로 있던 권채(權採 : 1399~ 1438)는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니, 장군 김자웅(金自雄)이 매우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
김자웅은 뛰어난 문장가가 나이 마흔에 일찍 세상을 떠나간 것을 탄식한 것이었으나, 사인(舍人)
박이창(朴以昌 : ?~ 1451)은 이를 비꼬아 말했다.
"장군은 주문자(主文者 : 대제학 자리를 맡을 사람)가 없을까봐 그리 슬퍼한답니까?"
이러면서 역대 대제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거하니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그 자리를 맡았고, 양촌이 서거하니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맡았으며, 춘정이 서거하니 청경(淸卿) 윤회(尹淮)가 맡았고, 청경
이 서거한 뒤 지재(止齋) 권제(權제)가 그 자리를 이어 맡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만일 지재가 서거한다면 남수문(南秀文)이 맡을 것이고, 남수문이 서거하고 나면 내가 또한
맡게 될 것이외다. 그리고 내가 죽고 나면 또한 장군이 있지 않소이까? 권채가 일찍 떠났다고 무엇
을 그리 걱정한단 말이요?"

 


이 말을 듣고 김자웅은 더욱 슬퍼하며 한글 반대파 박이창의 이야기를 한글의 발상지 율수제 학당 (정읍 무성서원 )송세림이 연산군 에게 알리려고 고금소총에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속에는 "날이 갈수록 문장의수준이 낮아지는 현상을 지적하여 비판하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한글창조파 권채의 죽음에 호탕한 담소하던 박이창은 황보인 권제 한확의 총애로 득세 권람 한명회 인수대비 서인, 노론파 유성룡 송시열 사대주의 한문파로 권채의 조카 유자광을 조선최대 역적으로 조작한 당파들이며 이들이 한글을 버렸으나 일본의 식민지 통역용으로 그리고 미국의 기독교 선교목적 성경 인쇄술로 한글이 급성장하였고 훗날 인쇄공 주시경이 이를 정리했다

 


이해에 한글반대 세력이 권채의 3대독자 권이(權怡)를 청부살인을 유도하여 정이현 친척을 매수 먼 함경도 철산군수로 보내 위장하려하였다

이를 유자광이 헌부에 신고한 기록이 아래 예종왕조실록에 자세하다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10일(을미) 1번째기사

 

군기시 판관 정이원이 아들을 시켜 권이를 결박시키니 국문하게 하다

 

처음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정이원(鄭而元)이 그 아들 정정(鄭靖)을 보내서 형조(刑曹)의 장수(杖首) 를 청하여, 이들과 함께 권이의 집에 가서, 권이를 결박하여 그의 집 뜰 가운데 눈[雪] 위에다 놓아 두고, 밤을 새고 한낮이 되어도 오히려 놓아주지 아니하므로, 권이의 아내가 정이원의 집에 찾아갔으나, 문을 닫아걸어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울기를 매우 애통하게 하였다. 이웃 사람이 가엾어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정이원의 아들 정정이 내 남편을 결박해 왔는데, 그 생사(生死)를 알 수 없어서 우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 살펴보아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사람이 살펴보니, 권이가 과연 계단 위의 창(窓) 밖에서 꿇어앉아 있었는데, 이때 마침 그 족인(族人) 안근(安謹)이 와서 구원해 주어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이의 오촌숙(五寸叔)인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그 연유를 자세히 갖추어서 아뢰니, 승정원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곧 정정과 증인(證人)들을 불러서 사실을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사실대로 하였으므로, 의금부에 명하여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이때 정이원이 함경도 철산 현감(利城縣監)을 제수받아 길을 떠난 지 하루가 되었는데, 이를 잡아오게 하여 국문하여 자백을 받앗다

얼어죽여 자연사로 위장한 청부살인을 숨기려고 고의로 먼 함경도 현감으로 보내려다 유자광 힘으로 살아났다.

 

 

권채의 외손 채재웅, 친구 허종의 손자 허항을 정난정과 윤원형이 '작서의 난'과 김안로 숙청에 조작 몰아서 죽였다

 

세조대왕의 황보인 세력 제거로 권채의 처조카 유자광이 권채(權採)의 한글사용 처럼 쉬운 한글로 경서읽기 과거제도를 시도하려고 한글시, 민속음악을 세조대왕이 한글시(월인천강지곡)를 짓고 유자광이 한글시 정읍사. 동동. 만전춘.등을 악학괘범에 사용하는 한글사용 혁명이 이루어진다

 

 

 

유자광이 살려낸 권이의 사위 조윤무(전라도절도사)를 파격적으로 동부승지에 임명 올렸으나 이들이 반대하여

중국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서 사멍 의문사를 하였다

서울에서 한문세력을 피해 세종대왕 장녀정화공주를 권채의 고향인 정읍 대장금마을 안씨가문에 중매 정의공주가 연습한 기록만 남는다

전라도 군사훈련 전주군사훈련 대사습대회에서 한글로 군사병법 손자병법 삼국지 척개광지남서 읽기대회를 열었는데 한문을 모르는 서민도 병과에 임관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유일한 군사훈련 벼슬지역 전라도는 한문을 몰라도 무술군관 등용되는 실력자 지역으로 세조 수양대군 구테타, 남이장군 반란평정, 중종반정 유자광일등공신, 임진왜란에 조윤무의 친족 으로 경상도 남명 조식, 전라도 일제 이항의 제자와 그 계보인 유팽로 안영이 권채 유자광 홍길동 대장금 조윤무 마을인 장금산 회문산지역에서 최초 의병발의로 조윤무의 사위 유장군이 가등청정군에 항복하여 풍신수길이 죽이려는 소서행장의 군사 비밀을 손문욱으로 부터 얻어내어 고향친구 정걸과 정운에게 알려서 백전백승 이순신 승리를 이룬다

그 손문욱이 공로로 광해군 왕조에 인목대비 축출에 압장서다가 인조반정으로 전라도 군사 공로는 모두 이순신 난중일기로 만든다

난중일기 글씨는 송익필 글씨일까 왜군장군 소유 이순신 친필과 글씨가 다를까

중종왕이 말년 중병으로 대장금에게 의존하는 시대 유자광이 기른 조윤무 친족 남명 조식, 일제이항이 낙향하여 영호남 의병의 교육이 유팽로 안영 김천일 곽재우 고경명등 영호남 의병이 거의 여기 두 스승에게 배움에서 비롯된다

 

정여립 숙청 음모를 미리 알고 낙향 태인현 칠보산 보림사에 은신한 서울의 무술가였던 이항으로부터 무술교육을 계승한 권채의 후손 권극평이 도강김씨 호족장 김후진과 김천일이 고경명 의병을 도와서 활약했다

고경몀의 후손 고정주가 동학군 의병 숙청으로 담양 창평에 영어학숙을 세우고 김병로 김성수 장덕수 김낙기 등이 전주 선교사로부터 ' 알아야 승리한다'라는 배움에 감명받아 이들이 동경유학생으로 신익희 조만식등과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의 기초를 만들어

한국이 해방과되고 독립하였다

평양의 조만식이 지역감정 속에서도 특히 동경 호남 유학생화장 백관수에서 나용균. 김낙기 대대로 친절하여 강증산 차천자 보천교 , 정읍내장사 윤세만 바우덕이 농악대,김도삼농악대 ,등 정읍 농악 독립운동 모금 비밀농악 자금을 정읍 북면 유학규가 신익희 친족 이시영 임시정부 총무에게 자금을 전달하였다

이 사건으로 정읍 보천교 차천자 동학교는 해산되고 건물은 서울 조계종 사찰로 넘어가고 ..... 그래서 해방되자 이승만 김구 이승만

신익희 등이 다투아 정읍 독립군 세력을 안으려고 했다

그래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언을 김구보다 빠르게 정읍에서 선포했다

 

 

 

그힘은 한글이다 한글은 정몽주. 권우. 세종. 권채. 세조. 유자광. 정극인. 이항. 정철 등 인맥이 주로사용하였으나 명나라 의존 한명회 사류 서인 노론파 집권으로 사라지고 미국 일본에 의하여 대중화되어 한국 한류시대 스타로 지금의 영광이 있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