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아웃도어 후기

    인피니티 2010. 2. 23. 23:49

     

    ● 산행일시 : 2010년 2월 21일

    ● 날씨 : 약간 흐림

    ● 산행시간 : 9시간 32분 (식사시간 23분 포함)

    ● 산행 코스 : 은고개→외동장대지→벌봉→봉암성→동장대암문→북문(전승문)→북장대지

                         →서문(우익문)→전망대→연주봉옹성→서문(우익문)→수어장대→청량산  

                         →영춘정→남문(지화문)→제1남옹성→제2남옹성→남장대지→제3남옹성

                         →동문(좌익문)→송암정→장경사→장경사 신지옹성→동장대지→동장대암문

                         →봉암성→한봉성 표석(한봉,벌봉사이)→큰골 탑공원→한봉→약수산→약사산

                         →396봉→은고개

    ● 거리 : 약 22.5km

    ● 각 지점별 통과시간

    09 : 15  은고개 교차로신문사 건물앞 출발 

    10 : 29  챙성암문

    10 : 35  외동장대지 표석

    10 : 37  벌봉 표석  

    10 : 40  벌봉

    11 : 08  봉암성 표석

    11 : 12  동장대암문

    11 : 40  북문(전승문)

    11 : 52  북장대지 표석

    12 ; 07  서문(우익문)

    12 : 10  전망대

    12 : 18  연주봉옹성

    12 : 29  서문(우익문)

    12 : 34  병암

    12 : 40  수어장대

    12 : 49  청량산 정상

    12 : 57 ~13 : 20  점심식사

    13 : 25  영춘정

    13 : 38  남문(지화문)

    14 : 07  제2남옹성

    14 : 08  남장대지 표석

    14 : 15  제3남옹성

    14 : 44  동문(좌익문)

    14 : 51  송암정

    15 : 05  장경사

    15 : 15  장경사신지옹성

    15 : 28  동장대지 표석

    15 : 31  동장대암문

    15 : 40  봉암성

    15 : 59  한봉성 표석(한봉,벌봉 사이)

    16 : 00  한봉성암문

    16 : 14  큰골 탑공원

    16 : 28  큰골 입구

    16 : 49  한봉

    18 : 04  약사산

    18 : 19  396봉

    18 : 47  은고개 하산

     

    ● 산행지도

     

    구글

     

     

     

     

     

    ● 산행 고도표

     

     

    ● 남한산성 개요

    종 목 사적  제57호
    명 칭 남한산성(南漢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598,195㎡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재)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

    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

    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 성곽

    남한산성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

    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에

    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

    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은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

    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

    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

    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

    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 산행후기

    남한산성은 몇 번 산행한 적이 있으나 성곽 전체를 살펴볼 기회는 없었는 데 이번에 성곽을

    모두 돌며 남한산성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산행에 참석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4성문 16암문 5장대 5옹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 길이는 8km라고 한다.

    4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고 16암문은 원성에 11개 암문, 봉암성에 4개의 암문, 한봉

    성에 1개의 암문이 있다.

    5장대는 동장대, 수어장대(서장대), 남장대, 북장대, 외동장대가 있었는 데 현재는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5옹성은 연주봉옹성, 제1남옹성, 제2남옹성, 제3남옹성, 장경사신지옹성이 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이렇게 4성문과 16암문을  합해 20성문 종주로 이름붙여 본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남한산성 20성문 종주는 은고개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는 데 교통편이

    불편하여 일단 명일역으로 모여 버스로 가기로 했다.

     

                       ▲ 명일역에 모두 모여 은고개로 가기 위해 1번 출구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성덕여자상업고등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은고개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은고개로 향하는 버스 번호가 없어 불안했는 데

                                              버스를 기다리는 다른 분에게 여쭤보니 그 버스가 이 정류장에 정차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 광주시 퇴촌까지 가는 듯한 13-2번 버스를 타고 은고개로 향했다.

     

     

     

     

     

                       ▲ 은고개 입구 버스 정류장에 하차했다. 왼쪽이 광주시 방향이고 오른쪽이 하남시, 서울 방향이다.

     

     

     

     

     

                                          ▲ 하남시 방향에서 바라 본 광주시 방향

     

     

     

     

     

     

     

     

     

     

     

                       ▲ 은고개 입구에 있는 교차로신문사 건물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했다.

     

     

     

     

     

     

     

     

     

     

     

     

     

     

     

     

     

     

                       ▲ 돌계단을 시작으로 은고개에서 벌봉쪽으로  출발.

     

     

     

     

     

     

     

     

     

     

     

                       ▲ 남한산성 성곽중 처음으로 우리 일행들을 반겨주었던  봉암성의 모습

     

     

     

     

     

                       ▲ 챙성암문 이정표

     

     

     

     

     

     

     

     

     

     

     

     

     

     

     

     

     

                       ▲ 약간 무너진 성곽 밑의 제14암문(챙성암문으로 추측된다)

     

     

     

     

     

                                          ▲ 외동장대지

     

                                  ▩ 장대 :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일반적으로 성의 장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형식이 대부분이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

                                  의 경우처럼 중층 누각형태의 장대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건물의 형태

                                  로 남아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 누각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 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외동장대지 : 이 곳은 망월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해발 514m의 봉암을 이루고 남쪽으로 갈라진 줄기는 해발

                                  410m의 한봉까지 연결된다. 외동장지가 있는 곳은 이처럼 세 개의 능선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정상부는 평탄하고, 해발 고도는 492m로, 이곳에서는 동장대지와 벌봉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

                                  다. 현재 이곳에는 넓은 평탄지역에 고대가 구축되어 있고, 곳곳에 축대를 쌓았던 돌들이 흩어

                                  져 있다. 이 외동장대는 숙종 12년(1686) 수어사 윤지선이 수어청군병을 동원하여 봉암 외성을

                                  축성할 때 함께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조련때 후영장인 죽산부사가 군사 2,000명을 데리고 진을 치곤 하였다. 고지도를 보면 서장대와

                                  남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지만 외동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있는 도면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외동장대는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대만 구축했을 가

                                  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 벌봉 밑에 위치한 벌봉 표석

     

     

     

     

     

                                         ▲ 위용을 드러낸 벌봉 아래에서...

     

                                    ▩ 벌봉 :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

                                    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

                                    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

                                    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

                                    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

                                    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

                                    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

                                    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

                                    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 벌봉에 서다

     

     

     

     

     

     

     

     

     

     

     

     

     

     

     

     

     

     

     

     

     

     

     

     

     

     

     

     

     

     

     

     

     

     

     

           ▲ 성 안에서 본 제13암문

     

           ▩ 암문(暗門) :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이름 그대로 비밀

           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육축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적

           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 보다는 산성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형적으로 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암문은 성의 방어와 관련된 주요한 시설인 만큼 삼국시대부터 축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의

           기본적인 구조물로서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 보인다. 암문의 숫자는 성의 규모에 비례

           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적인 여건에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암문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하더라도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암문 만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암문의 내측에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암문을 폐쇄

           할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에 있는 11개의 암문

           은 남쪽에 4개,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분포되어 있다.
           암문의 구조는 대체로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산성의 암문은 16개의 암문중 6개는

           평거식이며, 나머지 10개는 홍예식이다.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

           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옹성 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대 서남

           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홍예식이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위치에 따라 크기가 매우 달랐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성 동쪽 수구문

           남쪽 20m 지점에 있는 11암문으로 암문의 폭은 286cm이고 높이는 307cm에 달하여 성문에 가

           까울 정도의 크기이다. 반면 가장 작은 암문은 수어장대 남서쪽의 6암문으로 푹은 77cm이고

           높이는 155cm에 불과해 성인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 성 밖에서 본 제13암문

     

     

     

     

     

     

     

     

     

     

     

     

     

     

     

     

     

     

     

     

     

     

     

                       ▲ 제12암문

     

     

     

     

     

     

     

     

     

     

     

     

     

     

     

     

     

     

     

     

     

     

     

                       ▲ 동장대암문을 통과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는 일행들

     

     

     

     

     

                                         ▲ 성 밖에서 바라본 동장대암문(제3암문)

     

        

     

     

     

     

     

                                          ▲ 성 안에서 바라본 동장대암문(제3암문)

     

     

     

     

     

     

     

     

     

     

     

                       ▲ 북문으로 향하며 바라본 동장대암문

     

     

     

     

     

     

     

     

     

     

     

                                          ▲ 내리막길이 눈으로 많이 미끄러워 밧줄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서야 했다.

                                             엉덩방아를 찧고있는 산너머님.

     

     

     

     

     

                       ▲ 산성 밖으로 하남시가 조망된다.

     

     

     

     

     

     

     

     

     

     

     

     

     

                                   ▩ 수구 : 남한산성 해발370∼400m 정도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고, 분지형태의 성내부

                                   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가깝다. 산성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다.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

                                   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 개울물로 물레방아 8개를 돌릴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였다고 한다. 수구문은 동쪽에서 서남

                                   쪽 70m 지점의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한다. 수구문은 110×50×157cm 정도의 대형 암괴를 이

                                   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양측벽에 2단, 또는 3단으로 쌓았으며, 강회몰탈을 빈공간에 채워넣었다.

                                   천장은 180×80×115cm 정도의 대형 암괴 4매를 덮어서 구축하었다. 수구의 폭은 188cm이고

                                   높이는 205cm로서 산성내의 알반적인 암문의 크기보다 더 크다. 수구문의 바닥에 깔린 돌에는

                                   폭 23cm 정도 간격으로 직경 9∼12cm, 길이 6∼9cm 정도의 구멍이 파여 있고, 천장석에도 직

                                   경 7cm, 깊이 9cm정도의 홈이 파여 있는데, 철심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수구문을 통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성내에는 축성 위치에 따라 부분적으로 우수가 모이게 되는 지점에는 별도로 작은 수구

                                   를 설치하여 성벽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성벽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지하였다. 산성내에는 현재

                                   성벽이 무너져서 확인이 어려운 지점을 제외하고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수구는 모두 28개에 달

                                   한다. 일반적으로 수구는 낮은 곳으로 모여든 물을 성밖으로 배출하였기 때문에 배수구의 위치

                                   는 외면에서 볼 때 출수구의 위치가 성벽의 중간에 있는 경우도 많다. 남한산성의 경우도 출수구

                                   의 위치가 바닥에서 100∼150cm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2m가 넘는 것도 있다.

                                   수구의 형태를 보면 바닥돌은 폭 80cm, 두께 20cm, 길이 1m 내외의 판석을 끝부분을 타원형이

                                   되도록 다듬은 다음 체성벽에서 약 30cm 정도 돌출시켜놓고, 그 위에 양측면의 바닥돌의 안쪽

                                   으로 10cm 정도 물리도록 1매, 또는 2매의 성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횡방향으로 길게 뚜껑돌

                                   을 올려 놓아 마무리하였다.

                                   출수구의 크기는 위치에 따라 약간식 차이가 나지만 대략 폭 35cm 정도에 높이는 20cm 정도

                                   이다. 수구의 횡단면 형태는 대략 장방형에 가까우며, 종단면은 바닥돌이 자연스런 경사를 이

                                   루어 성안으로 관통되며 층단쌓기를 한경우는 확인되지 않는다.

     

     

     

                                          ▲ 군포지 앞의 제4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4암문에서 화백동생님

     

     

     

     

     

     

     

     

     

     

     

                      ▲ 북문을 향하며 바라 본 군포지와 제4암문

     

     

     

     

     

                       ▲ 북문 방향 조망

     

     

     

     

     

     

     

     

     

     

     

                       ▲ 성 밖에서 바라본 북문(전승문)

     

     

     

     

     

                       ▲ 성 밖에서 바라본 북문(전승문)

     

                       ▩ 북문(戰勝門) :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

                       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

                       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

                       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꺼워져 약 710cm에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

                       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

                       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

                       두를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 홍예식(紅霓式) : 개구부의 윗 부분을 둥글게 틀어 홍예(무지개) 모양으로 한 형식이다.

                           평거식(平据式) : 성문의 양쪽 벽석으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걸쳐 네모진

                                                  모양의 개거부를 내 형태이다. 성문의 개구부의 크기가 작은 곳에 많이

                                                  이용된 형식이다.

     

     

     

     

     

     

     

                       ▲ 북문(전승문)을 배경으로 단체샷

     

     

     

     

     

                       ▲ 북장대지

     

                       ▩ 북장대지 : 북문에서 서북쪽 245m 거리의 해발 405m 지점에 위치한며, 연주봉과 성내를

                       연결하는 암문의 우측에 있었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각이 함

                       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

                       을 지휘하던 곳이다.
                       북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다.
                       그후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나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나 동장대의 경우에

                       다시 수축하지 않은 것은 한봉성과 연주봉 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

                       만 있을뿐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산성에 있었던 4장대 중 그 규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훼손이 심한 편이다.

                       규모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주변의 잡석들 속에는 기단석과 파편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서문 옆 전망대에서 송파구가 내려다 보인다.

     

     

     

     

     

                       ▲ 성 안에서 바라본 서문(우익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서문(우익문)

     

                       ▩ 서문(右翼門) :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사면

                       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

                       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은 높이

                       210cm이고 폭은 146cm이다. 바닥에는 지대석을 깔고 양쪽에 50×40×130cm의 장방형 홍예기석

                       한 매를 놓고 그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

                       하였다. 문짝의 크기는 85×210cm이며, 표면에는 20×33cm 크기의 방형 철엽을 4cm 정도 겹치

                       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

                       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게 40×20×35cm의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 안쪽

                       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표면이 박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안쪽의 홍예는 높이 227cm, 폭 210cm이고, 측벽부는 114×103cm 정도의 장대석으로 두 단을

                       쌓았으며 높이 170cm 이상부터는 전으로 쌓았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다. 문루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에 일부 우물 천정 을 병용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에 2출목익공식포를 장식하였다.

     

     

     

     

     

     

     

     

     

     

     

     

     

     

     

                       ▲ 연주봉옹성 가기 전에 전망대에 들러 본다.

     

     

     

     

     

     

     

     

     

     

     

                       ▲ 캐슬렉스 골프장

     

     

     

     

     

     

     

     

     

     

     

     

     

     

     

     

     

     

     

     

     

     

     

     

                      

     

     

     

     

     

                                         ▲ 연주봉옹성

     

                                     ▩ 옹성 :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

                                     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

                                     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나 용도, 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지지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

                                     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라기 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

                                     하여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7.7m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

                                     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옹성은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과 직접적인 연결됨이 없이 체성벽의 기저부를 옹성의 상단

                                     으로 하여 축조하였고, 암문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말단부에는 포루를 설치하

                                     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옹성들은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 다른 옹성은 원성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이 옹성에도 포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지는 않는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

                                     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 산너머님

     

     

     

     

     

     

     

     

     

     

     

     

                       ▲ 화백동생님, 산드라님

     

     

     

     

     

     

     

     

     

     

     

     

     

     

     

     

     

     

     

     

     

     

     

                       ▲ 성 밖에서 바라본 연주봉옹성

     

     

     

     

     

     

     

     

     

     

     

     

                       ▲ 다시 서문(우익문)으로 돌아와 수어장대로 향했다.

     

     

     

     

     

                       ▲ 병암

     

                       ▩ 병암 :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정조3년(1779) '남성신수기비문'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 '병암이민하10세기미서'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남한산성은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인화물질 소지 및 흡연이 금지라고 한다.

                          역사 깊은 문화재들이 산재한 곳이니 당연한 것이다.

                           

     

     

     

     

     

                       ▲ 수어장대로 향했다. 맨 왼쪽에 보이는 것이 수어장대이다.

     

     

     

     

     

     

                       ▩ 수어장대 :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

                       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

                       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지나가던 분한테 부탁해 수어장대에서 단체기념사진을 찍어본다.

     

     

     

     

     

                       ▲ 청량당

     

                       ▩ 청량당 : 청량당은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었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

                       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

                       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청량당은 서장대 서편 1단을 내려서 지어져 있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 건물

                       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 문을 달고 좌 우측 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건물인데 좌 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 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

                       하였다.

     

     

     

     

     

     

     

     

     

     

                       ▲ 청량산 정상

     

     

     

     

     

                       ▲ 제6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6암문(다른 암문과는 다르게 겨우 1명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규모의 암문이다.) 

     

     

     

     

     

                      ▲ 점심 시간이 되어 배도 많이 고프고 산성내의 한 탁자에 둘러 앉아 일행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 각종 나물과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까지 넣어 만든 먹음직한 양푼비빔밥.

                           맛있는 식사 시간이 끝나고 다시 성곽을 따라 길을 나선다. 

     

     

     

     

     

                       ▲ 영춘정

     

     

     

     

     

     

     

     

     

     

     

                                          ▲ 남문(지화문)으로 향하는 내리막길

     

     

     

     

     

                       ▲ 남문(지화문)에서 산너머님

     

     

     

     

     

     

     

     

     

     

     

                       ▲ 달근둥님

     

     

     

     

     

                       ▲ 성 안쪽에서 바라본 남문(지화문)

     

     

     

     

     

                       ▲ 남문 앞에서 "구직자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라는 표지판을 들고 있는 119 소방대원인 듯한

                          분들이 보이고 방송 촬영도 하는 듯 하다.

     

     

     

     

     

                       ▲ 성 밖에서 바라본 남문(지화문)

     

                       ▩ 남문(至和門) :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c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성문은 홍예

                       문과 문루로 구분된다.
                       홍예문은 높이 475cm, 너비 335cm, 길이 860cm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으로 구성되

                       어 있다. 성문의 하부 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고는 육축의 높이와 홍예문의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박아 댄 육중한 모습이며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

                       는 원형 그대로이다. 문짝의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장군목 홈이 측벽의 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성문 통로의 바닥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심하며 통로 위의 천장은 동문의 경우

                       와 같이 회벽이 홍예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회벽칠로 둥글게 막아져 있다.
                       다른 성곽의 성문에서는 주로 판자널로 천장을 막고 별화단청을 한 천판을 형성하는 것이 통례

                       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

                       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고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

                       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게 지어졌다. 또한 건축양식으로 비교하면 동문보다는

                       공포와 가구구조, 처마부분 등에서 비교적 형식을 갖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단은 양 측면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생략되어 있다. 향후 보수시에 기단이 설치 되어야 할

                       것이다.
                       화강석 장주초석 위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으며 약한 민흘림이 있다.

                       도리는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공포는 주두, 소로, 초익공을 갖춘 익공계 양식으로 꾸며 졌다.

                       고주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받는 5량가 형식으로서 퇴량이 없이 측면쪽에만

                       대량 위에 충량 2본씩이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정이며 외기반자쪽만 판재로 막아 대었다. 문루는 팔작지붕이며 용머리

                       는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누대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 양식이다. 주춧돌은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10cm의 장주 초석을 사용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 남문(지화문)에서 제1남옹성으로 향하기 전 사시미님과 산드라님

     

     

     

     

     

                       ▲ 제7암문이 보인다.

     

     

     

     

     

                       ▲ 성 밖과 안을 이어주는 도로 통로

     

     

     

     

     

                       ▲ 성 안에서 바라본 제7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7암문

     

     

     

     

     

                       ▲ 성 안으로 향하는 도로

     

     

     

     

     

                       ▲ 도로 출입구와 오른쪽의 제7암문

     

     

     

     

     

                                          ▲ 제8암문(닫혀있음)

     

     

     

     

     

     

     

     

     

     

     

                       ▲ 제2남옹성과 11시 방향의 성남 검단산(535m) 정상

     

                       ▩ 제2남옹성 : 둘레가 318m이며 옹성 끝에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이 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

                       문이 있다. 포루는 동서남 3방향으로 3개씩 9개가 설치되어 있다.

     

     

     

                       ▲ 남장대지

     

                       ▩ 남장대지 : 남장대는 남한산성 남쪽 제2옹성의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고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후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장대

                       위에는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세운 타운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둥굴게 잘 다듬어진 21개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주춧돌은 높이 31cm 내외의 원형 고주초석으로 직경은 50cm 정도이고, 남 - 북향으로 놓

                       여져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880cm인 정방형 건물이다. 성 내부로 향하는 건물터 뒤쪽에

                       는 장대를 지을 때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다. 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성곽을

                       크게 돌출시켜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히는 한편 수성의 효과를 크게 하였다. 특히 돌출된 성곽

                       의 끝으로는 옹성을 설치하여 그 끝에는 포혈을 설치하여 수비하도록 하였다.  

     

     

     

     

                                          ▲ 제9암문(닫혀있음)

     

     

     

     

     

     

                      ▲ 제3남옹성을 향하여

     

     

     

     

     

                       ▲ 제3남옹성을 향하며 뒤돌아본 제2남옹성 방향

     

     

     

     

     

                       ▲ 제3남옹성

     

                       ▩ 제3남옹성 : 제3남옹성은 시축 부분에서 축조가 끝나는 부분의 양쪽 벽이 거의 평행이다.

                       둘레는 125m이고, 31개의 여담이 있었다. 끝부분엔 5개의 포루가 남쪽에 3개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이 옹성의 포혈은 방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구축된 것이

                       특이하다.

                      

     

     

     

     

     

     

     

     

     

     

     

     

     

     

     

                                          ▲ 성 안에서 바라본 제10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10암문

     

     

     

     

     

                       ▲ 성곽 위쪽 부분을 보수하여 쌓은 부분이 하얗게 보여 아쉽지만 더 이상 보수하지 않고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동문(좌익문)을 향해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 성 안에서 바라본 제11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11암문

     

     

     

     

     

                       ▲ 시신이 버려졌던 곳이라 하여 "시구문" 이라고 한단다.

                          시구문은 제11암문 밑에 따로 있는 데 시구문임을 알리는 표석이 제11암문 앞에 있었다.

                          두 개의 문이 모두 시구문으로 사용된 것인지 정확한 표시가 있으면 좋겠다.

     

     

     

     

     

                       ▲ 길 건너 동문(좌익문)이 보인다.

     

     

     

     

     

     

     

     

     

     

     

     

     

     

     

     

     

                       ▲ 수문(시구문) 표석 앞에 안단테님

     

     

     

     

     

                                          ▲ 동문 앞 도로 건너 밑쪽에 조그만 수문이 있었다.(일명 "시구문")

     

     

     

     

     

     

     

     

     

     

     

     

     

     

     

     

     

     

     

     

     

     

     

     

     

     

     

     

     

     

                       ▲ 성 안에서 바라본 동문(좌익문)

     

     

     

     

     

                       ▲ 성 밖에서 바라본 동문(좌익문)

     

                       ▩ 동문(左翼門) :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사용빈도가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은 선조 때에 이미 보수하였고 인조 2년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

                       3년(1779) 성곽 보수시에 이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동문을 '좌익문' 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

                       (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성문은 홍예식이며, 폭은 310cm, 높이는 400cm 이다. 홍예는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홍예 안쪽에는 두께 12cm의 목재 판문을 달고 겉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의 철린을 붙여 보강하였다. 문 뒷면에는 가로 40cm, 세로22cm의 장방형 홈을 파서

                       장군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문의 육축(陸築)은 크고 정교하게 가공된

                       무사석(武砂石)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동문의 경우 일반 성돌에 비해 오히려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성돌의 형태나 축성상태를 보면 개구부의 바깥쪽

                       에서 보았을 때 홍예의 좌측 부분이 여러 번 수축되었음이 확인된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

                       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이며 총안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문 좌측 부분은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

                       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부도 사선을 이루도록 하였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

                       하고 문루의 천정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

                       굴도리 가구(架構)를 둘렀다. 다른 문에 비해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송암정 터

     

                      ▩ 송암정 : 성 밖의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오르면 바위절벽과 그 사이에 말라 죽은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산성리 산 8-1번지에 행당되며 송암정 표지석은 성 안에, 송암정의 바위와 고사목은

                     성 밖에 서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그 사내

                     에게 심오한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 내려 자결하였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렸으므로 '대부송'

                     이라고 부르는 그 소나무이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 제1암문 가기 전 성곽 밑쪽에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인 포루(砲壘)가 2개소 구축되어 있다.

     

     

     

     

     

                       ▲ 제1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1암문

     

     

     

     

     

                                          ▲ 문을 달려 있었던 흔적이 있는, 홈이 난 돌이 위에 보인다.

     

     

     

     

     

                       ▲ 중간 부분에는 빗장이 들어갈 수 있는 네모난 홈이 있다.

     

     

     

     

     

                                          ▲ 제1암문 안에서 바라본 성 바깥, 그리고 산드라님

     

     

     

     

     

                       ▲ 장경사

     

                       ▩ 장경사 :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한는 유일한 사찰

                       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의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 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측면의 칸은 정면

                       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체 평면은 장방향을 이룬다. 건물의 정면에는 각 칸마다 4쪽

                       여닫이 교자문을 달았다. 종무소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에 주심포식 4가가 모기둥을

                       썼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 제2암문

     

     

     

     

     

                       ▲ 제2암문으로 나가니 장경사 신지옹성이다.

     

     

     

     

     

     

     

     

     

     

     

     

                       ▩ 장경사 신지옹성 : 장경사 신지옹성은 둘레가 159m이며 여장이 40개였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루가 구축되었다.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 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 장경사 신지옹성에서 화백동생님, 사시미님

     

     

     

     

     

                       ▲ 옹성끝에 2개의 포루가 보인다.

     

                       ▩ 포루(砲壘) :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을 포루(砲壘)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진법

                       전술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종래의 전술은 궁시류에 의존하였지만, 조총과 화포

                       의 위력을 경험하고 난 이후 조선도 신무기인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여기에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개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산성축조에도 대포를 쏠수 있

                       는 시설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었으며, 축성기법도 화포의 공격에 견딜수 있는 형태로 바뀌

                       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대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게 되어 병 자호란이 끝난 2년 뒤인

                       인조 16년(1638)년 원성을 증개축하면서, 원성과 옹성에 포루를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봉암성이나 한봉외성, 또는 신남성의 축조도 기본적으로 적이 화포공격을 할 수 없도

                       록 한다는 전술에 입각해서 축성하게 되었으며, 숙종 31년(1705) 봉암성에 두 개의 포루를

                       증축하는 등 화포 공격을 할 수 있는 포루 설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신록"에서는 이를 대부분 포루(砲樓)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포루(砲樓)의 전형적인 모습은 화성에서 볼 수 있다. 화성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안에 화포를 감추어두었다가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위에는 작은 누각식의 건물을 올렸다.
                       반면 "남한지"에는 포루(砲壘)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포루의 형태가 기본적으로 같을지

                       라도 누각(樓閣)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외에 포루, 또는 포좌

                       라는 명칭이 쓰이기도 한다.
                       남한산성에서는 문헌기록과 현장조사를 통하여 포루는 모두 7개소에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중 남옹성1에 8개, 남옹성2에 9개, 남옹성3에 5개, 장경사부근의 원성에 2개,

                       장경사 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 그리고 봉암성에 2개가 설치되었다. 이중 모두 파괴되

                       어 현재 전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연주봉옹성의 포루를 제외하면 각 포루의 수는 28개에

                       달한다.
                       포루는 체성벽으 안쪽에 폭 130cm, 높이 150cm 정도의 공간을 구축하고 성벽쪽에는 폭

                       50×50cm 정도의 구멍을 내어 포신을 걸칠수 있도룩 포루를 만들었으며, 좌측이나 우측벽에

                       는 작은 이방(耳房)을 구축하여 화약이나 무기들을 비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의 포루는 대부분 신남성 방향이나 한봉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사방이 산이 험준하여

                        적의 화포공격이 가능한 곳은 이 두군데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한봉성과 한봉인 듯 하다.)

     

     

     

     

     

     

     

     

     

     

     

     

     

     

     

     

     

     

     

     

     

     

     

     

     

     

     

     

     

                       ▲ 군포지에서 뒤돌아 본 장경사신지옹성 방향

     

     

     

     

     

                       ▲ 동장대지

     

                       ▩ 동장대지 : 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장대의 외곽에는 높이 350cm 정도의 석축이 쌓여 있다. 수어청의 5영 중 전영장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건물 지에는 와편과 잡석이 흩어져 있으며 주변에 비교적 높이 쌓은 석축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았다. 이곳은 숙종 때 외성이 확장되면서 외동장대와 함께 성곽의 동쪽에서 가장 높아

                       성곽 북쪽과 동쪽을 한눈에 감지 할 수 있는 곳이다.

     

     

     

     

                       ▩ 여장 : 여장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여장 축성시 어려움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인 여장의 경우 체성벽의 상단에 미석을 설치하고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석은

                       체성벽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체성벽 맨 윗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역할과 의장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의 경우 이러한 미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성시 미석을 설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20년(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에는 다시 원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전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부분적으로 타와 타 사이의 타구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횡방향으로 올려 놓았다.

                       현존하는 여장을 보면 성벽의 정상부에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20-30cm 정도의 활석으로 약

                       30cm 정도 허튼층 막쌓기로 쌓고 그 윗부분에는 방전을 사용하여 쌓고, 내부에는 생석회

                       잡석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옥개전을 덮었다. 여장의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었다.

                       세 총안의 가운데에는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총안의 간격은 대략 96cm 정도이며, 총안의 크기는 폭22cm, 높이 24cm이다. 성벽외곽의 경

                       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근총안은 경사도가 38도, 원총안은 2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외곽의 경사도가 높은 능선지점에는 여장의 총안외에도 체성벽의 상단부에

                       별도의 총안을 설치하기도 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동장대암문이 보인다.

     

     

     

     

     

                       ▲ 동장대암문

     

     

     

     

     

     

     

     

     

     

     

     

                       ▲ 동장대암문을 통과하여 한봉 방향으로 간다.

     

     

     

     

     

     

     

     

     

     

     

                       ▲ 제15암문

     

     

     

     

     

     

     

     

     

     

     

     

     

     

     

     

     

     

                                          ▲ 제15암문 밖에서 화백동생님,사시미님

     

     

     

     

     

                       ▲ 한봉, 벌봉 사이 이정표 앞의 한봉성 표석

     

     

     

     

     

     

     

     

     

     

     

     

     

     

     

     

     

                      ▲ 성 안에서 바라본 제16암문(한봉성 암문)

     

     

     

     

     

                                          ▲ 성 밖에서 바라본 제16암문

     

     

     

     

     

                       ▲ 한봉,벌봉 사이 이정표 있는 곳에서 탑공원이 있는 큰골로 하산했다.

     

     

     

     

     

     

     

     

     

     

     

     

     

     

     

     

     

                       ▲ 석상을 배경으로 단체샷

     

     

     

     

     

                       ▲ 탑공원

     

     

     

     

     

     

                     

     

     

     

     

     

     

     

     

     

     

     

     

     

     

     

     

     

     

     

     

     

     

     

     

     

     

     

     

     

     

     

     

     

     

     

                      ▲ 큰골 입구

     

     

     

     

     

                                          ▲ 큰골 입구에서 20~30m 이동하여 내려온 만큼 다시 한봉을 향해 오른다.

     

     

     

     

     

                       ▲ 표지 작업중인 사시미님과 안단테님

     

     

     

     

     

     

     

     

     

     

     

     

                       ▲ 질퍽질퍽해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올라 한봉에 도착했다.

     

     

     

     

     

     

                       ▲ 일부가 남아있는 한봉성을 끝으로 남한산성 성곽과 이별했다.

     

     

     

     

     

                                          ▲ 약사산 가는 길에 있는 철탑 두개 중 첫번째 철탑을 지나며

     

     

     

     

     

                                          ▲ 약사산 정상

     

     

     

     

     

                       ▲ 약사산 정상 삼각점

     

     

     

     

     

                       ▲ 396봉 오르는 길(396봉 주변은 다른 곳과 다르게 암릉이 많다.)

     

     

     

     

     

                       ▲ 396봉에서 약사산 방향을 바라보며

     

     

     

     

     

                                          ▲ 산행 들머리(은고개 엄미리 계곡 방향)

     

     

     

     

     

                                         ▲ 하남시  방향에서 광주시 방향으로 바라 본 은고개

     

     

     

     

     

     

     

     

     

     

     

                                          ▲ 뒷풀이 장소인 "애마오리"

     

     

     

     

     

     

     

     

     

     

     

                       ▲ 애마와 함께 한 산드라님

     

     

     

     

     

                       ▲ 오리 훈제와 샐러드

     

     

     

     

     

     

     

     

     

     

                       ▲ 오리 훈제 한 마리에 따라나오는 들깨 수제비 2인분

     

     

     

     

     

                       ▲ 의미있는 남한산성 일주후 간단한 뒷풀이를  마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해본다.

     

     ☞ 자료 도움 :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