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야기)

choyeung 2008. 12. 23. 15:13

 

젊은 화가의 모습 김봉기(金棒璂)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구상작품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봉기(1923~) 화백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진주사범을 나와 1949년이후 1963년까지 부산사범학교와 부산사대부중에서 미술교사를 한 적이 있으며 당시 본인의 스승이었다. 부산 사대부중은 현재 부산 서중(西中)으로 바뀌었으나  당초의 위치는 서구 아미동에 위치해 있었고 나중에 이전하여 화랑초등학교와 같이 교정을 사용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미술수업에는 수채화 물감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교실에서 유화물감으로 그림작업을 하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사실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었다. 선생은 화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인지 방학 기간중에는 주로 학교 교실에서 작업을 하였다. 책.걸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교단이 있는 곳에는 크다란 100호짜리 켄버스를 의자로 받쳐서 세워놓고 그렸으며 당시 부인께서도 임신한 몸이었지만  현장에 나와서 그림작업에 대하여 나름데로 평가와 충고를 하였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선생은  교실에서 그림작업 중에는 가끔 나오도록 하였던 것으로  신기하게도 바탕칠을 하는 단계에서 부터 차츰 그림이 완성되어 가던 전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항상 소지하고 있었던  물건 중에는 두터운 켄트지로 된 여러 권의 드로잉 책에는 인체에 대한 각가지 누드 포즈가 연필로 수도 없이 그려져 있었고  특히 인물에 대한  습작이 많아서  따로 열심히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나의 중학교 시절 특별활동으로는 1학년부터 음악반(합창반)에 가입하였는데  당시 남여학생들이  대개 소프라노로 음역이 같았지만  본인  목소리는 변성기로 접어들어서인지 발성이  낮게 변하여 자연히  푸대접을 당하였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미술반을 기웃기웃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방학중에 그림작업을  집중적으로 하였고  반장이던 본인을 심부름을 시킨다면서 자주 불렀으며  언젠가 "너도 그림을 한번 해 보거라" 는 말도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늦게나마 그림을 시작한 것이 선생의 이런 말씀이 기억에 남아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선생은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난 후 1965년에 도불 개인전을 인사동에서 개최하였고 국비로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공부를  마친 후에는 대학교수로 발탁되어 전적하였다. 현재 선생은 미국 LA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고 하나 소수문하여도 연락을 할 수 없다. 아래 글에 의하면 선생은 진주사범에서 일본인 선생에게 미술지도를 받은 것 뿐으로 오직 독학으로 예술혼에 잠겼던 것이며 평소 그림을 밥보다 즐기었던 것이다.

특히 선생의 작품은 1960년 전후의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인물을 전원과 도시풍경을 배경으로 특색있게 그렸다. 그림속에 나오는 대상과 주제들이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을 열심히 가꾸어 가는 사랑스런 우리들의 가족과 사회 군상들을 취급하여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부산지방의 화단에서 활동하면서  켄버스에 무거운 부피를 포개는 기법을  좋아했으며 현실에 가까운 리얼리즘과 보다 아카데믹한 성향을 즐겼다.   

-제13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풍년]으로  대통령상 수상(1964년), 제12회(1963년) 국전 특선-뜰, 제9회 (1960년) 국전 특선

 

 

                                                             [풍년] , 유화, 100호, 1964년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품

 


남달리 인물화 즐겨 그렸던 사실주의 작가중 한사람

-"한국의 미술학도" 자신 소개 1964년 국전 대통령상 수상

 

역사를 잃으면 미래를 잃는다고 한다. 부산의 미술사 가운데 1940년대 기록은 흐릿하다. 1940년대 후반은 부산미술전과 관련된 기록이 다소 남아있다. 그중의 하나가 1940년대 부산에서 사실주의 그림을 최고 잘 그렸다는 서양화가 김봉기(金棒基·1923~)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경남 남해 출신으로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1949년 당시 부산사범에서 미술교사를 하고 있었다. 50년대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1964년에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미국 이민을 갔는데 현재 LA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동생 김병기도 50년대까지 그림을 그렸다.

김봉기에 관한 기록은 민주중보의 인터뷰 기사(1949.10.21)다. 다음은 재구성한 내용이다. 배움의 종소리가 고요하고 맑은 대기 속에서 무르익는 가을, 보드라운 햇살이 소리없이 숨어드는 미술실 여기저기에 캔버스가 놓여있고 학생 두 명이 구상을 그리고 있다. 그 옆에서 청년화가 김봉기는 출석부와 연필통을 어루만지면서 말한다. '배웠다는 건 오직 진주사범에서 일본사람 니시무라 선생에게 학생으로서 미술을 지도받은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순전히 혼자 익힌 셈이지요.' 일찍이 초등학교 때부터 싹 튼 예술혼에 잠기면서 그림을 밥보다 즐기고 있다는 그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학교는 부산사범이었고,그는 네 해 동안 자신의 옛 모습처럼 미술을 좋아하는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도 프랑스도 가보지 못한 한국의 미술학도'라는 것은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그는 스물여섯의 청년화가!

당시 그는 유화 가운데서도 남달리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8·15 광복 이후 미전이 있을 때마다 떳떳하게 기성대가들에게 도전하다시피 붓을 휘둘러 출품작이 벌써 열 다섯 작품이 넘는다고 한다. 더구나 부산에서 열린 미전에 낸,그의 온순하면서도 불타는 마음이 가득 찬 화폭들 모두가 젊은 부산화단의 놀랍고 야릇하게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지난번 경남미술연구회전에 미완성으로 출품한 '소녀와 메'를 그린 유화 한 폭을 다시 정성들여 가다듬던 붓질을 멈추면서 말했다.

'저는 여태까지 해 온 것이,얇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는다는 한결같은 마음에 그칩니다. 말하자면 지축(地軸)까지 포개져 있는 무거운 부피와 어떤 안전감,현실에 참 가깝게 가는 리얼리즘,다시 말하여 아카데믹한 쪽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날 여러 나라들이 걸어온 자취를 더듬어 볼 때 아무런 밑바탕도 없이 그저 쉬르리얼리즘에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지만,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밑바탕 그리기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의 중간에 끼어들면 쉬르리얼리즘 그림이 당시 부산에 있었다는 것은,부산 문학의 선구적인 초현실주의 도입 등과 아울러 볼 때 그 정체는 물론 해명을 요하지만 '모던한' 부산 문화의 한 경사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면서 교직에 매여있기 때문에 도무지 제작과 수업의 시간적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고통도 많다고,높은 이마를 찌푸린다. 그의 아틀리에는 서대신동 자택에 있지만,그보다는 학교 미술실에서 학생들과 한마음 한몸이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부산에는 전람회를 열 장소 하나 버젓하게 없으니 말이죠. 독일에는 미술관이 700개나 있다는데 이 땅의 현실은 너무 하지요. 민주중보사의 미전에는 해마다 감사하고 있습죠. 구상이 하도 많고,아직 붓도 들지 못하는 바쁜 터이지만 오늘부터라도 밤을 새워가면서 제작을 할 작정입니다. 걱정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딱하지요. 하지만 이 딱한 현실에 사는 나로서는 현실을 그대로 힘있게 표현할 뿐입니다.'

참 아름다움에 육박하고 있는 김봉기의 모습은 1940년대가 끝날 무렵의 부산미술계의 한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무척 반가운 자료이다. 이로 미루어 그때 부산화단에 이미 사진처럼 그리는 사실화뿐만 아니라,넓게는 반구상도 아우르는 현실주의(리얼리즘) 그림이 나타나 있었으며,아울러 그러한 구도를 넘어 선 초현실주의 그림이 있었다는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겠다. 그런 유파들의 그림을 그렸으나 그 흔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부산미술사의 복원이 될 터이다. 그것이 과제로 남아있다.

[판화가 이용길 -내가 본 부산미술]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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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중 14회 미술부 출신 염광섭이라고 합니다.제가 2학년때 선생님께서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신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3학년때 경남고를 거쳐 진주교대로 옮겨 가신 후 도미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뒤 소식은 저희들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오랜만에 존경하는 선생님에 관한 글을 대하니 정말 반가웠습니다.선생님 재임중에는 각종대회에서 수상도 많이 했지만 선생님께서 떠난 뒤로 새로 부임하신 젊은 선생님은 비구상 작가였기 때문인지 지도방법이 판이하게 달랐고 저희들은 중간지대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꿈을 접었답니다.아마 김봉기 선생님께서 사대부중에 그냥 계셨더라면...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만 지나간 부질없는 일이지요.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후 소년시절 예술에 대한 꿈을 되살리려 붓을 다시 들었고 서예와 서각도 하고 있답니다.저보다는 많이 선배이신 것 같은데 매우 반가웠습니다.가슴 두근거리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