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강좌

창동아지매 2015. 10. 7. 15:04


 

  최유진 교수 (경남대 철학과) 

              원효와 마음 2

 

 

I. 원효의 생애와 깨달음

      

원효(元曉)617(신라 진평왕 39)에 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 보통 신비한 이야기가 따라다니듯이 원효도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고 하며 태어날 때에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보통 육두품 출신으로 생각하여 왔었는데 요즈음엔 오두품 출신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진골 귀족이 아닌 좀 더 낮은 신분인 그의 출신 성분이 그로 하여금 좀 더 민중에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낮은 출신 성분이 그로 하여금 승려로서의 출세를 추구하기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는 거리낌이 없는 대자유를 누린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국유사󰡕의 원효 전기의 제목도 원효불기(元曉不覊: 원효가 거리낌이 없음)라고 붙어 있는데 이도 원효의 대자유인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수도에 전념하다가 중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원효는 마음에 대하여 탐구를 하여 이론적으로 그 본질과 현상을 밝히고자 노력을 하였는데 그 작업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좀 더 넓은 곳에서 공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송고승전󰡕(贊寧(919-1002) 988완성)의 원효 전기에 의하면 현장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학길을 나섰는데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두 번째 시도 때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을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약관의 나이에 당나라에 교종이 성한다는 말을 듣고 원효 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유학할 뜻을 품었다. 본국의 해문(海門) 당주(唐州)의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도에 궂은비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길가의 작은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서 바람과 비를 피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서로 보니 고분(古墳)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계속 비가 오고 땅은 진창이어서 조금도 나아가기 어려워서 머무르고 나아가지 못하여 또 연벽(埏甓; 무덤 속 통로에 깔려 있는 벽돌)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밤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괴이한 짓을 한다. 원효가 탄식해 말하기를, “전에 잘 때는 작은 토굴이라 생각하여 편안하였는데 오늘밤에는 머물렀더니 귀신들에 의해 수(; 빌미; 불행이나 탈이 생기는 원인)가 많구나. 곧 알겠다. 마음이 생겨나므로 종종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므로 작은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또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唯心)이고 만법(萬法)은 오직 의식(唯識)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만두고서 짐을 챙겨 돌아갔다. 의상은 홀로 길을 가면서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송고승전󰡕보다 이전의 저작인 󰡔종경록󰡕(延壽(904-975)의 저술)에서는 시체 썩은 물을 먹었다고 하는 더욱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깨달았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 해동의 원효 법사와 의상 법사 두 분이 같이 당나라로 스승을 찾아오다가 밤이 되었는데 묵을 데가 없어 무덤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원효 법사는 목이 마르므로 물이 먹고 싶던 차에 마침 자리 곁에서 하나의 괸 물을 발견하였으므로 손으로 떠 마셨더니 아주 맛이 좋았다. 다음 날 보았더니 이것은 원래 시체 썩은 물이었다. 당장 그 때에 속이 메스꺼우면서 토해 버리다가 환히 크게 깨치며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부처가 말하기를, ‘삼계(三界)가 마음일 뿐이요, 만법(萬法)이 식()일 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맛좋고 메스꺼움은 나에게 있고 실로 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라고 말하고 마침내 옛 살던 동산으로 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폈다.

 

일반적으로 민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종경록󰡕의 이 기사처럼 해골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임간록(林間錄)󰡕(각범혜홍(覺範慧洪)(1070-1128) 1107년 작)에서도 해골 물을 마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대(唐代)의 원효 스님은 해동 사람이다. 처음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명산의 도인을 찾아 황량한 산길을 홀로 걷다가 밤이 깊어 무덤 사이에서 자게 되었다. 이때 몹시 목이 말라 굴속에서 손으로 물을 떠 마셨는데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새벽녘에 일어나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해골 속에 고인 물이었다. 몹시 메스꺼워 토해 버리려고 하다가 문득 크게 깨닫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이 여래와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하셨는데 어찌 나를 속이는 말이겠는가?” 그리하여 스님은 바로 해동으로 돌아가 화엄경소를 써서 크게 밝혔다.

 

전해 오는 전기 기록 모두가 원효가 삼계유심의 도리를 깨달아 중국 유학을 그만 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효가 스스로의 깨달음의 경험을 자신의 저술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없고 이 이야기들은 설화적인 전승이므로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원효에게 있어서 마음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원효의 생애에서 또 한 가지 커다란 사건은 파계를 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일이다. 그는 그 길로 소성거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거사로서 평생을 살았다. 원효의 실계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유학한 시말(始末)과 포교의 큰 업적은 당()의 전기와 행장에 자세히 실리었으므로 모두 기재하지 않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이상한 일을 기록한다. 성사가 일찍이 어느 날 미친 사람처럼 거리에서 외치되,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내가 하늘을 버틸 기둥을 깎겠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때에 태종(太宗)이 듣고 이르되, “아마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賢子)을 낳겠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더없는 이익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瑤石宮)(지금 학원(學院)이 바로 이곳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궁으로 데려가라 하니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찾으니 원효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사천(沙川)은 속()에 이르기를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원효가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시니 궁리가 그를 데리고 궁에 가서 옷을 갈아 말리고 유숙하였다. 공주가 과연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하니 신라 10(十賢)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리 언어로 중국과 우리의 풍속 문물을 회통하고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해석하여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경을 배우려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

 

원효의 부인이자 설총의 어머니가 요석공주라는 얘기인데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향전의 자료적 신빙성이 문제이다. 다른 기록에는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향전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일연이 채록한 것인데 신빙성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다. <고선사 서당화상비>󰡔송고승전󰡕에 전혀 기록이 없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의 설총 전기에서도 원효가 아버지인 것은 말하고 있지만 공주가 어머니라는 사실은 말하고 있지 않다. 설총의 전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인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또 문제가 되는 것은 낮은 신분의 원효가 높은 신분의 공주와 결혼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원효의 부인이 공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물론 절대적으로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어쨌든 그가 설총의 아버지인 것은 사실이고 그는 이후 환속한다. 그는 승려로서보다는 재가의 거사로서 살고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는 수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앉아서 저술만 한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직접적인 교화 활동을 많이 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수많은 저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민중불교를 실천한 사람이 원효였다. 귀족적인 불교를 널리 민중 속으로 전파하여 미천한 신분의 사람까지 불교를 알게 된 것은 원효의 공이 컸다. 이와 같이 평생을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민중교화에 힘쓰던 원효는 686년에 7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II. 󰡔대승기신론󰡕과 원효의 일심

 

원효는 불교의 많은 분야에 대해서 폭넓게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존하는 것은 20여종이지만 100종 가까운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의하면 4482권이 원효의 저술이지만 조명기의 󰡔신라 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는 98종류의 서목(書目)을 열거하고 있고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편의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에서는 86종류의 서목을 열거하고 있다.

이 모든 저술들이 마음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지만 역시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유식철학 계통의 저술들과 󰡔대승기신론󰡕과 이른바 여래장사상 계통에 관한 저술들인 󰡔대승기신론소󰡕 󰡔별기󰡕 󰡔이장의󰡕 󰡔금강삼매경론󰡕 등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이 중요하다.

원효는 그의 사상의 중요한 근거를 󰡔기신론󰡕에 두고 있으므로 원효가 󰡔기신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원효의 전체 사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원효의 󰡔기신론󰡕에 대한 평가는 우선 󰡔기신논소󰡕󰡔대승기신론별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신론󰡕에 대한 입장을 정확하게 알려면 󰡔기신론󰡕 관계 저술뿐 아니라 그의 다른 저술들도 참고하는 등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소󰡕의 종체문(宗體文)에서 열면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뜻을 근본()으로 하고 합치면 일심(一心)을 핵심()으로 한다.”라고 말하여 이 논은 일심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무량무변의 뜻을 다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일심과 화쟁이 그의 󰡔기신론󰡕 평가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기신론소󰡕․󰡔별기󰡕에서 원효는 일심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원효의 철학에서 일심은 궁극적 목적지이며 만물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일심의 기본이 되는 논리가 󰡔기신론소󰡕․󰡔별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원효 사상의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화쟁과의 연관에서 말한다면 쟁론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고 모든 경전의 사상을 망라하는 것으로 보아 이 논을 높이 취급하였다.

구체적으로 원효가 이 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중관과 유식의 종합으로 보았다는 의견과 유식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이라고 보는 입장, 여래장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견해, 󰡔기신론소󰡕 󰡔별기󰡕의 일심 해석을 화엄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원효가 󰡔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의 종합으로 보았다고 하는 견해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의 중관 계통은 부정만 하고 유식 계통은 긍정만 하는데 󰡔기신론󰡕은 긍정 부정이 자재하여 모든 논쟁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이다. 그러나 중관 유식보다 󰡔기신론󰡕의 사상을 더욱 훌륭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기신론󰡕을 중관 유식의 종합으로 보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중관 유식을 낮게 평가하는 󰡔별기󰡕에서의 원효의 말도 그의 결정적인 입장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원효는 중관과 유식에 대해 많은 저술들을 하고 있으며 그 경전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화쟁적인 원효의 입장에서 보아도 중관 유식을 낮게 평가하는 󰡔별기󰡕의 말이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기신론󰡕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말 정도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래장사상으로 󰡔대승기신론소󰡕󰡔별기󰡕의 원효의 입장을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래장사상을 유식과는 독립된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견해의 영향을 받은 관점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여래장연기종이라 하여 법장이 기신론을 파악하고 있고 그것이 문제가 있다 해도 원효가 여래장을 중시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원효는 바로 여래장연기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따라서 원효 입장과 법장의 입장이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효의 여래장 중시를 법장이 영향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원효는 기신론사상과 유식사상을 굳이 독립시키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식적인 입장에서 󰡔기신론󰡕을 해석한 것이 원효라는 의견은 기신과 유식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부각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바로 한편으로는 기신론을 중관, 유식보다도 한 단계 높은 것으로 보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입장에서 여래장을 중시하는 원효의 입장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기신론소󰡕 󰡔별기󰡕의 원효의 일심 해석을 여래장 일심이 아닌 화엄 일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원효의 기신론의 일심 해석은 다른 학자들의 일심 해석과는 달리 절대적 진심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다. 따라서 단순한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화엄적 일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화엄교가의 해석에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이 화엄의 일심보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점이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을 화엄의 일심보다 낮은 차원의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두 경전에서 말하는 것을 같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효의 일심을 화엄 일심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화엄과 󰡔기신론󰡕을 아우르는 것이 원효의 일심이라 하겠다.

원효가 어떻게 이 논을 파악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이런 여러 입장들이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점도 있다. 원효 자신의 저술 속에 이런 여러 해석에 대해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지만 그러나 어떤 것이 더욱 원효의 근본 입장에 가까운 것인가 하는 것은 논의가 필요하다. 원효의 󰡔기신론󰡕에 대한 입장은 원효의 전체 사상과의 연관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전체를 아우르는 입장이 원효의 입장과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원효는 󰡔기신론󰡕에서 무엇을 중시하였는가? 원효가 󰡔기신론󰡕의 사상 중 가장 중시한 것은 이 논의 화쟁적 성격이며 이 논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이 그의 모든 사상의 근본이 된다. 원효는 또 수행에 있어서도 󰡔대승기신론󰡕의 이문이 불교의 근본적 수행이라 할 수 있는 지()와 관()을 닦는 이론적 기초라고 보고 있고 이 지와 관이 함께 갖추어지지 않으면 깨달음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론과 수행 모두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을 󰡔대승기신론󰡕에서 찾았다. 그만큼 󰡔기신론󰡕은 원효 사상에서 중요하다. 원효는 󰡔기신론󰡕이라는 저술이 갖는 화쟁적 성격에 주목하여 당시의 다양한 쟁론을 화해시키려 했고 그 근본 원리를 이 논의 일심이문 사상에서 찾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효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심과 화쟁의 중요한 근거를 󰡔기신론󰡕에서 찾았고 따라서 이 경전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그 근본을 일심에 두고 있다. 그는 일심의 근거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였고 궁극적인 목적도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삼았다. 그런데 원효의 일심은 󰡔기신론󰡕에 그 주요한 근거를 두고 있다. 원효의 일심은 여래장사상을 강조하는 논서라고 하는 󰡔기신론󰡕에 주요 근거를 두며, 원효에 있어서는 일심이 곧 여래장을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원효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상가였으므로 여래장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일심은 단순한 깨달음의 가능성이라는 정도를 뛰어넘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래장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여래장사상의 연장선 위에서 원효의 일심을 파악하는 것이 원효의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을 잘 드러낼 수 있지만 원효사상을 단지 여래장사상에만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깨닫게 해서 일심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가르침이라면 모두 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특정한 종류의 경전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종파적 편견에서보다는 깨달음의 도구로서의 상대적인 유용성을 위해 여러 경전에서 인용하곤 하였다. 일심의 원천에로 돌아가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일심을 기본으로 해서 이론을 전개하되, 구체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론들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 원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평가를 볼 때에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원효의 기본 입장이 무엇이냐 했을 때는 역시 여러 경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기신론󰡕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기신론󰡕이 중관 유식을 종합하여 중관 유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전이라고 원효가 판단하였다거나 여래장사상으로 보아야 한다거나 유식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논의들은 그것만을 고집해서는 곤란하고 좀 더 넓게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모든 경론의 핵심을 종합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기신론소󰡕의 대의문에서의 말도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III. 원효의 마음에 대한 견해

 

원효는 구체적으로 마음에 대하여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왜 마음을 탐구하였는가?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마음을 깨달으면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효의 저술들과 그의 실천이 모두 마음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현실에서 직접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원효의 마음에 대한 이론 즉 일심의 이론의 역사적 배경을 보자면 원시 불교 이래의 마음을 중시한 이론들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그 직접적인 연결 관계는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 또는 일심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주로 󰡔대승기신론󰡕󰡔금강삼매경󰡕에 근거하여 일심을 말하고 있음에서 우리는 그의 일심이 이런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저서들에 근거하여 원효의 일심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원효가 일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일심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 곧 목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목적이 고()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원효의 목적지도 바로 고가 없는 자유자재한 인간 본연의 자리인 일심인 것이다. 현실의 인간은 어리석음에 가로막혀 동요되고 그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데 그것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일심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그 일심은 과연 어떤 것인가? 원효는 그 일심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우선 그것은 모든 법() 즉 모든 존재의 근거라는 것이다. 곧 현상세계의 질서나 모든 것이 이 일심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나타나는 것은 일심의 견지에서 포괄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일심은 상대적 차별을 떠나 있다는 것이 원효의 견해이다. 일심이라는 것은 대상화된 어떤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화해서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일심 그것은 영원하다거나 순간적이라든가, 또는 본성이 있다든가 본성이 없다든가, 형상이 있다든가 하는 등의 모든 상대적인 차별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일심은 그의 전 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일심은 모든 것의 근거이며 평등무차별하다. 따라서 일심의 근거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근원적인 점에서 평등무차별하다. 현실의 모습은 실제적으로는 다양하게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상충됨이 없이 각각이 그대로 살려진다. 일심은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의 둘로 나누어 고찰이 가능하지만 둘이 다를 바가 없다. 일심의 견지에서 보면 생멸이 진여이고 진여가 생멸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 즉 다양한 여러 이론들이 바로 진여와 다를 바가 없어서 그 자체로서 살려질 수 있게 된다. 진여와 생멸의 밑바닥에 일심이 있으므로 이것이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는 불교의 모든 사상들에 특유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회통하는 일심의 정화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중생의 제도에 중점을 두고 일심사상을 실현해 나갔다.

궁극적인 일심의 성격은 이러하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원효는 구체적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의 유식철학의 여러 이론들을 흡수하고 새로운 유식도 연구한 위에 기신론 사상 등을 융화시켜 독자적인 유식사상의 체계를 형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존의 여러 이론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론도 흡수한 위에 그것들의 조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번뇌의 문제에 대해서는 치밀한 작업을 통해 번뇌의 이론을 종합한다. 그것이 그의 󰡔이장의󰡕이다. 󰡔이장의󰡕에서 여래장 기신론 사상체계와 유가유식사상체계를 화회시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을 중시하는 원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그의 마음에 대한 탐구가 선적인 실천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엄밀한 이론적 근거 위에 서 있음을 한편으로 알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 저술에서 현료문과 은밀문의 이문으로 나누어서 번뇌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다. 현료문에 유식계통의 경론에서 말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배치하고 은밀문에는 기신론계통의 번뇌론을 번뇌애와 지애로 다룬다. 번뇌애의 체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육종염심이 해당되고 지애의 체는 근본무명이 해당된다. 그리고 현료문의 이장이 은밀문의 번뇌애에 해당한다고 본다. 결국 󰡔이장의󰡕는 사상적으로 기신론계의 입장을 그 중심에 두고 유식계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 원효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