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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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빨래 / 정은아

젖은 빨래는 묵직하다. 머금은 물이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눈물처럼 흐른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범람 했던 자리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기가 마른다. 내 눈물도 그랬을까. ​ 산후조리 중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9시에 출근이라, 아침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줬다. 아이가 일찍 깨면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고, 쌀을 씻어 안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바빠 보였다. 나는 5살 첫째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둘째의 사이에 누워 뒤척였다. 남편은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텀벙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 “자기야, 뭐해?” ​ 내 물음에 그는 바로 응답했다. ​ “빨래해. 어제 낡은 공장에서 ..

댓글 수필읽기 2020. 7. 2.

02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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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문 / 김지헌

실존과 초월, 주체와 타자, 안과 밖, 정신과 몸, 모든 경계에 이를 때 우리는 문을 통해 넘나들고 때로 양존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는 온통 문이다. 그 문들을 통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 또한 무수히 많다. 우리는 수많은 문을 통과하며 살아가지만 똑같은 문은 없다. 같은 문을 통과해도 그 경험은 매 번 다르다. 매 순간 변화하는 세계의 사물들은 비슷한 것 같아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긴 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통과제의를 거칠 때마다 문을 통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드나들었던 문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길을 지나며 변화하고 나아갈 뿐이다. 때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사립문(대문) 동짓달 깊은 밤, 꿈결인 듯 잠에서 깨어나다 사립..

댓글 수필읽기 2020. 7. 2.

02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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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재 / 변종호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겹겹이 쌓인 산허리 중에 그나마 쉬운 곳에 길을 냈으나 편히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굽이 돌고 돌아 가쁜 숨 몰아쉬며 가풀막을 힘겹게 올라야 넘을 수 있다. 재를 처음 넘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초, 설구산에 온통 붉은 꽃물이 들었던 시기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었다. 노산의 늦둥이로 태어나 체구는 작고 병약해 두 번의 강을 건너고 재를 넘는 십리 장터를 다녀오는 것은 무리였다. 소풍을 앞두고 옷이랑 신발을 사준다는 달곰한 유혹이 없었다면 재를 오르다 벌렁 드러누웠을 일이다. 기억 속의 주치재는 높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재를 넘어야 영월이나 제천, 원주를 갈 수 있었고 주천 중학교는 물론 장터에 가느라 곡식을 이고 진 사..

댓글 수필읽기 2020. 7. 2.

02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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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고요한 우물 / 김귀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어요. 신령스러움이 느껴졌지요. 세상의 가장 복잡한 번뇌와 가슴 안쪽 고갱이의 사랑을 버무려 보석을 만든다면 아마 그런 빛깔이 아닐까 싶더군요. 졸여지고 졸여진 유장한 세월이 두 개의 눈에서 고요로 깊었어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포물선을 중용으로 벼린 달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친정에 들를 때였지요. 동네 입구 당산나무 아래 구순의 노인이 차창으로 인사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걱정했답니다. 납작한 돌을 괴고 앉은 채로요. 차고 물맛이 좋은 방앗간 집 우물이 곧 메워질 것이라는 겁니다. 뜬금없었지요. 동네 우물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탓에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친정 동네가 요즘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치솟고 있어요. 외지인들이 들어와 헌집을 부수고 높은 곳엔 축..

댓글 수필읽기 2020.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