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도심이 2020. 7. 11. 01:22

금산면김제의 마을이야기(금산면 일원 Ⅰ)

지평선추천 0조회 4919.09.16 21:3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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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이란 지역명은 금이 나오는 산이 있어 금산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금산면이라는 이름은 1935년에 지어진 이름으로 백제 법왕1(599) 왕실의 자복사찰(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 세워진 금산사가 위치한 고장이라 하여 금산이라 한 것이다.

그만큼 금산면에 있어서 금산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지역의 정체성으로 연결되기에,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더 말할 필요 없으려니와 김제시와 전라북도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의 정체성과도 연결 될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다만 수많은 국민들이 금산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명확하다. 금산사는 우리나라 정신사적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자면 매우 장황할 것이나 지면 관계상 요약해보자면, 금산사는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품어 주었던 사찰이며, 그 희망은 미륵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거나, 그 속성을 간직한 채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에 잠재되어 표현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금산사가 처음으로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잡은 것은 1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금산사중창불사로 시작된다. 이후 금산사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대표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며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통일신라의 폐쇄적 사회구조의 적폐가 드러나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던 말기에는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곳곳의 호족들이 미륵을 자처하며 나라를 세웠던 이른바 후 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은 행정의 수도를 전주로 삼고, 정신적 중심지로 금산사를 원찰로 삼아 금산사 주위에 성곽을 쌓았으며, 이때 만든 성문(홍예문)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그 후 고려 중반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왕사가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금산사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또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금산사는 국가를 수호하는 사찰로 명성을 이어갔는데, 임진왜란 당시 처영대사가 호남일대 승병들을 이끌며 혁혁한 전공으로 나라를 지켰으나, 이를 계기로 금산사는 왜군들에게 승병들의 본거지로 지목되어 대부분의 목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하는 왕의 사유물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주장을 하며 대동계를 이끌며 활약했던 정여립과도 금산사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금산사의 인근에 정여립의 생거지가 있으며, 당파싸움으로 치달으며 민생이 파탄 나 백성들의 고통과 염원이 금산사라는 미륵도량에 위안을 찾을 무렵 정여립은 금산사 일원을 무대로 미륵신앙과 민주적 사상을 바탕으로 대동계를 이끌다 역적으로 몰려 조선 최대의 피바람이 불었던 기축옥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신분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희망을 심어주었던 미륵신앙은 동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민족종교로 생겨난 원불교와 증산교 뿐 아니라 그로부터 분파된 수많은 종교들이 미륵신앙의 밀접한 영향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미륵신앙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영향을 줌과 동시에 동학의 연결 선상에 있는 천도교인들이 전국적으로 3.1운동에 대거 참여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이뿐 아니라 개신교, 천주교 등 외래종교의 유입당시에도, 유교 사회질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함에 따라 타 지역의 경우 외래종교의 안착이 매우 어려웠으나, 유독 금산사가 소재한 금산면일원만큼은 신분과 계급, 남녀차별을 떠나 모두에게 평등했던 미륵사상에 익숙했던 터라 개신교의 성지 금산교회와 천주교의 성지 수류성당 등의 건립과 전파가 지역민들에게 수월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렇게 금산사는 김제시나 전라북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사찰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신사의 큰 틀에서 주목해야할 사찰이자 김제시의 자존심인 것이다.

 

이에 김제의 마을이야기 금산면 일원 편을 다루기에 앞서 금산면과 불가분의 관계인 금산사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1편에서는 쌍용리, 원평리, 용호리, 선동리를 살펴보고 향후 2편과 3편에서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주요 사건들과 인물, 이야기 등을 언급하며 풀어가고자 한다.

 

쌍용리는 금산면사무소와, 금산중·고등학교, 청소년 문화의집 등이 소재한 면행정과 교육의 중심지라 할 수 있으며, 정여립의 사당터였다는 곳에 현재는 쌍용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또한 쌍용리 월평마을내에 200여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당산나무처럼 서 있는데, 예전 인동장씨가 마을을 조성할 때 주변에 그늘이 없어 사람들을 위해 심었다고 전해지며,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나무를 기준으로 마을내로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평리는 금산면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이자 역사인물들을 상당수 배출한 고장으로, 동학농민혁명의 꿈을 실현하고자 민·관 합치기구로 세워졌던 원평집강소가 자리잡은 곳이며 이 원평집강소는 민가로 사용되며 폐가로 방치되다 최근 김제시와, 김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문화재청의 협력으로 복원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또한 원평을 근거지로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김덕명장군의 활동지이자 묘소가 있는 곳이며, 이곳 원평장터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사람’, ‘사도법관등의 칭호를 얻었던 김홍섭 판사가 태어난 고장이다.

 

용호리는 일제강점기 광복군 제1지대장을 역임하며 활약했던 이종희 장군이 태어난 고장으로 유명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의 일전을 벌였던 우금치전투에 대패한 뒤 동학농민군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을 무렵, 500여명의 농민군이 후퇴하며 재기를 꾀하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구미란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선동리는 삼국시대에 세워진 석축산성인 상두산성이 있는 곳이다. 현재 상두산 아래 봉우리와 중간 봉우리 사이 널따란 곳에 장군대(將軍臺)로 보이는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동남쪽에는 쌓아놓은 석성이 있다. 이 선동리 상두산성은 전라북도 전주로 통하는 동서로 교통요지로서, 내륙지방에서 정읍 눌제를 거쳐 줄포만에 이르는 과거 해상 교통으로의 연계지점에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특히 노령산맥의 중봉을 이루고 있는 모악산과 바로 연결된 상두산에 이러한 산성이 있다는 것은, 상두산이 호남지방의 중간지점으로서 군사적 요새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쌍용리(雙龍里)

과거 금구면 수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은리와 용호리 일부를 합하여 두 개의 용자가 들어 있다하여 쌍룡리라는 이름으로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으며, 쌍룡리에는 부평, 용계, 월평, 회평 등 4개 마을이 있다.

 

 부평(富平, 浮坪)

원평옆에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사금을 캐가고 메워진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금을 많이 캐내어 부자가 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부평(富平)’이라 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을 캔 구덩이를 메우고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뜰 부()자를 써서 부평(浮坪)이라고 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부자 부()자로 고쳤다는 사람도 있다.

 

 학평(學坪)

일제시대 사금을 캐내기 위해 파헤쳐졌던 모래와 자갈 위에 원평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학교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며, 원래는 부평에 속했으나 마을이 커지자 둘로 나누면서 학교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학평이라 했다.

 

 월평(月坪)

회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변에 계수나무 아래 산다는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옥토망훨(玉兎望月)형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승배기

쌍룡리 가운데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회평(會坪)

회평 마을은 용암과 회평 두 마을을 합하여 회평이라 부르고 있으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때 정여립(15701590)이 지금의 쌍룡사 터에 자리잡고 뒷산에서 무예를 익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며, 회평은 언양 김씨 김무곤의 5대 조부가 처음 정착해서 살아왔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사금 채취가 한창일 때, 여러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마을이 커져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쌍룡사 뒤편 노루목 고개가 잘려져 있는데, 이는 청나라 이여송이 혈을 끊으려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용암(龍岩)

회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이 마을은 정여립이 모반자로 몰리어 죽은 후에 청주 한씨의 본거지가 되었다.

 

 원평리(院坪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으로 들이 넓다고 하여 원들’, ‘너른들또는 원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암리, 용흥리, 성암리 일부를 합하여 원평리라는 이름으로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원평리는 학원, 이원, 유목, 중원 등 4개 마을이 있다.

 

 용호리(龍湖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호리, 용성리, 부평리 일부를 합하여 용성과 구호의 이름을 따 용호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구미, 장전, 소용, 주평, 황곡 등 5개 마을이 있다.

 

 구미(龜尾)

장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형성 당시에는 구미란(龜尾卵)’이라 불렀으며, 마을 앞에 거북이의 머리와 같은 바위가 있고, 마을 뒷산의 모습이 거북이의 등을 닮았는데, 이 마을은 거북이의 꼬리 부분에 들어서 있어 구미라고 했다. 이 마을은 광복군 제1지대장 이종희 장군(1892~1946)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1894 12월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과 관군을 맞이한 동학농민군이 이 마을에서 싸워 마을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수백 명의 동학군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170년 전 두만형 선생이 이 마을에 기거했다는 기록이 두선생의 문집에 실려 있으며, 마을 주변 산에 고인돌 두기가 있다.

 

 소룡동(巢龍洞)

주평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오무동이라고도 부르며, 까마귀가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는 오무산(烏無山)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오무동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소룡동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알 수 없다.

 

 주평(舟坪)

소룡동 황골사이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모습이 배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동리(仙洞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으로 지형이 선녀가 베를 짜는 형국이라서 옥녀(玉女)’ 또는 선동(仙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평리 일부를 합하여 선동리 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선동리에는 아직과 산수 두 마을이 있다.

 

 산수동(山水洞)

아직동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갑오 동학혁명 때 최문범, 장순철, 황명국 등이 피난처로 기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본래는 선동 마을이었는데 마을이 커지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선동에서 나누어졌다.

동쪽에는 해발 200여미터의 지풍산, 서쪽에는 해발 350여미터의 칠판산, 남쪽에는 해발 150여미터의 한박산, 동남쪽에는 상두산 등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산수동이라고 했는데, 현재는 전주최씨가 많이 살고 있다.

 

 아직동(娥織洞)

옥녀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선아동(仙娥洞)’이라고도 부른다. 하늘에서 내려온 어여쁜 선녀가 배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근처에는 옥녀(선녀)직금혈(織錦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지관들이 명당을 찾으려고 몰려드는 마을이다. 당산에는 수령 200여년 된 나무가 있어 이 마을이 오래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마을 남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갓 시집온 새색시가 우렁이를 잡다 발을 헛디딘 바람에 연못에 빠져 죽었다 하여 각시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대원(大院)

아직동 동남쪽 상두산 중턱의 평평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날 마을 북쪽 옆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도 대원이라 했다.    학예연구사 백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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