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평.기고

채널만호 2007. 6. 16. 14:00

글쓴이 : 채진원 (2007.6.8)


1. 괴물에 대한 많은 오해

2006년 한국의 봉준호 감독이 <괴물>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Hobbes, Thomas, 1588∼1679)는 자신의 근대 민주주의적 국민주권사상을 집약한 책제목으로 《구약성서》<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환상의 괴물인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사용하여, 자신의 진보적 사상과는 무관하게 당시대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현재까지 손해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제한할 수 없고, 개인의 힘만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소위 성악설에 근거한 사회계약론으로, 전제군주제나 독재 그리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것으로 오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오해가 일반적이다. 가령 인터넷 포탈 naver에 홉스를 검색해보아도 “홉스는《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영화 <괴물>이 한창 상영 중 일 때 한국일보 모 기자는 ‘누가 괴물인가’라는 칼럼에서 “정부가 괴물이란 착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란 말로 유명한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괴물에 비유했다”라고 하면서, 괴물에게 잡혀간 딸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신고한 가족을 감금시키는 무책임한 ‘정부’를 진짜 괴물로 평하고 있듯이, 리바이어던을 부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홉스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을 흔히 성경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괴물이고 이는 절대권력과 권위를 가진 절대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홉스의 생각은 이와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오히려 그런 괴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절대적인 신, 현실의 지배자인 왕과 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당시 민중의 열망처럼, 새로운 민주적인 국가, 즉 명실상부한 국민주권 국가의 이미지가 홉스가 꿈꾸었던 리바이어던이다.


굳이 홉스가 추구한 대로 리바이어던을 무시무시한 괴물로 표현하고 싶다면, 1985년 당시 북한에 납북되어 있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알려진 북한영화 '불가사리' 괴수에 가깝다. 왜냐하면, '불가사리'는 고려 말을 배경으로 쇠를 먹는 괴수 불가사리의 이야기로, 도탄에 빠진 민중에게 무기 만들기를 강요하는 조정의 폭정에 맞서 불가사리가 결국 민중의 선두에 서서 조정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괴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본래의 뜻과는 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로 오해를 받아왔던 것일까? 일단은 원서나 번역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독자의 탓이거나 그 책에서 제시하는 민주적인 가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지 못한 지식인들의 탓도 클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시대적으로, 리바이어던이 국내에 한글로 소개되는 시점이 대체로 박정희 독재자에 의한 폭력(폭압)적 국가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리바이어던이 우파지식인들에 의해 독재국가의 옹호자로 해석되고, 좌파지식인과 반독재-반국가주의세력에게는 박정희의 ‘폭력국가’와 홉스의 ‘국가에 대한 강조’가 구별되지 못하고 동일한 것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아이러니이지만, 당시에 홉스의 정치사상과 리바이어던을 제대로 읽었던 우파지식인과 좌파지식인이 있었다면, 우파지식인은 리바이어던을 국민들이 읽어서는 안되는 ‘불온한 금서’로 정했을 것이며, 반대로 좌파지식인들은 민주국가를 염원하는 ‘국민의 필독서’로 권장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1987년 민주화운동이후 우리사회에서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라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는 요즘, 리바이어던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은 사람에 대해 이리”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이, 민주화이후 우리시대의 갈등과 정쟁의 고통을 집약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우리시대의 과제인 갈등과 정쟁을 치료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리바이어던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를 탐색해보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2. 리바이어던의 실체는 ‘폭력’이 아닌 ‘말’

홉스에 따르면 국가 구성 계약(협약)에 의해 개인들의 무한정한 이기심과 투쟁적 본성을 통제할 공통의 힘이 창출되고, 계약(협약)의 체결은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들을 완전히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국가조직에 힘을 부여하는 것,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가조직을 탄생케 하는 바로 원초적 사회‘계약’임을 알 수 있다. 즉, 만인이 수락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그리고 자연상태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국가권력은 원초적 사회계약 이전부터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약(협약)에 의해 그리고 그 계약(협약)의 체결과 동시에 등장한다.


홉스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약(협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홉스가 사용하는 계약(협약)에 대한 원어는 convenant인데, 이것은 contract로 번역되는 ‘계약’이 아니라는 점에서 ‘협약’? ‘약속’? ‘합의’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웹스터 유사어 사전』에 의하면, convenant가 “통상적으로 공식적이고 엄정하며 구속력 있는 합의”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서, 홉스가 사용하고 있는 계약(협약)의 개념은 계약을 맺는 사적 이해관계자들간의 단순한 타협수준이 아니라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공적질서인 국가의 창설과 이렇게 합의와 협약으로 만들어진 국가에 대해 계약자들의 절대 복종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의 정당성과 힘은 바로 계약자들 사이에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합의와 협약 그 자체에서 나온다. 국가의 권위와 권력은 국가를 창출할 때 협약의 매체인 ‘말의 힘’에서 왔기 때문에,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의 실체는 폭력(violence)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의해서 구성되고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J. Habermas)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론장’(public sphere) 또는 ‘의사소통적 권력’(communicative power)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렌트(H. Arendt)의 표현을 빌리면,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개념의 분명한 구별일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결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흔히들 "권력이라는 것이 곧 폭력"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폭력의 대립물은 권력이다. 따라서 폭력과 권력은 다르다.


폭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power)은 폭력(violence)과 다르게 행위(action)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에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므로, 권력은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함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할 때, 생겨나는 잠재적인 약속의 힘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 수단으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3. 민주화 이후의 리바이어던: 세계평화와 국민통합

홉스가 ‘괴물’(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던 근대 국가는 16~18세기 서유럽의 봉건제에서 절대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전 유럽을 휩쓴 부르주아 시민혁명을 통해 절대주의 국가가 국민국가로 이행하면서, ‘짐이 곧 국가’라고 까지 했던 군주의 절대 권력이 국민주권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통해 꿈꾸었던 주권재민, 생명존중, 평화공존의 세계는 그의 사후 3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도래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근대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미-소 냉전구도하에서 이데올로기적 질시와 반목, 군사적 위협속에서 살아왔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구도가 해체되었지만, 지역분쟁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고, 세계화의 진전으로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은 커지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한반도의 한국은 냉전,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랜 독재정권하에서 국민의 생명과 인권, 평화, 말과 협약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국민주권이 사라진 폭압의 세계에 있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진전으로 권위주의정권이 사라지고,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었다고는 하나, 탈산업화와 탈냉전화 및 탈주권화의 급진전으로 과거에 비해 남북갈등, 계급갈등, 계층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정파갈등이 폭발하는 가운데,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이 힘들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이념은 그 어원상 두 가지 목표를 통일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양적인 측면에서, 지배자를 소수에서 절대적 다수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인 측면에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지배자가 될 수 없도록 구성원간의 정치적 평등과 공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순과 갈등을 줄이거나 폐지하기 위한 대안적 정치체제를 발견하고 공고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모델에서 전자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ism) 또는 다원주의(pluralism) 또는 민중민주주의(people democracy) 모델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적 공화민주주의(republicanism)모델일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과제는 1987년을 경계로 양적인 측면에서 질적인 측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양적인 측면에서 정치의 주체인 주권자가 독재자에서 국민 다수의 지배로 바뀌었으나,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지배자가 될 수 없는 사회상태를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6월 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왔던 우리 헌법 제1조 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정체성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4. 제7공화국의 공화민주주의를 향하여

일반적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시민적 미덕(civic virtue)을 구비한 유덕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공복리의 실현에 공헌하는 체제로 곧 공화국(republica, common-wealth)을 말한다. 따라서 공화국의 존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원리로 대략 ‘시민적 미덕’,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시민의 자율적 독립’과 ‘부패방지’를 꼽는다.


그 중에서 핵심 정수이자 기반은 ‘시민적 미덕’이다. 시민들이 미덕이 있을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 미덕은 바로 시민들의 공공적(public)인 적극적 자유(freedom)와 동의어이며, 따라서 그것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사적(private)인 자유와 권리들의 보호라는 근대적인 ‘소극적 자유’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밝히고 한국의 민주정치의 발전논의에 보다 적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화주의내지 공화국 존립의 기반인 정치에 참여하는 유덕한, 또는 정치적 공통감각을 가진 시민이 대한민국의 실제 국민으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1차적 숙제가 놓여있다.


즉, 대한민국의 공화국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지배-종속관계로부터 해방되어 공화국의 진정한 주권자인 공적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화국의 정부와 제도정치가 신자유주의적 경제불평등 체제와 정책의 추진을 위한 ‘도구적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영역에 침투해오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이익정치’를 공적으로 지양하는 ‘시민적 공론정치’로 새롭게 탈바꿈될 때,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형성되고 동학이 작동할 때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민적 공론정치가 꽃피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자세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엘리트적 활동방식과 집단행동을 소통적으로 바꿔야 하고, 근대정치의 개념을 포럼(forum) 등으로 표현되는 공론장 개념으로 창조적으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독점했던 정치의 의사결정과정과 ‘정치적 과정’을 주권자인 정치적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방하고 돌려주는 과정이다.


다시말해서, 정치적 과정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독려함으로써, 신뢰감을 되찾고, 그들이 마음속 깊이 숨겨둔 공동선과 미래에 대한 생각, 시민적 애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정치적 판단과 소통의 공론장을 활짝 열어 줘야 한다. 엘리트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집단행동을 하면 할수록 시민들은 주눅을 들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시민들을 표나 찍는 도구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평가가 그의 생존시는 물론, 사후 오랫동안 호의적이지 못하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재검토되는 이유는 그가 살았던 격변의 시대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질적으로 다르긴 하더라도, 이념간의 대립, 계급간의 대립, 이익간의 대립, 세대간의 대립, 지역간의 대립을 넘어서 사회통합을 이루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지닌 시민들이 공론장에 참여하여 말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여 국민통합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창출하고 싶은 강력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