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린 이 설 교

공 상희 2008. 7. 21. 18:18

우리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편84:1-4, 10
마태복음16:13-20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地方으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극적인 장소입니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의 토속신인 팬의 신전이 있던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大帝의 아들 빌립이 재건하고 당시의 황제였던 가이사랴 시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황제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명명한 이름이기에 그 지역에서 이 세상의 신 이해와 베드로의 신앙고백사이에는 신학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근간으로 하여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인자'라는 호칭은 복음서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가끔 지상 사역을 감당하는 예수님과 관련짓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마지막 때에 심판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 신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공동체에게 증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물으신 후, 주님은 이제 개인적인 고백을 확인하시려 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小要理 문답 같은 방식으로 물으신 이 말씀은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반드시 알아야하고 또 해야 할 고백이기도 합니다
 헬몬山 줄기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리트릿(Retreat)을 가진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지상 사역을 마치고 이제 교회로 하여금 이것을 감당하도록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은 여론을 종합해서 예수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고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아나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과 주님 되심,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고백을 듣고, 아주 흡족해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듣고 교회 시작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누가 주인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부터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놓치면 전부를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주체를 밝혀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를 세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바로 고백할 수 있을 때 교회는 바로 세워집니다
 교회를 세우는 주체는 이제 교회가 세워질 곳으로, '이 반석 위에'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의도하신 '반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교롭게도 반석이라는 말과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라는 말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반석은 '페트라'(      )/ '페트라'(     )라고 하고, 예수님 당시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로는 'kepha'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라는 말의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메타포를 즐겨 사용하시곤 했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아름다운 고백을 듣고, 그의 이름 뜻을 사용하셔서, 네가 가진 그 고백 위에, 그 견고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반석이 주는 이미지는 견고함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깨어져도 울지 않는 반석과 같은 신앙,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변함없는 그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어떻게 반석과 같은 고백으로 인정받았는가? 최초의 메시아 고백이기도 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정확한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합격점을 받을 만한 고백이기도 했던 베드로의 고백은 정확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고백했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과 왕 되심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합격점에 이릅니다. 우리 삶, 신앙생활, 헌신 생활, 예배, 사역들을 주님이 돌아보실 때, 우리는 합격  선입니까?
 
1)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은 나다 하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 가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 세워지는 이 교회는 '내 교회' 헬라어로 '무 덴 에클레시안'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스리고, 원하시는 대로 세워져야 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약속은 음부의 권세가 흔들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분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왕이심을 고백하는 교회는 사탄이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간교한 사탄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며, 지옥의 권세가 성도들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권세는 얼마나 간교하고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송두리째 흔들려고 달려듭니다. 교회 밖에서는 윤회설이니 환생설이니 해서 혼란스럽게 하고 그러한 매체들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전생에 나는 --"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토해놓습니다,
 또한 사탄은 내적으로는 교회를 공략해옵니다. 서로 마음이 상하게 하고, 갈라지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해서 교회로 하여금 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근본적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의 회복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고백을 가지고 사는 성도나 교회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왕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약점이 있다면, 주인 되심에 대한 고백이 없거나 약하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교회입니다.

2) 주님은 교회의 주인은 너다 하십니다.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의 책 가운데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You Shall be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두에게 그러한 내적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유혹, 주인처럼 행동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합니다. 사탄은 내가 마치 네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내가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분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오르면서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 성전을 오르는 그들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과연 그 고백이 있습니까? 그러한 고백을 한 성도들에게 우리주님은 이 교회는 "네가 주인이다" 하십니다.
 이 말은 네가 주인노릇을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모두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면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교회가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4편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노릇을 하는 자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하였습니다.  '주의 장막'은 히브리어로는 '미쉬케노데카'로서 '당신의 장막들'(Thy tabernacles KJV)이라는 복수입니다. 여기서 '장막''미쉬칸'이란 '주거''막사'란 뜻을 가진 말로서 흔히 성막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시78:60; 출40:2,35,36,38; 민9:15,17,18)이것은 다윗이 법궤를 안치한 성막이나(삼하6:17) 솔로몬이 지은 성전(왕상6:1-8)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로는 'your dwelling place'입니다. 하나님의 거하는 처소입니다. 교회는 성도 하나 하나가 건물의 건축자제가 되어 지어지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입니다(엡2:21-2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그리 사랑스러운 지오"하는 것은 주님이시여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지으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교회가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하는 말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된 성도는 교회의 모든 일을 책임을 지는 자입니다. 해야 할일 체워야 할일 내가 해야된다는 생각이요 내가하지 아니하면 누가 하랴 하고 모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합니다.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팔을 거둬 부치고 일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할 때는 밖으로 맴돌다가 영광 받는 자리가 있으면 살짝 들어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인 교회를 사모합니다. 쇠약하도록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합니다. 내 마음과 육체를 같이 동원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마음과 육체는 나의 전존재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주의 전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주인의식이 있는 자는 "주의 궁정에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있게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귀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러워 집니다. 목사님이  사랑스럽습니다. 장로님이 귀하게 보입니다. 직분 자들이 존귀하게 보입니다.

3) 주님은 교회의 주인은 우리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성도들 모두에게 내 교회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우리 교회입니다. 내 교회라고만 알고 있으면  참으로 잘못될 수 있는 확률이 많습니다. 자기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와서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 나 와서 받아드림을 받고 활개치며 신바람 나게 신앙 생활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하나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외로워지면 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 교회가 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이 모여서 한 공동체를 이룬 곳입니다. 그 지체 하나 하나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교회를  콤뮤니오 상토룸(Communio sactorum) '성도의 교제'라고 했습니다. 존 칼빈은 '코에투스 엘렉토룸'(Coetus Electorum) '선택된 무리'라 했습니다. 이 교회론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동체로서 교회론으로 같은 맥락을 이룹니다. 성도의 교제는 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너'가 있어서 우리가 될 때 가능합니다. 선택된 무리도 하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말합니다.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입니다.
결론입니다.
이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문제를 내가 책임지는 "내 교회"라는 생각과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같이 책임지는 "우리교회"라는 마음과 최종적으로 그 몸을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사신 "주님의 교회"라는 의식을 분명히 가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