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水 꽃피는 고향에 시 . 人生論理 .

사람과 관계는 파도다. 삶. 살아온 생애의 고난 성취 감동 그 누구도 느끼지 못 한 人生論理者와 함께 합니다. 인생관의 고난을 블로그에 글로 하세요. 고민하시면 건강을 해침니다.

인생은 양파 껍질

댓글 157

人生 論理 淸水 꽃피는 고향에 시

2020. 11. 27.

인생은 양파 껍질/淸水 꽃피는 고향에 시/인생 론리 칼럼작가

 

1 조선땅 시조 시작

조선팔도 땅 어딘가에 살면

이나라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를

알아야 살고있는 자신을 알게된다.

 

조선 시조  목차

1.목조 2.자연 3.천상 4.광희 5.입전 6.경휴 7.염순 8.승삭 9.충경 10.경영 11.충민. 12.화(華) 13.진유 14.궁전 15.용부 단신(端信)16인(.璘)

17.양무(陽茂)

 

(18)목조(穆祖)(追寗)

2.영필 3.영일 4.영습

19. 1.안천대군 2.안원대군 3.안풍대군 익조(翼祖 追寧) 5.안창대군 6.안흥대군

20. 1.함녕대군 2.함창대군 3.함원대군 탁조(度祖) 5. 함천대군 6.함흥대군 7.함양대군 8.함성대군

21. 1.완창대군(完昌大君)

 

환조(桓祖)(追寧)

3. 환원대군 4-환천대군 5.완상대군

 

선원계도(璿源系圖)

조선 역사 5천년 전통를 이어온 우리민족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桓祖시대의 왕조는 고구려 궁예가 동생으로 한 왕건에게 넘기고

주권을 잃어 목숨을 부지하려고 궁예는 부하을거느리고 지금의

산정호수 명성산으로 은둔하려 하려 하였으나

완건의 군사에게 쫓겨 명승산 절벽 바위에서 창검으로 격투하다

결국 궁예는 칼에 맞아 피흘리며 목이베어져 떨어진다.

(여기에서 역사 글은잠시 접어둔다.)

 

(桓祖)의 및 음

태조 이성계는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년) 10월 11일 화령부

(和寧府" 영흥)에서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성계(成桂). 자(字)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며

등극 후에 이름은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바꾸었다.

비는 신의황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계비는 신덕황후 강씨(神德王后康氏)다.

  태조는 1356년(고려 공민왕 5년) 등용되어 1361년 홍건적을 방어하고

1362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복면 병마사가 되어 던산동에서 대파했으며. 1370년

에는 원나라 동령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또 남해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여러차레 토벌하여 위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1388년(우왕 14년)에 우군통도사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을 제거하고 우왕(禑旺)을 폐한 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뒤 전권의 병권을 장악했다.

이 무렵 그는 진흥 정치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여

공양왕 3년)에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고. 전세 개혁을 단행

하여 구세력을 폐위하고 1392년 7월 17일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태조 2년) 3월 15일 국호를 "조선이라 고치고 이듬해 수도를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태조의 마지막 유언

태조 이성계는 함흥이 고향이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황후 강씨와 함께 묻히기를 바랬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처럼 쌍릉에 합장되기를 바라고 축소한것이

신덕황후의 정릉이다. 그렇치만 계모 강씨와 사이가 좋치않았던

태종(太宗)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태종 이성계의 부자 관계는 골이 꽤 깊었다.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방원(芳遠 : 태종)이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황후 소생의 두 아들을 모두 살해하고 동모 형제까지

제거하자 태조  이성계 분노는 대단했다.

그는 곧 방과 (芳果 :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다.

2년 뒤 성종이 상왕이 되고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서을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함흥으로 돌라갔다.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차사를 보냈는대 그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이때부터 갔다가 소식도 없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 차사라

고 부르게 되었다.

태조가 차사를 모두 죽여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설에 전하지만.

문헌에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의 희생만 이

알려 있다.

그러나 박순(朴淳)역시 (태종 실록)에 의하면 조사의 난이 일어나자

그때 함주의 군중에서 피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간청으로 마음을 돌린 태조가 한양 근방

까지 왔다가 마음이 동요되어 지금의 의정부 자리에 머물며 입경을

미루자 조정의 신하들이 태조를 배알하여 정치를 논했다고 한다.

의정부라는 지명은 그때 생긴 것이라 전한다.

  서울에 돌아온 태조는 덕안전(德安殿)을 새로지어 만년에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에서

보령 74세로 승하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神武大王)이고 묘호는 태조이며.

1899년(광무 3년) 12월 19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되었다.

태조가 승하한 뒤 태종을 신덕황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은 따로 서울 가까운 곳의 길지을 물색하여 지금의 구리시

자리로 결정하였다.

 

제9대 성종왕 시대 인수 대비 

역사는 되돌아 온다.

양녕대군은(文宗 단종)의 오른팔 병조판사(兵曹判事)

김종호의 집으로 찾아가 죽였으나 확실히 광화문

궁궐 밖에서 완전히 죽인후 대궐로 들어가 병권를

장악한 후  6대 어린왕 단종을 유배시키고 왕이된 후

단종의 세력이다시 역모를 꽤하므로 단종을 사약을 내린다.

역사적 권력다툼은 지금이나 예나

여자의 치마폭 정권 다툼이다.

제 9대 성종이 왕이 되기전 궁녀(송이는)

성종보다 9살 위로 성종을 어른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었다.

성종의 왕비 인수대비와 대왕대비의 권력은

여인의 치마폭속에 있었다.

충신 한명회는 궁직이로 세조을 임금으로

만드는대 커다란 역할를  하였다.

여기에서 궁녀로 있던 (송이)파평 윤씨가

성종대왕의 왕비가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정치권력의 암투는

정치가 아닌 여인의 시샘 투기 다툼에서

궁녀였던 (송이)가 임금의 왕비가 되어

온갖 음모로 인수대비를 궁밖으로

쫓아내는 (송이)궁녀였던 왕비가 되어

권력 다툼으로 사약을 받고 폐위가 된다.

 

송이는 어떤위치에 있었는가

그 누구나 처음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그 보다 더 큰 정치적

욕심을 탐욕하는대 있다.

제9대 성종왕은 자신의 소신의

정치를 펼 수 없었다.

그것은 대왕대비와 (송이)궁녀였든

그가 아내로 왕비가 되어

어머니 인수대비 왕비를 궁밖으로

내쫓는것은 송이가 나라의 정권를

쥐려는대에서 성종대왕

인수대비와 대왕대비 송이의

지나친 욕심으로

성종은 파평윤씨 일가로

주요한 권력자리를 차지하고

성종왕으로 성종이

원하는 정치를 펼 수 없으므로

결국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와

정치를 도모하게 된다.

이에 (송이)는 천한 여자로

궁녀였던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성종시대 

정권를 장악하려는대 있어

궁녀가 되어 (송이)는 왕비가 된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던것을

지나친 정치야망으로

신분이 궁녀었든 (송이)는 임금의

왕비가 된것으로 더이상

허욕을 부리지 않았어야 하였다.

종이었든 (송이)는 대왕대비

정치의 휘말려 인수대비를

독약으로 암살 하려다가

제9대 성종대왕은 파평윤씨(송이)는

제9대 성종대왕에게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양파속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의 마음속은 하나의 틀이다.

가자고있는 하나의 사물은

그가 어떠한

권력의 힘을가지고 있다 하여도

양파 껍질에 불과하다.

사람의 공허에서 존재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들여다 보면 가면은 양파 껍질로

지난날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벗겨 하나식

내려보아도 미련 없는

마음의 껍질 뿐으로

나오는건 텅텅빈 내미음의(혈관속)에

들어있는 가슴의 박동소리

들으려는가

우리에게 쥐어진 이 시간은

관념으로 인생사

허무함을 깨달아야 하는 수법으로서

존재 한다로 보아.

 

사람의 생존으로 

가지는 것은 결코 확고히

가슴의 심어지는것이 아니며

세월속에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유전으로 있어서

끊임 없는 새로운 변화로 인하여 

바다 지평선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파도의 거품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의 생존은 지속 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라면

자신의 존재가치다.

그 존재가치가 끊기느냐

보존하는대 있어서

인생으로 옮은것은

왜면하고 요구를 취하는

존재의 비롯되는 사물의의한

객관적 자신의 존재를 나타

내는 자아의

허욕스러운 것의 불과한 것이다.

즉 인생은 흐르고

홀러서가는 데 불과하다.

인간으로 하나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집념하면

뇌파의 심리로

저장되는 건

하나의 불길이

분수대와 같이 솟구치는

욕망의

현상은 인간의 동맥의

혈관이 끊기면

인간의 생명이 중단되어

죽음에서 마자막인

의지의 존재가치는

마자막 무(無)의

인간을 벗겨도 또 까내려

벗겨도 양파 껍질로

마지막 양파는 아무것 없는 공":":

 

'人生 論理 淸水 꽃피는 고향에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여인들의 눈물  (176) 2021.01.03
이보게 . 인생 차 한잔하세  (222) 2020.12.26
사람과 관계는 파도다  (170) 2020.12.18
인생은 양파 껍질  (157) 2020.11.27
인간의 무지  (87) 2020.11.24
인생에 장터  (124) 2020.11.09
인생 낙엽따라  (137) 2020.11.02
人生 12支 福吉  (87) 20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