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공 상희 2008. 7. 3. 17:19

하나님의 딜레마
                             / 마태복음 27:45∼50 /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용서해 놓으시고 정작 아들은 용서하지 못했을까?하는 것이 의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이미 어려서부터 알았습니다. 문제는 왜 십자가인가? 인류의 죄 문제가 꼭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여서 해결할 방법밖에 없는가? 그냥 "내가 너희들의 죄를 사하노라!" 그렇게 한마디 말씀으로 용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던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인데 왜 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절절 매시는지… 여기에는 뭔가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에덴에서 딜레마에 빠지신 하나님
인류의 첫 조상 아담·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와 첫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생명과를 따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양자간에 맺어진 약속의 효력을 위해서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으면 정녕 죽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정녕"은 "기필코", "당연히" 라는 뜻으로 심판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당해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그를 죽이면 하나님의 사랑은 끝입니다. 만약 그들을 살린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가짜입니다. 죽이려니 사랑에 걸리고 살리려니 하나님의 공의에 저촉되고.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상황-하나님께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2. 갈보리에서 딜레마에 빠지신 하나님
그로부터 4천 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독생자 예수. 그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신 분이고 33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대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세례 받을 때(마태복음 3:17), 변화산상에서(마태복음 17:5).


인류 역사에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나의 벗" 다윗에게는 "마음에 합한 자" 바울에게는 "택한 나의 그릇" 여러 선지자들에게는 "나의 종"이라는 표현은 썼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는 말은 예수에게만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한 신분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는 간절한 심정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주세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천사가 와서 도와야 될 정도입니다. 이 정도이면 어떤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 않으실까?
지금도 십자가에 달리셔서 "왜 나를 버리시니이까?"를 부르짖습니다.
지금 예수는 개인의 문제로 달려있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갈보리에 달려있습니다. 그의 구원의 기도를 들어버리면 인류의 죄는 그냥 남아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의 탄원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를 들어주면 하나님의 공의는 가짜이고 그를 죽이려니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3. 십자가에서 해결된 하나님의 딜레마
하나님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카멜롯>. 아서왕에게 신임 받던 기사 중에 랜슬롯 경과 왕비(귀네비어)가 불륜에 빠지게 됩니다. 왕의 신하 중에 모드레드라는 간사한 자가 있는데 두 사람의 밀회 중에 현장을 덮칩니다. 기사는 도망가고 왕비는 체포되어 배심원의 판결로 화형을 선고받게됩니다.


남편의 입장으로 보면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왕의 입장으로 보면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집행관입니다. 아내를 죽인다면 그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고 아내를 살리고 법을 죽인다면 그의 통치권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과 법의 충돌. 남편과 왕의 신분의 충돌. 아서 왕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아서 왕은 법보다는 사랑하는 아내를 택함으로 통치권은 타격을 입습니다. 아서 왕은 그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하고 한쪽을 희생함으로 문제를 절반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막판에 아들을 살려 주실까? 하나님의 공의를 희생시키시며 아들 편을 들어 주실까?


하나님께서는 율법 쪽을 택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뒤집어씌우시고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끝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서 왕은 사랑 쪽을 택함으로 끝내 법을 희생시켰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킴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공의를 이루시고, 부활시키심으로 끝까지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딜레마가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해결해 준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우리가 있고 그래서 우리의 죄는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존귀한 자들입니다. 왜냐? 우리는 하나님의 딜레마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딜레마가 되었다면 죄송하지만 얼마나 존귀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며 딜레마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천사가 타락했을 때에도 딜레마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놓고 하나님께서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기 희생, 아들의 희생으로 극복하셨고 우리들을 사랑스런 자리로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딜레마의 극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딜레마도 극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딜레마를 극복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