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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군자 2020. 10. 24. 12:10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Digest:

에센스 축약다이제스트통합경전.pdf

 

 

 

 

 

 별 그리다  2019. 12. 20. 9:50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김좌진』 장군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청산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이다.장군은 북로 군정서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1920년 2월 에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여 독립군 지휘 간부들을 길러 내었다.

이해 9월에는 처음으로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다.명실 공히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홍범도,이범석과 함계)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일제강정기 민족적 쾌거였고,독립 전투의 금자탑이었다.단비를 기대하던 조선 민중으로서는 큰 선물을 받앗고 독립에 대한 확신과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 이후 만주의 상황은 악화 되었다.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계속 증파되었다. 그들의 만행도 가일층 심해졌다.일본군은 여기저기서 아무 죄도 없는 재만 한인들에게 패전의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한인 부락을 초토화하는 작전도 전개되었다.

◐김좌진 장군에게 자금을 댄 보천교

『김좌진』장군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이때 장군은 『보천교』와 연결되었다. 장군은 이미 1922년 초에 유정근을 밀사로 특파하여 보천교의『 차경석』 교주에게 협력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바 있었다. 그러나 유정근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필요한 군자금 모집은 계속되었고,김좌진 장군과 보천교의 접촉도 계속 진행되었다.

근년 김좌진은 자금 부족 때문에 부하를 해산하여 전혀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번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景錫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었다.지난 10월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寧古塔에 와서 「2만여 원의 군자금」을 주었다.이로써 김좌진은 이 돈으로 옛부하를 소집해 삼차구三岔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해 동지를 인솔해 동녕현東寧縣에 들어가려 했다.(일본 관동청 경무국,1924)

 

"김좌진,군자금을 확보하다"라는 문건의 내용이다. 군자금은 무장투쟁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군자금이 없으면 무기를 구입할 수 없고 무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당연히 군사 작전도 할 수 없다. 활동 불능 상태가 된다.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김좌진 장군에게 보천교에서 5만원(20억)이라는 거금을 준 것이다.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원 정도로 볼 수 있다. 2만원이면 8억 정도 이고 5만원이라면 20억 정도로 추정된다.이 액수라면 부하들을 재 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하기에 충분하다.이렇게 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끈 김좌진장군이 다시금 항일항쟁을 이끌 수 있도록 한 힘이 보천교에 있었던 것이다.우리에게 완전히 잊힌 역사다.

보천교→동학→무극대도(참동학) 증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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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100주년/ 청산리 대첩과 보천교에 대해서

 복숭아  2020. 10. 21. 11:25

 

 

김좌진 장군, 한국의 독립운동가 (음력 18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 -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과 보천교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입니다. 이러한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와도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거든요.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엄청난 군자금을 들여 독립운동에 기여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 독립군 편성에 주력을 기울였습니다. 1920년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해서 독립군 지후 간부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렇게 졸업생들을 298명 양성하였고, 그 기반을 바탕으로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군자금이 있어야 무기도 사고 인재도 양성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1920년 10월 21일~26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로 큰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에게 한번 패배를 하고 이에 대한 분노로 일본의 만행은 더욱 가세 졌습니다.

일본군은 여기저기서 아무 죄도 없는 재만 한인들에게 패전의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부락을 초토화하는 작전을 전개하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좌진 장군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군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강하게 받던 민중들은 두려움 때문에 독립 자금도 모아지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보천교입니다.

근년 김좌진은 자금 부족 때문에 부하를 해산하여 전혀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번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景錫)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寧古塔)에 와서 2 만여 원의 군자금을 주었다.

이로써 김좌진은 이 돈으로 옛 부하를 소집해 삼차구(三岔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해 동지를 인솔해 동녕현(東寧縣)에 들어가려 했다.

1924년 11월, 일본 관동청 경무국의 보고 내용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 본부(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에서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2만 원이라고 되어있는데, 동시대의 다른 자료를 보면 5만 원을 군자금 지원을 보천교가 했다고 한다.

이 금액은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5만 원은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입니다.

역사 속에서 증산도의 뿌리인 보천교에서 독립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참고 자료>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8673

 

청산리 대첩 100주년..."독립군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 BBS NEWS

< 앵커 >오늘은 독립군과 일본군 간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 부근에서 엿새간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항일 독립운동사

news.bbsi.co.kr

청산리 대첩 100주년..."독립군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 BBS NEWS

< 앵커 >오늘은 독립군과 일본군 간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 부근에서 엿새간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전과...

news.bbsi.co.kr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3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3

 

www.hmhtimes.com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6)김좌진의 독립운동을 돕다 - 한韓문화타임즈

만주의 독립운동과 김좌진 장군한국인 중 보천교나 차경석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김좌진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장군은 1918년 ...

www.hmhtimes.com

청산리 대첩에 대한 영상 자료

청산리 대첩에 대한 내용은

아래의 영상의 시청하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습니다.

청산리대첩은 총 아홉 번, 홍범도와 김좌진 등 연합부대의 전략전술과 유격전의 승리

https://youtu.be/CJYiZVSUjWg]

 

청산리대첩 과정 총정리,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연합전선 (대한 독립운동사)

https://youtu.be/ejsndPuMf28

보천교가 뭐지?

■ 우리가 몰랐던 무명의 독립 운동가들

몰라도 너무 몰랐던

참 충격적인 사실 입니다

지금까지도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왜곡된 우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독립운동사

그냥 사진만 보셔도 이해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몇 년전 대한민국 국회에서 개최된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 모습입니다

왠! 보천교 = 독립운동 단체?

1894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일어섰던

갑오동학혁명의 꿈이 좌절되자

혁명의 성지, 정읍(井邑)으로 구도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600만 도세를 일으킨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

세상에서는 그를 "차천자(車天子)"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죠

1926년, 조선의 인구가 1천 8백만명 이었다니

조선인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보천교 신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주한 美총영사, 밀러 보고서에도 6백만명으로 본국에 보고한 공문이 공개되었습니다

보천교 본부가 있었던

정읍은 독립운동의 성지였습니다

하지만 보천교는 단순히 종교단체가 아니라

실상은 대한의 독립운동을 하던 비밀결사 단체였습니다

그 당시 신문 기사들을 보면

보천교가 상해 임시정부 등으로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했던 단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몇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원을 지원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홍범도 장군에게도 지원하여 봉오동 전투에서도 대승할 수 있었답니다

​신문기사 설명:보천교 2인자였던 탄허스님 부친 김홍규 북집리(일제하 독립자금원 역할을 한 조선총독부 백서 공식통계 600만 신도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재무책임자를 남집리, 북집리 두 명으로 분리시켜 혹시 있을 조선총독부의 검거에 대비했다. 북집리 김홍규가  상해 임정 김구주석에게 보낼 독립군자금 지화와 은화 포함해 십만 칠천원 상당을 자신의 집 마루밑 항아리에 보관중 일제에 발각되어 당시 3대 메이저 조중동으로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조선, 동아, 매일신문에 대서특필된 기사다. 지금으로 하면 44억가량 되는 군자금이다.

 

또한 당시 가장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종교단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는 눈엣 가시처럼 제거 1호 단체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또 한가지 몰랐던 사실

근대 한국 불교의 대승, 탄허 큰 스님도 보천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탄허스님의 부친,

김홍규 선생은 보천교의 2인자로

보천교의 재정 총책임자이었습니다.

어린 탄허는 부친의 영향과 보천교의 서당을 다니면서 사서오경 등 한학을 배웠으며,

특히 正易과 후천개벽사상에 대해 깊은 영향을 받아 후일 불교에 귀의해서도 개벽과 정역에 대해 많은 강론을 하였습니다.(1935년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탄압) 신법>에 의해 강제경매로 해체되고 차경석 교주 사후 보천교 해산 이후 탄허는 불문에 귀의함)

부친 김홍규 선생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한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을 추서 받아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김홍규 선생이 몸 담았던 보천교의 핵심 조직인

12방주의 조직표 입니다

정읍 보천교 본부의 핵심 건물은

바로 십일전(十一殿)

바로 이 건물이죠

그렇게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던 보천교가 차천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일제의 집요한 파괴 공작에 의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많던 신도와 건물들도 모두 주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는데요.

우리나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십일전도 일제에 의해 경매에 넘어가 현재 조계종 본사인 조계사의 대웅전을 짓는데 쓰였습니다

마침내

나라가 광복이 되어

이 땅에 첫 발을 내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의 첫 일성!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조국이 해방된지 72년이 흘러서야

600백만 민초들의 혈성(血誠)으로 이룩한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보천교에 대해

진실을 찾으려 합니다

민의(民意)의 대변자들이 모인 국회에서

이같은 뜻깊은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동안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희생에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현직 국회의원 중에도

보천교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의 후손이 있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립니다

짧은 동영상이니까 꼭 보세요

https://youtu.be/I5PMCbJom2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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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단체는?|작성자 대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