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평.기고

채널만호 2017. 12. 10. 14:32

종교는 언제 니체사상을 극복할건지.. (삶의 경험담에 부쳐)

세상에 안타깝게도 정의의 온전한 신은 없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느신이 가장 쎈지합니다.
가장 쎄면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법인데,
안타깝게도 온전히 지구와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지켜낸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의무는 방기한체 권리만 요구하는 신과 그추종자는 도처에 널려있으며,

천민자본주의와 독선이 모든 종교계에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계중 가장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천주교와 달리 종교인과세에도 소극적입니다.

이슬람은 기독교계에 비해 헌금 강요를 하지않습니다만, 구태한 봉건문화가 문제이며,

일부극단주의자가 무차별테러를 일삼기도합니다.

한편 어떠한 잔악행위는 시대만 다를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종교계서 자행됐음이 진실입니다.
중세시대엔 국수주의를 위시해 가톨릭에서는 종교 폭압정치와 마녀사냥을 자행했고,
이를 벋어나고자 근대에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과 일부 기독교인도 가세해 원주민 소탕작전을 펼쳤고 ,

그과정에서 수많은 아메리카원주민을 학살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기독교가 중세가톨릭의 전행을 되풀이한 이유는 중세에 교회를 신성시했는데,

그 교회독재의 잔재를 청산치못하고, 다른 형태로 이어져왔기때문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않믿으면 다지옥가!" 하며,

다른종교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공포전도와 독선주의가 그것입니다.

인류사회에 중세에서 근대과도기에도 종교가 온전치못하다보니,

독재정치도 횡횡했고 공산당같은 이념과 냉전도 여기서 파생됩니다.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는데, 공산사상뿐아니라 일부는 기독교를 취합 이념화해,

주체사상을 수립, 기괴한 김부자독재체제를 이어가게됩니다.

불교계는 원래 도올김영옥교수가 주창하듯 깨닮음의 종교였지만,

독선적교회의 영향으로 불교의 법전해석도 갈라져서 일부 불자중에는 부쳐님을 잘 모시지못하면 

사바세계나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며, 절에 자주 갖다받치는 시주질과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합니다.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이 되어 먼가달라야하는데,

어떻게된것이 기업화되고 속세와 똑같은 교인이 천지입니다.
교회가 사역이 아니라 사업화,장사속으로 전락하다보니,

이것을 수습하고 뒤치닥거리다 종치는게 그나마 양심있는 현제의 주님의 종들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다녔고 선교사가 꿈으로,
전문인선교사를 준비했지만 이렇듯 허망한 현실을 접하고 때려친지 오래입니다.
하나님도 무능하고 방관자적이라 예수님을 믿기는하나 교회는 다니지않습니다.

 

 

한편 살며 느끼는것은 조상신 앞에서 누가 센지 함부러 논하지말라 생각됩니다.
조상신만큼 쎈신이 있을까? 반문할정도로 쎄긴아주쎕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가면 어느신처럼 생색내기에 그칠뿐 이또한 말짱꽝으로 한심뿐입니다.
유교문화주의에 봉건,권위사회라는 오류가 팽배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역설도 있습니다.
가정이 가부장적으로 집안 자녀 재산분배도 자매와 아래남동생에겐 극히 일부만 돌아가고
장남이 거의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개인사 예기를 좀 하고자합니다.
나의 집안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전후까지만해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로 당시 좀 부유한가문이었습니다.
집터만해도 마을에서 좀 큰편이었고, 아름드리 감나무가 수십그루에 텃밭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논,밭 40마지기선, 야산임야 4천평이상이였습니다.
형제 둘중 저희 부친은 둘째로 작은아버지로 통합니다.
저희 부친은 물려받은 재산이라봐야 큰집터 절반정도의 대지융통부동산정도였으며,
그것으로 옆마을에 낡은집을 얻어 분가하고 3마지기정도의 논을 확보했드랬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대부분 물려 받은 본가 '금동마을'의 (큰형)큰아버지는 아우가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에 삶도 궁핍하기에 , 재산을 조금이라도 좀 나눠주리라는 취지로 야산 두개중 동네서 가까운 임야 3천평을 공동갑으로 등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지금에서 50여년전)
이 임야는 서울 여의도공원처럼 낮은언덕과 완만한평지로 이루어져있기에 개간해 야산밭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땅이었으며, 이미 큰집에서 100평 이상을 수월히 개간해 사용중으로, 중장비만있다면 대부분 개간할수있는 좋은임야입니다.
그런데 저희 부친은 그좋은 조건을 뒤로하고, "야산밭은 빌려써도 좋으니까 논이나 좀 떼어주소" 합니다.

그것을 수년이 지나도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않았고, 큰아버지는 "거시적으로 말고 먼장래를 생각해보라. 장차 밭농사도 흥할것인데 논3마지기 더 받는것보다 임야1500평을 받아 개간해 야산밭으로 사용하는게 훨씬 경제적이다"는 취지로 설득해도 반응이 시킁둥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정황을 10여년간 넌지시 지켜본 큰당숙이 큰아버지에게 "작은 아우가 싫다고하니 그야산을 우리에게도 좀 주소. 싼임야값이라도 치뤄줄테니 나중에 을로 등기해주소"하고는 저희 부친에게는 "큰형이 야산말고 방죽옆논을 좀 준다하며, 우리 당숙2인은 그야산을 일부 싸게 사기로했네.
부동산법을 아는 내가 서류대행해줄테니 큰형에게 임감을 달라고하시게. 내가 다 알아서 해줌세."하고 말장난을 칩니다.
자초지경을 다시 확인하지않고 큰집에 도장을 휙 받아 바로 건네준 부친은, 등기과정에서야 논할당 논의가 없음과 큰당숙이 돈도 않주고 임야 일부를 편취하렴을 알고 큰집에 알립니다. 그러나 큰집이 관공서에 가보니 이미 당숙들이 등기장난을 쳐놓은 상태로 때는 늦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년기때 큰아버지 편찮은 틈을타서, 친지당숙이 위처럼 어찌어찌해서 큰아버지 인감도장을 빼돌려서, 큰집야산을 공동명의 3인(갑;큰아버지, 을;당숙2명)으로 둔갑해논 사건입니다.
하여 눈뜨고 당한 큰아버지는 당숙들에게 "너희는 우리 작은집에 비해 논.밭이나 재산이 좀 있고, 작은집에 비해 먼 친척이니, 공동명의로 돌려논 성산을 작은집에게 계속 빌려줄터이다. 나도 그렇고 너희들도 사용할 생각일랑말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염치상 당숙들은 군소리없이 저희 작은집에게 밭을 사용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않았고, 이리하여 지금까지 이릅니다.

 


∇ 원래 큰집임야였던 야산 3천평 일부모습(사진에 일부보이듯 성산 우측엔 고인돌문화재가 있음)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큰당숙이 정말 악해서 큰집임야등기장난을 쳤는가인데,
정신이 훽해서 그런것이지 정말 사람이 그래서 그런것이 아니며, 원인은 아래처럼 조상신이 노해서임이 큽니다.
당시 큰아버지가 저희 작은집에 야산공동갑 제의 수년이후,
제부친은 일단 논을 더 받기전까지 야산을 빌려쓴다 생각하고 확장,개간해서 밭을 늘렸는데 그과정이 문제였습니다.
큰집이 이미 개간한 100여평 바로 밑 주변에 우리 신씨 웃대조상묘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을 순리대로 이장하고
개간해야했는데 그러지를 않고, 그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서 이장시켜 버렸습니다.
묘지순서가 웃대는 위로 아랫대는 아래여야하는데, 웃대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놨으니,
이른바 아랫대와 겸상하는 형세인것입니다.

∇ 그 문제를 만든 조상성산 근처모습이며 사진상에 보이는 묘지가 그것인지는 정확하지않음.

 

 

그래서인지 내나이 4세경 그조상묘 이장사태이후 저희집안에 별의별 불화가 끈이지를 않았습니다.
세살때까지 기억으론 부친이 선한 사람이었는데, 조상묘사건이후 거의 괴물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그 만극한사건이 있은직후 큰집 장녀가 저희부친에게 조상묘를 제대로 이장시키라고 항의했지만,
"출가외인은 문중사에 참견말라"며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며 간혹 술취해서 큰집에 찾아가 "제발 논이나 좀 떼주라"며 추태를 부렸다고합니다.

 이렇듯 제부친은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 집안이 시끄러웠으며, 자녀들에게 위협하면서 자주 학대했습니다.
3남2녀중 첫째가 누나인데(둘째는 나 장남) 누나는 결혼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에 이르고맙니다.
모친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내가 국민학교다닐때 어느날 다리를 크게 다쳐,
모친외가의 가족력 파킨슨병이 되살아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킨슨병으로 고생중이십니다.

 

조상묘사건 그때시점에 첫째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나중에보니 지적장애아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적장애였는데 장애 극복하려는 노력을 않했고, 나중에 커서는 인성에 문제있는 인격장애에 이릅니다.
예로 어둑한 밤에 자려는 동네노인들의 집에 자주 찾아가 못자게 말을걸며 귀찮케하는 진상짓에,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다 못해 남의 자전거를 편취해 지금까지 훔친 자전거만 50대가 넘으며,
부모님돈 훔치는것도 모잘라 어렵게사는 먼사촌댁에 침입해 기물파손 및 절도행각이니, 못쓸인간 그자체입니다.

 

 

한편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내나이 5세때 어느날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습니다.
그래서 그칼이 그대로 제 머리에 맞아 꽂히어 머리부상을 당했고 사경을 해맸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후천적 지적장애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나의 친지중에서나 죽마고우도 이후 사회직장사람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선천적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달리, 후천적 장애를 딪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머리부상으로 상처는 아물었으나 뇌를 다쳐서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생기기도해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지요.

사회생활에서도 일이 서툴다고 종종 핀잔을 듣기도해,
자의,타의로 그만둬야했던적이 수차례일정도로 절망과 고독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분발하려 하며 나름 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년기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그냥 특출나지않는 소년이나 사람으로만알뿐
귀촌시 골사모에 저의 삶의 사연을 올려서 읽으신 분들외에는,

뇌를 다친줄은 죽마고우도 지금까지도 모르고있고, 주위 사회인은 더더욱 모르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유증이 심해져서 기억력이 퇴화되고
앞면장애,마비가 조금씩 생기다보니 대인기피는 어쩔수없는거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와 기억력에 있어, 지금까지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지금도 회상하면 내인생에 신묘한 사건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가사난으로 중퇴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검정고시학원 반에서 등수가 2~10등으로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도 받으며, 고졸자격을 이수했습니다.

 

 

그리고 고졸자격이기에 병역을 민방위가 아닌 단기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단기병으로 제대하기까지 말년휴가까지 포함해 보통 많게는 포상휴가가 5차례입니다만,

군대생활을 다만 열심히했을뿐인데 휴가가 8차례 가까이(한달) 됐으니,

군선.후배들이 포상휴가 비법의 조언을 구할정도였습니다.

∇ 단기병 복무시 군사단 무등산 미화활동대회에서 포상휴가 받은사례 활동모습.

 

가문사람중 삶이 나은 인생이 아니지만 노력과 배푸는 공덕을 실천하였기에 저주도 저멀리가지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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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전까지의 후원관련 이미지영상

 


 

그 야산에가면 간혹 개콘 명훈아~ 버젼처럼
"조상님, 조상님, 우리 조상맞소? 응? 도대체 정체가 뭐요?.." 하고 반문이 들지경입니다.

위처럼 참담한 사건들이 있은후 조상도 조상나름이라듯,
그조상하면 별로 역이고 싶지않은 대상일뿐 그리 반기어 모시고싶은 대상은 아닙니다.

 

∇ 최근 귀촌해 봉양하는 마음으로 문제의 성산주변을 조금씩 정돈한 모습입니다.


누가 어느신을 믿는지 묻는다면 두루믿는 케이스로, 좀 온전한 신이라면 다믿으나 아닌신은 상종도 않는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모르겠으나 예수님하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하는 일부 천주교인들과
촛불에 앞장선 진보기독교인들이 가끔 떠올립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한켠에는 은혜와 소망의 예수님, 낮은자의 예수님으로 남겨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러운 부처님도 그리워져봅니다.
기독교 덕목의 '믿음,소망,사랑'도 괜찮겠지만, 불교에서 "공덕하여 성불하소서"하는 격언이 마음에 와닺습니다.

이세상에서 사람들이 "공덕=인간질" 이것만 잘하면 천하태평인것을 생각해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