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도심이 2020. 4. 30. 03:53
우리들의 이야기 서철원 박사 조직신학 탈고 후 출판 기념 기자와 함께 좌담
바위섬 추천 0 조회 8 20.04.16 1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철원 박사 조직신학 탈고 후 출판 기념 기자와 함께 좌담.

 이 땅의 개혁신학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삶으로 전하는 개혁신학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질문은 개혁신학포럼 최더함 목사가 맡습니다. 서문강 목사에 이어 서철원 박사를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개혁주의 신학 교육에 헌신한 서철원 박사(78)는 최근 교의신학 7권 전집을 완간했다. 7권은
△신학서론 : 믿음으로 신학함 △하나님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역 △인간론: 인간,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론: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구원사역 △구원론: 의롭다 하심, 거룩하게 됨 △교회론: 교회, 하나님의 집 △종말론: 창조 경륜의 궁극적 성취 등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조직신학 저서다.
<변증학>을 쓴 반틸 밑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 논문에서 칼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을 강력히 비판하는 등 '뼈대'를 세운 박형룡 박사에 이어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콘텐츠'를 채우는 일에 헌신해 왔다. 지난 5월에 한 세미나에서는 '현대신학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제목의 발표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달 이뤄진 서철원 박사와의 인터뷰.
-박사님 하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나는 고3 때 WCC를 반대하다 퇴학당한 사건이고, 하나는 100대 논문으로 선정된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1959년 대전 중앙교회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는데, WCC 찬성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회의가 중단됐습니다. 한쪽은 연동교회에 와서 속회를 했고(후일 통합), 한쪽은 승동교회에 와서 속회했습니다(후일 합동). 연동과 승동 측으로 불렸습니다.
저는 자세히 잘 모르면서 WCC로 가면 안 된다고 다니던 학교(순천 매산고)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5월 초 7명이 함께 교정에서 인쇄물을 나눠주면서 반대시위를 하려 했는데, 사전에 누설돼 교사에게 막히고 교장이 참석한 회의 끝에 즉결처분으로 퇴학당했습니다. 결국 7월 중순 숭일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고3은 전학이 안 된다고 했지만, 정규오 목사님(전 광주중앙교회)이 넣어 주셨습니다."
-당시 퇴학을 안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교에서 대학 진학시 장학금도 약속받았었는데, 퇴학을 당하고 나니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도움을 받았다면 힘들지 않게 살았을 것입니다. 시골내기라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가정교사도 잘 못해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서울대에 당당하게 합격하셨습니다.
"지금 같으면 석 달이나 쉬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는 열심히 하고자 했습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총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하셨는데요.
"고3 때 정 목사님이 '총신대를 4년제로 만들었다. 학비도 도와줄테니 가라'고 하셨지만, 목표대로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서울대 4년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정 목사님이 느닷없이 아버지를 통해 '총신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대학원과 해외 유학비까지 대시겠다며....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서울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총신대 신대원을 같이 다니다 대학원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습니다.
군목 제도가 막 생겼을 때여서, 안수를 좀 빨리 받은 다음 시험을 치르고 27세 때쯤 군목이 됐습니다. 훈련기간에 군목 시절까지 합치면 4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다른 사람들 대학 마치고 학위 2개 딸 시간에 국내에만 있었던 셈이어서, 비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197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했는데, 이것만 마치고 다시 철학을 하려는 나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온 아내가 오자마자 임신을 했고, 세 학기 중 두 학기 시험 기간이 출산 기간과 겹쳐서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철학부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분에게 자문을 구하니, 7-8년 공부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철학 반 조직신학 반으로 수정했습니다."

-지도교수인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학 전체를 수용하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반틸이 '전제주의'로 변증학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참'임을 전제하고 조직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대화에서도 기독교 기본 진리에서 출발해, 아무리 불신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신 의식'이 접촉점이 돼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수업 중 토론하면서 '전제주의로 창조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를 여쭤봤습니다. 저는 증명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이 '전제주의'인데 그걸 공격하니 얼마나 당황 하셨겠어요. 전제주의로 칼 바르트를 공격했는데 말입니다. 반틸이 제게 합당한 답을 주진 않았습니다. 써 와서 발표하라고만 하더라고요(웃음).
기독교 진리가 참이라는 데서 출발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를 이루셨는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창조'인데 말입니다. 물론, 저는 신학 하는 방법 등에서 반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틸은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를 참 좋아합니다. 신학을 말할 때는 거의 바빙크를 갖고 이야기합니다. 계시의 흐름도 바빙크와 연결돼 있지만, 바빙크와는 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어려운 공부를 결국 마치고 귀국하셨습니다.
"정규오 목사님이 총신대 시절 학비를 대 주셨고, 웨스트민스터 비행기 표도 감당해 주셨습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에 갈 때는 미국 친구들이 반, 정 목사님이 반씩 후원해 주셨습니다. 정 목사님이 은퇴하신 뒤에는 자유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셔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총신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저술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총신대 은퇴 후 한국개혁신학연구회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복음과 율법의 관계>, <하나님의 구속경륜>, <교리사> 등이 있고, <성령신학>은 오순절 운동의 혼란을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회는 신학 교육에 복음 선포가 희박하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사역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와 선교사, 신학교수 요원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성경공부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독교를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 요한 다음 신학자를 꼽으라면 히브리서 저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훌륭한 신학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확실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루는 데는 바울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믿음과 은혜로만 구원을 이루는 것이지, 행함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제시한 것이 율법의 완성과 폐지입니다. 히브리서를 바로 이해해야, 구약과 신약의 연대(連帶)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교의신학 7권을 내놓으셨습니다.
"한국에 한국 저자의 바른 조직신학 책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남의 것을 옮긴 번역서나 짜깁기한 책입니다. 성경이 말한 복음의 내용을 바로 제시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목회자들뿐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신학 서론부터 종말론까지 제시하려면 신학의 출발점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그 출발점이 없습니다. 칼빈조차 신학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만 했지, 출발점은 없습니다.
모든 신학과 설교의 시작은 '창조의 경륜'입니다. 저는 그 입장에서 저술을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것이 선이기에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외의 길은 악이기에, 죽음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을 한 나무에 계시하셨는데,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주 자가 되기로 하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쓸어버리고 다시 짓지 않으시고, 범죄한 백성을 돌이키셔서 자기 백성을 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범한 죄 값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모두 범죄자이기에, 죄 값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범죄했으니 사람이 갚아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 되시어 대신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하도록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것이 교회로 나타났고, 그 회복이 완성되면 역사는 끝이 납니다.
이 신학 사상이 창세기에 나와 있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야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가 창조의 경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부나 종교개혁자들, 현대 신학자들까지 2,000년 역사 속에서 '창조의 경륜' 가운데 신학을 전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습니다.
"예정 교리가 훌륭하고 교회를 지켜왔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예정된 사람은 무조건 구원하셨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전자처럼 이야기해 왔습니다.
물론 예정론이 칼빈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가 완성하고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아퀴나스도 예정을 말했지만, 칼빈이 완성시켰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부족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예정된 사람은 무조건 구원을 작정하셨다고 하니, 세례를 받아도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깨달아서 구원의 은혜를 얻지만, 옛 사람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칼빈도 성화의 문제를 다뤘지만, 성경적 방안을 말하지 못한 채 '옛 사람을 죽이면 새 사람이 나타난다.'고만 했습니다. 어떻게 옛 사람을 죽이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도 '죄 죽이기'를 말했는데, 칼빈의 반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죽이고자 하지만 육의 욕망을 나로서는 해결할 길이 없으니, 결국 로마 교회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 2,000년 역사 최초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법'을 제시했습니다. 이걸 못하니 모두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사막으로, 수도원으로 가면 욕망이 사라지나요? 고행과 금욕만 있을 뿐입니다.
죄의 욕망이 있을 때, 요한일서 1장 7절처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면 그 욕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죄의 욕망'이라는 제목이 붙지 않아서 적용을 못했습니다.
지은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있지만, 죄의 욕망도 죄입니다. 욕망이 일 때,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구속의 사건을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모든 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이 책을 열심히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서철원 박사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창조가 무(無)에서 만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상 너머에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며 “하나님이 피조물을 입으셨다가 돌아오셨다는 것도 없이, 그저 ‘인간 예수’에 의지한다. 성육신도 없고, ‘인간 예수’가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대웅 기자

-지난 5월 '현대신학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발표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슐라이어마허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약된 말을 썼기 때문입니다. 반틸이 바르트를 비평하면서 칸트의 철학을 많이 해설했지만,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는 하지 못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를 이해하지 못하니, 칼 바르트와 현대신학도 좀 과격할 뿐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르트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습니다. 칸트 철학으로 완전히 신학을 바꿔서, 인간의 의식을 변형시켜 버렸습니다. 철학을 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칸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슐라이어마허와 바르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바른 신학이고, 현대신학은 가짜라고 담대히 선포하고 공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 대토론회에서도 오영섭 박사가 바르트를 많이 변호했는데, 그를 예찬한 글만 읽었지 본론을 모르는 것 아닌가 합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바르트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바르트에게는 현상만 있기에, 현상 너머 배후의 하나님은 그에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알 수 없는 하나님은 그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밖으로 지각을 받아들이고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데, 지각을 받아들인 거나 내가 오성의 법칙을 넣는 것이나 같습니다. 감각기관으로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 다 동등하다고 말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둘 다 동등하지만, 받아들이는 면에서는 의존적입니다. 이는 경건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이 아닌 전적 의존을 믿고 말하면 그것이 곧 신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의존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한국어 표현으로 바뀌었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그에게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의존 의식을 객관화시켜서 아들로 만든 것입니다. 절대의존 감정을 느끼는 게 하나님이지, 그에게 하나님이 따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슐라이어마허의 실상을 바빙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에 하고 싶으신 말은.
"어느 학교에서 나왔든지,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사역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냥 선포하면서 '복음 선포'라고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사역을 선포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은, 그 선포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온 제 교의신학 책은 설교 준비 교과서입니다. 온 백성이 다 읽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종교

도심이 2020. 4. 16. 04:57

섬진강,금강,만경강,동진강 동진강 따라 걷기 (2)-2

최태영추천 0조회 4919.06.09 17:03댓글 2 









(위 사진 : 첫 휴식장소 옹동면 매정리 신기마을 앞 모정.)


(위 사진 : 빈센트 반고호의 그림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장소. 
웃자고 해 본 소립니다.)





(아래 사진들 : 거대한 장재배수장. 새로 짓고 있다. 정화능력과 배수능력을 더욱 높이려는 듯.)




- 소수력발전소, 여성의 힘 - 



두 군데의 소수력발전소를 만납니다.

그 중 하나는 이 지역 출신의 두 여성이 2008년도에 기증(?)한 것이로군요.



 (아래 두 장 : 삿갓보 발전소.)




(아래 사진들 : 동진강 소수력발전소. 여성 둘이 기증했다는.)







-낡은 다리에 집착하다 -



낡고 오래된 다리도 두 군데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이것이고,



 

가운데 부분만 새로 지어 이어붙였군요.

다리 이름이 궁금하고 교두에 뭐라고 새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건너가서 보면 교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행과 너무 떨어질 것이 걱정스러워 건너가보기를 포기합니다.



(이어붙인 다리 위에서 찍은 구름.)

 


또 하나는 점심 먹을 식당이 있는태인면 소재지의 남쪽입구가 되는 위치에서 발견했습니다이 다리는 꽤 넓고 긴중요한 다리였던 것 같아요국도 1호선이 지나가는 다리였던 것이 나중에 새로 개설된 국도 1호선 때문에 조금 더 북쪽의 대각교에게 역할을 넘겨주고 퇴역한 거산교입니다.




(위 사진 화살표 : 다릿발에 새긴 수표.)



단기4266년 1월 준공이라 한글로 새겨진 교두만 남아있고다리의 이쪽 끝이나 저쪽 끝 모두 다리 이름을 새긴 교두는 이미 없어졌습니다.


이 다리는 국도와 관계된 근대역사 말고도 영조대왕의 생모 숙빈 최씨의 이야기가 얽혀 있기도 합니다(물론 그 당시에는 이런 시멘트 다리가 아니라 섶다리였겠지요만.) 


주거부정의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한 소녀가 우여곡절 끝에 인현왕후의 시녀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로 후궁이 되고 나중에 영조대왕을 낳은 후 숙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드라마 <동이>의 여주인공이 이 다리 어름에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는 인연을 만났다는.



 

-숙빈 최씨 기념공원-




숙빈의 친정 해주 최씨 문중에서 가꾼 것으로 보이는 기념공원이 꽤 그럴싸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이곳은 용신마을원래 다리 이름은 대각교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조선의 문물 특히 왕실과 관계되는 것은 모두 격하하거나 흔적 지우기에 급급했던 일제가 단지 거산리에 가깝다는 뜻밖에 없는 거산교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닐까.



 

태인면소재지까지는 불과 1.5킬로미터쯤그러나 들러보지 않습니다.

아침에 신태인에서 칠보까지 거슬러 오면서 버스가 태인터미널에 1분간 멈춘 적이 있어 유명한 피향정(披香亭)’과 넓은 연밭은 이미 보았습니다.

 

거산교(또는 대각교끄트머리에 있는 만가 손칼국수집에서 거대한 양푼에 담겨 나온 바지락 칼국수를 점심으로 포식(?)했습니다.




- 오후 걷기. 배 부른 사람 일하기 싫다 -.

 


(위 사진 : 낙양리 배수문까지 가는 길은 이런 풀숲길의 연속이었다.)


(위 : 낙양배수장. 이곳을 지나자마자 ...)




-낙양리 김제간선 취수문- 


낙양리 김제·정읍 간선취수문일행 중에 정국장과 나 빼고는 와 본 적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바꾼 현장을 대하는 감동이 큽니다.

 


이 역사(役事)가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더 자랑스러웠을까요일제의 근대화된 기술력을 조금 빌려 썼다는 이유 하나로 사랑받고 잘 관리되어야 할 우리 것 우리 유산이 오히려 비아냥과 자기혐오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이른바 검은 역사의 뒤끝이 지지리도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역시 강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야 -.

 

예상대로 두 간선수로에 물의 태반을 나누어 준 동진강 본류의 물은 별 볼일 없어집니다.

강의 동쪽 둑길을이제는 물도 잘 보이지 않고 키보다 높이 자란 수변식물들과 강 둔치의 논밭에 둘러싸여 걸을 뿐입니다.




(위 사진 : 궁사 배수장을 거쳐 동진강으로 합류되는 사용필한 농업용수. 작은 분수로 산소를 추가 공급 중.)


(위 사진 : 동진강 본류의 물은 고작 이 정도만 남아 흐른다. 대를 열네 개나 받쳐놓고 있는 낚시꾼. 가지런히 잘도 벌려놓았네요.)



 



SRT(?) 고가철도교 아래 그늘에서 잠깐 마지막 휴식을 취합니다여기서는 목적지 신태인읍이 지척에 건너다보이는 가까운 거리.


정읍천 하구의 옛 만석보(萬石洑터까지는 직선으로 3.5킬로미터쯤이지만왕복 두 시간이나 걸릴 거리이기도 하고 그늘 없는 둑길 걷기에 모두 지쳐 있기에 차마 가보자는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신태인의 왕신여고 인근을 통과하면서 아까 낙양리 수문에서 갈라져 나온 김제간선수로의 도도한 물길을 만납니다나 혼자 감행한 김제 간선수로 따라걷기가 바로 이 근처에 와 있고 아직 그 후의 진도는 나가지 못하고 있네요.

오늘의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

 

다음 주는 마지막으로서 자전거 타고 강 따라 달리기입니다물론 자전거가 싫은 사람을 위한 걷기 프로그램도 함께 있답니다.

 

손목의 인대에 염증이 생기는 건초염(트리거 핑거)이 오늘 아침부터 크게 나아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손목이 아프면 자전거 타는 일도 물건너가고글도 못 쓰니까요.

오늘의 답사후기도 손목 좀 아끼기 위해 짧게 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 첫댓글 19.06.09 17:49

    1. 낚시꾼이 있는 하천은 동진강 본류가 아닌 1차 지류인 용호천.

    2. 만경강&동진강 마지막 8차는 코스상의 어려움으로 자전거만 이용하고 걷기는 없습니다.
    (걷기 위한 프로그램인데, 걷기가 없다니 다소 민망합니다. ^^)

    3. 잠깐동안 걷기는 쉬겠습니다.
    7월 20일에 있는 '2019 진안고원길 달빛걷기' 전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또 달빛걷기 이후는 계곡트레킹이 찾아옵니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

  • 19.06.11 13:20

    맞네, 용호천이군요. 실수...

  • 이전 목록으로 이동
  • 1
  • 다음 목록으로 이동

회원님은 현재 손님입니다. 이 게시판은 준회원 이상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하셔서 회원 등급을 올려보세요.

글자 수0/총 글자 갯수300
최신목록

하단 게시글 목록
섬진강,금강,만경강,동진강

무진장&전북 강 따라 잇기

게시글 목록
리스트 번호제목글쓴이작성일추천조회
183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7) 벽골제를 향하여 사진첨부 최태영 19.06.14 0 32
182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6) 최태영 19.06.14 0 22
181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5) 사진첨부 최태영 19.06.14 0 21
180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4) 최태영 19.06.13 0 18
179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3) 사진첨부 최태영 19.06.13 0 10
178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2) 최태영 19.06.13 0 34
177
김제 대간선수로 답사 (2-1) 사진첨부 최태영 19.06.13 0 40
176
[사진] 190608 동진강 2차 사진첨부 사니조아 19.06.12 0 66
175
수정 - 동진강 따라걷기 (2-1) 중에서 사진첨부 최태영 19.06.11 0 50
174
[걷기] 2019 만경강&동진강, 전북을 담다. 8차. 6/15.. 댓글수3 사진첨부 정병귀 19.06.09 0 75
현재 보고있는 페이지 173
동진강 따라 걷기 (2)-2 댓글수2 최태영 19.06.09 0 49
172
동진강 따라 걷기 (2)-1 댓글수1 사진첨부 최태영 19.06.09 0 56
171
'기술보국' 유감 사진첨부 최태영 19.06.05 0 35
170
[사진] 190601 동진강 1차 댓글수1 사진첨부 사니조아 19.06.05 0 139
169
동진강 따라 걷기 (1)-끝. 김명관 고택에서 칠보발전소, 칠보면까지 사진첨부 최태영 19.06.03 0 76
168
동진강 따라 걷기 (1)-7 김명관 고택 사진첨부 최태영 19.06.03 0 35
167
동진강 따라 걷기 (1)-6 외능, 안계마을, 산외면소재지. 사진첨부 최태영 19.06.03 0 36
166
[걷기] 2019 만경강&동진강, 전북을 담다. 7차. 6/8.. 사진첨부 정병귀 19.06.03 0 36
165
동진강 따라걷기 (1)-5 처음 보는 마을 안 수로. 사진첨부 최태영 19.06.03 0 20
164
동진강 따라 걷기 (1)-4 운암발전소 옛 자리와 종산마을 댓글수2 사진첨부 최태영 19.06.02 0 57
163
동진강 따라 걷기 (1)-3 포텐셜 에너지 사진첨부 최태영 19.06.02 0 23
 


 
 
 

종교

도심이 2020. 2. 17. 21:19

개신교 장로교 새문안교회 - 1887년 첫 예배...조직갖춘 최초의 한국교회

 

 

 

서울 광화문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교회로서, 감리교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정동제일교회를 꼽는 이들이 많지만, 장로와 집사 등을 갖춘 조직교회로는 새문안교회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첫 예배를 드린 후 1백여 년의 한국 교회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아니라 한국 역사에도 적지않은 기여를 해왔다. 교육과 복지 분야에서 많은 일 들을 해왔고, 독립운동가 등 각 분야에서 민족지도자를 대거 배출하여 근대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편집자 주

 

◇신문로 새문안교회=서울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서대문방향으로 두개의 육교가 있고, 그 사이 큰길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교회 건물이 위치해 있다. 신문로 1가 42번지. 지금 새문안교회는 옛 교회를 헐고 197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교회는 1907년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며 실제 새문안교회의 처음 위치는 큰길 건너편에 있는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 자리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그 곳에 집을 얻어 안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사랑채가 바로 교회가 시작된 곳이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한옥교회를 열었고 이 교회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교회가 된 것이다. 위치 때문에 교회이름이 처음에는'장로교 정동교회'라 하기도 했다.

'새문안교회'라는 오늘의 명칭은 1894년 예배당을 서대문 안쪽 대로변으로 옮긴후 붙여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정동예배당'혹은 '정동교회'란 명칭과 함께 '서대문교회'(West Gate Church), '새문안교회'(Saemoonan Church)가 혼용되어 쓰이다 1907년 이후 현재의 위치로 교회를 옮긴후부터 '새문안교회'로 불렸으며, 일제시대에는 한문으로 '신문내교회'(新門內敎會)로 또 한번 교회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새문안이라는 말의 유래는 조선시대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서대문(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여러번 바뀜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漢字)로 '신문(新門)'이라 이름하게 됐고, 그 안에 교회가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미국장로교의 한국전래=1876년 일본에 개항한 조선은 1880년대 들어 서구열강들에게 연이어 문을 열었다. 미국은 1882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고 이때부터 미국내 개신교단들이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결과 1885년 미국 북감리회선교사 아펜젤러와 미국 북장로회선교사 언더우드가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하게 됐다.

의료선교사로 미리 와있던 알렌의 뒤를 이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인천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 일을 도왔으나 한국말을 조금 배우고부터는 길에 나가 노방전도에 힘썼다. 당시 한국정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얼마동안 미국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에서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 관리들은 선교활동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해주자 이에 선교사들은 점차 거리전도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1887년 9월 27일 저녁 서상륜이 전도한 서울신자 등 14명이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 목사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 모였다. 그 중 한 명이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두사람은 장로로 선출되었다.

처음 교회를 구성한 14명중 13명은 서상륜이 인도한 소래지방에서 온 교인들이었으며,이 날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 된 것이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장로 안수식이 열렸다. 또 이 교회에서는 한국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1887년 크리스마스에 성찬식이 거행됐다. 그 후 새문안교회는 계속 번창하여 창립 1년뒤에는 교인 수가 5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중 11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4년 10월 송순면 장로 장립과 더불어 당회가 조직되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됐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공동체적 의미의 교회는 황해도 소래교회를 첫번째로 꼽기도 하지만 당회를 구성한 조직을 갖춘 교회로는 새문안교회가 처음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에 힘썼으며 여러 곳에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했다. 새문안교회는 1910년대에 홍제동, 한강, 교북동, 김포, 행주, 동막, 파주 등 7개소에 예배처를 갖고 있었으며 이 곳들은 후에 모두 독립교회로 발전했다.

◇한국사회속의 새문안교회=언더우드는 1886년 5월 자기집에 영국 고아학교 형태의 한국 최초 고아원인 '예수교학당'을 열고 학비와 옷, 음식을 제공하면서 한글성경을 가르쳤다. 원생 1명으로 시작한 이 고아원은 두달만에 원생이 1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에 언더우드는 교회당 창립을 서두르게 됐다. 고아원 명칭은 후에 '구세학당'으로 바뀌고 다시 1901년 연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신학교'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895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새문안교회 신도들은 의료선교사를 도와 진료소에서 간호와 구호활동을 벌였다. 지난 1세기 동안 새문안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방향이 소외된 이웃을 위했던 이유는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특수선교로 시작한 교회의 창립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역사속 새문안교회=새문안교회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사에 큰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대거 배출했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경을 헤매던 어린 김규식을 키워 독립운동가로 만들었으며, 대표적인 구국계몽운동가로 활약한 도산 안창호를 비롯 한글학자 최현배와 음악가 홍난파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 교회사적으로는 최초의 유아세례자인 서병호와 일제치하에서 20년간 강단을 지킨 차재명을 비롯해 새문안 창립자 언더우드의 2세와 3세로 새문안을 섬긴 원한경과 원일한 등 수많은 종교인과 교육자들을 배출했다.

이처럼 새문안은 지난 1백여년간 우리나라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 근대사의 시발점인 1876년 개항과 동시에 수용된 기독교가 한국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처럼 새문안교회는 역사의 흐름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또 새문안교회는 독립협회의 구국계몽운동에 나섰으며 온 나라가 참여했던 3.1 만세운동, 그리고 최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인권운동에도 교회 젊은이들이 앞장서는 등 민족교회로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창립 115주년=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라는 창립배경을 가진 새문안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 사회복지재단을 두고 소년소녀 가장을 도우며 17개 사회기관을 지원하고 있다. 또 동작이수복지관, 성남은행나무어린이집, 새문안어린이집, 이수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1895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구호활동을 벌였던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 의료선교부를 두어 국내 무의촌과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활발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 새문안교회는 창립 115주년을 맞아 경축음악회를 열고있다. 9월 1일 '새문안 솔리스트 음악회'로 시작하여 채리티앙상블 '창립 115주년 축하의 밤'으로 이어진 음악회는 오는 10월 6일 새온 성가대 구노의 '장엄미사'까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일요일에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도 새문안교회는 현재 역사자료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115년 역사를 담고있는 자료를 모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며,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 완공될 예정이다.

 

종교신문/우상규기자 carrot@sgt.co.kr

 

<사진>최초의 새문안교회(언더우드목사 사랑채). 1887년 9월 27일 밤, 정동에 있던 한 한옥에 14명의 한국인과 언더우드목사, 로스목사가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