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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5. 11. 2. 23:01

무안지역 포구의 조사와 연구1)

 


 

차례

 

1. 머리말

2.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는 무안반도 포구

 1) 강상포구

 2) 해상포구

 3) 수군진 포구

3.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지 않는 무안반도 포구

 1) 강상포구

  (1) 『한국지명총람』에 보이는 포구

  (2) 신규 확인한 포구

 2) 해상포구

  (1) 『한국지명총람』에 보이는 포구

  (2) 신규 확인한 포구

 3) 고고학 자료로 확인한 고대거점 포구

 

4.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우리의 국토는 험난한 산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관계로, 고래로 육로보다는 해로가 교통의 중심이 되어 왔다. 일찍이 해안과 하안을 따라 수많은 나루와 포구들이2) 형성되었고, 이들은 해상 및 강상 교통의 거점으로 기능하며 국내외의 유기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 해양활동 금지정책[海禁政策]이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채택되어 바다를 멀리하게 됨에 따라,3) 物流는 여전히 나루와 포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삶의 공간은 육지의 산곡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나루와 포구에 대한 관념적 천시의 풍조가 만연되어 갔다. 현실과 관념의 괴리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국을 지칭하는 관용어로 ‘坊坊曲曲’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津津浦浦’라는 표현을 쓴다. ‘방방곡곡’이란 말에는 육지 중심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고 ‘진진포포’란 말에는 해양 중심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4) 이제 우리는 해양개방의 시대를 맞아 해양 중심적 사고를 다시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루와 포구에 대한 관심을 새삼 일깨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 호남지역 조사․연구의 사례지역으로 무안반도를 선택한 것은 무안반도가 서해와 남해의 교차점에 해당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인 영산강의 하류에 해당되며, 무안과 접해 있는 신안군의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산재해 있어 호남 포구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사 과정에서 무안반도는 과연 예상한 대로 포구가 가장 밀집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찍이 백제시대에 무안군은 ‘勿阿兮郡’으로 일컬어졌으며, 통일신라 경덕왕대에 한자식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務安郡’으로 개칭되었다.5) 무안군은 서쪽의 서해바다와 동쪽의 영산강이 남쪽에서 만나면서 반도의 형상을 이루고,6) 여기에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무안천이 무안군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어 물로 둘러싸여 있는 형세이다. 이 점에서 ‘물아혜’란 옛 지명은 아마도 ‘물안에’란 순 우리말을 음차한 것에서 연원하여, ‘무안’이라는 한자식 표기로 전화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만큼 무안반도는 일찍부터 해상 및 강상의 물길과 그 물길의 거점이 되는 강상 및 해상 포구들이 발전해 왔던 것이다.

이번 무안반도 포구 조사에서 우선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포구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강상포구 8개소, 해상포구 5개소, 수군지 포구 5개소를 확인하고, 현지조사를 통해서 위치와 현황을 점검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헌에 전하지 않는 포구가 더욱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지 조사를 통해서 이들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먼저 『한국지명총람』에서 포구와 관련 지명을 찾아서 문헌에 전하지 않는 포구들을 탐색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런데 현지 조사 과정에서 『한국지명총람』에 나오지 않는 포구도 상당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에 현지 노인들과의 인터뷰와 GPS 장비를 통한 해발고도 측정 등을 통해서 미지의 포구를 하나하나 확인해 갔다.

포구 조사의 분야는 우리에게는 아직 미지의 분야이다. 조사의 방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현지를 무작정 배회하면서 나름대로 원칙을 찾아 정리해 본 것이다. 좋은 지적과 의견을 기대한다.

 

2.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는 무안반도 포구

 

浦는 『삼국사기』에서부터 보이고 있으나 무안의 경우는 『高麗史』에서 처음 확인된다. 무안의 포구가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지리지에서인데, 특히『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가장 상세하다. 다음은 참고한 조선시대 문헌과 여기에서 확인한 포구들을 표로 나타낸 것이다.

 

     고문서

 

포구명

高麗史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志

輿地圖書

湖南邑誌

大東地誌

특기사항

頭靈梁

 

 

 

《新增》서쪽으로 흘러 영암바다로 연결,《大東地志》《세종실록》龍津溟所壇: 春秋로 제사

德甫浦

 

 

 

 

 

 

 

泥梯浦

 

 

 

 

 

(현 함평)

沙湖浦

 

 

 

 

 

(현 함평)

夢灘津

 

 

 

 

 

 

 

德津浦

 

 

궁예와 견훤의 영암 德津浦 전투

極浦

 

 

 

 

 

 

권농방어사를 무안현령이 겸직

倉浦

 

 

 

 

 

 

 

鼎足浦

 

 

 

 

 

 

고철소원

梨山津

 

 

 

 

 

 

 

臨海浦

 

 

 

 

 

 

전라수영 唐串倉

海倉

 

 

 

 

 

 

무안 해창

眞木只浦

 

 

 

 

 

 

鹽所

大堀浦

 

 

 

 

전라수영(현 함평)

木浦

 

 

 

만호진(현 목포)

多慶浦

고려 말

 

 

 

 

권농방어사를 함풍현령이 겸직

臨淄鎭

고려 말

 

 

 

 

 

‘해제권농방어사’를 함평현령이 겸직

※ 참고문헌

  14세기 이전:高麗史(1392~1451)

15세기     :『世宗實錄地理志(1454년)

15-16세기 :『東國輿地勝覽』(1481년)+『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新增』이라 약칭

17세기     :『東國輿地志』(1656년) /『東國』이라 약칭

18세기     :『輿地圖書』(1759년)/『輿地』라 약칭

19세기     :『大東地誌』(1865년)

19세기     :『湖南邑誌』(1871-1895년)/『邑誌』라 약칭

 

1) 강상포구(江上浦口)

 

(1) 두령량(頭靈梁)

 

위치: 『新增』과 『東國』에 “무안현 남쪽 6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황: 『新增』에 의하면 두령량에서 서쪽으로 흘러 영암바다로 연결된다고 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대천(大川)이 하나이니 두령량(頭靈梁)이다. 현의 남쪽 서애(西崖)에 있다. 돌산이 우뚝 서서 강에 임하였는데, 이것이 용진 명소(龍津溟所)가 되었다. 봄·가을에 그 고을에서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7) 『大東地志』에도 “용진명소단(龍津溟所壇)이 두령량(頭靈梁)에 있다. 오른쪽으로 석산(石山)이 우뚝 서있으며 그 아래에 용진명소(龍津溟所)가 있다. 본 읍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고 나온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용진명소단은 현 삼향면 우비마을의 상사바위 인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기에도 상사바위에서 큰 굿을 올리곤 하였다 한다.8)  두령량은 상사바위일대 영암사이의 영산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주룡포라는 포구가 있다(뒤에 소개).

 

(2) 덕보포(德甫浦, 덕진포 참조)

   

위치: 『新增』에 “현 동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몽탄면 사창 3리 덕암마을 동쪽앞 덕암천 하구이다.(N34°57′57.6″ E126°32′01.5″) 고려시대 명칭은 덕진포로 오늘날 몽탄면 덕암마을 무안 양수장 동쪽이다.

현황:  16세기의 기록에만 보이며 후대의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덕암리=덕보포”로 추정한 근거는 이러하다. 첫째, 옛날에 배가 들어왔던 곳이고, 둘째, 해창이 현 동쪽 20리라 하므로 덕암리는 해창보다 거리가 약간 가까워 현동 18리와 일치한다. 셋째, ‘덕보’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보면 전라도 방언으로 ‘독보’ 즉 ‘돌로 쌓은 보(둑)’을 한자화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덕암’은 ‘독암’으로 이해된다. 전라북도 부안의 ‘독다리=德達浦’와 고막원의 ‘석교=독다리=떡다리’가 그러한 예이다. 현지조사를 해본 결과 선창의 앞에 둥그렇고 조그만 산이 있는데 돌산이었다. 현재 근처에서는 바위를 파내고 양수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덕암은 이 돌산과 관계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현재 주민들은 이를 ‘독보’라 부르고 있다. 넷째, 물길을 살펴보면 무안읍 황산제에서 출발한 덕암천의 하류가 덕암마을 앞을 지나 영산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뱃길이 양호하고 북서쪽에 야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는 곳이어서 浦가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도 갖추고 있다.

 

(3) 이제포(泥梯浦)

 

위치:『新增』과 『東國』에 “현 동쪽 15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 함평군 엄다면 토교마을의 동쪽, 옛 토교다리 남쪽에 해당한다(N35°01′02.8″ E126°31′42.3″).  

현황: 1914년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변경된 곳이다. 함평천의 중간지점에 있어, 『新增』의 “남쪽으로 흘러 대굴포로 연결된다”는 기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4) 사호포(沙湖浦)

   

위치: 『輿地』에 “현 동쪽 15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사포 나루이다.(N34°59′07.8″ E126°35′34.9″)

현황: 1914년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변경된 곳이다. 함평천과 영산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동쪽에 있는 대굴포의 입구와는 1㎞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 나주시 동강면과 연결되는 동강대교가 건설(1987.7. 착공~1991.8. 완공, 길이 500m)되어 사포나루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5) 이산진(梨山津)

 

위치: 『大東地誌』에 “현 남쪽으로 20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몽탄면 이산리의 강정·이산·당촌마을 앞 일대의 포구로 비정된다(선창 추정지 N34°55′48.9″ E126°31′03.5″).

현황: 이산리의 지명에 관한 변천은 마을 뒷산이 배의 형국이어서 ‘舟山’으로 불리다가 일제기에 ‘梨山’으로 개칭되었다는 설명도 있으나,9) 이는 오류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일제 이전인 『대동지지』등에도 ‘梨山’이라는 표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산리의 ‘梨山’을 ‘아름다운 배꽃이 핀 산’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산리의 별칭이 ‘배뫼마을’인 것을 볼 때, ‘배를 매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배맨마을’로 불리다가 ‘배뫼마을’로 전성되고, 이것이 한자지명으로 전환하면서 ‘매뫼→梨山’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산’이라는 마을 이름 자체에 포구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이산마을의 북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에는 식영정이, 북동쪽에는 영산강이 가장 심하게 휘어져 흐르는 느러지가 있는데, 이산진은 이 만곡부의 중심에 있다. 또 목포와 영산포를 잇는 뱃길 백리에서 이산진을 중심으로 양쪽이 각각 50리이다. 그런만큼 이산진은 영산강의 포구 중에서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곳 중의 하나였으며 중요한 역할을 한곳으로 추정이 된다. 고려시기의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위한 배를 만든 전선제작소가 있었다 전하며10), 뱃사람들이 안전항해를 위한 제사를 모셨던 당터와 마을 앞의 넓은 포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군기창고터로 비정되는 곳에서 철모가 출토되었다 하고, 선창 추정지에서 배 바닥의 매립이 추정되는 것11)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목포와 영산포간 뱃길의 중앙에 위치하여 중간기착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6) 몽탄진(夢灘津)12)

 

위치: 『輿地』에 “현 남쪽 30리 梁山浦 하류에 있다.”고 되어 있으니, 몽탄면 명산리 하몽탄에 해당하며, 몽탄대교에서 650m 북쪽에 있다.(N34°54′06.8″ E126°31′25.8″)

현황: 현 강나루식당의 앞에 있던 나루로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탄마을과 왕래하였다. 제보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제시기에 4~5톤의 기선이 운항되었는데 한 번에 소(牛)를 포함 70여 명을 실어 날랐으며, 1970년대에 하루 500여 명이 나루를 이용하여 일로 명산마을로 건너와 명산 간이역을 이용하여 주로 목포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55년 동안 사고는 한 번도 나지 않았다. 나주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목포․일로․함평․몽탄장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나주의 동강면 사이에 몽탄대교가 건설(19990.9~1994.6 길이 680m) 되면서 나루터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또 영산강 하구둑이 막아지기 전 하몽탄에는 숭어, 해파리, 산갱이가 많았으며, 특산물은 뱀장어와 뱀장어 새끼였는데 제보자의 부친은 이를 잡아 일본 통조림 공장에 수출 하였다.

 

(7) 조선 덕보포(德甫浦)와 고려 덕진포(德津浦)

   

위치: 조선시기 德甫浦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두 곳의 기록에서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가) 덕보포는 (무안)현에서 동쪽으로 18리 떨어져 있으며, 대굴포 하류에 있고, 남쪽으로 흘러서 두령량이 된다.13)

 나) 나주의 영산강은 -중략- 무안에 이르러 大掘浦가 되고, 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頭靈梁이 되어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14)

  위 기록으로 보아 덕보포는 영산강 본류 물길에 있었고, 물길의 개념으로 병용될 정도로 중요한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덕보포는 가)의 기록으로 보아 두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에 있어야 한다. 첫째는 ‘대굴포와 두령량 사이’ 둘째는 ‘무안현에서 東으로 18리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 여기에다 포구명에서 ‘德甫’의 德은 흔히 독(石, 岩의 전라도 토박이말)의 한자 표기이다.15)  포구의 선착장은 자연 암반을 이용한 경우가 많은데 승하선 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곳으로 몽탄면 덕암마을이 주목된다. 무안읍에서 동쪽으로 직선 6㎞의 거리에 있다.16) 주민들은 속칭 ‘떡보’ 또는 ‘덕포’로 불리웠다.17) 이로 보아 덕암마을에 덕보포가 있었음을 알겠다. 이와 같이 덕보포는 『東國輿地勝覽』에서만 보이고 이후의 각종 지리지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된 포구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덕진포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高麗史』에서 덕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다.

 

  다) 德浦는 이전에 德津浦라고 하였는데 務安郡에 있다.18)

 

  다) 기사는 高麗의 60대 漕運倉이 있는 포구를 말한다. 앞에서 살핀 대로 德浦는 德甫浦이기 때문에 德甫浦가 곧 德津浦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고려시기의 德津浦는 무안에 있었고, 조선시기의 德津浦는 영암군에 있었던 셈이다.

 

 

(8) 극포(極浦)

 

위치: 삼향면 맥포 1구 극배 마을 앞에 선창이 있었다.(N34°50′21.1″ E126°28′29..6″H 11m)

현황: 제보자의19) 증언에 의하면 마을 선창자리인 목포~몽탄간 도로 중 삼향 동초교 진입로 초입 남쪽(N34°50′21.1″ E126°28′29..6″ H 11m)의 독립가옥의 북쪽 논에 1967~1968년 한해(旱害) 때 관정을 파다가 수십 개의 말목(∅20~30㎝)이 뻘속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고 지금도 땅을 파면 나온다고 하는데, 이는 갯고랑과 선창관련 시설물로 추정된다. 또 북동쪽 200여m 구릉에서(N34°50′27.5″ E126°28′33..6″H 25m) ‘꼬막다물’(조개더미를 이름)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거의 멸실되었다. 옛 집자리에서는20) 고기와가 십수장 출토되었다 한다.21)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에 極浦營이 설치되었고 무안현령이 ‘권농방어사’를 겸임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무안현조에 의하면 “나주의 越境인 任城·群山․極浦의 땅이 현의 지경 50리를 넘어서 현의 남쪽에 들어와 있다.”고 되어 있고,22) 『新增』에는 “군산부곡(群山部曲), 극포부곡(極浦部曲), 임성부곡(任城部曲)의 세 부곡을 합하여 무안군 삼향리(三鄕里)가 되었다. 무안현(務安縣)의 남쪽을 넘어갔는데, 나주에서 서쪽으로 90리이다.” 군산부곡은 오늘날 군산동(원동)이고, 극포는 극배이며, 임성은 임성마을이다. 극포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배를 정착시킨 곳이라 하여 ‘끝배’로 불리었는데 한자로‘ 克浦’라 하였다가 그 후 경주이씨가 정착하면서 ‘克培’로 변경되었다 한다.23) 『新增』 나주목조에 “삼향(三鄕)의 죽전(竹箭)이 천하에 소문나니, 주석돌[錫]과 단은(丹銀)이 어찌 보배라 할 것인가.”라 하였는데, 竹箭은 대(신우대)를 이용하여 만든 화살을 말하는 것으로 ‘일로읍 죽산리’가 주요산지였다 한다.

 

2) 해상포구

 

(1) 창포(倉浦)24)

 

위치: 『新增』 “현에서 서쪽으로 6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는데, 무안읍 평룡리 창포마을이다. 선창은 창포마을 서쪽해변에 있었다.(N34°58′37.7″ E126°26′29.0″ H 6m)

현황: 현재 7호 정도의 마을로 간척 후인 ’83년 현경면에서 무안읍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당시에는 12호가 살았으며 술집이 두 곳이 있었다. 선창은 별다른 시설이 없는 모래사장이었으며 남쪽에 있는 청계면을 가려면 간조 시 노두목(징검다리)을 건넜다. 일제시기에 주변의 농산물을 수집하여 목포로 운반하였던 곳이다. 1964~1982년 톱머리와 청계면 도대리 간 간척공사25)로 인하여 내륙화되었다. 당시 간척 전 허가 받은 주민만 일부보상을 받았을 뿐 혜택은 받지 못했다. 제보자의 기억에 의하면 세 번의 사업자가 변했는데 1차 김한종(착임자), 2차 우진건설, 3차 남한토건(최상옥)을 거쳐 완공되었다. 70년대 후반까지 황서리․미역․듬북 등을 실은 중선배들이 들어왔다. 간척전에는 모래사장과 해변에 소나무가 많아 무안읍에서 소풍을 많이 왔다. 돌과 엽송을 활용한 석화양식을 하였는데 어판장까지 있었다. 동네에서는 소형어선을 소유하였으며 대형의 배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배였다. 대형의 배들은 100여m 떨어진 조금등에26) 정박한 후 소금 미역 듬북 등을 하역하였다. 갯고랑은 현 태봉천 외에 창포 앞에도 평룡리에서 내려오는 갯고랑이 동서로 있었는데 간척공사시 메꾸고 남북방향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어 태봉천에 합류시켰다. 참고로 창포 북동쪽에 있는 북서쪽에 있는 ‘신한 마을’은 간척후인 85~86 무렵에 화순 동복수원지 이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창포에는 일찌기 ‘花雪堂’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광여도’ 등 고지도에 창포와 화설당이 기록되어 있다.27)

 

(2) 정족포(鼎足浦)28)

 

위치: 정족포는 “무안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29) 전한다. 산골인 몽탄면 달산리로 비정하고 있으나 타당성이 떨어진다.30) 다음의 기록 등을 참조하여 위치와 기능을 살펴보자.

   

  鼎足浦는 무안현의 남쪽 30리에 있다.31)

  古銕所院이 鼎足浦에 있다.32)

 

  이에 따르면, 정족포에는 銕所(야철지)와 銕所院이 있었고, 조선 전기 정족포의 위치와 철소원의 폐원 사실을 알 수 있다. 『東國輿地志』당시에는 이미 폐원되었는지 古銕所院이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무렵에 같은 성격으로 보이는 鐵場 두 곳이 확인된다.  

 

  鐵場이 두 곳으로 하나는 東南쪽 紫口洞에 있으며, 하나는 南쪽 炭洞에 있다. 품질은 모두 상품으로 鍊鐵 1천 5백 86근을 軍器監에 바친다.33) 

 

  위에서 언급한 두 곳의 철장 중 紫口洞은 산골에 있는 몽탄면 현 철소리 마을이기 때문에 포구와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남쪽 탄동(숯골)이 주목된다. 오늘날 일로읍 구정리 탄동(숯골)에는34) 소댕이 나루가 있었다. 이칭 ‘소쟁이 나루’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그 주변에 소쟁이 마을도 있었다. 또 북쪽의 개를 ‘소포’라 칭하기도 한다.35) 갯고랑과 연접한 곳에는 ‘쇠점등’이 있다.36)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족포는 탄동 남쪽의 소댕이 나루 인근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곳은『동여비고』의 개략적인 위치와도 일치한다. 철소원은 아마도 정족포의 인근 소댕이 나루에서 영암으로 건너가려는 객들이 묵었던 院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銕所는 ‘철물을 생산한 야철지’이다. 탄동에서 생산한 숯을 이용하여, 철소에서 철을 녹여 軍器를 생산한 후, 정족포에서 船積하여 한양의 군기감에 상납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3) 진목지포(眞木只浦)

 

위치: 『세종실록지리지』함평현조에 “鹽所가 네 군데 있는데 하나는 眞木只浦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해제면 만풍리 진목마을(N35°07′37.10″ E126°19′45.9″) 서쪽 해안이다.

현황: 眞木은 참나무를 한자화한 것이다. 만풍리에는 현재에도 일제시기 제염법으로 생산하는 염전 세 곳이 500m서쪽에 있는데 무등염전·만풍염전·구염전이 그것이다. 조선 초에 있었다는 염전은 火鹽(陸鹽)이었을 것이고, 그 장소는 현재는 간척논인 곳에서 제염하였을 것이다.

 

(4) 무안 해창

 

위치: 『대동지지』에 “海倉 동쪽으로 20리이다.”라 되어 있는데, 몽탄면 봉산 1리 해창마을이 그곳이다.(N34°58′32.2″ E126°32′14.5″) 선창은 마을의 동쪽으로 현재는 논으로 간척되어 있다. 

현황: 면소재지에서 동북으로 6㎞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동쪽으로 영산강에 접하고 있으며 북·서쪽은 낮은 구릉으로 막혀있다. 일명 동창이라고도 불렸으며 세종때 조세법이 합리적으로 정비됨에 따라 조세창을 건립하고 나주군의 일부와 무안군의 일부의 租穀을 수납하였다.37) 선창터는 영산강과 마을 앞이 접하고 있는 지점이며 창고터는 나주임씨 제각이 있는 일대로 추정이 된다.38) ‘정춘자’댁은(봉산리 11번지) 원래 동편의 해창 관아건물을 뜯어서 도리기둥 등을 재활용하여 지은 흔적이 남아있다. 관아터의 앞은 높은 석축으로 되어 앞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건물이 높아 영산강과 주변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창샘은 관아터 동쪽 하단에 있는데 남쪽을 제외한 삼면은 판석을 이용하며 쌓았던 것을 근년에 앞쪽도 시멘트로 막아 수도용 모터를 설치하여 사용 중이다.

해창은 낚시형국의 명당자리이다. 50년대까지 돛단배는 다녔다고 하며 순풍에는 키만 잡고 있으면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쉽게 갔지만, 조건이 안 좋으면 노를 저어 가는데 3~4일이 걸리기도 하였다 한다. 제보자는39) 당시의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너무 힘드니까 사공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니는 것을 보았어! 키를 잡는 일도 순탄치만은 않아! 뻘에 배가 자주 박히는 것을 목격하였어, 바람의 방향이 자꾸 바뀌어 키잽이가 적절히 대응을 못하였거든.”이라 하였다.

 

(5) 임해포(臨海浦)와 당곶(唐串)40)

   

위치:『大東地誌』에 “남쪽으로 60리이고 임해포 앞에 당곳창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唐串은 지금 목포시 용당동 목포제일고등학교(구 목포상고) )정문 근처 옛 당곶마을이다.

현황: 당포에는 전라수영, 별장진, 당곶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1432년 대굴포에서 옮겨온 전라수영의 병선이 1440년까지 있었던 곳이다.41) 조선 후기 唐串鎭의 유래는 정유재란 당시 이 충무공이 1597년 10월 29일 월동을 위하여 고하도에 입도하여 100여 일을 머무르다 다음해 강진(현 완도)의 고금도로 鎭을 옮긴 뒤, 군사 모집과 군량미 보관을 위하여, 이를 담당하는 종 9품 別將鎭을 두었다. 그 후 인조 25년(1647)에 무안현의 남쪽 50리로 이설하였는데, 그 곳이 당곶진이다.42)

  이와 같은 唐串鎭은『순조실록』30년(1830) 11월에 湖南어사의 單子로 인하여 비변사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羅州의 唐倉을 혁파하였다.43) 혁파이유는 명기하지 않아 알 수 없다.44)

  당곶진의 호칭은 세 가지이다. ①지리지인『輿地圖書』,45)『務安縣邑誌』,46)『大東地志』47) 등의 鎭堡條에서는 ‘唐串鎭’으로, ② 여러 고지도에서는 ‘唐串’으로48) 기록하고 있으나, ③『비변사방안지도』에서는 〈그림 10〉과 같이 ‘唐串都廳’으로 전한다. 분명한 것은 무안현 唐串으로 이전되어 ‘唐串鎭’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군량미를 보관하는 唐串倉도49)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요한 기능을 하였던 唐串鎭의 위치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다.

  기왕의 설을 검토하고 바른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자.50) 현재 唐串鎭의 위치는 두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하나는 옛 하당마을이며, 다른 한 곳은 하당의 동쪽 옥암리 당가두 마을이다. 唐串鎭의 위치는 무안군지(1923) 이후 별다른 비판 없이 하당설이 일반론이 되었다.51) 그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하당설  은 하당의 속칭 ‘창꼬지’ 또는 ‘창꽂’에서 기인하고,52) 당가두 마을설은 당곶  발음과 유사성 때문이다.53) 두 곳 모두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무안읍을 기준으로 木浦鎭은 60里, 唐串都廳은 57里 그리고 扶之山은 50里 떨어져 있다.54) 그러나 비정되고 있는 하당마을과 당가두 마을은 『조선후기지방도』에서 50里인 까닭에 당곶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바른 위치를 찾아보자.  

 

   
그림 10. 唐串都廳(鎭)의 위치 (비변사방안지도)

  먼저 唐串鎭에서 무안읍까지의 거리(57리)를 기준으로 살펴보자. 『조선후기지방도』에 등장하는 무안현 이로면 11마을55) 중 57리에 가까운 마을은 雙橋(58里), 山亭(57里), 龍塘(55里)이기 때문에 이 세 마을의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옛 龍塘마을(현 마리아회고 정문 앞)의 800여 미터 남쪽에 위치한 ‘당꼬마을’이 주목된다. 지금 전남제일고(구 목포상고) 정문 남쪽일대에 있었던 마을명이다. 별칭으로 ‘당끄’ 또는 ‘뻘등’이라고도 했다.56) 바다쪽으로 길쭉한 구릉지를 형성하여 ‘일종고지(串)’라 불렀다. 무안읍에서 용당마을까지는 55리이고, 당꼬마을과는 2리가 더 늘어나므로57) 정확히 일치한다.58)

  唐串의 물길환경을 살펴보자. 木浦鎭 앞을 통과한 옛 갯고랑은 송도~목포역 동쪽~일종고지(전남제일고) 앞까지 S자로 만곡되어 唐串의 남서쪽 속개와 연결되어 있었다.59) 이로 보아 唐串浦口는 제일고 정문의 서쪽에 있었으며, 唐串倉은 학교 정문 인근의 당꼬마을이 분명하다.

 

 3) 수군진 포구

 

(1) 대굴포(大堀浦) 

 

위치: 『新增』에 “무안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나주(羅州) 금강(영산강의 별칭)의 하류다. 고려 때에 이 강을 지세에 등져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로 쳤다.”로 되어 있다. 무안군역에 있었던 대굴포는 1914년에 변경되어 현재는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에 해당한다.(N34°59′30.2″ E126°32′59.7″H 10m)

현황: 1914년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변경된 곳이다.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의 사포에서 동쪽으로 1㎞ 동쪽으로 가면 대굴포의 입구가 나온다. 옛 전라수영이 전북옥구에서 이설한 전라수영이 설진 되었다가(1408~1432) 목포의 당포로 다시 옮겼던 곳이다. 『고려사』 57권 지제11 나주목 탐라현조에 제주도에 가는 세 가지 뱃길의 경로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굴포를 중간기착지로 언급하고 있다.60)

또 고려 명종 때 1100년대 문신(시인)인 김극기가 대굴포에서 지은 시를 보면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운 배 떠있네. 봉우리 끝에는 붉은 해를 보내고, 바다 밑에서 하얀 달 맞이하네. 물가에 가득한 모래 서리 같고, 공중에 연한 물결 눈인 양, 고기잡이 젓대소리 서너 곡조에, 갈대 사이에서 절로 처량하구나.” 하였다. 이 시에서 ‘배’가 등장하고 있어 대굴포의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2) 목포영(木浦營)

 

위치:『新增』에 “무안현 남쪽 68리, 나주와 목포가 여기와서 바다로 연결된다.”고 되어 있다. 현재 만호동 1의 56번지 앞 공터에 세워진「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석비가 있는데 이 일대가 목포진성이 있었던 지역이다.(N34°47′00.4″ E126°22′58.8″) 

현황: 『세종실록지리지』 151권 전라도조에 의하면 “목포(木浦)는 무안현(務安縣) 남쪽에 있으며, 중선 6척과 별선 2척, 군사 4백 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옛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3) 임치진(臨淄鎭)

 

위치: 임치진은 해제면 臨水里 임치마을에 해당한다.(N35°06′10.2″ E126°15′48.2″)

현황: 임치마을은 현재 약 70호의 마을로 리아스식의 복잡한 해안을 끼고 있는 해제반도의 서단에 있으며 서쪽의 신안군 지도의 북동단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북동쪽 해제면 소재지와는 직선거리로 약 3㎞ 정도 떨어져 있다.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동릉제’로 부르다가 그 뒤 물가에 이르렀다하여 ‘임수리’라 불렀으나 어느 풍수가가 마을의 모양이 치(淄)처럼 생겼다 해서 임치(臨淄)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입향조는 密陽朴氏 朴自興인데 경기도 관찰사겸 순찰사를 지내다 사화로 유배되어 이곳 저곳을 방랑하다 1500년경 임치에 정착하였다. 현 대표성씨는 김해김씨 31호, 밀양박씨 20호 전주최씨 16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61)

신안군 지도읍과 해제면 사이는 좁은 곳이 300여m에 불과한 좁은 해협으로 물이 들고 썰물 때 바닷물의 흐름이 빨라 물이 뒤집어 지면서 소리가 매우 커 ‘울때’라 하였는데 한자로는 ‘鳴梁’이라 하였다.62) 이는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고 북단에 위치한 수군진의 입지조건 또한 그러하여 관심을 끈다. 하지만 임치진과 신안군 지도사이의 명량해협 남북 5.5㎞ 어간에 6개의 제방이 막아지면서 주변이 간척되어 현재는 물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임치는 제일 윗 상단을 막은 제방의 동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해용제방이 막아지면서 간척이 되어 해제염전과 임치염전이 만들어지고 염전의 경계에서 약 300m 북쪽에 임치진이 있다. 臨淄鎭은 명량해협의 북단에 위치하는 남~북 400여m 서~동100m의 작은 포구로 서북동은 구릉으로 둘러져있으며 남쪽만 바다와 연결이 되어있다. 임치진성은 특이하게도 바다와 연결된 남쪽을 제외하고 구릉의 삼면을 싸고 있는 형국이다. 서북쪽은 흔적이 완연히 존재하나 그 외에는 거의 멸실되었다. 서문밖에 공적비가 5개가 보존되어 임치진성의 역사를 그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민의 제보에 의하면 “남쪽의 제방이 막아지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전언에 의하면 관아가 있었던 현 마을회관 앞 현 논(畓)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라고 한다.63) 해발고도를 측정한 결과 -1m(N35°06′09.9″ E126°15′49.6″)로 나타나고 있어, 임치진 관아로 추정되는 현 마을회관 앞까지 배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임치진은 언제 설진이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으로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에서 “공양왕 3년(1391)에 이르러 함평 현령이 해제의 권농방어사(永豊․多景․海際勸農防禦使)를 겸임토록 하였다”64) 한 것에서, 다경진과 임치진65)에 설치된 수군진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임치현(임자도․임수리․영광 백수지역 포함)은 원래는 백제의 古錄只縣이었고 경덕왕때 鹽海縣으로 고쳐서 압해군의 관할 하에 있는 현으로 만들었으며 고려에 와서 임치로 고치고 영광군에 소속시켰다.”고 되어 있다.66) 즉 백제시기에 고록지현이 이었던 임치현은 신라가 백제 정벌 후 경덕왕 16년(757) 에 염해현으로 개명되었다가, 고려조 태조 23년 940에 임치현으로 고쳐 영광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이 개국하면서 함평현에 소속되었다가 1906년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0세기 초에는 왕건의 수군이 견훤의 사신선을 나포한 곳이기도 하여,67) 일찍부터 중요한 거점포구로 기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임치진은 원래 咸平縣 소속으로서 全羅右道 水軍僉節制使가 설치되었던 수영이나 세종 무렵에 관할 만호진이 8개 혹은 5개라는 상반된 기록이 있다. 즉 『세종실록지리지』 영광군조에는 검모포·법성포·다경포·목포·어란포·군산포·남포도·금갑도진 등 8개 만호진으로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조에는 5개의 만호진을 두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연유는 미상이며 추후에 살폈으면 한다. 임란 후인 숙종 때에는 다경포와 함께 해로의 요충지(咽喉)인 위도진의 관할 하에 재배치되고 있는데 중앙에서 요구하는 수군진의 비중이 남해안의 해상방어 중심에서 일본과 조선선통신사의 파견 등 화해무드 조성으로 조운 등 원할한 해로의 확보로 옮겨간 때문이 아닌가 한다.

눈에 띄는 유적으로 임수리 선정비군이 있는데 무안군 해제면 임치마을 임치진성의 서문밖에 僉使의 공적비가 5개가 있다. 이 비들은 순찰사 이공사명청덕선비(1685), 절제사강공제청덕선정비(1685), 정제사위공혁만청덩선정비(1707), 절제사강후필윤청덕선정비(1807), 절제사정후신영세불망비(1863)이다.

 

(4) 다경포진(多慶浦鎭)

   

위치: 운남면 城內里 原城內 마을이다.(西門: N34°56′11.6″ E126°18′49.6″)

현황: 세종 무렵에는 ‘瓦浦’68) 조선후기 1872년 지방도에는 ‘구룡포(九龍浦)’라 하였다. 다경진성의 동문쪽 원성내 마을에는 현재 20여 세대가 살고 있다. 북동쪽 운남면 소재지에서 현 육로로 약 4.5㎞ 떨어져있다. 다경진성은 마을의 서북쪽에 있는데 동문과 연결되어 있다. 총연장 450여 m로 규모가 적은 수군진으로 그 흔적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완연하며, 다경진성 하부는 90×60cm 크기의 방형 돌로 축성하고 상부는 작은 석재를 이용 축성하였는데 남북 약 165m 동서 약 85m의 장타원형 석성이다. 동문지 오른쪽의 석성은 높이 약 5m에 길이 40여 m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길은 원성내 마을에서 북서쪽 해변으로 가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서는 와편과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다경진성의 성터 일부가 남아 있다. 성(城)은 고려시대 후기 종4품인 만호가 해안을 수비하기 위해 축조했다. 그 뒤 조선시대 때 수군만호가 재축성했다.

『新增』 등에서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 이전부터 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둘레는 970척, 높이 12척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높이 2m, 길이 100여m의 성곽 기초만 남아있다.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성씨의 입향조를 살펴보면, 조선 인조(1623~1649) 때 강주진이 전북 고창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한 곳이 바로 이 곳이며 진주 강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특히 이 곳은 150여 년 전에는 부자 마을이었다. 당시는 신안 인근에 場이 없었기 때문에 홍도·흑산도 등 섬 지역 주민들이 다경포의 포구를 통해 이 마을을 거쳐 함평장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때는 신안과 육지를 잇는 포구 역할을 하면서 교통의 요지로서 흥성했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면암 최익현이 흑산도로 유배갈 때와 우이도의 어상 문순득이 오끼나와와 필리핀, 그리고 중국을 전전하는 3년의 표류생활을 경험하고 귀국하여 우이도로 귀환할 때, 다경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경포는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통하는 주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지형을 살펴 해상의 수군진 당시의 옛 뱃길을 복원하여 보자.  먼저 현재 서쪽으로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와 서로 마주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해제면 임치리와 해로로 연결되어 있다. 더 나아가 북진하면 영광의 법성포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관심을 끈다. 임치와는 현재의 육로로 35㎞ 정도 되지만 해로를 이용하면 임치진과는 북쪽으로 직선거리는 20여㎞, 해로로는 약 21.5㎞ 사이에 두고 있어 북쪽 임치진과는 상호 뱃길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북쪽 해변에는 북동쪽 3㎞ 운남면 소재지와 연결되어 있는 갯고랑이 연접해있어 간조시에 뱃길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뱃길로는 중요한 요충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때 활용이 되었을 포구는 특이하게도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해변에 마주하고 남쪽의 구릉을 등지고 있어 북서풍에 노출되어 있고 해안이 비좁아 포구로서의 입지조건은 양호하지 못하다할 것이다. 따라서 수군진이 아닌 어항으로 발전가능성도 어려워 1895년 수군진이 폐쇄되면서 포구의 기능은 약화 소멸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에 다경포진 앞 바다에서 포구의 흔적과 선박 수리시설과 접안시설로 추정되는 말목열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5) 務安縣 梨山浦 戰船所

 

  무안현의 梨山浦 戰船所는 조선 후기 관방포구이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강정․당촌마을 앞에 있는 포구이다.69) 여러 『지리지』와 『고지도』에70) 등장한다. 梨山浦71) 또는 ‘梨山津’이라는72) 기록이 보이나 나루의 기능은 확인되지 않는다. 무안읍에서 직선거리로 이산포까지는 7.5㎞로 약 20리이다.73) 남서쪽 200m 지점에는 息影亭이 있고,74) 북동쪽에는 영산강이 가장 심하게 휘어져 흐르는 물길 늘어지가 있는데, 이산포는 그 만곡부의 중심에 있다. 이곳은 목포와 영산포간 뱃길의 중앙에 해당한다.  

  이산리의 지명에 관한 변천은 마을 뒷산이 배의 형국이어서 ‘舟山’으로 불리다가 일제기에 ‘梨山’으로 개칭되었다고75) 하나 일제 이전인 『戶口總數』에는 梨湖里,『대동지지』등에도 ‘梨山’이라는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기에도 ‘梨山’이었다.76) 이산 마을을 속칭 ‘배매’라고 하고 마을 앞 냇가를 배매천이라 한다.77)    해변고을 무안현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 무렵 전선이 처음 배치된 것으로 살펴진다. 그러나 그곳은 이산포가 아니라 甫吉浦(현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였다. 70여년이 지나 복길포의 地勢가 不便하여 乙卯年(1675)에 石津面(이산포)으로 이설하였다.78) 그 후 흔적은 영조 33년(1757)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기록과 18세기 중반이후에 그려진『비변사 방안지도』에서79) 확인된다. 무안현 戰船 1隻에는 船卒 215名이 편성되어 있었으며,80) 이산포에는 무안현 소속의 戰船들 외에도 전선에 필요한 水軍器庫 1곳이 있었다. 『조선 후기지방도』에는 이산포와 무안읍이 小路로 연결되어 있고, 또 “水軍庫(自官二十里) 水深五丈 潮入則七丈 水廣一百十步”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그 앞 영산강 물길에는 전선, 병선, 사후선이 각 1척씩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이를 통하여 船所倉은 水軍庫, 선소는 당시 무안현 전선의 정박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과 주민들의 제보와 일치한다.81) 인근에는 고려시기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위한 배를 만든 전선제작소가 있었다고 전한다.82) 무안 전선소는 19세기의 『지리지』까지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갑오개혁 이후 전국의 營들과 동시에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방어사영(防禦使營)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남해안 일대는 거의 무인지경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고려사에 “공양왕 3년에 영풍, 다경, 해제의 권농 방어사(永豊多景海際勸農防禦使)를 겸임케 하였는바 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른다.”83) 다시 말하면 공양왕 3년(1391)에 이르러  다경과 해제의 수군진을 관할하는 직책인 권농방어사의 함평현령이 겸직하였다는 것으로 다경포진과 해제(임치진?) 수군진으로 발전하는 초기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서 무안현령에게는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겸직하게 하였는데 이도 다경포와 해제의 경우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3.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지 않는 무안반도 포구

 

1) 강상포구

 

(1) 『한국지명총람』에 보이는 포구84)

 

① 나주 해창85)  

   

위치: 삼향면 남악리 3구 안동마을 해창마을로 현재 영산강의 지류인 남창천 하류에 맞닫아 있는 포구이다.(N34°48′59.6″ E126°29′03.9″H 5m)

현황: 전남도청의 부지에서 제외된 지역으로 행정단위로는 남악리 3구이다. 현재는 무안이지만 1895년 이전에는 나주에 속한 나주 해창이었다.  “‘저쪽(범바위의 자방포)은 무안사람들이다’라는 말을 어려서 아버지께 많이 들었다.”거나,  “나주 동강에 가서 안동이라면 모르고 해창이라 해야 알았다”86)고 한 제보를 통해서도 해창이 나주 소속 월경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해창은 안동마을의 일부가 되어 있다. 해창의 선창은 해창마트 앞의 현 남창천이었다. 배는 영산강 하구둑 공사가 시작되는 70년대 말까지 깡다리배 등 중선배들이 들어왔다. 해창의 창고터는 해창마트 뒤 북서쪽의 언덕이다. 이곳에서는 주춧돌이 수개가 출토된 적이 있다. 또 남악리 방면으로 제방이 있었고 제방 끝에 300×150×30㎝ 정도 크기의 상판을 가진 다리독이 있었는데 물이 들면 물속에 잠기었다. 지금은 땅에 묻히어 있다.87)  배를 묶었던 팽나무 즉 닻줄목이 해창마트 뒤에 지금도 있으나 남악리와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8차선 도로공사가 시작되어 멸실 위기에 있다.

나주 해창으로 알려진 羅州 三鄕倉은 조선 후기 포구이다. 현재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3구 해창마을로 현재는 영산강의 지류이나 옛 갯고랑이었던 남창천 하류에 있는 포구이다. 현재는 무안군에 속하지만 조선 초부터88) 1906년 이전에는 나주에 속한 월경지였다.89)

  해창에는 영산강 하굿둑 공사가 시작되는 70년대 말까지 깡다리배 등 중선배들이 들어왔다. 해창의 창고터는 해창마트 뒤 북서쪽의 언덕에 있었고 그 곳에서 주춧돌이 수개가 출토되었다. 또 인근에는 배를 묶었던 팽나무 즉 닻줄목이 있었다.90)

  三鄕倉에는 米 521石, 太 230石, 租 4579石, 牟 1273石을 취급했으며,91) 광해군 10년(1618) 에는 영남 해변의 作米(찧은 쌀)는 나주 海倉으로 운송하였다가 秋冬 사이에 급보가 없는 경우에는 役所(역사하는 곳)에서 가져다가 사용하도록 하였다는92) 기록이 전한다.

  한편『호구총수』에는 海倉村으로,『조선 후기지방도』(1872)에서는 “海倉”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삼향창 호칭은『輿地圖書』93)『錦城邑誌』94)에서 확인된다. 왜 삼향창이라 칭하였을까? 당시 나주 해창은 영산포(당시 신촌면)와 고월창(당시 마산면)에도 존재하였다.95) 영산포 나주 해창은 『輿地圖書』에서도 확인된다.96) 나주 지역에 있는 조선 후기 세곡창은 세 곳으로 나주 영산포와 고월창, 삼향면의 삼향창이 있었다. 나주 해창은 영산창을 지칭하고, 삼향면의 것은 삼향창으로 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② 용포(龍浦= 조선시대 注乙浦)97)

   

위치: 삼향면 용포리 3구 용포마을

현황: 용포리 마을은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오룡산과 서북방에 덕룡산이 둘러있어 용혈을 나타낸다. 마을 앞에 포구가 있었으나 1911년 기차철둑 공사로98) 간척되어 배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 초기이기 때문인지 연령 80대의 주민들도 뱃길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배가 들어온 흔적이나 바닷가 삶과 문화는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서북쪽 갯가에서 오룡산 당산 쪽으로 세 아름 크기의 팽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었는데 20여년 전에 고목이 되어 모두 쓰러지고 작은 나무만 남았다. 옛날 팽나무밭은 6백평 정도였는데 매우 무성하여 구렁이도 살았고 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애들의 사체를 나무에 묶어놓았다고 하였다. 제일 하단에는 상여집까지 있어 무서운 곳이었다. 용포 선창은 팽나무가 있는 제일 하단 서쪽이었는데  배를 맨 팽나무를 ‘닻줄목’이라하였다. 현재 마을회관 앞에도 팽나무가 있었는데 고목이 되어 죽고 대신에 근년에 심은 작은 나무가 있는데 명절에 돼지머리를 놓고 재미로 고사를 지낸다. 용포마을에는 아기장수 설화가 전한다.

 

초기 나주 전선소 注乙浦

 

  주을포는 1600년 무렵에 나주전선이 배치된 포구이다. 영조 23년(1747) 나주목사 徐命珩이 나주죽포에 있는 전선을 삼향면 장항포를 굴착하여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에 등장한다. 주을포의 위치에 관한 내용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나주죽포의 전선이 당초에 삼향면 줄포(注乙浦)의 앞바다에 있었는데 적합하지 않아 六七十年前(1680)에 죽포로 이전하였고, 注乙浦는 獐項浦의 뒤 언덕 咫尺의 땅이다.99)

 

  장항포의 지척에 있는 注乙浦에서 문제가 있어 나주 죽포로 이전하였는데 다시 그 인근 장항포로 이전 하는 것은 폐단중의 하나로 지적한 것이다.(5장, 2절 죽포 참조)

  장항포의 뒤 언덕에 있는 注乙浦는 어디일까? 장항포는 지금의 무안군 삼향면 용포리에 소속된 작은 마을인 노루목 포구를 말하며, ‘자방포’라고도 한다.  현재 장항포의 인근에는 注乙浦 마을이 존재하지 않아 문헌을 검토하였다. 『戶口總數』와 『羅州郡邑誌』方里條에 三鄕面의 距官門 九十里에 二士勿村, 克瑞村, 竹田村, 鳥頭村, 松山村, 麥浦村, 白鶴村과 함께 注乙浦村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현 마을명과 비교하면 순서대로 각각 이동, 극포, 죽림, 계두, 송산, 맥포, 백학마을로 밝혀졌지만 주을포 마을만은 없다. 그러다가『조선 후기지방도』와 『구한말지도』에는 삼향면에 龍浦마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반 무렵에 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100)

  용포마을에 남아 있는 옛 지명을 살펴보자. 그 중 ‘구슬개’와  ‘珠洞’이 있고,  별칭 ‘주래 용포’에서101) 용호마을의 고칭이 주을포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항포의 뒤쪽 언덕으로 지척지간이라는 위치설명과도 일치하기도 한다.

  옛 용포마을102) 환경을 살펴보면 마을 북쪽 하단은 옛적에 바다였으나 구한말 이전에 간척되었다. 따라서 1911년 기차철둑 공사 전에 이미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103) 오룡산 능선에서 옛 포구까지 직선상에 3백년 이상 된 팽나무 수십 그루는 인공조림 된 비보림은 마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그 하단 ‘쇄정끝’이라는 팽나무밭(약 6백평)의 나무들은 배를 매어 ‘닻줄목’이라 한다.104) 이런 정황으로도 주을포는 지금의 삼향면 용포마을임이 분명하다.

③ 맥포(麥浦)

   

위치: 삼향면 맥포리는 70여 호가 사는 마을로 행정명은 맥포리 3구이다.

현황: 마을 바로 앞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다. 맥포는 1단계인 호남선 철둑에 의하여 뱃길이 막힌 곳이다. 따라서 맥포리의 뱃길 흔적에 대해 알고 있는 생존자는 찾지 못하였다. 마을 유래지에 의하면 “전언에 옛 적에는 영산강변이라 하여 ‘맥호’(麥湖)라 하였다가 ‘맥포’로 변했다. 맥호는 400여년 전 마을의 입향조인 李先馥의 號인 ‘맥호’가 마을명화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다.105) 그러나 당시 맥포리는 바닷가였으며 호수의 개념이 아니었다. 또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정한 예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경우인데 반대로 입향조의 개인 호를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는 추정은 의심스러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맥포리는 바닷가 마을로 안쪽까지 조수가 들락거렸으며 남창천 건너 일로읍쪽에 남창의 선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북서풍을 막아주고 바닷가였던 맥포리 마을 앞이 선창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④ 남창(南倉)

   

위치: 일로읍 지장 2리에 있는 남창마을은 송태마을에 흡수되었다. 과거에 남창이 있었으며 대밭이 있는 서쪽으로 맥포리 마을을 연결하는 시멘트 도로 근처가 선창이었다.(N34°51′42.4″ E126°28′43.8″) 

현황: 배를 묶었던 팽나무가 있었는데 근년에 고사되었다고 한다.106) 남창으로 추정되는 서쪽 논의 해발 고도가 7m(N34°51′41.2″ E126°28′39.1″) 정도다. 철로 제방으로 뱃길이 막히면서 남창은 육지화되어 현재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⑤ 작은 장항포(獐項浦)107)와 큰 장항포

   

위치: 작은 장항포는 삼향면 용포 1구 후정마을의 동쪽 노리목 마을이며 큰 장항포는 장항포 제방의 동쪽 끝에 있는 ‘자방포’(N34°49′23.2″ E126°29′44.9″)라는 곳인데 물길이 넓고 일로읍에 속한다.

현황: 조선시기에 노루목은 나주에 속하였으며, 자방포는 무안에 속하였다. 따라서 풍선배가 운항 중에 뻘속에 박히게 되면, 박힌 지점을 ‘나주 뻘’과 ‘무안 뻘’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작은 장항포에는 현재 8가구가 살고 있으며 노루목과 범바위 사이를 일제초기 1910년대108)에 막은 500m 정도의 제방으로 인하여 장항포들이 만들어 졌다. 제방의 반대쪽을 ‘자방포’라고 하나 큰 장항포가 와전된 것이다. 작은 장항포인 노루목 선창의 위치는 현재 삼향배수장의 하단에 해당한다.(N34°49′18.9″ E126°29′30.1″) 70년대까지 중선배들이 들어 왔다. 인근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인근 마을에 팔았던 어촌이었다. 포획 어종은 주로 짱뚱어․맛․숭어․게․뱀장어 등이었고, 낙지는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⑥ 도장포(道壯浦)109) 

   

위치: 일로읍 죽산4리 도장포 마을이다.

현황: 옛 이름은 壯湖였으며 마을의 남쪽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영친왕궁에서 축조한 제방으로 인하여 도촌과 연결되면서 도장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110) 일제시기에 도장포 마을의 간척지의 경작권을 주장하며 일제에 소작료를 내지 않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도장포의 선창은 해발고도가 7m로 선박의 운항이 가능한 곳으로 조사되었다.(N34°48′58.0″ E126°30′12.7″) 좌표의 우측에 있는 조그만 밭은 일명 '선창밭'이라고 하며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추정 선창의 남쪽에 남악~광양간 고속도로가 300m 남쪽에 건설 중이다. 당산나무(멀구슬나무)는 고 이수길(2006년 생존 시 74세)의 증조부가 심었는데 정월 초~1.15 무렵 3~4 일간 당산제를 크게 지냈는데 지금은 모시지 않는다. 당산제를 지낼 때 나무에 흰 당목을 감았다고 한다.  

 

⑦ 소댕이 나루

   

위치: 일로읍 구정리 ‘착도’라는 작은 섬의 앞에 있다.

현황: 영산강변에 있는 옛날 강상포구 나루로 영암군 매월리 연동골을 왕래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나루터 흔적뿐 그 기능은 소멸되었다. 참고로 소댕이 나루에서 상사바위까지 2.5㎞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무안군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하였다

 

⑧ 파군교와 당호리

 

위치: 몽탄면 청룡2리 당호저수지에 파군교가 있다.(N34°53′24.5″ E126°30′09.0″, 저수지 수면위 해발고도는 12m)

현황: 당호천은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朴谷川 또는 破軍川이라 했다. 마을을 이룬 선조가 唐나라에서 건너왔다 하여 ‘唐’자를, 맑은 물이 흐른다하여 ‘湖’자를 따서 ‘唐湖’라 한다.111) 당호제 저수지 위쪽에 있는 현 파군교는 1974년 9월 준공이 되었다. 몽탄면에서 동남쪽 6㎞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사방이 둑으로 연결된 지역으로 명산역을 끼고 넓은 영산강과는 간척들판으로 연결되어 있다. 파군저수지 제방 아래 200m 파군천 수로(N34°53′24.7″ E126°30′59.6″)의 해발고도는 3m에 불과하고 타 지역의 강상포구에 견주어 보면 조선 후기에 근처까지 배가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후삼국시기에는 뱃길이 더 내륙으로 들어갔음을 감안하면 당호리 저수지의 파군교 근처까지 뱃길이 열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⑨ 자고리 나루 

 

위치: 느러지(어오지)마을의 남동쪽 900여m 떨어진 ‘장구부’라는 곳에 있었다.(N34°55′16.0″ E126°32′20.6″) 

현황: 나주시 동강면 고천리 자고리마을과 연결된 조그만 나루로 마을사람들이 마을 배를 이용하여 왕래하였고 전임 사공은 없었다. 나주 쪽은 산자락 북단에 있는 수문통자리이며 무안 쪽은 현재 폐가가 1채가 있는 곳에서 200여 m 떨어진 약간 북쪽에 있었다. 그 동편에 현재 비닐하우스와 벼저장고가 있다. 현재는 논으로 되어 있지만 과거 나루였을 당시에 질퍽거려 징검다리를 놓고 강가로 접근하였다.

 

⑩ 신설포 나루

 

위치: 무안 해창의 남쪽 500m 정도 영산강변에 있다. 현재 몽탄양수장(1984.8.30일 완공) 일대이다.(N34°58′20.9″ E126°32′13.7″)

현황: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 송암마을과 왕래하는 나루이다. 함평 우시장이 컸을 때는 사포나루가 컸었는데 영산포가 다리가 연결 되면서 사포는 작아지고 신설포가 커지게 되었다.112)    

 

(2) 신규 확인한 포구

 

① 생기미 나루

   

위치: 일로읍 청호리 우비 마을의 동쪽 영산강변에 있는데 상사바위의 남쪽에 연접하고 있다.

현황: 학산면 은곡리와 왕래하는 나루이며 현재 내수면 어업에 종사하였던 독립가옥 3가구가 있다. 나루의 남쪽에는 광양간 고속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② 주렁 나루(주룡포) 

   

위치: 일로읍 청호리의 영산강 변에 있다.

현황: “駐龍津은 南쪽 五十里리에 있으며 靈岩界로 통한다”고113) 하며, 두령량 물길에 있는 나루이다. 무안군 일로읍 주룡마을과 영암군 학산면 미교마을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두령량은 무안현의 남쪽 60리에 있다”114)고 하는데 별칭이 다양하다.『고려사』에서 무안의 龍津江115) 외에도 注龍江116), 住龍潭117) 駐龍浦118) 등으로 칭했다. 동쪽의 은적산과 서쪽의 주룡산 상사바위 사이는 영산강 중․상류의 물들이 모두 지나가는 협곡으로 물살이 매우 빠른 곳이다.119) 

   상사바위에서는 소재관의 주관하에 조선 초부터 치제가 이루어졌다. 세종 11년(1429)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 제사 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라 국고의 미곡으로 하게 하였는데 務安의 龍津溟所도 포함되었다.120)『世宗實錄地理志』에 “大川이 하나이니 頭靈梁이다. 현의 남쪽 西崖에 있다. 돌산이 우뚝 서서 강에 임하였는데, 이것이 龍津溟所가 되었다. 봄·가을에 그 고을에서 제사지낸다”고121) 한 것과 일치한다. 이런 기록에서 상사바위가 龍津溟所임을 알게 한다. 현 삼향면 우비마을에 있는데, 일제기에도 큰 굿을 올리곤 하였다.122)

 

③ 돈도리 포구123)

 

위치: 일로읍 의산리 돈도리 마을의 바로 앞에 있었던 포구이다.(N34°50′30.6″ E126°31′37.7″) 

현황: 돈도리는 영화제방이 막아진후 농장이 만들어지고 생긴 근대마을이다. 이 마을은 영산강의 작은 지류에 있는데 본류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동쪽이다. 일제시기에 막아진 영화농장의 제방(약 1800m)의 남쪽다. 돈도리는 영산강 하구둑이 막아지기 전까지 맛․ 게․장어․숭어 등을 잡는 어촌이었으며 선창으로 활용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수문통에서 350m 남쪽에 작은 물길이 연결된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 것이 돈도포구의 물길이다. 돈도 포구의 300m 아래에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다.

 

④ 양두포(羊頭浦)124)

   

위치: 일로읍 복룡리 양두마을 동쪽이다.(N34°51′38.0″ E126°32′11.1″, 해발고도 5m) 

현황: 양두마을 앞에는 羊島라는 작은 염소섬이 있다. 양두 마을앞 일대가 선창이었으나 양도를 건너가는 갯고랑이 간조 시 뱃길의 역할을 하였다. 해방 50년 무렵까지 큰 배, 즉 조기 중선배들이 들어왔는데 50여 척이나 되어 일명 작은 목포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사기 위하여 쌀 돈을 가지고 몰려들어 마을은 북적였다. 당시의 양두는 잘 나가는 어촌포구로 부자마을이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이 이루어져 무안에서 공무원이 제일 많은 동네 중 하나가 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퇴직하였다.  

 

⑤ 용호선창125)

   

위치: 일로읍 복룡2리 용호동 마을에 있다. 선창은 복룡3교 일대이다. (N34°52′08.8″ E126°31′41.4″, 해발고도 1m)

현황: 용호마을의 북쪽 복룡마을에서는 선창부근을 ‘선창몰’이라 하였다. 마침 조사 당시 수로정비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파헤쳐진 흙은 모두 갯뻘이었다.

 

⑥ 뒤구지 나루

 

위치: 몽탄면 이산리 느러지(어오지)마을을 돌아서 있는 뒷구지에 있다.(N34°56′05.4″ E126°31′50.9″) 현재 느러지 관광농원126)의 입구가 나루였다. 자고리 나루의 약1.6㎞ 북쪽이다.

현황: 동강면 대지리 대각촌과 연결되어 왕래하는 나루이다. 뒤구지 나루에 비하여 전임사공이 있을 정도로 큰 나루였다.

 

⑦ 북적포 나루

 

위치: 몽탄면 사창리 두암마을을 지나 직선거리 500여m 남동쪽 영산강변 야산 아래에 있다.(N34°57′30.0″ E126°31′37.9″) 

현황: 현재 수문이 있다.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 연화촌을 왕래하는 나루이다. 일제 때에 山野(일본인 名)의 소유인 큰 창고가 있었다.

 

⑧ 사창

 

위치: 몽탄면 원사창리 마을이다. 중종 때 사창이 있었다.127)

현황: 사창마을 남쪽에 있는 사창저수지 아래에 당산나무가 있는 곳(N34°57′59.9″ E126°31′21.2″ H 11m)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사창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128) 하지만 배가 들어왔다는 위치를 감안하면 약 100m 서쪽에 현재 철로를 건너는 육교가 있는데 그 위의 약간 높은 지대에 거목이 몇 그루 있는 곳이 사창터로 추정이 된다.

 

2) 해상포구

 

(1) 『한국지명총람』에 보이는 포구

 

① 배다리(舟橋)

 

위치: 망운면 목동리 상주교 마을이다. 망운소재지 주유소에서 200m 북동쪽으로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고도이다.(N35°00′55.9″ E126°24′02.5″, H 6m)

현황: 창포호 간척지의 북단인데 현재 현경간 도로에 있는데 북쪽에 약간의 갈대밭이 있고 상주교 마을은 동쪽이다. 갈대밭 아래에 배다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작은 수문이 있다.

 

② 성포(城浦)129)

 

위치: 해제면 광산리 성포마을로 선창은 남쪽 100m의 수문이다.(N35°06′05.6″ E126°17′48.0″, H -1m)

현황: 성포는 금산간척지에 있는 포구로 수심이 깊으며 성포에 물이든 2시간 후에 해제 뒤쪽의 물이 든다. 옹기․황서리․젓갈 등을 실은 풍선배들이 들어왔다. 금산간척지에는 두 곳에 제방이 있는데 일제 때 막기 시작하여 해방 후 50년대 후반에 막아진 성포~점등간 제방과 남쪽에 있는 25년전에 축조된 마실제방이 있다. 점등간 제방은 점등에서 인력으로 채토하여 철로를 놓아 운반하였다. 마실 제방으로 신안군 지도간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막은 사람은 일본인으로 호가 금산(대리인 김문평)이어서 금산간척지로 불리운다. 점등간 제방 건너편에 옹기를 구웠던 옹기가마터가 2곳이 있다. 점등마을 것은 1970년대까지 작업을 하여 작업했던 분들이 생존한다. 1.5㎞ 정도의 북쪽에 해제면 소재지 양간다리가 있다. 성포에서는 사금(沙金)이 나와 1950년대에 대규모 작업이 이루어졌다.

 

③ 수포(水浦) 

 

위치; 해제면 임수리 수포마을 앞이 선창이었다.

현황; 샘을 파면 물이 잘 나와 수포라고 하였다. 이 수포마을 경로당 남쪽 논(N35°06′22.6″ E126°15′58.9″) 은 해발고도가 불과 4m로 간척 전에는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서쪽 1㎞ 제방 너머에 있다.

 

(2) 신규 확인한 포구

 

① 중등포(中登浦)130)

 

위치: 삼향면 유교리 중등포 마을로 선창은 구다도해식품 앞과 성지산업 사이이다.(N34°50′29.9″ E126°25′39.0″, H 6m)

현황: 중등포에서 서쪽 1.3㎞ 바다에 木柵을 막고 절강하기 위하여 지나던 중을 밀어 넣고 막았다 하여 중등포라 한다.131) 과거 광목간 국도 1호 도로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서해안 고속도로 목포 인터체인지 북단이며, 과거에는 갯고랑이 동서로 나 있었다. 배는 700여m 떨어진 동쪽의 중앙상회(N34°50′35.1″ E126°36′04.7″, H 8m)까지 들어갔다. 중등포에서 샘을 파면 지금도 짠물이 나온다.

 

② 장부다리 선창132)

 

위치: 청계면 청계2구 656-7이었다.(구암마을 N34°53′21.0″ E126°25′53.4″)

현황: 일제시기 학유정마을 제방이 막아지기 전에는 장부다리까지133) 배가 들어갔는데 장부다리휴게소에서 일로방면으로 50m 동쪽으로 가면 도로의 왼쪽에 느티나무 거목과 연꽃이 심어진 논 수로가 나온다.  이곳이 장부다리 선창인데 수로의 해발고도가 5m 밖에 되지 않는다. 제보자는 주변산의 봉우리명이 투구봉, 말봉, 군사봉, 칼봉 등인 점이 특이하다는 점을 덧붙였다.

 

③ 영진포134)

 

위치: 鶴遊亭 마을로 옛 역나루가 있었다.(N34°53′19.8″ E126°25′27.8″, )

현황: 제방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학유정 마을 서쪽 끝에 있고, 하나는 마을에서 2.5㎞ 서쪽에 있는데 가란리와 중산골을 막은 제방이다. 학유정 마을의 서쪽 끝에 있는 제방은 1917년 제작된 지도에 이미 있는 것으로 보아 1910년대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80세의 주민도 바다에 대한 기억이 없으며 제방은 이미 막아져 있었다는 증언에서도 확인되었다. 바깥쪽 제방은 1970년대에 완공되었다. 학유정 선창은 마을 서쪽끝 갯고랑 부근 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해적(왜구)들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신들이 드나들었다는 항으로서 제물포, 부산포 등과 함께 서남단에서는 영진포라는 곳이 있다. 충분한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학유정 일대의 포구는 옛적에 당재 구암마을 앞까지 바다였는데 나락 2~3천 가마를 실은 범선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135)

 

④ 압창포(鴨蒼浦)136) 

 

위치: 망운면 동산리 압창포 마을이다. 선창은 마을회관 남쪽 조립식 주택 서쪽 논이다. (N35°00′26.8″ E126°23′52.3″, H -2m)

현황: 압창포는 ‘갈매기가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갯마을이었다. 압창과 동산리간 둑은 1923년에 완공되었는데 당시 선창은 수문에 있었다. 일제 당시는 목포에서 압창포간 매일 정기여객선이 다니는 어촌이었으며 주막도 있었다. 일본인 4인이 거주하면서 조선흥업회사의 사무소와 창고의 일을 보았는데 망운․현경․해제면에서 소작료로 목화와 벼를 수합하여 배를 이용 외지로 수송하였다. 1983년 톱머리와 청계 도대간 제방이 막아지면서 육지화되었고, 2002년 무안공항이 건설되면서 피서리 주민 10여호가 이주해와 40여호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무안기업도시 대상지역이다.

 

⑤ 동산리 발동기머리137)

 

위치: 망운면 동산리 선창은 속칭 ‘발동기머리’이다.(N35°00′03.0″ E126°24′26.2″, H -2m)

현황: 2002년 완공된 다리의 하단 100여m 인데 독립가옥과 창고가 한동이 있는 곳이다. 현재의 수로보다 동쪽에 현 창포호로 연결된 큰 갯고랑이 있었고, 거기에 기곗배가 정박한 곳이라 하여 ‘발동기머리’라 한다. 무안공항이 서쪽 건너편에 보인다. 무안기업도시의 대상지역이다.

 

⑥ 당두마을138)

 

위치: 망운면 동산리 당두마을의 서쪽바닷가이다.(N34°59′31.8″ E126°24′58.9″)

현황: ‘닭머리 형국’ 이라는 닭머리에 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하여 ‘당머리’ 또는 ‘당두’라 일컫는다. 당두에는 외부의 배들은 들어오지 않았고 마을의 소형어선들을 바닷가에 묶어 두었다. 10여척으로 주로 소형배들이었는데 큰 배는 새우잡이 배였다. 무안기업도시 대상지역이다.

 

⑦ 점등선창139)

 

위치: 망운면 동산리 점등마을로, 선창은 점등 앞 바다이다.(N34°59′25.3″ E126°25′25.6″, H 0m) 큰 배는 갯고랑(현 학계천)이 있는 북동쪽에 매었다,

현황: 점등에는 30호 정도가 살았는데 점등과는 달리 집집마다 어업에 종사한 전형적인 어촌마을이었다. 낙지․전어․숭어․새우․꼬막․석화가 생산되었다. 마을이 해발고도가 낮고 바다와 인접하여 태풍시 해일의 피해를 보았다. 어판장140)이 마을의 입구에 있는데 지금은 재활용품 수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에 여객선은 다니지 않았으며, 마을어선들이 선창을 활용하였는데 점등에서 생산된 옹기141)를 운반하는 풍선도 운항되었다. 점등의 닭머리끝 해안은 모래사장과 바위들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들었는데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모래와 석재는 간척 후 채취하여 타지로 반출되고 현재는 없다. 어촌이었던 당시 무안읍에서 택시타면 점등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점등은 부촌이었다. 그러나 주민의 동의나 보상도 없이 간척으로 인하여 생활의 터전을 상실하고 농촌으로 탈바꿈되었다. “단지 군에서는 간척지 땅 중 일부에서 1필지(1200평)씩을 지역 영세민에게 우선 분양하였다. 반면에 외지인에게는 100~200마지기를 분양했다.”고 한다. 점등은 무안기업도시의 대상지역으로 주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⑧ 양곡마을 선창142)

 

위치: 운남면 양곡리마을에 있는 포이다.(N34°56′27.5″ E126°20′38.5″)

현황: 운남면 양곡리 마을은 3단계의 간척공사가 진행되었다. 1단계는 조선 말에 막아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제방으로 마을의 동쪽끝단에서 남쪽으로 일제 때 막은 제방 서쪽 끝(수문통=이의석 댁)으로 막은 둑이고 2단계는 일제시기에 막은 둑으로 양곡리(이의석 댁 앞)에서 신촌리간 제방이고, 3단계는 70년 전후에 완공된 영해촌과 대박간 제방이다. 양곡리 마을은 제방의 막은 순서에 의하여 선창의 위치가 변하였다. 1차 선창은 제방 막기 전에는 마을 앞이 선창이었다.(N34°56′53.4″ E126°20′46.2″) 2차 선창은 일제 이후로 이동되었는데(N34°56′27.5″ E126°20′38.5″) 여기에는 3단계 제방이 막아지기 전까지 목포를 왕래하는 기곗배가 운항되었다. 목선인 영신호와 광진호가 하루 2차례 운항하였으며, 현 운남면 소재지, 동암 연리 일대의 주민이 이용하던 인근에서 중심항이었다. 2차 선창을 지난 물길은 더 북서쪽으로 1.5㎞ 올라가 점등마을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점등에서 만들어진 옹기는 점등마을 앞에서 직접 뱃길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보자는 일제 때 막은 둑안에서 운조리 낚시, 게잡이 등을 하였고 겨울에는 갯땅에서 갯나무를 하였으나, 농사는 염기로 인하여 십 수 년 전에 비로소 시작했다고 한다.

 

⑨ 연리마을 선창143)

   

위치: 운남면 연리마을 앞에 있었다.

현황: 현 운남면 소재지 운남초등하교 서쪽에 있는 마을로 연리마을의 선창도 양곡리의 마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단계의 제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선창도 옮겨졌다. 1단계 제방은 조선말에 마을 남단에서 동쪽으로 막은 작은 제방이고 2단계는 1단계의 둑에서 남쪽으로 240m지점에 서쪽과 동쪽으로 막은 둑으로 일명 70년 전후에 미국지원 밀가루로 막아 밀가루 제방이라 한다. 3단계 제방은 고랑물에서 성내리간 막은 제방으로 30여 년 전에 완공이 되었다. 3차 제방 안에서는 염전이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논으로 개간되었다. 1차 선창은(N34°57′31.1″ E126°19′57.3″)으로 1단계 제방의 수문에 있었는데  당시 선창가에는  거목인 팽나무와 아래에 유산각이 있었다. 팽나무는 닻줄목으로 이용되었는데 현재는 그 나무는 고사하고 대신 子木(직경 약80㎝)이 2 그루가 있다. 마을 앞에서는 육염을 굽던 염밭이 몇 년간 운영되었다. 2차 선창(N34°57′25.1″ E126°19′51.1″)으로 2단계 제방의 갯고랑에 있었다. 2차 선창의 동쪽 구릉에 돈사가 있다. 2차 선창이 운영되었을 당시에 망운 고구마를 달구지 또는 지게로 운반하여 풍선에 싣고 목포로 운반하였다. 망운 고구마는 일제시기에도 많이 재배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

 

⑩ 염포144)

 

위치: 운남면 내리의 간척지에 있는데 안쪽에 천일염 염전이 있어 ‘염포’라 한다.

현황: 50년대까지 육염을 굽던 염소가 있었다. 솥등은 현재 시멘트 다리와 염전의 소금창고 사이에 불룩한 솥등이 있었는데 동쪽은 모두 염밭이었다.(N34°57′30.2″ E126°18′27.9″) 제보자는 초등학교(당시 4학년)때 견학을 갔는데  화목을 섬에서 싣고 와서 솥등으로 운반하는 것과 소로 쟁기질하는 것, 염탕수를 큰 사각솥에 넣고 불을 지피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현 월악교회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집이 주막이었다.

 

⑪ 수포(水浦)

 

위치: 해제면 임수리 수포마을 앞이 선창이었다.

현황: 샘을 파면 물이 잘 나와 수포라고 하였다. 이 수포마을 경로당 남쪽 논(N35°06′22.6″ E126°15′58.9″)은 불과 해발고도가 4m로 간척 전에는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서쪽 1㎞ 제방 너머에 있다.

 

3) 고고학 자료로 확인한 고대거점 포구

 

그 동안 무안지역에서 조사된 고대의 중요 유적·유물은 지석묘 386기(59개소) 삼국시대고분 17개소, 유물산포지 14개소, 패총 2개소가 지표조사145) 되었고, 국립광주 박물관에 의하여 1984년 무안 사창리 옹관묘 발굴, 1991,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월암리 지석묘가 발굴되었으며, 1997년에는 무안 양장리 유물산포지가 발굴조사 되었다. 아직 충분한 조사로 보기에는 미흡하지만  백제시기의 읍치였던 무안읍 고절리와 해제면 고읍리는 제외한 지역은 그간의 고고유적 조사를 근거로 해당지역의 물길과 뱃길을 살펴 중요지역은 고대거점포구로 설정하여 보고자 한다.

 

(1) 몽탄면 양장리 거점포구

 

소재: 무안 양장리는 서해안고속도로의 목포~무안구간(1993년 착공)인 몽탄면 양장리 1구 답 1117와 1119 번지에 있다. 동측하단은 파군교가 있는 당호저수지와 연접하여 있다.

현황: 1990년 지표조사 1994. 4. 25~9. 25 1차 조사 후 저습지의 발견으로 1994. 12. 16~1995. 5. 16까지 추가 발굴하였는데 총 발굴기간은 10개월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양장리 유물산포지에서 농경관련 저습지와 환호를 두른 대규모 주거지가 발견이 되었다. 발굴결과를 소개하면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기는 3~5세기를 중심으로 수리시설 생활·분묘 유적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둘째 농경관련시설이 저습지에서 조사되었는데 여러종류의 말목열과 목조시설물들이 발견되었다. 또 조선시대이후의 저수시설(목제사용 둠벙)로 보아 고대~근래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활동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저습지에서 출토 된 목제 중 농구 목구 용기 건축용재 등 다양한 목기류가 출토되어 광주신창동 유적과 함께 목제유물연구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넷째 삼국시대 수혈주거지 37기 수혈유구 12기, 지상가옥 10기, 환호 성격의 수로 등이 확인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의 팔각건물지도 발견이 되었다.

발굴결과를 종합하면 청동기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일정규모 이상의 취락이 계속 형성되었으며, 특히 3~5세기대에 형성된 대규모의 주거지 군과 환호적 성격의 수로 그리고 생산관련 시설들은 당시의 취락의 일면을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146)  2필지의 조사의 결과만 보더라도 대단히 중요한 생활유적이다.  아쉬운 점은 서해안고속도로의 예정부지만을 발굴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조사가 진행되지 못하여 양장리 일대 양지촌 도림산 월산리에 분포하는 유물산포 유적의 전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물길과 뱃길을 고찰하여 보자. 양장리 유적은 영산강의 작은 지류인 당호천(일명 파군천)가에 있다. 현재의 영산강(몽탄대교)까지는 직선거리 약 1700m에 불과하다. 영산강변의 제방이 막아지기 전에는 당호천을 따라 당호저수지까지 바닷물길이 열려있었을 것이다. 해발고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영산강 제방과 소화 17년에 완공된 당호저수지 둑까지는 간척논이었다. 영산강 제방에서 약 1500m 떨어진 지점 즉 당호저수지 제방 200m 아래 당호천 수로 (N34°53′24.7″ E126°30′59.6″) 해발고도는 3m에 불과하다. 이는 영산강제방이 없다면 바다의 기수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호저수지를 거슬러 올라가 파군교 하단(N34°53′24.5″ E126°30′09.0″) 저수지 수면위 해발고도 12m이다. 이 고도는 하천의 물이 풍부하다면 조선후기에 뱃길이 가능했던 최대 한계 지점에 가깝다. 그런데 그 이전의 시기로 올라가면 해면이 높았으므로 바다와 연결된 뱃길은 양장리 유적 근처까지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양장리는 생활유적으로 보아 3~5세기의 중심포구로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포구의 역할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전자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전용옹관의 시기이며 후자는 팔각건물지로 보아 설화로만 전하여 오는 몽탄과 파군교 설화를 뒷받침하는 고고흔적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역사로의 전환이 가능해지기도 하겠다.

 

(2) 몽탄면 사창 거점포구

 

유적현황: 몽탄면 사창에는 조선시기에 사창이 있었는데 현재에 무안기차역이 있다. 이 무안역을 중심으로 반경 1㎞ 내외의 좁은 지역이다. 영산강의 작은 지류인 지석천과 덕암천을 끼고 있는데 당시에는 모두 조수가 들락거리는 간석지였으며 양천은 갯고랑이었다. 현 덕암천에는 덕보포가 있었으며 양천사이에 북적포나루가 있었다.

이 사창지구에서 지표조사 결과지만 옹관․석실고분들이 밀집 분포한 것으로 밝혀졌다.147) ①사창마을 석실분은 사창리 마을 뒤쪽 우명산(牛鳴山)산록에 2기의 석실분이 있다. 석실의 일부로 보이는 개석과 벽의 일부가 노출되어있다. ② 사창리 4구 두암마을은 옹관고분이 밀집한다. 두암마을의 북쪽 표고 30m구릉에 6기의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이 고분에서 서쪽으로 7~80m 떨어진 노루봉 능선에서는 광주박물관이 1984년  옹관고분 4기와 목관토광묘를 수습발굴한 바가 있는데 출토유물은 管玉 曲玉 有孔廣口小壺와 鐵斧 大刀 철화살촉 등 철기류로 전형적인 옹관고분의 출토물이다.  ③ 사창리 돌머리 마을에서는 석실고분으로 보이는 고분이 3기가 조사되었는데 2기는 板狀石 石室의 방형과 전방 후원형 고분일 가능성이 있으며, 또 한기는 석곽에서 옹관편들이 출토되었다. ④ 사창리 3구 토기동 마을의 야산 경사면에 1(현지 조사에서는 2기라 들음)기의 고분이 있었다하나 깍이어 인멸되었는데 할석만이 출토되어 割石墳으로 추측되었다. ⑤ 몽탄면 다산리 인평마을의 남쪽 250m, 3~40m의 구릉전체가 옹관고분 밀집지역으로 수십기로 추정되었다. U자형 대형옹관편과 얇은 소형옹관편들이 도처에 파괴되어 흩어져 있다. 인평고분은 사창리의 타 고분군들과 모두 2㎞내에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148)

사창리 거점 지역에서 보이는 고분군들의 시기는 3~6세기로 보이며 영산강 고분문화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옹관고분에서 출발되어 할석분 판석석실분 방형 또는 전방후원형 추정분들은 영산강이 아닌 타지역과는 대별되는 양상이다. 고분은 단순한 무덤으로써가 아니라 당시의 축조한 세력의 크기와 존재시기를 의미한다. 아직 무안지역에서는 고분 발굴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대 옹관․석실고분에 대한 추후 조사 시 미스테리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화들은 모두 강이나 해상을 바라보는 30~40m의 구릉에 대부분 분포하고 뱃길의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양을 주무대로 한 당시의 해양문화를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무안군 사창지역의 고대문화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함평으로 이월

   1) 고막천의 가항종점 古幕浦

  고막포는 고려~조선시대 포구로 여러 『지리지』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고막교는 함평군 원고막마을 앞에 있다.149) 조선시기 당시에는 무안에 속하였으며 나주와 경계를 이루는 고막원천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그 하단에 고막포가 있었다.150) 영산강 본류로부터 고막원천을 따라 약 6.6㎞를 올라가면 고막교에 이른다. 1910년대에 50~100섬을 실은 배가 드나들 정도의 뱃길이었다. 실제로 나주 척포마을의 노인들은 일제시기 소금을 싣고 고막포까지 밀물과 함께 올라갔다고 한다.151)

   고막교는 발굴조사결과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152)

 고막교로 인하여 고막원천의 뱃길은 차단되었다고 보지만 사실상 하상고도가 3m 정도이고 수량도 풍부하지 않을 뿐더러 하상경사가 급하여 더 이상 뱃길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振例津

  振例津은 조선 말기 나루로 무안 진례면 이별바우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현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덕음마을과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 기동(옛명 中村)마을을 연결하는 나루였다.153) 문헌상으로는 19세기 말 이후에 등장하며 명칭이 다양하다.『金城邑誌』에서는 “振例津은 속칭 中村浦津이며,”154) 『조선 후기지방도』의 나주목 지도에는 ‘振例津’으로, 반면에 同 무안현 지도에서는 ‘中村津船’이라 하였다. 그리고『구한말지도』와 『일제지도』에는 ‘中村渡’라고도 하였다. 주민들은 ‘중촌포진’이라 널리 칭하고 있다.

  진례진은 옛 나주 공수면 중촌포 마을을 지나 함평의 고막원을 연결하는 中路 기능을 하였다. ‘중촌포나루’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포구의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선조 당시에 지어진 烟派亭은155) 중촌나루 위의 이별바우산 남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까지 나주 공산쪽 사람들이 함평 학다리역을 왕래 할 때 주로 이용되다 정지되었다.

 

4. 맺음말

 

이번 조사․연구에서 우리나라 역시 포구의 나라였음을 새삼 확인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진진포포’란 관용어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번 조사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고자 한다.

첫째, 무안반도는 물길과 포구가 특히 발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무안반도의 포구는 총 41개소에 달했다.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무안반도가 한반도 축소판의 형상을 띠고 있고 사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물안’의 형세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강상포구가 해상포구보다 오히려 많다는 점이다. 총 41개 포구 중에서 강상포구가 29개소에 달하고 있어 해상포구보다도 더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포구가 바다와 강을 통해서 내륙 깊숙이까지 망라하는 물류네트워크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포구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되는 무안반도의 포구는 총 17개소에 불과하다. 엄연히 존재했을 포구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대다수가 누락된 것은 조선시대 포구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물류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시되지 못했던 이율배반성을 느끼게 한다.

넷째, 오늘날 지명조사에서조차도 포구에 대한 관심이 미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포구 24개소 중에서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 나오는 포구는 13개소에 불과하다. 11개소는 지명조사에서 누락된 셈이다.

다섯째, 고대의 포구와 조선시대 포구가 일치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확인한 고대 거점 포구 2개소가 조선시대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 포구의 단절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국제적 성격을 띠는 고대 포구와 국내적 성격을 띠는 조선시대 포구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현상일 수도 있겠고, 고대 포구와 조선시대 포구의 입지적 차이에서 연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점 앞으로 포구 조사․연구에서 유념할 대목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대동지지』,『호남읍지』.

『무안군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무안군, 1986.

『한국지명총람』 14, 한글학회, 1982.

『무안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래』, 무안문화원, 1996.

『마을 유래지 』,무안군, 1 987.

『내고향 해제마을』, 해제면지발간위원회, 1988.

『무안군사』, 무안군사편찬위원회, 1988.

『무안양장리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무안군, 1977.

  『한국의 간척』, 농어촌진흥공사, 1996,

 

 

 

 

 

 

 

 

 

 

 

 

 

 

 

 

 

 

 

 

 

 


그림 3. 영산강 중․하류 지역의 간석지 개간과정 (김경수, 2001, 박사학윈 논문, 41쪽)

 

 

 

 

 

 

 


그림 4. 『東輿備考』의 덕보포, 정족포


그림 5. 나주 무안강변 강상포구의 분포도


1) 본 논문은 『도서문화』28집(2006년 12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실린 것을 기초하고, 2010년 박사학윈 논문 작성 시 추가 조사로 밝혀진 내용을 덧붙여 2015년 10월 수정 가필하여 완성하였다.

2) 나루와 포구는 혼용하여 쓰기도 하지만 각기 다른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즉 나루는 상대 나루로 건너가는 작은 규모의 선착장이 있는 지점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포구는 바다로 통하는 출입구로서 포구 주위에 마을 내지 도시가 형성된 것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항구는 대규모의 포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나루와 포구를 통칭하여 포구라 칭하기로 한다.

3) 강봉룡, 2005,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한얼미디어 참조.

4) 주강현, 2006 『관해기』, 웅진지식하우스.

5) 『三國史記』, 地理志, 武州, 務安郡條.

6) 무안반도는 한반도의 축소판의 형상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7)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나주목, 무안현조.

8) 2006.11.26, 제보자 ; 김상대(남 79세, 노루목 마을의 토박이)는 어렸을때 상사바위의 굿을 보러  갔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다. 주관이 관청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9)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211쪽

10)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211쪽

11) 2006.11.26 제보자 ; 김상오(남 77세, 이산리 555), 임석배 (남 84세)

12) 2006.11.26 제보자 ; 정봉휘(남 55세, 강나루 식당주인으로 토박이)

13)『新增東國輿地勝覽』卷36, 全羅道, 務安縣, 山川條.

14)『燃藜室記述』 別集 卷16, 地理典故.

15) 타 지역 용례를 보면 전라도 토박이 말 ‘독(石)’이 ‘德’으로 표현된 경우는 영암읍의 바로 위에 있는 德津橋를 ‘독나루’, 전라북도 부안의 경우에 德達浦는 ‘독다리’음 중에서 독→德으로 다리→達로 한자화된 경우이다.

16) 주변 환경을 살펴보면, 마을 앞은 현재 간척논이며, ‘배들이골’은 현재의 해발고도가 0.5~2m인 점으로 보아 옛적에는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직강화된 덕암천의 상류에는 ‘배들이들’과 ‘배다리’ 지명이 남아 있다. (김경수 엮음, 『향토생김새』, 제 1편 광주직할시 전라남도 편, 향지사, 1922년 영산포 지도)

17) 한글학회, 1982, 『한국지명총람』전남 Ⅱ, 165쪽.

18)『高麗史』 卷79, 地33, 食貨 2, 漕運條. “德浦 前號德津浦 務安郡.”

19) 2006.12.3 제보자 ; 이선옥(남 69세, 이장 42년 경력) 4대조가 중선배 3척을 소유하고 어업에 종사하여 선창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20) 2006.12.3 제보자 ; 이선옥의 현 집의 북쪽 약150m 지점.

21) 2006.12.3 제보자 ; 이선옥(남 69세, 이장 42년 경력)

22)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무안현조.

23)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 148쪽.

24) 2006.12.9 제보자 ; 배사재(남 60세)

25) 농어촌진흥공사, 1996『한국의 간척』, 363쪽(시행자: 최상옥, 공사기간: 1964~1982, 매립면적: 1554㏊)

26) 선창의 북쪽에 동서방향으로 있는데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높은 지역이다. 개답공사를 한 현재도 높다

27) 화설당과 수은 선생에 관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나주 목사일행이 수은선생과 함께 창포 갯가에 그림같이 새로 지은 堂에 다다르니 하얀 솜 방울 같은 눈송이가 나부끼는 터에 산차나무(흔히 동백으로 불림)는 빨간 꽃을, 매화나무는 상큼한 향기를 짙게 풍기며 피어 있었다. 그 당은 柳運(1580〜1643) 처사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향하여 어머님이 돌아가심에 상심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을 닦기 위해 온 심혈을 기울여 배운 바대로 이기설에 의하여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었다. 감회에 젖은 南郭 牧使에게 인사를 하고 정좌한 柳處士에게 堂을 짓기까지 애를 쓴 일에 대하여 위로하고 “그대의 堂에 이름이 아직 없으니 花雪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여 ‘화설당’이 되었다 한다.

28) 변남주 2010, 『전근대 영산강 유역 포구의 역사지리적 고찰』, 목포대박사학위논문, 77쪽의 내용으로 수정하였다.

29)『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全羅道, 務安縣, 山川條. 

30) 務安郡史編纂委員會, 1994,『務安郡史』, 87쪽에서 비정한 승달산 동록의 달산마을은 “무안에서 20리”에 위치하여 거리가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산골이어서 포구가 존재할 수 없다.

31)『東國輿地志』, 全羅道, 務安縣 山川條. “鼎足浦 在縣南 三十里.”

32)『東國輿地志』, 全羅道, 務安縣 郵驛條. “古銕所院 在鼎足浦.”

33)『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羅州牧, 務安縣條. “鐵場二, 一在縣東南紫口洞, 一在縣南炭洞品皆上. 鍊鐵一千五百八十六斤, 納于軍器監.”

34) 영산강 지역에 위치하여 육로로 보면 외딴 곳이다. 탄동의 남쪽은 옛날에는 바다였고 갯고랑과 인접하였다. 폭 100여m에 이르는 넓은 갯고랑은 東으로 흘러 약 1.5㎞ 지점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그곳에는 영암 태백으로 건너가는 소댕이 나루가 있다.

35) 여기에서 소(솟)의 한자는 鼎으로 쓰여 지는 경우를 보아 지명에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한글학회, 1983, 『한국지명총람』전남편 Ⅱ, 177쪽.)  

36) 제보 : 2010. 2. 24, 윤정님(여, 1932년생, 구정리 주민). 점등 상황은 구정마을 회관에 있던 할머니 10여분들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윤할머니가 점등에 밭과 논이 있어 간척 전의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점등 바닷가에 붉은 돌이 많았으나 논에 매립되었다고 하였다. 현장조사에서는 옹기편이나 야철지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옹기점이 아니라 쇠점 즉 철소(야철지)의 흔적으로 판단된다.(점등 좌표 : N 34° 48′ 56.9″, E 126° 31′ 35.9″)

37)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 235쪽.

38) 2006.11.26 제보자 ; 임이택(남 90세, 해창마을 주민)

39) 2006.12.3 제보자 ; 임채관(남 63세, 해창마을 주민)

40) 변남주, 2010,『전근대 영산강 유역 포구의 역사지리적 고찰』,목포대 박사학위논문, 81~82쪽의 내용으로 수정하였다.

41) 『전라우수영지』전라우수영 연혁.

42) 자세한 내용은 김경옥 외 2004, 『고하도』, 목포문화원 참조.

43)『순조실록』 권31, 30년(1830) 11월 10일(갑자).

44) 務安에 있는 唐串을 羅州의 唐串倉이라 한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무안 당곶으로 이주하여 오기 전 고하도가 나주목에 속하였던 것과 관련하여 이설 후에도 계속하여 나주목에서 관할하였던 것으로 추론된다.  

45)『輿地圖書』, 全羅道, 務安縣, 鎭堡條. “唐串鎭 在縣南五十里萬曆二十五年 丁酉之亂忠武公 李舜臣統舟師 大破日本賊於鳴梁之口 此都廳初設於羅州高下島 順治四年移設 於本縣唐串 召集募軍備置軍餉 以備不虞 別將一色吏一 自統營定送使之糶糴.”

46)『務安縣邑誌』, 鎭堡條. “唐串鎭 在邑南六十里 防船二隻 募軍一百名 軍餉會外 米四百八十七石九斗二升 租三千六百三石八斗三升一合.”

47)『大東地志』, 全羅道, 務安縣, 鎭堡條. “唐串南五十里 宣祖三十年 李舜臣大破倭賊于海南之鳴梁 有都廳 初設 於羅州高下島 仁祖二十五年 移設 于此備儲軍餉置 別將後廢.”

48)『광여도』(규장각 소장, 古 4790-58), 『해동지도』(古大 4709-41), 『여지도』(古 4790-68), 『지승』(奎 15423), 『동여도』, 『여지도서』등에서는 주룡과 목포진 사이에 唐串으로 기록되어 있다.

49)『순조실록』 권31, 30년(1830) 11월 10일(갑자) ;『湖南沿海形便圖』.“統營所屬 邑五十里.”

50) 1722년에 설립된 목포시 고하도에 있는 이충무공 유허비(-近年 又移鎭 於唐串-)는 唐串으로 이전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51) 당곶 위치는 下塘說이 통설이다(고하도 이충무공유허비 현황판 ; 李海濬, 1995, 「목포의 역사」,『木浦市 文化遺蹟』, 37쪽 ; 목포문화원, 2003, 『목포의 땅이름』197쪽 ; 목포대박물관, 2007, 『목포시문화유적분포지도』, 22쪽.)

52) 한글학회. 1982. 한국지명총람 전남편Ⅱ, 148쪽.).

53) 목포문화원, 2003, 『목포의 땅이름』, 212쪽.

54)『備邊史方案地圖』, 註記. “木浦鎭 未方去 60里 在二老村, 統營屬唐串都廳 丁方去 57里 在二老村, 扶之山 丁方去 50里 二老.”

55)『조선후기지방도』에 나타난 務安縣 邑治의 官門과 二老面의 마을까지 거리는 다음과 같다. 南倉(40里), 下塘(50里), 地藏(40里), 甘屯(30里), 新迪(?) 竹田(30里), 靑昑(40里), 雙橋(58里), 山亭(57里), 龍塘(55里), 觀海(52里).  

56) 한글학회. 1982, 한국지명총람 전남편Ⅱ, 149쪽 ; 당꼬마을 제보 : 2008. 11. 22. 장방옥(남, 40년생,  퇴직공무원, 50년부터 용당거주.), 이점임(여, 1924년생, 제일고 체육관 샘아래에서 18세에 시집와서 계속 거주.), 이광자(여, 43년생, 중학교 2학년 때 왕자회사 아래에서 조개를 캤으며 배가 들어왔다고 증언.)

57)『戶口總數(1789)』의 二老村面에 나오는 32개의 마을은 무안읍을 기준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나열이 되는데, 맨 마지막이 木浦里이고 다음이 唐串里, 龍塘里이다. 이 순서는 서로 인접한 곳을 의미한다.  

58)備邊司方案地圖』, 註記. “統營屬唐串都廳 丁方去 57里 在二老村.”

59) 이와 같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당곶창을 드나드는 병선이나 짐배들은 흘수가 커서 동쪽 갯벌 위로 직진하는 것 보다는 목포진 앞을 통과하는 갯고랑이 안전한 항로였을 것이다. 또 唐串倉에 보관된  군량미를 보전하는데, 목포진의 안쪽에 위치하여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唐串 마을의 진고개 일대는 암반이 널리 깔려있다. 게다가 갯고랑과 접지하는 곳은 弓形을 이루는데, 지금의 제일고 정문에서 남서쪽에 해당한다. 그 둔덕에는 현재 신축 체육관이 있으며 그 하단에는 옛 샘 2곳이 있었다(N 34° 48′19.2″, E 126° 23′43.7″). 작은 빌라가 지어지면서 현재는 매립되었다.

60) 『고려사』에 전하는, 제주에 이르는 세 경로는 다음과 같다. “①羅州에서 출발하여 직행으로 務安 大堀浦, 靈巖 火無只瓦島, 海南 於蘭梁을 거쳐 7주야 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게 된다. ②해남현에서 출발하여 三寸浦를 따라 가다가 巨要梁과 三內島를 쳐서 추자도에 이르게 되며 ③탐진에서 출발하여 軍營浦를 따라 가다가 高子島), 黃伊島, 露瑟島, 三內島 등을 거쳐 3주야 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게 된다. 제주로 가는 이 3개의 항로는 모두 이 섬(추자도)을 거쳐서 斜鼠島, 大火脫島, 小火脫島 등을 지나서 제주의 涯月浦나 조천관에 닿게 된다.”  

61)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 403쪽.

62) 명량해협의 남쪽에 ‘명량’과 ‘울때’라는 자연마을의 지명만이 남아 있다.

63) 2006. 11. 19 제보자 ; 임만봉(남, 노인회장, 75세, 임치마을 주민)

64) 『고려사』 권57 지제11 나주목 영광군  함풍현조.

65) 해제 권농방어사와 임치진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66) 『高麗史』 권57 지제11 영광군조.

67) 『高麗史』 卷 1, 太祖世家 1 즉위전조,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鹽海縣에 이르러 견훤이 吳越에 보내는 배를 나포하여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여 흐뭇하게 포상하였다.” 

68)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조.

69) 이산포 포구 : N34°55′48.9″ E126°31′03.5″

70)『여지도서』․『대동지지』․『무안현읍지』와 『지승』․『비변사 방안지도』․『광여도』․『대동여지도』.

71)『輿地圖書』, 全羅道, 務安縣, 山川條.

72)『大東地志』, 全羅道, 務安縣, 津渡條. 

73)『輿地圖書』, 全羅道, 務安縣, 庫舍 條에는 “船所倉은 현남쪽 15리에 하고 있다”하였지만 『大東地志』, 倉庫條 에서는 “舡所倉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또『무안현 읍지』, 倉庫條에서는 “船所倉은 邑南邊二十里 있으며 待變亭이 있다” 하고 있다. 이 기록들에서 선소에 있다는 待變亭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으나 선소창은 水軍庫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74) 息影亭은 1630년에 閑好 임 연 (1589∼1648)이 지은 정자이다.

75) 務安郡, 1987, 『마을 由來誌』, 211쪽.

76) 이산리의 ‘梨山’을 ‘아름다운 배꽃이 핀 산’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산리의 별칭이 ‘배뫼마을’인 것을 볼 때, ‘배를 매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배맨마을’로 불리다가 ‘배뫼마을’로, 다시 한자 지명화 ‘매뫼→梨山’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77) 주변환경을 살펴보면, 이산마을의 북․서․동쪽은 100m내외의 낮은 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영산강에서 200여m 북쪽으로 내만한 강정마을 앞은 해발고도가 2m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조수의 영향을 받는 갯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논으로 변했으나 이산골 계곡에서 흐르는 냇고랑을 따라 뱃길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78)承政院日記』, 숙종 34년(1708) 2월 4일 (신사). “-전략- 雖以已行之事言之, 務安縣戰船, 自前在於本縣甫吉浦, 地勢之不便, 與羅州大浦一般矣。曾於乙卯(1675)年間, 巡撫御史 李世華, 因土兵等狀, 具由啓聞, 移置於本縣石津面, 地形便好, 藏船甚穩, 一日三時, 浮在水面, 一號令之間, 可以發船, 此亦已驗之明效也。-후략-”

79)『備邊史方案地圖』 註記. “本縣戰船巳方去 28里 戰船1 隻兵船 1隻 伺候船 2隻 在石津面 軍兵 224名(代將旗牌官 6人 軍 218名), 軍餉桓留庫穀 123石 在戰船倉 巳方去 20里 石津面.”

80)『地乘』, 務安縣 註記의 205명의 구성은 戰船代將 1인 吏戰船旗牌官 4, 兵船將 1, 射夫 18, 砲手 24, 火砲敎師 10, 左石捕盜 2, 舵工 1, 格軍14, 伺候船舵工 2, 格軍 8, 舵工 8, 船直 2, 能櫓軍 100, 兵船射夫 10 , 砲手 10인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81) 강정마을 군기 창고터로 비정되는 곳에서 철모가 출토된 사실과(傳 철모출토지 : N34° 55′51.2″ E126° 30′59.2″ 현재는 대밭이다.) 영산강변에 있는 강정포구를 매립할 때, 고선박의 하체를 그대로 두고 덮었다고 한다(제보 : 2006. 11. 26, 김상오(남, 1930년생, 이산리 555, 이산마을 토박이), 임석배 (남, 1923년생, 이산마을 토박이)).

82) 務安郡, 1987, 앞의 책, 211쪽.

83)『고려사 57권』 지제11, 나주목, 영광군,  함풍현조.

84) 한글학회, 1982 『한국지명총람 14』, 무안군편.

85) 2006.11. 25, 제보자 ; 박병무(남, 85세, 남악리 주민), 김국현(남 56세), 권풍작(남 66세). 주로 박병무 님이 제보하였다.

86) 2006. 11. 25 제보자 ; 박병무

87) 해창마을 주민들은 8차선 도로의 공사시 멸실될 것을 우려하는 2가지가 있다. ① 갈대밭에 묻히어 있는 대형판석 ② 해창의 배들을 묶었던 팽나무인데 이 둘을 마을의 적당한곳에 옮기어 마지막 해창의 유물로 보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11.28 10:00에 권풍작씨가 팽나무는 파서 서울로 옮기는 작업 중이라고 하였다.  

88)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羅州牧, 務安縣條. “越境, 羅州任城 群山 極浦之地, 越縣境五十里, 入于縣南.”  

89) 1906. 9. 24. 勅令 第 49호에 의거 무안군으로 이속되었다. ‘저쪽(범바위의 자방포)은 무안사람들이다’라는 말을 어려서 아버지께 많이 들었다.” “나주 동강에 가서 안동이라면 모르고 해창이라 해야 알았다”라는 이야기는 삼향면 해창마을이 나주 땅임을 알 수 있다. (제보 : 2006. 11. 25, 박병무, 남, 1921년생, 안동마을 주민)

90) 현재 이 나무는 2006년 해창마트 뒤로 도청소재지와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8차선 도로공사 중 동쪽으로 50여 미터 정도 이동되어 이식되었다(제보 : 2006. 11. 28, 권풍작,남, 1940년생, 해창마을 주민).

91)『羅州牧邑誌』, 倉庫條.

92)국역비변사 등록』, 광해군 10년(1618) 6월 1일

93)輿地圖書, 全羅道, 靈巖郡, 倉庫條. 

94)『錦城邑誌』, 倉庫條 

95)『비변사방안지도』, 나주지도.

96)『輿地圖書』全羅道, 羅州牧, 田稅條. “元米 二千二百四十一石十四斗 太 一千一百六十三石六斗一升 位米 四百十五石五升 太 一百五十九石一斗 三手糧米 一千一百十一石八斗二升隨歲豐歉或減或增二月 收捧海倉 三月裝發 自羅州榮山浦 忠淸道 元山鎭前洋 京畿 金浦前洋 達于西江二十日程.”  

97) 2006.11.25 제보자 ; 박종철(남, 78세, 용포 토박이), 장을남(남,71세, 용포 토박이)

98) 목포역~학교역 공사기간: 1910.10~1913.5.15.

99)承政院日記』, 영조 23년(1747)3월 13일 (계묘). “-전략-且其戰船, 當初泊在於三鄕面注乙浦前洋矣。以其注乙浦之不合, 六七十年前, 移迫於竹浦, 所謂注乙浦。卽獐項浦後岸咫尺之地也。-후략-”

100) 한글학회 , 1982, 『한국지명총람』 14, 174쪽에는 “고종32년 무안군에 편입되었다가 1910년 목포부로 조정, 1914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후정, 용계, 평전, 덕치, 추치, 신동, 와동, 장항, 극배, 이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포라 하였다.” 용포지명은 1914년 등장한 새로운 마을 명임을 알 수 있다. 갯가 마을은 천박시하는 풍토가 있기 때문에 마을명을 새롭게 바꾼 예가 많으며 촌로들은 본 지명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

101) 제보 : 2008. 11. 10, 김남현 (남, 1932생, 용포마을 이장 삼향면 노인회장), ‘주래용포’ 호칭은 제보자의 부인이 결혼하려 할 때 친정의 마을 어르신한테 “주래용포로 시집을 가려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02) 삼향면 용포리 3구 용포마을은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오룡산과 서북방에 덕룡산이 둘러있어 용혈을 나타낸다. 포구가 있었으나 80대의 주민들도 직접보지 못하였고, 단지 용포마을 앞이 바다였다는 사실만 전해들었다고 하였다.

103) 목포역~학교역 공사기간은 1910. 10~1913. 5. 15까지이며 『구한말지도』에 이미 용포 앞 제방이 막아져있다.

104) 제보 : 2006. 11. 25, 박종철 (남, 1926년생), 장을남(남, 1935년생) 서북쪽에는 갯가~오룡산 당산 쪽으로 세 아름 크기의 팽나무가 수십 그루가 줄지어 심어져 있었는데 20여 년 전에 고목이 되어 모두 쓰러지고, 현재의 몇 그루는 작은 나무가 다시 자란 것인데 제일 하단에 있는 나무들은 닻줄목이라 하였다.

105)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 150쪽.

106) 2006.11.25,제보자 ; 손전식(남 69세) 이계봉(남 72세)

107) 2006.11.26,제보자 ; 김상대(남 79세, 노루목 마을의 토박이)

108) 1917년에 제작된 지도에 이미 장항포 제방이 막아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109) 2006.11.26 제보자 ; 이만종(남 69세, 도장포 이장)은 총각시절에 들은 이야기라 하였다.

110) 務安郡, 1987,『마을 由來誌』, 83쪽.

111) 務安郡史編纂委員會, 1994『務安郡史』, 1622쪽.

112) 2006.12.3 제보자 ; 임채관(남 63세, 해창마을 주민)

113)『大東地志』, 全羅道, 務安縣, 山水條. 

114)『新增東國輿地勝覽』, 卷 36, 全羅道, 務安縣, 山川條. 

115)『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양주조.

116)『務安縣邑誌』山川條 

117)『팔도지도』, 규장각 古4709-23.

118)『대동여지도』.

119) 두령량의 상사바위에는 나주의 앙암바위와 유사하게 황낭자와 추씨총각이 못 다한 사랑으로 구렁이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무안군, 1987, 『마을유래지』, 1081쪽.).

120)『세종실록』 권46, 11년(1429) 11월 11일(계축).

121)『世宗實錄地理志』, 全羅道, 羅州牧, 務安縣條. “大川一, 頭靈梁 在縣南西崖, 石山屹立臨江, 是爲 龍津溟所, 春秋, 其官致祭.”

122) 제보 : 2006. 11. 26, 김상대(남, 79세, 삼향면 노루목 마을 토박이)는 어렸을 때 상사바위의 굿을 보러 갔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한다.

123) 2006.11.26 제보자 ; 김행진(남 62세, 돈도리 마을 주민)

124) 2006.11.26 제보자 ; 배석호(남 70세, 마을주민)

125) 2006.11.26 제보자 ; 배성옥(남 70세, 마을주민)

126) 민박과 효수차 (원료: 산야초 ) 된장을 생산하는 농원이나 운영이 되지 않고 있는 농원이다.

127) 한글학회, 1982『한국지명총람 14』무안군 편

128) 마을 주민 김성화(83세) 배쌍용(72세) 박기주(72세) 등은 사창터를 알지 못했다.

129) 2006.12.10 제보자 ; 김용만(남 63세, 7살 무렵 父를 따라 금캐러 영광에서 성포로 이주)

130) 2006.12.9 제보자 ; 최후길(남 52세), 이영미(여 40세), 오육월(여 무진년생) 김복례 (여, 88세)

131) 務安郡史編纂委員會, 1994『務安郡史』, 1612쪽.

132) 2006.12.9 제보자 ; 전보근 (남 75세) 박영효(남 73세)

133)  木浦大學校博物館· 務安郡, 1986『務安郡 文化遺蹟』263쪽 - “ ‘장부’는 농사지을 때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인 ‘장보’에서 유래한다”

134) 2006.12.9 제보자 김제이(남 74세) 박남길(남 81세)

135) 木浦大學校博物館· 務安郡, 1986『務安郡 文化遺蹟』, 263쪽.

136) 2006.12.10 제보자 ; 이서자 (남 74세)

137) 2006.12.10 제보자 ; 신개태(남 61세)

138) 2006.12.10 제보자 ; 배납실(여 50세)

139) 2006.12.10 제보자 ; 김충용( 남 47세, 당시 어민)

140) 어판장은 대통령지원사업으로 마을의 울력으로 지었는데 등기는 간척주인 최상옥으로 등기 되어있다.(제보자)

141) 가마는 마을의 대밭에 있으며(N34°59′22.8″ E126°25′21.3″,) 60년대까지 운영이 되었다.

142) 2006.12.17 제보자 ; 모성옥(남 51세)  

143) 2006.12.17 제보자 ; 정호길(남 73세)

144) 2006.12.17 제보자 ; 정호길(남 73세)

145) 木浦大學校博物館 · 務安郡, 1986『務安郡 文化遺蹟』

146) 木浦大學校博物館,務安郡·韓國道路公社,1997『務安良將里 遺蹟』, 21쪽.

147) 木浦大學校博物館 · 務安郡, 1986『務安郡 文化遺蹟』, 64~69쪽.

148) 木浦大學校博物館,全羅南道·務安郡,1991,『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木浦~務安間 高速道路-』, 22~23쪽.

149) 고막교 서쪽의 원고막 마을에는 고려~조선시대의 고막원터가 있으며, 고막교는 고려말 고막대사가 놓았다고 전한다. 다리 옆에 있는 고막대사비는 원고막 마을에 있으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하다.

150)『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全羅道, 羅州牧, 橋梁條. “古幕橋 在古幕浦.

151) 제보 : 2008. 7. 30, 금정 노기태(남, 1932년생) 금산 전삼목(남, 1932년생), 송헌 김영호(남, 1937년생) 남촌 정순우(남, 1937년생) 모두 척포마을 토박이로 1980년대 초반까지 어업에 종사했음. 장소는 척포마을 노인정

152) 木浦大學校博物館, 1986,『咸平郡 文化遺蹟分布地圖』, 192쪽.

153) 진례진: 북쪽 함평 N34°59′05.6″, E126°34′57.4″, 남쪽 나주 N34°59′03.5″, E126°35′04.6″

154)『金城邑誌』, 津渡條.

155)東國輿地志』, 全羅道, 羅州牧, 樓亭條에서 思菴 朴淳(1523~1589)의 別墅라고 하나 烟派는 박순의 兄은 朴漑(1511~1586)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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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1 )
돼지 고기 성분이 생쥐와 같답니다 세균이 인체내에 들어가면 절데 죽지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돌아다니면서 번성을 한답니다 . 소고기 세균은 인체내에 들어가면 배속에서만 가만히 있다가 자연히 죽는답니다 돼지기름 소기름을 포화지방산 기름이라고 합니다 포화지방산 기름은 인체내에 들어가면 혈관속 근육속 몸속에 구석구석 쌓여서 쌓인기름에서 염증이 유발이 되어서 암으로 전이가 된답니다 . 면역력이 없으면 암덩어리는 눈덩이처럼 삽시간에 부풀고 면역력이 있으면 암덩어리는 삽시간에 작아져서 자연히 없어진답니다 올리브나무는 천년을 살면서 면역력에는 최고로 좋답니다 서울대 교수님께서 올리브장수 백세책을 쓰셨습니다 .경기도 군포시 맘스유약국에서 돼지고기 성분에 대한 내용글을 보내주셨씀니다 .올리브잎에 효능은 심장병에 탁월하며 혈관확장 상처치유 통증완하 각종 암병고침 혈당조절 치아세균 죽임니다.몸속에 쌓인 포화지방산 기름을 탁월하게 녹여 배출을 시킴니다 들기름도 몸속에 쌓인 기름을 탁월하게 녹여 배출을 시킴니다 제가 살인적인 통증으로 배가 아플 때 올리브유기름이 통증을 없애 준다해서 통증이 멈출때까지 먹은 양이 30숫가락입니다 느끼해서 천연박하사탕과 시원한 물과 함께 먹었씀니다 올리브유 기름은 피부를 건강하게 하면서 면역력을 탁월하게 합니다 .돼지고기와 생쥐와 성분을 말할 때 쓰는한자 이룰성 成 나눌분分 성할성 盛 돼지고기와 생쥐성분할 때 스는한자는 이룰성자를 씀니다 . 이유는 돼지고기 피는 연합니다. 소고기피는 탁하면서 진합니다.돼지고기 피는 세균이 번성하기 좋습니다 돼지고기 세균은 아메바세균입니다 식중독 세균입니다 tv 방송에서 보았슴니다 식중독세균은 모체에서 분리를 해서 새끼를 많이 번성하는걸 진한 혈액속에서는 분리를 못하며 자연히 작아지고 움직이지 못합니다.
혈액이 물처럼 연하면 기운이 없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친정집 외양간 돼지막에 생쥐가 다니는걸 보았씀니다. 돼지 발굽 소발굽을 통해서 세균이 스며든다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있씀니다. 온난화가 심해지면서 돼지몸속에 세균은 더욱 강해지고 번성을 많이 한답니다 tv뉴스에서 보았씀니다 식중독 세균은 절데로 안죽는답니다 . 저희 친정 사촌 작은아버지께서는 병든 소고기 점심때 끌여 드시고 식중독 유발이 되어서 병원에 가셨다가 저녁때 돌아가셨씀니다.
뉴스에서 보았씀니다 한강 근처 하수구 전화조 속에 두남자가 들어가서 정화조 청소 하다가 독까스 마시고 즉사 했답니다.독까스를 한번에 많이 마시면 즉사하고 양에 따라 오래살면서 노화가 오기도 합니다. 돼지고기 자주드시면 인체내에도 병이 많이 빨리 유발이 되어서 사망하겠지요 돼지고기 세균이 인체내에 많이 서식하고 있으면 뇌혈관 온몸속에 혈관등에 열이나고 독이 퍼져서 혈관이 약해지면서 미세혈관은 말라서 한꺼번에 없어진다는걸 ebs매주금요일밤 9시 50분 명의 방송에서 보았씀니다. 혈괌이 마라서 없어지면 혈액순환이 안되면서 뇌 눈 창자 온몸뼈 관절 근육등으로 혈액이 스며들지 못하고 망가지고 퇴행된다라고 명의방송에서 보여주었씀니다.혈관속에 포화지방산 기름이 쌓이면 혈액순환이 안되면서 뇌 눈 창자 관절 근육 온몸뼈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망가지는걸 명의 방송에서 보여주었씀니다 .
망가진 부분으로깨끗하고 건강한 혈관을 통해혈액이 스며들면서 정상으로 재생이 되는걸 보았습니다.소뼈를 푹삶으면 뼈속에 영양분이 빠져나오고 구멍이 숭숭하는걸 볼수있씀니다
사람몸속에 뼈에도 독열이 퍼져서 뼈에 열이 나면 뼈속에 영양성분이 다빠져서 대소변으로 배출이 되버리고 구멍이 숭숭하는걸 골다공증이라고 합니다. 온몸속 머리에서 발끝까지 뼈속에 골다공증에 걸리면 디스크 뼈가 약해지면서 디스크가 튀어나오고 지탱을 못하게 되면서 협착증도 함께 걸림니다 . 뇌로 혈액이 스며들지 못하면 침해가 걸리고 단기기억상실증인 알츠하이머가 걸리고 깜박잘까먹는 사람이 되면서 이런사람이 침해 걸릴 확률이 높답니다 통
관절이 망가지고 퇴행되며 창자 간 췌장은 썩어서 암병이 완전히 90프로가 진행이 되어도
2) 증이 없어서 모른답니다 완전썩어서 제거수술해논걸 보았씀니다.돼지고기 세균은 삶거나 굽거나 고열로 오래 푹 고아서 삶아도 절데로 안죽습니다 본래 돼지고기 세균은 열이 많이날수록 강해지고 번성을 더 많이 한다해서 온나화가 심해져서 날이 더워지거나 하면 식중독 조심하라고 뉴스에 나옵니다 . 돼지고기 세균은 인체내에 건강한 혈액이 많이 생겨야 자연히 죽습니다. 여덟팔 八 칼도 (-刀) 돼지 통 한 마리를 칼로 꼭 이런방법으로 만 여덜토막을 잘라서 실험을 했다는 말입니다 돼지 앞다리 우측 1토막 좌측1토막 돼지 뒷다리 우측1토막 좌측1토막 돼지 배부분 우측 2토막 좌측2토막 합이 여덜토막 자르는걸 팔각을 떳다라고 합니다

생쥐 한 마리를 돼지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팔각을 떠서 각부이마다 실험을 해 보았더니 고기맛과 기름맛 국물맛이 돼지와 생쥐가 똑같다 고기에 결이 각부이마다 똑같다는 말을 성분이 똑같다라고 합니다. 저희 친정동네 이금애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금애 언니 아버지 벙어리이신데 금애언니 아버지께서 생쥐를 잡아서 금애언니한태 구워 주어서 먹었다라고 저한태 금애 언니가 말했씀니다. 금애 언니는 숨쉴때마다 그르렁 그르렁 하면서 숨쉬기 힘들어 했씀니다
또 삐쪅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아서 걸어다니는것도 힘들어 했씀니다
돼지기름이 인체매에 많이 쌓이면 뚱뚱하게 됨니다 . 기름을 빼고 드시면 세균만 인체내에 남아서 혈관을 말려서 혈액이 근육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삐쪅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아서 기운이 없습니다.그리고 인체내 뼈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골다공증에 유발이 됨니다
과일 밀가루 음식 해삼물 생선등을 드시면 면역력이 생김니다 , 면역력은 과일을 먹으면 기운이 나는설 말합니다. 과일 포도당이 최고로 기운이 남니다 .
위 危 급急 쌀포(勹) ) 쌀밥을 먹으면 몸에 열이나면서 미세혈관이 온몸동시에 없어지면서 혈액이 망가진 뼈와 근육 창자 등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망가지고 퇴행된부이가 정상으로 재생이 안됨니다 ebs매주 금요일 명의 방송에서 보았씀니다 온몸속에 미세 혈관이 말라버리면서 없어지는 것을 또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서 탄수화물로 변해서 탄수화물이 포도당으로 변한답니다 포도당이 망가지고 퇴행된 뼈와근육속으로 스며들면서 정상으로 재생이 되는걸 보았씀니다 그러나 혈관이 말라서 없다거나 막혀 있으면 포도당은 대변 소변 으로 배출되버리고 아무 효능이 없습니다 .벼화禾 ( 丿 )삐침삐침에 뜻은 하늘에서 태양열이 굴절되어서 내려와서 열을 나게 한다 나무木이것이 나무를 풀과 라고 합니다 벼껍질로 기름을 짜서 공업용으로 쓰답니다 쌀이 그만큼 뜨겁게 열을 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 바위엄 ( 厂 ) 암병은 바위 와 돌이 된답니다. 가수 송대관씨 어머니께서는 심장이 살인적인 통증으로 아파서 수술을 하셨는데 심장에 다이아 몬드와 같은 돌이 많이 박혀 있더랍니다.뱀 사(巳) 뱀귀가 암병을 유발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 뱀귀를 영어로는 사탄악마 라고 부르며 한문으로는 속일궤 詭 속일휼譎 악마라고 부름니다.

쌀포 勹 . 彐(돼지머리계 ) . 마음심心. 돼지머리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면 심장병이나 암병이 유발이 된다는 뜻입니다 , 그래서 위급한 상황이 온다 .

속일궤 .부수 . 말씀언 言. 뱀귀가 말을 하는데 뱀귀는 속이는 말만한다 .勹 쌀포 속일궤 한자속에 부수로 들어있는 쌀포에 뜻은 쌀을 올리고 무당집 절집에 빌면 복준다라고 뱀귀가 속인라는 뜻입니다 불교방송에서 보았씀 어떤 부부가 살면서 쌀장사를 하던중 남편은 쌀되박 깍
3)아 팔고 부인은 수북히 주고 팔고 살다가 노년에 영감님 먼저 돌아가셔서 상방앞에 밥지어 올3) 려놓고 며느리가 비는데 아들눈에 밥그릇에 뱀귀가 있어서 아들이 죽였는데또어디에서 와서 있더니 죽일려고 하니 할머니께서 못죽이게 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살괴박 깍아 팔다가 뱀귀되었다. 그후 상방을 치우고 뱀귀가 어디로 갔나 보니 쌀뒤지 속에 있더랍니다.뱀귀는 쌀위에서 살더래요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 바위엄厂. 뱀귀가 암병을 걸리게 한다.는 한문 부수입니다 암병은 돌이되고 몸이 굳어서 바위처럼 됨니다tv에 보면 몸이 굳어가는 사람 나옵니다. 올리브유나 올리브잎과 함께 만든 약을 먹으면 몸이 굳어가게 하는 뱀귀를 죽일수 있씀니다. 올리브에 효능은 혈관확장 포화지방산 녹여배출시키는데 탁월합니다.포화지방산 기름은 인체내에 들어가면 혈관속 몸속에 쌓이는 기름입니다 불포화 지방산은 인체 내에 들어가면 쌓이지 안고 쌓인기름을 녹여서 배출시키는 기름이 바로 들기름 .올리브유 기름. 입니다 . 두가지 기름으로 볶음반찬 이나나물 많이 무쳐 드십시오 외국에 장수하는 나라에서는 쌀음식을 안먹습니다 .
혈당조절 .포도당으로 변함. 백혈병고침. 만가지 암병고침 치아세균죽이는 효능.통증완하 효능. 巳 [뱀 사] .뱀귀가 암병을 유발을 시킨다 병질암자병 癌들어 있씀니다.
제꿈에 친정집 담밑에 까만 구렁이 세 마리가 엉겨있더니 한 마리가 기어가더니 다리네개가 쑥나오더니 돼지로 변해씀. 제꿈에 황소가 친정동네 논에 서있더니 펑하더니 사람으로 변하더니 사람이 스르륵 하더니 뱀으로 변했씀 꿈에 황토길 회향목나무 가로수길에서 늙은 노란 호랑귀가 달리더니 새끼호랑이로 변하더니 옆길로 달리더니 늙은 까만 돼지로 변했씀.
꿈에 제목구멍 안에 옷핀이 끌러진채로 있더니 이꿈을 꾼날 열이 나고 몸이 아파서 해열 진통제를 설사약 합이 18개를 먹고 살았씀 28개를 먹고 열이 내리고 걸어다닐수 있게 되었씀니다
약 藥 . 풀초 艹 . 夭-어릴요.흰백 白.나무木 . 약은 약나무와 약초를 끌여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또 어릴요자에 뜻은 배속에 태반속에 아이를 끌여서 피를 하얗게 만들어서 알부민 포도당 주사와 알부민 먹는약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제가 약사님께 물어보았슴니다 알부님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고 태반으로 만들었답니다.
제가 딸아이를 낳았을 때 산부인과 의사선생님 말 태반은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쪽으로 놔두어라 말하셨씀니다. 의사들은 피를 혈액 .포도당. 적혈구라고 부름니다.
제꿈에 칼도 보았씀니다. 꿈에 스텐레스 쇠로 만든 골프채 공치는 부이로 흙을 파더니 사람손으로 변해서 흙을 팟습니다 , 꿈에 제가 사람목아지를 돌려서 뜯어서 속을 보니 하얀 돼지기름이 가득차있고 돼지껍질로 되어있었슴니다..사탄악마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으면 인체내 들어가서 돼지기름과 껍질을 먹습니다. 제가 상계동 살 때 gs 마트에서 장을 봐오는데 갑자기 심장이 찢어지는 느낌과 동시에 목이 바삭바삭타면서 머리위로 열이 확오르면서 고개가 떨구어 지면서 쓰러질려는 찰나에 제가 만든 올리브잎 구기자. 감초 . 당귀. 박하잎. 황기. 헛깨열매 넣고 끌인약물에 포도1 .머루. 주스내려 희석해서 만든약을 먹고 걸어서 집에와서 뒷날은 서너시간동안 심장을 찢어데는데 너무 오랜시간을 찢어데니 약물을 마셔도 심장에 기운이 없어서 죽을것같을 때 인삼을 귀두째 씹어먹었더니 신기하게도 심장에 열이 내리면서 심장에 기운이 났씀니다. 상계동 벽산아파트 살고계신 할머니 갑자기 아침부터 배아프고 설사 구토를 해서 병원에 갔더니 걷은 아무렇지도 안는데 배속에 장이 다 찢어져 버려서 궤메는 수술을 하셨답니다. 그런후 항문으로 대변을 못보게 되어서 변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다니시다가 세균 감염으로 인해 재수술하셔서 대변주머니를 배속에 너었답니다 .이렇게 속에서 찢어
지는 병도 있답니다. 제꿈에 머릿속으로 송충이가 들어가는데 모르는 여자가 후불어서 날렸슴니다. 제꿈에 허벅지에 구더기 송충이가 있더니 살인적인 가려움 유발이 되어서 동이보감에 보았더니 들기름을 솜에 묻혀서 10분문질러라 해서 문질러 보았더니 신기하게도 안가려웠씀
5) 올리브유는 피부면역력을 탁월하게 합니다 들기름과 1:1로 희석해서 문지르면 좋습니다.
창모 무당집가면 삼지창으로 사람몸을 찌르면서 몸속에 잡귀 악귀 는 뱀귀인데 쫏아준다고 속입니다. 빛날경 꿈에 황금구렁이를 보았씀니다 .사람에 대변을 먹고 황금구렁이로 변해서 복준다고 속인다는 뜻입니다
이렇습니다. 여기서 활성산소는 산소가 아니라 방귀 독까스입니다 . 대사과정은 인체내 배속에서 대변이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세포는 사람에몸 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
(노) 老 . 흙土. 사람이 노화가 와서 병들어 죽으면 흙이된다는 뜻입니다 . 삐침 丿. 하늘에 태양열이 내려와 땅에 모든걸 하얗게 태운다. 는뜻인데 사람에 몸속에 독이 퍼지면 독열이 태양열과 같은 온도이다라는 뜻입니다 비수비(匕). 칼을 비수라 합니다 사람에 몸속에 독열이 많이 머릿속에서 발끝까지 퍼져서 스며들면 칼로 자른 듯이 다진 듯이 찢은 듯이 되어서 아파서 노화가 와서 죽게된다 (화) 化. 사람인人 . 비수비(匕) 사람에 몸을 칼로 찢은 듯이 다진 듯이 해서 노화가 와서 단명하게 된다
세종대왕 시절에는 재래식 화장실 근처 흙을 파다가 대포만들었답니다 . 돼지고기 먹으면 노화가 빨리 옵니다.세균이 안죽고 열을 나게 하며 세균이 대변과 합해지면 열이 더나면서
열독이 뇌속으로 스며들면 뇌가 쪼그라들어서 침해가 유발이 된답니다 ebs 매주금요일 밤9시 50분 명의 방송 시간에 보았씀니다 . 또는 눈으,로 스며들면 시력이 저하되어서 실명되고
뼈로 스며들면 뼈속에 열독이 들어가서 골다공증 관절염에 디스크 협착증에 걸림니다
소뼈를 푹삶아서 보면 소뼈에 구멍이 숭숭 나 있씀니다. 사람뼈속에도 열독이 퍼져 스며 들어가면 영양분이 빠져나가고 말라버리고 구멍이 숭숭 나 있는걸 보았씀니다 이걸 골다공증이라고 합니다 .골다공증에 걸리면 허리 디스크 뼈에 영양분이 빠져나가고 디스크가 지탱을 못해서 튀어나오고 합니다 열이 나면서 또 열독이 온몸속에 퍼지면 미세혈관인 실핏줄이 금방 말라버려서 없어지는걸 명의 걸보았씀니다.
디스크 협착증이 유발되는 원인도 명의 방송에서 보았씀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서 탄수화물로 변해서 탄수화물이 포도당으로 변해서 혈관을 통해서 숭환이 되어서 뼈와 근육 살 뇌 창자 속으로 스며들면서 망가진 부이가 정상으로 재생이 되는것도 보았씀니다.혈관이 말라서 없다거나 혈관속에 기름이 쌓여서 막혀 있다거나하면 포도당이 순환이 되지못하고 망가진 부이가 정상으로 재생이 되지안는다는 것도 보았씀니다 ,
창자가 썩어서 간 췌장등을 제거수술해논것도 보았씀니다. 암덩어리인 돌을 수술해서 꺼내논걸 보았씀니다 . 간이나 췌장은 90프로 백프로 썩을때까지 통증이 없답니다. 그러다 모르고 죽게 된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 매일 포도를 한송이씩 씨는 먹지말고 먹으면 몸에 참좋답니다.증이 치유되고 푹페인 부이는 정상으로 재생이 되어있었씀니다, 외국에 장수하는 나라에서는 주식이 과일 밀가루빵을 먹고 그다음 해산물먹고
육고기는 장조림을 만들어서 약간만먹는답니다 . 육고기는 양고기효능은 젊어지는 효능 있씀니다. 꿩고기는 붓기를 빼주고 염증을 치료한답니다 . 메추리 고기는 검은 머리가 나는 효능이 있답니다. 돼지고기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님니다 옛날에 가난했을 때 먹을것이 없을 때 다른설탕은 석유추출물은 백세장수 식품이라고 tv백세장수 프로에 나왔씀니다.. 로 만든다고
먹은 더러운 것입니다 .밀가루는 침해 예방된다라고 tv방송에서 실험을 했습니다.사탕수수설탕

귀한말 몇자적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다 함께 읽으십시오.
a) tv에 나놨씀니다,미원은 사탕수수설탕과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토마토. 다랑어. 양파를 끌여서 만들었씀니다 양파를 너무많이 너으면 느끼합니다.
미원은 인체내에 아주좋습니다.백세장수 식품입니다. 사탄악마들이 못먹게 합니다 본래 사탄악마들은 암병을 유발을 시키기 때문에 또는 돼지고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귀에 말들리게 해서 돼지고기 좋다라고 속이는 말을 하고 협박해서 암병에 안걸리게 하는 음식은 못먹게 합니다 . 제가 자다가 가슴에서 불이나서 일어나면서 보니 남자사탄악마가 제 가슴에 에누워서 몸을 흔들면서마찰을 일으키고 있었씀니다 저희 친정에 집안 조부모 되는 두분 께서는 어
릴적부터 귀신이 보이고 들리고 해도 농사짓고 장사하다가
돌아각가씀니다 귀한말 몇자 적었씀니다 .주변에 많은 분들과 다 함께 읽으십시요
거북귀 龜 彐(돼지머리계) 부수가 두 개 들어 있씀니다.

뜻을 해석하자면 돼지고기 먹으면 거북이 꿈을 꾸고 고열이 나면서 백혈병에 유발이 된다는 뜻입니다 . 제가 에전에 돼지고기 먹을 때 꿈에 거북이가 제 품속에 있는 꿈을 꾸고 고열이 나기 시작했씀니다 .또 거북이가 옆에 있는꿈을 꾸고 고열이 나면서 머릿속에 기운이 없어서 죽을 것 같았씀니다 . 대종약국 아저씨 말씀 백혈병은 고열이 나면서 피를 하얗게 끌여서 흰백(白)자써서 백혈병이라고 한다. (丿 )삐침 에 한자 해석뜻은 하늘에서 태양열이 땅에 내려와 땅에 모든걸 태워서 하얗게 재가된다는 뜻입니다 . 날일 (日 ) 부수는 태양을 본떠서 만들었답니다. 백혈병은 고열이 나는 온도가 태양열과 같다는 뜻입니다.
백혈병을 고칠려면 적혈구가 인체내에서 백혈구보다더 많으면 적혈구가 백혈구를 잡아먹고 완치가 된답니다. 의사들은 혈액을 포도당 또는 적혈구라고 부름니다.적색은 빨간색입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위장에서 탄수화물로 변해서 탄수화물이 포도당으로 변한답니다. 백혈병을 고칠려면 올리브잎을 끌여드십시오, 올리브에 효능은 백혈병고침 혈관확장 혈당조절 포도당으로 변함 상치유 치아세균죽임 각종 만가지 암병을 고침 올리브잎을 2리터 생수 1병에 30개정도 넣고 끌여서 이물에 커피를 타서 드십시오. 돼지고기는 음식이 아님니다.
커피는 원두 콩두자 쓰는 콩입니다. 콩은 몸에 좋습니다. 암병고치는 효능이 있씀니다.
제가 살인적으로 배가 아파서 올리브유를 30숫가락을 천연박하사탕과 함께 먹었더니 통증이 멈추었씀니다. 올리브유에다가 닭고기를 튀겨서 드십시오 볶음반찬 만들어 드십시오,‘
닭고기에 효능은 외우기를 잘하게 합니다. TV방송에서 보았씀니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시험보면 전과목이 다 백점을 받는 데 이아이는 매일 닭고기 먹는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하시길 닭고기는 외우기를 잘하게 하는 효능이 있답니다.
이세상에는 곳곳에 사기꾼들이 많습니다 아닌 의사선생님들도 있씀니다.
돼지고기가 인체내에 좋다라고 먹으라는 의사 요리사는 공부를 제데로 안한사람이여 했어도 병을 키워서 돈벌어먹을 요량으로 제데로 안가르켜 주는 사기꾼 의사선생들입니다.
제가 부산에 살 때 심장에 열이나서 인삼이 안맞다라는 한의사도 있었씀니다.
그런데 제가 심장에 열이 많이 나면서 찢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쓰러질려할 때 인삼을 먹었더니 신기하게도 심장에 열이 내렸씀니다.TV에서 실험했슴니다 인삼을 산악자전거 타고 다니
텔레비전에서 보았씀니다. 어떤 초등학생일 매일 닭고기를 먹는데 시험보면 전과목 다 백점받는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 닭고기에는 외우기를 잘하는 효능이 있답니다 저도 머리가 자주
아파서 잘 까먹습니다.저도 매일 닭고기 먹고 안까먹습니다. 또 밀가루 음식을 매일 먹으면서 안까먹고 잇씀니다 머루 포도 야채등과일을 매일 먹고 있씀니다

b)제가 다리가 아파서 서서설거지도 못하고 하루에 약을 10개넘게 먹다가 포도를 한송이 먹고
약을 안먹고 걸었씀니다. 동이보감에서 보았더니 머루로 입안 염증유발된부이를 문지르면 좋다해서 문질러 보았더니 하룻밤자고나니 염증이 없어졌습니다

올리브잎은 당진 올리브농장에서 팝니다 인터넷 들어가면 전화번호 있씀니다 . 010 8366 0343
미원은 천연재료를 끌여서 만들었씀니다 사탕수수설탕과 멸치 다시마 양파 토마토 다랑어 등입니다 그런데 화학 조미료 할 때 화자를 노화 할 때 화자로 잘못썻씀니다
그래서 안좋다라고 사람들이 인식을 하고 있씀니다 미원에 재료를 보면 사탕수수설탕은 백세장수 식품이라고 tv방송에 나왔씀니다. 다른설탕은 석유 추출물로 만들었다라고 tv방송에 나왔씀니다. 미원에 재료는 노화 와는 관련 거리가 아주 먼 재료만 이용해서 만들어졌씀니다.극장에서 파는 팝콘도 석유추출물을 이용해서 만들어서 팝콘 튀기는 직업을 삼십년 하신분께서는 폐질환이 안좋아져서 숨쉴 때 산소호흡기 이용해서 숨쉴수 있답니다 기존에 철학정치가 그런 음식들을 만들게 세종대왕과 같은 달나라귀신인 사탄악마들과 천사들인태양신이 만들게합니다.
제 태몽은 외가 큰논에 어마어마 하게 큰 용신이 있었으며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 올라갔더니 사람사는 동네가 있었으며 빨래터에서 포르스름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으며 모르는 여자가 여기는 은하수골이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성경에 보면 오얏이자를 나열해서 파자로 써놨으며 나무목 아들자 이렇게 쓰면 파자라고 합니다





귀한말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다 꼭읽으시고 많은 분들게 전달 하십시오
당뇨병 糖 엿당 .한자에 부수 米 쌀미. ( 厂 )바위엄 彐돼지머리계.- 囗입구 로 해석하며 에워싸다라고 해석합니다 . 쌀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피가 부족해서 당뇨병에 유발이 된다는 뜻입니다 . 돼지고기를 드시면 돼지기름이 혈관속에 쌓이고 근육속에 쌓이면서 혈액순환을 막아서 혈당이 소변으로 배출이 되면서 피가부족해서 기운이 없는 저혈당이 유발이 됨니다 . 고혈당은 올리브유나 올리브잎을 끌여서 드시면 혈당조절이 됨니다 ,혈당조절이 되면 비만하지 안게 됨니다 .바위엄자에뜻은 암병은 바위되고 돌이된다라는 뜻입니다 . 尿오줌뇨 . 尸 [주검시.지붕시] 널에 시체가 누워있는 모양. 죽은 사람은 관 뚜껑을 덮어서 흙에 묻는다는 뜻에서 지붕이라는 뜻을 가짐.(居 살 거.물수 水.소변을 물로 표현해서 썻습니다. . 病 병들병 .당뇨병은 암병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세상에 모든병을 총 암병이라고 한답니다 암병에 초기는 감기와 스트레스에서 유발이 되기 시작한답니다 . tv에서 보앗습니다 어떤 청년이 으실으실 춥고 밤새워 아픈후 병원에 갓더니 뼈암이라해서 발목을 절단했답니다 .


세종대왕은 문씨 성을 돼지머리계자로 내렷답니다.
왕이 성을 지어서 하사합니다 . 돼지고기만 먹고 전립선염유발이 되어서 대가끈어져라는 뜻입니다 . 사탄악마가 인체내에서 돼지기름을 먹고 전립선에 들어가서 마찰을 계속일으키;면 전립선관이 염증이 유발이 되고 부어서 정자가 배출이 자연적으로 안됨니다 약을 계속먹고 치료를 일년이고 몇 년이고 받아고 완치가 안되어서 결국은 수술해서 염증유발된 부이를 제거하는 수술하는걸 명의방송에서 보았습니다. 정자도 몇 개 없다라고 명의방송에서 보여주었습니다 돼지고기 먹으면 기형아도 낳고 정자가 건강하지를 안는답니다 .정자가 많이 생기지도 안고 활동적이지도 안고 정자가 건강하지를 안는답니다 . 전립선에 염증이 유발이되어있는 남자에 정자수는 적다라고 명의방송에서 보여주었습니다. 돼지고기와 포화지방산 기름은 만가지 암병에 유발이 됨니다 활성산소라고 세종대왕이 쓴의서에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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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입안에 염증이 유발되는 부이가 엄지손톱이 다들어갈정도로 깊이 넓게 페였으며 노란염증이 가득있었습니다. 동이보감에서 보고 머루를 문지르면 완치된다해서 머루 10알정도를 문질렀습니다. 뒷날 자고일어나서 보니 입안 페인부이가 99.9프로가 메꾸어지고 염증도 없어져버렸습니다. 살짝 긁힌것처럼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머루가 염증치료와 근육재생을 탁월하게 삽시간안에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창자도 뇌도 근육도 눈도 뼈도 포도당이 스며들면서 정상으로 재생되는 과정을 명의방송에서 보여주었습니다 .
뇌에 화상입은것처럼 물집이 생긴부이가 염증이 생기고 푹페입니다. .올리브잎끌인물과 머루를 함께드셔야 완벽하게 뇌상처가 완치가 됨니다 의사선생님말씀 머루는 뇌에 좋다하셨습니다
血 피혈. 삐침 丿, 삐침부수에 뜻을 해석한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태양열과 사람피 온도가 온도가 같게 태양신인 사탄악마들이 혈관속에들어가서 한다는 말입니다 . 壓 누를압, 달월 月,
개견犬 흙土 , 바위엄 ( 厂 ) 달나라신이라는 것은 사탄악마들입니다 .사탄악마들이 혈압을 확오르게 열을확오르게 합니다 . 개고기를 드시면 혈압이 오른다하는 말입니다 .
이렇게 혈압병에 유발이 되면 명이다해서 흙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악마인 달나라신 태양은 사탄악마들이라서 돼지고기를 안드셔야 됨니다 개고기도 안드셔
야 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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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 腦뇌 梗 경 塞 막을색 뇌가 괴사한다는 뜻이랍니다 달월 月자가 부수로 들어있는 뜻이 의문이겟지요 이세상에는 잡귀가 있고 용신이 있습니다.
뱀귀를 잡귀라고하며 또 세종대왕은 달나라신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외달나라신이라고 이름을 하늘에 달을 따다지었느냐면 세종대왕은 사후세게 보니 자신이 뱀귀가 되어서 용이되고싶어서 인고에 세월을 물속에서 살아도 용이 안되고 심술만 사나원지면서 하늘에 달을 따다가 달나라신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 그런후 풍악울리고와서 나라세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늘에 용 신인것처럼 저를 속였습니다 .자신이 평생일해서 삼백억을 벌어서 보름달에 뜻으로 백오십억 베풀었다고 속였습니다 제꿈에 구름위에 체구가 큰 할아버지가 서있고 제가옆에서서 소리를 지르니 쩌렁쩌렁 했습니다 천국에 용신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어느날 꿈에는 계단에 구름조각이 있었습니다. 달나라신이라는 사탄악마들이 뇌속으로 들어가서 뇌경색을 유발시킨다
는 뜻으로 달월자가 들어 잇습니다 제꿈에 송충이가 제머리속으로 들어가는 데 모르는 여자가 후 불어서 날려보냈습니다 .머루가 뇌 괴사된 부이를 재생을 시킴니다. 어느날은 제가 잠잘려고 옆으로 누워있는데 옹달샘이 제 얼굴앞으로 기어왔습니다. 어느날은 꿈에 제가랭이 허벅지에 구더기 구더기알 탁구공크기만 한 것 두덩이 송충이가 있더니 살인적인 가려움이유발이 되었습니다 아토피염입니다 가려운 부이에 저는 들기름과 올리브유를 1대1로 희석해서 화장솜에 묻혀서 10분정도 문질렀더니 신기하게 가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동이보감에 나와있습니다
봉화에 머루농장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 하십시오.
고지혈증에 뜻은 지방이 혈관속에 산처럼 쌓여있다해서 높을고자를 쓴답니다 포화지방산 기름을 콜레스테롤 이라고 합니다 .돼지기름 소기름 팝유기름이 주로 인체내에 쌓여서 고지혈증등, 당뇨병 등을 유발시킴니다 또는 쌓인기름에서 염증이 유발이되어서 만가지 암병으로 전이가 됨니다 효령대군은 풍악을울리고 세종대왕이랑 내려왔습니다 꿈에 효령대군은 박인환씨 얼굴과 쌍둥이처럼 생긴얼굴로 현관문안에 서있었습니다 .
카페인 성분은 해독을 한답니다 해독에 뜻은 풀해 解 , 뿔각角 , 칼도(刀) .소우변牛 뿔각에 부수뜻은 녹각을 뜻합니다 녹각은 피를 만듭니다.칼로 녹각을 자른다 . 소우변 부수뜻은 소는 풀을 먹고 매일 아침마다 변을 시원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풀은 대변을 시원하게 보게하면서 열을내리게 하며 녹각또한 열을 내리면서 피를 만듭니다 . 커피가 녹각처럼 피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 읽을독 讀 말씀언 言 선비사 士
조개貝 눈목目 여덟팔 八 선비가 공부를 해서 말을 전해서 가르켜 주어라는 뜻이며 조개를 먹으면 해독이 되고 또 아울러 눈이 좋아지고 팔기 기운이 난다라는 뜻입니다 .
팔기를 해석한다면 여덜가지 기운이나는 음식을 먹어라 여덜가지 해독되는 음식을 먹고 열이 내리는 기분좋은 착하고 바른말을 귀로 들어아 열이내리는 음악도 들어라 저는 대중가요를 들으면뇌에 열이내림니다. 제가 송추 락카페가서 음악을 듣는순간 머릿속이 편안해 지면서 열이 내리는걸 느꼈씀니다 , 국악은 목청소리낼 때 힘들게 나게해서 듣는 사람도 힘이듬니다 . 열이남니다 듣는 사람이 편안한느낌과 즐거운 느낌이 들어야 열이 자연히 내림니다 열을 빨리 삽시간안에 내리게하는 의사선생님들중에는 관장시켜서 설사시킴니다
해독이 되는 효능이 있는 음식은 무조건 열을 내리는걸 해독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아프거나 신경질 불면증에는 무조건 열이남니다. 그럼 해독에 효능이 있는 커피가 열나게 하지안습니다 누군가 거짓으로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잘하면서 많이한 선비더러 말로 가르켜 주어라고 또 누군가 써놨습니다 이세상에는 사기꾼과 착하고 바른 사람이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커피는 원두라해서 콩두豆자를 씀니다 콩을 먹으면 백년을 살수 있답니다. 제가 먹어보니 콩들중에는 커피콩이 최고로 인체내에 기운을 많이 삽시간안에 나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씀니다
축농(증) [empyema, 蓄膿(症), 축농증에도 농자부수에 달월자가 들어있습니다 .달나라 사탄악마가 염증인 고름농 자에뜻으로 고름을 유발시킨다는 뜻입니다.달나라 사탄악마는 돼지고기 기름을 인체내에 위장에서 먹는답니다 . 인터넷으로는 고자추자가 안나옵니다 옥편보면 나와있습니다. 고자추한문 부수에는 돼지머리계자가 두 개들어있는 거북귀자와 쌀미자 들어있습니다 . 돼지고기와 쌀밥먹으면 고자된다라는 뜻입니다 정력이 약해지면서 전립선암에 유발되면서 정자가 안생긴다는 뜻입니다, 임파선염이라는 병에 뜻은 고름과 염증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고름과 염증은 돼지기름 소기름에서 최고많이 유발이 됨니다 , 머루나 올리브잎이나 올리브기름 들기름을 매일 하루종일 삼시세끼니 드시면 기운이 나면서 자연히 없어져 버림니다
전세계인들께서 다 제글을 읽게 하십시오 또는 전달해서 알게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