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CHEONEJOON.COM 2017. 6. 3. 21:39

출처 : http://munibook.unikorea.go.kr/?sub_name=information&cate=1&state=view&idx=96&page=4&ste=


나. 외교정책 전개과정 

(1) 1948년 정권수립∼1950년대 초반 : 중·소 의존 

북한의 외교관계는 1948년 9월 정권수립시기부터 1953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진영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당 시의 외교활동은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는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가 거 의 전부였으며, 수교국도 소련, 중국, 동구 제국 등 12개국에 불과하였 다. 이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리더십이 확고하 였던 반면 중국은 국공내전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소련의 한 위 성국으로 지원을 받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영향력도 소련 이 거의 독점적으로 행사하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북한의 대중·소 외 교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은 근 100만 명에 달하는 중 공군을 참전시켜 북·중은 혈맹적 유대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일시에 중국 편향으로 기울지 않고 중·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북한의 중·소 등거리외교는 결과적으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경쟁 적으로 경제 원조를 받는 외교적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2) 1950년대 중반∼1960년대 후반 : 비동맹외교 강화

휴전협정이 성립되자 북한은 전후 복구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우선 중·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협력관계 강화에 주력하였 다. 그러나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지역의 신생독립국 29개국이 참가한 반둥회의에서‘평화 5원칙’이 발표되고6), 흐루시초프가 평화 공존정책을 거론하게 되자 북한은 중, 소, 동구 등 공산국가에 국한하 였던 진영외교를 탈피하여 다변외교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중립국들과의 외교적 접근을 시도한 것은 1956년 4월에 개 최된 제3차 당대회에서 다변외교로의 전환방침을 밝힌 때부터이다. 이와 동시에 1956년 4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라는‘인민외교’수행담당 기관을 노동당 외곽단체로 만들어 대중립국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시 작하였다. 그 결과 1958년에는 알제리, 기니 등과 수교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대중립국 외교를 더욱 강화하였는데 이 것은 아시아·아프리카지역의 신생독립국가들이 대거 UN에 가입하고 1960 년 제15차 UN총회에서 남북한 동시초청문제가 제기된데서 비롯되었다.

1961년 9월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①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 ②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반대투쟁 ③신생독립국가에 대한 접근8) 등을 강조하였으며, 같은 해 6월과 7월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고「조·소 우 호 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과「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사실상의 군사동맹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962년 중·소 국경분쟁과 쿠바사태 이후 중·소 분쟁이 격 화되자 북한은 중국에 밀착하였다가 1965년 2월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계기로 중·소 균형외교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중·소 양다 리 외교에서 북한은 그들의 외교적 활로를 찾고자 1966년 8월‘내정불간섭과 호상 평등’을 표방한 자주노선을 선언하고9) 이를 대중립국 외 교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3) 1970년대 : 자주외교의 실현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북한은 내외환경에 중대한 변화들이 발생 하자‘사상에서의 주체‘ ’, 정치에서의 자주’를 표방하면서 이른바‘자주 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자주외교기’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중 국 편향 외교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중·소 중립입장으로 선회하는 가운 데 보다 다변화되고 실리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북한이 실리외교 를 정책노선으로 채택한 것은 197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국제정세에서 제기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의제 가 토의되면서부터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대외적으로 1971년 9월 중국의 UN가입과 1972년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한 미국·중국의 관계개선, 일 본·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국제적 화해분위기의 성숙, 그리고 UN 및 기타 국제기구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대비한 지지국의 확보 필요성 등 이 작용하였다. 또한 대내적 배경으로는 새로운 6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도입을 위해 서방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의 필 요성 등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북한은 1970년 제5차 당대회 이후 1980년 제6 차 당대회까지 66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외교에서의 자주적 노력을 통하여 제3세계 지역에서 중국이나 소련의 외교에 의 지하지 않을 수 있는 독자적인 외교활동망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초청, 방문 등의 외교노력을 통하여 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 있는 제3세계 국가들과의 유대를 확대·강화할 수 있었다.

1975년 이후 북한의 제3세계 외교의 성과로는 무엇보다도 1975 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개최된 비동맹회의 외상회의(8.25~30)에서 ‘비동맹회의’에 가입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어 같은 해 제30차 UN 총회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서방측 안과 공산측 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등 그 영향력이 대유엔외교에까지 미치게 되자 북한의 외 교는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는 북한의 호전적인 대남전략의 지속, 외채 상환문제, 외교관 밀수사건 등으로 국제적 위신이 크게 손상되어 더 이상 별다른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4) 1980년대 : 서방외교 추진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자 주·친선·평화’로 표방하고 외교다변화를 모색하였다. 특히‘친선’이 라는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 국가, 비동맹 국가, 제3세계 국가들과의 단결강화를 강조하면서 우호적으로 대하는 자본주의 국가와도 친선관 계를 맺는다는 대서방 외교 강화방안을 제시하였다.

북한이 대외개방을 모색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계획경제와‘자력갱 생’정책의 한계에서 비롯된 장기적인 경제침체의 탈피와 경제의‘주체 화·현대화·과학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외경제관계의 확대가 필연 적으로 수반되어야함을 뒤늦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공고화할 필요성도 있었으며, 1978년부 터 추진된 중국의 개방정책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1983년 10월 버마‘아웅산 폭파사건’으로 인해 서방국 가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자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1984년 1월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를 열고‘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조치를 취할데 대하여’라는 의제를 토 의하고, 미국과 남·북한이 참여하는 3자회담 개최, 미국과의 평화협 정 체결 등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은 1984년 1월 대외무역의 확대방안을 공식적으로 결정하 고, 1984년 9월에는 외국인의 직접투자·합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합 영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1987년 4월에 채택된‘제3차 7개년계획’ 에는 대외무역 확대와 경제합작·합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의‘자주·친선·평화’외교는 실제 정책추진의 내용면에 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고, 오히려 북한 외교 전반에 심각한 손실 을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북한의 대외개방도 실질적인 성과는 미약 하였고, 오히려 북한은 1987년 10월 서방 채권은행단에 의해‘채무불 이행국가’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개혁·개방정책의 진전은 북한에게는 부담스 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5) 1990년대 : 미·일과의 관계 정상화 추진

냉전시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동맹국이었던 국가들의 한국과의 유 대관계 강화,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 가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국제사회의 구도변화는 북한에게 새 로운 변화에 맞춰 돌파구를 찾게 만들었다.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 와 급격한 대외환경의 변화로 인한 국제적 고립탈피와 내부의 경제난 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일본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였다.

특히 김일성 사망(1994.7.8) 이후 북한은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에 직 면하였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 중심의 비상위기관리체제를 통해 체제안정을 꾀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외교적 고립탈피와 경제난 해 결을 위한 자원확보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미국과는 1988∼1992년 사이 베이징에서 28차례의 참사관급 외교 관 접촉을 진행하였으며, 특히 1994년 10월 21일 북·미간‘제네바합 의’를 이루어냄으로써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통한 관계개선 계기를 마 련하였다. 또한 1999년 3월 금창리 지하핵 의혹시설의 성격 규명을 위한 협상을 타결지음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식량 60만톤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그 후 미사일 재발사문제와 관련하여 베를린에서 미국과의 합 의를 이끌어내고 후속회담이 11월 15일 베를린에서 재개됨으로써 대 미관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일본과는 1991∼1992년 사이 8차례에 걸친 국교정상화회담을 개최 하고, 1995년 3월에는 북한 노동당과 일본의 연립여당이 국교정상화회담을 재개한다는데 합의하였으며, 일본은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50만톤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였다. 북한과 일본은‘일본인 처 고향 방문사업’을 추진하여 두 차례 고향방문을 실현시키고, 1998년 3월 에는 일본 자민당대표단이 방북하여 관계개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8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양국관계는 급격 히 냉각되기도 하였다.

1999년 8월 북한은 정부성명을 통해 일본이 관계개선과 과거사 보 상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북·미간 관계개선을 골자로 한‘베를린 합 의’(1999.9)가 마련된 분위기에 편승하여 방북한 일본 정당대표단과 북한측은 12월 3일 공동보도문을 통해 국교정상화회담 재개에 합의하 였다. 이에 따라 1999년 12월 19일부터 개최된 적십자회담에서 양측 은 제3차 재북일본인 여성 고향방문 재개 등 4개 항에 합의하였으며, 이어 열린 수교회담을 위한 국장급 예비회담에서도 2000년 3월에 국 교정상화 본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북한은 중국이 1992년 8월 우리나라와 수교를 하자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보였으나, 1996년 5월「북·중 경제기술협조협정」체결 과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중국 방문, 그리고 1999년 10월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의 북한방문을 통해 쌍방간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러시아와는 1999년 3월「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대체 하는 신조약에 가서명함으로써 일반국가 관계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북한은 1998~1999년 사이 유럽연합(EU)과 2차례에 걸친 정 치대화를 개최하였으며, 1999년 9월에는 제54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백남순 외무상이 유럽국가 등 20여개국과 외무장관 회담을 가짐으로 써 그 동안 소원하게 지내왔던 유럽연합 여러나라와의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6) 2000년대 : 전방위 외교 추진

1998년 9월 공식 출범한 김정일 체제는 변화된 대내외적 상황 속에 서 체제유지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고 이로 인 해 국제적 고립 탈피 및 국제사회의 지원확보를 외교활동의 주요목표 로 설정하여 전방위 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북한은 체제안보가 최우선 과제라는 인식하에 핵·미사일 문제 등을 고리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2000년 10월 에는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 한 후 ,‘적대관계 종식’등의 내용이 담긴‘공동성명’과‘반테러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회담을 하는 등 관계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양측 관계는 후퇴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북한은 체제보장과 경제지 원 확보를 위해 핵카드를 활용, 대미관계 정상화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에도 의욕을 보이고 있는 북한은 2000년 수교회담 을 재개하고 동년 9월에는 제3차 일본인 처 고향방문사업을 실시하는 등 수교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이어 2002년 4월 북·일 적십자 회담과 국장급 회담을 거쳐 같은 해 9월 17일 북·일 정상회담이 개최되 었다. 북·일 정상회담에서‘일본인 납치 및 공작선 침투’를 인정·사과하 고「북·일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등 대일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2004년 5월 제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치 일본인 가족들을 송환하는 등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면서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한 일본의 지원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 메구미 사건’등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경색국면이 지속되었다.

북한의 전방위 외교활동은 대 EU 외교활동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 나고 있다. 북한은 2000년 1월 이후 EU국가와의 외교관계 확대를 적 극 추진하여 현재 총 27개 성원국 중 프랑스·에스토니아를 제외한 25 개국과 수교하였으며, EU국가들을 대상으로 경제지원 획득 및 경협 추진 활동을 강화해오고 있다.

이는 외교 역량을 확충하고 경제 실리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EU 국가들은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 등 도발 행위 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나아가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비난 하는 등 대북 압박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EU 정상회의에서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확고하고 조속한 이행 을 촉구하는 의장국 결론이 채택(6.19)되었다.

북한은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서도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 다. 2001년 7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베트남·라오스·캄 보디아를 방문한데 이어 2002년 3월에는 태국과 말레이시아를 순방 했다. 또한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2002.3), 천득령 베트남 주석 (2002.5) 및 분양 라오스 총리(2002.5)를 초청하는 등 동남아시아 국 가들과의 관계개선에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09년도에도 북한은 미얀마·베트남 등 ASEAN에 대한 외교를 중 시, 군사·경제협력을 통한 경제 실리 획득을 도모하고 있으나,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 고 있다. 최근 한(韓)·ASEAN 특별정상회의에서는 북핵 실험 규탄 언론 성명이 채택(6.2)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중국·러시아와는 정상외교를 통해 전통적 우호관계 를 복원하고 강화해 가고 있다. 중국과는 김정일의 방중(2000.5, 2001.1, 2004.4, 2006.1) 및 장쩌민(江澤民) 주석(2001.9)과 후진타 오(胡錦濤) 주석(2005.10)의 방북을 통해 기존의 우호관계를 회복한 이후,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에 대응하면서 다방면적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국 외교활동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러시아와도 정상간 상호방문(2000년 7월 푸틴 대통령 방북, 2001년 7~8월 김정일 방러)을 통해 전통적 친선관계를 회복하였고 특히 2002 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극동지방 방문 시에는 TKR-TSR 연결 사업 및 북한과 러 극동지역간 경제협력 등 실질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도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영 향을 받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 에 중국과 러시아가 동참함으로써 북한의 대중·러 관계는 불편한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은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6자회 담에 참여함으로써 북한 핵문제 해결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보였으며, 특히 2005년에 열린 제4차 6자회담에서는 북핵문제의 해결원칙과 목 표를 담은‘9.19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대한 제재로 북한 자금 이 동결되자 북한은 이에 격렬히 반발, 2006년「대포동 2호」를 발사 하고 1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이와 관련,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논의를 주도, 결의 1695호와 1718호를 채택하였다. 이후「부시」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비핵화 과정을 재개하고자 하였고, 북· 미 양자 접촉 이후 2006년 12월 6자회담이 재개되었다.

2007년 2월과 10월 각각 6자회담 관련국들은 북핵문제에 관한‘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2.13 합의’)와‘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조치’‘( 10.3 합의’)에 합의하였다‘. 2.13 합의’채택 이후 비 핵화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7년 7월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 및 IAEA 요원의 복귀가 이루어졌으며, 2007년 10월 이후 불능화 작 업도 시작되었다. 핵 프로그램 신고서에 대한 북·미간 의견 차이로 신 고는 지연되었으나, 2008년 4월 북·미간 싱가포르 합의에 따라 동년 6 월 북한은 중국에 신고서를 제출하였고, 미국은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 료 등 상응조치 이행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이행하지 않자, 북한은 2008 년 8월 불능화 작업 중단 및 핵시설 원상복구를 선언하였으며, 결국 10 월「힐」차관보의 방북 이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였다. 2008년 12월 시료채취 등 북·미간 검증 합의를 문서화하기 위한 6자 수석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북한이 시료채취의 문서화를 끝내 거부 함으로써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북한은 2009년 1월 오바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외무성 대변인 담 화·회견을 통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대북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청 산되어야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009년 2월부터는 장거리 로켓 발사를 준비하였으며,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발사하였다. 이에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를 개최, 북한의 장거 리 로켓 발사는 안보리 결의 1718호 위반이라는 의장성명을 채택하였 다. 북한은 동(同) 의장성명 채택에 격렬하게 반발, 4월 14일 외무성 성 명을 발표, 폐연료봉을 재처리하고, 자체 경수로 건설을 적극 검토하며, 추가 핵실험을 감행할 수 있다고 위협하였다.

2009년 5월 25일 북한은 끝내 2차 핵실험을 감행하였으며, 유엔 안 보리는 대북 결의 1874호를 채택하였다. 북한은 이에 또 반발, 6월 13 일 외무성 성명을 발표, 핵 포기 절대 불가 입장을 천명하고, 우라늄 농축 개시를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은 2000년대 들어서 체제 안보 및 경제 협력을 위해 전방위 실리 외교를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미사일 발사·핵실험 등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며, 외교 활동도 다소 축 소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Article

CHEONEJOON.COM 2017. 5. 2. 18:53

http://www.vogue.co.kr/2015/04/24/%EC%86%8C%EC%99%B8%EB%90%9C-%EC%8B%9C%EA%B0%84%EC%9D%98-%EA%B8%B0%EB%A1%9D%EC%9E%90-%EC%98%81%ED%99%94%EA%B0%90%EB%8F%85%C2%B7%EC%82%AC%EC%A7%84%EA%B0%80-%EC%B5%9C%EC%9B%90%EC%A4%80/


소외된 시간의 기록자, 영화감독·사진가 최원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엔 눈이 멀기 쉽다.
유행을 좇는 카메라들 틈에서 치열하게 세상의 진실과 마주한 젊은 작가들이 있다.
미술가 장민승과 포토 저널리스트 양영웅, 다큐멘터리 사진가 홍진훤, 영화감독·사진가 최원준.
우리의 부주의한 시선이 놓쳐버린 삶의 풍경을 포착해온 소외된 시간의 기록자들이다.

 

경계 너머의 세계

영화감독이자 사진가인 최원준은 수도권 주변의 군사시설물과 북한이 아프리카에 만든 건축물 및 기념비 등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닌 장소들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2010 일우사진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에 오른 그는 파리 팔레드 도쿄와 케 브랑리 박물관의 지원 작가로 선정된 이후,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4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 참여했고, 현재 뉴욕의 뉴뮤지엄 트리엔날레에서 전시 중이다.

Che one Joon

2010년, 문래동에 대한 영화 <물레>를 촬영하면서 독재자의 우상화와 상징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아프리카 세네갈에 북한이 건립한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가 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북한이 만든 건축물과 기념비는 저에게 북한에 갈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북한이 만든 건축물과 기념비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아프리카의 토속적 색채와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어떤 식으로든 혼성·혼합되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만들었어요. 언제부턴가 ‘북한’ 은 비가시적인 대상처럼 느껴지는데, 이건 이국성과는 다른 차원이에요. 극장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이미지 메이킹이겠죠. 그때부터 리서치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북한의 국가 이미지, 그리고 김씨 일가의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곳은 ‘만수대 창작사’입니다. 김일성 동상과 김정일 초상화 등을 전문으로 만드는 이 단체의 해외 개발 부서에선 1974년 에티오피아에 혁명승리탑(Tiglachin Monument)을 무상으로 지어줬어요. 그걸 시작으로 마다가스카르의 대통령궁과 토고의 대통령 집무실, 기니의 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장 건립을 무상 지원했고, 80년대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의사당과 함께 일명 ‘김일성 경기장’으로 불리는 탄자니아의 곰바니 경기장 등을 지어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 북한은 아프리카에 우상화 선전물을 수출해 외화벌이를 하는 중입니다. 이런 건설 사업으로 약 1억6,000만 달러(1,791억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런 사실은 2010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세워진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네갈의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의 의뢰로 만수대 창작사와 세네갈의 대형 건설사 아테파그룹이 합작하여 만든 이 대형 기념비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6m가 높으며, 기념비의 손가락은 대서양과 미국을 가리키고 있죠.

2012년 파리 케 브랑리 국립 박물관의 지원금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첫 촬영이 2013년 2월에 이뤄졌고, 총 세 차례에 걸쳐 가봉, 세네갈, 에티오피아, 콩고, 보츠와나, 짐바브웨, 나미비아, 남아공 등 아프리카 9개국을 다녀왔습니다. 촬영은 준비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운데 인터뷰이 섭외와 촬영 허가서 발급이 가장 까다로웠어요. 이런 문제들을 혼자 해결하긴 너무 힘들다 보니, 작업의 스케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일이 커졌어요. 아프리카 시내에서 촬영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아마 가보면 아실 겁니다.

영화와 사진, 아카이브 설치로 구성된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 프로젝트는 아프리카와 북한의 비교 문화 작업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있는 북한 건축물과 기념비 등을 통해 북한을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남한의 미술가가 북한의 흔적을 찾아 아프리카에 간다는 건, 조금 과장하면 비극적이라 할 수 있죠. 실제 아프리카에 있는 북한의 건축물과 기념비는 각 나라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딱히 북한을 표상하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아프리카의 색채보단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형식이나 주체 예술 형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편입니다. 흔히 미디어에서 봐오던 평양의 조각과 건축을 쉽게 연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분단 현실에선 북한에 존재하는, 혹은 그들이 창조한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떻게든 남한과 연결해 해석할 수밖에 없겠죠.

그동안은 미아리 집장촌이나 수도권 주변의 군사시설물의 변화 과정, 그리고 미군기지 문제 등에 관한 사진 작업과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해오며 우리 사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또 다른 공간을 다뤄왔습니다. 그런 이미지 작업을 통해 우리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근대성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어요. 여전히 사진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턴 영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진보다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내러티브를 서술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아요. 사진의 경우도 그렇지만, 영화감독 겸 사진가인 앨런 세쿨라의 사회과학적인 접근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카메라 워크는 독일 사진가들과 뉴 컬러 뉴 워크 시대의 스타일을 지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며 저만의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감독 지아장커의 호흡을 좋아합니다. 최근 3년간은 북한이 아프리카에 만든 건축물과 기념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지난해부턴 북한 화집과 우표를 하루에 몇 번씩 들여다보며 북한의 예술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죠. 올해도 아마 아프리카에 가지 않을까 싶어요.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 프로젝트가 분단된 현실과 타자화된 북한을 더 추상화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비가시적인 존재인 북한에게 다르게 말을 걸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될 거라 생각해요. 아프리카라는 거울에 비친 북한의 이미지를 통해 북한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며 다가가고자 하는 남한 미술가의 열망이 담긴 작업으로 보이길 희망합니다.



                                                                          CREDIT


 
 
 

Palais de Tyoko

CHEONEJOON.COM 2014. 7. 14. 21:55
http://webzineold.arko.or.kr/?MID=boardInfo&IDX=4&IDX2=1049


프랑스 파리의 팔레 드 도쿄 미술관의 맨 위층에 위치한 르 파비용 레지던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지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유럽의 많은 젊은 미술인들이 지원하고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팔레 드 도쿄라는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미술관의 이미지와 르 파비용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에 있다. 
1999년 미술평론가 제롬 상스와 니콜라 부리오의 제안에 의해 시작된 팔레 드 도쿄는 2002년 개관하였지만 르 파비용은 이보다 일 년 앞선 2001년 앙주 레치아에 의해 설립되었다. 앙주 레치아는 80년대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비디오 아트 분야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는 비디오 설치미술가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파비용의 디렉터로 재직 중이다. 그는 파비용을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실 같은 프로그램이 되도록 만들었는데 프로그램의 핵심 중 하나는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파비용은 지난 10년간 좋은 작가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인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2008 마르셀 뒤샹 미술상 수상작가 로랑 그라소, 그리고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크리스텔 레뢰 등이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모인 10여 명의 예술가들과 큐레이터는 약 8개월간의 기간 동안 파비용의 소속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그 진행 과정은 조금 특이하다. 먼저 파비용의 최종 인터뷰를 통과한 예술가는 프랑스 국립 세르지 미술학교의 포스트 디플롬 과정의 학생으로 등록이 되고 8개월간 장학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레지던가 끝남과 동시에 포스트 디플롬 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세르지 학교에 기록이 남게 된다. 그러나 참여 예술가들은 세르지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닌 팔레 드 도쿄 안에 위치한 파비용의 스튜디오를 가게 된다. 
파비용은 홈페이지를 통해 해마다 새로운 주제를 발표하며 지원자를 모집하는데, 지원자는 이 주제를 바탕으로 작품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본인이 지원했던 2009년의 주제는 무용과의 협업이었다. 다른 예술 장르와의 융합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주제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 한국에서 사진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본인에게는 쉽지 않은 주제였다. 당시 본인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어바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도 관심이 있던 터라 재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당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가재울 뉴타운은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어 이주가 이루어졌음에도 오랜 시간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빈집들이 방치된 상태였다. 본인은 가재울 뉴타운의 빈집들과 공터를 바탕으로 무용수들이 하루 24시간 동안 기계와 빈집이 되어 퍼포먼스를 한다는 계획안을 제출하여 서류심사를 통과했고 인터뷰를 위해 파리로 갔다. 인터뷰에는 파리의 중견 아티스트와 비평가, 팔레 드 도쿄의 디렉터 장 드 르와지와 큐레이터, 파비용의 디렉터 앙주 레치아와 프로그래머 등 약 10여 명의 심사위원이 자리했다. 지원과 인터뷰는 레지던 기간보다 일 년 전에 이뤄지는데 본인의 경우는 2010년 10월 인터뷰를 통과해 2011년 11월 파비용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제출한 계획안을 바탕으로 심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인터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나왔다. 기억나는 질문들 몇 가지를 여기에 적자면 먼저, 한국과 관련된 작업을 계속 진행하는 작가가 한국을 떠나서 프랑스에 오면 어떤 작업을 할 것인지와 두 번째는 작가로서의 나의 포지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인터뷰를 통과하고 2011년 11월부터 시작된 파비용의 프로그램은 파비용이 단순히 작업실을 무료로 주고 오픈 스튜디오를 하는 유형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리서치 유니트’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파비용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동 중인 퍼포먼스 아티스트 필립 퀸스(Philippe Quesne / Vivarium Studio)와의 협업이었다. 유럽 각지에서 온 7명의 작가와 2명의 큐레이터 그리고 한국에서 온 본인까지 10명으로 구성된 파비용 동료들은 각자의 작품 소개와 오리엔테이션을 한 다음 날부터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필립과 매일같이 회의를 했다.
유학 경험이 없는 본인은 유럽인들이 어떤 식으로 새로운 주제를 도출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필립은 리더가 되고 싶지 않아 했고 동등한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기를 바랐다. 민주적이랄 수도 있는 이런 방식은 상당히 긴 시간의 대화로 매일 이어지고는 했는데 한국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계속된 토론에 결국 몇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고 실험적인 이 작품은 2011년 12월 파리의 오래된 소극장 La Ménagerie de Verre 극장과 베를린 중심부에 위치한 HAU2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하게 되었다. 

공연이 있은 후 두 달 동안은 휴가가 주어졌다. 학생비자를 발급받은 학생의 신분이므로 대학의 방학기간과 동일하게 휴가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휴가 기간에도 장학금은 매달 나온다. 
2012년 2월의 두 번째 프로그램은 코르시카 아일랜드에서 지역 작가와 함께하는 협업 프로젝트였다. 코르시카에서 2주간의 프로그램 이후 팔레 드 도쿄는 상당히 중요한 행사를 준비했는데 그것은 광주비엔날레의 감독이기도 했던 오쿠이 엔위저가 감독으로 선임된 파리트리엔날레였다.  
팔레 드 도쿄 큐레이터 다리아(Daria de Beauvais)는 트리엔날레와 같은 기간에 미술관의 다른 공간에 <모듈>이라는 기획전을 개최하였다. 이브 생 로랑이 후원한 이 전시는 파비용의 작가들과 외부 작가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트리엔날레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고 본인 또한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 홍종우에 대한 비디오 작품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노르웨이 최북단 키르케네스에서 베르겐까지 이어지는 대형 크루즈 여행이었는데 이것은 파비용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여행으로 낯선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노르웨이 크루즈에서 벌어진 마지막 프로그램은 노르웨이 관광청의 초청으로 이뤄지게 됐는데, 파비용의 젊은 작가들은 일주일간 낮에는 출판 프로젝트의 회의를 했으며 밤에는 백야를 보며 상상을 초월하는 파티를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팔레 드 도쿄에서 발간하는 매거진에 실리는데 본인은 여행은 함께했지만 주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 프로젝트에 불참하였다. 파비용 웹사이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매년 참가자들은 파비용의 기획 아래 해외의 미술 혹은 문화 단체들과 협업 프로젝트를 하는데 2009년에는 한국의 경기창작센터의 입주작가들과 당시 독립 큐레이터였던 박만우(현 백남준미술관 관장)의 기획으로 우리 시대 다문화에 대한 전시를 경기도미술관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렇게 팔레 드 도쿄의 르 파비용은 8개월 동안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앞서 설명한 새로운 분야의 예술가와의 협업, 색다른 여행을 통한 프로젝트, 그리고 팔레 드 도쿄에서의 전시와 그곳에서 이어지는 수차례의 VIP 파티 등은 8개월간 파비용 작가들을 파리 주류 미술계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결과적으로 작가들에게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본인이 파비용 프로그램 참여 이후 진행한 유럽에서의 전시와 프로젝트, 워크숍 등 다른 활동 기반을 만드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올해부터 팔레 드 도쿄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미술문화교류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한국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할 것으로 예상한다. 팔레 드 도쿄가 이제 막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현시점이 한국의 젊은 미술인들에게는 팔레 드 도쿄 르 파비용에 지원해 볼 좋은 시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