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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2006. 1. 1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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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  한국소설(2006년 1월호 발표) / 200자 원고지 99매



       겨울 벚꽃


            이 영 철




  카페는 몇 쌍의 젊은 연인들이 있을 뿐 한산했다. 명세와 나는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밖에는 때 아닌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콩벌레처럼 목과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바 안은 분위기에 맞게 호세필리치아노의 Rain이 흐르고 있었다. 바 주인이 음악에 대해 문외한은 아닌 듯 싶었다. 과일 안주에 위스키를 한 병 시켰다.    

  “너와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내 잔을 채우는 명세의 얼굴에 낮게 가라앉은 잿빛 비구름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며칠 째 면도도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잔디처럼 돋아 있었고, 항상 젤을 발라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던 머리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코 밑도 헐어있었다.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강한 알코올 기운이 식도를 지나 위에까지 자극을 주며 젖어들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진저리가 쳐졌다. 두 번째 잔을 비웠을 때였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인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10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닌데.”

  “명구도 알고 있니?”

  “대충은.”

  명구는 명세의 바로 밑에 동생으로 두 살 아래였다. 명세가 자그마한 연예기획사를 처음 시작할 할 때부터 참여해 대형 영화제작사를 차린 지금까지 실질적인 운영과 자금관리를 맡고 있었다. 명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명구의 자금관리는 빈틈이 없었다. 따라서 명구에게 영화사의 경영에 대한 모든 것을 맡기고, 명세는 영화사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외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골프를 같이 치고, 애경사를 챙기고, 술자리를 만들어 그들과 어울렸다.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제 이 바닥에서 명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명세가 제작한 영화를 통해 무명에 가깝다가 일약 스타가 된 애들도 적지 않았다. 명세는 배우를 보는 눈이 정확했다. 따라서 명세 눈에 띄면 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스타를 꿈꾸는 배우들은 어떻게든 명세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늘 주변에서 맴돌았다. 명세는 어느새 충무로 바닥에서 ‘스타제조기’, ‘흥행의 마술사’로 통했다. 따라서 명세와 일하기 위해 영화감독을 비롯해 유명 스타에서부터 무명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찾아왔다.

  그렇게 잘 나가던 명세가 지금 위기에 처해있었다. 영화사 사운을 걸고 야심만만하게 찍고 있던 영화가 ‘엎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한류열풍을 타고 있는 남녀 주인공들을 캐스팅해 매스컴과 충무로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되던 영화였다. 공개적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동원 기록을 넘어서겠다고 공표한 야심찬 작품이었다. 초호화 멤버의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영화를 찍기도 전에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등 동남아 각국들과 한국 영화사상 최고가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판권계약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랄까. 배우와 스태프를 태운 버스가 대관령 촬영현장으로 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지며 10미터 언덕 아래로 굴러 남자 주인공이 크게 다쳐 혼수상태이고, 다른 스태프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해 병원에 누워있었다. 영화 찍기 전에 당연히 보험이야 들었지만 보험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이 끝내 깨어나지 못하면 주인공을 바꿔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해외 판권계약에도 문제가 생기고, 반쯤 찍은 영화 제작비도 다 날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 순간만 삐끗하면 영화는 ‘엎어질지’도 몰랐다.    


  명세는 친척의 소개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난 지 몇 달도 안 돼 성격이 마음에 들어 서둘러 결혼했다. 명세의 소극적이고 꼼꼼한 성격에 비해 와이프는 증권회사를 다니던 처녀 때부터 자신이 직접 분당에 땅을 사 집을 지어 집장사를 할 정도로 담대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와이프는 결혼과 동시에 증권회사를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과 집장사를 해서 벌은 돈이 통장에 제법 많이 들어있었다. 그에 반해 명세는 영화사 부장으로 있으면서 받은 봉급을 시골집에 부치고, 대학원을 다니고, 독립영화를 찍는다고 겨우 신혼살림을 차릴 작은 아파트 전세 얻을 정도의 여유밖에는 없었다.

  “당신 꿈을 한번 크게 펼칠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머슴노릇만 하고 말 거야. 당신도 이제 독립해서 사장 한 번 할 때가 된 거 같아.”
  명세 와이프는 결혼 후 일 년이 지나자, 명세에게 영화사를 그만두게 하고 역삼동에 연예기획사 사무실을 차려주고, 차도 한 대 뽑아주었다. 출발은 명세를 포함해 4명이었지만 2년 만에 직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명구의 역할이 컸다. 명세는 규모가 커지고 일이 많아지면서 술을 마시는 날도 늘어났고 덩달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무실이나 찜질방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부터 명세와 와이프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허구헌날 그 놈의 일! 일! 앞으로 당신은 내 앞에서 회사에 관련된 일은 한 마디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알고 싶지도 않고. 이 집이 무슨 하숙집인줄 알아. 내가 당신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는 파출부인줄 아느냐고.”

  명세 와이프는 명세가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연예기획사 일이라는 것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듯이 일정한 룰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생기면 전 직원이 새우잠을 자며 며칠씩 밤샘을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런 직원들만 두고 명세 혼자만 퇴근해 집에 갈 수는 없었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 연예기획사를 차리고부터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명세는 한 달에 걸쳐 거의 전 직원들과 날밤을 새우다시피한 대형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 5억이 넘는 이익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아내에게 자랑하고 밍크코트라도 한 벌 사주었겠지만, 아내는 회사 일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라면 실수였다.

  “당신 어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일주일 전에 회사에 5억이 들어왔다며?”
  “응, 명구가 그래?”
  명세는 아내의 말에 별 뜻 없이 물었다.

  “난 귀도 없는 줄 알어? 나도 다 아는 방법이 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했어? 일개 봉급쟁이를 오너로 만들어준 게 누군데. 이제 날 무시해도 좋을 만큼 컸다 이거야? 정말 그런 거야?”

  “회사 일은 듣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그딴 소리를 해. 그리고 말이면 다 말야. 뭐, 일개 봉급쟁이를 뭐가 어쩌고 어째!”

 명세는 아내의 늘 그런 식의 말투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아내는 명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내의 돈으로 연예기획사를 차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성장시키기까지에는 정말 남모르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긴 말 안하겠어. 내 돈 내놔. 내 돈으로 그만큼 커졌으니까 이자까지 붙여서.”

  “뭐? 내 돈!”

  명세는 어이가 없었다. 명색이 부부 사이에 네 돈 내 돈이라니. 하지만 그 문제로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명세는 명구와 의논한 후 아내의 통장에 연예기획사를 차릴 때 들어왔던 2억에 월 2부 이자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넣어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시간만큼 창밖에 내리는 겨울비에 시선을 주고 있던 명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딸이 며칠 전에 죽었어.”

  “뭐라고? 병원에 몇 년 째 누워있다고 했잖아?”
  명세가 말하는 ‘그 남자’란 명세 와이프의 애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면 옷을 벗어 아무데나 집어던져 놓고, 음식을 해도 터무니없이 많이 해 결국엔 다 먹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기 일쑤였다. 과일을 깎아도 과장을 좀 하면 과일의 살점 반쯤이 버려지도록 두툼하게 깎았다. 명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짓이었다. 보다 못한 명세가 한마디 하면, 이렇게 깎아야 껍질을 뚫고 들어간 농약성분을 그나마 제거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생선을 먹어도 등의 살점만 대충 떼먹고 머리와 배와 꼬리 부분은 그냥 버렸다. 아내의 생활 습관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엄마를 닮아갔다. 명세는 아내의 그런 점들이 못마땅했다. 아내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다니며 옷을 주워 옷걸이에 걸고 양말은 세탁기에 집어넣어야 했고, 내버려두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음식이 아까워 자신이 먹곤 했다. 그런 걸 가지고 또 한 마디 하면 아내는,

  “우리 그냥 서로가 하는 일은 알면서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편하게 살자, 응. 너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네모반듯하게 규격화된 당신을 보면 난 숨이 턱턱 막혀. 사람이 좀 어딘가 여백이 있어야 인간미가 있는 거 아냐. 당신처럼 그렇게 매사에 빡빡하면 매력이 없다고.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말도 몰라. 사업하는 사람이 정말 왜 그래, 쫀쫀하게. 당신에게 얻어먹을 게 좀 있어야 사람이 꼬일 거 아냐. 소금도 먹은 놈이 물을 켠다고 당신이 베푼 만큼 결국 그 사람도 당신에게 도움을 줄 거 아니냐고.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좀 베풀면서, 제발 부탁하건데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안 본 척 눈 좀 감아주고 살자, 응.” 


  명세는 연예기획사로 자리를 잡고 나서 영화제작사까지 차렸다. 사무실을 얻고 직원 20명이 근무할 120평 공간에 사무실 집기들을 한창 사들일 때였다. 그즈음도 명세와 아내는 성격 차이로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던 때였다.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이 사라진 명세였다. 한 지붕 아래에 애들이 있으니까 부부지 이미 마음과 몸은 아내 곁을 떠난 지 오래된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 사건은 영화제작사를 차리면서부터였다.

  기왕에 시작하는 거라면 폼 나게 출발하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임대료가 제일 비싸다는 스타타워빌딩에 영화사를 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아내는 명세가 사업을 크게 벌이자,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티격태격하던 문제들도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명세는 아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보며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돈 내 돈, 일개 봉급쟁이란 말 등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명세도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신혼 초 좋았던 때처럼 되돌아갔다.  

  “당신 사무실과 방도 내가 알아서 다 꾸며줄게. 기대해도 좋아.”

  아내는 명세를 보며 눈웃음까지 보이며 며칠 전부터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바닥 장판과 벽지를 고르고 벽에 걸을 그림을 사 나르고 책상과 의자 사무용품에 이르기까지 사무실 세팅을 총 감독했다.

  “이제 두 사람 다시 봄날이 온 거요? 조카 볼 수 있는 거요?”

  신바람 난 아내를 보고 명구가 명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놀렸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찬바람이 불고 있던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명구였다. 사무실 세팅이야 명구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만은 좋아서 신바람을 내는 아내를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무실 오픈을 이틀 앞두고, 아내가 논현동 가구 골목에서 실고 온 응접세트를 본 명세는 어이가 없었다. 아내는 알록달록한 루이뷔똥 색상처럼 화려하고 대담한 꽃무늬가 박힌 천으로 된 소파를 사무실로 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눈감아주려고 해도 일하는 사무실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소파였다. 영화사 오픈 날짜가 알려지면서 유명 배우들과 영화감독, 촬영, 조명, 미술 실무자들이 대거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픈을 이틀 앞두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느라 예민해져 있던 명세는 아내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화가 나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이걸 여기 놓으라고 사 온 거야. 사무실에 어떻게 이딴 걸 놔. 여기가 무슨 룸살롱이야. 술파는 데냐고. 하여간에 수준하고는…… 당장 다른 소파로 바꿔오지 못해!”

  명세가 벌컥 화를 내자,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신이 나 있던 아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사무실 세팅에 바쁘게 움직이던 20여 명의 직원들도 느닷없는 명세의 큰소리에 일하던 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명세를 잠시 노려보다가 핸드백을 들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아내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명세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아내는 출입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 집에 들어간 명세는 낮에 화를 냈던 것이 미안해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아내를 안아주었다.

  “여보, 낮엔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순간, 아내는 명세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하곤 수준이 안 맞다며? 어떻게 직원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줄 수가 있어. 그래 잘 봤어. 난 당신 말처럼 룸살롱 수준밖엔 안 되는 여자야. 그러니까 수준 낮은 여자 안으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고상한 여자 만나서 잘 해봐.”

  아내는 명세를 쏘아붙이고는 베개를 들고 작은 딸 성미 방으로 가버렸다. 그동안 사이가 안 좋다가 영화제작사를 차리면서 다시 잘 풀려 가는가 싶더니 낮에 소파 사건으로 둘 사이는 전보다 더 악화되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려던 명세도 자존심이 상해 그날 이후로 딸 방에서 자는 아내를 찾지 않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아침이 돼도 밥조차 차려줄 생각을 안했다. 영화제작사 오픈 날도 끝내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명세는 아내에게 인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신혼 초부터 명세는 잠자리에서 늘 아내에게 구박을 받던 중이었다. 나는 술자리에서 소파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명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명세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그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와이프가 너무 세. 신혼 첫날부터 소파 사건으로 각방을 쓸 때까지 와이프는 잠자리에서 만족을 못했거든. 사실 나도 다른 여자와 해보면 꼭 약한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야. 와이프는 항상 불만이었어. 심지어는 무슨 남자가 토끼도 아니고 자기만 즐기고 마냐, 고까지 핀잔을 줬으니까. 생각해 봐라, 남자가 돼가지고 와이프한테 그런 핀잔을 듣는 심정이 어떻겠냐. 남자로서 자존심이 팍 상하기도 하고 밤이 되면 은근히 잠자리가 두려워지기까지 하더라니까. 잘 해야지 신경 쓰니까 더 안 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자존심 싸움이 길어지면서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고 했다. 명세는 영화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따라서 술을 마시다 보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늘어갔다. 하지만 와이프는 명세가 집에 들어오거나 말거나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생활비도 매달 경리를 시켜 아내의 통장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나오고 밤늦게 들어가다 보니 한집에 살면서도 며칠씩 얼굴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거실에서 마주쳐도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쉬는 날 집에서 피자를 시켜도 아이들이 가져다주어서 그나마 한 조각 얻어먹는 정도였다. 남들 보기에 무늬만 부부였지 실상은 별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큰딸 성애가 이따금 아내 몰래 명세 방에 왔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성애는 어느새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부쩍 커 있었다. 명세가 모르는 아내에 대한 얘기는 성애를 통해서 듣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성미는 완전히 아내 편이었다. 아내에게 어떻게 세뇌를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는 명세를 보면 제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말을 붙여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되물어야 마지못해 겨우 한두 마디 대꾸할 정도였다. 늘 아내와 붙어살더니, 성미에게 있어 명세는 이웃집 아저씨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미와 아내는 궁합이 맞아 그렇게 살갑게 지낼 수가 없는데, 문제는 성애였다.     

  명세는 영화사를 차리고 한 지붕 아래 사실상 별거를 시작한 지 4년 후, 와이프가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하의 남자와 일 년 정도 만나다가 헤어지더니 이번엔  지금의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와이프는 일부로 명세에게 알리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같이 있을 때 전화가 와도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지 않고 통화를 했다. 한번은 자정이 넘도록 인터넷을 검색하고 베란다로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낯선 차에서 내리는 아내를 본 적도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술 취한 아내에게 오래도록 키스를 했다. 그것도 아파트 공터에서. 아내는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거나 외박하는 날이 많았다. 어느 때는 아무 말도 없이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라면을 끓여 먹거나 자장면이나 피자를 시켜먹었다. 보다 못한 명세가 한마디 했다.  

  “당신 정말 어디까지 갈 거야?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이런 내가 보기 싫으면 이혼해. 언제라도 원하면 해줄 테니까.”

  아내는 오히려 역공을 했다. 명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사회적 체면 문제도 생각해서 이혼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명세가 아내에게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아내는 아주 사소한 거로도 걸핏하면 화를 냈고, 유독 두 딸 중에서 큰딸 성애를 들볶았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성애가 자기를 닮지 않고 명세를 닮았기 때문이란 거였다.

  한번은 며칠 동안 외박을 하고도 당당한 얼굴로 들어오는 아내를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언성을 높였다. 

  “잘 하는 짓이다. 난 이제 당신이 밖에 나가서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든 내 눈에 띄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아파트 공터 같은 곳에선 낯부끄러운 짓거리는 안 해 줬으면 해. 밖에 일은 어디까지나 밖에서 끝내. 내 말 알아듣겠어!”

  “흥! 잘 났어, 정말.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래라저래라야. 우린 법적으로만 부부지 이미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 아냐?”

  “핑계 좋군. 엄마라는 여자가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오지를 않나. 그것도 양이 안차서 며칠씩 외박까지 해. 나는 그렇다고 해도 애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자장면을 시켜 먹는데…… 그러고도 당신이 제대로 된 엄마라고 할 수 있어?”

  “웃겨. 당신이 언제부터 나나 애들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그리고 애들이 한두 살 먹었어. 그 나이에 있는 쌀에 밥도 못해 먹어. 나도 당신이 밖에서 어떤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잖아. 외박한다고 바가지 긁는 거 봤어? 혹시 알어, 능력 있는 당신 때문에 영화사가 아주 잘 나가니까 이제 막 크려는 영계들이 잘 보이려고 몸을 주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이 여자가 정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정곡을 찌르니까 그래도 뜨끔한가 보지.”

  “관두자. 당신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내 스스로가 한심하단 생각이 든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 봐. 상식적으로도 당신이 성불구자라서 섹스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신부님이나 스님처럼 성직자도 아닌데 5년이 넘도록 금욕을 한다는 게 말이 돼.  비록 토끼처럼 금방 하긴 해도 당신은 섹스를 좋아하잖아. 그리고 이젠 내 눈치 볼 것도 없고…… 주변에 널려 있는 게 예쁘고 싱싱한 영계들인데 그냥 있었겠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말해 봐. 그럼 5년 동안 섹스를 한 번도 안했어? 안 했냐고?”

  짙게 아이샤도우를 바른 아내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다그쳤다. 가정주부의 화장이라고 보아주기에는 너무 야하고 진했다. 명세는 아내의 화장과 거침없는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안 하기 시작하면서 술집에 갔다가 파트너를 데리고 이차를 가거나 여배우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금욕을 하며 살기에는 아직은 너무 젊고 피가 뜨거웠다.

  “왜 대답을 못해. 사실 난 당신이 다른 년과 섹스를 했던 안 했던 알고 싶지도 않어. 이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살자 이 말야.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당신 재주껏, 능력껏 인생을 즐겨.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난 당신을 믿었는데 당신은 그 믿음을 먼저 저버린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의 당신이 있기까지는 초기에 내 도움이 컸다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지금 생각하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명세와 할 얘기가 있어 아는 선배의 빌딩 옥상주차장에 명세 차를 세우고 새벽까지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빌딩 셔터가 내려져 있어, 잠자는 경비아저씨를 깨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까지 같이 올라가 차를 끌고 나온 적이 있었다. 곤한 잠을 자다가 깬 경비아저씨는 말은 안 해도 입이 나와 있었다. 내가 빌딩 주차장 입구의 차단기를 올려주는 경비아저씨에게 ‘잠을 깨서 미안하다’ 며 만원을 쥐어주자,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경비아저씨는 ‘조심해 가시라’ 며 거수경례까지 했다. 차가 막 도로로 접어들 때였다.

  “뭐하러 돈을 주냐.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는 건데. 경비들 하는 일이 뭐야.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면 버릇만 나뻐져. 다른 사람에게도 돈을 달라고 할 거 아냐.”

  그때 나는 가깝게 지내면서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명세의 숨겨진 다른 면을 발견했다. 솔직히 그날 이후로 나는 명세와 별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자주 만나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곤 했는데, 일부로는 아니지만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었고, 전화가 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곤 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과는 더 이상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랬던 명세가 언제부턴가 변해가고 있었다. 명세 와이프 말처럼 ‘도덕적이고 네모반듯하고 정확하던 성격’이 한결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 왔다 갈 때는 매번은 아니지만 차단기를 올려주는 경비아저씨 손에 담배 값이나 하라며 만 원을 쥐어주곤 했다. 명세에게도 사람의 냄새, 여백의 미가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제 경비들은 명세만 나타나면 먼저 반갑게 인사하고 차까지 알아서 주차해주고, 갈 때는 지하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꺼내주었다. 주차할 자리가 없으면 다른 차를 빼고서라도 명세 차를 주차해 줄 정도였다.

  명세는 인간적인 면에서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연예인들과 같이 일을 하려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정확한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인간적인 교류가 먼저 선행돼야 함을 어느 순간 크게 깨달았다고 했다. 서로가 인간적인 것이 바탕이 됐을 때 계약도 매끄럽게 잘 되더라고 했다. 내가 그때 주차장 사건을 이야기하며 그런 모습을 보고 솔직히 그동안 널 멀리 했다고 고백하자,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그 인간적인 것을 위해 명세는 연예인들과 술자리를 빈번히 가졌고, 그 자리에 자주 나를 부르곤 했다. 명세 덕분에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나와는 거리가 먼 연예인들을 접하게 되고 몇 번 본 연예인과는 친분도 쌓게 되었다. 


  명세가 집을 완전히 나온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중이었다. 싸움의 발단은 성애 때문이었다. 아내는 유독 성애가 하는 모든 행동을 못 마땅해 했다. 사실 성애가 말이 없고 눈치가 재빠르지 못하고 행동이 굼뜨기는 하지만 생각은 깊은 애였다. 반면에 막내 성미는 애교도 많고 눈치가 빨랐다. 때론 설거지도 하고 안마도 해주며 갖은 아양을 다 떨어 아내에게서 성애보다 용돈을 더 받아내곤 했다. 하지만 명세는 가슴에 영감이 들어앉아있는 듯한 애늙은이 같은 그런 성미가 못 마땅했다. 애들은 어디까지나 애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성미보다는 성애에게 더 정이 갔다. 

  그날도 아내는 성애를 밥상에서 생선을 훔쳐 먹다가 들킨 고양이를 잡들이 하듯 혼내고 있었다. 각자 방을 청소하라고 했는데, 성미가 청소를 다 한 반면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미처 청소를 하지 못한 성애를 혼내는 중이었다.

  “넌 어째 애가 그러냐. 동생인 성미 반 만 따라가 봐라.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곰이 따로 없다니까. 빨랑 청소하지 못해!”

  아내의 잔소리와 함께 성애 등짝을 몇 번이고 사정없이 때리는 소리가 방까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성미를 편애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명세는 손찌검까지 하는 아내에게  순간적으로 화가 솟구쳐 문을 벌컥 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엄마가 돼가지고 애들에게 손찌검이나 하고 말야. 애가 컴퓨터에 빠져있다 보면 좀 늦게 할 수도 있는 거지. 방청소 좀 늦게 한 것이 그렇게 맞을만한 이유가 돼? 그리고 애를 때리려면 회초리로 때리든지 해야지 어디서 손찌검야, 손찌검이. 당신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야!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참을 수 있지만 애들에게 손찌검하는 것만큼은 못 참아, 알어?”

  거의 10여 년 동안 한 집에 살면서도 조용히 있던 명세가 느닷없이 큰소리를 내자 성애와 성미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슬금슬금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이고, 밖에서 하루 종일 있는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러셔. 성애 쟤가 얼마나 게으른지 알고나 하는 말야. 밥 먹고 지 이빨 닦는 것도 성미는 알아서 하는데, 쟤는 내 입이 닿도록 말해야 겨우 닦는 애라고. 어쩜 그렇게 씻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누굴 꼭 빼닮았는지 몰라.  그것뿐인 줄 알어. 학교 갔다 오면 학생이 숙제부터 해야 할 거 아냐. 동생인 성미는 숙제 다 하고 샤워할 때까지 쟨 침대에서 뒹굴뒹굴 구르면서 만화책이나 보고 인터넷이나 하고 놀다가 밤늦게야 졸려서 눈 비비며 숙제를 하고 있으니 내 속이 안 터져. 뭐 하나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누구 단점만 쏙 빼닮았다니까. 나 닮은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한 군데도 없어요. 내 속으로 낳았지만 쟨 참 불가사의한 얘라고. 내가 성애 혼내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당신이 성애 데리고 나가서 따로 살면 될 거 아냐. 난 나 닮은 성미하고 살 테니까.”

  “뭐라고! 나더러 나가라고!”

  “그래. 내가 하는 짓이 못마땅하면 당신이 나가면 될 거 아냐. 누가 말려. 어차피 우린 법적으로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남남이나 뭐가 달라. 나도 이제 한집에서 당신 얼굴 보는 거조차 지긋지긋해.”

  아내는 명세를 빤히 쳐다보며 빈정댔다.
  명세는 소파 사건 이후로 10년을 눈을 딱 감고 살아왔지만 집을 나가라는 말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로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입을 옷만 가방에 챙겨 집을 나왔다. 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사무실 가까운 곳에 원룸을 하나 얻었다. 아무리 부부싸움이 잦은 부부라도 잠자리에서 몸을 섞다보며 칼로 물 베기를 할 수 있지만 잠자리를 따로 하는 부부는 문제가 있었다. 하물며 한집에 살면서 10년을 따로 잠자리를 했음에야. 

  ―당신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든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생활비나 부쳐.

  아내는 핸드폰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두 사람은 법적으로 이혼수속만 안 밟았다 뿐이지 이혼한 부부와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명세가 원룸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두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바 주인은 호세필리치아노의 노래를 좋아하는지 다시 틀고 있었다. 명세와 나는 위스키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단숨에 목에 털어 넣었다. 몇 잔 들어가서인지 목에 턱턱 걸리던 술이 이제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너편 건물에 내걸린 플랜카드가 바람에 사정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금세라도 플랜카드를 묶은 줄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 남자 와이프가 협박을 하나 봐.”

  “성애 엄마가 너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

  명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잔을 채웠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자작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를 너무 잘 아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와이프가 집에 없을 때 옷을 가지러 갔다가 알았어. 그날 성애가 어떤 전화를 받으며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 매는 거야. 그러던 어느 순간 얼굴이 빨개지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으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거야.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주지 않으려는 수화기를 뺏어 들어봤더니 그 여자였어. 4년 전에 영화사로 찾아와, 니 마누라 단속 좀 똑바로 해, 라며 악에 받쳐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고 너에게 말해주었던 그 남자의 아내였어. 그 여자는 내가 받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해대는 거야. 그 어린 것에게. 그걸 듣고 있는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을게. 그땐…… 와이프가 정말 밉더라.”

  명세 말에 따르면, 그 남자 딸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4년 전, 당시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때, 남편이 명세 와이프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너 죽고 나 죽자며 식칼을 들고 설쳐 남편과 피투성이가 되는 극단적인 싸움을 벌였고, 부모의 그런 싸움을 보며 공포에 질려 울던 아이는 어느 순간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 이후 혼수상태가 되어 4년째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산소 호흡기를 통해 숨만 쉴 뿐 뇌사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 남자와 명세 와이프는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그 남자와 아이의 엄마는 결국 별거에 들어갔다. 아이 엄마는 남자에게 생활비를 받아 아이를 돌보며, ‘내가 어떤 년놈들 좋아서 춤추라고 이혼을 해줘’라며 오기로 이혼도 안 해주고 지금껏 혼자 살던 중에 끝내 아이가 죽었다는 거였다.

  “그 여자가 우리 성애나 성미에게 그랬을 정도면 와이프에게는 얼마나 했겠어. 보지 않아도 알만해. 4년 전에도 영화사로 날 찾아 왔을 때 보니까 막가파식 조폭 스타일이었거든. 성애가 와이프에게 내가 집에 옷을 가지러 왔다가 그 여자 전화를 받았다고 말한 거 같아. 오늘 낮에 핸드폰에 메시지가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왔더라고.”

  명세는 핸드폰에 찍힌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메시지는 여러 번에 걸쳐 들어와 있었다.


  ―그 여자가 나 때문에 애가 죽었다고 자꾸만 협박을 해. 이제 나도 그냥 있지만은 않을 거야. 고소를 할 거야.


  ―주변에 이 사실을 비밀로 해주고, 그 여자에게는 우리가 이혼한 것처럼 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했으면 좋겠어. 지가 나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만큼 복수를 한대. 애들한테도.


  ―애가 죽으니까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거 같아. 그동안 가만히 있더니 증거 자료를 가지고 있다며 보상을 하라고 해. 한 번 만나야 할 거 같아.


  ―어쩜 당신에게도 전화를 하거나 찾아갈지 몰라.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처럼 하고… 그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영화사도 잘 나가는 것처럼 말하면 안 돼. 무식한 여자라 어떤 짓을 할 지 몰라.


  내가 메시지를 읽는 동안, 명세는 씁쓸한 표정으로 겨울비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명세 일이지만 마치 내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명세는 교통사고가 터진 영화사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일 텐데. 연일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을 텐데. 평소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수염도 덥수룩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지고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명세가 안 돼 보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성애는 지금 한창 사춘기야. 그 여자한테 온갖 말을 듣고 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게 가장 염려돼. 혹시라도 충격을 받아 삐뚤어지지나 않을까.”

  명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또 술잔을 뒤집었다. 나는 말릴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취해서, 엉망으로 취해서 하루쯤 아무 생각 없이 잠드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였다. 함께 취하면 안 될 거 같아 나는 들었던 잔을 그냥 내려놓았다.

  “성애는 속이 깊고 현명한 애잖아. 너무 걱정마라.”

  “니가 안 들어서 그래. 입에 담기도 싫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지 않아? 한 마디로 니  엄마는 더러운 여자라는 거지. 니 엄마 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는 거고. 니 엄마는 창녀만도 못한 년이라고 악다구니를 쓰더라고.”
  “그래 그런 소리를 들으며 그냥 있었냐. 그냥 놔뒀냐고.”

  “그럼 어떡해. 그 여자는 지금 딸이 죽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어떤 면으로는 그 여자가 이해도 돼. 나라고 해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었을 거야. 그 여자는 와이프와 자기 남편 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성애한테는 앞으로 전화가 오면 그냥 끊으라고 했어.”

  명세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친구의 괴로움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매 시간 톱뉴스로 명세의 영화사 이름이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유명 배우의 죽음으로 그동안 영화계 전반에 깔려있는 안전 불감증이 성토되는 분위기였다. 명세는 하루아침에 한국의 영화를 이끌어갈 유능한 영화사 대표에서 끝없이 추락해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배우와 부상을 당한 스태프의 가족들에게도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이제 모든 걸 끝내고 싶다.”

  명세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뱉었다. 나는 명세가 말하는 ‘끝내고 싶다’라는 말의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아 명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산다는 게 뭔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차라리 꿈이라면 깨기라도 하면 되련만…….”

  갑자기 명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명세 옆자리로 옮겨 앉아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명세의 소리 죽인 흐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왔다. 사내의 눈물……. 친구의 눈물……. 참으려 했지만 나도 가슴이 격해지며 어느 순간 주르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명세와 난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금이 가고 부수어진 길을 내가 걸어갈 때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뒤에 앉아서 웃기나 할 텐데

    울어야 할 내일이 두렵습니다.

    운명의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은 뿌려졌고

    아는 자와 알려진 자들이……

    

  킹 크림슨의 Epitaph(묘비명)이 흐르고 있었다. 똑같은 노래인데도 오늘따라 흐느끼듯 열창하는 킴 크림슨의 음색이 너무나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노래가 다 끝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명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비가 뿌려진 빙판길처럼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명세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 술잔을 다시 뒤집으며 말했다.

  “너도 들었냐? 오늘따라 킴 크림슨이 왜 이렇게 날 울리냐.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 ……운명의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이 뿌려졌다…… 친구야, 가자. 나 화장실 좀 다녀와서.”

  명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태로워보였다. 하지만 잡아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급히 수첩 위에 뭔가를 써서 쪽지로 접어 손에 쥐었다.

술집을 나오자 으스스했다. 목덜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섬뜩했다. 명세도 추운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떠난다는 것은 돌아온다는 무언의 또 다른 약속이라는데…… 끝내고 싶다는 것은 또 다른 뭔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갈증일까? 열망일까?”

  명세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웃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두툼한 파카차림의 그가 마치 겨울비 속에 길을 잃고 서있는 한 마리 가엾은 곰 인형을 연상시켰다.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면 돌파가 아닌가 싶다. 와이프 문제도, 아이들도, 영화사 일도. 나아가 네가 감당해 내야 할 그저 살아서 숨만 쉬는 생존이 아닌, 삶까지도 말이다…… 정말 모든 걸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것도 없지 않을까…… 솔직히 너는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끌어안는 걸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명세는 건물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아지랑이처럼 아련한 눈길로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보이지 않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버리는 건 쉽겠지. 끌어안고 버티어 내는 것이 두려운 거겠지, ……훨씬 힘든 거겠지.”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어깨를 웅크려 등지고 두 손을 모아 쥐고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허공에 길게 내뿜었다. 담배연기는 입김과 함께 내리는 빗속에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흩어졌다.

  “크크크, 난 니가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릴 때 보면 엄청 멋있더라. 나도 한번 피워보고 싶지만…… 체질이 아닌가 봐. 숨이 턱턱 막혀 죽을 거 같거든.”

  명세는 키들키들 웃었다. 어쨌든 명세가 웃는 모습을 보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건물 입구에 서서 말도 잊은 채 겨울비가 내리는 것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갈게.”

  “그래.”

  나는 꽁초를 빗속에 던지며 잘 가라는 말도, 어디로 갈 것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원룸으로 가든, 집으로 가든, 또 다시 혼자서 술집으로 가든 묻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 빗속으로 나가려는 명세 손에, 나는 바에서 급히 쓴 쪽지를 쥐어주었다. 명세는 의아해 하며 쪽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든 네 머릴 편히 뉠 굴속에 들어가서 읽어 봐. 꼭. 버리거나 잊어버리지 말고.”

  명세는 돌아서서 비틀거리며 몇 걸음 가다가 우뚝 멈추더니 쪽지를 든 손을 등 뒤로 번쩍 들어 돌아보지도 않고 몇 번인가 흔들어 보였다. 겨울비 속에 멀어져 가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범람하는 도심의 골목길을 멀어져 가는 명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명세에게서 아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독사의 독니 같은 칼바람이 휑하니 뚫린 내 가슴을 독하게, 지독하게 아프도록 물어뜯는 겨울비 내리는 늦은 밤이었다.

  내가 명세의 손에 쥐어준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겨울 벚꽃가지를 꺾어보라.

  가지는 죽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봄이 되면 보라.

  죽은 듯 보인 가지 그 어디에 그토록 많은 벚꽃들을 숨기고 있었던 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