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물창고/임경석의 역사읽기

은행나무 2020. 7. 28. 19:17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장재성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 주도 뒤 옥중 처형… “사회주의 계열” 서훈 안 줘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장재성(왼쪽). 1943년 찍은 가족사진.

장재성 옆에 부인 박옥희와 큰아들 장상백(11개월). 장재성기념사업회

 

1962년 3·1절 일간지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내각 사무처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운동유공자심사위원회는 (1962년 2월) 28일 하오 제3차 회의를 열고 수훈 대상자를 다시 검토한 끝에, 단장을 받게 된 장재성씨에 대한 수훈을 취소키로 결의하였다. 알려진 바로는 장씨에 대한 취소는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건국공로훈장 수훈자의 총수는 205명으로 줄어들었다.”1

 

1962년 첫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에서 탈락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張載性)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겐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 1등 중장(重章), 2등 복장(複章)에 뒤이어 3등 훈장을 뜻했다.

 

해방 뒤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17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겨졌음에 눈길이 간다. 공동체의 규범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이처럼 지체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이 정체성 확립과 관련해 얼마나 무신경하고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2년 독립유공자 서훈 제도에는 정치공학적 책략이 숨어 있었다. 5·16 쿠데타가 벌어진 이듬해였음에 주목하자. 자신의 취약한 적법성과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애국선열 포상, 유공자 후손에 대한 원호, 민족문화 보존 등의 정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공동체적 가치를 선양하는 효과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노렸다. 집권 뒤 첫 3·1절을 이미지 개선에 활용하려 했다. 민족적 규범과 가치를 수호하는 공공성의 대표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온몸에 뒤집어쓴 오물을 가리려고 비단옷을 갖춰 입은 셈이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서훈 결정을 번복한 까닭은,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상훈심의위원회에서는 ‘6개 제외 규정’을 운용했다. 독립유공자라 하더라도 서훈하지 않는 경우를 명시했던 것이다. 이 중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게 3개항이었다. ‘국시 위배’ ‘납북’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등의 항목이다. 설령 독립운동에 큰 공로가 있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 장재성은 이 내부 지침의 희생양이 되었다.

 

광주고보 5학년 때 사회과학 연구모임 결성

 

장재성이 처음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은 그가 19살 때 일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11월3일이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6명이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깰 성(醒), 나아갈 진(進)이라는 모임 이름은 세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지침 삼아 함께 전진하자는 뜻을 담았다. 사회과학 연구모임이었다.

 

22살 때 장재성의 비밀결사 관련성은 더욱 심화했다.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1929년 6월 귀국했다. 전업으로 비밀결사운동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새 사회과학 비밀모임은 광주 각급 중등학교로 퍼졌다. 앞에 언급한 두 학교에 더해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독서회’ 또는 ‘소녀회’라는 이름의 사회과학 연구모임이 움직였다. 장재성은 이 비밀단체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학교별 독서회를 지휘하는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 직위에 올랐다.

 

광주고보 독서회 사례를 들여다보자. 구성원은 17명인데, 5개 반으로 나눠 반별로 독서모임을 열었다. 즐겨 읽은 책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같은 마르크스 저작, <사회주의 대의> <무산자정치교정> 등의 해설서, <노동자전> <학생과 정치> 등과 같은 참고서였다.

 

이들은 그해 6월 하순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회합했다. 참가자 최성원의 기억에 따르면, 장재성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발언을 했다. ‘우리가 저들의 쇠사슬에 묶여 영원히 노예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될 것인가? 이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지을 일이지 남의 자비심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독서회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난 뒤 평탄하고 광활한 중머리재를 누비며, 난생처음 혁명가를 부르면서 시위행진 연습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랬다고 한다. 그때 예행연습이 없었더라면 11월3일의 대시위가 과연 이루어졌을까? 아마 <학도가> 따위의 창가나 부르면서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손쉽게 해산당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재성은 활동 영역을 비밀결사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합법 영역의 공개적인 사회운동도 중시했다. 1929년 광주 출신 국내외 유학생들을 규합해 ‘광주유학생회’를 조직하고 간부로 취임했다. 또 같은 해에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에도 참가했다. 1929년 9월 광주에서 열린 도연맹 제2회 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그의 활동상은 다각적이지만, 외연이 일정한 범위 안에 있음이 눈에 띈다. 바로 광주 일원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이었다. 그는 합법과 비합법의 양 공간에 걸쳐 광주의 청년·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장재성과 그 동료들이 개척한 합법 영역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소비조합운동이었다. 학생들 왕래가 잦은 북성정(北城町) 네거리, 오늘날 금남로4가역 교차로 금남로공원 중앙로변에 위치한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을 임대했다. 그곳에 문구점과 빵가게를 열기 위해서였다. 빵가게 이름이 이채롭다. ‘장재성빵집’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찾던 호떡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다다미 18장이 깔린 널찍한 2층 공간이 유용했다. 비밀모임이나 은밀한 작업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을 압수수색한 일본 경찰의 보고서에 따르면,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회의용 탁자가 덩그러니 놓였다고 한다.2

 

일본 경찰이 그린 독서회중앙본부의 합법 소비조합 건물. ‘장재성빵집’과 문방구. 1층에 두 개의 가게를 열었고,

다다미 18장이 깔린 2층은 비밀모임과 인쇄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썼다. 장재성기념사업회

 

거듭된 옥살이 끝 6·25 때 옥중 총살당해

 

장재성은 11월13일 체포됐다. 광주 학생들의 11월3일 첫 시위, 11월12일 2차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였다. 그는 ‘광주 3대 비밀결사 사건’의 피고인 116명의 수뇌로 간주됐다. 그리하여 1930년 10월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6월13일 상급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4년형을 언도받았다. 동료 피고인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1934년 4월11일 만기 출옥한 뒤에도 장재성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40년 반일 시국 사건에 연루돼 다시 3년을 복역해야 했다.

 

해방 뒤 장재성의 행적은 단편적인 정보만 알려져 있다. 8·15 직후 광주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조직부장으로 일했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 14명 중 한 사람으로 일했다. 그는 민전 활동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1947년 7월11일 우익 청년단체 50여 명이 광주민전 사무소를 습격해 사무국장 장재성을 비롯한 2~3명이 무수히 폭행당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현장에는 ‘상당한 길이의 단도’와 흉기, 몽둥이가 팽개쳐져 있었다고 한다. 장재성은 인사불성의 중상을 입고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3

 

광주민전 피습 사건 이후 장재성은 비합법 영역으로 활동 중점을 옮긴 것 같다. 1948년 8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황해도 해주를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대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다. 언론매체에 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피검 기사다. 그에 따르면, 장재성은 1949년 4월4일 밤 11시30분 서울 시내에서 종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됐다.4  남로당에 가담한 혐의였다.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살아서 형무소 문을 나서지 못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6·25전쟁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정세 속에 그는 다른 정치범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됐다고 한다.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 채였다. 전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 기준에 문제가 있다.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되던 때부터 군사독재 정권의 책략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음을 이미 살펴봤다. 다행히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개입은 약화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도 점차 유공자로 인정받는 사례가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더 큰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외압이 이뤄지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현행 독립유공자 심사 기준에는 문제 조항이 살아 있다. 해방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동조한 경우에는 설령 독립운동에 현저한 공로가 있더라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이데올로기적 외압 조항은 역사적 진실에 배치된다. 독립유공자 여부는 오직 순수하게 독립운동 공적 유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1945년 8·15 이전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적이 있는지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도 사후적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외압은 배제돼 있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가 애국지사다. 그로 인해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이다.

 

이데올로기적 외압 조항은 시민사회 여론과도 배치된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중진으로 구성된, 보훈처의 자문기구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 관해 권고한 내용에 귀 기울여야 한다. 판단 시점을 1945년 8월15일에 두고, 그때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전에 그의 사상이 어떠하든, 또 해방 뒤 정치적 행적이 무엇이든, 그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독립운동 공적만으로 유공자 판단해야

 

이데올로기적 외압은 역사학계 정설과도 충돌한다. 2019년 5월 열린 ‘정책토론회: 독립지사 서훈,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도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은 “해방 이후의 행적은 포상의 대상에서 불문에 부쳐야 한다. 사회주의자들과 현재 북한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용욱 교수도 “해방 이후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고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지금 우리 국격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토론회 자리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의 수장으로 있는 역사학계 원로들도 합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5

 

장재성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교·대학 시절부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작가, 지금은 장재성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일하는 황광우는 되묻는다. “독립운동하다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분을 서훈하지 않으면 누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까?”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張載性씨 수훈 취소’, <동아일보> 1962년 3월1일치.

2. 光州警察署 道警部補 福本直能, <檢證調書>, 1929년 12월17일. <思想月報> 1-11, 254쪽, 1932년 3월.

3. ‘광주민전사무소를 백여 명이 습격 테로’, <경향신문> 1947년 7월15일.

4. ‘남로 孔慶漢등 검거’, <조선일보> 1949년 4월7일.

5. ‘독립유공자 공적 기준 시기 1945년 8월14일 이전 한정해야’, <연합뉴스> 2019년 5월2일.

6. 황광우, ‘광주학생독립운동 장재성, 부끄러운 광주’, <남도일보> 2020년 1월27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