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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岩 張基萬 2015. 3. 23. 23:52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세계Ⅲ-Gian Lorenzo Bernini [건축,그림]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가, 건축가, 화가,1598.12.7.나폴리~1680.11.28.로마)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세계>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세계Ⅰ(1610~1630)』  http://blog.naver.com/ohyh45/20192450908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세계Ⅱ(1631~1680)』  http://blog.naver.com/ohyh45/20192492678

지안 로첸초 베르니니는 이탈리라 바로크 시대의 가장위대한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극작가이다. 바로크 조각양식을 창조하고 크게 발전시켜 미술사에서 바로크 조각의 독보적인 존재로 거론된다. 베르니니의 미술 이론은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연구하면서 그것이 자연의 불완전함을 보충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쩌면 고대 작품들과의 관계를 일부러 과장했는지도 모른다. 베르니니의 스케치와 점토 습작은 대부분출처를 확인 할 수 있는 고대 작품들에 의존하고 있지만 완성된 작품들은 형태와 주제에서 모두 고대작품들과는거리가 멀다. 보존되어 있는 드로잉과 점토 습작 덕택에 그의 제작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베르니니의 양식은 적어도 2대 남짓한 기간에 걸쳐 유럽의 여러지역으로  펴져 나갔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아 조각은 그의 업적에 기초를 두고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이탈리아가 유럽 미술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시기도 끝장나고 말았다. 그는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낳은 뛰어난 만능 천재였으며, 그의 공헌으로 이루어진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 양식으로는 마지막으로 국제적인 것이 되었다.

 

베르니니는 종교적, 정치적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았으며, 뛰어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세계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베르니니는 아마도 그 어떤 미술가보다도 당대의 지배적인 양상을 잘 구현하고 있었으며, 그가 엄청나게 성공한 것은 주로 현상(現狀)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인 그의 태도 덕택이었다. 그가 죽자 그는 유럽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이자, 아울러 유럽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널리 평가 되었다.

 

 

 

베르니니의 자화상(1623)

 

1. 생애 

  

1) 초기 생애

 

베르니니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1562 ~ 1629)는 약간 재능이 있는 피렌체파 조각가로 후반기에는 로마로 이주해 살았는데 베르니니는 아버지에게 조각을 배우기 시작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베르니니는 젊어서 부터 부지런히 작품을 만들어 화가인 안니발레 가라치의 찬사아 교황 파울루스 5세의 후원을 받았으며, 곧 완전히 독립한 조각가로서 기반을 잡았다.

 

바티칸 궁전에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대리석상들을 깊이 연구해 거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에 만든 군상(群像)의 하나인 <어린 주피터 및 파우나와 함께 있는 염소 아말테아(The Goat Amalthea with the 1nfant Jupiter and a Faun> 는 고대 작품을 모사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6세기 성기 르네상스의 회화에소 정통해 있었다. 나중에 교황우르바누스 8세이자 베르니니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을 위해 만든 <성 세바스티아누스 St. Sebastian> (1617년경) 를 보면 그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많이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베르니니의 초기 작품들은 당대 교황 가문의 일원인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후원을 받아 베르니니는 처음으로 실물 크기의 중요한 군상(群像)들을 만들었다 .

이 연작들은 단편적이고, 우연한 시각으로 된 <트로이에서 달아나는 아이네아스와  안키세스 및 아스카니오스 Aeneas, Anchises and Ascanius Fleeing troy)에서부터 마치 부조처럼 한 곳에서 볼 수있도록 셜계된 <아폴론과 다프네 Apollo and Daphne>의 환상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 나타난 피부와 머리카락의 질감에 대한 감각과 새로운 색채 감각은 미켈란젤로의 전통에서 벗어나 서양조각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2) 중기 생애 

 

우르바누스 8세의 후원

우르바누스 8세(1623 ~ 1644 재위)가 교황 직위에 오르면서 베르니니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 만들었으며 예술적으로도 발전하였다. 우르바누스8세는 그에게 회화와 건축도 다룰것을 촉구했다. 그의 그림은 조각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몇 점, 특히 2점의 자화상(1620,1640년경,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은 매우 뛰어나다.

 

최초의 건축 작품은 로마에 있는 개조된 산타비비아나 교회이다 .  그 무렵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울 상징적인 구조물을 의뢰 받았다. 그리하여 1624~1633년에 금박을 입힌 거대한 청동 닫집을 만들었다.

 

나선형 장식의 기둥들과 금속으로 된 옷주름 처리는 매우 나선형 장식의 기둥들과 금속으로 된 옷 주름 처리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나 장소 위에 설치해 존경을 표시하는  닫집을 생각나게 한다. 이 작품에서 그의 독창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4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는 듯한 윗부분의 보주(寶珠)와 그 위에 얹혀 있는 십자가이다.

이 닫집은 우르바누스 8세의 개인적인 상징물이기도 하다. 닫집의 꼭대기 근처에는 교황의 3중관이 있으며, 기념물 전체는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벌과 해, 월계수 덩굴들로 아로새겨져있다. 이 닫집은 완벽한 조화로 배치되어 있어 그 높이가 4층 건물 만큼이나 된다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 닫집은 또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설계되어 있는 모든 장식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성당의 돔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은 거대한 조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성 롱기누스 St.Longinus>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것이었다. 

베르니니의 건축활동은 주로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은 뒤에 이루어졌는데 ,  그해에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팔라초 바르레리니의 건축 일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주문이 늘어나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작업실을 차리고 작업계획을 세워 한 작업조가 만든 조각품과 장식품들이 전체적으로 일관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또한 베르니니는 언제나 열렬한 카톨릭교 신앙에 입각해 작품을 만들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1주일에 2번 영성체 했음)

 

그는 종교미술의 목적이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북돋우며, 가톨릭 교회의 전도자로서 봉사하는 것이라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 ~63)의 공식 교리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종교미술은 항상 알기 쉽고 사실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독실한 믿음을 위한 정서적인 자극제로서 작용해야한다, 베르니니의 종교미술은 주로 그러한 원칙들에 따르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로 발전했다. 

그는 우르바느스 8세 밑에서 무덤이나 분수와 같은 새로운 여러 종류의 기념풀들도 만들기 시작했다. 루르바누스 8세의 무덤은 팔을 위엄있게 들어 올린 채 않아 있는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에 금을 입힌 청동석관(靑銅石棺)  옆으로 각기 사랑과 정의를 상징하는 2개의 흰 대리석상이 있다.

 

석관(石棺)  위에는 죽음의 신을 나타내는 형상이 묘표(墓標) 역할을 하는  잎사귀 위에 우르바누스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베르니니는 여기서 콘체로(이탈리아어로 '착상'또는, 예전에는 '기발한 착상'이라고 했음)라는 생생한 주제를 사용해 새롭고 다채로운 무덤의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이시기에 또한 혁명적인 일련의 작은 묘비들을 설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리아 라기의 묘비(1643)이다

 

베르니니가 로마시에 공헌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분수들이다. 맨 처음 만든 분수는 스페인 광장에 있는 <바르카차 Barcaccia)(1627 ~1629)로서 , 이것은 조각과 건축을 융합한 점에서 성베드로 대성당의 닫집과 비슷하다.  <트리톤 Triton> 은 고대 로마의 건축학적인 분수를 극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전통적인 기하학 양식의 광장 분수로 겹쳐진 모양의 분수 못은 마치살아 있는 듯하며 4마리의 돌고래가 해신(海神)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조개 껍질을 들어 올리고 있으며, 해신(海神)은 고동에서 물을 뿜어오리고 있다.

그러나 베르니니의 초기 건축작품들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1637년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 위에 종탑들을 세우기시작했다.  그러나 1646년 그 무게 로 말미암아 성당 거물에 금이가기 시작하자 종탑들은 철거되었고 베르니니는 한동 안 신뢰를 잃었다.   

 

 

베르니니의 자화상 

 

인노켄티우스 10세와 알렉산더 7세의 후원

 

베르니니의 가장 장대한 공 공기념물들은 1640년대 중반에서 1660년대 사이에 만들어졌다. 로마의 나보라 광장에 있는 <4대갇 분수>는 무묵한 바위 위로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으며,  바위주변에는 17세기 세계 4대강(유럽의 도나우강, 아프리카의 나일강,아시아의 갠지스강, 아메리카 대륙의 라플라타강)을 상징하는 4개의 대리석상이 놓여있다.

교황이 양팔과 올라브 가지(인노켄티우스 10세의 紋章)를 몰고 있는 오벨리스크 위의 비들기는 그것들이 나타내고자하는 뜻(다시금 힘을 얻등 교황이 하느님 밑에서 세계를 지배함)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뚜렷한 상징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베르니니의 분수는 시각적으로도 그 장대함을 과시하는 불멸의 작품이다.

 

베르니니의 종합적인 상상력은 또한 연극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알부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연극의 본질은 그의 미술의 본질과 똑 같았다. 그는 관객과 직접적이고도 더러는 예기치않게 접촉하기 위해 구태의연한 관행을 깨뜨렸다. 그는 무대에서 실제로 불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한번은 무대를 물에 잠기게 해 관객을 잠깐이나마 그 장면에 실제로 참여하는 배우로 만들기 까지 했다.

 

베르니니의 성숙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는 가장 뛰어난 작품은 로마의 산타마리아델라비토리아 교회에 있는 코 르나로 예배당으로 여기에서는 초기의 발전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 페데리고 코르나로 추기경이 의뢰한 이 예배당은 그 작은 교회의 수랑(袖廊)에 있다. 그 예배당의 초점에는 스페인 카르멜 수도회의 위대한 개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1515 ~ 1582)가 체험한 신비한 경험을 묘사한 <성녀 테레사의 법열 The Ecstasy of St. Teresa) 이 놓여 있다. 

성녀 테레사이 진술을 토대로 한 이 조각은 한 천사가 나타나 신성한 사랑의 불 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는 테레사의 환영을 묘사하고 있는데, 성녀는 요동치는 물결 모양의 옷 주름으로 온통 휩싸인 채 무아(無我) 상태에서 황홀경에 빠진 모습으로 천사와 함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빛에 싸여 건축과 장식 요소들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제단 너머의 벽감(無我)안에 들어있다. 

그 좌우에는 오페라 좌석과 비슷한 공간 속에  대리석상으로 묘사된 코르나로가(家)의 수많은 가족들이 대화나 독서 또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코르나로 예배당은 회화적인 조각이나 건축에 대한 베르니니의 이상을 최고조로 실현시킨 것이다. 

성녀 테레사와 천사의 조상은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관람자는 그것이 입체상인지 고부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조상의 위쪽과 뒤 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떨어지는 자연광도 뒤쪽에 조각된 금빛 광선과 더불어 군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성녀 테래사의 법렬>은 전통적인 의미로는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적 드라마에서의 예베자도 포함해 조각과 그림, 빛 등으로 이루어진 회화적인 장면이다

 

베르니니의 가장 뛰어난 건축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을 둘러싸고있는 주랑(柱廊)이다. 이 커다란 공간은 주로 부활절이나 특별한 행사 때 교황이 축복을 받으려고 모여드는 군중을 수용하는데에 쓰였다. 베르니니는 교회에 달린 사다리꼴 앞마당 앞에 거대한 타원형 광장을 설계을 설계했는데 , 그 형체를 어머니의 감싸는 두 팔에 비유했다. 

벽이 없이 독립해 있는 주랑(柱廊)은 드나들 수 있는 울타리의 필요성에 대한 기발한 해결책이었다. 방문객을 교회로 인도하는 이 타원형 광장은 지나치게 폭이 넓은  대성당의 정면을 보완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타원형의 광장의 중심에는  1586년 식스투스 5세가 이 교회 앞으로 옮겨놓은 바티칸궁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그는 마테르노가 예전에 만든 분수를 타원형 광장으이 긴 축선 상에서 오벨리스크와 타원의 둘레 사이에 옮겨 놓고 , 오베리스크를 중심으로  그 반대편에 배경의  조화를  위해 똑 같은 분수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또 다른 그의 작품인 산 안드레아 알퀴리날레 교회 내부와 비교해 볼때  그 타원형 공간은 비슷하면서도 그 의미와 기능에서 약간 차이를 보여 흥미를 끈다.

 

베르니니의 가장 장대한 종교 장식품은 중세에 나무로 만든 교황좌(座)에 씌울 금박 청동덮개인 성 베드로 옥좌(1657 ~1666)이다. 베르니니의 임무는 그 옥좌의 장식 덮게를 만드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아오는 순례행렬을 위해 대성당의 앱스(後陣)에 의미 심장한 장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옥좌는 초기 교회의 신학박사를 (성 암브로시우스, 성 아타나시우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성 아우스티누스)를 나타내는 4개의 인상적인 청동상을로 받쳐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위로는 구름과 햇살 위로 천사들의 금빛 후광이 타원형 창문에 그려져 있는 '성령의 비들기'에서 펴져 나오는 자연의 빛은 하나님이 교회를 매개로 세상에 골고루 내려보내는 은총의 물결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이 옥좌는 대성당 바깥의 타원형 광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면서도 그 양식이 매우 달라서 놀랍도록 다재다능한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모두 키지 가문 출신의 교황인 알렉산데르 7세(1655 ~1667재위)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베르니니는 대규모 작업 중에도 계속해서 몇 점의 인물 흉상을 만들었다. 그 중 최초의 것은 모데나 공작인 에스테 가(家)의 프란체스코 1세의 융상(1650 ~1651, 모데나 에스텐세미술관)으로 , 이 작품에서 그는 초상조각의 혁명을 이루었다.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흉상은 꽤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럽지만, 바로크의 이념을 대변한 인물인 보르게세 못지 않게 바로크 시대의 이상을 나타내는 영웅적인 과시와 위풍당당한 자채를 보여준다.

 

 

 

베르니니가 제작한 모데나 공 프란체스코 1세의 대리석 흉상(1650 ~1651)

 

프랑스 여행

 

베르니니는 1665년 4월 말 쯤 파리로 가서 11월 중순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이것은 그가 로마를 장기간 떠나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그 여행은 루이 14세가 여러 해에 걸쳐 그를 초청한데다가 예수회회장인 대부 올리바의 권고로 이루어쪘다 여행의 목적은 새 왕궁의 설계였다.

이 무렵 베르니니의 명성은 대단해 군중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각 도시의 거리에서 줄을 이었고, 파리에서의 환영회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의 미술과 건축을 무시하고 이탈리아 미술과 건축만을 오만하게 극찬하자,  민감한 프랑스 사람들은 곧 불쾌해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베르니니는 지금은 없어져버린 튈르리 궁을 '꼬마들의 대부대'를 생각나게 하는 '크지만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 파리의 모든 그림을 다 합쳐도 이탈리아 미술가인 구이도 레니의 그림 1점보다 못하다고 평했다. 

이러한 말들 때문에 그는 프랑스 왕궁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그가 제시한 루브르 궁의 설계도가 거절된 것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잇었다. 베르니니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남긴 작품은 위엄있게  앞을 쳐다보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커다란 흉상이다. 선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수직적이고, 안정된 이 초상 조각은 그뒤 100년 동안이나 왕의 초상 조각 제작의 모범이 되었다.

 

 

루이 14세 흉상 

 

 

후기 생애

 

베르니니의 후기 조각 작품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한 건축물 및 장식에 비해 필연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 몇몇 작품은 매우 흥미롭다, 그 가운데에서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키지 예배당을 위해 조각한 <사자굴 속의 다니엘 Daniel in the Lion's Den>. <하박국과 천사 Habakkuk and the Angel>(1655 ~1661)에서는 늘어진 몸, 표현이 풍부한 몸짓 , 단순하지만 뚜렸한 감정 표현 등 그의 후기 양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똑 같은 특징들이 성 베드로의 옥좌를 받치고 있는 인물상들에 이미 나타나 잇는데 이러한 특징은 베르니니가 1667 ~1671에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 산탄첼로 다리를 다시 장식하기 위해 만든 감동적인 <천사들 Angels> 에서 절정에 이른다.

교황 클레멘스 9세(1667 ~1669 재위)는 베르니니가 만든 <천사들>을 매우 놓이 평가하여 다리에 세워두지 않게 했고, 그것들은 현재 로마의 산 안드레아 델라 프라테 교회에 있다.그 대신 다리에는 모사품을 가져다 놓았는데 , 그가운데 하나인 <머리글자 INRI를 가진 천사 Angel Wth the Superscription INRI>는 실제로 베르니니가 직겁 만든 모사품이다.

 

베르니니는 말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장식품을 하나 더 만들었다. 시크라멘토 예배당의 제단(1673 ~1674)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천사들의 유순하고 인간적인 예배는 천사들의 옆에 있는 청동 닫집의, 시간을 초월한 듯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베르니니 의 후기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내 준다. 

 말년에 배르니니는 변함없는 건축 원칙들 이야말로 덧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안이라고 생각 했던 것 같다. 배르니니으 가장 뛰어난 후기 작품은 로마의 산프란체스코 아리파 교회에 있는 수수한 알 티에리 예배당(1674경) 이다. 제단 위의 빅적 넓은 공간에는 독실한 성도 루도비카 알베르토니의 죽음을 묘사한 조상이 있다.

베르니니는 코르나토 예배당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제작과정과는 반대로 , 건축과 조각 및 그림이 제각기 서로 다른 역할을 하도록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분리시켰다. 그런 점에서 알티에르 예배당은 그가 예전에 만든 교회 내부의 변형으로서 더욱 전통적인 색채를 띠 고 있다.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Ludovica Albertoni>는 아치형 통로에 있지 않고 넓은 공간의 바닥에 놓여 있으며 성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상의 빛을 받으며 죽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로는 예배한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녀의 독실한 신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베르니니는 81세에 죽었으며 일생 동안 8명의 교황을 위해 일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있는 베르니니의 무덤 

 

 

2. 작품 세계 

 

베르니니는 나폴리에서 매너리즘 조각가인 피렌체 출신의 피에트로 베르니니에게서 태어났다. 7세 때에 몇 개의 큰 사업에 참여하게 된 그의 부친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어린 베르니니의 재주는 화가 안니발 카라치와 교황 바오로 5세의 눈에 들게 되고, 교황의 사촌이었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그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된다.

그의 최초의 작품들은 오래된 헬레니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르게세 추기경 아래에서 젊은 베르니니는 빠른 속도로 그 재능을 드러내었다. 추기경을 위한 초기 작품들 중에는 『아기 제우스와 어린 사티로스에게 젖을 먹이는 염소 아말테아』와 같은 정원을 위한 장식적인 작품들과 『저주받은 영혼』,  『축복받은 영혼』와 같은 우화적인 흉상들이 있다. 22세에 그는 교황 바오로 5세의 흉상을 완성한다. 

 

 

베르니니는 고전적 엄격성을 지키면서, 유동적 선과 통일적인 중량감을 나타내어, 우아하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며 건축 자체와 작품이 서로 밀접하게 맺어져 있다. 특히 원근법의 효과는 보는 이에게 원근에 대한 환각을 주었다.

 

성당, 궁정 건축, 조각, 묘묘(墓廟), 분수, 장식 등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보르게세 갤러리에 있는 시피오네의 콜렉션 명작들의 연작과 함께 그의 세속적인 소재를 다룬 조각품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페르세포네의 납치(1621 ~ 1622)   / 성녀 데레사의 환희(1647 ~1652)(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1] 조각적 성과 

 

베르니니의 조각적 성과는 막대하고 다양하다. 그의 잘 알려진 조각은 다음과 같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박물관의 코로나로 경당에 있는 《성녀 데레사의 환희》, (베르니니가 설계한) 《스칼라 레지아》(바티칸 궁과 성 베드로 대성전을 연결하는 계단)의 기초에 지금은 숨겨져 있는 콘스탄티네가 있다.

그는 두 천사상을 조각하여 산탄젤로 다리의 디자인을 도왔다. 다른 것들은 그의 디자인에 기초해 그의 제자들이 만든 반면에 이 작품은 곧 그가 만든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그가 명성과 권력의 정점에 있던 1665년 4월 말에 파리로 여행하여 11월까지 머물렀다. 베르니니의 국제적인 인기는 그가 파리에서 걸어갈 때 거리에서 찬양하는 군중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예수회의 총장인 올리바(Oliva) 신부가 권장한 이 여행은, 루이 14세가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연속된 요청을 한 것에 대한 대한 회답이었다. 여기서 베르니니는 루브르궁의 동쪽 정면의 (결국은 거절당한) 디자인을 제안했으나 내국인 클로드 페로의 더 엄격하고 고전적인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의 대담한 오목볼록한 파사드(입면)는 폐기되었다.

베르니니는 프랑스의 예술과 건축보다 이탈리아의 것을 칭송하여 곧 프랑스 궁정의 눈에서 벗어났는데, 귀도 레니의 그림이 파리의 모든 그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시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은 한 세기 동안 왕실 인물 묘사의 표준을 정립했던 《루이 14세의 흉상》이다. 

    

2] 건축 

베르니니의 건축적 착상들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열주랑과 광장을 포함되어있는데, 그는 《바르베리니 궁전》 (1630년부터 보로미니와 함께 작업), 《루도비시 궁전》 (지금은 몬테치토리오 궁전), 《키지 궁전》 등의 여러 로마의 궁전들을 설계하였다. 

 

베르니니의 최초의 건축 설계안은 청동으로 된 웅장하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제대을 높이 뒤덮는 캐노피(차양)인 <성 베드로의 발다키노(1624년-1633년)>와 성 비비아나 성당(1624년)의 〈파사드〉(입면)였다.

 

1629년 <발다키노>가 완성되기 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에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작업의 모든 직무를 맡겼다. 그는 바르베리니(우르바노 8세의의 본명) 교황을 위한 무덤을 대성전에 설계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와 대성당의 종탑 설계에서의 오판으로 인해 베르니니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팜필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후원이 끊기지는 않은 상태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7세 키지의 임기에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장식하는 데에 다시 중요한 역할을 얻어, 성당 앞 부분의 열주랑과 광장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바티칸으로 향하는 스칼라 레지아 입구와 대성당 안에 있는 애프스(교회 건축에서 동쪽으로 반원형으로 들어간 작은 방) 안에 있는 〈성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 또한 그의 걸작들 중 하나이다. 

 

베르니니는 많은 교회들을 무에서 시작해서 짓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한 구조들의 장식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는 이 영역에서 세가지 임무를 충족시켰다. 그의 고매한 정신은 그에게 분명한 디자인 안에서 구조를 설계하고 내부를 장식할 자유를 허락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작은 타원형 바로크 양식의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Sant'Andrea al Quirinale) 성당》이다. 여기에 있는 〈성 안드레아 조각상〉은 제대의 틀을 이루는 이디큘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또한 베르니니는 카스텔간돌포 교회(산 토마소 다 빌라노바)와 아리치아 (산타 마리아 아순타) 교회를 설계하였다. 

 

베르니니는 또한 파리에 있는 루브르궁의 열주랑을 짓기 위해 루이 14세에게 고용되었으나, 결국은 건축가 클로드 페로의 설계안에 밀려 거절되고 말았다. 이것은 프랑스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력이 쇠퇴함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클로드 페로의 마지막 설계안은 베르니니의 팔라디오풍 계단 난간 뒤의 평지붕의 특징을 포함한 것이었다. 

 

      

 

     로마의 산탄드레아 얼 퀴리날레 성당              

 

 

성 베드로 광장(산 피에트로 광장)의 건축물

 

    

3] 로마의 분수들 

 

바로크의 장식적인 활력이 잘 드러나는 로마 분수들은 공공적인 작품과 교황을 위한 기념물 두 종류가 있는데, 그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한 창조물들이다. 베르니니의 분수들은 트리톤의 분수와 바르베리니 분수(벌들의 분수)이다.

 

네강의 분수(콰트로 피우미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는 웅장한 걸작이자 정치적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분수에 조각된 베르니니의 강의 신들중 하나는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 (재능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라이벌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설계한 작품.)의 외관에 실망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 분수는 성당의 외관이 완성되기 몇 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나보나 광장의 4대 분수중의 하나인 폰타나 델 모로

 

 

4] 대리석 초상 

 

베르니니는 인물상의 돌로 된 침묵에 매력적인 역동성을 빌려옴으로써 대리석 흉상에 또한 변혁을 가져왔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디 몬세라토 교회에 있는 페드로 데 푸아 몬토야 몬시뇰의 흉상은 틀 바깥으로 몸을 내민 순간적인 동세를 보여준다.

 

사교적이었던 시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은 그의 흉상에서 대화하는 얼굴이 응결되어 있다. 그의 애인로 일컬어졌던 콘스탄차 부오나렐리의 초상에서는 신성과 존엄이 묘사되어있지 않다. 대신 교제나 놀람의 상황에서 포착한 단정치 못한 사생활의 순간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바깥의 왕실 후원자들을 위한 인물 조각상을 보면, 베르니니는 루이 14세의 인물상에서 어느 면으로 보나 왕의 존엄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바람을 맞는 대리석 의상과 폭포와 같은 머리카락을 만들어냈다. 이런 조각적인 풍부한 표현은 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의 흉상도 미화시켜준다. 그 외에 리슐리외, 잉글랜드의 찰스 1세, 헨리에타 마리아 등의 작품이 있다. 

  

 

안토니 반 다이크의 촬스 1세의 초상화(3명 모두 촬스 1세이다)

 

5] 다른 작품 

 

다른 베르니니의 조각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베르니니의 아이들〉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각들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앞에 있는 미네르바 광장에 위치해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광장에 세우기를 원했고, 베르니니에게 오벨리스크를 보조할 조각을 만들 것을 의뢰했다.

 

코끼리 조각상은 1667년 베르니니의 학생인 에르콜레 페라타가 만들었다. 코끼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코끼리의 미소이다. 왜 코끼리가 웃고 있는지를 찾아 보면 반드시 이 동물의 뒤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동물의 근육이 긴장되고 꼬리는 왼쪽으로 움직인 것을 알 수 있다.

 

베르니니는 코끼리가 배변하는 것처럼 조각했다. 코끼리의 뒤는 베르니니와 그의 장인 동료들의 주된 적대자들중 한 명이었던 도미니코회 수사 도메니코 팔리아 신부의 집무실을 직접 가리키고 있어,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다. 

 

1644년 그의 전폭적인 후원자였던 우르바노 8세의 사망으로 베르니니에게 경쟁자 집단이 생겨났고 그의 직업에는 변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네이브를 확장하고 나보나 광장의 4대강의 분수(콰트로 피우미 분수)를 만들도록 그의 작업을 지원해 주었다.

 

1655년 인노첸시오 10세가 사망했을 때에 베르니니는 로마에서 공공의 취향의 권위자였다. 베르니니는 로마에서 1680년에 사망했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감독 하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루이지 베르니니, 스테파노 스페란차, 줄리아노 피넬리, 안드레아 볼지, 필리포 파로디, 자코모 안토니오 판첼리, 라차로 모렐리, 프란체스코 바라타, 프랑수아 뒤크누아 등이 있다. 건축에서 그의 라이벌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있고 조각에서는 알레산드로 알가르디가 있다. 

 

베르니니가 죽은 지 2년 뒤에,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로마에서 살면서 필리포 발디누치에게 베르니니의 전기를 쓸 것을 의뢰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가 그린 베르니니의 초상화 

 

 

4대강 분수

 

 

가시면류관을 든 천사상

 

 

축복받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6]회화

 

베르니니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젊었을 때에 하던 부업이었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며 조금도 뻣뻣하지 않고 자유롭다. 베르니니는 로마에서 그의 아버지인 피에트로 베르니니 밑에서 공부했고, 조숙한 신동으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은 즉각 주요 수집가들에게 발견되었다

 

 

 

이탈리아 화폐, 50000 리라,1992년, 149X 78mm,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

 

(자료출처 : 위키백과)
 

Paintings  

 

 

Self-Portrait As A Young Man, 1623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25

 

Saint Andrew And Saint Thomas, 1627 

 

 

Self-Portrait As A Mature Man, 1630-35

 

 

Pope Urban Ⅷ, 1632

 

 

Self-Portrait, 1635

 

 

Portrait Of A Boy, 1638

 

 

Gian Lorenzo Bernini by Baciccio, 1665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Fontana Della Barcaccia, 1627-28

 

스페인광장 계단 아래쪽 중앙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난파선 분수(ontana Della Barcaccia,)는 지안 로첸초 베르니니와 아버지 삐에뜨로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이다. 테베레 강에 홍수가 났을 때 배가 이곳까지 떠내려와 좌초되었던것에 착안해 물에 가라 앉ㅅ는 배 모양이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트레비 분수와 같은 수롱;ㅔ지만 지대가 높아 수압이 낮으므로 약하게 흐르는 물이 난파선이라는 분수의 모양과 잘 어울린다. 분수의 물은 위 아래 두 군데로 나뉘어져 위쪽에서 흘어 나오는 물은 사람만이 마실수 있고 아래 쪽 고인물은 말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Barcaccia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설계한 바르카치아 분수

 

Fontana Del Tritone, 1624-43  베르니니의 조각작품이 보인다

 

 

The Triton Fountain by Gian Lorenzo Bernini,  1624-43 , in Piazza Barberini, Rome 

 

 

Piazza Navona Rome Italy

 

 

The Fountain of the Four Rivers, 1648-51

 

 

Fountain Of The Four Rivers, 1648-51

네개 강의 분수. 거대한 바윗덩이 위에 4대륙을 대표하는 아프리카의 나일강, 아시아의  갠지스강, 유럽의 다뉴브강, 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을 의미하는 네 조상이 자리잡고 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앞에서 이 분수를 시연하게 된 베르니니는 특유의 대담한 연출로 교황을 놀라게 했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를 보고 실망한 교황이 돌아서려는 그 순간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기적과 같은 순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Piazza Navona Rome Italy  

 
 
Fontana dei Fiumi di
 
이태리 로마에 있는 나보나 광장의 분수에 새겨진 베르니니의 조각품이다. 유명한 관광 명소인 트레비 분수의 조각품 처럼 인기가 많다고 한다.

 

 

 

4대강 분수의 갠지스강을 상징하는 거인상

 

 

 

 

 

 

Fontatna del Moro

 

Fontatna del Moro는 무어인의 분수라고도 불리운다. 가운데 무어인은 모조품이지만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지오반니 안토니오가 만든 무어인의 분수이다. 에디오피아인이 돌고래와 ㅏ우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뒤에 보이는 것은 산타고네세 인 아고네 성당이다.

 

 
Fontana di  Trevi
 
트레비 분수는 베르니니의 원안에 따랐다고 하는 N. 살비의 설계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바 사후인 1762년에 완성되었다. 흰 대리석작품으로 게산믄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의 해신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위에 해신 냅투누수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있으며 주위의 거암 거석 사이에서 끝임 없이 물이 흘러내려 못을 이룬다 분수의 아름다운 배경은 나폴리 궁전의 벽면을 이용한 배경을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로마시대에서 볼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이라고  한다 이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다시로마에 돌아올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동전을 던진다.
 
 
 
트레비 분수는 현존하는 로마 분수 중 가장 규모가 큰 분수로 높이는 25.9m 너비는 19.8m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는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다고 평가된다

 

 
Ariccia sta maria assunta
 
 
 
Saint Peter's Square from the dome 
 
성 베드로 광장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 는 1656년 부터 1667년 까지 성베드로 광장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회랑과 열주를 덧 붙임으로서 비실리마는 보다 가늘고 긴 모습을 더하게 되었다. 광장 입구에 전체 복합 건축물의 중앙 포크스를 돔으로써 정면의 시각적 충격을 줄이고 돔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하였다.
 
오른쪽으로 신앙교리를 위한 성성과 17세기에 만든 우피지오 궁이 있고 바로 그 뒤에 1871년 6월 30일 바오르 6세가 제막한 교황알현실 지붕이 있다. 알현실과 바실리카 사이에 튜튼 대학이 있다. 이 건물은 전하는바에 따르면 샤를르마뉴가 프랑크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건축한 것이다.
 
이 건물 옆에 19세기에 지아진 팔라조 델라 카노나카와 돔이 있는 바실리카의 성물소가 있다. 바실리카 오른쪽에는 니콜라스 5세 탑, 스위스 근위대 막사와 함께 시스킨 예배당과 사도궁이 있다. 바실리카 정면은 최근 미국 카톨릭 자선단체의 도음으로 복원되었다.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세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운것이다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가지는 그 높이가 16미터다 

 

 

 

Vatican.
 
회랑 위에 140개의 대리석상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상은 주로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하나의 높이는 3.24m이다
 

 

 
로마 카톨릴과 바로크 미술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지안 로첸초 베르니니가 개축한 바디칸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베르니니는 베드로의 옥좌가 있는 제단 부분을 화려한 금빗으로 장식하고 돔 지붕 아래에는 거대한 청동 닫집을 세워서 카톨릭의 영광을 드높이고자했다.
그리고 약 200년 뒤 성당과 광장을 통리성 있게 연결하는 열주 회랑을 만들었다. 성당 전면의 양편에서 길게 뻗어 나와 둥글게 광장을 감싸는 형태는 마치 신이 두손을 벌려 신도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축을 통한 이러한 극적인 연출과 감정적 효과는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승의 신 하디스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내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했다는 신화이 한 장면을 형상화한 [페르세포네의 납치]에서 네르니니는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을 부드러운 인간의 피부로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