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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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골목 / 최민자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휘황한 네온사인도, 대형마트도, 요란한 차량의 행렬도 없다. ‘열려가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스르륵 열리는 자동문이나. 제복 입은 경비원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고층빌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길목 어름에 구멍가게 하나, 모퉁이 뒤에 허름한 맛집 하나 은밀하게 숨겨두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일상의 맥박삼아 두근거리는,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어서 좋다.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길에서부터 곁가지를 치고 얼기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쪽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댓글 수필읽기 2020. 6. 14.

14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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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조선의 영웅 / 심훈

우리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가는 소리와, 아홉 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 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틀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서 남녀 아동들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5리 밖에 있는 보통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 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안 살림..

댓글 수필읽기 2020. 6. 14.

14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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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7월의 바다 / 심훈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 한 ..

댓글 수필읽기 2020. 6. 14.

14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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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비닐하우스 짓다

비닐하우스이지만, 다 짓고보니 뿌듯하다. 먼저 골조를 세우고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부직포, 다시 비닐을 깔고 마지막으로 차광막까지 네 겹을 씌웠다. 마치 물에 빠진 듯 땀에 젖었지만, 기분이 짱이다. (2020.6.12.) 3m 간격으로 뼈대를 잡은 후, 60cm 간격으로 지붕을 놓았다. 나와 친구들이 일손 봉사를 했다. 지붕의 골조를 잡는데 쉽지 않았다. 친구가 요즘 인기라는 영탁 막걸리를 두 통 사왔다. 땀 흘리며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꿀맛이었다. 겨우 지붕에 뼈대 5개에 묶었다. 별 것 아닌 듯해도 하고나니 뿌듯했다. 이어서 곧장 비닐을 덮어 씌웠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았다. 비닐이 넓고 바람이 불어 중심을 잡는데 꽤 어려웠다. 암튼 억지억지해 1차 비닐을 씌웠다. 비닐 안에 들어가니 화끈거리..

댓글 일상에서... 2020. 6. 14.

13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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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해지 / 정은아

핸드폰을 해지하러 대리점에 갔다. 주인 잃은 핸드폰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해지 전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전원을 켰다. 다시 생명을 얻듯 불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왔다. 잘못 누른 걸까. 재빨리 소리를 줄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음악 파일이 재생 중이었다. 꿈속에선 보이나 봐. 꿈이니까 만나나 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 봐. - ‘부활’의 노래. ‘생각이 나’ 남편의 핸드폰은 다시 살아나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눈물샘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대리점 안은 고객들로 소란스러웠고,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으로 숨었다.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노래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댓글 수필읽기 2020. 6. 13.

13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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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시각적 산문 / 이춘희

사진이란 빛이 잠시 머물다간 흔적이라 생각했다. 가까운 친구가 사진작가여서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는 되었지만 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의 흔적을 담아 언제든 그 순간을 재현할 수 있는 것 정도가 내가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진의 가치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혔다. “사진의 가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는 데에 있다.” 소설가 정찬의『새의 시선』에 실린 대화체의 문장이다. 그는 이것이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존 버거의 말이며 ‘사진의 가치’가 아니라 ‘사진의 권력’이라 말했다고 정정해준다. 유독 이 짧은 글이 한순간에 와 닿았던 것은 요즘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나의 짓거리라 해야 할지 마음의 행태라 불러야 할지 모를 일 때문이다...

댓글 수필읽기 2020. 6. 13.

11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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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지금, 오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휴일의 서울 북한산이나 관악산은 사람의 산이고 사람의 골짜기다. 봉우리이고 능선이고 계곡이고 간에 산 전체가 출근길의 민원 지하철 안과 같다. 평일 아침저녁으로 땅 밑 열차 속에서 비벼지던 몸이 휴일이면 산에서 비벼진다.​ 휴일의 북한산에서는 사람이 없는 코스를 으뜸으로 치고, 점심 먹을 자리를 찾을 때도 사람 없는 자리를 다투다가. 사람 없다는 코스로 너도나도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댓글 수필읽기 2020.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