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공 상희 2009. 5. 6. 12:07

 

 

 

 

 

 

 

호세아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호세아 1:1-9  호세아의 결혼  2002. 1. 16.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3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1)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2)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보고자 합니다. 수요일은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호세아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호세아서, 그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때론 아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로서 정절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미 음란하여졌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멜과의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심판만이 아니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야 하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우선 호세아의 시대적 배경을 보고자 합니다. 유다의 왕으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입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인데도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남쪽 유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왕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하면서 남쪽 유다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초대 왕이 여로보암이었기에 이 왕을 여로보암 2세라고 합니다. 이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북 이스라엘이 아주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대한 만큼 타락도 엄청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호세아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음란한 이스라엘을 그대로 심판하여 버리시지 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음란한 여인이란 아주 상습적인 음란한 행동을 하는 창기와 같은 자입니다. 또 신전 창기일 수도 있습니다.

 

 

 

호세아 4:13-14절을 봅니다.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가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행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패망하리라"

 

 

 

이스라엘 온 땅이 우상숭배로 가득 찬 것입니다. 곳곳마다 신전들이 즐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에 호세아는 선지자로서 정결하고 깨끗한 신부를 맞이하여 그 시대에 경종을 울려야 할 텐데 어떻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결혼을 하여도 처녀와 결혼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레위기 21:13-14절에서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찌니라 과부나 이혼 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찌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어긋나게 하시면서까지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리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의와 사랑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행하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팔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대로 시행하신다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만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합니까?

 

 

 

시편 85:10절을 봅니다.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다"는 말씀입니다.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대로 시행하자면 긍휼이 숨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려면 진리가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가 시행이 되려면 화평이 보류되어야 합니다. 공의대로 시행하려면 화평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자리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공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하여 주시고 결혼하여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대로 용납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심판을 행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셔서 결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이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4절입니다. 고멜이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르엘은 ‘흩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한 왕자라는 복된 이름이지만 이스르엘은 흩어버린다는 저주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아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으로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르엘은 아합 왕가가 진멸당한 곳입니다. 예후가 아합 왕가를 몰락시킨 곳입니다. 그 공로로 예후의 왕위가 4대 동안 이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로보암 2세는 예후의 3대째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후를 벌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후가 겉으로 표명하기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제거하여 나간 것입니다. 바알은 부수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여로보암 1세가 섬기던 금송아지 숭배의 죄악에서는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왕하10:16,28-29)

 

 

 

그러므로 호세아의 아들의 이름이 이스르엘이 되는 것은 흩어버리는 것인데 단지 예후의 왕조만을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흩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최고의 번영기인 여로보암 2세 때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예후의 집안은 망하고 살룸 왕은 한 달 만에 므나헴에게 죽고 므나헴 때 앗수르 왕이 쳐들어 와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으나 베가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었고, 베가는 다시 호세아의 반란으로 죽었습니다.

 

 

 

이 호세아는 선지자 호세아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입니다. 결국 B.C 722년에 앗수르에 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이 계시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버리심은 이스라엘이 창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딸을 낳았습니다. 6절입니다. 이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루하마’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정 접두어 ‘로’가 붙음으로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이 본문에서 나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긍휼이 여겨서 여호와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가 앗수르의 공격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가 되었을 때 그들의 손에 의하지 않고 앗수르 군사가 다 죽어버린 사건이 히스기야 왕 때에 있었습니다. 유다에 등불을 꺼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북 이스라엘의 심판의 선언 중에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로암미’라 짓게 합니다. ‘암미’란 내 백성인데 ‘로’가 붙어서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은 자기의 백성을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 자녀의 이름은 모두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시고-이스르엘, 긍휼이 여기지 아니하겠고-로루하마, 내 백성이 아니라-로암미로 이스라엘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시지만 그러나 유다를 통한 희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후로부터 북 이스라엘은 10지파가 다 흩어져 버리지만 유다에 붙어서 들어오는 자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유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회복의 내용이 1:10-2:1절의 내용입니다.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 너희 형제에게는 1)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2)루하마라 하라"

 

 

 

심판 후에 다시 회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범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이 부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18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다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든 벽을 없애버리시고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 고멜보다 더 악하고 더럽고 추한 우리를 주님의 보혈로 정하게 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아들의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자기 의로 거룩하다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씀이 걸림돌이 되지만 정말 자신이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요 창기인줄 아는 자에게는 복음인 것입니다.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당신의 피로 씻으시고 정결한 신부로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10-2:1  한 두목을 세우고  2002. 1. 23.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 너희 형제에게는 1)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2)루하마라 하라.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왜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음란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음란하여진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메시지를 호세아 선지자가 결혼을 하여 낳은 자녀의 이름을 통하여 보내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인데 이제는 흩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로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루하마가 긍휼인데 '로'라는 부정접두어가 붙어서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로암미’입니다. 암미가 백성인데 역시 '로'가 붙어서 내 백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심으로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단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언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둔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할례당에게 무할례당이라 여김을 받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거나 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긍휼을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의롭거나 선을 행하거나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얻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론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전적인 은혜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구원을 하신 것은 무언가 선한 것을 행할 것을 알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선교사나 집사나 장로를 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고 구원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또다시 주님의 긍휼과 자비는 사라지고 사람의 행함만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 놓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순종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쪽 유다도 망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유효하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되지만 ‘그러나’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입니다. 심판가운데서도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인하여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이 선포됨으로 그 빛을 더욱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면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불순종 아래 갇혀 있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불순종 아래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만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실상을 먼저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흩어 버리실 것이며,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호세아서가 끝이라면 아무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이 '그러나'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아무리 부정적이고, 심판의 내용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나오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심판의 선포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는 것입니다.

 

 

 

1:11-2:1절을 봅니다. "봉독" 전에 흩어버리시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신 곳에서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암미라, 루하마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그러시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노라 그러시면, 긍휼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약속이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선포하고서 심판이후에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두목을 세우고 나오는 것입니다.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로 바벨론 포로에서 스룹바벨이나 여호수아 제사장 같은 자들을 머리로 하여 돌아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까지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 없도록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날에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대로 이스르엘이란 흩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뜻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심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곡식을 심을 때 주로 흩어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도 가시덤불에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흩뿌리고 나서는 땅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그러니 흩어버리는 것이 때로는 심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심는 행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스르엘은 흩어지는 심판을 의미하지만 이제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라는 것은 심어진 열매가 많이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2:24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받은 저주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대신 지신 것은 하나님의 흩어버리심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 열매의 결과가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아니라 하던 그 자리, 그래서 저주를 받아 죽은 그 자리에서 내 백성이라는 부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화평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에베소서에서 찾아 본 말씀입니다. 오늘은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내 백성이라 부름을 받는 말씀, 그것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으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신약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9:19-29절입니다.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ㅅ)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ㅇ)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ㅈ)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ㅌ)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7절에 보시면 사람이 구원을 얻고자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하나님의 긍휼로 남아 있는 것이랍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의 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이나 간에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자기 백성을 창조하여 내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마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심판받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신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셔야 마땅하고 긍휼을 입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 할 정도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의 자녀라 부르심을 입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긍휼을 입은 자라는 부름을 입은 자들은 누구를

두목으로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목 즉 우두머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머리가 누구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대신 저주 받으시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창조하여 내신 한 두목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목은 말 그대로 머리입니다. 왕입니다. 주입니다. 목자입니다. 이러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34:20-25절입니다.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호세아 1:7절에서 유다에 긍휼을 베푸신다는 말씀을 따라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 되셔서 화평의 언약을 세우심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머리, 두목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두목으로 삼고 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분의 대신 받으신 심판과 저주로 인하여 우리는 심판과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그의 백성이라 부름을 받는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늘 우리의 두목을, 우리의 왕을, 우리의 목자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우리를 자기 백성 만드시기 위하여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2:2-7  그제야  2002. 1. 30.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2절에서 너희 어미와 쟁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미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내로 부름을 받은 나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입니다. 그리고 4절에 그 어미가 낳은 자녀들이란 이스라엘의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이 어미의 행음으로 낳은 자녀들이기에 음란한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하자면 교회가 잘못 전도하여 양산된 교인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어미와 쟁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쟁론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새번역에서는 고발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쟁론하고 고발하여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그 유방 사이에 있는 음란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 음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한 남편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온갖 우상을 좇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쟁론하고 고발하여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이란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하고 광야 같게 하고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보자면 쟁론하여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당시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타락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을 지라도 그것에 무릎을 꿇지 않은 남은 자인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 혼자 남았다고 말하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있다고 한 것처럼 남겨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풀어 봅니다. 너의 어미와 쟁론하라고 합니다. 자기 어미를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어미란 무엇입니까? 자기의 근원입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어머니의 품 같다고 하지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을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미인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어찌 자기의 근원을 고발하고 부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역사를 보면 모든 출발이 떠남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고대사회일수록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이 되고 배경이 되는 것을 스스로 박차고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를 벌할 때 제일 중한 벌이 추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낸 아브라함을 그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의지하고 있는 한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경우도 이집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애굽의 비옥한 땅들을 버려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리에서,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아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게 되어 있을 때 여기에서 안주하고 있는 것은 함께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그것을 고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회에서 반드시 핍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핍박한 내용을 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쟁론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린이가 어머니를 의지하듯이 그렇게 기댈만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회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가정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자기 가정을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하여 주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가정행복 세미나’를 가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내 가정이 행복하여 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행복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뿐이겠습니까?

자기의 교회도 얼마든지 기댈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네 어미를 고발하라는 것이 이스라엘이 몸담고 있는 국가이듯이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있는 이 ‘늘푸른 교회’가 단지 내가 소속이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리와 상관없이 무조건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습니까? 다른 교회 다른 집안 다른 회사는 잘못되어도 내가 속한 단체는 무조건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단체를 허물어뜨리면 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속한 단체를 긍정하고 도움을 주면 나의 동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현실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는 자명하여 집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잘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집안, 회사, 교회, 국가를 잘되게 하여 주시면 얼마든지 믿고 따르겠지만 나를 해체시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심보가 예수님 앞에서 다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미웠으면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러 대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좋아하는 것들을 고발하시면 안색이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2:51-53절.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4:26절.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은 따라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배척하고 싶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계산해보고서 따라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자가 미리 계산하고서 세우는 것과 전쟁도 계산해보고 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쟁론, 고발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였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지 그들의 고발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호세아 2:3절입니다. 벌거벗겨 그 나던 날처럼 하겠다는 것입니다. 광야같이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묘사가 에스겔서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물론 에스겔서 16장은 남쪽 유다에 대한 고발이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으로, 그리고 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4-5절입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이것이 처음 나던 모습입니다. 유기된 피투성이입니다. 이러한 아이가 발짓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하면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황후처럼 키워 놓았더니 그때부터 하는 일이란 게 창녀보다 더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창녀는 돈을 받고서 몸을 팔지만 이들은 오히려 자기의 돈을 주어가면서 온갖 바람을 다 피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스겔 16장에 가득합니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기기를 바랍니다.

 

 

 

다시 호세아 2:5절입니다. 저희의 어미가 행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 연애하는 자들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들입니다. 이방의 강대국들입니다. 자기들의 힘이 될만한 모든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이 연애하는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모두 남편 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되어졌는데,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에 살면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오히려 자기들이 연애하는 우상들이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자기들이 연애하는 자들이 준다고 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땅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싸우셔서 그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이 준다면서 그 우상을 연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를 고발하고 쟁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나던 날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벌거벗겨 끌고 간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친정이 좀 의지가 될까 했는데 난데없이 보증을 서준 게 잘못되어 가지고 다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시집에 무언가 바랐더니 동서들의 암투로 한 푼도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믿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따라 갔던 모든 것들이 모두가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6-7절을 봅니다.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아 버립니다. 고통과 답답함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 가려고 하여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다 탕진하여 버리고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여도 누가 주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제야 아버지 집을 기억합니다. 자기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더 이상 아들로는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품꾼의 하나로는 써주시지 않겠는가 하고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가 유산을 주지 말라고 말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말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그래 네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가보아라 하고서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7절 중반을 봅니다. "그제야"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그제야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하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악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쟁론하고 고발하여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친다고 하면서 얼굴색이 변하며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는 사실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오늘날 진정한 기독교인은 절망적 소수’라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호세아서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무엇을 연애하고 있습니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꼭 가시와 담에 막혀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제야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돌아오도록 기다리시는 주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시와 담으로 돌아오게 된 자들이 주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긍휼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에스겔 16:60-63절을 봅니다. "봉독"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 외에는...

 

 

 

 

 

 

호세아 2:8-13  주님을 잊어버리고  2002. 2. 6.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3)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13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피투성이로 된 계집아이가 길에 버려져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고아원에 갖다 맡기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서 데리고 가서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예쁘게 키워 놓았습니다. 거기다가 용돈도 넉넉하게 주었는데 이 아이가 하는 일이란 게 늘 부모의 속 썩이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나쁜 짓 하다가 경찰서나 들락거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막아야 하지요. 어떻게 막겠습니까? 가시와 담으로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창을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온 몸을 망치고 이리 저리 몸을 파는 곳으로 전전하다가 빚만 잔뜩 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늙어서 쓸모없게 된 이러한 자의 빚을 다 갚아주고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는 백성입니까? 천하에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본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출애굽의 경험과 광야의 기적과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의 일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벌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벌을 주시는 것은 사랑의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정말 버리실 것 같으면 벌을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을 주신다는 것은 아직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고발하고 심판을 합니다만 그리고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심판 속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하고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소의 구원이란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재 내가 사는 세상과 환경이 문제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잘 보완하고 수리하면 살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현재의 나의 모습이 좀더 나아진 상태나 환경을 뜻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심판받고 멸망 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뽑아내고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나서 새롭게 심으시고 건설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2:5절입니다.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어미가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간음입니다. 간음이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들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면서, 즉 바알을 섬기면서 바알이 자신들의 떡과 물과 양털과 기름과 술들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를 언급하면서 모두 뭐라고 합니까?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알이 준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종류는 떡과 물과 양털과 삼입니다. 의식주에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자기들이 연애하는 자들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술은 기본적인 의식주보다 고급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누가 주시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에 모든 소유가 누구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까? 바로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가 ‘주’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애굽 백성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어떠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란 단지 자신의 재산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천하가 바로의 손에 의하여 움직여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초라한 늙은이가 와서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400년이나 자기들의 소유물로 여기고 살아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따로 있다고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가 예, 하고서 내어 놓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내어 놓겠습니까? 결국 열 가지 재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애굽의 백성들과 바로 왕과 다른 나라들까지 온 천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 되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재앙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알아야 할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면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고 기호로 손가락에 매고, 문에다 써 붙이고 냉장고 싱크대 위에 써 붙여서라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온 천하의 주 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모는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였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가르치고 외우게 하여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 길로 우상숭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 백성이 망한다고 호세아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내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빼 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호세아 2:8-9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 준 것이라 하면서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와 기름, 은과 금, 곡식, 양털과 삼, 이 모든 것들을 도로 찾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이 아니라 기름과 포도주, 금과 은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바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빼앗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것입니까?

 

 

 

신명기 7:12-13절입니다.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현재 자기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과 그 안에서 나오는 모든 소산물들이 자기들이 잘나서 얻고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경고하여 두었습니다.

 

 

 

신명기 8:11-20절입니다.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신명기 8:1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고 배부르게 되고 은금이 증식이 되면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게 될까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 것인데도 모두가 자기들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 줄 아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것이 19-20절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의뢰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어버리심으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들 앞에서 드러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탕자의 예를 들어 봅니다. 처음에 돈이 있을 때는 세상이 모두 자기 손안에 있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친구도 많고 예쁜 여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돈 떨어지자 친구도 그렇게 사랑한다고 매달리던 여자들도 모두가 돌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좋아하던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하여 갈 때는 어느 누구도 막아낼 자가 없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내 손에서 건져 낼 사람이 없으리라" 어느 누구도 구하여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의 모든 즐거움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안식일과 월삭과 모든 명절을 폐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망한 지경에 무슨 명절입니까!

 

 

 

12절을 봅니다. 추수 때에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어 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 버리고 가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요 무화과는 단 열매입니다.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단 맛이 사라지고 모래를 씹는 것처럼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면 이렇게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벌을 내리시는 것은 결국 그 의지하고 연애하여 따라 가는 것들을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이제 그 따라가던 자들이 너 싫다 하고서 버림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주님은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그 대가를 가지고 가듯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지 않습니까? 이미 내가 주가 되어 있기에 주님은 간곳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상황에서 언제나 내가, 내가, 내가라는 말속에, 내 것, 내 것, 내 기분, 내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생 때문에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처럼 바람 난 여자를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저를 사오는 것처럼.

 

 

 

오늘 세상에 바람난 우리를 주님은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토록 그 피의 공로를 잊어버리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13절. 징계)

 

 

 

 

 

 

호세아 2:14-23  여호와를 알리라  2002. 2. 13.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4)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5)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6)이스르엘에 응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심판의 상황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태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바알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따라, 그 긍휼과 자비의 크심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먹고 배불러지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을 그들이 연애하는 바알이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입었던 것까지 모두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나던 날의 벌거벗은 모습대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들 앞에서 드러내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벌하심에서 건져낼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를 통하여 온 천하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땅이 황폐하여지고, 모든 기쁨의 절기들이 폐하여지고, 농토와 과수원이 수풀이 되고 들짐승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림으로 그들이 연애하는 자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아 이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전의 남편이 나았다고 하면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다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역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돌이키시는 그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호세아 4:1-6절을 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한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업들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인애와 진실이 없으면 없을수록 종교사업은 번창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질수록 온 땅에 우상숭배의 제단들이 가득 가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 백성이 망한다고 하면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호세아 6:1-3절을 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힘써 여호와를 알고 찾으면 여호와께서 임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힘써 여호와를 찾는다고 하여도 왜 찾는가 보니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여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힘써 찾아내어서 알아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알리셔야만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 때에 가시와 담으로 막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구멍을 뚫고 담을 넘어서 도망가면 그들의 소유를 다 빼앗아 버림으로서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애하는 자들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면 그제야 주님께서 그들을 말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2장 14절을 봅니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단어가 '내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린 이스라엘을 개유하시는 것입니다. 개유란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다 빼앗긴 그들을 다시 설득하여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까? 거친 들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빈들이요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란 늘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의 세월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나왔던 그 장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만이 있어야 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어디에서 외쳤습니까? 빈들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친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미 화려한 성전이 있었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한 도시가 아니라 빈들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새롭게 자기 백성을 창조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말로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저의 마음에 말하고'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마음에 기록하리라는 말씀처럼 그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고치시는 것은 결국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마음에 하시고서 비로소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골’이란 ‘환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 그의 가족과 함께 매장당한 골짜기입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물건을 훔친 것입니다. 옛날 전쟁에서 물건 약탈이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가나안의 첫 성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 안의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의 욕심은 하나님의 싸우심을 무시한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수고하였는데 이정도 쯤이야 내가 가져도 되겠지, 그런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성에서 아간으로 인하여 패배한 것입니다. 결국 아간과 그 가족과 그의 모든 재물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고 불에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자면 모두가 아골 골짜기에서 처형당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소망의 문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16절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여 주시는 날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구속되는 날입니다. 이 날에 다시는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부르리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기서 바알이란 ‘내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상 바알을 내 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그 우상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고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로를 하시고, 말씀을 마음에 기록하시고, 남편이 되어 주셔서 그 입에서 다시는 바알이라 하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부르게 되는 일을 누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라고 하십니다.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주님을 부르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온갖 바알의 이름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연애하고 내가 좋아하고 나의 관심사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서는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일, 빼앗으시고, 설득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주시고, 그래서 바알을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부르게 하신 것 외에 또 무엇을 주신 것입니까?

 

 

 

18-19절입니다. 그 날에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들로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해로운 짐승과 새와 곤충들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의 활과 칼을 꺾어버림으로 전쟁을 없애고 평안히 눕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연의 재해와 인간세계의 전쟁까지 제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장가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음란하고 더러운 여인을 거두어만 주신 것만으로 영원토록 감사하여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지참금을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 지참금이 무엇입니까?

 

 

 

19절에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변됨, 그리고 은총과 긍휼히 여김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것을 선물로 주셔서 자기의 아내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23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란 사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뀌어 버리면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님의 속성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호세아 11:8절입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심으로 그렇게 타락하고 음란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받아들여짐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2:20절을 봅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렇게 음란하고 패역한 자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셔서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과 진실함으로 장가드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무언가 잘 보여서 내가 소원하는 바를 받아내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더욱 이러한 계시된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23절처럼 "주는 내 하나님이라"는 복된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3:1-5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2002. 2. 20.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우리는 흔히 구약은 율법, 신약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신약시대에는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8-11절을 봅니다. "8 또 하나님이 2)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ㄴ)모든 2)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것임을 성경이 미리 알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도 역시 구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 책에 기록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왜 인간이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서만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언급하여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또다시 오해하여 내가 믿어주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믿음이 또다시 율법적 행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성경 전체에 계시되는 것이며 특히 호세아에서 죄된 인간의 실상을 더욱 잘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를 사랑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따랐기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언약하신 그 언약과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하는 일이라는 게 늘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과의 결혼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멜이란 여인은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그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셔서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살다가 또다시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신명기 22:20-22절에 의하면, 결혼하였는데 여자가 처녀인 표시가 없으면 돌로 쳐 죽여서 악을 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남자가 괜히 싫어서 트집을 잡는 것이라면 벌금을 내고 평생을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유부남, 유부녀가 통간하면 둘 다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면 고멜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보낼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24:1절입니다. "봉독" 그렇다면 호세아가 고멜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돌로 쳐 죽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혼하여 주는 것만도 큰 자비를 베푼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이러한 이혼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아내와 살기 싫으면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서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험적으로 율법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이혼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로 받아 치면서 그러면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악함을 인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혼증서 없이 여자가 쫓겨나면 재혼이 안 되기에 약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하여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멜과 같은 여인을 모세 율법에 그대로 적용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이고, 많이 봐주어도 이혼증서 주어서 내어 보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 나는 처녀로 시집왔고, 시집와서도 바람피운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남의 이야기로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러한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간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많이 쓰십니까? 아니면 텔레비전 보고 잡담하고 자기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많이 사용하십니까? 시간만이 아니라 물질은 어떻습니까? 헌금하는 것은 아까워도 나의 자존심 세우는 일에는, 나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수십, 수백 만원이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고서도 바람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멜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엉뚱한 데 눈 돌리고 끌려가면서도 뒤로 돌아보는 롯의 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음란입니다.

 

 

 

그러므로 돌로 쳐 죽임당하여야 마땅하고 많이 봐주더라도 이혼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고서 영원한 지옥형벌에 떨어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낫다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자기의 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받았다, 선택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야 자기들의 죄를 알고서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를 하게 되면 교만하게 되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어 버리면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성경을 그래도 이만큼 안다, 이만큼 보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를 들으니 어느 교회 집사가 사업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려운데 그 사람은 사업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니 성경을 필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필사하다 보면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되어서 사업도 잘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8번짼가 성경필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게 되었다면 성경 읽어서 또는 필사하여 사업이 잘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늘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기는 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의 용서와 사랑만을 붙들게 될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하여 귀한 것을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건포도 떡은 귀한 식물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우상을 위하여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의 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온갖 희생과 정성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 내가 사랑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가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음란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또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또 사랑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사사기: 또 범죄 함, 징계, 고난, 부르짖음, 또 구원함, 그러나 호세아서오히려 호세아가 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옴.)

 

 

 

2절입니다.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사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가격은 종의 몸값입니다. 팔려 버린 여인을 다시 돈을 주고 사오라는 것입니다. 사창가에 팔린 여인을 빼내어 오려면 엄청난 돈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멜과 같은 경우는 합법적으로 데리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은과 보리를 주고서 사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그를 돈 주고 다시 데리고 와서는 뭐라고 합니까?

 

 

 

3절입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고 합니다. 나도 네게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많은 날 동안 있으라는 말은 고멜이 인격적으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서 오랜 기간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에봇과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저희가 말일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날 동안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유다는 70년이라는 기간이 정하여지는데 북 이스라엘은 기간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구속의 중심이 유다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 유다는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오지만 북 이스라엘은 그러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주 미미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남 유다처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포로로 잡혀간 시대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왕도 없고 군도 없다는 것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주상이란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고 드라빔은 대표적인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와 우상을 동시에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사장의 에봇을 이미 북 이스라엘에서는 음란하게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화 된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 무너진 곳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구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리라는 그 언약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서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이 5절의 말씀을 새번역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서, 주 저희의 하나님을 찾으며, 저희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떨면서 주 앞에 나아가,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주님 앞에 떨면서 나아가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긍휼과 은총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자들이 다 불순종 아래 갇힌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로나 정결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2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라고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이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찾고 애를 써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긍휼로 인하여 그의 은총으로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은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주님의 살과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들이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더욱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더 깊숙이 담대히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4:1-10  하나님을 아는 지식  2002. 2. 27.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8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10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호세아 1장에서 3장까지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의 결혼과 자녀들의 이름들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음란한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4장에서 13장까지는 1장에서 3장에 나타나는 내용을 더욱 확대시켜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들으면서 계속하여 고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음은 마지막 14장에서 주의 긍휼을 입고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책망을 듣고서 회개하는 무리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씀 앞에서 책망을 받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4장 1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미 2장 2절에서는 너희는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선지자이기도 하고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그의 어미와 쟁론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그 어미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고발이며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에 대한 고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 연애하는 것을 따라가는 그 어미를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근거를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4장에서 쟁변하시는 분이 여호와께서 친히 쟁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쟁변은 심판 전에 그들의 죄를 묻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그 죄가 무엇인가를 밝혀내고 심판을 선고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는 이유가 쟁변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쟁변의 내용은 이스라엘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가득한 것에 대한 쟁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서 애굽에서 출애굽 하였고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인애 즉 하나님의 속성이 가득하여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진실은 진리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리고 인애는 긍휼로 사랑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인애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말인데 '언약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은 담겨져 있지 않고 없어져야 할 것들만 가득하였습니다. 그것들은 저주, 사위, 살인, 투절, 간음입니다.

 

 

 

저주는 맹세하면서 남을 저주하는 것과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면서 맹세하는 것과 연결이 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위는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투절은 훔치는 것입니다. 살인과 음행, 이러한 것들이 가득하여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백성들에게만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제사장들에게도 동일한 상황입니다. 제사장들의 주된 임무가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잊어 버렸으니 백성들이야 더한 지경입니다.

 

 

 

6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일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을 잊어 버렸으니 하나님께서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녀들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란 단지 제사장의 자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봅시다.

 

 

 

8절입니다.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속죄제물은 제사장들에게 돌아가는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죄가 많아져야 자기들에게 돌아올 양식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장의사들의 바램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장사가 잘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관심이 백성들의 속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에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모습이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여 자기의 배를 섬긴 것입니다. 제사를 강조하고 예배를 강조하는데 아주 신령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도적질하는 이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성을 바쳐라 그러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았다면 이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인된 우리가 무엇을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아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만이 죄인을 살리는 길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9절입니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다 꼭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한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있어야 할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도 없고, 없어야 할 저주와 거짓말과 살인과 훔치는 것과 간음들만 가득하고 피가 피를 뒤대이는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슬퍼하며 그곳에 거하는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가 다 쇠잔하여 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의 아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아서 지금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황무하여진 것입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이 구약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얼마나 비옥한 땅이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땅조차 쇠잔하여 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황폐함입니다.

 

 

 

4-5절입니다. 3절이 그 땅의 황폐함이라면 4-5절은 영적인 황폐함입니다. 제사장들이 낮에 거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밤에 거치는 것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영적인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잊어버려서 걸려 넘어진다는 것은 백성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5절 끝의 네 어미를 멸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계속하여 6절 이하에 네 자녀를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이 이스라엘의 멸망인 것입니다. 이들은 번성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7절에 봅니다. 번성할수록 범죄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애를 써서 먹을 것을 장만하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요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여호와 좇기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의 성전이란 성도의 마음이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 된 마음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고 없어야 될 것만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사귐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진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인 진실과 인애와 자비와 용서가 가득하여야 할 심령에 없어야 할 것이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알아야 할 것은 모르면서 몰라도 되는 것들은 가득하게 알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공부를 하라면 그렇게 외우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빠른 유행가 가사는 하나도 틀리지 않고 줄줄이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느끼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저 녀석이 누구를 닮아가지고 저 모양이냐고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회 때 다 비운 것 같았는데 벌써 눈에 보이는 것들로 가득하게 채워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보암직하게 만들어 내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의 거울을 가지고 우리의 심령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아 나를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도 가득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에, 가정에, 교회 안에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왜 성전을 헐라고 하셨을까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는데 정작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곳이어야 할 성전이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 채워졌기에 허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허물어버리시고 이제는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 삼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우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의 성전에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까?

 

 

 

갈라디아서 5:16-26절을 봅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교회 안에 무엇이 없어야 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까? 갈라디아서 말씀에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 안에 육체의 열매들을 발견하고 책망을 받고서 그것들이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성령의 열매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다 보니 육체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4:11-19  마음을 빼앗김  2002. 3. 6.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13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14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하나님의 지시로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아 결혼생활을 하였으나 고멜은 또다시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다시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3:1-3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다시 고멜을 사 와서 아내로 삼고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음이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남 유다도 꼭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인도하여 들여놓으셨는데도 그들의 몸은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나 그들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늘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마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음을 무엇에 빼앗겨 버렸는지, 그 결과가 어떤가를 돌아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이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知情意(지정의)로 정의된다면 그것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의 마음이란 영적인 것을 깨닫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4절 끝에 보시면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마음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하고, 충성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완악하여 질수도 있고, 부패하여지기도 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즉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의 마음을 볼 수가 없으니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그 사람을 압니다. 그러나 행위란 것이 얼마든지 마음과 다르게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 말도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더라도 그 마음의 중심이 어떠한지를 주님께서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서도 행위로 드러나야 우리는 죄로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의 죄된 생각을 이미 행위로 나타난 죄와 똑같다고 보신 것입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은 여기에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몸은 나무에 있으면서 마음은 콩팥에 가 있다면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천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어디에 빼앗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무엇을 향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입니까?

 

 

 

호세아 4:11절을 봅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음행과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음행과 포도주란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됩니다. 포도주란 가나안의 특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중요한 음료수일 뿐 아니라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술을 마시고 신전의 창기들과 음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니 그 결과는 온통 우상숭배로 온 나라가 도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세아 4:12-13절을 봅니다. 나무에 묻습니다. 나무란 나무로 만들어 세운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을 떠나 음란하듯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산 위에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산 위란 신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곳으로 생각하여 산 위에 제단을 차리고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나무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무성한 가지와 잎들로 인하여 좋은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그러한 나무의 무성함처럼 무성하고 번성하게 되기를 빌고 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골에 가더라도 동네입구의 커다란 정자나무라든가 마을 입구의 참나무 상수리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서낭당을 세워 놓고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쫓겨난 가나안 원주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여 쫓아내어 버린 그들의 모습을 이스라엘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명기 12:1-3절을 봅니다.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서 멸하라고 한 그러한 풍습을 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보다 더 심하게 섬긴 것입니다.

 

 

 

여호수아 정복을 지나 사사시대, 왕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온갖 우상숭배로 가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다 그리하였습니다. 너희의 딸들과 며느리들이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데도 하나님께서 벌하시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였으면 잘못하였다고 벌을 주시면 그것은 아직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벌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14절에서 딸들과 며느리들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 다 한가지로 음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과를 먹으려고 보니 조금 상하여 보이는 것을 칼로 도려냅니다. 그런데 조금 도려내고 보니 안에 더 깊이 넓게 썩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썩어 있기에 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면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시니 잘 되어 가는 줄 알고 있습니까? 이 땅에 기독교라는 종교사업이 이렇게 번창하여 가니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안에 우리도 들어있고 그래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시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버리고 타락하여 버렸기에 벌하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결국을 보고자 합니다. 깨닫지 못하여 패망하리라고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하였는데 결국 이들은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7:1-18절입니다. "봉독" 왜 망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하신 것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어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을 곧게 하고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제하여 버리시니 유다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7:20-23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고서 왜 그러느냐고 책망을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이 멀도다, 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사람의 규례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입니까?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라고 합니다. 광패는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하는 짓이 예의에 어긋나고 난폭하다고 국어사전에 나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여기서 조금 더 낫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도대체 무엇으로 고쳐낼 수가 있겠습니까? 교육으로! 공자로! 소트라테스로! 윤리 도덕으로! 모두의 마음이 이러한데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합니다. 낮아지심입니다. 어느 정도로 낮아지셔야 하셨습니까?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줄기차게 한 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이미 할례가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고,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말라기 끝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4:4-6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빼앗기고 있습니까? 어제 저녁에 ‘세계는 지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인도의 결혼 지참금에 대하여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지참금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인사의 선물이었는데 지금은 악습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온갖 혼수품을 다 해갔는데도 부족하다고 임신 6개월의 아내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말은 오토바이를 사가지 않았다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온갖 법에 호소를 하여서 2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 한 여인은 혼수품을 해가지 못하였다고 남편에게 맞아서 허리를 다쳐 꼼짝하지 못한 채로 쫓겨났는데 어린 아이가 셋입니다. 길거리의 엉성한 나무 침대에 누워있는데 어린 딸아이 하나는 죽었고, 두 아이가 누워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동안 그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참금을 가져가지 못하였다고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참금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신랑을 버려두고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까?

 

 

 

 

 

호세아 4:15-5:7  정조(貞操)  2002. 3. 13.

 

 


15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찌어다 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18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19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개역한글판 호 4장) 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2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6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7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교회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부된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7절에 보시면 정조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일편단심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정조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이미 죄와 허물로 인하여 정조가 상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담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정결한 신부로 단장을 하려고 하여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붙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의 주신 의의 옷은 버려두고 자기 스스로 멋진 옷을 입고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존심입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행실로 만들어 낸 옷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이사야서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9:1-8절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독사의 알을 먹고 거미줄로 옷을 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로는 결코 자신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미줄로 옷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의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죄악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상이 죄악의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길이라는 것이 굽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평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절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주님 앞에 스스로 정결하여 거룩한 신부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조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구약시대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만 그러나 북 이스라엘만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 유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3장에 의하면 북 이스라엘을 형이라 하고 남 유다를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인 북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망하는 것을 보았다면 남 유다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가 오히려 더 심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넘어지는 것입니다.

 

 

 

호세아 5:5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북 이스라엘의 대표지파가 에브라임입니다. 그러니 북과 남이 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손봉호 교수의 칼럼 중에 '윗물은 더러워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윗물이 더럽다고 해서 아랫물마저 더러워진다는 것은 숙명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아랫물이 맑아질 수가 있다고 하여야 역사의 발전이 있다고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예로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 발전이란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는데 무슨 발전이 있습니까? 역사의 수많은 오류들을 인간들이 몰라서 지금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고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전쟁의 폐해를 몰라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해의 심각성을 몰라서 공해를 유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란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바르게 고쳐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행위와 사상이 죄악된 행위와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이 망하는 것을 보면 동생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동생도 어느 순간 그러한 형을 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범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것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자신의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 유다의 성전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디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15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행음하였더라도 유다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길갈과 벧아웬으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진친 곳이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할례를 행하면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 버렸다고 해서 길갈이라고 이름 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갈이 이제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벧아웬은 벧엘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벧엘이란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집이 허영의 집, 우상의 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 올라가서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유다도 오늘 우리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완강한 암소와 같아서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완강한 암소라고 하니, 옛날 저의 시골집에서 길렀던 암소가 생각이 났습니다. 소는 대부분 온순한데 이 암소는 사나운 암소였습니다. 쟁기를 메어서 논밭을 갈려면 제대로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와 씨름하다가 일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소가 새끼를 낳고서는 젖을 물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시골에서 소가 얼마나 큰 재산입니까? 그런데 농사도 짓지 못하고 새끼도 낳지 못하니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할 수 없이 팔아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완강한 암소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4:1절에서도 암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여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갈고리와 낚시로 걸어다가 성 무너진 곳에 던져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완강한 암소 같은 이스라엘을 어찌 양떼처럼 넓은 들에서 먹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우상과 연합되어 있으니 그 마시기를 다하고 음행을 다하기를 마지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음행이 마음을 빼앗는다고 하였듯이 그들의 결국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19절을 봅니다.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 이사야 64:6절에서 이미 본 것처럼 죄악이 바람처럼 몰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열심히 길갈을 찾고 벧엘을 찾아 제물을 바쳐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정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바치고 있습니까?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가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5:1절을 봅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귀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미스바와 다볼이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곳 역시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길갈, 벧엘, 미스바, 다볼 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오히려 올무가 되고 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러한 곳으로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떠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 헌금을 한다, 봉사를 한다면서 이렇게 모이지만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양떼도 소떼도 끌고 왔는데 정작 받으실 하나님은 떠나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양떼와 소떼가 더 많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은 더 많은 헌금이 나와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떠나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까?

 

 

 

5:7절입니다.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삼키리라" 새 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제물과 절기지킴을 그들이 붙들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은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정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물을 잘 바치고 절기를 잘 지키는 것이 아니지요. 제물과 절기가 무엇을 위하여 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자신들이 제물 바치는 그 행위에 의의를 두고 있기에 정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위를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한 자기의 행위를 포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서 의를 찾으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정조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하여 정조를 잃어버린 고멜과 같은 자들입니다. 창기와 같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복음칼럼에 짧은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미끄러짐’이라는 제목입니다. 얼마나 자주 주님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가 아니면 도저히 소망이 없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주신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만 정결한 신부가 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 주신 의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이 말씀을 왜 하는가 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개하려는 자들이 있기에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피로서만 정결함을 얻는 것입니다.

 

 

 

 

 

 

호세아 5:8-6:3  여호와를 알자  2002. 3. 20.

 

 


8 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찌어다 9 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11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1)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찌라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대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시고 지금까지 은혜로 살리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주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우상에게 빼앗겨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다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 앞에서는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6:1-3절에 보시면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앞에서 살자!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고 주님께로 돌아가서 그 앞에서 살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절을 봅니다. 이미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은 황무하여 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필연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견책을 받아 망할 것이 확실하기에 남 유다는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형이 잘못하여 매를 맞으면 동생은 분위기 파악해서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집부리고 반항하면 동생이 더 맞을 수가 있습니다. 형이 잘못해서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너도 꼭 같이 잘못을 하는가 하면서 더 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망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남쪽 유다 너는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것이 8절입니다. 8절에서 기브아와 라마와 벧아웬이 남쪽 베냐민 지역입니다. 역시 유다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팔을 불고 호각을 불며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까? 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이 베냐민 네 뒤를 좇는다고 경고의 소리를 외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5절을 봅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자, 주님 앞에서 살자, 주님을 알자 하는 것이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돈을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러도 나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이지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죄된 삶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주를 부르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절망적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온 문명이란 것이 결국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것이 인간이 공동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표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죄된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을 보면서 인간의 실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지금도 입고 살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10-11절에서 보게 됩니다.

 

 

 

10절에서 유다의 죄가 무엇입니까? 지계표를 옮기는 것입니다. 지계표란 자기 땅의 영역표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땅을 무상으로 분배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싸우셔서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신 것입니다. 인구의 수를 비례하여 제비뽑아 경계를 정하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영토의 표시인 지계표를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 땅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계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이방인의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역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모두 다 몰아내고 파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계표를 옮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모습입니다. 

 

 

 

11절에서 북 이스라엘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의 명령을 좋아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가르침이 더 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자기들을 좋게 하여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낯설고 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루도 못살 것 같습니다. 비전도 없어 보이고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 같고, 도대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 같습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데 그러한 꿈을 허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갑갑한 감옥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잔소리 많은 시어머니 같습니다. 그러니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지요. 간섭하셔야 합니다.

 

 

 

12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썩히는 것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좀처럼, 썩히는 것처럼 에브라임을,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좀이나 썩히는 것은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망하는 길입니다. 옷에 좀이 썰어버리면 겉모양은 멀쩡한데 입으려고 하면 불에 탄 재처럼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썩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에서 썩어진 것은 겉으로 볼 때 멀쩡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병이 들었구나! 상처가 있구나! 하고서 깨달았다면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13절을 봅니다. 야렙 왕에게 가는 것입니다. 야렙 왕이란 싸움의 왕이란 말로서 앗수르 왕의 별명으로 봅니다. 자신들의 병과 상처가 났다면 치료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이방의 왕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로 돌아가야 사는 길인데 힘만 있으면 살겠다고 앗수르 왕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도 같은 모습입니다.

 

 

 

앗수르와 애굽의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국제정세를 따라 이리 저리 도움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구원은커녕 그들은 앗수르에게 점령당하고 만 것입니다. 남 유다는 나중에 바벨론에 망하지만 앗수르에 의하여 괴롭힘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움을 받고자 은과 금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괴로움만 더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렙 왕이 그들을 고치지 못하고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은 와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들을 괴롭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로도 세계의 열강들이 이 땅을 집어 삼키려고 얼마나 각축전을 벌렸습니까? 그 결과 지금의 반쪽 나라가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열방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면 이스라엘 나라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계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왕 됨을 싫어하여 이방의 왕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빼앗긴 것이요, 정조를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이러한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그들을 움켜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나라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지만 말씀은 내가, 즉 여호와 자신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건져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7:1-8절. "1 유다 왕 아하스 십이 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4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5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6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7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18절을 봅니다. 이렇게 사자가 삼키듯이 사로잡혀 가고난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가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얼굴을 돌이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세상의 힘들이 오히려 그들을 삼켰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니다.

 

 

 

이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음란한 고멜이 자기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가 나중에 죽을 고생을 하고서는 그래도 옛 남편이 나았다고 하면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서 돼지가 먹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하여도 주는 자가 없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그들이 의지하던 그것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 여호와를 간절히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미 신명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25-31절입니다.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26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결국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간에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좋아하던 것들을 좇아갔다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올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좋아하고 의지하던 것들에 의하여 수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 그제야 주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호세아 6:1-3절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들의 병과 상처를 세상의 힘에 의지하여 치료하고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로 인하여 오히려 낭패와 실망을 당한 후에 주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틀 후에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까운 회복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이 그렇게 가깝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남쪽 유다가 망한 후에 70년의 세월이 지나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의 심정이 호세아 6:1-3절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남은 자들끼리 서로 격려하는 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 앞에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삼일에 일으키리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로도 교부들은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나오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여호와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힘써 알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하다가 망하여 버린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애착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셔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그 앞에서 살라고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그러나 돌아오는 자는 참으로 극소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동일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일부에서는 속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고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교회 갱신 협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바른 목회를 하자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임들이 또다시 세상의 힘을 요구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그 앞에서 살자,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이 말씀을 들어도 소귀에 경 읽기처럼 들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주께로 돌이키는 자들에게 주님은 새벽빛같이 일정하게 신실하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비를 흡수해버리는 땅입니다. 천수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늘 적절한 때에 비가 와야만 살아가는 땅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이 참으로 살길입니다. 다른 것에 아무리 기웃거려 보아도 그것이 우리를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어디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고 그 자리에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지도 못할 헛된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호세아 6:4-1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2002. 3. 27.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9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11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몰라주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하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은 다르게 대응하여 올 때 갈등과 반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마태복음 7:12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본뜻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오히려 역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먼저 헤아린다면 갈등과 반목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죄로 인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4절을 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에브라임아 유다야 도대체 내가 네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을 데리고 와서 살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처음부터 음란한 너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사랑하여 주었는데 또다시 바람이 나서 나가 버렸느냐? 그러나 다시 값을 주고 사왔는데도 또다시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지요! 때로는 혼을 내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하고, 상을 준다고 하기도 하고. 그러나 아무리 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이렇게 힘들게 공부시키려고 하는데 도대체 너의 점수가 이게 뭐냐, 도대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겠니? 그러한 심정이 들 때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에 바로 여러분 자신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겠는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도대체 어떻게 하랴는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탄식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사야 5:1-7절을 봅니다.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1)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는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4절에 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공평과 의로움이셨는데 도리어 포학과 부르짖음이 열매 맺힌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사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너의 품에 두었건만 무엇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이것저것을 더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사무엘하 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들리십니까? 너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끄집어내어서 오늘까지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건만 도대체 너의 인애는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향한 인애가 얼마나 엄청난지 아느냐, 그런데 너희가 나에 대한 인애는 아침 구름과 같고 쉬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인애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를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할 때 인애, 자비, 긍휼 등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 충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언약백성에게 나타나는 것을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헤세드를 받은 백성을 ‘헤싣’이라고 합니다. 우리 번역으로 경건한 자 또는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경건하고 거룩하여서 헤싣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결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 밑에 있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 즉 인애를 입었다면 당연히 그의 백성 안에서도 인애가 나오는 것이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가 나오는 것이요,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애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애도 없고, 이웃에 대한 인애도 없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을 받고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지 않았을 때 일만 달란트 탕감하여 주신 분이 그를 다시 붙들어 감옥에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로 말미암아 모두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인애가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힘씀과 애씀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래도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언제 자비와 긍휼이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서의 말씀이 옛날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바로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애가 있습니까? 이름을 인애라고 짓는다고 해서 인애가 나오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심판을 행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았던 이사야서의 포도원 노래처럼 포도원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집안에 칼이 끊어지지 않고 자기의 처들이 백주에 아들에 의하여 범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들이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다 불어버리실 때 여러분이 그동안 의지하였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과 화려함으로 뒤덮어져 있는 거짓된 것들을 태풍이 몰아치듯이 불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날아가 버리고 텅 비어 버렸을 때 참으로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인생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호세아 6:5절입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치고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그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발화하는 빛처럼 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심판이 일차적으로 어떻게 임하시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데도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치는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왜 평안을 빌고, 복을 빌어 주지는 않고 치는 설교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을 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제사 잘 드리고 절기 잘 지키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죽여 버린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 입의 말씀으로 친히 죽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주님의 심판의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 1:16절에 보시면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을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호세아 6:5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장차 주님의 심판이 어디에 임하게 되는지를 미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완강하게 마치 완강한 암소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호세아 6: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것은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렸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면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은 전혀 자비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바알의 영향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손을 잡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의 나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하는 제사와 제물의 헛됨을 고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번제와 제사를 드리면서 오히려 죄를 더 짓고자 한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 당시의 사회 모습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7-9절입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되니 하나님에 대한 인애도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까? 흙덩이가 하나님의 호흡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한 몸인 아내를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의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인애가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가는 곳 마다 이기심과 탐욕을 뭉쳐진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나라를 만드시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도 역시나 하나님의 인애가 나오기 보다는 포학과 살육이 거듭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길르앗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고 피 발자취가 편만한 것입니다. 피 흘리기에 빠른 발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라도 바르게 서야 하는데 제사장들까지 함께 결탁이 되어서 강도처럼 변하여 있는 것입니다.

 

 

 

9절에 세겜이란 도피성이 있는 곳입니다. 제사장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제사장들이 강도떼들이 기다리는 것처럼 살인하고 사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피아 영화를 보면 성당에서 마피아들과 거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신부들과 함께 미파아가 손을 잡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처럼 제사장들이 도적들과 한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10-11절입니다. 이러한 일들만이 아니라 행음하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유다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수 때가 정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추수 때는 정하여져 있는 것입니다. 추수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알곡과 가라지입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인애가 나오고 자비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는 삶을 산다면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세상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고 합니다. 남의 사정 다 봐주고 너는 어떻게 사느냐고 합니다. 무조건 앞서라는 것입니다. 자기 밥그릇 확실히 챙기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일요일 하루만 나가서 믿어주고 세상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에 다짐을, 설득에 설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경쟁과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원도 극성이고, 영어 학원도 극성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애를 찾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라도 인애가 나오고 있습니까?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하여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볼 때는 어떻습니까?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심지어 목사까지 동원하고 성경까지 동원하면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우리가 있는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인애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우리의 이웃에게 도대체 예수 믿는 자로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일요일 교회 나온다고요? 십일조 한다고요? 성경보고 기도한다고요? 봉사한다고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지 않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를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호세아 6:6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죄인을 구하러 오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고 있는 현장에서 주님의 인애를 긍휼을 배척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2:1-8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 ㄱ)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ㄴ)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7 ㄷ)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자 예수님의 대답이 역시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인애와 긍휼입니다. 이것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입고자 함입니다. 나의 의가 없기에 주님의 인애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비함이 아니라 주님의 인애와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주님이 원하시는 이러한 인애가 있습니까?

 

 

 

 

 

호세아 7:1-16  치료  2002. 4. 3.

 

 


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2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3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4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뿐이니라 5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6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 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7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공회에 들려준대로 저희를 징계하리라 13 화 있을찐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찐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15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16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1절에 보시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른 치료를 하려면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바른 진단이 없이 오진을 하여 치료를 한다면 치료가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94:9절에서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 하시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지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보지 못한다고 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는 자들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을 지으신 분이 그것을 모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시편 103:14절에서는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한방의학에서 체질 따라 약을 처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의사가 사람의 체질을 안다고 하여도 친히 지으신 분이 얼마나 정확하게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죄악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옮겨 주셨음을 인하여 찬양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스가랴 12:1절에서는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고 말씀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며 사람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인간에 대해 진단한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진단서 치고는 너무 분량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나고 복잡한지 진단서도 복잡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단을 한마디로 요악한다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러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진단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진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성경은 분명히 인간에 대한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인간의 철저한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의원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인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애가 없었기에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인용하시면서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자신이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의와 자기 행함의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는 전적인 죄인이 아니야, 어느 정도 선을 행할 가능성을 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호세아서를 보아오면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얼마나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분에게 돌아오지 않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죄로 똘똘 뭉쳐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죄가 드러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려고 청진기를 들고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오셔서 진단을 하시니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드러나는 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죄란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궤사란 사기와 거짓입니다.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란 북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에브라임이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면서 동시에 중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요 중심이 이러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온 나라가 사기와 거짓이 가득하고 안팎으로 도적질과 약탈이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확한 현실진단인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들을 다 기억하고 계시는데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의 체질을 아신다는 말씀을 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체질을 주님께서 아시기에 주를 의지하고 주께 회개하면 용서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여러 가지 죄악을 보시고 아시고 기억하고 계시는데도 이러한 것에 대하여 그 마음에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 하면서 죄를 범하여도 즉각 보응을 하시지 않으시니 점점 대담하게 죄를 범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하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악의 행위가 이들을 담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목전에 있는 것입니다.

 

 

 

3절 이하에서 계속하여 이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왕을 기쁘게 하고, 거짓으로 방백을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란의 음모를 품고서 왕과 장관들에게 아첨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왕은 전부 19명이었는데 그중에 8명이 반란으로 인하여 교체되었습니다. 반란은 단지 왕조만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그들의 가족까지 전멸시켜 버리는 반란인 것입니다. 이들의 죄악된 모습을 빵 굽는 화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빵을 굽는 화덕이란 흙이나 돌로서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워 달아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죽한 밀가루가 부풀어 발효가 되면 화덕에서 빵을 굽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떡을 주로 쪄서 만듭니다만 이스라엘이나 건조한 지역에서는 주로 불에 빵을 구워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화덕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단지 불을 피우지 않을 때는 빵이 발효가 덜 되었을 때에만 잠시 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덕이 뜨거운 것처럼 죄를 짓는 일에 늘 달구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화덕이 식어져 있다면 다시 불을 피워서 달구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늘 달구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덕이 아니라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죄를 짓기에 빠르다는 것입니다. 늘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피를 흘리기에 빠르다는 것입니다(롬3:9-18). 이러한 구체적인 죄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4절을 보시면 "다 간음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 간음하는 자이기에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욕에 달아올라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래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는 글자를 지워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간음을 보고서 우리는 뭐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그러한 환경과 여건이 주어졌다면 우리인들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입니다.

 

 

 

이미 마음으로 주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모두가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치부 아이들이 기도시간에 누가 눈을 떴다고 선생님께 이릅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안 것입니까? 자기는 실눈 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배신과 반란입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죽이기를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배신과 반란들이 지도자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하심은 사라지고, 공평과 의는 사라지고, 오직 사기와 거짓말과 강포만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도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단하신 이스라엘의 실상인 것입니다.

 

 

 

8절 이하에서는 "뒤집지 않는 전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병이란 프라이팬 같은 곳에 얇게 밀가루 반죽을 펴서 굽는 떡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지짐을 굽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짐을 뒤집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쪽은 불에 타고 한쪽은 생 밀가루입니다. 그러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뒤집지 않는 전병같이 되어 버린 것은 또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8절 이하의 죄악은 혼잡 됨과, 이방의 세력을 의지함과,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혼잡 됨이란 이방인과 결혼하여 혼혈아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방인과의 결혼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도 이방인과 혼잡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혼잡된 것을 받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뒤집지 않아서 먹을 수 없는 전병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쪽은 종교적 위선이고 한쪽은 이방과 다름없이 세속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느 쪽도 쓸모없어진 모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고 의지하여야 하는데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고 앗수르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에 기대어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의 세력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새 그물로 새를 잡듯이 이들을 떨어뜨려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전에 선지자들이 공회에서 증거한 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만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3절-16절입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고 돌아오라고 고침을 받으라고 말하여도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화를 선포합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13 나를 떠나서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은 반드시 망한다! 나를 거역한 자들은 패망할 것이다. 건져 주고 싶어도, 나에게 하는 말마다 거짓말투성이다. 14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1)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1)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짓이다. 15 그들의 두 팔을 힘있게 기른 것은 나였지만, 그들은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다. 16 2)허망한 것에 정신이 팔린 자들, 느슨하게 풀어진 활처럼 쓸모없는 자들, 대신들은 함부로 혀를 놀렸으니, 모두 칼에 찔려 죽을 것이다.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치료를 받으려면 이러한 실상을 우리가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자신에 대하여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전적인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단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며 또 치료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6:1-3절을 봅니다. "봉독"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오늘도 빈손 들고 나아가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8:1-14  바람을 심고  2002. 4. 10.

 

 
1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7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8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9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10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주었을찌라도 이제 내가 저희를 모으리니 저희가 모든 방백의 임금의 지워준 짐을 인하여 쇠하기 시작하리라 11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13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14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바쁜 봄입니다. 밭과 논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야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심고 자라고 거두어들이는 일들을 통하여 사람의 일생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일년이라고 계산을 한다면 봄의 때가 있고 여름의 때가 있고 가을과 겨울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 본다면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것이 노아 홍수 이후로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8:22절에서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합니다. 노아 언약이라고 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심고 거두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음과 거둠이 땅이 있을 동안입니다. 그러면 땅이 사라지는 순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심음과 거둠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인류가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어 왔는지가 세세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고 거둠에 있어서 바람을 심는 자가 있고 의를 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8:7절에 보시면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사라는 말입니다. 많이 애를 쓰고 노력하여 심었는데 그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하면서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을 가졌다고 큰 소리를 치더라도 그것이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두가 허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호세아 10:12절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기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밭 갈아서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것을 심고 있습니까?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입니다.

 

 

갈라디아서 6:6-10절을 봅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이 말씀의 최소한의 문단이 6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거두지 못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도 거두고 육체의 것들도 다 거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썩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썩어진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는지 너무나 분명하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기 쉽기에 다시 예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학생이 내일 시험을 치는데 같은 지능을 가진 아이라고 할 때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시험 점수를 잘 받겠습니까? 아니면 예배당에 와서 철야금식기도 하는 학생이 시험 점수를 잘 받겠습니까? 물어 볼 필요도 없이 공부한 아이가 시험 점수 잘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겠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이 어렵게 취직을 하여서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친구들 불러서 술 한 잔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고 나서는 감사헌금을 월급의 10퍼센트를 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금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큰 사고가 나서 한꺼번에 날려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 때문에 헌금한다면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잃어버릴까 미리 보험을 들  듯이 헌금하는 것이 무슨 하나님께 헌금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틀리는 것입니다. 돈을 모으려면 헌금하지 않고 모아야 모이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여 의지하면 한번에 불어 버리시는 것이 은혜입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로부터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썩어진 것이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위하여 심는가는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아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기를 '뒤집지 않는 전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의식만이 남아 있는 것은 뒤집지 않아서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요, 뒤집지 않아서 생 밀가루가 된 것은 이방의 사상과 혼잡이 되어버린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달려들 것이라고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신명기 28장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이러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는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8:1절에서 내 언약을 어기고 내 율법을 범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 하여도 그러나 이미 선을 싫어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때에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 하여도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선을 버리고 살면서 그날에 부른다고 한들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1-2절).

이제 구체적인 범죄의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범죄사실이나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도 그들처럼 눈에 보이는 정치와 종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8:3-6절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방백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세운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힘과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시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우상을 만들어 정책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게 한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을 왜 섬기게 될까요? 그것이 사람들을 좋게 하여 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삶이 어려운 것이지 일주일에 한번 제사하는 일이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한번씩 나와서 절하고 제물 바치고 돌아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편리성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대체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의 금송아지들을 부수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는 부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을 어떻게 스스로 부수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적이 쳐들어 와서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상세히 보자면 정치와 종교의 문제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외세를 업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제사를 더 잘 드리자는 것입니다.

 

 

8:10절입니다.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준다는 것은 강대국에 조공을 바쳐서 자기들이 처한 어려움을 타개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힘들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동맹국이라고 약속을 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의 짐만 가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관계라고 하지만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시설의 땅을 제공하고 비용도 상당부분 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는 이런 것을 의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8:11절입니다. 종교적입니다. 에브라임이 제단을 많이 만듭니다. 그러나 제단이 많아질수록 범죄하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제단이 많아지는데 왜 죄를 더 많이 짓는 것입니까? 그들은 제단을 많이 만들면 신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제단을 많이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신이 우리의 이 정성을 보시고 복을 주시리라는 생각자체가 우상을 섬기는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하시는데도 이들은 제단만 많이 만들어 바치면 신이 기뻐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단별로 교세 경쟁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제물을 바치고서는 그것으로 자기들이 먹고 잔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열국에 포로로 잡혀가고 애굽까지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만든 것입니다. 왕궁과 견고한 성읍을 의지하고 그들의 지으신 자를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율법이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12절에 보시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있어도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 가지만 듣고 있습니까? 수십만 가지로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모습은 왜 이 모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당이나 천국 가는 데나 써먹고 세상을 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관계없는 것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관계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관계없다, 나는 그래도 이 땅이 좋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까? 정치 종교 모든 분야가 모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바람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8:7절을 봅니다.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 미친 바람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아! 내가 바람을 심었구나, 하지 마시고

 지금 의를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긍휼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0:12절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호세아 9:1-9  타작마당  2002. 4. 17.

 


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2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3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4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5 너희가 명절일과 여호와의 절일에 무엇을 하겠느냐 6 보라 저희가 멸망을 피하여 갈찌라도 애굽은 저희를 모으고 놉은 저희를 장사하리니 저희의 은 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저희의 장막 안에는 가시 덩굴이 퍼지리라 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찌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9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타작마당과 술틀을 기뻐함

 

1절에서 9절까지는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형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왜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타작마당과 술틀을 의지함 때문이며, 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요 미친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이들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에서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방 사람들이 기뻐하고 뛰노는 것은 언제입니까? 그들의 수입이 늘어났을 때입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나 포도를 수확할 때 또는 양털을 깎을 때 이들은 커다란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확을 준 그들의 신에게 감사를 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기뻐 뛰어 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 뛰어 노는 것이 이방인들과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고 음행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음행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타작마당과 포도주틀을 의지한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타작마당과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타작마당과 술틀을 의지한 것은 이방인과 같아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이신데 타작마당과 포도를 생산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작마당과 포도주를 의지하니 이것이 이방인의 사상이요 바알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음행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인하여 기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쁨입니까? 나의 수입이 늘어가는 것이 기쁨입니까? 주일학교 3학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서 질문을 하였답니다. 세 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 아이가 돈이 제일이라고 하였답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다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 아이는 엄마. 다른 한 아이는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였답니다.

 

 

이 질문을 한 선생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이란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공평하게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에게서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수확이 많아서 창고를 늘리고 이제 편안하게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이방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많은 재물들이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재물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인의 사고방식에서 구원하신 것은 이제 그러한 것을 목숨처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양식도 없고 물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이들이 사는 것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은 양식만 있으면 살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원망이 무엇이었습니까? 떡이 없다 물이 없다는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엇이 없었습니까? 자유가 없었습니다. 진리가 없었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 살아도 내 배만 부르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작마당과 술틀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만 있으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하여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형벌이 무엇입니까? 추방입니다. 약속의 땅에는 비약속의 백성들이 살수 없는 곳입니다. 토하여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미 그 사상이 이방인이 되어 버렸기에 그들은 이방의 땅으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이방의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떡과 포도주만 있으면 살아 갈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가서 더러운 떡을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땀과 노력이, 그들의 섬기는 우상들이 준다고 생각하는 떡과 포도주는 더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식물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더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이 더러운 사상이기에 더러운 떡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 애굽으로 앗수르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여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명절과 절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이방의 땅에서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상당한 집에서 먹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초상집에 들어가서 먹는 것은 일주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어떤 포도주나 떡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겨우 자기들의 먹는 것에만 소용되지 하나님께 드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힘입어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단적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6절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이방의 땅에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재난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을 갈지라도 그리고 애굽에서 그들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곳이 무덤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난하면서 그들이 살아남고자 가져간 은 보물에는 찔레가 덮일 것이요 그들의 장막에는 가시 덩굴이 자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2.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음

 

7절을 봅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미쳤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러하였지만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고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를 보면 뒤의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많고 그 원한이 크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어리석다고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8절도 선지자가 새 잡는 그물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는다고 되어 있는 말씀도 오히려 선지자를 핍박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예언자가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았다. 하나님이 계신 집에서마저 너희는 예언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부패하기를 마치 사사시대에 기브아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기브아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캄캄한 암흑처럼 지금 왕이 있는 시대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가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입니다. 자기들의 타작마당과 포도주는 의지할지언정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26-27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이 말씀은 사마리아 성이 적에게 포위되어서 물가가 치솟아 오른 것입니다. 평소에는 부정하다고 먹지도 않던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니 돈 없는 사람은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자 어떤 두 여인이 자기들의 아이를 삶아서 먹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이를 삶아 먹고서 다음날 다른 아이를 내어 놓으라고 하니 숨기고 내어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재판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왕의 대답이 여호와께서 돕지 아니하시는데 내가 무엇으로 도우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기다리겠느냐며 엘리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가 내일 이맘때면 고운 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사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살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이며 미친 말입니까? 지금 굶어서 죽어가는 지경에, 자기 아이를 삶아서 먹는 지경에,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이나 하는데 어떻게 고운 가루 한 말에 달랑 한 세겔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가 있었다면 나귀 머리보다 값이 더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가가 하루아침에 팔십 배도 더 하락한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왕의 식물을 담당하던 장관은 하늘의 창고 문을 연다고 하여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 장관의 말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어리석고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엘리사가 너는 그것을 보기는 하되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날 문지키다가 사람들에게 밟혀서 죽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기에 애굽으로 앗수르로 추방이 됩니다. 또는 애굽이 살길인줄 알고 스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고서 다시 오물에 뒹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이란 곳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관개 수로가 잘 되어 있기에 사람들이 노력만 하면 먹고 살수 있는 나라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비가 흡수하는 땅이라서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 주셔야 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확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곳입니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까? 댐을 건설하고 저주지를 만들고 관개시설을 만들어 농사지어야지 무슨 짓 하고 있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방인의 모습인가 약속의 백성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리석고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방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타작마당과 술틀을 의지하고 살겠다고 하고 있습니까?

 

 

시편 4:7-8절을 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다른 사람들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으로 기뻐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의로 인하여 기뻐합시다.

 

 

 

 

 

호세아 9:10-17  옛적에  2002. 4. 24.

 


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12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찌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16 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옛날에는'이라는 말만 들으면 지루해 합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고생하였는데 너희는 어떻게 이러느냐고 잔소리하는 것으로 알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카드 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카드만 들고 가면 은행에서 돈이 나오고, 식당에 가서도 카드만 제시하면 밥도 주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젊은이나 아이들에게 ‘옛날에’라는 이야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도 '옛날에'라는 말이 싫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면 옛날 이야기하는 것이 자랑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현재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치고 변변한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지금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면 과거를 우려먹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 다들 어렵고 힘들었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잊혀졌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이야기들은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단어가 '옛적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단어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문맥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하여 넣은 단어입니다. 10절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옛적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옛적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나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기를 광야에서 포도송이를 만난 것과 같고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만난 것과 같았다고 하십니다. 광야란 황무지입니다. 그런 곳에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달려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쁨입니까? 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에서 가장 먼저 익은 열매가 얼마나 먹음직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난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고 찾으셔서 만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듯이,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듯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듯이 그렇게 찾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예수님이 우연히 지나시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주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진 것입니다.

 

 

여기서 예를 들은 다섯 가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었고, 세리요 창기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의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버림 받아야 당연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보다 강하거나 커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작은 나라였습니다.

 

 

신명기 7:6-11절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찌니라"

 

 

택하신 이유는 다만 사랑함을 인하여 기뻐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며 또한 그들의 조상과 세운 언약을 인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코 자기들이 잘나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사랑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입기 전에는 동일하게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버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상태에서 택하심을 입었다는 이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오히려 귀찮은 양 버리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16장에 버려진 계집아이처럼 탯줄도 자르지 않고 씻기지도 않은 채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키워 놓았더니 바람만 피우고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9:10절 하반절을 봅니다.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키우셨는데 이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브올에게 헌신한 것입니다. 바알브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서 바알에게 절하고 그들과 음행하게 된 사건입니다.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것에 몸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을 드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특별히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뜻의 ‘나실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헌신하여야 할 텐데 오히려 우상에게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과 같이 가증하여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하신다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

 

 

11-12절을 봅니다.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처럼 날아가고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낳아서 기르는 자가 있다고 하여도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하셨는지 두로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곳에서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장차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고 그의 자녀들이 끌려가서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신명기 28:62절에서 "너희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간구가 나옵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왜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자녀가 생산되어도 그들이 끌려가서 죽임 당하게 될 바에야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의 간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응답은 심판입니다.

그 내용이 15-16절입니다.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다는 것입니다. 길갈은 애굽의 수치를 굴러버린 장소인데 이곳이 이제는 우상숭배의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쫓아내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치고 그들이 낳은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고 하십니다. 이 정도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이른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함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께서 떠나 버리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12절).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잘난 것이 있어 주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상에게 가서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처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여! 주여! 하면서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에 자신의 몸을 드리고 있는 실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판인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달라는 그 내용이 신약에서 어떤 경우에 나타나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28-31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현장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고 가심을 보고서 가슴을 치면서 울고 따라오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날이 이르면 수태하지 못하고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극한 환난의 때입니다. 전쟁의 때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산들을 향하여 자기들 위에 무너지고 덮어지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여섯째 인을 떼실 때의 상황입니다. 이때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진노에서 가려 달라는 것입니까? 어린 양의 진노입니다. 이러한 진노가 누구에게 쏟아지는 것입니까? 임금, 왕족, 장군, 부자, 강한 자, 종, 자주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들의 소유를 늘리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단지 자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를 늘리는 재미로만 사는 자들이 당할 모습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고 땅의 것들만 구하며 사는 자들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베드로전서 4:17-19절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1)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시작이 됩니다. 지금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를 지금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와 나의 산업과 나의 가진 것들을 의지하고 바라고 믿고 있으면서 어린 양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가 약속하신 나라를 무시하면서 산다면 어찌 심판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고서 회개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떠나버리시면 심판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떠나버리시면 그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관심도 없고 나의 소유 사라짐에만 관심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주님과 함께 사시며 그분만을 인하여 기뻐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0:1-8  두 마음  2002. 5. 1.

 


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3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같으리로다 5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1)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6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2)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7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 이스라엘의 죄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포도나무의 기능이란 나무 자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오직 포도 열매가 제대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의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열매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으로 살고 있느냐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매 맺는 포도나무인데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들의 산업이 풍성해지면 해질수록 우상숭배가 더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다른 성경에서 어떻게 고발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5:1-7절입니다.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1)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예레미야 2:21절에서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않고 원하시지 않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까? 이들이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거짓된 마음으로도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의 삶의 열매란 온갖 죄악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 열매들이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둘째는 거짓 언약을 세우는 것이며, 셋째로는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 가지의 말씀을 보기 전에 우선 두 마음이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정직한 마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꾀를 낸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사람의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천하게 말하는 개나 짐승은 좋으면 꼬리를 흔들고 싫으면 으르렁거립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겉으로 축복하되 속으로는 저주를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그 이웃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나 속으로는 불법과 속임이 가득하다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마음상태입니다. 이러한 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들을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보고자 합니다.

 

 

첫째, 10:3절에서 왕이 무엇을 하리요,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왕을 모시고 사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시면서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왕 사울을 세우셨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왕이 아님을 보이시기 위한 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왕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북 이스라엘의 처음 왕 여로보암은 다윗이 섬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집권하자 말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세우고 하나님이라면서 섬기게 한 것입니다. 이후로 북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왕들이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왕들의 죄를 벌하심으로 백성들이 왕에게 아무른 기대를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란 하늘의 왕을 보여주어야 하는 왕인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니 여호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의 왕들이란 10:7절처럼 물위의 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왕이 거품인 것입니다. 물위의 거품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또는 물위에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됨으로 물거품처럼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두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지 못할 것을 의지하면 그것이 물거품과 수면위의 나무토막과 같은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대선이나 총선이나 지방선거나 간에 그들을 믿을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물거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들에게 무언가 기대를 건다는 것 자체가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증거입니다.

 

 

둘째, 10:4절에서 헛된 말과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운다말씀합니다. 헛된 말이란 입에만 발린 말, 화려한 말 등입니다. 그러면서 거짓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맹세란 거짓을 하지 않기 위하여 맹세를 하는 것인데 오히려 거짓을 하기 위하여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약을 세우니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겠습니까?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밭이랑에 나는 독한 인진과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진이란 독약 같은 풀로 봅니다. 그 정도로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외국과의 언약을 맺어도 얼마든지 배신하여 버리는 상황이고, 국내에서도 백성들 사이에서도 약속을 깨어버리니 믿을 구석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두 마음을 품고 살기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온갖 사기와 거짓이 가득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진실하게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해야 하는데 모두가 자기의 실리를 따라 맹세하고 언약하면서까지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인진과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이 시대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10:4-8절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북 이스라엘은 직접적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하게 되면 그 금송아지를 인하여 기뻐하던 제사장들이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 영광이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가 무너지면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던 모든 자들이 다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앗수르로 옮겨 야렙 왕에게 선물을 주어도 돌아오는 것은 수치뿐일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금송아지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우상을 섬긴 일로 인하여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의 금송아지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는 이미 심판의 때인 것입니다

 

 

이것이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의지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금송아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심판 때에 과연 금과 은이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2:20-22절입니다.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3)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여호와의 한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교만한 것들을 다 낮추어 버리실 것입니다. 여호와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의지하던 금과 은을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바위굴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온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 의 위엄과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인생들이 헛되이 의지하는 것들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호흡이 그 코에 있으니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천하에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 외에는 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참으로 높으신 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안하무인입니다. 자신이 무가치함을 아는 자만이 주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간구를 들어 봅시다.

 

 

시편 80:8-19절입니다.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1)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2)강까지 미쳤거늘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13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3)가지니이다 16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17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나무로 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무성하게 되었으나 이들이 범죄함으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자신들의 의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 아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코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주의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힘이라고 하는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두 마음으로 나뉘었던 것을 회개하면서 주의 자비를 구하는 심령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복은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비같이 임하여야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10:12절을 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돈 없음을 인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 없음을 인하여 간구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가 비처럼 내시시기를...아멘

 

 

 

 

호세아 10:9-15  의를 심고  2002. 5. 8.

 


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의 시대로부터 범죄하였거늘 무리가 기브아에 서서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을 거기서 면하였도다 10 내가 원하는 때에 저희를 징계하리니 저희가 두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저희를 치리라 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3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14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훼파되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훼파한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 15 너희의 큰 악을 인하여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멸절하리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심는 행위입니다. 선을 심을 수도 있고, 악을 심을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을 심을 수도 있고, 게으름을 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도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행하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하여 악한 일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오늘이라는 하루 동안이라도 무엇을 심었습니까?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어 긍휼을 거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고 거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심어 죄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보았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에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알고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주 부지런히 일합니다. 공부 잘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합니다. 권세를 잡기 위하여 수십 년의 고생을 견딥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거둡니다. 얼마 전에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의 주제는 고진감래였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 원인을 찾아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성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도전의식을 심어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성공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그러한 가치로 판단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수 없는 영생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썩어진 것, 또 썩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던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기 위하여 심는 자들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정치도 할 수 있고, 사업도, 공무원도, 무슨 일이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업가가 되어야 해! 최고의 박사가 되어야 해!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선수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목표가 16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정결함 얻음이 목적입니다,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성도의 지극히 당연한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 사도의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늘 갈등하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데 투자한 시간과 물질과 마음이 얼마나 됩니까? 반면에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서 주님을 더 알기 위하여 말씀보고 기도하면서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기위하여 어느 정도로 마음을 쓰고 계십니까?

 

 

고린도전서 3:10-15절을 봅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가 다 마지막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에 각자의 살아온 공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불로 검증을 받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여 보아서 없어지는 것과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는 것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고 없어지는 것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각자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모두 불에 타 없어지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러나 남아 있다면 상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행위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그렇지 않다고 하였지 않습니까? 라고 의문이 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8-10절을 봅니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그 몸으로 행한 대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도 높고 낮고 경쟁이 있는 곳인가,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공력이 불에 태워짐을 통하여 인위적이고 사람 앞에서 행한 것들 즉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지 아니한 것들은 모두 다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업적이라고 하여도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에 타지 않는 것이란 오직 위로부터 온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공로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 상이면서 동시에 날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믿음으로 산 사람은 이 땅에서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가도 순교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맛보는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란 그 어느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영생의 상을 받은 사람이 그 영생을 위하여 살아가면 그 사람은 이미 영생을 맛보며 사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세상 것을 구한다거나, 종교적인 업적이라고 하여도 시기와 질투와 자기 자랑과 인간의 정욕을 따라 행한 것이라면 모조리 불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 구원을 얻겠지만 불 가운데서 나오는 것처럼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받는 상이란 영생의 가치를 더 절실하게 알고 그 값의 귀함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상이요 복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0:32-35절입니다.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바울 사도가 로마로 잡혀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다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주와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라고 하면서 바울 자신이 본을 보인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원리는 자기의 소유가 많아지고 늘어나는 것을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이 세상의 원리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살과 피를 주신 분이시기에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셔서 많은 사람을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으니 가장 복 있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주는 것이 복이 있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가 큰 자인 것입니다.

 

 

다시 호세아서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고 오히려 악을 심어 죄의 열매를 거두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선지자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미 8:7절에서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둔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모두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람을 심어서 그 결국은 미친 바람, 광풍을 거두는 것입니다. 폭풍보다 더 심하게 불어치는 것이 광풍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바람을 심은 자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으며 악을 심어 죄를 거두는 자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도 여전히 관심은 바람을 심고 악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안타까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뭐 다른 거지 뭐! 별 사람 있으려고! 죄인이 별 수 있겠니?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찔림이 있다면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호세아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서 고발하는 죄가 두 가지입니다. 10절입니다.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 저를 치리라고 하십니다. 그 두 가지란 여호와를 떠난 것과 우상숭배입니다. 또는 여호와를 떠난 것과 다윗을 떠난 것으로도 봅니다. 다윗을 떠났다는 것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떠나고 다윗을 떠났다는 것이 결국 우상숭배로 나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죄의 고발이 13절입니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의지한 것입니다. 자기의 원하는 뜻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회사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기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자기의 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마땅한데 자기의 길, 자기의 방법, 자기의 방향을 모두 부정하고 주님의 길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의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네 용사의 많음을 인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언가 믿을 만한 구석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어찌 주님을 의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 그 사람은 악을 심고 죄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절입니다.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이 의가 없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의란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내가 내 의를 주장하는 열심이 오히려 주님의 의를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의롭다 하심을 나의 마음에 심어 주옵소서! 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다른 것을 구할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 없음에 안타까워하면서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갖 가시와 덩굴이 가득한 마음 밭을 말씀의 쟁기로 갈아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레미야 4:3-4절입니다. "3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가시덤불에는 파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아예 가시덤불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말씀을 처음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다가 시련이나 재물의 유혹이 오니 그냥 넘어지고 결실치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말씀의 능력은 오늘도 이러한 심령을 갈아엎으시고 회개케 하셔서 의가 비처럼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의가 비처럼 임하시는 것은 바로 주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호세아 11:1-11  불붙는 긍휼  2002. 5. 15.

 


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2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5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고' 이 말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 랍비로서 20세기를 살다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사람의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유대인이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는 않지만 그가 구약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 중에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고’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게 늘 망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도 이 말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은 호세아 선지자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서도 다시 집을 나갑니다. 그러자 호세아 선지자가 다시 가서 값을 주고 데리고 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반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인간이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비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11: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23절에서 처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어리다고 하십니다. 어리다는 것은 아직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그들이 강하거나 잘난 것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작은 나라였다고 신명기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불러내신 것은 오직 사랑하심과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신명기 7:6-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러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형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지런히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응. 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수록 더욱 멀리한 것입니다. 바알들에게 제사하고 그들이 아로새긴 우상에게 분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멀리 도망가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자식을 부르면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리 도망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가 죽으라고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과 이스라엘의 반응. 3절입니다. '그러나'라고 말씀이 시작됩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도망가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아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명기 1:31-32절을 봅니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들을 안음같이 안아서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안아서 인도하시는데도 그들이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포기하여야 합니까? 안고 있는 이스라엘을 던져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 4절입니다. 걸음을 가르치고 안아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제는 사랑의 줄을 묶어서 끄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아니 하시면 아무라도 주님께 올수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셔야만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멍에를 벗기시고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에서는 인정의 줄과 사랑의 끈으로 둘러업고서 가슴을 풀어헤쳐 젖을 먹였다고 번역합니다. 이만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면 그 사랑의 품안에 거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반응. 5-7절입니다. 계책을 세웁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품안에서 떠날까하면서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계책이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계책을 믿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칼이 저희의 성읍을 치고 문빗장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는커녕 결심하고서 물러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하여도 듣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소를 물가에 끌고 가더라도 물을 먹고 안 먹고는 소에게 달린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래서 최종 결정권을 사람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결심하고 주님을 떠나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8-11절입니다. 에브라임이여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불살라진 근처의 성읍입니다(신29:23). 이스라엘의 소행을 보자면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유황불에 살라져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속에서 돌아서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기 때문입니다. 불쌍하여 마음이 격하여 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 마음이 타는 듯하여 물러가서 울었던 거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 불붙듯 하기에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하자면 천번 만번 버림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무궁하심을 인하여 버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몇 번만 잘못하여도 때로는 단 한번의 실수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떠한지를 성경 몇 곳을 봅니다.

 

 

예레미야 31: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브라임을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하여도 깊이 생각하시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측은한즉 하나님께서 반드시 긍휼히 여기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23절입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오직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주의 성실이 크심으로 진멸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자처럼 일어나셔서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시면 온 세상에 흩어졌을지라도 자기 백성은 여호와를 좇게 될 것입니다. 서편에서는 지중해 바다입니다. 각 섬들에서 올 것이요, 애굽은 남쪽이고 앗수르는 북쪽입니다. 동쪽은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곳은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까? 떨면서 새 같이 비둘기 같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떨면서 오지만 와서는 각 집에 머물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84:1-4절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의 집에 거하는 자의 복을 노래하면서 참새와 제비도 자기 집과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흩어져서 참새처럼 비둘기처럼 약하고 두렵고 떠는 자들이라도 주께서 불러 모으심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안전히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절에서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15절입니다.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ㄴ)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11: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헤롯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가 오게 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어 내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100%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 안에서 긍휼입니다. 이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 안에서만 자기 백성이 긍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란 단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마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끝없이 반항하고 거역하고 결심하고 돌아서는 그들을 또다시 찾아내시고 안으시고 사랑의 줄로 묶어서 결국 주님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은 자신의 무능과 죄악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소망을 주의 긍휼에만 두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이 불붙듯 하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호세아 11:12-12:6  날마다  2002. 5. 22.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우리가 살아 숨쉬는 한 날마다 우리 안에서 튀어 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내 안에 이러한 것들이 언제 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실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발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산다면 자기 안에서 나오는 악도 정당화 시켜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정보를 선별하여 취하기도 바쁜데 언제 진지하게 말씀 앞에 설 시간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말씀조차 공식화 하여 빨리 듣고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평생동안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면 반드시 말씀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노출시키기기를 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속마음을 말씀 앞에서 들추어내어 보고자 합니다. 

 

 

11:12절입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은 궤휼로 하나님을 에워쌌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거짓과 궤휼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러나 금송아지를 섬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고자 하는 자들을 가로 막으면서 이것이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거짓과 궤휼로 하나님을 에워싼 것입니다. 유다는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보다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늘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을 가로 막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까지 막아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내가 있음으로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거짓과 궤휼로 가득한지 주님 앞에서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과 가치를 늘 세상의 기준에 두고 있다면 우리가 거짓과 궤휼로 주님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와 대화를 하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정말 당신은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군요! 다른 소망이 있군요! 그들에게는 마치 비현실적인 사람처럼 꿈꾸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서 어린아이가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나로 인하여 주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려진다면 이것이 거짓과 궤휼입니다.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보면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하나님은 간곳없고 금송아지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이 교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번창하는 사업장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늘 고정되고 있습니까? 늘 주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늘 이랬다 저랬다 정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목사이기에 늘 주님만 바라보고 살 것 같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정함이 없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행한다고 1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도 ‘날마다’로 잡아 보았습니다.

 

 

12:1절을 봅니다. 에브라임이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이미 8:7절에서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바람이란 헛된 것입니다. 헛된 것을 심고 헛된 것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먹어야할 생명의 말씀은 먹지 아니하고 헛된 정욕을 위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동풍이라고 합니다. 동풍이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인데 곡식을 마르게 하고 집을 날아가게 하고 배를 깨뜨리는 그런 바람이라고 합니다. 광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는 거짓과 포학을 더하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굽에 기름을 보내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살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앗수르와 애굽에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생명처럼 여기는 돈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로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와 바라는 것이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면 우리가 지금 바람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면 계속하여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고 바람을 먹고 동풍을 따라가는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막으실 것입니다.

 

 

1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 고집부리며 헛된 바람을 쫓아가고 있으니 그 소행대로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벌주심이 은혜요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에 날마다 거짓과 궤휼로 살아가는데도 그대로 방치하여 두신다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쟁변하시고 벌주시고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벌과 보응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인 것입니다.

 

 

이 사건을 야곱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봅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삶은 그의 이름대로 교활하고 거짓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2:3절입니다. 태에서 그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곱입니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은 속이다, 불의에 남의 뒤를 치다, 발뒤꿈치를 들었다 등의 뜻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배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형을 속여서 아람으로 도망가고 그곳에서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겼다고 합니다. 다시 3-4절에 보시면 장년에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힘을 가지고 덤벼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에서의 첩자인줄 알고 덤벼들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천사인줄 알고서 울면서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울면서 간구하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만 여기서는 울면서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태에서부터 싸우는 자, 겨루어 이겨야 되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천성입니다. 본능입니다. 이러한 야곱이 70세에 고향을 떠나 죽을 고생을 하면서 20년을 지내고서 벧엘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벧엘로 올라가다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날들을 자기 힘을 의지하고 성공하고자 애를 쓴 그 야곱의 허리를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힘을 의지하려고 하여도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호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야곱처럼 우리도 날마다 살기위하여 발버둥치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형님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장인도 아내도 심지어 하나님도 나를 도와주어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날마다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무슨 수로 막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신 것입니다. 야곱 같은 자를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의 백성으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언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신 것입니까? 그리고 언제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창세기 28:10-19절.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직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1)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가다가 들에서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타나셔서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태에서 부르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마침내 이루셔서 20년이 지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건데 야곱의 어떠한 선행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벧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말씀하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약속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만들어 내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어내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시대에 야곱의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2:6절입니다. 돌아오라, 인애와 공의를 지키라,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을 보아라! 그렇게 나면서부터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그, 장년이 되기까지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그 야곱을 꺾어 이스라엘로 만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고 하나님만 항상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망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남겨진 자들은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남겨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택하시고 남겨진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1:25-32절입니다. "봉독"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29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불순종이 주특기입니다. 본능입니다. 이미 불순종 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날마다 거짓된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3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날마다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은혜로 나온 자들은 결코 자기의 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인애와 주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며 날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호세아 12:7-14  나는 부자라  2002. 5. 29.

 


7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0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14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할 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단지 금송아지를 섬긴다든가 이방신을 섬긴다든가 하는 그런 것만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관계, 경제활동에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로보암 2세 시대로서 북 이스라엘이 아주 번성하던 때입니다. 부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선지자는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자가 된 것이 우리의 정당한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는데 웬 잔소리냐는 식입니다. 나는 실로 부자라, 그렇지만 내가 재물을 얻고자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왜 하는 것입니까? 단지 먹고 살기 위하여서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자가 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았습니까? 농가를 생각하여 보면 집에서 옷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자급자족에서 조금 남는 잉여생산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서로 필요한 것들을 바꾸며 사는 물물교환을 하였지요. 그러나 이것이 불편하니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활동이 점점 발달되어서 이제는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없는 물건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건만이 아니라 무형의 가치까지 사고파는 것입니다. 심지어 모든 인간관계까지 전부 돈으로 환산하여 마케팅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경제활동입니다. 그러므로 공간과 물자의 상품화가 아니라 경험과 시간의 상품화가 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저는 상고(商賈)여늘' 이라고 말씀합니다. 상고란 장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상고란 말을 직역하면 가나안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가나안이란 무역이 활발한 지역입니다. 특히 두로와 시돈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무역이 발달하고 바알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과 상고라는 말을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에브라임이 가나안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장사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고가 되어버린 것입니까?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詐取)하기를 좋아하는 장사꾼이 된 것입니다. 사기치고 강탈하는 장사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장사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장사할 때 사용하는 되와 말과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들이는 되와 저울추와 파는 되와 저울추의 용량을 다르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상은 어떠하였습니까?

 

 

아모스 8:4-6절을 봅니다. "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8;1절에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십니다. 이것은 끝이라는 뜻입니다. 왜 끝이 이르렀는가하면 그것은 거짓이 가득한 경제활동인 것입니다.

아모스 2:6-8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이방 장사꾼처럼 변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활성화 되고 부자가 되고나니 모두가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민중들은 여전히 고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소수의 부자가 생겼다는 것은 다수의 가난한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자기들이 정당하게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쓰는데 웬 잔소리냐는 것입니다. 장사하지 않고 월급을 받아 부자가 된 사람이면 정당한 것입니까? 월급을 어떻게 주는 것입니까? 결국은 물건을 생산하고 물건을 파는 일에 동원되었기에 월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장사하여 돈을 벌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사고파는 경제체제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곳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가나안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모습, 즉 상고의 모습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를 받아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수기 8:7-20절을 봅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게 되면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은금이 증식하고 부자가 됨으로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의 능력과 자기들의 힘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을 다시 망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자기들의 부가 하나도 죄된 것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종의 신분에서 나온 것입니다. 금은 패물을 들고 나온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입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교만을 광야의 상태로 돌려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아무 생산물이 없는 곳입니다. 물도 없는 곳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이상을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10절). 아모스 선지자가 여름실과 한 광주를 보았다는 것은 이제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야곱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아람에서 자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고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친 것입니다. 사람을 섬기고 양을 친 것은 순전히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에 이러한 야곱을 다시 부르시고 얍복 강가에서 그의 허리를 치심으로 이스라엘로 만드신 것입니다. 야곱을 이렇게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선지자를 보내어 보호하셨다고 하십니다(12절).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가나안이 되어버린 장사꾼이 되어버린 자리에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면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질이든 영적이든 간에 우리는 스스로 부자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자기가 부자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 위하여 살고 있다면 이미 부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의 동기를 주님께서는 이미 행위로 보시는 것입니다. 결국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주님 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과 내 힘과 내 수단과 방법으로 살겠다는 것이 부자의 마음입니다. 돈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로 사는가! 자기 힘으로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은혜로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돈이 없어도 자기 힘으로 사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래도 이만하면 되었지 하는 자세는 부자의 자세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은 역시 영적인 교만인 것입니다. 이러할수록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실로 부자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돈의 유무만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 의의 문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가 없는 자는 주님의 의를 구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자기의 가난함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적인 가난함을 알지 못하니 매사가 미지근합니다. 차지도 덥지도 안한 것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부자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금도 많고 좋은 옷도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할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고급 옷으로 가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만들어진 의의 세마포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에 눈 밝지 말고 영적인 것들에 눈 밝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한지를 아는 자만이 열심을 낼 것입니다. 자기의 의 없음을 인하여 애통하며 주님께 간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사가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24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이 무역의 중심입니다. 모든 세계의 무역이 이곳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필품만이 아니라 사치품과 사람의 영혼까지 사고파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가나안이 상고가 되었다고 하셨는데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과 무역하는 자들이 모두 상고들입니다. 그들이 치부하고 있는 것들이 영원히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9월 11일 미국 무역센터가 테러 당하고 그 건물이 해체된 자리에 다시 더 튼튼하고 더 견고한 빌딩을 세운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세상의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는 자리로 가지 마시고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3:1-8  주밖에 없네!  2002. 6. 5.

 


1 에브라임이 1)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2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3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6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 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일하심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늘 다른 주를 찾아 다녔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주인이 분명히 계시는데도 우리는 늘 또 다른 주를 찾아 나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죄의 모습입니다. 참되신 주님을 떠나 인생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 원초적인 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미 주로 설정하여 놓고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들을 찾아서 이러 저리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 외에 주를 찾아 나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무엇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하면서 끊임없이 이것 저것을 주워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진리가 무엇이며 주님이 누구신지를 이미 증거하고 있습니다.

 

 

13:4절을 봅니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나오면서부터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 여호와임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십계명에서 분명히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이나 그 무엇이나 간에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는데 이 주님이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철학과를 갔답니다. 그래서 교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고, 어느 철학자는 저렇게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수님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니 대답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방황하면서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물장사를 만났는데 고물 장사의 리어카에 철학 원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둘 다 진리를 찾아 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내 인생의 주인이냐를 찾아 다녔다는 것입니다. 결국 김진홍 목사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오랜 후에 우연히 그 고물장수를 만났는데 전자제품 고물상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인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찾아 헤맨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 되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주인을 찾은 것이요 진리를 발견한 것이요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내가 찾아서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24-26절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함과 같으니라"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누구인지를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 아니었던 자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백성이라 사랑한다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10:20-21절입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구하지도 찾지도 아니하던 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종일 손을 벌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찾아진 백성들이 주를 믿는다는 자들입니다.

 

 

고멜이 호세아를 찾아 간 것이 아니라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것도 음란한 여인 고멜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러나 고멜은 호세아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집을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또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떠나 다른 곳으로 헤매며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여호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는 것입니다.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들고 진실함으로 장가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부된 이스라엘은 거듭 바람을 피울지라도 주님의 은총과 긍휼의 무궁하심으로 진실함으로 장가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대도 우리는 하나님을 싫다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간섭 같아서 싫은 것입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상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참된 복이며 기쁨인데도 그렇게 살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너는 네가 주인이야, 그러니 네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살아야지, 어떻게 늘 남의 간섭을 받고 살아야 되겠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 13:1절과 6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셨는데 그들이 배가 불러지니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모세를 통하여 경고한 바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8:11-16절입니다.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렇게 경고 하셨습니다만 슬프게도 그 경고는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먹고 배부르게 되니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지금까지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서 사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온 세상에 가득한 것입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즐길 것도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 한분만으로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까? 너무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13:2절에 보시면, 바알로 인하여 범죄 함으로 망하는 것을 보고서도 더욱 범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고 제사를 드리고 송아지의 입에 입을 맞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경배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인사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인사하고 경배하는 것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절과 7절과 8절을 봅니다. 이러한 자들이 아침 구름 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이,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죽정이 같이,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같이 사라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고 배불러져서 교만한 자들이 이러한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와 표범같이,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서 찢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공격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불러짐으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을 잠시 잠간 후에 보면 자세히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며 따라간 것들도 이러한 모습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4절을 봅니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냥 사라지도록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찾아다니고 있습니까? 이미 예수님을 알고 믿었으면 다른 것들은 다 허상이며 연기같이 구름같이 안개같이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러한 것들에 미련을 두고서 쫓아다니고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정말 사라지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호세아 2:5-7절을 봅니다. "봉독" 가시와 담으로 막으셔서 좋아하여 따라가던 것을 찾을찌라도 찾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제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고멜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이 자유인줄 알고 재산 정리하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그곳에서 기근이 일어나자 돼지보다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자격은 없으니 품꾼의 하나라도 여겨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심정이 아니라면 아직도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헛되고 헛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생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 여인은 자기의 갈증, 목마름만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 다섯을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와 살고 있어도 갈증은 더한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물동이도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간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주님을 만나기는 만난 것입니까? 날마다 세상에 대하여 나의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우리의 갈증이 더하여 가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복음성가 중에서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배경은 역대상 17:20절 말씀인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께 한 고백입니다. 주 밖에 없네, 주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언제 나오는 것입니까? 오랜 세월 찾아서 안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헛되고 헛된 것들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낭패와 실망당한 후에 주 밖에 없네,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를 구합시다. 아직도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헛되고 헛된 것들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알게 하시고 나에겐 주 밖에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습니다. 나의 남편도, 나의 자녀도, 목사도, 교회도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만이 우리의 신랑이요 구원이시오 생명입니다. 주 밖에 없네! 우리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3:9-16  하나님의 대적  2002. 6. 12.

 


9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0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15 저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이스라엘이 왜 망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이었습니다. 참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짓 도움을 찾아 나선 것이 이스라엘의 패망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을까요? 그것은 자기들의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하루를 살았습니까? 햇빛이 없으면 살수가 없었고, 공기가 없었다면 5분도 살수가 없었음을 인식하셨습니까? 우리가 사는 일에 정말 필요한 것들은 모두 무상으로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것들을 은혜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돈만 있으면 살겠는데, 하면서 하루를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패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면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고 말과 병거를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한 이유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로 왕을 구한 것입니다. 10-1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언제입니까? 사무엘시대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하면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는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죽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시기에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지도자가 없어지자 백성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제사장이 있고, 율법이 있어도 그들을 통치할 왕이 없다는 핑계로 마음대로 산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량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왕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8:4-7절입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면서 우리도 열방과 같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을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처럼 인간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제도를 알려줍니다. 자녀들을 모집하여 갈 것이요,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갈 것이요, 십일조를 취하여 갈 것이요, 왕으로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계속하여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을 허락하시는데 분노하심으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북 이스라엘의 왕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서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여로보암이 세금을 가볍게 하여 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자 북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왕이 되자 마자 여호와를 배반하였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남 유다의 성전에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면 그들의 민심이 남으로 향할까 염려하여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의 왕조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 세우시고 진노하심으로 폐하시는 전형이 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조가 여로보암 1세로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209년간 19명의 왕이 다스렸습니다. 아홉 가문에서 왕들이 나왔고 왕가가 바뀔 때 마다 예외 없이 피를 흘리는 혁명으로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하였으나 그러나 왕으로 인하여 오히려 백성들이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쪽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인하여 너그럽게 대하여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남 유다도 결국은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데 그러나 믿음이 없으니 계속하여 눈에 보이는 왕과 눈에 보이는 힘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왕들이 과연 이스라엘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좋아해서 구한 왕으로 인하여 고생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로 인하여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도움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선지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22절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인생의 도움을 구하고 있고, 전쟁에서 구원하지 못할 말과 병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3:16-22절입니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18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구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리고 가장 필요적절하게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왕을 구하자 분노하심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여기 왕이 있다, 한번 고생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왕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106:14-15절입니다.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백성들이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크게 발하여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탐욕스럽게 끌어 모았는지 메추라기를 무더기로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탐욕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고기를 허락하셨지만 그 응답이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저주하시기로 마음먹은 자의 요구는 쉽게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치시고자 하시는 자의 기도는 쉽사리 듣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라면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 우리를 망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만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을 먹고 살아도 남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 것을 구하고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세에 재물을 쌓아둔 것이 그 사람에게 재앙이 되고 화가 되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모으고 또 모으려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그의 재물 많음이 오히려 그 영혼을 망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왕을 구한 것만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죄악도 역시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12절에서 13절입니다. "봉독"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고 그 죄가 저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쌓이고 쌓인 것입니다. 드디어 터뜨려질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해산하는 것처럼 때가 차매 그 쌓여진 죄로 인하여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미 신명기 32장에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중에 지식이 없도다 29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 31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32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34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37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38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로 일어나서 너희를 돕게 하라 너희의 보장이 되게 하라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쌓이고 쌓인 죄악을 심판하실 때 그들이 평소에 의지하였던 신들과 반석들에게 돕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쌓이고 쌓인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을 그렇게 심판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은 속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40-43절입니다. "40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41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42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43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위하여서는 속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대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다른 것들을 자기 힘으로 삼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힘으로 삼지 않고 다른 것으로 자기의 힘을 삼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요 원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대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구속을 입은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미 세상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사망의 권세를 이겨버린 주님의 능력 안에 살기를 소원합니다.

 

 

호세아 13:14절입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고린도전서 15:50-58절입니다. "봉독" 호세아서 13:14절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능히 이겨내시고,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합시다.

 

 

 

 

 

호세아 14:1-9  돌아오라  2002. 6. 19.

 


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4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그동안의 호세아서 본문의 말씀 중 오늘이 마지막 장입니다. 그 결론은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음란한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독거리며 다정히 말씀하시고, 때로는 호되게 매를 드시기도 하시면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를 드시는 것도 돌아오라는 사랑의 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돌아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끝끝내 고집하며 돌아오지 않다가 결국 낭패와 실망을 당한 후에 겨우 남은 자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으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매를 드셨는데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뿐인데도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땅이 황무하고 성읍이 불타고 이방인에게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의 원두막처럼, 원두밭의 상직막처럼 에워싸인 성읍처럼 겨우 조금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님께서 조금 남겨두셨기에 남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사야서에서나 호세아서에서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돌아오지 않은 것은 왜 입니까?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소리치는 선지자들을 돌로 칠지언정 돌아오지 않는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고쳐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고쳐서 돌아올 자들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고서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고침을 받았기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셨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이렇게 각기 제 길로 간 것은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각자의 탐심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미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수중에서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먼저 찾아내시고 고치심으로 돌이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 살려내어야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호세아 14:1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 엎드려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불의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의함으로 엎드려진 그들이 주님께서 살리시고 남기셔서 돌아오게 하실 때 어떤 자세로 돌아오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주님께서 고치시고 돌이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구원 얻는 방법론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구원받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구원 얻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받은 주의 백성인가를 찾아내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비결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로 돌아 왔다면 2-3절의 자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찬송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2절에서 너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2절의 내용입니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고 합니다. 자기 불의로 엎드려진 것을 알기에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고서 그것을 제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하는 것입니다. 불의로 망한 자가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선한 것이란 회개하는 심령인 것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을 회개하는 입술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입으로 나오기에 입술의 열매를 받으소서! 하는 것입니다.

 

 

시편 51:14-17절입니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노래하는 것입니까? 주의 의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술로 주를 찬송하고 전파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사나 번제를 즐겨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14:1-2절의 내용과 시편 51편의 내용이 의미상으로 거의 같은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께로 돌아온 자는 3절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고, 말을 타지 않고, 우상을 향하여 너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않고 고아의 심정으로 주의 긍휼을 구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호세아서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이사야, 예레미야, 다른 선지서 등에서 아주 많이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힘으로 삼지 않고 고아의 심정으로 오직 주님께 긍휼을 얻는 것입니다, 하고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런 방식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서 그 패역을 고치시고 주님의 진노가 떠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상한 심령, 고아의 심정으로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까? 강대국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힘과 실력, 경제적인 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행한바 의롭다는 일을 바라보지 않고 고아의 심정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반대로 주님을 부르면서 강대국 되게 해달라고 하고 말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경제대국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오전에 자주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 또 왔었습니다. 마치 돈이 하나도 없어서 없노라고 하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48년만에 월드컵 4강전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기분 좋게 돈 좀 주면 좋을 텐데,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하고 월드컵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였지요! 그러자 신학을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으면 축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는 말투였습니다.

 

 

이 사람이 평소에는 아주 말도 없이 불쌍한 표정으로 구걸하는데 오늘은 돈이 없다고 하니 목사 장로 전도자 뺨치게 자기도 말 잘 한다고 하면서 나쁜 짓 안하고 사는 것을 보아서라도 도와주면 될 텐데 하면서 투덜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의 마음하고 우리의 마음하고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월드컵 성공을 위하여 교회에서 빌고, 절에서도 빌고, 그렇게 근엄하던 유림들도 빌고 있으니 우리나라 잘된다는 것에 거지도, 교도소에서도 다 기뻐하는데 왜 목사 너는 그런 소리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쁜 짓 안하고 다니는 것만 해도 도와줄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가난한 심령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무슨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였기에 이런 고생을 주는 것입니까? 내가 그래도 나쁜 짓 안하고 그래도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이렇게 예수도 믿는데 이렇게 도와주지 않으시렵니까? 라는 식이 된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께로 돌아온 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기에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나의 힘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예레미야 17:5절에서 사람을 믿고서 그 마음이 하나님께 떠난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든 국가이든 누구이든 간에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서 주님께 나온 자들이 주님께 돌아온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17:5-8절을 봅니다.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돌아온 자들에게 주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돌아오게 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은 정말 생명의 풍성함,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맛보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의지하고 따라 갔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서 이제 주님께서 진노를 거두심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4-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패역을 고치시고 사랑하심으로 그 진노가 떠난 자들에게 이슬과 같고, 백합화 같이 피겠고,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고, 그 가지가 퍼지고 감람나무 같고 그 향기가 레바논의 향기 같으며 곡식같이 소성하고,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시적인 표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는 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슬이 촉촉이 적셔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늘 임하는 것과, 백합화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도, 백향목 같이 뿌리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자라는 것 등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생명의 기쁨인 것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오직 주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9절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이 말씀을 지혜가 있어서 깨닫는 자는 의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이 돌에 거쳐서 넘어질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걸림이 됩니까? 기쁨이 됩니까?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될 것이요 다른 것을 힘으로 삼는 자는 걸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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