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공 상희 2008. 7. 3. 17:32

무엇에 박혀있는가?
마태복음 27:35, 36

 

 

 작년,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가 미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의 인격이나 교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의 수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통에 카메라를 2천년 전으로 돌려 십자가 처형을 할리우드 식으로 액션화(化)했기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손을 뚫고 나온 커다란 못 사이에 피가 떨어지고 그 피는 마치 스크린 밖 관객들에게 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1. 육신이라는 십자가에 갇힌 치욕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신성(神性)만을 소유하고 계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성은 아무 것에도 제한 받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는 존재의 수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땅은 압제 당하고 있는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피조물이 되심은 창조주의 능력을 잠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육신은 정말 보잘것없는 육신이었습니다. 육신 속에 갇혀 있었던 33년의 생애는 혐오와 갑갑함, 두려움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상처가 되는 수난입니다. 이 고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애에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 있는 육신의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아름답지 못한 외모로 힘들어하고, 출생 신분으로 괴로워합니다. 장애라는 십자가, 실직이라는 무거운 짐, 병든 육신이 심한 고통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초청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33년 육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용기가 솟을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십자가의 수난에만 고정시켜 슬피 운다면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 평생 못 박혀 살았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사람들에게 못 박혀 사셨습니다. 그분은 돈에도 흥미 없었고 권력에도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큰 예배당을 건축해야 한다, 종교를 만들어야 한다 등등 그런 것조차도 그분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사람-종교가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사람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비종교적인 사람들, 창기들, 세리들, 이방인들… 이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의 동류로 취급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했기에, 그들에게 못 박혔기에 일평생 그들에게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배신당한 제자들을 찾아온 것은 주님의 사랑의 못이 그들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은 손에 박힌 못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랑의 못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교회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를 사랑하기로 못 박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냄새나고 고약하고 인간이 덜 되었지만, 그래서 마음도 상하고 불편하고 힘겹지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어제까지만 해도 환호하던 사람들-지금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품으셨습니다. 고슴도치를 품은 것입니다. 안을수록 찔리고 피를 흘립니다. 십자가의 손자국에서 난 핏자국보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거절당하고 상처받고 흘리던 마음의 핏자국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픕니까? 사람처럼 무섭게 느껴지는 존재도 없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에게 평생 사랑하면서 살기로 못을 박아야 합니다. 거절당하는 아픔을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간다 고백했으니 삶으로도 고백합시다. 그래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여섯 시간 동안 버림받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그것을 단순히 육체의 고통을 만들어 버리는 것은 값싼 동정심을 유발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같은 예수 영화가 오히려 예수님의 진면목(眞面目)을 왜곡시켜 버리는 위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이 되셨지만 아직도 그분의 육체 속에는 성자라는 신성(神性)이 있습니다. 33년을 주님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왔고 성부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고통이 무서워서 그런 기도를 드렸다면 그것은 나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를 크게 실망시키는 모습입니다. 나중에 베드로도 졌던 십자가를, 옆에 달렸던 죄수들도 그 위에 달려서 슬슬 예수님을 놀려가며 여유를 부리던 십자가를 정작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살려달라고!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몸부림 쳤다면 그것은 진정 구원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피하고자 했던 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림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 십자가에서도 저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잔만큼은 피하게 해주십시오!"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빛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얼굴을 외면하시는 것을 알고, 그 잠시동안의 버림이 너무 견딜 수 없어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 것입니다. 포도주도 거절하심은 고통을 전혀 회피할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외면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사람과의 버림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버림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보면서 울어도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용서가 없이 사람을 이길 때,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게 없이 성찬예식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위해서 운다면 그것은 주님과는 관계없는 눈물입니다. 마치 장례식에 고인을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세가 억울해서 우는 가장(假裝)의 눈물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알 때 그 버림은 주님과의 진정한 연합이 되고 새로운 것들을 얻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