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공 상희 2008. 7. 3. 17:11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마태복음 3:16, 17


설교지원팀



영화배우 이병현 씨의 일본 팬 모임에 4만 2천여 명의 일본 여성이 몰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순수한 사랑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관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신사’입니다. 일본 황실과 조상들을 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만 전달할 뿐이지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약 일본인들이 제대로 기독교를 안다면, 기독교의 사랑을 안다면 정말 우리보다 더 화끈하게 열정적으로 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입니다. 삼위 모두가 사랑으로 빛납니다. 삼위의 사랑이 일체를 이루었으니 그 사랑은 엄청난 사랑의 에너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 사랑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성부 하나님은 대가를 치르는 사랑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소리를 내셨습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좀 이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왜 여기에 있습니까? 왜 팔레스타인 이 땅에, 식민지 청년으로, 목수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습니까? 사랑을 했으면 천국에 있어야 하고 땅에서 살려고 하면 더 품위 있는 모습으로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도“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것은 빈소리처럼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참 사랑이 있고 하나님만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대들의 철없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고 자식들에게 상처를 받은 부모들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대가를 치르는 사랑이고 고통당하는 사랑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이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는 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불순종의 거역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으셨습니다. 처음으로 생명이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성자의 십자가 처형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를 보내셨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 처형으로 당신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하셨습니다.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고통 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사랑은?“너”를 위해 아파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특징은 자식을 위해 아파하는 것입니다. 너만 편할 수 있다면, 너만 잘 될 수 있다면?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아버지적인 사랑, 부모님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렌섬>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입니다. 텔레비전 부호인 깁슨의 아들이 납치당합니다. 납치범들은 거액의 돈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기자회견을 통해 납치범들의 요구사항에 응답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아버지는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유괴범을 체포해 주는 사람에게는 25억을 주겠다, 50억을 주겠다… 아내는 펄펄 뜁니다. 아버지는 냉정한 표정을 짓지만 골방에서 펑펑 웁니다. 그러면서도 정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제안은 납치범들에게 묘한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돈에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납치범들의 자중지란으로 아들은 무사히 구출됩니다. 정의도 이기고 아버지의 사랑도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정녕 죽음이 있으리라!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성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고통 받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에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말로만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이 필요하고 대가를 치르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자 하나님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실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을 만드셨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던 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창조하신 물 속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세상에 오실 때도 낮은 자의 신분으로 오셨고 낮은 자들과 함께 살다 가셨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손자를 낳으면 대통령이든 목사이든 누구든 하루아침에 아기가 됩니다. 손자의 눈높이로 낮아집니다. 왜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기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손자를 사랑하게 되면 같은 수준으로 낮아집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낮아짐이 있습니다. 낮아짐은 수준을 함께 하는 것이고 수준을 함께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자들에게 같은 말로, 같은 모양으로 하나 되는 것은 체면도 눈치도 없습니다. 그들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왜 그렇지 못합니까? 같은 수준으로 낮아지지 못합니까? 우리 사랑에 예수의 사랑이 녹아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녹아지면 주님처럼 하나 되는 사랑이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이 녹아내린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낮아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당신을 함께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에게“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함께 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진정한 몸이 되려면 낮아지는 사랑으로 보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계급장을 떼고 함께 해야 합니다.

 

3. 성령 하나님은 남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본문에 성령이 나옵니다.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온유와 온화와 평화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복음서에서 성령의 역할은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삼위를 대표하는 신으로 나오고 예수님은 나름대로 기적과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실체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이 계시는 데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체도 아니고 그런 영적 분위기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이 어둠과 혼란과 공허함을 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덮으시면서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드러내고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가 가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은 언제나 숨겼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남을 드러내고 자신을 숨기는 사랑입니다.

예수가 누구신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분의 하셨던 말씀들을 깨닫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빛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타인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성령의 역사를 더 뜨겁게 체험하고 성령의 임재를 더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진짜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배워서 믿는 믿음은 한계가 있고 학습해서 쏟아내는 신앙고백은 어느 이상의 진전을 못합니다.

믿음은 학습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진짜 고백이 나옵니다. 사랑도 학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불이 붙고 진짜 사랑이 나옵니다.

말죽거리 개포동은 옛날에는 살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우스갯소리로‘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했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강남입니다. 개포동은 이제는‘개도 포텐사를 타고 다닌다’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시시했다 해도 이제 삼위의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고 알게 된다면 우리도 굉장한 사랑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어야 우리 청소년부는 건강한 부서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