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여행]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댓글 66

전국 문화재와 박물관/국가지정 문화재

2012. 7. 18.

 

 

 

 

 

[부여여행]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이 절터는 백제(百濟)가 부여(扶餘)로 왕도를 옮긴 시대 (538-660)의 중심사 사찰터이다. 경내에는 백제시대에 건립된 오층석탑(五層石塔)(국보 제9호) 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좌상(石佛坐像)(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이 절터는 몇 차례의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절의 배치(配置)가 확인되고 각 시대의 유물들이 수습(收拾)되었다. 특히 현재 석불좌상이 있는 건물터에서 발견된 기와 중에 "태평 8년 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고 새겨진 글이 나와 고려시대에는 정림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遼) 성종(成宗)의 태평 8년은 고려 현종(顯宗 ) 19년(1028)에 해당된다.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大藏殿)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중요 건물 배치는 중문(中門), 오층석탑, 금당(金堂), 강당(講堂)의 중심축선(中心軸線)이 남북 일직 선상에 놓이고, 이를 회랑(回廊)으로 두른 장방형(長方形)의 평면 위에 남북일탑식(南北一塔式) 가람배치(伽藍配置)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7세기 일본의 사찰가람에 영향을 주어 고대 일본의 사찰 가람배치의 본이 되었다. 발굴조사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의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백제벼루, 토기 등 사찰용품과 소조(塑造) 불상(佛像)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문화생활을 알 수 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08호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 定林寺 >는 부여천도< 扶餘遷都 > 즈음인 6세기 중엽< 中葉 >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百濟 >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었고, 그후 고려시대< 高麗時代 >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때의 번창을 알려주는 것이 석탑< 石塔 >이라면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석불상< 石佛像 >이다. 현재의 머리와 갓은 후대< 後代 >의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상< 毘盧舍那佛像 >인 것이 확실하다. 불상에 비해서 대좌< 臺座 >는 잘 남아 있는데, 상대< 上臺 >는 앙련< 仰蓮 >이 조각되었지만 마멸과 파손이 심하고, 중대< 中臺 >의 8각간석< 八角竿石 >은 각면에 큼직한 안상< 眼象 >이 표현되었으며, 하대< 下臺 >는 3중< 三重 >으로 복련< 覆蓮 >, 안상< 眼象 >을 새긴 각면이 중첩되어 복잡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8각대좌< 八角臺座 >라 하겠다. 이 불상과 대좌는 강당< 講堂 >의 주존< 主尊 >으로 생각되는데, 명문< 銘文 >기와로 보아 1025년경의 중창 때 조성된 불상으로 11세기 중엽의 만복사< 萬福寺 > 대좌< 臺座 >나 불상과 함께 11세기 고려< 高麗 > 불상양식< 佛像樣式 >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041-830-2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