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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군자 2016. 10. 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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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대법사-이상호 이정립 형제에 얽힌 이야기 2


  By 명세

교운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수부님과 차경석 성도의 재세시와 그 이후의 역사를 매개해주는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 대해서 바르게 볼 수 있어야 맥을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 이들이 경전과 역사를 기록할 때, 얼마나 붓대질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고수부님께 하신 말씀 중, ‘금구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지리라구릿골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지리라로 바꾸어서 기록한 것은 이미 워낙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증산교사에 의하면 고수부님이 경오년 동지에 고찬홍 성도를 동화교로 보내시어 상제님 육순회갑치성을 동화교와 합동으로 모실 것을 요청하였는데 바로 답하지 못하니까 그 다음해 정월, 오월, 칠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결국 칠월에 김환과 임경호의 찬성에 의해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월에는 고찬홍 성도가 동화교를 찾아와 이상호에게 동청룡사명기를 전해주는 예식까지 벌인 것으로 나오는데 앞뒤 상황을 아는 사람이 봤을 때 가히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선정원경(고민환 성도)과 선도신정경의 기록을 보면, 경오년부터 동화교에서 고수부님을 시봉하고 싶다고 연락이 끊이지 않고 왔는데 고수부님이 상기의 상제님 말씀을 근거로 허락하지 않다가 결국 이상호가 조학구와 함께 신미년 7월경에 와서 간청할 때, 옆에서 듣고있던 고민환 성도가 당시의 어려운 재정여건을 감안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게 좋겠다고 주청하여 고수부님이 결국 허락하시게 되는 전말이 소상하게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느 쪽의 기록을 더 믿을 수 있는지 헷갈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와 같은 사실 왜곡과 조작의 실력을 감안하고 다른 사건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합경전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는 보천교연혁사에 기록된 두 형제의 활동 부분은 증산교사와 상반된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충분히 조작 미화했을 증산교사와 보천교연혁사 둘 중, 과연 어느 쪽의 기록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증산교사의 대법사 편을 그냥 대충 읽으면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활동한 대법사 활동이 듬성듬성 그럴 듯하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주는데 저도 처음엔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그런데 자세히 집중해서 읽어보면 앞뒤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단체를 조직하여 그 이름을 분명히 대법사로 했다는 것을 밝혔는데 상식적으로 이것은 종교단체명이 아닙니다. 창립선언 내용을 읽어봐도 대법사는 영락없는 사회계몽단체일 뿐입니다. 조직이 처음 결성되는 과정도 사실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동아흥산사 사건으로 구속수감되었다가 해방을 전후해 출옥한 이정립이 서울 합정동 최위석의 집에서 40여명(최위석이 모은 인원)이 치성을 올리며 교단운동을 개시하기로 뜻을 모아, 각자 전국()으로 흩어져서 동지를 모아 대순절 치성 때 전국에서 모인 사람이 145명이었는데, 이때 이정립이 천사의 교의를 선포할 교화단체 대법사를 조직하자고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으며 또 선언 강령 조직초안을 제출함에 역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고 하며, 조직안대로 참석한 145명 전원을 중앙통제위원으로 선임하였다고 하며 그 명단을 죽 열거한 끝에 중앙통제위원회에서 이정립이 의통의 유래와 준비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고 이로부터 포교와 조직에 힘쓰며 의통자금조달에 노력하여 신속히 준비에 착수하자고 제의하여 전원의 찬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제위원은 각기 동지들을 모아 육단으로 육임을 조직하기로 하니 다음해 4월까지 맹렬한 활동으로 수만의 사원을 포섭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법사에 관한 기록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기록만으로는 대법사가 종교단체인지 사회계몽단체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최위석에 의해 모인 40명과 함께, 다음 대순절까지 전국적으로 교단활동을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여 모이기로 햇으며, 그렇게 하여 추가적으로 145명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정립은 그 형 이상호와 김규찬 2명에게 얘기한 것이 전부이며 나머지 시간은 조직안 구상을 했다고 밝히고 있죠~ 그런데 그 조직안이라는 것은 교단활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계몽활동을 하는 대법사라는 사회단체 조직안인데, 그 조직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는 겁니다.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대법사 창립선언에서 밝힌 활동방향과 계획(기관잡지 또는 해당서물을 발행하는 외에 면려대를 조직하여 수시로 각지에 순회하여 민중을 직접 지도하고 또 순강대를 조직하여 수시로 순회강연을 행한다)대로 사회계몽활동을 추진한 적이 한번도 없는데, 정상적이라면 만장일치로 가결된 단체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그에 관한 조직적 고민이 수반되었을 것이고, 현실적 이유로 변경되는 부분이 있게 되면 그에 관한 언급이 안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법사라는 이름과 조직이 교단적 성격과 안맞는 것이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치고 본래의 뜻은 교단활동에 있었다고 인정해주자고요~ 그래야 그 날 창립행사날 이정립 본인이 의통 얘기를 하고 포교와 조직 운운한 것도 이해되니까요~ 그런데 다음해 4월까지 불과 7개월만에 수만명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역시 교인이라는 말이 안나오고 단체명이 대법사이다보니 사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군요~

 

그리고, 어떻게 전국에서 교단활동을 위해 모인 145명이 전혀 조직적인 구분없이 모두 중앙통제위원이 될 수 있는지도 의아하죠~ 예를 들어 전국조직이라면 지방별 대표와 업무분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처음 모였던 40명 또한 최위석이 모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사회계몽활동단체 구상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엄청난 조직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 과연 인간 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 엄청난 조직 성장의 과정이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을 위인이 아니죠~ 그렇다면 객관적인 교단의 역사를 쓰는 자라면 가장 중요한 이 부분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단 한마디로 축약되어 조직적인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임시사무소를 서울시 필운동 팔십구번지 고 임경호방에 두었다고 하고 그 다음해(1946년 병술년) 가을에 통제위원 명단에 없던 김근하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구 보천교 본소 건물을 7만원에 사서 본부로 사용하게 되었다는데 보천교 측에서 매매원인무효 소송이 들어와 결국 그 다음해(1947년 정해년) 12월에 건물을 보천교에 양도하고 용화동에 새로 10만원을 들여 본사 사무소를 마련했다고 하면서 대금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는데 밝히기 곤란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본사가 서울에 임시 사무소밖에 없었던 1946년 정월 3일 고사치성을 위해 정읍으로 간 것은 왜일까요? 고사치성을 정읍으로 가서 참배하는 행로에 백남신 성도의 자부를 만나 시부인 백남신 성도의 이름이 대순전경을 통해 알려져서 고맙다며 10만원을 교회사업에 희사한 것을, 상제님께서 남신의 관액을 풀어주시고 맡겨놓은 10만냥이 44년만에 의통준비자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죠~

 

처음엔 분명히 대법사와 사원이란 용어를 쓰고 있었는데, 정말 뜬금없이 1948년 무자년 대순절 교인대표대회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죠~ 이 행사에서 대순전경을 교경으로 대순철학을 교의서로 사용하기로 하여 대량으로 출판할 것을 결의했으며 그 해 동짓달에 배동찬이 경북지방에서 포교운동을 일으키면서 안동 조극규와 의성 김옥경 두사람에게서 90만원을 차입하여 출판비로 조달하여 상기 두 책을 4천부씩 간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경과 교의서는 언급되는데 교단명은 없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해 보화교에 입교한 전 미군정 통위부장 유동열이 교단 통합에 뜻이 있었는데 대순전경과 대순철학을 읽고 감동받아 이것을 바탕으로 통합운동을 펼치자고 하여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1949년 기축년 정월 17일에 증산교 17개 교파 대표들이 모여서 증산교단통정원을 조직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단선언, 교의체계, 신앙체계, 교단규약 등이 등장합니다.

통정원의 대표적인 활동으로 순회강연을 개최했는데 5월에 발생한 김구 선생 시해 사건으로 일시 중지한 것으로 증산교사는 끝이 납니다. 그 이후로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교사를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홍범초의 범증산교사에서도 통정원의 그 이후 역사에 대해서, 19506.25전쟁으로 유동열 통교가 납북된 후 통정원이 와해되었다는 단 두 줄로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사망 기록과 그 이후의 교단 역사 기술로 이어집니다. 도대체 1950년부터 1966년까지 자그만치 17년의 역사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록을 남겨놓은 이정립과 그 기록을 그대로 베껴쓰기 하고 있는 홍범초의 기록을 100% 신뢰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죠~

대법사 증산교에서 안운산 성도사(당시 안흥찬 총사수)와 인연이 되어 함께 했던 역사에서 어느 쪽의 말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아무리 증산교사에 나오는 그들의 기록대로 대법사가 그렇게 창립된 것이라고 인정해주고 싶어도 그 자료 자체가 앞뒤 모순투성이에 대법사 단체의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없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용일 뿐이죠~ 자신이 바빠서 기록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그 맥을 잇는 홍범초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빠뜨린 내용의 보충이라는 것조차 아예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대법사에 관한 내용은 더 이상의 사료가 없는 판박이 기록에 불과한 것을 볼 때, 그들의 조작 능력으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 자체의 기록으로는 조직명단에서 중간간부의 위치에 안흥찬이란 이름을 넣어준 이외에 더 이상 그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 가타부타 언급할 수 없었던 역사적 내용이 범증산교사의 증산도사 편에서 어쩔 수 없는 자기들 변명을 위주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죠~

다음 편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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