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공 상희 2009. 5. 6. 12:04

 

 

 

 

 

 

 

 

출애굽기 강해

 


 

이장우 목사

 

 

 

 

 


 

출애굽기 1:1-7  출애굽  2001. 1. 7.


출애굽이라는 말은 애굽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엑소더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제목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70인역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히브리어 제목으로는 성경의 첫 단어를 따라 ‘이름들은 이러하니라’라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기원전 3세기경에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서 제목을 부친 것이 헬라어 제목으로 엑소더스입니다.

 

 

 

애굽에서 집단으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전쟁이란 한 지역을 정복하여 승리하면 그 지역에 눌러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고 승리를 하셨는데도 애굽에서 살지 않고 애굽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도 아주 급하게 보기 싫은 것을 피하여 가듯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밤에 신발을 신고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서 양의 고기를 구워먹는 것입니다. 당장 떠나듯이 식사를 하고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떠남의 정점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것을 출애굽의 유월절만큼 잘 보여주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만 발려져 있다면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이라도 어린양의 피 아래 있지 않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능력이란 오직 어린양의 피로서 되는 것임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남은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급하게 떠나는 것입니다. 어디로 떠나는 것입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애굽은 힘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인간 왕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인간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 다스리는 곳입니다. 이곳으로 떠나는 것이 출애굽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면서도 어디로는 가기를 싫어하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천국으로 가기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급히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교회의 모습인데 자꾸만 애굽에서 붙어살려고 하고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출애굽을 우리가 시작하면서 늘 떠날 준비를 다시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괴로움이 많아지자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디에서 보게 되는가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왕에게 달라고 하자 더욱 심한 고역을 시킵니다. 그러자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가 더 고생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저 모세를 벌주세요,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언약은 관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을 잘 들어서 구원하십니까? 아니지요.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미 말씀하신 내용을 이루기 위하여 출애굽할 때를 조성하시고 출애굽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도식을 아브라함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섬겨도 될 텐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는 것을 출바벨론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벨론을 떠날 때는 개인적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는 개인적이 아니라 한 국가로서의 출발입니다. 이러한 출애굽의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1-5절입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과 숫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애굽에 미리 가 있던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70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창세기를 통하여 이러한 내용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보시면 야곱의 혈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K.J.V 버전에 의하면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생명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살펴보았지만 한 번 더 상고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35:11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국민과 국민이 네 허리에서 나오고 왕들도 네 허리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허리를 꺾지 않으시고 많은 후손을 주시든지 하셔야지 그 상한 허리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물론 이때의 야곱은 이미 자녀들을 낳았지만 얍복강에서 허리를 다치게 됨을 통하여 이름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에서는 국가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그러면, 부러진 허리로부터 나오는 백성, 그런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이 허리가 중요합니다. 허리를 다치면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라도 당장 드러누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아는 어느 집사님이 중학교 체육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 늘 운동으로 다져진 몸입니다. 그런데 허리를 다쳐서 꼼짝을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백성이라면 그 모습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바로 왕 앞에 야곱이 섰을 때 절름발이입니다. 지팡이를 짚고서 서야 하는 초라한 늙은이입니다. 평생 지팡이를 짚고서 살다가 죽을 때에도 지팡이를 의지하여야 한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부러진 허리로부터 나오게 됨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1절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신 그 전능이 이제 출애굽기에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은 국민과 국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여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마치 창세기 35:11절을 다시 읽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애굽에서 이렇게 번성하고 많은 백성이 생긴 것은 야곱에게만 하신 언약은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5:5절입니다. “봉독” 하늘의 별과 같이 후손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15:13-14절. “봉독”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백년을 섬기겠고 그들은 4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이 언약의 말씀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원하여 애굽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는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바로 왕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혹시 적이 쳐들어오면 이들이 그들과 연합하여 우리를 대적하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여, 감독을 세워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나라의 성을 짓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합니다. 이러한 중노동을 시키면 죽기도 하고, 피곤하여 자녀를 많이 생산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중노동을 시키는데도, 오히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것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몇 백 년이 지나면서 왕조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이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로 부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강대국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덕분에 그렇게 되었는데 요셉을 모르는 왕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라와는 결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정치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그런 나라에서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출애굽하는 것은 인간 왕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으로의 출애굽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인간이 자기의 권세로 다스린다면 그런 곳에서는 빨리 출교회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누가 다스립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출애굽이란 세상의 방향, 가치관, 삶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사는 모습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고 주님께 간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만 가나안땅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의 땅을 지상의 땅으로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통하여 하나의 커다란 구원의 도식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떠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굽에서 불러내었으나 이스라엘은 실패를 합니다.

 

 

 

호세아 11:1-2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사랑하여 불러내셨는데 부를수록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불러내셨는데 오히려 바알을 섬기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다시 애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출애굽이 완성이 됩니까? 구약을 보면 출애굽을 하여도 여전히 반역을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이 됩니까?

 

 

 

마태복음 2:13-16, 20-2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애굽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이 출애굽을 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죄인들과 같이 되셔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처럼 애굽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부름을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실 때, 내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아들이라 불러내었으나, 호세아의 말씀처럼 애굽에서 사랑하여 불러내었으나 부를수록 멀리 도망가며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실패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출애굽을 제대로 하시는 예수님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무엇이 되어 있습니까? 이미 애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정신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으로 로마가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대하기 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애굽화된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전히 이루시고서 떠나시는 것입니다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차원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별세를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31절입니다. “봉독”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별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별세라는 단어가 바로 ‘엑소더스’입니다. 출애굽기라는 말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증인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을 목도한 증인이 엘리야 아닙니까? 물론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로도 봅니다만 지금 예수님이 별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출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별세입니다. 출애굽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가 애굽입니다. 그러니 떠나야지요. 어느 정도로 준비하고서 살아야 합니까? 신발을 신고 허리띠를 띠고서 밥을 먹을 정도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출애굽기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을 생각하고 살지 아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압박이 시작되겠지요? 제발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3:1-4절을 봉독합니다. 예수님이 엑서더스 하셔서 가 계신 곳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예수님이 별세하셨습니다. 출애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당연히 별세를 꿈꾸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1:15-2:10  모세  2001. 1. 14.

 


하나님의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 자꾸 늘어나자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왕이 지혜롭게 행동을 합니다(10절). 중노동을 시키면 인구가 줄어들까 하여 중노동을 시켜도 오히려 인구가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지혜로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이 멈추지 아니합니다. 또 지혜를 짜내어서 히브리인의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받을 때 여자 아이면 살리고 사내아이는 죽여 버리라고 합니다.

 

 

 

여자 아이는 애굽인들이 자기들의 몸종으로 삼거나 첩으로 삼아버리면 동화되어 버리기에 별 위협을 느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내아이만 죽여 버리라고 산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사형입니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왕으로 되어 있는 왕의 절대명령입니다. 바로 왕이란 곧 신격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의 비밀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땅의 티끌만큼이나 천하디 천한 히브리종의 산파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파가 어떤 자들입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내어 놓은 거절입니다. 바로 왕의 지혜를 천하디 천한 히브리인의 산파의 지혜가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한 행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세상의 왕이 나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거절할 수 있는가? 어떤 문제에 있어서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나에게 이익과 직결이 되어 있을 때 아니요, 함으로 오는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아니요,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두려우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산파라는 그 약한 여인이 거대한 제국의 왕의 명령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소환을 합니다. 왜 아이들을 살려 두느냐는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아이 낳는다는 말을 듣고 가보면 벌써 낳아 있었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여인들이 다 아이를 잘 낳아서 그랬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라헬 같은 경우에는 베냐민을 낳고 죽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들은 모두가 무서워 벌벌 떠는 그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런 말하는 저도 사실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더 두려워할 때가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만 하는 설교가 아니라 동일하게 지금 저에게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과연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목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 부자나 권세자나 세상에서 힘 있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를 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설교집에 보니까 히브리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이를 죽이지 못하였는데 오늘날 산부인과 의사들이 과연 어린이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교회에 산부인과 의사가 있고 그 사람의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정도라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저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도 살고 저도 사는 길이지, 이런 말은 누구 때문에 하지 못하고, 이런 말은 누구 때문에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실화를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에 있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의 어느 집사가 교회당 안에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없애려고 시찰회에 말을 하였더니 그 교회사정이 그 사람에 의하여 경제권이 주도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아들이 서울에서 무슨 회사를 경영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덕비를 예배당 앞에 세워두어도 누군가 말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서는 기도원에 가서 한 주간 기도하고 와서는 청년들 불러서 그것을 뽑아다가 그 사람의 집에 갔다 주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전화가 와서는 전도사님의 사례는 이제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서 그 일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교회의 사택의 장판 밑에 전에 있던 전도사가 무엇을 써놓았는데 그 집사를 욕하는 내용이지요. 월급 준다고 이런 저런 주장을 하였겠지요. 이런 것에서 자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0:24-33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자들을 당연히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몸을 죽일 뿐입니다. 정작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질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 세상이나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비록 그 신분과 지혜가 미천하여 보이지만 가장 지혜롭다는 바로 왕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산파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3개월이지만 모세를 3개월이나 숨겨서 키운 모세의 부모도 애굽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3개월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울음소리가 커지자 더 이상 숨겨 키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서 그곳에 아이를 담아서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 하였으며”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워하지 아니함도 결국은 3개월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들키면 아이는 물론 부모까지 죽임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역청을 바르고 강물에 띄우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부모의 손을 떠난 것입니다. 그 갈대상자를 따라서 미리암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간에 바로 왕의 공주가 그곳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공주가 성경 외의 이집트 역사 기록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왕 바로가 투트모세 1세인데 이 왕의 무남독녀인 하세푸트로 봅니다. 그리고 이 공주가 결혼한 남편이 투트모세 2세와 양자인 투트모세 3세 때 섭정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공주가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어려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그 뚜껑을 열어보니 아기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버린 것인 줄을 알지요? 그러나 갈대 상자에 넣어서 버리는 예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엄하였기에 태어나자말자 강에 갔다 버리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정이 들기 전에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갈대상자에 아이가 담겨 있는 것이 많이 그렇게 하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중간에 울었더라도 건져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대 상자를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 것입니다. 이때 공주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자기의 아들을 잃어버린 그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어린 아이가 우니까 모성애가 더 발동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이밍을 하나님이 맞추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왕은 자신이 지혜롭게 행하고자 하여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를 살해하라고 명령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가장 미천하고 약한 자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모세의 누이 미리암, 그리고 바로 왕의 공주, 그리고 물에 버려진 한 아이입니다. 이러한 약함이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을 까요? 그러나 이러한 약함이 오히려 가장 강력한 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첫째 여인, 모세의 어머니는 이미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며, 둘째 여인, 미리암이 그 갈대상자를 따라가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봉독” 멀리서서 지켜보더니, 이것은 그냥 서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을 예견하고 확고히 거기에 자신을 붙박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토화된 예루살렘의 멸망의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애가서 기자의 심정과도 같은 것으로 봅니다.(애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셋째 여인, 바로의 딸입니다. 이 공주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고린도전서 1:25절의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주의 모세를 향한 불쌍히 여김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러한 긍휼은 단지 연민의 정 정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공주의 시녀들이 왕의 명령에 저촉이 된다고 그 상자를 공주에게로 가져오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이를 건져내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여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바사 왕 고레스를 하나님이 메시아로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온 세계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태어난 어린아이가 물에서 건짐을 받는 형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되는 구원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홍해바다에서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국가입니다. 어떻게 바다 속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이것을 모세가 먼저 자신이 물속에서 건짐을 받고서 그것을 이스라엘 국가에 확대 반복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됩니다. 아이를 죽이려는 바로 왕, 아이를 죽이려는 헤롯 왕.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적절하게 그 죽음의 세계에서 오히려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위협 속에서 오히려 약함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지혜가 힘이 약한 자들에 의하여 무너지듯이 헤롯 왕의 지혜(나에게 왕을 알려 주시면 나도 경배하겠노라)와 힘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약한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아기 예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런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물에서 건짐 받는 모세처럼 죽음의 그늘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즉 긍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역시 주님의 구원은 약하여지신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힘으로 볼 때는 정말로 볼품없는 약하고 미련한 모습으로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를 물에서 구원하시고 그 모습을 이스라엘 국가 전체로 확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알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수와 말과 병거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어내고자 하다가 망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어린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을 때 어떻게 건짐 받는가를 봄으로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3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구원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에게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만이 볼 수 있도록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애굽의 그 강대하고 지혜로운 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련함의 반복이 성도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듯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약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오늘 성도들에게도 예수님의 그 십자가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반복시키심으로 우리를 함께 십자가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행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세상이 볼 때에 제일 앞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 분이 계시고 그 뒤로 무수히 많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런 행렬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죽음의 행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에게는 그것이 생명의 길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아무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1-22  모세의 열심  2001. 1. 21.

 

 


모세가 물에서 바로 왕 공주의 손에서 건짐을 받고서도 젖을 떼기까지 자란 곳은 자기 친모에게서 자란 것입니다. 10절에서 보시면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란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어린이 교육이란 철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는 히브리인이다, 라는 정체성을 젖을 먹이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울 때부터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서 애굽에서 왕자들과 함께 자라게 됩니다. 모든 애굽의 학문과 문화를 배우면서 자랐지만 그가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때가 되면 그들의 동족을 해방시키려는 민족애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오늘 11절 말씀에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서 좌우로 살펴보아 아무도 없음을 보고서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입니다. 모세의 의분이 독립운동가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다음날 다시 나가보니 자기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서 말리니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는가?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를 죽이려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좌절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려고 모험을 걸었습니다. 모른 체 하고서 바로 왕 공주의 아들로 살았다면 비록 양자로 입양되었기에 잘만하면 바로 왕이 될 수도 있고 왕이 비록 되지는 못하였더라도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열심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의 감독관을 죽여 버렸는데 오히려 자기 민족에게서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인생을 미리 한번 점검을 해보고자 합니다.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젖먹이로 자란 어릴 때의 교육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이 철저한 것을 세계가 알고서는 ‘유대인의 자녀교육법’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특별하고 철저합니다. 그러한 히브리인의 교육을 어릴 때 받고서 자랍니다. 두 번째로 바로의 왕궁입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서 배워야 할 모든 학문을 배웁니다. 이것이 젖 먹으면서 배운 것 보다 시간이나 교육의 질에 있어서 월등하겠지만 그러나 바로의 왕궁의 교육이 어릴 때의 민족의 정체성을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어릴 때, 처음 배울 때 어떻게 배우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어려서 교육받고 바로의 왕궁에서 장성하여 이제 자기 민족을 생각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자기 백성들이 따라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모세를 하나님이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의 시기가 시작이 됩니다. 어릴 때의 어머니의 교육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 최고라는 애굽의 지식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광야에서 홀로 자기 비움의 훈련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한참 때의 그 열정과 열심이 다 식어버리도록, 그 찬란했던 꿈들이 꺾여져버리도록 하나님은 침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어려운 훈련입니다.

 

 

 

자신이 열심을 낼 때 하나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되실 텐데,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80세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자신이 자꾸만 거절하는 것은 자기의 연약과 부족함을 인식하고서 그렇게 한 것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애굽에서 모든 학문을 다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말과 행사에 다 능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22절.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더라”라고 스데반 집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는 말을 잘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가 40세 때에, 한참 때에 일하려고 할 때는 가만히 계시더니 왜 이제야 오셔서 가라고 하십니까? 지금보다 그때에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 다 늙어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는 반항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거절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모세의 이 네 번째 시기는 하나님에 의하여 살려지는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애굽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의 생활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서 어느 우물가에 이르렀는데 남자 양치기들이 여자만 양을 치는 자들에게 횡포를 하는 것입니다. 양떼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먼저 다 먹이고 나서 나중에 먹이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을 모세가 보고서 그 여자 양치기들을 도와서 양떼에게 물을 먹여 줍니다.

 

 

 

애굽에서는 불의를 보고서 쳐 죽였는데 여기서는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 여인들이 집에 돌아가니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는가 그러자,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있다고 하여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그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았겠습니까? 바로의 궁을 거절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기 민족을 위한 열심을 내었을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심을 보고서 우리는 이러한 속담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속담이나 고사성어들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성경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도 이런 말들이 하늘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성경적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인간의 최선과 가능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이러한 속담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입니다. 속담으로 성립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공감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됩니까? 진인사를 했습니다. 지성을 했습니다. 스스로를 도와서 애굽의 감독을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침묵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은 사람이 그래도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을 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도 못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모독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느 사람과 의논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홀로 하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나귀를 통하여서도 하시고 돌멩이를 통하여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의 속담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속담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지성도 우리의 진인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심이 드러나시도록 인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도 하나님의 영광에 한몫 끼여 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어디에 드립니까? 보좌에 드리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사람이 어떠한 충성과 헌신을 하였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유지되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한몫 끼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 이러한 훈련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훈련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느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교회를 위한다고,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하는데 사람들이 삐쭉거리는 것입니다. 그래 니 잘났다, 그러는 것이지요? 그럴 때 힘 빠지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해봐라, 나는 손놓고 있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마치 모세가 열심을 내는데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언제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나, 왜 그러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라도 알아주시고 모세야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상심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이라고 해주시면 되실 텐데,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열심에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대응하시는데 그것은 침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는 참으로 열심을 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밖에 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엄청난 사업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빚만 지고서 망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개척 교회들이 그렇게 시작하였다가 문 닫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아예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께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능력만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입에 발린 말처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러나 막상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누가 공로패를 받습니까?

 

 

 

건축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볼만한 커다란 일들을 하고 나면 누가 공로패를 받습니까? 결국 자기들이 영광을 다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그러한 일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지혜를 짜내어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1%의 가능성만 있고 99%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그 1%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우리가 할 수 있다, 하는 믿음으로 나가면 됩니다, 하는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 정말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일들을 만들어 내기는 합디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열두 정탐꾼 중에서 두 명만 갈수 있다고 하고 나머지는 다 못 들어 간다고 하여, 정말 못 들어 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여 이 일을 이루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럽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속담을 현실화시킨 것이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의 일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1절.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십니다. 44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의 영광을 멀리하고,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어떤 일하심입니까? 사람의 열심과 가능성을 포기시키는 일하심입니다. 지난번 ‘밀알장애인협회’에서 왔을 때에 뇌성마비 형제의 시 중에서 한 구절을 다시 소개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걷지 못하는 자유로 주님을 찬송케 하소서. 우릴 쓰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장애로 임하였으니, 우리가 그 손에 들려진 도구임을 기뻐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듣지 못하는 자유로 주님을 찬송케 하소서. 우릴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침묵으로 임하였으니, 침묵 중에 임하는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열심이 장애로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꺾으시기 위하여 40년을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묵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그 답답함을 아시겠습니까? 날마다 보느니 하늘과 구름, 풀과 바위들만 늘려있는 황량한 광야, 이제 늙은 양치기기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무려 40년 세월을 지내면서 한숨과 원망과 울분들이 깎이고 다듬어지고 포기되어지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합니다.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모세는 끝이 났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하여 이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의 소리가 하늘에 상달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의 고역을 돌아보고 구원할 마음이 있어서 자기가 열심히 폭력을 행사하였을 때 살인자로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도와서 자기 언약의 백성을 탈출시키지 아니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40년.

 

 

 

그런데 23-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침묵의 세월 속에 애굽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탄식소리가 하늘에 상달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고 구원하고자 하여 폭력을 사용하였을 때는 광야에 쫓겨 갔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심, 하나님께서 기억하심, 하나님께서 권념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굽어보시고 아신 것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 단어로는 “하나님께서 들으심. 기억하심, 굽어보심, 아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아신다는 말씀이 끝에 있습니다. 이러한 아신다는 단어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아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고난에 참여하시는 아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아심이 바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열심으로 인한 백성의 돌봄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돌보시고, 아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돌아보시니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고통을 받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러한 주님의 고통의 부르짖음 속에서 나타나는 그 구원의 신비를 알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계시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 침묵 속에서도 이방인 백부장은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구원받는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12  신을 벗어라  2001. 1. 28.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은 세상의 것들을 빼내어 버리는 하나님의 훈련학교였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결코 세상의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철저한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모세를 그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화려한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또한 인간의 모든 영광과 자만을 진토에 버리기 위하여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교육과 하나님의 교육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육이 목적하는 바는 육에 속한 사람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교육은 그 육을 시들게 하고 제거시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러므로 모세같이 세상의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배설물로 여겨지기까지의 과정이 광야인 것입니다. 이러한 학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종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면 모세와 같은 교육의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붙들려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왔다면 꼭 통과하여야 하는 과정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과의 단절이 일어나는 광야입니다. 이러한 세상과의 단절의 세월이 모세에게 40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어떻게 부르시는 것입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고서 모세가 이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떨기나무란 키가 작은 관목류의 가시덤불입니다. 그저 불이 붙으면 한번 후루룩 타버리고마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 불이 붙어있는데 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히 여겨서 가까이 가보니 그 불꽃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봉독”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을 벗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신명기 4:24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불로 나타나시는 것이기에 감히 인간이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리로 가까이 나아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에 거룩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15절에서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네 선 곳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발 벗음이란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노예는 통상적으로 신을 벗고 다녔기 때문으로 봅니다. 이러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이 종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자기 이력과 경험과 과거의 자랑들이 벗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식의 하나님의 일한다는 방식이 벗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순종할 뿐입니다, 하는 자세가 신을 벗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새 사람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아직도 옛날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세상에서 복이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을 아직도 복이니 성공이니 하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신발이 벗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의 이력들이 헌신짝 벗어버리듯이 벗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기에 우리는 고난의 풀무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0년의 고독한 광야도 필요한 것이고 우리가 낮아져서 주님의 종이 되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건만 불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의 모습이 떨기나무 같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사라져버리는 그러한 보잘것없는 가시덤불 같은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부정한 것들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이상한 광경을 보고서 그리로 갔지만 그러나 그 불붙는 가시덤불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어떠한 기적과 이적들을 통하여 이적과 기적 그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5:25절에서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하고 있습니다.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만난 것이고 또 시내산에서 불과 연기 가운데서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8-22절을 봅니다. “봉독”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로 상징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두려워서 자기들이 직접 듣지 못하고 중보자를 통하여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는 말씀이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임을 시내산에 강림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죽이 않았는가 물으실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시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표적과 기적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이 아주 많이 따라다녔습니다. 병고침을 받으니까, 먹고 배부르게 되니까, 그리고 기적을 볼까 하여 따라다닌 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물러가더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말씀하시자 그 많은 무리가 떠나가고 다시는 따라다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에게 남을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어질 천지에 관한 것들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없어지지 아니하고 성취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의 지극히 당연한 자세입니다.

 

 

 

이번 주부터 ‘성경정독집’으로 하루 한 장씩 성경을 읽으시고 답을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주간 성경달력이 나옵니다. 벽에 걸어 두시고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신을 벗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을 벗는 것뿐입니다. 나의 주인됨을 말씀 앞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성경을 좀 안다는 것도 내려놓읍시다. 나의 지금 절실한 문제나 필요들도 벗어 둡시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이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라하고 볼품없는 떨기나무에 현현하신 것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도 있을 텐데 왜 그런 곳에 임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그곳이 말구유이든 세리의 집이든 창기의 집이든 그곳이 거룩한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6절입니다. 신을 벗게 하시고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언약의 하나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자신이 이미 말씀으로 언약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두려워서 얼굴을 가릴 뿐입니다.

 

 

 

7절입니다.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의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답답하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단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이러한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낮아지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면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광야 떨기나무에까지 낮아지심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400여년 전에 언약하신 그 언약을 친히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고,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지도자로 나서는 것은 결코 그들의 의로움이나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에서의 구원과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부르심을 생각할 때 그래도 나는 뭔가 있었기에 부름을 받았을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안하신다고 하여도 또 이런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내가 무슨 큰일을 이루어내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부르셨을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아직도 옛날의 신발이 벗겨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내가 나의 생각과 방법을 가지고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을 벗고서 비우면,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든지 시키시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신을 벗은 자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나는 이래서 안 됩니다, 저래서 안 됩니다, 시키시려면 이러한 역할을 주십시오, 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교회에서는 사람의 기존의 실력과 기존의 주특기들이 발휘되는 곳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일을 맡을지라도 감사와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직도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9-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러면 예 알겠습니다, 즉시 수행하겠습니다, 라고 해야할 텐데, 11절에서 모세가 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누구관대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이 항의 속에는 두 가지가 들어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신이 이제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이기에 그러한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일 수가 있고 또 하나는 아니 지금 와서야 왜 그러십니까? 제가 40년 전에 힘 있고 실력 있을 그때에 나를 도와주시지 않고 이제야 가라고 하십니까? 라는 두 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박영선 목사님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그 40년 전에, 그때 왜 쓰시지 않으시고 이제 부르시는가 하는 항의가 들어있다고 봅니다. 둘 다 보아도 무관합니다. 깨어질 대로 깨어져서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자세일수도 있고 아직도 덜 깨어져서 옛날 그때 나를 부르시지 않고 왜 이제 부르셔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까? 하는 항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간에 성취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2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모세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실력과 능력이 아니라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앞으로의 일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증거란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증거가 성립하는 것이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어떻게 증거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이시기에 미리 증거를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미 증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거의 말씀처럼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세도 원망을 하고 백성들도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의 원망을 찾아봅니다.

 

 

 

출애굽기 5:20-23절입니다. “봉독”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더하여진 것을 인하여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원망을 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그러한 생각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단지 자신들의 고통만 면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물과 양식이 없어지자 원망하고 불평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러한 백성들을 두고서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라고 항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백성과 모세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이제 앞으로 되어질 일도 미리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주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라고 이미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까지의 나의 편견과 고집과 세상의 속한 모든 과거의 경험과 이력과 경력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벗어 버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13-22  하나님의 이름  2001. 2. 4.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모세는 바로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이 누구관대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면서 이 산에서 나를 섬기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증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러면 제가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을 할 때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면 그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미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이름을 묻고 있습니다. 높으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모세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애굽에서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들의 이름들이 있는데 우리 조상의 신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시는데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것이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수많은 신들은 스스로 있는 신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와 이익을 따라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래서 강의 신이 있고 개구리의 신이 있고 파리의 신이 있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계신다는 이 이름의 뜻을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 하나님을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 안에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의 직업, 그 사람의 모든 정보와 인격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단지 고유명사화 된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다 담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나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이름의 설명도 사실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씀을 좀더 원어로 가깝게 번역을 하면 “나는 ... 이다”입니다. 이것은 고유명사화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나는 ...이다’ 라는 히브리어가 ‘여호와’ 또는 ‘야훼’로 읽는데 유대인들은 이 네 글자를 거룩한 문자라 하여 발음을 하지 않고 ‘주’라는 말로 바꾸어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에 대하여 많은 해석들을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어떠한 인간에 의하여 이름지워질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킨토시’라는 분은 자신의 강해서에서 이런 강해를 하였습니다.

 

 

 

나는 ....이다”라는 분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제 신약에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에 저도 동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말씀 중에 ‘나는 ...이다’ 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특히 그러한 내용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부활이다. 생명의 떡이다. 선한 목자다. 참 포도나무다. 이러한 ‘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바로 ‘나는 ...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이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무엇이다, 라고 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가장 적절한 이름에 대한 뜻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셔서 구원하여 내시는 것이 자신의 이름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것이라고 불러 주시면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데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 의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서 주어지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이 더욱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매킨토시는 이러한 ‘나는 ...이다’라는 내용을 가지고 이 괄호 속에 우리가 무엇이나 채워 넣으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이나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주어진다고 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나 되어진다, 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15절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나의 소원을 괄호 속에 채워 넣으면 해결하여 주시는 그러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그러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선택이 되고나니 자기들의 뜻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언약이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 낮추심으로 인생에게 언약을 맺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하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을 지시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 400년 전의 그 언약을 때가 차매, 이루기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루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서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다시 15-16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신 그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한에서만 우리가 스스로 계시는 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결국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이름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6:2-9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고 여호와의 이름으로는 알리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호와로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뜻이란 결국 애굽에서의 구속을 위한 이름이 됩니다. ‘나는 ...이다’의 이름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전쟁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애굽의 신들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을 위하여 전쟁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것이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 그러한 전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6:5-9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구원하시는데 애굽의 폭력적인 압제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폭력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사용한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친히 싸우시는 그 전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란 이름 앞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수식어가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입니다. ‘만군’이란 말 그대로 군대의 이름입니다. 전쟁하시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것이 여호와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에서 한번 보고자 합니다. 1-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구원하시기 위하여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내어 주면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신 것은 누구의 영광입니까? 모세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3:17-18절을 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면 그들이 들으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바로 왕에게 가서 말하면 잘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신 손으로 치신 후에 그들이 내어놓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19-20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손을 들어 여러 가지 재앙으로 치신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친히 전쟁을 하심으로 그들이 나오게 될 것인데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21-22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시면 전리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전리품을 챙겨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애굽에서 강제노역한 대가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보다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전쟁을 하신 결과 그들이 졌기에 내어 놓은 전리품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대로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졌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구약에서 고정된 이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지게 하시는 ‘나는 나의 언약을 이루어내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여호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이 결국은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집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에 대하여 이사야 9장을 봅니다.

 

 

 

9:1-7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전에 흑암 중에 고통 하던 자들이 추수날의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흑암에 눌려있던 자들이 스스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억압당하던 그들이 여호와의 전쟁으로 이기고 탈취물을 나누어 나오듯이 주님의 약속하신 그 구원의 날이 이르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시는데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한 아기가 나옵니다. 이는 한 아들이 되시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매었다고 합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윗의 위에 앉으시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왕위를 이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은 군대의 용어입니다. 여호와란 ‘나는 ... 이다’입니다. 그러니 이분의 이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기묘자, 모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으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로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전쟁에서 승리하셨는데 그 전쟁의 승리가 바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를 감히 부르지 못하고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한 ‘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하나님 아버지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아직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8-10절입니다. “봉독”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다 하심이라. 이것은 올라가셨다는 것은 바로 내려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전쟁을 하시고 위로 올라가시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이란 바로 여호와께서 싸우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시듯이 오늘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 즉 주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전쟁에 참여된 것이 오늘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신고 영생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주의 이름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며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에 관한 전쟁입니다. 지금 자기의 이름을 부인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지만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이름을 주장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부정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주의 이름이 아니라 나의 이름에 관심이 있다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1-17 모세의 고집, 하나님의 설득  2001. 2. 11.

 


모세가 40세 때 그의 동족을 사랑하는 열심이 오히려 살인을 하고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40년을 광야에서, 그 과거의 자아들이 다 무너뜨려진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가라고 하시는데도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못합니다, 저래서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불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았다면 물불 안 가리고 나섰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모세가 정말 못하겠다고 거절을 하든지 아니면 전에 왜 도우시지 않으시고 이제야 가라고 하십니까? 하는 원망이든지 간에 모세는 지금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데도 고집을 부르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설득하고 계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모세에게 말씀하심. 3:10절. ‘너로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의 거절. 3:11절. ‘내가 누구관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설득. 3:12절.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렇게 설득하시는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거부로 볼 수 있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갈 것이지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한 인간인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창조주가 시키면 피조물이 당연히 순종해야지요. 육신의 부모가 시켜도 하는데 감히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하다니 이런 무엄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철퇴로 쳐버리고 다른 사람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설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의 크심과 긍휼이 어떠함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계속되는 모세의 고집과 하나님의 설득을 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모세에게 말씀하심. 3:15-22절까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출애굽할 것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 어떻게 나오게 될지도 미리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의 거부. 4:1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너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설득. 4:2-9절입니다. 두 가지의 이적을 행하십니다. 모세의 지팡이와 모세의 손의 이적입니다. 처음 표적은 믿지 않아도 두 번째는 믿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안 믿으면 하수를 취하여 육지에 부으면 하수가 피가 되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까? 불 가운데 나타나시고,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가 다시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고 멀쩡하던 손이 가슴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문둥병이 되고 다시 넣었다가 빼어보니 처음 그대로의 손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믿지 못하면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기적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선 기적의 의미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집트에서 뱀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장식물들에 보면 뱀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섬기는 신 중의 하나가 뱀이 됩니다. 이러한 뱀을 정복하고 잡아버리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고 좀 더 비유적인 면을 보자면 애굽의 세력에서 이기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문둥병이 되었다가 나아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둥병이란 하나님의 저주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가슴에 손을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둥병이 다시 손이 들어갔다 나옴으로 나음을 입는 것을 통하여 어떤 주석가는 처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고서도 이들이 믿지 못한다면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이시고서 모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세 번째 모세의 거절. 4:10절. 본래 말에 능치 못하다고 합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22절에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다 능하더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말을 잘못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혹시 이렇게 보는 분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를 잘 할줄 모른다고 봅니다. 그렇게는 볼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지도자의 수업을 받는다면 지금 히브리인들의 언어도 분명히 배웠을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하나님과 소통은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에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봅니다. 일말의 긍정이 됩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모세의 거절하는 고집으로 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책망조의 설득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설득. 4:11-12절. 누가 입을 지었는가, 벙어리, 귀머거리, 눈 밝은 자, 소경을 누가 지었는가? 여호와께서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그래서 ‘나는 무엇이다’이신 분,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 말씀하시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는 모세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예, 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의 핑계란 끝이 없습니다. 결코 스스로 항복하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모세의 거절. 13절.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의 고집이 이 정도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드디어 화를 내십니다. 화를 내시면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득. 14-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를 발하시면서 네 형 아론을 붙혀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너를 만나러 올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모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 더 거절하다가는 한 대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한두 번 말해서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키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주 반복하여도 또 하지 말라는 짓은 기어코 하고, 하라는 짓은 얼마나 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늘 생각할 것은 나도 저렇게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저 아이보다 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아시기 바랍니다. 교사를 하면서도, 전도회 회장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왜 이리 말을 안 듣나, 하지 마시고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고 또 그 사람에게서 긍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지도자가 되면, 잘라내다가 볼일 다 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부터 강제로 만드셔서 거절하지 못하게 단 한번에 혼을 내어서 보내시면 일하시기도 편하실 텐데, 왜 이렇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모세가 감당해야 할 백성들을 설득하는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면서 얼마나 자주 모세를 원망합니까? 그럴 때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서의 모세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모세를 이렇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설득당한 그 방법으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할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듭 반역하고 거절할 때, 특히 금송아지 사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무리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32:7-14절. “봉독” 이러한 하나님을 향하여 중보를 하는 그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께 그렇게 설득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을 알기에 이제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중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하면서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의 역할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의 역할들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책망을 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자신을 그 백성들과 동질화시켜서 주님의 그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지자들의 전형이 모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누구의 설득이신지 이해가 되십니까? 모세를 설득하신 그 하나님의 낮아지심,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행한바 그대로 갚으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설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보다 훨씬 자주 많이 말씀으로 설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말씀을 보고 계십니까? 그러한데도 우리가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릴수록 손해입니다. 누구의 고집이 셉니까? 하나님의 고집이 영원한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집을 누가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 가면 갈수록 두려운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마음 든든합니까? 얼마나 확신이 옵니까? 이러한 주님이시기에 한번 붙드시면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지를 아시고 이제 주님 앞에 항복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2:1-13절을 봅시다. “봉독” 이러한 하나님의 설득 앞에 이제는 감사하며, 순종하며 곧게 나아가셔서 주님의 그 크신 은혜 속에 잠기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로 낙심치 않도록 우리 같은 죄인을 그렇게 오래 참아주신 주님을 깊이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4:18-31  장자 만들기  2001. 2. 18.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나 신을 믿는다는 자는 어떻습니까? 이들도 역시 자기 자신이 주인으로 있고 신이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섬기게 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생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독립하고자함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고 중심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앙이란 나를 섬기던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로 바뀌는 것이며, 내가 주인인 자가 주님이 주인인 자로 바뀌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삶이 얼마나 생소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일에 도움을 주는 그러한 자로서 믿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내시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거절하다가 하나님의 설득에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시기까지 하시면서 모세를 보냅니다. 그런데 말을 못한다고 하니 아론을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아론이란 모세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도 되지만 모세가 아론과 함께 사역을 할 때마다 무엇을 보게 됩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지 않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라가 이삭을 주신다는 말씀에 웃었지요.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태어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삭아, 하고 부를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음을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계속 아론과 함께 다니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하지 못한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론까지 붙여주신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자기 장인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납니다. 아내와 자식과 함께 길을 떠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갑니다. 지금까지 단순히 양을 치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누구의 손에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치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거대한 애굽을 심판하는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가는데 ,그 가는 일의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입니다만 그렇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왜 출애굽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22절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이것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는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장자로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장자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장자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애굽에 가서 바로 왕에게 자기 백성을 내어 보내라고 하는 이유가 분명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를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명령을 받고서 가다가 길의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왜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24-25절입니다. “봉독” 할례 때문입니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집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나의 피남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신 것은 할례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이 아브라함 때부터 나온 하나님의 백성됨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왠 일인지 모세의 아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하라고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할례를 행하라고 하였는데도 십보라가 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하셨고 할례를 행하자 하나님께서 놓아주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 삼으시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99세 때입니다. 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후손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만들어진 백성을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력이 아님이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할례를 행하고서, 낳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포경수술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할례를 행함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혈통이 아님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13절에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장자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만들어내신다는 것이 할례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심부름을 하는 모세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하시자 십보라가 할례를 기억하고서 얼른 자기의 아들에게 차돌로 할례를 행하여 그 피가 묻은 양피를 자기의 남편에게 던지면서 뭐라고 합니까? 실로 당신은 피남편이라고 합니다. 피가 있어야 되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 본문에 모세라고 명백히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지 간에 지금 하나님께서 죽이시려다가 물러가신 것은 할례를 인하여 물러가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은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를 만드시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만드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도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40년 전에 행한 그러한 인위적인 모세의 열심히 인한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무엇을 바르고서 나옵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혈통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낼 수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피를 통하여,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장자 만들기에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 이스라엘을 불러내시지만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시작할 때 보았던 말씀을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호세아 11:1-7절입니다. “봉독”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바알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으셔서 인도하시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을 고치는 줄을 알지도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줄로 이끌고 목에 멍에를 벗기고 그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데도 돌아오기를 싫어하여 앗수르 사람이 그들의 임금이 되어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내신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보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4-15절입니다. “봉독” 아기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헤롯이 죽고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마태는 무엇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까? 호세아 11:1절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아들로, 장자로 불러내셨건만 그들이 아들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의 역할을 완전하게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십니까? 역시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을 받은 자에게 주의 영이 임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진 것은 피없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실 때에 피를 흘린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들들의 맏아들, 즉 장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맏아들을 양자들이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17절.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됨. 로마서 8:28-29절. “봉독”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1-15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즉 죽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까? 죽음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짜 아들을 욕보이고 죽인 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자는 세상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시는데 아이들이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만드신 아들이라면 세상의 환난이나 곤고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에서도 피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짐승의 피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4:22-2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자기 아들 만드시는 길에 방해가 되면 무엇이나 제거하여 버리십니다. 그렇게 하셔서라도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내셔서 자기의 아들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이제 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이것은 섬김으로 복을 받아 낸다거나 섬겨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기에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면서 사는 것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나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님을 알아 갈수록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감사요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임을 알아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라는 것이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5:1-23  여호와가 누구관대  2001. 2. 25.

 


5장을 보기 전에 먼저 4장 후반부를 잠시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모세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론이 모세를 영접하고 입을 맞춥니다. 그런데 누가 형입니까? 아론입니다. 형이 동생에게 입맞추는 것은 형이 동생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모세를 주님처럼 섬기게 됩니다. 물론 아론이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갔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지만 자신이 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주로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모습은 바로 에서와 야곱입니다. 에서가 형인데 야곱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이 만날 때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기 살고자 한 것이라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에서가 야곱에게 절하여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고서 그 앞에 입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진노하심이 급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이 어떻습니까? 모두가 자기가 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섬겨주기를 원하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습이 바로 왕에게도 나타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나타나고 모세에게도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만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표적을 보이니 백성의 장로들이 믿고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돌아보심을 인하여 머리 숙여 경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모세를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40년이 더 걸린 것입니다. 40년 전에 모세가 백성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때에 백성들이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40년이 더 지나서 모세도 깨어져야 하고 백성들도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고통이 가중되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직도 자기들이 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무언가 자기 가능성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까지 다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자신이 가난하고 어렵다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고서 찾는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신됨을 더 보충시켜주는 ‘알라딘의 램프’같은 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그 집에 평안을 전하고 그 집이 받아들이면 그 집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의 신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세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단지 자기들의 고통을 들어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자신들의 고통이 가중되면 당장 모세를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고통을 들어주는 신으로서의 경배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 점검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나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과 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예배란 하나님과의 거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쉬울 것이 없는 것 같으면 예배란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죄의 고통이 심각한지를 알게 된다면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러한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예배드림이 내 기쁨이 됩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바로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내어놓으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1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결국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하나님 섬김이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를 보내어 자기들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씀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어느 정도의 저항을 받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항이 바로에게서 나타나고, 바로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보아야 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보아야 예배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이제 2절을 봅니다.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고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내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의 생각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왜 나의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저 노예들을 마음대로 내어놓으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감히 나를 뭘로 보고서 내어놓아라, 말라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미 바로란 지상에서 신으로 통하는 자 아닙니까?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바로에게 명령한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명령도 자기 나라의 큰 노동력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여호와라는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기업이 수출이 아주 잘되어서 쉬는 날도 없이 풀가동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 가서 그 회사의 회장보고 여기 일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 일 못하니 다 쉬도록 하시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관대, 이 일을 그만둔다는 말이냐? 그러지 않겠습니까? 예배하면 하나님이 수입을 주는가,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까? 일요일 일 안하고 예배드리면 수입이 일요일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거나 또는 이러한 말로서 인도를 하는 것도 모두다 바로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관심사가 하나님께 희생의 제자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사 드리면 무엇을 주는데요, 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죄로 인하여 모두가 바로가 되어 있으니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키워주면 좋은 신이고 나의 이익을 손해나게 하면 나의 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광야에 가서 희생을 드리려 하나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  하나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희생이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체화됩니다만 이러한 희생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제사를 잘 지내고 예배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것, 즉 주님을 섬기게 된 것이 복인 것이지,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지, 예배를 잘 드림으로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하는 복을 더 받고자 하는 것이 이방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란 이미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그 놀라운 복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 주심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고 고린도전서 2: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섬김이 없는 자에게 무엇이 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자의 예배란 언제나 이 예배를 통하여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른 예배를 말씀드리면 이러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감히 나더러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쉽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돌려보냅니다. 너희 하는 일이나 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서 바로가 어떤 명령을 내립니까? 7-9절을 보시면 벽돌을 굽는데 짚을 주지 말고 수효는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게을러서 예배니 무엇이니 하니까 더 고생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바로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고생을 더 하게 만듦으로 모세를 원망하게 하는 작전입니다.

 

 

 

9절의 내용입니다. 그래 너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고? 모세의 그러한 말을 듣지 않도록 더 고생을 시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의 작전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중간 감독자들이 있었겠지요. 그들이 벽돌의 수효를 채우지 못합니다. 아무리 곡초 그루터기를 모아서 짚을 대신한다고 하여도 짚을 제공해주지 않고서 어떻게 짚을 주는 것만큼 만들어 내겠습니까?

 

 

 

그래서 바로에게 항의를 하니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게으르다, 그러니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느냐, 이제 먹고 살만하니 딴 소리냐, 그러니 고생 더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백성들을 이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돌아오는데 마침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봅니다. 그러자 이들이 뭐어라고 합니까?

 

 

 

21절입니다. “봉독” 너희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의 눈앞에 미운 물건이 되게 되었으니 이제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살만하였는데, 비록 고생이 되더라도 지금보다 고생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짚을 안주고 벽돌을 만들라고 하니 더 고생이 되게 하는 이러한 지도자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가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벌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란 무엇입니까? 단지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든 누구든지 간에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을 주는 신은 나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을 들을 때는 경배하다가 지금 고통이 오니 모세를 벌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라든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광야에서도 뭐라고 합니까? 물이 없고 양식이 없으면, 그리고 길이 힘들고 피곤하면 아니 왜 우리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는 이 고생을 하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옛날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애굽의 고기가마 옆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파와 마늘과 부추를 먹을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더 학대를 당하게 하시나이까? 그리고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나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결국 출애굽시키시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기리라”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이루어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와 같은 온 세상의 세력이 방해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세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반드시 닥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오히려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이제 먹고 살만 하단 말이지, 그러면 당장 직장 그만둬, 라는 말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두려워는 마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나올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내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바로의 손에서, 애굽에서 나와 놓고도 애굽을 그리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곁이라도 좋사오니, 그저 내 한 몸, 우리 식구 거저 건강하고 복받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다스린들 어떠합니까? 바로가 지도자가 되던 모세가 지도자가 되던 거저 이 땅에서 평안하고 형통한 것이 좋습니다,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는 주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이기에 우리를 출애굽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는 것을 버리시고 광야에서 주님의 만나로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이 사실이 기적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절기, 그 희생의 제물이 되신 어린양 안에 있음이 바로 궁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비교할 수 없는 복임을 놓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6:1-13  네가 보리라  2001. 3. 4.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보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에서 생각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본다는 것은 자신의 정성을 드리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구경꾼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기본적인 신에게 드리는 정성이 부족하여 보이니 아마 본다는 것보다는 드린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람의 정성을 바친 드림에 너무 강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 너무나 소홀해졌다고 봅니다. 시간상으로 설교가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지만 설교시간마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성을 바침에 강조를 해버리니 예배는 그야말로 드림만 있고 받거나 보는 것이 없어져버린 느낌입니다.

 

 

 

사도행전 17:24-25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으시고 또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기는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시간에 드림보다 받는 것이 많아야 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드림은 전혀 소용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약의 헌금 정신은 억지나 인색함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은 복음 전하는 자와 성도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쓰였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사랑과 교제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0-20절을 봅니다. “봉독” 신약의 헌금 정신과 자세입니다. 바울의 복음전하는 일에 기쁨으로 참예함, 교제함이 바울이 무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것에 참예한 것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복음의 교제, 헌금으로 참예함보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는 결론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루어내셔야만 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올 보아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질이고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시는지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만 말씀하시면 척 알아서 순종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니 너희는 보게 되리라, 그런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는 인간이 죄짓는 일에는 너무나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고 또 그 죄짓는 자리에서 절대로 떨어져 나오려고 하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끄집어내시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출애굽기에서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인간의 죄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알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장서서 무언가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보아라, 내가 한 이 일을 보아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를 설득하고 기적을 보이시고 분을 내시면서 가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처음에는 좋아합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였겠지요. 그런데 모세가 바로를 만나고 나니 오히려 고생이 더 심한 것입니다. 짚 없이 벽돌을 예전의 수대로 만들어 내라고 하니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는 내용이 원망조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 보아도 안 되잖아요?

 

 

 

5:22-23절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그래 안 되니? 그러나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보게 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바로가 얼마나 엄청난 힘으로 히브리 민족을 억압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바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하나님의 강한 손이 바로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강조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로의 세력이 권세가 강한 것 같아도 내가 강한 손으로 역사하여 바로가 항복을 하고 히브리 민족을 쫓아내듯이 보내게 될 것을 네가 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역할이며 오늘 우리들의 증인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너희가 나의 하는 일을 보게 되리라를 사람의 영광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한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서재실에 앉아 있으면 장사하려고 전화가 오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가끔씩 성경에 대하여 묻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이 있고 대부분 장사하는 사람들, 어느 단체인데 도와달라는 그런 전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세계한인기독교인명총람’ 이라는 책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큰 사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기독인으로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사람을 책에 실어서 홍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취지와 목적은 자랑스러운 코리안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기타 여러 가지 취지와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결국 자 우리가 한 일을 보라고 합니다. 진짜 빛된 삶을 산 사람은 숨겨지는 것이고, 또 숨어도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법이지 자신이 자신의 소개서를 보내어 책에 싣는데 한 사람 당 얼마를 요구하는지 아십니까? 선불 13만원, 후불 16만원입니다. 목사, 부흥사, 이 책을 출판하는 독지가의 이름과 경력을 실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보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사를 하고 있고, 이러한 장사가 되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날 때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일으키고서는 사람들이 주목하여 보니까 뭐라고 합니까? 왜 나를 주목합니까? 우리 개인의 경건과 능력으로 일어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하면서 이를 온전케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를 온전케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6:2-7절입니다. “봉독”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여호와의 이름은 알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신 그 구원의 능력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을 뿐입니다. 실제적인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의 이름의 능력, ‘나는 무엇이다’의 이름의 능력, 출애굽한다, 하시면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입니다. 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시사 구원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빼어내십니까? 애굽의 무거운 고역에서 주님의 강하신 팔로서 빼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7절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빼어내어서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옮기시겠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속지 두 번 속는가, 하는 심정으로 모세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습니다.

 

 

 

9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전에 구원한다고 하더니 구원은커녕 오히려 죽도록 고생만 하게 되었는데 뭐 또다시 바로의 손에서 구출한다고? 그러면 내손에 장을 지져라, 이런 식입니다. 만약 그런 일을 하다가 바로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고역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단지 전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여호와, 스스로 있는 분, 그러므로 말씀하신 바를 있게 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거절하여도, 백성이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이 많으시다면 한번에 알아듣게 하셔서 인도하시면 되시지 않는가 하시겠지만 우리의 죄와 고집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의 손길을 보게 하시고 설득하시고 항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10-11절입니다. “봉독” 다시 바로에게 가라, 그리고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전해라.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모세의 대답이 12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도 말을 안 듣는데 어찌 바로가 들으리이까? 하면서 또 자기는 입이 둔한 자라고 합니다. 틈만 나면 핑계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누구십니까? 누가 여호와의 뜻을 돌이키겠습니까?

 

 

 

13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와 아론에게 다시 말씀하시고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여 결국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리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계속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무엇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까?

 

 

 

7:4-5절입니다. “봉독” 지금 애굽에서 나오리라는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러나 결국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재앙이 계속될 때마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홍해바다 앞에서 모세가 뭐어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14:10-14절입니다. “봉독” 아직도 민중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더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압니다. 그리하여 홍해바다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13절에서 이제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무엇을 합니까? 주님께서 하신 구원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쫓아 살다가 주께로 돌아왔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절제하고 회개하고 열심을 품고 주께로 돌아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신 주님의 솜씨를 보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같은 죄인이 주님께로 돌아왔는가, 보라 주님의 일하심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나면 내 자랑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내가 한 일을 보아라, 하고 싶지 않습니까?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언제 주님의 일하심을 보아라고 할 틈이라도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모세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1:30-3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앞서서 싸우시고 사람이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로 행로 중에 안으시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무려 40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안고 오셨는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동으로 인도하셨는데도 믿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부모를 믿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 일에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도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 뿐이라는 것입니다. 갈렙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산지를 정복하였을 때 가나안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온전히 믿음으로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은 갈렙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도 들어갑니다만 모세의 후계자로서의 여호수아입니다만 이곳에서는 갈렙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여호수아나 갈렙은 예수 그리스도 표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주님의 일하심을 믿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하실 일을 믿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믿음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뭐라고 하면서 삽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한 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33:2-3절. “봉독” 금요일 저녁에 드린 말씀입니다. 환난날에 네가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크고 놀랍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그 크고 놀랍고 비밀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함을 받고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보라, 주님의 일하심을 보라, 하는 것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사시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을 보이면서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7:1-7  하나님의 군대  2001. 3. 11.

 

 


오늘 읽은 분문을 보기 전에 우선 6장을 봅니다. 6:10-27절까지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입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 시므온, 레위까지만 소개됩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모세와 아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족보를 기록함은 두 가지의 뜻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역사 속에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하심이 대단한 족보를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의 족보입니다. 바로 왕의 족보가 아니고 그 시대의 영웅들의 족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의 백성들의 족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출애굽과 연관된 족보인데 레위 지파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출애굽과 제사와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뜻으로 보입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레위 지파가 제사장 가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이란 사건 전체가 하나의 제사의 형태로 남아지는데 그것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절기가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를 소개하지 않고 레위 지파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후손도 아니고 아론의 후손만 소개가 됩니다.

 

 

 

잠시 보자면 23절에서 아론의 아들이 나옵니다.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죽고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되고 나중에 비느하스가 나옵니다. 이러한 족보가 모세와 아론의 족보라고 하면서 이들의 역할이 결국 제사장의 역할임을 족보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족보를 통하여 레위 지파만 소개됨이 제사자의 직분과 출애굽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봅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 어린양의 피를 흘리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

 

 

 

그리고 6:28-3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로 바로에게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또 다시 자신은 입이 둔한 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미 말과 행사에 능하다고 하였는데 자꾸만 입이 둔한 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지, 정말 말을 유창하게 잘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말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말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말 잘해서 구원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조심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지식으로 전할까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도 말에는 어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글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장애란 하나님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장애를 두심으로 겸손케 하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나는 못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직 자신을 믿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의 일들이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기의 주특기를 개발하여 사용하지만 주님의 일이란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은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바로 알 때에 우리는 염려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지금 5-6장에서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내리라” “내가 너희를 들여보내리라” “내가 너희를 나에게로 이끌겠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 땅을 주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 내실 일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는 것, 하나님의 모든 요구가 몸소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게 되기 전에는 참된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면 알수록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심을 바라봄으로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7장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입이 둔한 자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아론이 네 대언자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에게 신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가 이미 신으로 있는데 모세가 바로 앞에서 신처럼 된다는 것은 모세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은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찌니라, 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지금까지 계속하여 반복하시며 조금도 굽히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 즉 자기 언약에 있어서 전능하심이며 하나님의 열심이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쉽게 내어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을 봅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재앙을 더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군대, 자기의 백성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수련회를 하면 프로그램을 빽빽이 짜는 수련회가 있습니다. 그런 수련회에서 아이들의 소망이 자유시간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유시간을 주면 그 자유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에로의 구원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내셨다, 그러면 그다음에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의 구원은 있는데 어디로의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구원받았다는 감격은 있지만 구원받은 자의 삶이 무엇이냐는 아직 걸음마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강단에 많은 간증자들이, 어떤 자가 서고 있습니까? 전과 몇 범이 나오고, 엉망진창으로 살던 연예인이 예수 믿었다고 간증자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좀 덜 하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온갖 성공자들이 간증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망하였다고 성공하였는지, 어떻게 전도왕이 되었는지 이러한 간증들이 나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어디로 부름 받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출애굽시키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신 일이며 그 목적은 오늘 4절 말씀에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름인 것입니다. 즉 거룩에로의 부름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부름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노예들인데 이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시는 것은 물론 언약을 따라 하시는 것이지만 세상의 군대를 심판하는, 군대의 역할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가장 큰 군대는 바로의 군대입니다. 누가 감히 바로의 군대를 이길 수가 있습니까? 만약 바로의 군대를 이기려면 바로보다 훨씬 강한 군대가 와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군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노예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으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 즉 하나님의 군대를 나오게 하실 때에 애굽 사람이 여호와를 알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애굽이란 온 세계입니다. 그러니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군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군대로 삼으셨는데 어떤 군대입니까?

 

 

 

신명기 7:6-8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군대로 택함을 입은 것은 결코 수가 많아서, 다른 민족보다 힘이 세어서 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한 그 언약을 인하여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잘난 것이라고는 일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애굽처럼 강대국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셨다면 하나님의 군대가 세상에서 많은 군사를 모으고 힘으로 나라들을 정복하는 그러한 군대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역사상에서는 이러한 착각으로 인하여 수많은 종교전쟁이 일어났습니다만 하나님의 군대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힘과 힘의 전쟁이 아니라 거룩과 비거룩의 전쟁을 위하여 부름을 받는 군대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바로의 군대가 어디에서 줄초상이 나는 것입니까? 유월절 밤에 줄초상이 납니다. 모든 장자는 다 죽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 집안에는 장자가 아버지고, 장자 아들도 장자라면 동시에 두 명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이 넘어 갑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군대가 바로 하나님이 군대입니다. 그러니 전혀 세상의 수라든지 힘이라든지 무기라든지를 군대의 힘으로 보지 않는 군대가 바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린 군대, 이러한 군대가 홍해를 건넙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를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는 홍해 바다에서 모두 수장되는 것입니다. 바다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는 군대는 어린양의 피를 바른 군대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의 힘이고 위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군대로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정복 전쟁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가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직전에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의 자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왕을 원한다면 어떤 왕이어야 하는가를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7:14-17절을 봅니다. “봉독” 왕이 될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말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애굽의 그러한 군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과는 정반대의 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한 왕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말을 얼마나 많이 두었는지 열왕기상 10:26-11:3절에 보시면 병거가 1천 4백이요, 마병이 1만 2천이요, 은금이 풍부하여 은은 돌 같이 흔하였고, 아내는 후비가 7백이요 빈장이 3백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무엇에로의 부름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전쟁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비거룩과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결코 세상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이 백성들보다 키가 어깨 위나 더 큰, 힘있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이러한 사울 왕을 만세로 환영하였지만 그러나 골리앗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어떻게 싸우는 것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시면 저 할례 받지 못한 자가 어떻게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나가서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도 나중에 나라가 평안하고 군대가 많아지자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군대를 계수하게 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7만 명이나 죽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란 늘 무엇을 의지하여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군대로 남는다는 것은 그들의 무기가 결코 창과 활과 칼과 마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나님의 군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공로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군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비거룩과의 싸움입니다. 비거룩과의 싸움이란 사람의 수나 돈이나 행함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러한 힘을 축적하는 길로 가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창원 시찰회가 저희 교회당에서 지난주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식사를 대접하였는데, 어려운데도 이렇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합디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넉넉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전쟁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하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가 늘 주님의 거룩 안에 있는 것이 승리입니다.

 

 

 

디모데후서 2:1-4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군사라고 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위한 고난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군사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이고 목표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임 사역자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매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교회의 수가 많고 적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건물의 있고 없음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피로 거룩하게 됨을 유지하고 비거룩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생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은 십자가의 용사입니다. 세상의 비거룩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죄와 싸우는 용사들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하는 것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기에 세상의 힘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10-20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로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7:8-13  강퍅  2001. 3. 25.

 


바로가 왜 재앙을 받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악하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것입니까?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말을 듣지 않음이 심판인 것입니다. 만약 바로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악하여서 열 가지의 재앙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도 날마다 열 가지의 재앙보다 더한 재앙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보다 선한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바로는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왕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 백성들을 노예처럼 학대하기는 하지만 어느 나라치고 이렇게 안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힘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부를 더 확대시키는 일이란 인류역사상 끊임없이 이어져 온 현실입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돌려보면 자신이 힘이 있으면 약한 자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 바로가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하여서 재앙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가 재앙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재앙을 받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강퍅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것이 강퍅입니다.

 

 

 

로마서 1:28-32절을 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것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모습입니다. 온갖 죄악은 사형에 해당된다고 알면서도 자기들이 행하고 그것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죄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니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우상이 되고, 금수와 버러지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애굽의 우상들을 보면 강, 개구리, 이, 파리, 독종, 우박, 메뚜기, 태양 이런 것들이 모두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지 않은 상태가 바로 강퍅인 것입니다. 이러한 강퍅한 마음은 그 어떠한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나 선한 교육으로 바꾸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자도 안 되고 공자도 안 되고 김용옥도 안되는 것입니다. 죄를 알면서도, 하면 안 된다고 알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보고서 저 나쁜 놈이라고 하여도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하였다면 우리라고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대로 버려두신 모든 인간이 다 강퍅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그것이 바로 강퍅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내린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과연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즐거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려 주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은 눈감아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로마서에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말씀을 그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 모든 것에 하나님 두기를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강퍅한 것입니다.

 

 

 

그런데  7:3절에 보시면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부러 바로를 강퍅케 하신 것이라면 바로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대표적인 질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괜히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서 죄짓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하여 일일이 대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한 곳을 찾아봅니다.

 

 

 

로마서 9:15-18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바로가 강퍅케 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오히려 더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퍅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나에게 불의가 있다고 항의를 할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기의 소용대로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시작도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어떠한 선행적인 조건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께 공평치 못하다고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죄로 인하여 모두가 하나님께 항의할 처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양, 강퍅케 된 것이 하나님의 책임인 양,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양 하는 것이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는 죄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퍅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주님의 긍휼을 바라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크신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나의 마음이 강퍅한지 아닌지를 늘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합리하게 들리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더 옳아 보인다면 그것은 강퍅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 자들이 강퍅케 되도록 내버려 두시니 계속하여 강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도 강퍅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계속하여 강퍅하여지는 것은 자신도 하나님처럼 행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감히 나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무엇입니까? 모세만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신하들, 즉 박사와 술사들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물을 피로 만드는 것을 자기의 신하들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구리를 올라오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이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11절을 봅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행한 그러한 일쯤은 우리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애굽의 술사들이 만든 뱀을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 놀랄 바로가 아닌 것입니다. 뭐 별것 아닌 것들이 와서 까불고 있어, 그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술객들이 흉내도 내지 못하는 것을 보였다면 조금은 두려워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는 강퍅한 마음이 부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22절을 봅니다.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강물을 피로 만드는 일을 애굽의 술사들도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8:7절입니다. “술객들도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행하여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이러니 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하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수 있다는 인간의 발상입니다. 이것이 과거만이 아니라 과학이 발달하였다는 현대는 더한 것입니다. 뱀을 못 만들어냅니까? 양도 만들어내고 우리나라에서도 송아지를 복제하여내는 것입니다. 이제 곧 사람도 복제하여낼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한다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퍅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 하숫가를 파서 물을 구합니다. 물이 오염되면 정수기 만들어 먹으면 되는 것이지 하늘을 바라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구요? 그런 것은 신화시대의 이야기이지 그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지식이 그들의 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이겨내고자 ‘창조과학회’가 나와서 창조가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됩니까? 아마 나중에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짓들이 모두가 마음이 강퍅하여진 모습입니다. 교만하여 자신이 결국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강퍅함입니다. 그러니 바로만 강퍅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강퍅한 것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착하거나 악하거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강퍅인 것입니다.

 

 

 

이렇게 강퍅하게 되도록 바로에게는 애굽의 술사들이 부추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술사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과학자들이고 그러한 과학만능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들도 결국 애굽의 술사와 같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강퍅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애굽의 술사와 같은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가장 주의하여야 할 것이 종교적으로 애굽의 술사와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처럼 행사하면서 나타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으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일들을 얼마든지 흉내 내는 것입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짜 보석이 진짜보다 더 멋있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애굽의 술사의 이름이 구약에는 없는데, 신약에는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9절을 봅니다. “봉독”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매킨토시’의 출애굽기 강해에서 경건의 모양은 사람들이 흉내 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부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강권하심과 은혜로 복음을 전하고,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고 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도 이러한 것을 얼마든지 잘한다는 것입니다. 진실 되게 하는 사람보다 더 낫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은 선교를 잘하면 교회가 부흥되고 나라가 부자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선교를 이용하여 자기 교회 성장과 자기나라 부자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니 구제니 전도니 봉사니 하는 것이 진리를 대적하는 수단으로 사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결국 그 거짓됨이 드러나듯이 진리를 위장하고 가장하여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인 양 위장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모세 때와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역하도록 하는데 어떻게 거역하게 하는가 하면 모방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의 일꾼 같고 가장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자긍하고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장사한 것입니다.

 

 

 

매킨토시의 강해를 인용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사람입니다. <형식주의자는 그의 정욕이 거꾸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의 쾌락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의 감정이 통제받는 것과 그의 마음이 정결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두 세계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게”하는 종교를 원한다. “앞으로 올 세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연 모르고 있다>-세상의 수많은 목사들이 얼마나 세상을 포기하게 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강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포기합시다. 이미 완성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강퍅하여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7:14-25  첫 번째 재앙  2001. 4. 1.

 


바로와 애굽에 재앙이 내리는 것은 바로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임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만약에 악하다고 하여서 재앙을 내리신다면 이 세상은 날마다 열 가지의 재앙보다 7배나 더한 재앙이 내려 마땅한 곳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재앙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맛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한 것이지요. 그러나 바로의 술사들도 그러한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의 지팡이가 바로의 술사들의 뱀을 잡아 먹어버렸지만 그 정도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십니다. 그 첫 번째 재앙은 애굽의 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입니다.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러한 재앙을 하나님 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자문을 구하시거나 그들의 힘을 빌리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단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주도권을 가지고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40세 때에 한번 민족애를 가지고 자기 힘으로 한번 힘을 써보았지만 그때는 광야로 쫓겨나는 일만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명령을 하실지라도 묵묵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모세가 그만큼 자아가 부수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옛 자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면 결단코 고분고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일들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한 길이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일이 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지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오히려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자신이 일을 결정하여 놓고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모세와 아론은 단 한마디도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작전 지시를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

 

 

 

14-19절까지가 모두 하나님의 작전 지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를 모두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너는 하숫가에 서서 바로를 맞을 것이고 네가 여호와의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 하수를 지팡이로 치면 피가 되리라, 그러면 네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합니다. 그러한 모든 지시를 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0절에 보시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니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행함을 강조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순종의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이나 부수는 과정을 통하여 순종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수는 작업의 결과로 순종이 나왔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일이지, 모세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임재하신다는 것은 말씀만 해 놓으시고 팔장끼고 계시면서 하나 못하나 두고 보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하시고서는 그 일을 손수 팔을 걷어 부치시고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맡겨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맹세하고 죽을지라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정작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도망가고, 배신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인된 우리 인간의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놓은 말을 우리가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맹세하고 죽어도 이 말을 이루어낸다고 하여도 결코 자신의 말을 이루거나 책임을 다 질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약 10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를 활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원고도 직접 손으로 작성할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의 한계와 제한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맹세한 바를 지키지 못한 것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하여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러나 지키지 못 하였을 때는 언제나 그럴듯한 변명과 핑계를 듭니다.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한 것은 정죄하면서 자기가 지키지 못한 것은 합리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성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것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전능하신 것입니까?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전능하신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이루시는 과정이 출애굽인 것입니다. 그러니 출애굽이, 모세가 순종하고 안하고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루어내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세가 순종함으로 열 재앙이 일어나고, 출애굽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는데, 돌문을 열라고 하였습니다. 돌문을 열지 않았다면 나사로가 살아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문을 여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돌문을 열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돌문 열면서 마리아와 마르다도 믿지 못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 즉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돌문 여는 사람이 믿었을까요? 아이고 냄새날 건데, 하면서 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고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자 돌문을 연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이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렸더니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순종만 하면 이러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이 당연하고 순종만 하면 성경의 모든 약속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순종이 계속됩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순종이 가능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입니다.

 

 

 

로마서 11:32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모든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단군의 자손이나 모두가 불순종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순종은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어떻게 이용하려고 드는가 하면, 그렇구나 하나님이 다 하시니 나는 그냥 놀자는 쪽으로 꼭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놀아버리십시오. 그리고 한참 놀다가 맞고 돌아오는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예화를 보았습니다. 학생이 공부해야 할 때에 공부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공부하기 싫은데 지금 공부하려고 이렇게 책상에 앉아있는 것은 위선이다, 나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니 나가서 노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하고서 논다면 어떻게 됩니까? 맞는 길 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그런 학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러나 간에 하나님의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참으로 순종하여야 할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출애굽이 하나님의 홀로 행하신 일이신 것처럼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불러주신 것도 역시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신 것임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억눌림이나 마지못함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기쁨이 분명히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망한 것 같고 죽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아직도 나의 자아가 깨어지지 아니한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첫 번째 재앙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의 의지하고 믿는 것이 자신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8:16-18절을 봅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게 듣지 아니하도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게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찌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벼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내어보내라고 하여도 바로가 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과연 누가 참된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미 태양의 아들로 신격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이란 그 당시에 세계 최고의 강대국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지혜와 지식과 군사력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지금도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거대한 피라밋이 애굽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면서 내 백성이니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그러니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마, 하시는 것이 열 가지의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온 세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이 피가 되는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입니다. 나일강은 그들의 식수요 농업용수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물고기들 또한 그들의 중요한 양식입니다. 그리고 그 운하를 따라 무역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 나일강입니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함으로 비옥한 평야가 발달한 것입니다. 강 하류에 평야가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생명줄인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일강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가히 죽은 것입니다. 강이 단지 피 색깔로 바뀐 것이 아니라 그 강의 고기가 죽고 강물에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강물만 아니라 못과 호수도 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애굽의 나무 그릇이나 돌그릇에까지 모두 피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나 애굽의 술사들도 이러한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의 마음이 또다시 강퍅하여 그러한 일에 관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야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런다고 그것이 대수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사실 요셉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이 일어나서 요셉의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집스러운가 하면 무려 열 번이나 재앙을 퍼부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뿐입니다. 그냥 붙들고 있다가는 다 죽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바로와 같은 자들입니다. 물을 마음껏 마시니 우연히 그렇게 된 줄 아는 것입니다. 봄이 되고 꽃이 피니 자연의 법칙이 그렇게 만들어 가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물의 움직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밝히 드러나지만 이미 영이 죽어 있기에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모르면 우리가 강퍅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퍅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역시 바로가 당한 재앙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배가 부르게 되면 어떻게 될 거라고 미리 경고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28:2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6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이것뿐만이 아니라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23-26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하심은 결국 여호와께로 돌아오도록 낮추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26:40-41절입니다. “봉독”

 

 

 

오늘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바로처럼 교만한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퍅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은 결국 하나님의 재앙을 받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심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의 삶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재앙을 벗어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8:1-15  많음의 재앙  2001. 4. 8.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많음의 재앙이라니, 많으면 좋은 것이지 왜 많은 것이 재앙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궁핍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거저 많은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것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지요. 많을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을수록 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많을수록 나쁜 것도 있겠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사십니까?

 

 

 

평소에 늘 생각하는 이것은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아닙니까? 늘 궁핍을 느끼는 것이 돈 아닙니까? 그런데 돈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 돈이 많은 것이 재앙이 된다면 이런 말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개구리가 많아지면 재앙이 된다고 하더라도 돈이 많아지는 것이 왜 재앙이 됩니까?

 

 

 

그동안 황소개구리를 식용으로 수입해서 기르다가 그것이 너무 많아져서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황소개구리 잡기 대회를 하였지요. 이러한 황소개구리가 너무 많아지면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생태계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구리가 돈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왜 이런 발상이 나왔는가 하면 개구리가 애굽의 신인 것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어떤 신인가 하면 애굽의 하피 신과 아이의 출생을 돕는 헤크트 여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구리는 풍요의 상징인 것입니다. 여름철 개구리가 왕성하게 울어대는 소리를 시골에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왕성한 울음소리로 인하여서인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 개구리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개구리를 보면 아이고 복이다,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네 조상들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아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금으로 송아지도 만들지만 금으로 두꺼비도 만들어 보관하지 않습니까? 금은방에 가보면 그러한 형상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서의 개구리가 이제 너무 많아서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또 말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로가 거절하면 개구리가 너의 온 지경을 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 보내기를 거절함으로 개구리가 애굽의 온 천지를 뒤덮어버리는데 어느 정도입니까?

 

 

 

3-4절을 보시면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 갈찌며 개구리가 네게와 네 백성에게와 네 모든 신하에게 오르리라”고 하십니다. 온통 개구리 천지입니다. 앉아도 개구리 위에 앉고, 누워도 개구리 위에 눕고, 밥을 먹으려 해도 개구리가 밥그릇에 들어 있고, 가만히 있어도 개구리가 뛰어 사람에게 오르고 이것이 재앙이 아닙니까? 이러한 개구리가 많아지자 애굽의 술사들도 개구리를 애굽땅에 올라오게 합니다. 그러나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제서야 바로 왕이 모세를 불러 개구리를 물리쳐 달라고 합니다.

 

 

 

8절을 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개구리가 너무 많아지자 이것을 처리할 수가 없으니 바로가 항복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여 개구리를 물리치고 나자 그 개구리가 무더기를 이루어 악취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어떻게 나옵니까?

 

 

 

15절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았더라” 개구리로 인하여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움을 당할 때에는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라고 하고서는 개구리가 물러가고 숨을 통할 수 있으니 다른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숨도 쉴 수 없이 몰아치면 살려달라고 빌다가 어느 정도 숨을 쉬게 되면 내가 언제 그렇게 하였나, 하는 식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많은 재앙을 만나야 제대로 항복을 하겠습니까?

 

 

 

지금 숨을 쉴만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자신의 풍요 속에서 절박한 심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개구리나 많았으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이란 개구리가 많아지는 것이 재앙이듯이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의 재앙이란 풍요가 재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개구리가 풍요의 신이라지만 그러나 개구리가 너무 많아지니 재앙이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이 풍요로 인하여 재앙의 시대가 닥친 것입니다. 풍요를 누리기 위하여 대량생산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대량생산의 결과 소비되지 않는 것들은 폐기처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고민은,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고민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귀할 때는 거저 배부르고 추위만 막아주어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아지니 어떤 고민이 생긴 것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염려하는 것인데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도 얼마나 멋있게, 아름답게 입을까가 염려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이를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한편에서는 정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세상이 어찌 바른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신다고 하십니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풍요를 치시고 그 애굽의 가난한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해방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시는 것이지 단지 고통받는 자들을 모두 해방시키자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는 것은 구원이란 세상의 풍요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풍요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광야를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일강의 풍요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시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모르고 애굽의 풍요를 사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징계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11:4-8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이들이 만나로 부족하였다는 것입니다. 만나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종합식품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때 섞여 나온 무리들이 원망을 하자 이스라엘 자손들도 전염이 되어 원망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고기와 여러 가지 식물을 값없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값없이 먹었습니까? 자기들의 몸을 노예로 노동을 지불하고 받은 것인데 어떻게 값없이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이들의 탐욕이란 결국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그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별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형수가 죽기 전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니 자기의 시신을 팔아서 술과 고기를 먹고 죽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의 원망에 대하여 모세도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이들을 왜 나에게 맡기시는 것입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이들에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동안 고기 냄새가 질리도록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보행자가 60십만인데 이들이 다 먹으려면 소떼 양떼를 다잡은들 족하며 바다의 고기를 다 모은들 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마음껏 주시겠다는 것은 축복입니까? 재앙입니까? 재앙입니다. 이 재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봅니다.

 

 

 

민수기 11:31-34절입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들이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메추라기를 몰아와서 지면 90센티 정도에 내리게 하시니 손으로 잡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첫날은 종일 종야를 메추라기 잡은 것입니다. 철야하면서 잡고 다음날 또 하루 종일 잡았습니다. 메추라기가 어느 정도인지 보셨습니까? 중간 정도의 닭 크기입니다. 몇 마리만 잡아도 몇 일은 먹을 텐데 얼마나 잡은 지 아십니까? 적게 잡은 자도 십 호멜이라고 합니다.

 

 

 

한 호멜은 당나귀 한 마리가 짊어지는 양이랍니다. 리터로는 약 220리터입니다. 그러니 적게 잡은 사람이 당나귀 열 마리가 지고 갈 분량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탐욕으로 인하여 큰 재앙이 내려서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었습니다. 그 고기를 잇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재앙이 내린 것입니다. 그 재앙으로 죽은 자를 모아 시체더미를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곧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명명합니다. 무슨 이름입니까? 탐욕의 무덤입니다.

 

 

 

인간의 탐욕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메추리 한 마리 사는 돈이 천원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천 원 짜리가 90센티미터 정도에서 날고 있다면 우리는 몇 일 동안 모을 수 있을까요? 1박 2일 정도가 아니라 아마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며 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애굽에서 나온 무리를 광야에서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로 낮추고 주리게 하시고 네 열조가 알지도 못하는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게 되면 나를 잊어버릴까 염려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8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먹고 배부름과 풍요를 좇아간 것입니다. 애굽에서 개구리가 풍요의 신이라면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풍요의 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풍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이들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5절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간음하다가 죽었고, 주를 시험하다고 죽었고, 원망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는데도 우리는 거저 수가 많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탐욕의 무덤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절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수와 재물의 많음, 바로 이것이 많음의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하여 많은 것이 좋다고 합니다. 돈도 많아야 좋다고 하고, 사람도 많아야 좋다고 합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모두가 힘이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힘이란 곧 숫자에서 나오니 숫자가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점검도 안 하고 거저 진리인양 마구 달려갑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개구리가 와글와글 하듯이 교회당 마다 기도원 마다 와글와글 합니다. 돈 주세요. 사람 주세요. 와글와글 하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 돈 여기 있다, 사람 여기 있다, 하고서 주시니 이것이 재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사람의 수를 믿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가정이나 교회나 모두가 탐욕의 무덤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곳을 우리는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가 고난주간입니다. 일주일이라도 사람들은 하루에 한끼씩 금식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오락을 삼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1년 동안 내내 탐욕을 위하여 살다가 일주일만 참으면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많음을 버리고 없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 고난주간이라고 꽃꽂이를 보십시오. 가시나무로 십자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많음을 위하여 사신다면 그것은 개구리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많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버림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길을 갈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염려는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개구리를 몰아내셔서 죽여 버리심으로 그것이 악취가 됩니다. 어느 날 그것이 생명인줄 알고 좇아가던 것들이 악취가 나면, 주님께서 일하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2:22-3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32절,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니라” 많음의 재앙에서 없음의 자유를 주님과 함께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8:16-19  하나님의 권능  2001. 4. 15.

 

 


세 번째 재앙입니다. 이번에는 바로에게 예고도 없습니다. 다른 재앙들은 예고를 하시는데 세 번째 재앙은 그러한 예고도 없습니다. 대부분 예고를 하시고 심판을 하시지만 갑자기 재앙과 심판이 닥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강물이 피로 되고, 개구리가 올라오는 것을 통하여 알만큼 알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강퍅한 자들에 대하여 예고 없이도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도처에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14절을 봅니다. “봉독” 적그리스도의 출현,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난리의 소문들, 이런 것들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러한 일들이 갑자기 많아 질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러한 재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재앙을 재앙으로 읽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자기 살려고 자기만 사랑하다보니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서 성도의 자세란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의 재앙을 읽고 그 심판을 알고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두 번째까지의 재앙은 강물이 피로 변하고 강물에서 개구리가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이 강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데 그 강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만이 참 신이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흉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번째는 땅의 티끌로 이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강물이 범람하여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내는데 이제는 그 땅의 티끌이 오히려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박윤선 목사님은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의 비옥한 땅을 믿고 살았는데 그 땅의 티끌이 사람을 괴롭히는 깔따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할 때에 그것을 도리어 그들에게 해가 되게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애굽의 술사들이 이를 만들어내어 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뱀을 만들어 내고, 강물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를 올라오게는 하였지만 이는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애굽의 술사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합니다. 신의 권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들이 모방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 일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전에 ‘강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 때에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것이 죄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끝임 없이 인간은 할 수 있다, 나는 가능성이 있다, 불가능은 없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자, 그러는 것입니다.

 

 

 

요즈음 텔레비전 광고에 물이 반 컵 찬 유리잔을 놓고서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공익광고협회’의 광고이겠지요. 뭐라고 합니까? 어 절반 밖에 없네, 그런데 다음에는 아직 절반이나 있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도 무슨 정상에서 만납시다, 라는 책을 보는 것처럼 성공을 향한 몇 가지 법칙, 이런 것들이 설교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퍅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얼마든지 힘을 모아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에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물리친 것들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예수님하고서 이름은 부르지만 그 내용은 사탄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데 감히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신에게 엎드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을 믿는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을 아직도 자기 의지가 약하고 마음이 여려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애굽의 술사가 되는 자들이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과학자들이요, 윤리 도덕 선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포함시킵니다. 의사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어느 집사님이 병원에 가서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항상 최악의 상태를 슬쩍 던지지 않습니까? 그래야 의사에게 매달리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의사도 애굽의 술사입니다. 그러니 과학자나 철학자나 의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의사의 말의 반의반이라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며 달라졌겠습니까? 의사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 말은 그렇게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거의 매일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찌 된 셈인지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의 한계를 바르게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것이 강퍅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애굽의 술사들이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신의 일입니다, 라고 하여도 바로는 강퍅하게 버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의 여러 일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강퍅하여져 있는지를 아십니까? 거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손해 보면 안돼, 양보하면 안돼, 희생하면 안돼, 거저 눈칫것 자기 실리 챙겨야지, 미련스럽게 남 좋은 일만 시키면 안 돼, 하고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 하려면 끝까지 남아서 바보처럼 일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거저 적당히 눈치 보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러는 것입니다. 누가 끝까지 남아서 쓰레기까지 정리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다가도 한번씩 덜커덕 하고 걸리는 사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건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시면 그때라도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아시고 주님 앞에 항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권능이란 내가 하는 어떤 일에 기적처럼 도움을 주어서 성공하였습니다, 하는 것으로 권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고 나는 이제 망했구나,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술사들이 더 이상 자신들이 모방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서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말이 ‘신의 손가락’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재앙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이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성도란 세상에 심판을 알리는 자입니다. 세상이 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뛰어난 지도자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망한다고 증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증거하는 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히브리 노예들인 모세와 아론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아주 우스운 자들입니다. 너희의 꼴이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보았을 때 얼마나 웃기는 작자들이었겠습니까? 대제국 이집트의 파라오 왕 앞에서 초라한 노예의 한사람이 하나님을 섬겨야 된다고, 그래서 자기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재앙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란 이러한 모습입니다. 결코 이 세상의 힘과 권세와 권능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권능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지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어떤 십자가입니까? 신명기 21:23절의 말씀처럼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저주 받아 죽은 그 죽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재앙을 들고 선 것처럼 오늘 성도란 세상에 십자가를 들고 선 자들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이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양치던 지팡이보다 더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의 정도가 애굽의 술사보다 뛰어나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는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치병이 낫게 되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개척교회가 몇 년 만에 몇 만 명이 되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마귀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도 위장하고 모방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술사들이 모방하듯이 하나님의 권능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단이 온갖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가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진리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에 모든 것을 아들로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이 아들을 부정하고서 다른 것을 좇아가는 것이 바로 심판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권능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볼 때 미련하고 꺼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 미련하고 꺼리는 것을 좋다, 라고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권능이 대단한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와 복음이 세상의 권능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더욱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탐스러운 것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란 세상이 볼 때 미련하고 어리석고 꺼리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애굽의 술사가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한 표현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2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손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귀신을 좇아내는 것입니다. 귀신을 좇아내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강한 자가 자기 소유를 지키고 있을 때 그 소유가 안전하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강한 자를 무장해제 하면 그 재물을 나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난 것입니다. 애굽의 포로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건져내시듯이 오늘 마귀에 붙들려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권능인 십자가로 우리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은 그 십자가의 권세아래 사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세가 증거되는 것이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아래 있음을 모세와 아론처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권능은 참으로 미련하고 거리끼는 모습으로, 심판과 재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8:20-32  출애굽의 목적  2001. 4. 22.


2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에와 그 신하의 집에와 애굽 전국에 이르니 파리 떼로 인하여 땅이 해를 받더라 25○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6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하나이다 28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29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 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30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31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서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32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고난받는 애굽의 현실에서 탈출이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대로 타국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그들을 징치하고 나서 그곳에서 나오리라고 창세기 1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따라 출애굽이 이루어지는데 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20절에서도 “내 백성을 내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출애굽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하여 나오는 백성들도 단지 자신의 구원이 목표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최종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과정 속에서 어려움이 오면 당장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 자신이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로 설정이 되어 있기에 구원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제서야 인생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절실한 문제는 섬길 자를 바르게 찾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섬겨야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서 피조물을 섬기고,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입니다.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을 섬기고 그분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자기 모두가 각자의 신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배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욕망을 따라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사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김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이 바르게 설정이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김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에게 말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출애굽을 하였어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을 때 이들은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을 위한 섬김이냐고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면 이것저것을 주신다는 것 때문에 섬기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는가 하면 결국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주시는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애완용 동물이나 관상용 식물을 키우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들을 키우기 위하여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돌봅니까?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꾸미는데 애견 미용실이 있지 않습니까? 쓰다듬고 안고 함께 먹고 함께 자기까지 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에게 하는 것의 절반이라고 자기 부모에게 하였다면 효자 났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을 섬기기 위하여서 그렇게 합니까? 결코 아니지요. 결국은 나의 기쁨을 위하여서 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위하여서 하기에 내 마음에 안 들면 그 대상을 바꾸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줄로 알고 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는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섬겨주어야 나에게 구원을 주고,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제대로 섬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봐 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일조 안하고 주일성수 안하면 그보다 더 큰 손해가 날까봐 겁이 나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마치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호랑이가 예뻐서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떡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제사들이 우리나라의 옛날이야기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느 마을 뒷산의 동굴에 1년에 한번씩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재물 중에서는 짐승만이 아니라 사람이 재물로 드려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섬김은 결국 자신의 작은 부분을 내어줌으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 참으로 섬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러한 하나님으로 소개 되어 버린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이 교회를 나간다,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항상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종교를 하나쯤 가지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하나쯤 가져도 된다는 말은 자기 위로나 어려울 때 의지할 힘이 되니 좋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에게 잘 보여서 재앙이 물러가면 그것도 괜찮은 장사라는 것이지요. 십일조 바치고 나의 재산이 보호된다는 확실한 보장만 된다면 십일조 정도야 못하겠습니까? 내 목숨이 보존된다는데 그래 떡 한 덩이 호랑이에게 못 던져주겠습니까? 이런 식의 하나님 섬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모세가 바로에게 네 번째 재앙을 내립니다. 우리 백성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니 내보내라, 만약 거절하면 이번에는 파리떼가 너와 네 신하와 네 집들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파리떼는 단지 파리정도가 아니라 세 번째 재앙의 이처럼 사람이나 짐승의 피까지 빨아먹는 그러한 곤충들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곤충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떼를 지어서 몰려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굽과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까지는 구별시켰다는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께 재앙이 닥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부터 재앙을 받는 쪽과 받지 않는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가 온 세상 중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바로 왕이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모세와 아론의 하나님이 참 능력의 하나님이시구나를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파리 재앙을 보고서 자신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고센 지역에는 이 파리 재앙이 없으니 어느 정도 항복을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25절입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제사만 지내면 되지 않느냐, 그러니 3일 길을 가지 말고 이 땅에서 살면서 제사만 지내라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 방향, 가치관은 여전히 애굽식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사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주장입니다. 종교는 허용하지만 애굽을 떠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바로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주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데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고, 헌금할 테니 그것으로 족한 줄 아시오, 하는 식이 된다면 바로의 제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단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또는 도움은 안 되더라도 손해만 오지 않게 된다면 하루 정도 예배 드려주겠다는 생각이 바로의 제안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왔습니까? 십일조 떼어 먹었더니 얼마나 손해가 났으며, 주일을 빼 먹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하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림이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귀찮은 일을 치루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비군 훈련 나가는 것처럼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비군 지나면 민방위가 있는데 일년에 한두 번 나가는 것인데 얼마나 귀찮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이런 식이 되어 있다면 그냥 푹 쉬시는 것이 났습니다.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 하나 들여 놓은 것이라면 그만 두셔도 무방합니다.

 

 

 

이러한 바로의 제안에 대하여 모세가 거절합니다. 어떻게 거절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시내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세가 알아 들을 수 있게 말합니다. 우리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러면 애굽인들이 그러한 제사를 가증히 여기기에 우리를 미워하여 돌로 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애굽인들이 신을 섬기는데 짐승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황소는 아피스에게 구별되어 있고, 암소는 이시스에게, 수양은 아몬에게, 그리고 다른 것들도 다른 신들에게 구별되어 있기에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마치 모슬렘 사원에서 돼지를 잡는 것이나 힌두교 신전에서 소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5세기 경에 애굽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희생제사를 지내다가 애굽 사람들에 의하여 종족이 학살된 사건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페르시아가 애굽을 공격할 때 애굽인들이 섬기는 거룩한 짐승들을 페르시아 군대 앞에 두고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궁사들이 활을 쏘지 못하여 지게 된 경우도 있듯이 애굽인들 앞에서 짐승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릴수가 없다는 말을 하자 바로가 동의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28절입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모세가 3일 길을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3일 길을 가야 시내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바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너무 깊이는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빠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도 돌보지 않고 전재산을 갔다 바치는 이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자 하는 주변의 사람들의 요청만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 내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소리가 우리 안에서 울리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주일 낮에만 한번 가도 되는데 뭘 저녁에도 가고 수요일도 가고 금요일도 가느냐? 헌금도 적당하게 하지, 지나치게 하면 되겠느냐? 거저 적당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저 집사가 저 정도 헌금하고 봉사하니 나는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 너무 멀리는 가지말자 하면서 다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수 집사가 저 정도이니 나는 이정도만 해도 잘하는 것이야! 목사가 저 정도인데 나는 이만큼만 하여도 많이 하는 것이지, 그러나 너무 깊이 빠지면 안돼,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 조심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 제사를 드리러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라는 소리가 바로의 소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적당히 거래하고 적당히 도장 찍고 가듯이, 액땜 하듯이 하고 가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행태를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고발하고 있듯이 소를 잡는 것이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양으로 제사함이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함이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고 이사야 6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제사, 어떤 예배여야 합니까?

 

 

 

신명기 6: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멀리 가지 말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아주 멀리 가는데 어느 정도로 멀리 가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로 말씀드린 자신의 기쁨이나, 자신의 불행을 방지하는 액땜식의 예배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르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4:23-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것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과의 대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것은 ‘영과 진리로’입니다.

 

 

 

우리의 신령한 분위기와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에서의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와 아버지, 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란 지금까지 제대로 예배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된 예배를 드리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약의 핵심을 십자가로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린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배하는 자란 사실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예배란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소와 양을 잡고,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를 드린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과의 사귐이 우리에게도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을 입은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다듬어가면서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의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려오는 예배를 방해하는 사단의 소리로 알고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친밀하여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것이 참된 기쁨이고 사람의 최고 최상의 목표요 가치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주님께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계심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 말리는 데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멀리 가셔서 참된 예배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운명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구원의 최종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9:1-7  깊어지는 재앙  2001. 4. 29.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여 주기 위한 종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우리 인간의 구원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이용하여 계속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을 왜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다른 복음에 그렇게 쉽게 빠져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과 공로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인 것 같은데 왜 다른 복음으로 쉽게 빠지는가 하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그러나 오직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대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에게 가능성이 없으면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여 내시겠습니까? 이것을 출애굽을 통하여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보면서 바로는 적이고 모세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미국 영화를 가장 많이 볼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가 앞서기도 합니다만, 영화를 볼 때  언제나 미국은 우리 편, 미국에게 당하는 편은 우리의 적으로 보게 됩니다. 정의와 승리는 언제나 우리 편, 불의와 패배는 언제나 적 편이라는 공식이 우리 생각에 뿌리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로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얼마나 강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가 당하는 재앙을 보면서 자기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러한 재앙을 당하는 것이구나, 하고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출애굽하고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면 애굽의 모든 재앙을 너희에게도 내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라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표라면 애굽의 재앙을 내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재앙을 이스라엘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당하는 재앙을 보면서 아 우리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리 고집이 센 바로 왕이라도 결국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구나, 하는 것을 또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재앙이 다섯 번째 재앙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을 서론으로 본다면 피, 개구리, 이, 파리의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고대의 신의 개념이란 그 나라가 얼마나 크고 강하냐에 따라 그 신의 위대함이 드러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애굽의 신이 히브리 노예의 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만큼 되었는데도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피와 개구리는 흉내를 내었지만 이 재앙부터는 흉내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는 신의 손가락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파리 떼 재앙에는 드디어 바로가 항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파리 떼가 사라지자 곧 마음이 강퍅하여서 하나님께 제사지내러 가라고 한 것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다급할 때는 신의 요구를 듣겠다, 하고서는 그 위기가 지나면 다시 옛날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속된 말로 화장실 갈 때 마음 하고 나올 때 마음 하고 다르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정이 긴박하고 다급하면 무슨 말을 못합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틈만 있으면 자기정당성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섬기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몰아치시면 거제서야 하나님 제가 이제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고서는 그 위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입니다.

 

 
 
그러면 몇 번 하시다가 그만 두시면 되실 텐데 그만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키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여 낸다, 그러시면 바로가 아무리 거절하여도 바로를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거절하면 할수록 재앙의 강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재앙이 심하게 닥치는 것입니다. 드디어 다섯 번째가 되자 무엇을 치기 시작하십니까?

 

 

 

가축을 치십니다. 가축은 애굽인들에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 애굽의 왕을 아멘호텝 2세로 추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동물숭배자로 특히 소를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에 남아있는 벽화에 아멘호텝 2세가 소 밑에서 젖을 빨고 있는 그림이 있답니다. 그러니 소가 신이니 신의 젖을 빨아 먹는 자신도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승을 신으로 섬기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서 1:23-24절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왜 짐승을 섬기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창조주를 섬겨야 할 인간이 사람을 섬기고, 짐승을 섬기고,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결과 이들은 짐승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짐승을 섬기지 않는데... 그러나 이렇게 물어봅시다. 왜 소를 섬겼을까요? 소가 얼마나 큰 재산입니까? 우유를 공급하고, 퇴비를 공급하고, 우리나라는 농사를 짓고, 나중에 고기까지 공급하고, 가죽까지 공급하는 그야말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큰 재산입니다. 우리나라가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소가 농촌에서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를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광우병과 구제역으로 가축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커다란 소를 기계로 집어다가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축을 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두 마리가 아니라 한번 병이 오면 거의 다 죽는 병이 왔을 때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지금까지의 재앙은 조금 불편하였지 재산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여도 견딜 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축의 재앙은 자신들의 커다란 재산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앙의 깊이가 더하여 가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고집이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인들만 소를 섬긴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만들어 섬긴 것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여호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섬기던 나라에서 구원받아 나왔는데 광야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소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리므로 오늘 우리도 다 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소가 재산이기에 우리가 재산을 믿고 사는 것이 소를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면 중간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재앙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예수 믿는 것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단체쯤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닥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여도 그들은 코웃음 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합시다. 그들이야 들을 귀가 아직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우리는 어떠한가를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 외의 것은 모든 것이 다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계속하여 피조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라면 그러한 피조물을 섬기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하여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항복하기까지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하신대로 이루어 가시는데 바로가 당하는 재앙과 택한 자의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역하면 거역할수록 재앙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하여 가는 것입니다.

 

 

 

가축의 재앙 다음에 사람의 몸에 독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박입니다. 그 다음에는 메뚜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 드디어 장자의 죽음까지 재앙을 더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그러한 재앙에 결국 항복을 하지만 어떤 항복입니까? 심판을 당하는 항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항복을 받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바로가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였는데 이스라엘은 한 여섯 번쯤 거역하다가 순종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역시 열 번이나 거역한 것입니다. 

 

 


 
민수기 14:22-23절입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도 열 번이나 광야에서 반역을 하였습니다. 사건적으로 열 번이라 하지만 그 사이 사이는 늘 반역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누구는 들어갑니까? 갈렙은 들어갑니다. 갈렙이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좇은 자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구원받지 못하였나요?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나중에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별세를 말씀하지요? 그러니 그러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거절하자 계속하여 재앙의 깊이를 더하여 결국 항복을 시키십니다. 그런다고 바로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하나님을 반역하는데도, 그리고 재앙을 받는데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요? 불만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환난이나 고난이란 심판의 재앙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끊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한번 해서 안 되죠? 두 번, 세 번, 정신 차릴 때까지입니다. 그리고서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의 말씀에 경성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알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9:8-12  몸을 치심  2001. 5. 6.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10그들이 풀무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독종이 발하고 11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수록 재앙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짐승에게만 악질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사람 몸에까지 독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독종이 일어나고 사람의 몸에도 악한 종기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시기를 풀무에서 재 두 웅큼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풀무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아마 그 당시에 유명한 풀무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풀무를 어떤 신학자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그러한 제단의 풀무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세가 그 풀무의 재를 두 웅큼 가져다가 바로가 보는 앞에서 하늘에 날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풀무의 재가 오히려 자기들의 짐승과 몸을 치는 독종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한다든지 신을 섬긴다고 할 때에는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우상을 섬기는 제단의 재를 하늘에 날리니 애굽 온 땅의 짐승과 사람에게 붙어서 독한 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기가 바로의 술사에게까지 발하게 된 것입니다. 고대의 술사란 마술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병도 치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오지 마을에 들어가면 무당들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배가 아프다 그러면, 배위에 나뭇잎 같은 것을 흔들어 가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술사들 자신이 독종이 발하였으니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할 수가 없을 텐데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을 저는 독종(毒種)이라고 봅니다. 독한 종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섯 번째 재앙의 독종(毒腫)은 독한 종기이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독종이란 독한 종자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독종이면 지금 가축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침을 당하면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 완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란 이정도로 독하고 질긴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항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독종 정도는 견딜 만한 모양입니다. 온 몸이 침을 당한다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2절에도 보시면 일곱 대접 재앙 중에 첫째 대접을 쏟으니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고 합니다. 주님을 반역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즉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독한 헌데가, 독종이 나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의 백성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인하여 독종의 재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서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8-11절을 봅니다. “8○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0○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인간이란 이정도로 독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받고 있으면서도 항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100분 토론에서 보건복지부 장관과 의사협회 회장, 약사협회 회장, 시민단체 대표가 나와서 토론하였습니다. 사람이 아프고 병들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관이 하는 말이 국민이 아픈데 병원비 때문에 병원에 못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결국 자기 밥그릇 챙기는 것입니다. 사회자인 유시민 씨가 끝에 한마디 하기를 “단체는 양심이 없다”라는 말을 합디다. 단체란 자기들의 집단이기심이 있기에 양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단체란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결국 개인도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고 병들면 다 겁을 냅니다. 많이 아프면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이 어떻게 온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온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죽음을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의사가 죽음을 고칠 수가 있습니까? 죽음은 인간이 해결을 못하니 사는 동안 내 몸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기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몸이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마다 몸에 좋다면 무엇을 마다합니까? 온갖 보약에다 보신탕에다 천년기념물까지 다 잡아먹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처음에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란 뜻이 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단지 죽어서 사람의 몸이 흙으로 분해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 즉 흙의 형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이후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가 흙인 것입니다.

 

 

 

창세기 6: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육체가 된 것입니다. 물론 숨을 쉬고 생각하고 문명을 이루어가면서 산다고 하여도 결국은 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관심사가 결국 자기의 몸을 우상화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오래 살까? 그래서 불사약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오래 사는 것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몸을 어떻게 아름답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제일 장사 잘되는 병원이 성형외과입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어떻게 성형외과가 잘 되는냐 하면 남자도 외모가 잘 생겨야 취직도 잘된다고, 남자들까지 성형수술을 하니 장사가 더 잘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몸을 육체라, 겉사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하시겠지만 성경은 영혼과 육체라고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입니다. 영은 순수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플라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속과 출처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모든 사람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여진 것입니다. 만약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파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골로새서 1:15-16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이 몸에만 관심을 가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직도 옛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있기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기에 창기와 합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몸이라는 의미에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관심사가 내 몸의 편리와 유익만을 생각한다면 아직도 우리가 옛사람, 겉사람, 흙에 속한 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반드시 새 몸을 입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옛 사람, 후패하는 겉사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죄악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의 옛 몸, 아담 아래 있는 몸으로 선행을 행할 수 있고 그것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수한 추기경이 도올의 동양학 강의에 초빙되어서 이런 말을 하였는가 봅니다. 기독신문 만화에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도울의 그림. “왜 기독교는 예수 외에 구원이 없다고 배타적으로 단정하는 것입니까?” 김수환의 그림.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만 누구나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직도 흙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가톨릭의 구원사상이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조금 이지러져있기에 조금만 손을 보면 스스로 신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전에도 말씀을 잠깐 드렸지만 이것이 얼마나 흙에 속한 사람들에게 듣기에 좋은 말입니까?

 

 

 

결국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몸을 믿는 것입니다. 몸으로 행하는 착한 일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있는 증거들입니다. 오직 자기의 배를 섬기고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선한 행실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몸을 우상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신의 몸의 행실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디도서 3:5절을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이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거듭나게 하심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거듭난 자는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은 이제 무엇을 위하는가 하면, 빌립보서 1:20절에서는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의 몸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인지 욥기서를 봅니다.

 

 


 
욥기 2:1-10절. “봉독”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하나님이 자랑하시자 사단이 재산을 치면 그렇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몸은 손대지 말고 나머지는 허락하시니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가 다 날아가지만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원망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 몸에 정말 독종보다 더한 악창(惡瘡)이 난 것입니다. 기와 조각으로 긁고 있는데 아내는 그런 하나님 욕이나 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심하게 몸이 침을 받았는데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몸의 침을 받고서도 항복하지 않는 것과 비교해서 욥이 몸이 침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몸이 약하고 병이 들었습니까?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약한 몸을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와 같이 강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면 우리의 몸이 건강하든지 약하든지 간에 우리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빌립보서 3:17-21절을 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아멘.

 

 

 

 

 

출애굽기 9:13-35  우박 재앙  2001. 5. 13.

 


여섯 번째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독종(毒腫)이지요. 짐승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독한 종기가 나는 그런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얼마나 독종(毒種)입니까? 그런데 바로만 그렇게 독종입니까? 바로는 지금 몇 번째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까지 포함하여도 8번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몇 번 들었습니까? 일주일에 한번만 교회에 나와도 52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그러니 누가 더 강퍅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가운데도 있지만 애굽의 백성들 중에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종들과 짐승들을 들판에 내어 놓지 않은 자들은 살았습니다. 애굽의 백성들도 일곱 번째는 말을 듣는데 오늘 우리는 일곱 번을 일흔 번도 더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얼 그리 순종하지 않는가 하고 싶으시겠지만 출애굽을 보면서 출세상을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집부리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까? 

 

 

 


 
지난주 100분 토론에서 학교 교육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제는 한번에 끝내는데 이것은 세 번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면 그렇겠습니까? 그중에서 어떤 학부모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학교에 보내는 것은 인간되라고 보내는 것인데 사실은 좋은 대학 가게 만들어 주기를 더 바라고 있다는 말을 합디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지요. 상식을 갖추고,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여 가르치는 것이 공교육의 목표인데 그보다는 쪽집게 식으로 잘 가르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고 있는 한 교육문제는 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의 교과서 내용이 아이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상식선에서 바르게 자라도록 배우는 내용인데, 그 내용보다 점수를 얼마나 받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과 내용이 얼마나 바른 인간을 만들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인데, 이러한 이념이 실현되는가 하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저 내 아들 좋은 내신 성적으로 좋은 대학 합격하는 것이 유일한 바램인 것입니다.

 

 

 

그러니 학교에 맡기지를 못하고 수 십 만원, 수 백 만원 들여서 사설학원에 보냅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일해서는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뇌물을 받고 정당하게 일하여 정당한 가격을 받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눈속임을 하여서 수익을 잡으려고 하고 있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입니까? 여기에서 참으로 자유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내가 정당히 일함으로서 받은 수입으로 자녀를 과외시키지 못하여 다른 아이들보다 성적이 떨어지면 그것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하면서 남편의 적은 월급봉투가 한스럽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대부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출애굽이라는 말씀이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그렇다고 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야 하는 것이 종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기에 오늘도 출애굽하자고, 출세상을 하자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지금 몇 번째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예고 없이 재앙이 내린 세 번째와 여섯 번째의 재앙을 제한다고 하더라도 다섯 번이나 됩니다. 본격적인 재앙 이전의 말씀까지 합하면 일곱 번입니다. 일곱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바로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왜 단번에 끝장내시기 않으시는 것입니까? 단번에 끝장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손을 펴서 온역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한번에 끝장내실 수도 있으신데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단번에 심판하여 버리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알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도록 하기 위하여 점차적으로 심판을 행하신다고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그리고 16절입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이러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냥 좋아라, 하고 있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런 꼴을 당하구나, 역시 온 천하에 하나님 같으신 분은 없구나,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그만을 섬겨야하는 것을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이 간간히 구원에 참여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볼 때에 애굽 백성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약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의 복입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과 같이 봅니다만 출애굽 상황에서 우리는 애굽 백성에 자신을 대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이번에 내릴 재앙은 애굽 개국 이래로 이러한 재앙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박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박의 재앙을 피하려면 너희의 생축이나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우박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재앙을 내리시되 예고하고 내립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9-21절입니다.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는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여기서 두 종류로 분리가 일어납니다. 한 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는 자와 그렇지 아니하는 자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여섯 번의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모세가 말하는 그 하나님이 정말 센 하나님이시구나, 그러니 이번에는 한번 그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해보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집부리고 마음이 강퍅하여진 자들은 그대로 들에 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두 편이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우박이 쏟아졌는지를 봅니다.

 

 

 

23절-26절입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23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24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25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26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우박만 쏟아진 것이 아니라 뇌성과 불이 함께 쏟아진 것입니다. 우박 속에 뇌성과 불이 함께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심판 속에서 바로가 항복을 합니다. 자신이 잘못되었고 하나님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그 우박이 사라지자 또 자기 그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원래대로입니다. 이제는 바로를 욕하지 못하겠지요? 그 고집스럽고 독종 같은 인간이라고 욕하시겠습니까? 하시려면 손가락을 자기에게로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 가운데서 뇌성이 함께 발한 것입니다. 뇌성은 히브리어 그대로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소리’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뇌성소리, 천둥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서 살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면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언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이후에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말씀하실 때에 백성들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면 우리가 다 죽에 되오니 모세 당신이 대신하여 듣고서는 우리에게 전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정도의 위력입니다.

 

 

 

출애굽기 19:19절을 봅니다.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기서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의 하나님의 음성이 뇌성입니다. 천둥소리입니다. 그렇게 크고 두려운 음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전하고 있습니까? 모세와 아론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거대한 제국의 파라오 왕입니다. 태양의 아들로 신이라 추앙받는 파라오가 뱀의 모양을 가진 황금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 왕의 홀을 가지고 한번 명령하기만 하면 엄청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십만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있는 지팡이입니다. 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는 양치던 지팡이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뇌성으로, 천둥으로, 불로써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8-3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쫒겨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시는 내용의 기도를 하시니 하늘에서 응답이 되는데 이것이 천둥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타남은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뇌성이나 요한복음의 뇌성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순종한 자는 심판에서 벗어났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을 강퍅케 된 자들은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따라 살면 심판을 받습니다, 라고 말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전도를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심판받을 세상에서 떠날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전도를 합니까?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된다는 말을 한다면 할 수도 있겠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출세상을 해야 한다고, 예수님처럼 땅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에서 배척을 받는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천하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이 책망을 받고 마음이 낮아지고 주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만 이러한 우박의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 구약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17-21절입니다. “17○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21또 중수가 한 1)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출애굽기의 우박재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박의 무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의 한 달란트가 각주에 보시면 약 백 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 근이면 60킬로그램입니다. 이러한 재앙에서 피할 수 있으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됨을 믿으신다면 오늘 밤에라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날마다 탈출을 꿈꾸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0:1-20  메뚜기 재앙  2001. 5. 27.

 

 


일곱 번째 재앙이 우박 속에 불이 함께 쏟아지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시무시한 재앙을 통하여서도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강퍅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표징을 그들에게 보이며, 애굽에 행한 이러한 일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여 이 일을 행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강퍅에 대한 것과,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강퍅에 대하여.
전에 한번 보았습니다만 한 번 더 강퍅을 보고자 합니다. 바로가 강퍅한 것이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신 것이라면 바로의 책임이 아니지 아니한가,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로마서 9장에서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를 말하면서 내가 태중에 있을 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한다고 하십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자가 자기 마음의 원대로 만들 권한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한 그릇이 되지 않음을 인하여 감사할 뿐이지 왜 저 사람은 강퍅하게 만들었는가, 라고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그중에 얼마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하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니라면 죄인을 의롭다 하여 주시는 것도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따지고 공평치 못하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강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강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못마땅한 일이 없습니까? 원망과 불평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지고, 나는 이러한 남편, 아내를 만나 가지고, 저런 자식을 낳아 가지고, 아이고 웬수다, 웬수, 하는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불평과 원망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웃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환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비(謙卑)치 아니하면 계속하여 재앙이 내리는 것입니다. 꼭 열 가지 재앙만이 재앙입니까? 애 먹이는 사람을 옆에 붙여주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낮아짐입니다.

 

 

 

 

3절을 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어느 때까지 네가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마음이 겸손하고 낮아지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강퍅이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관대,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이후에 생긴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기에 모두가 강퍅하여 질대로 강퍅하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오직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우리이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강퍅하여진 마음이 말씀으로 깨어져서 부드러워 지고 낮아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낮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낮추어지지 아니함이 강퍅이고, 교만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미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고, 썩을 대로 썩어 있는데도 계속하여 회칠한 무덤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범죄한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을 통하여 애굽의 살림이 거의 거덜이 났습니다. 짐승이 독종으로 죽었고 우박으로 죽었고, 우박으로 곡식과 나무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다른 말로 강퍅입니다. 이러한 강퍅을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심으로 인간이 어떠한지를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메뚜기 재앙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메뚜기 재앙이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우박 재앙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푸른 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5-6절을 봅니다.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들에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비와 네 조상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메뚜기 재앙을 경고하고 나오자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간청합니다. 지금 애굽이 망한 것인 줄 모릅니까? 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까? 빨리 항복하여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바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자존심이 있지,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신하들이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왔지만 바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러 갈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아직도 다 항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른들만 가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란 어른들만 드려도 됩니다.

 

 

 

출애굽기 23:17절에 보시면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여자나 어린이는 성전까지 올라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릴려면 어른만 가도 되지 않느냐는 바로의 제안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남녀노소, 짐승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가 거절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재산인데 그렇게 하면 재산이 통채로 날아가는 것이 되기에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애굽에서 단지 제사만 드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까지 떠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먼저 떠남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아니함이 메시지가 되는 것처럼 애굽의 상황에서 떠남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이 거절하자 바로가 너희의 경영이 악하다면서 모세와 바로를 쫓아냅니다.

 

 

 

자신이 다 망한 것을 알고서도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지고는 못산다. 어느 광고문구 아닙니까? 이것이 어필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러한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지고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지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끽 소리는 하고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강퍅입니다.

 

 

 

이제 그 강퍅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여 내셨는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육에 관하여
다시 2절을 봅니다.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왜 한꺼번에 재앙을 퍼부으시고 단번에 출애굽 시키시지 아니하시는지를 2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들을 너희의 자손들과 자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출애굽을 행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이러한 강퍅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꺾으시는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도 너희의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교육입니다. 바로만 목이 곧고 강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인 것입니다. 그 목의 힘줄이 놋쇠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목도 얼마나 곧은지 도대체 하나님 앞에 겸손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출애굽의 모든 상황들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만 섬기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6-28절을 봅니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애굽을 여호와께서 치실 때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희가 구원받아 나왔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워서 구원받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서 살아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 당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을 함께 당하지 않은 것은 결국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이 닥치지 아니한 것도 어린양의 피가 소급 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을 당하지 않아도 장자가 죽었다면 애굽과 같은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치 아니함이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 강퍅치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이스라엘에 계속된 가르침으로 전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강퍅하여 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가르쳐야 합니까?

 

 

 

신명기 6:4-15절까지 봅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는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와 같은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95:1-11절을 봅니다. “봉독”  바로의 강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강퍅을 말합니다. 이러한 강퍅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우리에게는 어떻게 말씀합니까? 역시 주님의 말씀에 강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19절입니다. 구약을 한 장으로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ㄱ)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ㄴ)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치 아니함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 가려는 것은 바로의 강퍅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치 아니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길입니다.

 

 

 

 

 

 

출애굽기 10:21-29  흑암 재앙  2001. 6. 3.

 

 


애굽인들의 가장 큰 신은 태양입니다. 태양을 ‘라(R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태양의 아들이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일 동안이나 캄캄한 어두움이 몰려와서는 손을 더듬어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였겠습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로가 모세에게 너희 모든 사람들이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제안한 순서를 보자면, 8:25절.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8:28절. “,,,광야애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 10:11절.  “,,,너희 남정만 가라” 그리고 오늘 말씀 10:24절에서 너희 모든 사람은 가되 소와 양은 남겨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바로의 거절에서 우리의 신앙의 방해와 타협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꼭 멀리 3일길이나 광야로 가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꼭 세상에서 그렇게 구별 나게 해야 되겠는가? 그러니 여름이면 해수욕장에 가서 간단히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장에 가서 근처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지금이 무슨 구약시대냐?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메이면 안 되지, 하면서 결국은 자기 자유를 찾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함께 모여 주를 찬양함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배보다 다른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아직 애굽 안에 있으라는 말에 타협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제사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 그곳이어야 합니까? 애굽을 떠나서 시내산까지 나아가는 거리가 3일길입니다. 왜 이렇게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우리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분리가 일어나야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입니다. 애굽의 사상과 정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소위와 사상에서 완전히 분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왜요? 너무 멀리 가면 갔다가 돌아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을 떠난 듯 하지만 또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너무 세상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멀리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이 아직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언제는 포기한 듯이 보이지만 어느새 또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다리를 걸치고 살고 있으니 세상적인 재미도 없고, 예수 믿는 재미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불쌍한 형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사실은 이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성경이 무어라고 합니까?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 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2:20-21)

 

 

 

그러므로 사람이 멀리 떠나가지 않으려면 차라리 전혀 가지 않는 것이 더 났지 않겠습니까? 원수도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두 번째의 제안인 것입니다.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믿기는 믿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애써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지금 내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 번째로 어린이들이 남고 어른들만 가면 그것은 절반의 떠남입니다. 자신의 혈육이 남아 있는데 제대로 떠난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짐승은 남겨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종과 우박으로 많은 짐승을 잃어 버렸기에 노예들의 노동력은 일부 잃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재산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이 결국 세상의 제안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요구들이 성도들에게 오늘도 동일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네 번째 제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꼭 재물이 있어야 하는가, 그러니 짐승은 다 두고 가서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는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고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면 우리의 소유도 사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소유는 또다시 나의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가 그런 말을 했답니까?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였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따로, 내 재산 챙기는 것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네 번째의 제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일리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제 만 2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는 헌금강조를 안한 것이 아닌가, 제 나름대로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더 무섭다는 말을 하기도 합디다. 전부 주님 것이라는 말로 알아들으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저의 관심은 여러분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의 네 가지의 제안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안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있다는 것이 캄캄한 어두움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3일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애굽에서 제사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3일길이 필요한 것그 자리에 가보아야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물로 요구하실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꼭 3일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면 선택하는 것이지, 우리가 임의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시내산에서 희생의 제사).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제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어떤 제물로 드려졌는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그 영을 받아서 세상과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3일길을 떠나서 제사에 참여가 된 것입니다. 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린 일에 우리가 참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이 성도에게는 무엇으로 보여야 합니까? 어두움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의 시각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루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니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자꾸만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늘도 무어라고 합니까? 비록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풀지 못하는 것은 없다, 라는 것을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그러나 착한 사람이 더 많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이러고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이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곳에서 살수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로 나누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의 죄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와 세상과의 관계도 영원히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 자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는 자와 세상과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 대하여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에 대하여 믿는 자가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실질적이고도 고귀한 지위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은 세상이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던져준 입장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살인자와 그리스도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선택에 당면해서, 살인자는 석방시켜주되,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버렸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두움에 속한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어두움이라고 보지 않고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어두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이 캄캄함이요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들로 사람들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십자가로 보면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위대한 왕과 지혜로운 관리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지기 때문에 나라들마다 애굽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둠의 나라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니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어두움이다 빛이다, 라는 구분은 착한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 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라면 그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매일 그가 행하고 경험하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실현해내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갈라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묶게 되는 것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활로 그러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올리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스림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이쪽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은 어두움이요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쪽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에 있는 자들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간격은 얼마나 큰지 그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과 통하는 길은 주님을 부인하는 경우에 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세상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앞으로도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안에 누가 예수를 믿는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됩니다. 어두움과 빛이 섞일 수가 없는데 지금은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이렇게 계속 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어두움과 빛의 분리가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분리가 더욱 선명하여

지도록 영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캄캄한 세상에서 빛을 발견하였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조문도 석사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세상의 도가 아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듣고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담대하게 세상과 대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1:1-10  마지막 경고  2001. 6. 10.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2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 4○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6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찌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사를 더하리라 하셨고 10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사를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바로에게 마지막 경고를 내립니다. 그 동안 아홉 번의 경고와 재앙 속에서 바로만이 항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모세를 두려워하고 모세가 증거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마지막의 재앙은 바로의 장자까지 치시는 재앙인 것입니다. 장자란 자신의 기력의 시작이기에 자신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로 인하여 애굽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게 되는데 어느 정도로 보내는가 하면 금과 은의 패물을 주면서 쫓아내듯이 보내는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가야 된다는 것을 가지 못하게 막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경고에서는 장자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까지 주어가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강퍅함이란 마지막 재앙의 경고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퍅함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진노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자는 살아남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떤 것은 진노의 그릇이고 어떤 것은 긍휼의 그릇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내는 그릇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진노의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당장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인간은 날 때부터 진노의 그릇이고, 어떤 인간은 긍휼의 그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공개신앙상담란에 질문이 올라온 것 중에 ‘유대인의 억울함’이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답을 하려고 다시 열어보니 지워버렸습디다. 유대인이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왜 그 예수님을 죽인 욕을 유대인들이 들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와 합동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합동으로 죽인 것이기에 모든 인류가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들의 욕심으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을 드러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중에서 어떤 자들은 진노의 그릇을 삼으시고 어떤 자들은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시는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왈가왈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을 죄인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만 그렇겠지만 이미 죄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마치 바로의 권세아래 있는 애굽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좋게 대할 수 있다고 하여도 바로의 권세아래 있기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재앙은 바로의 권세를 직접적으로 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를 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내시고 바로의 권세아래 있던 자라도 이스라엘에 편입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경고에 이은 마지막 재앙이란 장자의 죽음을 통하여 도장을 찍듯이 구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심판이십니다. 아홉 번까지의 재앙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재앙이지만, 자연물을 가지고 재앙을 내리신 것이지만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러 오시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리라” 하나님께서 밤중에 애굽으로 내려가리라는 것입니다. 밤중에 나온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의 절기 중 밤에 일어난 유일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애굽에서 출애굽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나온 것도 역시 죄와 사망이라는 캄캄함 속에서 구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에 친히 하나님께서 애굽에 가셔서 장자를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짐승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애굽 전역에 전무후무한 곡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할 때에 그들은 잔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과 한숨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잔치소리는 통곡소리로 바뀌고 통곡소리를 잔치소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나 짐승에게 어느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안전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는 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고이었고 이 경고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세상도 하나님께서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 계속하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역시 이 세상에 대하여 경고를 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서 이 성이 망한다고 외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경고의 나팔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믿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경고의 나팔을 불겠습니까?

 

 


 
사도행전 10:42-43절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증거한 내용입니다. 누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고 증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하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자와 이미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도 되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산 자요, 예수님 밖에 있으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애굽에 들어가셔서 애굽인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개도 감히 짓지 못하는 안정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물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구별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구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그 심판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여호와의 권세를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지금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 세상에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통곡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기뻐 찬송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출애굽기를 통하여 계시하셨고 또한 선지자들이 증거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그 제자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께서 자기의 종들을 통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리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1:2-3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에게 은과 금패물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0년 동안의 노동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가 무슨 대가가 있겠습니까? 죽도록 고생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으로부터 패물을 받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승리로 인하여 주어지는 전리품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의 모습을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에게서 호감을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고 또한 모세가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심히 크게 보인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할수록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이스라엘의 백성뿐만이 아니라 애굽의 신하와 백성까지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애굽이 진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패물을 가지고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 금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그 승리의 진리품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두 가지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의 금패물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재앙이 임하였습니까?

 

 

 

또 하나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ㄱ)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1)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2)사랑 안에서 3)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출애굽기 12:1-14  해의 첫 달  2001. 6. 17.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4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출애굽의 절정인 유월절이 일어난 때를 이스라엘의 해의 첫 달로 정하라는 말씀이 2절에 있습니다. 출애굽을 하면서 기존의 달력이 있는데 왜 또다시 새로운 달로 시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애굽과의 단절과 새로운 출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날짜를 맞추어서 시작을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꼭 몇 일부터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웁니다. 월말쯤 되면 꼭 첫날부터 열심히 공부하자, 그럽니다. 어른들도 그렇지요. 무슨 계획을 세우면 날짜를 기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날짜와 시간에 메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날짜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월절 사건이 일어나게 되니 날짜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월절 이전의 날짜는 날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누구의 생일도 의미 없고, 결혼날짜도 의미 없는 것입니다. 아주 기념할 만한 날이라 할지라도 아무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날짜들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전후를 기준으로 하여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국가로의 출발입니다.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는 사건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에서는 그 떠남에 있어서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나는 것에 어린양의 피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여놓으시는데 그냥 들여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발하는 것은 독립운동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힘을 키워서 탈출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신이 빠져버리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해의 첫 달로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송구영신’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송구영신을 할 때 자기들의 수치스럽고 잘못된 것들을 흘려보내려고 하지만 좋았던 것들은 그대로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에서는 그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날짜만 바꾸어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사고방식까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기준은 어린양의 피로서만이 기준이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아무른 소용이 없는 곳이 바로 유월절 밤인 것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이력과 경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어떠한 잘못들도 유월절 안에서는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유월절 밤의 기준은 어린양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안에 들어있지 않는 것은 캄캄한 어두움이요 거대한 무덤인 것입니다. 바로가 태양의 아들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나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하니 온통 캄캄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있었기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은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후의 세력은 사탄의 세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들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힘을 가진 나라라고 하여도 이미 사망의 권세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즉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이 있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두 곳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것이 세계최대의 국가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거대한 무덤인 것입니다. 거대한 피라밋이 무덤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망 안에서 어떤 착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여도 결국 자신의 무덤을 꾸미는 수준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공적에 따라 무덤의 규모와 비석이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서 생명의 왕 노릇하는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면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제일 큰 질병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조차 예수님의 피, 죄, 심판, 천국, 지옥 이러한 말들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아래서 만이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말만 하지 말고 우리 인간의 능력도 있으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라는 말보다 우리 서로 착한 일을 합시다.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살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말하는 죄라든가, 그 용서가 유일하게 예수님의 피라든가, 그러한 말을 하지 말고 우리 서로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풍조가 19세기 전 유럽에 만연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가 아니라 도덕의 종교이며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 당시에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회 환경을 바꾸고, 교육을 잘 시키면 괜찮은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너무 죄, 피 이러한 말들을 하지 말고 인간을 믿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설교나 교훈을 원하는 것이 그 당시 유럽의 교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어린양의 보혈에 대하여 듣기 보다는 거저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알아주라고 요구합니다. 세상을 사느라 힘이 들었는데 교회에서 위로하여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태도입니다. 세상사는 것도 피곤한데 교회에까지 와서 또 죄의 고발을 받아야 하니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말을 하지 말자고 서로서로 묵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무언지 고발을 받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무얼 그리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윤리 도덕적으로 무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 때 어떤 잔혹한 일을 하였는지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교육이나 사회적인 프로그램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단체들을 만드시거나 또는 사회적인 복지 프로그램을 만드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만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아홉 번의 경고와 재앙 속에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이미 그 배후에 사탄의 권세가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마귀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우리도 바로처럼 강퍅한 자들이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과 긍휼이 나타나기 위하여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죽음이 피하여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볼 때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오직 그 피를 인하여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피에 어떠한 것도 추가되지 아니합니다. 피만 있다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피를 보고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고 하니 이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만, 이런 뜻입니다.

 

 

 

지금 애굽땅이라고 합시다. 유월절 밤입니다. 똑 같이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발랐는데 한집은 그 피의 언약을 믿고서 아주 평안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한 집은 피를 바르고서도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께서 평안해 하는 집은 살려주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죽이십니까? 아니지요. 무엇을 보고 넘어갑니까? 그 피를 보고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 한집에서는 자신들이 피를 바르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직계혈통이고 나쁜 짓을 하지도 않고 아주 착한 일만 하였다고 피를 바르지 않아도 우리 집은 심판을 면할거야, 하는 집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살려 주었을까요? 아니지요. 피가 없으면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느냐 죽느냐의 관건이 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단지 불안해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아예 바르지도 않은 자라면 자기의 행위를 예수님의 피보다 낫게 여겼기에 이것이 바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에 떨어지겠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무시하고 사는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착한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어떻게 여겼느냐는 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린양의 피에 대하여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29절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모든 구약을 자신의 손가락에 모아서 지목을 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역할을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점도 흠도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나 윤리 도덕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것을 자신의 희생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7절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흘린 피, 그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이 은혜의 피를 증거하시는데 이러한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좀 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 언약의 피를 무시하는 자들이 어떤 형벌을 받을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1:13-2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우리가 구속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수치도 공로도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음으로 해의 첫 달이 되듯이, 새로운 주의 은혜로 날마다 새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2:1-14  유월절의 규례  2001. 6. 17.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4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구약에서 유월절의 정신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에서 제물을 바친다고 하여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잊어버리면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발하는 유일한 조건어린양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길이 어린양의 피아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피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 옆에다가 다른 것들을 추가하여 놓아두지 않습니다. 오직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로서만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유월절의 규례에서 사용될 희생제물은 어린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년된 수컷으로 10일에 취하여 14일에 잡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피는 문인방에,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날것이나 삶아서 먹지 말고 반드시 불에 구워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겨서는 안 됩니다. 혹시 남았다면 불에 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너무 많거나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양 한 마리에 몇 사람이 먹을 수 있을지를 계산하여서 모자라거나 남을 경우에 이웃과 함께 하도록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도록 합니다. 그리고 먹을 때는 허리띠를 띠고, 신발을 신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대략적인 규례입니다. 이 규례들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흠이 없는 어린양입니다. 흠이 없어야 하기에 선별할 때도 잘 보아야 하지만 10일에 취하여 14일까지 집에서 보살피며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피부병이나 신체적인 이상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일 동안 돌보면서 모든 가족들이 왜 이 양을 선택하여 잡아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양을 잡아 먹을 때와 전혀 다르게 준비하면서 유월절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왜 예배를 드리는지 그 의미를 자녀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예배드림이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세상의 복을 받아내는 식으로 된다거나, 벌을 받지 않으려고 액땜을 하는 식의 예배가 되지 않는지 늘 조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빠, 왜 오늘 놀러 안가고 예배당에 가는 거야? 라고 물을 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왜 어린양을 잡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2:26-27절입니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숙여 경배하니라” 이러한 대답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오늘 왜 예배드리러 가야 합니까? 물으시면 시끄럽다, 빨리 가기나 해, 그러십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제대로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유월절 제사나, 신약의 예배이거나 간에 이러한 희생의 의미를 모르고서 제사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하는 것은, 흠이 있어서는 속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대속의 제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아래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남자의 핏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피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였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베드로전서 1:18-23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보배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의 죄가 구속을 받은 것은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된 것입니다. 점과 흠이 있다면 온전한 구속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온전하고 완전한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의롭다 함을 영원히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이미 알려진바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인간이 죄를 짓고 나자 응급조치로 아들을 통하여 구속을 이루어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준비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피흘린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하나도 남기지 말고 피아래 들어있는 사람이 먹어야 합니다. 혹시 아침까지 남았다면 불에 태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 불에 구워야하는가? 날로나 삶거나 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어린양이 불에 굽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제의 제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죄를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고난의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고기가 하나도 썩지 않도록 하기위한 조치로 봅니다. 그 고기가 남겨져 버려지면 땅에서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도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하고 혹시 남으면 불에 태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편 16:10절입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썩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실 것이기에 유월절 어린양의 살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게 하는 조치라고 봅니다.

 

 

 

세 번째로, 그 어린양의 고기를 함께 먹는 교제입니다. 집 밖에는 피가 발려있습니다. 그리고 안에서는 그 고기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사람의 수를 따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는 단지 자기의 가족중심이 아니라 다른 이웃도 함께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 아래에서 형제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 자들, 즉 어린양의 피로 속함을 받는 자들은 당연히 그 속함을 받을 자들끼리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방금 찾아본 베드로전서 1장에서도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취미에 따라 모인 단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끼리끼리의 교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어떠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고 그 피아래 모인 자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둘러앉게 됩니까? 그 피흘린 어린양, 그리고 불에 구워진 그 고기를 중심으로 둘러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 자들은 또한 그 형제들과의 사랑의 교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나, 성도들간의 교제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자란 성령에 의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은 반드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게 되는 것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유일하게 모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모아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질 때 우리의 모임이 거룩한 특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조직, 명성, 교리, 의식을 향하여 모이게 하지 않습니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이나 취미를 따라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인격을 향하여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격은 하늘에 계신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로 모인다고 할 때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도 피 외에 교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와의 교제도 역시 피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하실 집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서 이러한 말씀을 자주 찾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전서를 이미 보았으니 다시 베드로전서 2:1-5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라면 그 모퉁이 돌에 붙어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아픔과 찔림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기초가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안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거룩함을 받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게 됨을 다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교회 안에서 없다면 그거야말로 친목단체나 취미단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가 주의 성령으로 인하여 함께 모인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인하여 충분하고도 완전한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환경이 어렵고, 고난이 겹친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의 기쁨을 빼앗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와 서로 교통하는 기쁨도 빼앗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다른 기쁨을 기대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결국 견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봉사나 구제나 친교나 여가활동들을 교제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러한 것들로 모이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전에 어느 교회에서 집사인데, 갑자기 성당에 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교회보다 성당이 훨씬 사회봉사활동을 잘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가 어린양의 피로 모이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들이 사람 모으기 위하여 계속하여 독서실을 만들고 취미교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유일한 기능이란 세상이 전혀 할 수 없는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곳입니다.

 

 

 

네 번째로,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의 자세입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 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식사법은 기다란 식탁과 의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는 기댈만한 방석 같은 것을 두고서 거기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음식을 먹습니다. 아주 느긋하고 평안한 자세로 먹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때는 당장 떠날 태세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당장 떠날 자세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2:15-20  무교절의 규례  2001. 7. 2.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6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 칠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 17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찌니라 18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9칠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20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찌니라.

 

 

 

유월절 밤부터 일주일간이 무교절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를 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이렇게 말합니다. 무교절이 유월절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교절이란 무엇입니까?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월절 식사가 불에 구운 고기와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 것입니다. 쓴 나물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오늘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여 확인하고 그들의 자손과 자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대대로 지킬지니라” 무교절이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날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어린양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바른 집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를 바른 집안에서는 어떠한 외부의 위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평안,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개조차 그 입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과 함께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누룩 넣은 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무교절 일주일간은 누룩 넣은 떡을 먹지 못할 뿐 아니라 집안에 누룩도 없애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교절의 가장 중요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룩을 없애지 아니하고 누룩이 들어있는 떡을 먹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기에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룩 없는 떡이 무엇을 뜻하기에 이렇게 누룩을 없애라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진노어린양의 피로 넘어간 것입니다. 더 이상 심판과 진노가 피아래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목민인데 이들이 공동체에서 추방이 된다는 것은 거의 사형과 마찬가지의 형벌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룩을 무교절에 철저하게 집안에서 내어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아래 있는데도 계속하여 애굽의 사상과 의식이 박혀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서도 조금만 어려우면 어디로 가자고 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때가 좋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노예로 살지언정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풍부한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애굽의 종이 되어도 잘 먹고 잘 살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가 하는 정신이 애굽의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풍요와 안락한 삶을 얼마나 동경하였을까요? 이러한 누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무교절마다 누룩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누룩만 없애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문자적이고 외식적인 것입니다. 평소에는 누룩 넣은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교절에 누룩이 없는 딱딱한 떡을 먹으면서 자녀가 묻는다고 합시다. 아빠, 다른 날은 누룩을 넣은 부드럽고 맛있는 떡을 먹는데 왜 무교절에는 이렇게 딱딱한 떡을 먹어야 하나요,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면? 자식아, 하나님께서 무교병을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먹지 않는거야,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는지를 전달하면서 애굽의 종살이와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탈출하여 나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굽 나라와 다른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교절은 지켰을지라도 그 내용면에서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교절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애굽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누룩임을 알고 버리라고 하신 것인데 오히려 애굽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보혈을 바르고 나왔는데도 보혈의 능력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누룩을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교절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온통 누룩덩어리입니다.

 

 

 

마태복음 16:5-12절입니다.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2)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가복음 8:14-21절입니다. “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15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3)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습니까? 7병이어로 4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는데 이 떡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을 듣고서 먹는 떡으로 알아들었는데, 예수님은 누룩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두 곳을 보시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는 지파인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무교절을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참으로 철저하게 무교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제일 많이 저주를 받은 집단입니다.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렇게 잘 지키지만 너희의 속에는 누룩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릇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데 밖으로는 종교적인 것들로 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노골적으로 현실적입니다. 천사도 없고 내세도 부활도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실중심입니다. 이들과 함께 하는 자가 역시 헤롯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잘 보여서 왕의 지위를 가지고자 하는 자입니다. 유대땅에서 살면서도 늘 지향하는 것은 로마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의 누룩을 제거하라는 것이 단지 이스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사상, 가치관, 사고방식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의 쓴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의 순전한 능력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변질시키는 누룩들이 얼마나 많이 침투하여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성도란 이미 거룩한 떡에 참여된 자로서 누룩 없는 떡이 되었는데도 계속하여 누룩이 침투하여 들어오는 것들을 왜 방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1-8절입니다.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6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 지역이 여러 가지 성적인 타락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방인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서 이러한 자를 그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교절에 누룩이 들어있는 떡을 먹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하듯이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누룩 없는 한 덩어리의 거룩한 떡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왠 누룩이 들어와서 퍼지게 하도록 내어 버려두느냐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7절처럼 누룩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결국 누룩을 내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을 드러내는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 수많은 누룩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러한 누룩이 들어와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피를 부정하게 여기도록 누룩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교훈과 사상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이 무엇을 증거하는지를 모르고 율법 지키는 것만이 최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지킴은 결국 자기들의 자랑과 자기들의 의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지키는 자기들의 기쁨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외식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얼마든지 이러한 형태가 나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현실 중심적입니다. 기독교의 복이란 전부 영적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께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동일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추구하는 바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8절.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온전한 희생이 누룩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교절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게 된 떡에 붙어있음이 명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여도, 그 보혈의 능력을 찬송하여도, 그 안에서 무엇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그리워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것은 누룩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쓴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르게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쓴 뿌리가 나오지 않도록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피고 교회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4-17절을 봅니다. “봉독” 15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주의하라” 우리 안에 교묘하게 들어오는 누룩과 쓴 뿌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될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룩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을 자꾸만 흐리게 만드는 사상과 교훈들입니다.

이러한 누룩을 주의하시고 날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이것이 날마다 무교절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1-28  무슨 뜻이냐?  2001. 7. 8.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7월 17일이 무슨 날입니까? 노는 날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이 날에 왜 학교가지 않고 노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합니까? 그냥 노는 날이다, 놀아라, 그렇게 답하지는 않지요! 최소한 이 날은 헌법을 만든 날이라는 정도는 이야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8월 15일에 대하여 물어도 어떤 날인지를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였던 일, 그리고 연합군과 일본의 전쟁,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기념일로 정하여 놓았는데 거저 놀러가기 바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란 무슨 절기로 나타납니까? 유월절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달력으로 시작하여 1월달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절기, 칠칠절, 초막절 등이 유월절이 없었으면 있을 수도 없는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기들이 무슨 뜻인지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레위기 23장을 봅니다. 23:3절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이 안식일에 대하여서는 이미 몇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23:4-8절입니다. “봉독” 유월절과 무교절의 규례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한 주간 무교절이고 첫날도 성회요 칠일 째도 성회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성회로 모이는 날은 무조건 안식입니다. 일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아니함이 왜 안식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입니까? 창조나 구원의 기념일이 모두 성회가 되고 쉬라고 하신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 홀로 이루신 것이요 이러한 안식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23:9-11절입니다. “봉독” 초실절이라고 하는데 유월절이후 첫째 안식일이 지나서 첫 곡식단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회로 모이지는 않습니다만 이 처음 열매를 여호와께 드리기 전에는 어떤 것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23:15-21절입니다. “봉독” 오순절입니다. 초실절부터 칠 안식일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여름추수를 하는 때이기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날도 역시 성회로 모이고 안식합니다.

 

 

 

23:26-32절입니다. “봉독” 이 날은 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이라고 부르는데 이 날은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입니다. 속죄의 의미를 알게 하는 날입니다.

 

 

 

23:33-44절입니다. “봉독”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가을추수를 하여 저장한다고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막절도 43절에 보시면 애굽에서 나와서 초막에 거한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의 의미보다는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기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반복하여 확인하고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절기를 단지 맥추감사와 추수감사로만 기억하여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원래의미는 맥추감사나 추수감사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즉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맥추절, 추수감사절이라고 지켜왔습니까? 그것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에 농경사회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농경사회에서 수입이라는 것이 보리농사와 가을 쌀농사가 주가 되기에 그때에 교회에 보리 가마도 가져오고 쌀가마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시화 된 곳에서는 그러한 의미도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절기가 무슨 뜻이냐고 신약적으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유월절 다음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누룩 없는 절기란 이미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나서 무슨 절기입니까? 초실절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을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10일이 지나서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신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초실절을 계산하여 칠 안식일을 계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오순절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에게 남은 것이 상징적이지만, 초막절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장막에 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주님과 함께 친히 거하시는 그날까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을 시멘트라 생각하지 마시고, 초막이라고 생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옥상에다가 초막을 가져다가 임시 처소를 만들어 몇 일을 지내시든지.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절기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일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쉬는 것입니다. 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안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묻습니다. 아빠, 왜 이런 예식을 행하면서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그 뜻을 물으면 아버지가 성실히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유월절 규례를 반복하면서 몇 가지 더 세부적인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어린양의 피를 뿌릴 때 우슬초 묶음으로 뿌리라는 것입니다. 우슬초란 쉽게 구할 수 있는 풀입니다. 이러한 풀을 묶음으로 하여 그 우슬초에 피를 발라서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라는 곳이 있습니다.

 

 

 

시편 51:7절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또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나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서 이 시편이 나온 것입니다. 우슬초로 정하게 하소서, 단지 우슬초로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우슬초에 발려진 희생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로 인하여 죽은 하나님의 거룩한 용사 우리야처럼 희생당하신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정결케 하소서,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마다 유월절을 행하면서 무엇을 기억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구원 받은 그 유월절 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현재화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구원을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우슬초로 정하게 하소서, 하면서 12절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의 즐거움이 없다면 무언가 가리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주님의 보혈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서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자기의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피를 바른 집에서 아침이 되기까지 한사람도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출애굽의 밤에 나오게 됩니다만 새벽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그것은 누가 지나가기까지 입니까? 여호와의 진노를 행하는 천사가 지나가기까지 그 집안에서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가 시행될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어디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길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예수의 피이고, 나중에는 그러한 피 말고 다른 것으로, 더 멋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조차 떳떳하게 나가고 싶어 하는 유혹들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피가 발린 집안에서 벗어나서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심판이 임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피아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할 복음의 제목예수의 보혈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러한 유월절의 뜻을 자녀들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2:26-27절입니다. “봉독”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유월절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라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이방 나라와 다를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이 정신, 어린양의 피를 보고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넘어갔다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게 되면 어떠한 제물이나 제사라도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8-10절입니다. “8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9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출애굽기 13:11-16절입니다. “11○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12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찌니라 14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쌔 15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16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찌니라

 

 

 

신명기 6:20-25절입니다. “20○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21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23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25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

 

 

 

유월절의 절기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가 우리에게 왜 예배를 드리는가, 왜 예수를 믿는가, 라고 물을 때 대답하실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목사님에게 물어보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렇게라도 하신다면 감사하지요만은 그러한 질문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세상의 것들만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자녀가 십자가의 의미를 물어올 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 자녀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도 우리가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한 담대함과 넉넉함과 자유함이 우리에게서 보입니까?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우리의 가진 소망의 이유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지 말씀하시겠습니까?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소망에 관하여 물을 사람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17절을 봅니다. “봉독”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2:29-36  여호와의 밤  2001. 7. 15.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유월절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출애굽이 시작되는 날이지만 애굽은 멸하는 자에 의하여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밤을 42절에서는 “여호와의 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봅시다.29절입니다. 밤중에, 밤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오늘날은 전깃불로 밤을 밝히니 밤에도 대낮처럼 일하게 되지만 옛날에는 밤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도 밤에는 쉬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해볼 수 없는 밤중에 멸하는 자가 왔습니다. 23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때 멸하는 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입니다. 이러한 멸하는 자가 애굽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멸하는 자가 어디는 넘어갑니까?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은 넘어갑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가 없는 집은 바로왕의 아들로부터 감옥에 갇힌 죄수의 아들까지, 11:5절에 의하면 맷돌 뒤에 앉은 여종의 장자까지와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밤중에 애굽 전역에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의 죽음 앞에서 왕이거나 죄수이거나 여종이거나 아무른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왕이라고 봐주고, 죄수라고 봐주고, 가난한 여종이라고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진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다 할지라도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덧입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던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한번도 남에게 해코지 한 적이 없이 착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양의 피아래 있으면 그 사람이 왕이거나 죄수이거나 종이거나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른 차별이 역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밤에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멸하는 자에 대하여 한 곳을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무엘하 24:15-16절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섰더라” 이 말씀을 보시면 멸하는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입니까? 다윗이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군대를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상태가 바로 애굽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9장에서는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명이 여호와의 사자에 의하여 전부 시체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가 쳐들어 와서는 아주 교만하였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자기들의 힘이 강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교만하여 큰소리치다가 자고 일어나 보니 18만 5천명이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왕만 살아 돌아가서 자기 신에게 엎드렸을 때 자기 아들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멸하는 자는 이스라엘과 이방이라는 민족적인 특성을 따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가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는 교회 다니고 있으니, 그래도 내가 몇 년을 예배당에 나오면서 그동안 내가 한 것이 얼마인데, 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거나 자기의 공력이 자랑이 된다면 역시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르지 않아도 된다는 교만하고 건방진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30절입니다. 장자가 죽고 나자 바로 왕이 항복을 합니다. 무조건 항복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버텨왔던 고집들이 장자의 죽음 앞에서 다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원하는 대로 다하라, 주를 섬겨라, 그리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여 달라고 합니다. 드디어 왕이 항복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백성들도 항복합니다. 어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들의 금과 은과 패물들을 내어주면서 어서 나가라고 합니다. 이미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3-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말씀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성취하는 핵심이 어린양의 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린양의 피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요한계시록을 한번 봅니다.

요한계시록 5:12-14절입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나님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이제 모든 역사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출애굽의 구조가 오늘날의 구원을 그대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밤이라는 것입니다. 캄캄함, 어두움에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1-3절에 보시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흑암과 혼동의 세계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역사처럼, 구원의 역사도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종에서 자유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바로 왕의 권세를 깨뜨리고 나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오는 밤의 절정, 핵심이 어린양의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를 믿는 것이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날도 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도 겨루는 야곱인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밤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야곱은 평생 절뚝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여호와의 밤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군대로 창조되는 것은 여호와의 밤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41절에서 “여호와의 군대”가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은 애굽의 노예 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란 무기를 잘 갖추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아래 있어야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무기로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 20:28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무기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무기가 되는 것이고,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참 빛을 모르고 앉아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심으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살림을 받은 자는 어떤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유월절을 지키고 누룩 없는 무교절을 일주일간 지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어린양의 능력을 무시하는 온갖 세상의 누룩들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누룩 없는 떡을 가지고 나옵니다.

 

 

 

출애굽기 12:34절을 봅니다. “백성이 발교 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유월절 다음날 무교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여행에 나서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향한 순례의 길에 나서는 것입니다. 무엇이 일어나야만 되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밤에 하나님의 심판을 어린양의 피로서 대속함을 받고 난 자들은 무교병을 들고서 여행길에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삶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길이 결코 무미건조하거나 딱딱한 빵을 먹는 것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삶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왔습니다. 오늘 성도의 삶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간 일하고서 일요일 하루는 마음껏 즐기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일요일도 아침부터 밤까지 온통 예배당에 모여서 무슨 재미가 있는가,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것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 긴장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2:42절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서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는 이 여호와의 밤을 잊어버린 사실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밤을, 유월절을 지킨다고 하여도 그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잊어버렸을 때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어떤 날입니까?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신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11절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1)주시리라

 

 

 

 

우리가 열매가 없는 이유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도외시 하고서 나의 힘과 의지와 결단과 결심으로 일하려고 하니 억지 열매, 육체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더욱 우리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이 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캄캄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의 여호와의 날을 그렇게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그 재림의 날이 영광의 날이 되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밤을 기억하면서,,,

 

 

 

 

 

 

출애굽기 12:37-51  여호와의 군대  2001. 7. 22.

 


37○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년이라 41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 46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47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찌니라 48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였으며 51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통과하여 출애굽함으로 이제 여호와의 군대라고 합니다. 군대라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 군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전쟁을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불러내신 것입니까? 그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정신이 없는 세상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가나안의 죄가 단지 윤리 도덕적인 죄만이라고 본다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공격하여 진멸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하며 원망하며 불신을 하였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은 어린양의 피아래, 즉 유월절 정신이 있었기에 다른 가나안 민족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은 세상의 힘을 가지고 하는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첫 성 여리고를 정복하기 전에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받게 합니다.

 

 

 

여호수아 5:1-15절입니다. “봉독” 할례, 유월절, 하나님의 군대장관. 이것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지금 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성인이 돌칼로 생식기 끝을 자르고 낫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다함께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칼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와 유월절을 지켰다고 우리는 여호와의 완전한 군대라고 자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또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편도 아니고 가나안 사람의 편도 아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앞장서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여호수아 15장의 내용입니다. 즉 가나안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호와의 군대가

유월절 밤을 통하여 만들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란 두 가지의 구성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할례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면 다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군대가 나서는 길에 누가 함께 따라 나오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2:38절을 봅니다.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행하였으며” 중다한 잡족이 함께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애굽이 유대사람들만 종으로 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서 자기의 종들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들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에는 애굽의 종살이 보다는 자유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중다함 잡족이 함께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도 여호와의 군대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군대에 참예하려면 무엇을 행하여야 합니까?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대가 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여야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인데 할례는 무엇입니까?

 

 

 

이미 창세기에서 할례에 대하여 보았습니다만 다시 한번 정리를 합니다. 최초로 할례를 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지요.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전에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후손이란 사람의 행위가 들어간 그러한 이스마엘 같은 자식이 아니라, 온전히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 나서 이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사람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되어진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사라의 태가 닫혀 있었고 이미 폐경기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너의 생식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오는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43-49절에 보시면 이방인이 유월절에 참예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안 됩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종으로 산 자는 할례를 받게 한 후에 유월절에 참예가 됩니다. 그리고 타국인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면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본토인처럼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방인도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데 참예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할례를 통하여 옛 인간의 혈통, 인간의 가치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방식들이 모두 단절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고 인정하는 자만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이 되지 않은 자들이 광야에서 계속하여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집단적으로 모세에게 대들게 만들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형식적인 할례를 행하였을지 몰라도 그들은 아직 애굽에서 단절이 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애굽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이 볼 때는 이방인이요 잡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나의 육정, 옛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할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 행위, 방법들을 다 잘라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라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단절되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난 자는 무엇을 믿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낮아진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 분이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임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할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에 붙들려 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을 봅니다. “1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두움의 일에 대하여 살아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 위하여 구약에서 유월절을 통과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서 유월절에 참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월절과 할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유월절 규례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12:46절입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밖으로 내지 말고, 라는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찬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을 세례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아는 자만 그 고기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곧 세례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님의 몸이 된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못하게 한 것이 성취되는 것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9:31-37절입니다. “31○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이 일이 이룬 것은 ㄷ)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또 다른 성경에 ㄹ)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다리가 꺾이지 아니함이 출애굽기 12:46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뼈가 꺾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심으로 그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자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를 받아야 유월절에 참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우리도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그러면 어떤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까?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것은 결국 애굽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믿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면 몸은 할례를 받았다고 할지 모르나 여전히 잡족의 근성과 습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아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는 온갖 즐길 것들이 많았는데 이제 말씀만 듣고 가려니 밋밋하다는 것입니다.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군대로서 무엇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싸움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 하였지만 그들이 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았는가 아닌가 하는 차원의 질문을 하지 마시고 오늘 내가 과연 주님의 군대로서 제대로 싸우고 있는가를 질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2:4-5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우리의 싸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것을 더 가지기 위한 싸움입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한 싸움입니까?

 

 

 

 

 

 

출애굽기 13:1-16  장자의 대속  2001. 7. 29.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4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5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6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7칠일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너희 곳에 있게 하지 말며 네 지경 안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도 말게 하며 8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9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지금 아프리카에 수많은 어린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에이즈에 감염이 되어 태어나고 있습니다. 에이즈로 부모를 잃는 아프리카 어린이가 1,600만 명이고, 남아공 임신여성의 태아 사망자 수 1/3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전세계 에이즈 바이러스 어린이 감염자 80%가 아프리카 주민이랍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도 방영이 되었지만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에이즈 감염이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이 들었고, 자기의 의지대로 살지도 못할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 안타깝게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만든 신에 대한 분노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들이, 옛날 같으면 신의 뜻이려니 하였을 것입니다. 제 먹을 것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면서 생기는 대로 낳았고, 물론 피임법도 없었지요! 그래서 보통 열명 가까이 낳아서는 몇  명 정도는 일찍 죽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정신이라는 게 ‘복음묵상’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이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으로 태어나면 평생 종이고, 양반으로 태어나면 평생 양반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대는 그러한 구별이 없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쥐고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떠난 진리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떠난 진리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대학들에서 철학과를 없애는 것입니다. 장사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발버둥을 쳐도 죽는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죽는 것도 죽고 싶지 않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자유의지를 말한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출생과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겸손하여야 할 것인데 오히려 출생과 사망도 마음대로 조절하여 보겠다고 수천억의 돈을 들여서 사람의 유전인자를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으면서 성경에서 살고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세상이 볼 때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겠습니까? 얼마나 의지가 약하면 보이지도 아니하는 신을 믿는다고 그러는가?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든, 세상 사람들 50억의 인구가 다 거부하든 말든 간에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운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로 죽지 않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므두셀라는 무려 969세를 살았지만 그 결국은 죽었더라, 입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든지, 건강하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든지 간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생의 성공이니 복이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쓰레기더미에 불과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 또 유월절을 말씀하시고, 무교절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또 무슨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지를 보면,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짐승도 첫 새끼의 수컷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 중에 양이나 염소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생축은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드리지만 그러나 나귀 같은 짐승은 바로 드리지 못하니 어린양으로 대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할 양이 없으면 그 목을 꺾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귀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에 자신의 운명이 달린 것입니까? 대속할 양이 있는가 없는가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나귀가 아름답고 튼튼하냐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할 양만 있으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유월절 밤에 모든 애굽의 처음 난 생축이 죽어갈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생축이 죽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까지 이러한 규례를 행하시는 것은 결국 짐승을 가지고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이란 왜 자기기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을 운명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태어나고 보니 죄의 종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이것이 애굽에 있던 바로의 장자나 모세의 장자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빈부귀천이 차별이 없이 죽음이란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부하여도 지름길로 먼저 달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신의

장자로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23절에서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장자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삼아서 자신을 섬기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살아난 것은 자신들이 잘나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물론 그 살아나는 유월절 밤에 어린양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운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무교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자식들에도 전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들 됨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7-9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누룩을 없애는 것을 자식에게 보이라, 그러면서 이것을 손목에 매고 미간의 표로 삼아서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소매깃에 말씀구절을 매어 달고, 이마에도 말씀구절을 넣은 조그마한 상자를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으로 지키는 것은 사실 유월절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되지만 대속하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받는다는 것을 모세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유월절 정신은 잊어버리고 그것을 지키라고 한 율법의 조문만 철저하게 지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유월절을

통과하여 나왔으니 이제는 애굽의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이란 오늘날 세상의 시대정신과 같은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되는 나라입니다. 힘만 있으면 출세가 보장이 됩니다. 얼마나 거룩하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힘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내지 않으려고 아홉 번의 재앙 속에서도 버티는 것은 노예란 그들의 재산입니다. 그들이 빠져나가면 힘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빼어버리라는 것무교절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함께 늘 강조되는 것이 무교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합니까? 누룩은 내어 버리는데 애굽의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의 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창과 칼과 금과 은이 그들을 지켜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거와 군사와 금과 은을 비축하였지만 그러한 것들이 오히려 적에게 몰수히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열왕기 상하에서 아주 상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그 많던 병거와 금과 은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율법이 금한 세 가지를 다 가졌습니다. 군사력, 경제력, 많은 아내를 가지지 못하게 율법으로 규정하였으나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였습니다. 말과 병거는 애굽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누룩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누룩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솔로몬 사후에 남북으로 나뉘어지고 나서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는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몰수히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니 그 누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애굽이 와서 다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처음 난 것을 대속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 난 것을 모두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러한 장자의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3:13-16절입니다. “봉독” 짐승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대속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속도 역시 자녀들에게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찜이냐 하면, 출애굽의 그 유월절 밤을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강퍅하여 그들의 장자를 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아났단다. 그러므로 그 장자는 여호와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란다, 하고서 이것도 손에 미간에 붙여서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손에, 이마에 붙여서라도 기억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살고 죽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 정신을 잊어버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절과 처음 난 것의 대속을 통하여 계시하는 바는 이것을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하였으면 이제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왜 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들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자신들이 실력이 좋아서 가나안땅을 차지한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가 그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아야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특한 생각인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무엇을 잊어버리게 되는가 하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우리교회에서 이 정도의 일을 하는데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날마다 손목에 기호로 삼고 이마에 붙여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무교절과 장자의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오늘날의 적용을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늘도 성도가 주의해야 할 것이 세상의 누룩입니다. 세속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들을 성도나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세속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경건이란 금식이나 철야가 아니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야고보서 1: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장자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대표성이 있습니다. 물론 장자가 직접 죽는 것이 아니라 대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자의 대속을 짐승으로만 하지 않고 한 지파를 장자로 만들었습니다.

 

 

 

민수기 3:11-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다 죽어야 되는 날에 여호와께서 어린양의 피로 구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처음 난 장자의 대속으로 어린양의 대속이었는데 여기서는 짐승이 아니라 레위 지파가 대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땅에 기업이 없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제사로 인하여 다른 형제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인 것입니다. 짐승에서 사람으로 그 역할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음 난 것의 대속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장자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장자로 부름을 받은 자기의 백성을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희생이 됨으로 참된 맏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는 양자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 반드시 죽어야 마땅한데 죽어도 다시 사는 이러한 영생을 어떻게 받았는가? 그렇구나, 대신 희생하신 분이 계시구나, 하고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결국 말씀을 읽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마땅히 진멸 받아야 하는 자였는데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날마다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정신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죄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가 아니야, 그래도 네가 이 정도로 지내는 것은 다 너의 노력이 들어간 것이야, 만약 네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겠느냐고 우리를 부추기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본성상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자꾸만 주님을 우리의 중심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사고방식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면 갈수록 사람의 힘과 애씀과 열심은 나오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0:1-18절입니다.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ㄱ)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1)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ㄴ)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대속을 하게 하셨습니다. 짐승도 아니요, 레위지파도 아니요, 오직 한 몸으로 제사를 드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3-24절.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우리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오직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뿌린 피로 인한 것임을 한시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3:17-22  구름기둥 불기둥  2001. 8. 5.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1. 돌아가는 길


드디어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벗어나서 각 지파별로 대열을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로 나왔습니다. 목표는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 당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지중해 바닷가로 길이 있습니다. 무역상들이 다니는 잘 알려진 길로 가면, 걸어서 일주일이면 가나안땅에 도착할 수가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름길이 있는데 돌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그 지역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블레셋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국경지역이기에 애굽의 수비대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오기는 하였지만 전쟁을 보면 애굽으로 돌아갈까 해서 미리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수비대만이 아니라 블레셋도 얼마나 강력한 싸움꾼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는 군대가 블레셋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리 길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감당치 못할 길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인도하시매”라는 말씀과 21절에서도 “인도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새벽에는 구름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길이 편하고 좋은 길일까요? 힘들고 어려운 길일까요?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니 편안하고 좋은 길일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평안히 가나안까지 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구원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도받는 광야길은 좁은 길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예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이란 길이 없는 곳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길이 없기에 날마다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온 길의 경험을 가지고 나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어제까지의 인도이고 오늘은 오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이 없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주님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6절에서 이 길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러한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을 이렇게 인도하시듯이 오늘날 주의 백성들도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에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 일이 왜 그리 꼬이고 막히고 안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잘 되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오히려 나의 계획과 목표들이 오히려 잘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지름길이 있고 보이는데도 꼭 빙빙 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몇 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를 믿고 나니 십년이 되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다른 사람들이 몇 년 만에 이루어 낼 것을 도움을 받아서 한두 해만에 이루어 낼 줄을 알았는데 오히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도 왜 이렇게 일이 안되는가 하는 일들이 없습니까? 경험하셨거나 지금 그러한 상황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데, 조금만 힘써 주시면 일이 착착 진행이 될 텐데, 왜 이렇지, 내가 헌금을 덜했나? 정성이 부족했나? 기도의 잔이 덜 찼나? 이러한 생각들이 드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만 그러한 생각들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우리는 스스로의 길이 막혀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길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이 땅에서는 사막이요 광야입니다. 어디로 가도 그곳은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그늘도 없는 메마른 땅입니다.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 외에는 아무른 소망이 없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길로 돌리시는 이유입니다. 만약 지름길로 가는 길이 있어서 그 길로 갔다면 이것은 주님께로 가까지 가는 길이 아니라 애굽으로 가는 길로 달려가기 때문에 막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구름기둥 불기둥


21-22절. “봉독” 여호와께서 앞서 행하시고 그 인도하심이 떠나지 아니하심. 구름기둥 불기둥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기둥이 밤에는 불로서, 낮에는 구름으로, 새벽에는 불구름으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막을 만들고 나서는 성막위에 구름이 머물면 그대로 머물러야 하고,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머무르고 싶다고 머물 수도 없고,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도가 있다면 편하고 좋은 길이어야 하는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히려 길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갔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가면 만사형통하고 무엇이나 잘되고 성공하고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 오히려 그 인도를 받아서 가는 길이 고생스러운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도들에게도 가장 심각한 질문일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오는데도 이렇게 일이 풀리지 않는가 하는 고민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교회는 예수만 믿으면 무엇이나 만사형통이라고 하던데 어찌 된 셈인지 만사형통은커녕 만사불통이 되니 이게 왠일 일까 하는 고민이 되지 않으십니까? 그럴 때 대부분 상담을 하면 처방을 해줍니다. 기도를 하라. 금식을 하라. 성경을 읽어라. 그리하여 어떠한 조건이 채워지면 일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불신앙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일 정탐한 일수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신명기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8:2-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일부러 길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길이란 예측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장래에 대하여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측가능한 것들을 생각하고서 미리 미리 대비를 합니다. 마치 노후 보험설계를 하듯이 예측을 하고서 살려고 합니다. 과거의 경험들을 비추어 보고서 장래를 대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홍수가 난 곳에서 대비를 하려고 강둑을 높였는데 그러나 집중호우로 강둑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둑도 짓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까? 하고서 질문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고 산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부자의 장래계획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재물이 있으니 창고를 늘리고 이제 평생토록 먹고 살만큼 되었으니 이제 내 영혼아,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 할지라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내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너무 장래에 대하여 대비를 철저히 하게 되면 주님의 인도를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구름기둥 불기둥이 없는데 어떻게 인도를 받습니까?

 

 

 

그것은 로마서 8: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되고,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의 인도함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수사에 대한 것, 장래에 결혼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이러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든 아니하든, 사업을 잘하든 못하든, 우리 안에서 얼마나 주님의 인도를 받고 사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길이 잘 열려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면 나의 일들은 자동으로 잘 풀린다는 그런 세뇌를 받아왔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마게도니아로 가게 되었고,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다 가게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도들도 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난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이 도리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내가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차질 없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그러한 생각과 계획들을 무너뜨리면서까지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여 저런 고생을 한다고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빈틈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인도를 받지 못하여 그렇고, 고생 없이 평안하게 잘 살면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렇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았습니까? 한량없이 성령을 받으셔서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도하심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얼마나 죽도록 고생을 하였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고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줄을 끊음으로 하나님의 언약만을 바라보게 하시는 인도하심입니다.

 

 

 

3. 요셉의 해골.

출애굽기 13:18-19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무엇을 챙겨서 나왔습니다. 요셉의 해골입니다. 미이라로 만들어 진 시신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요셉이 창세기에서 이미 말하였습니다.

 

 

창세기 50:24-25절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것은 요셉의 유언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고생 끝에 성공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러한 애굽에서 출애굽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내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맹세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출애굽하면서 챙겨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소원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땅에 들어가는 소원이 여호수아 24:32절에 이루어집니다. 여호수아서가 끝나는 것이 요셉의 해골이 묻히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일을 히브리서 11:22절에서는 믿음의 일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오늘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보내셔서 인도하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애굽 같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로, 길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빈틈없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를 받고 사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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