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공 상희 2009. 5. 6. 12:10

 

 

 

 

 

 

 

아모스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아모스 1:1-5  부르짖는 여호와  2003. 5. 21.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 있는 때입니다. 남쪽 유다 왕은 웃시야이며 북쪽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를 여로보암 시대의 지진 전 이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서 예언을 하기 시작하고서 이년 후에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지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모스 후대의 선지자인 스가랴 선지자도 예루살렘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이 지진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슥14:5). 지진은 땅을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히12:26-29).

아모스 선지자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니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너는 남쪽에나 가서 밥을 벌어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모스는 자신은 선지자나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며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인데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증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북 이스라엘이 솔로몬 사후 가장 부강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부강하여질수록 북 이스라엘은 사치와 타락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그 타락한 내용이 2:6-8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르짖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을 듣고서 회개하면 살 것이지만 외면하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외면하고 심판을 당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거짓으로 가리며 예언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기들이 부자로서 잘 살고 있는데 왜 간섭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부유층이나 누리는 것이지 가난한 자들의 학대당함과 고통에는 아랑곳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 것입니다. 은혜의 나라가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전락이 된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어 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오늘 이 세상도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부르짖음에 관심이 없는 것이 기근입니다.

 

 

 

아모스 8:11-13절을 봅니다. "봉독" 북 이스라엘이 경제적인 호황이지만 말씀의 기근입니다. 이 기근이 우리의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부르짖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부르짖으시는 것입니까?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그 부르짖음의 출발지는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부르짖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의 대상이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이지만 주변국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주변 국가들을 차례대로 심판하여 오면서 최종적인 표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안일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안일합니까?

 

 

 

6:1-7절입니다. "봉독" 안일하고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심판이 닥치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켜며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고 합니다. 다윗이 악기로 여호와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흥을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이 포도주에 취하고 기름을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중심지파가 에브라임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상관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이들도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으나 그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도대체 이렇게 하면서도 여호와의 날을 사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기를 지키고 성회로 모이고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살진 희생을 화목제물로 드리고 찬양도 하는 것입니다(5:21-23).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공법과 정의가 없어진 것입니다(5:24). 사회는 온통 포학과 강포와 부르짖음이 가득한데 종교적인 행위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시행되어야 마땅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나안 땅에서 이렇게 살다가 망한 나라들의 모습처럼 되어버리자 심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5:18-20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그저 세상이 주는 것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절기도 지키고 헌금도 하면서 산다고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러면서 심판의 소식은 나와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목표로 하면서 주변국부터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서서히 가운데로 몰아가면서 폭격을 하듯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유다를 심판하시면서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지금 다른 나라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긴장하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3-5절입니다. 다메섹의 죄악과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서너 가지 죄악이란 쌓이고 쌓인 죄라는 것입니다. 이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 북동쪽에 위치하였고 ‘수리아’라고도 합니다. 이 나라가 자주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한 것입니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한 이러한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의 궁궐에 불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아합 집안의 심판을 위하여 엘리야에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람의 왕 벤하닷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어 그 이름을 벤하닷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불로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의 거민을 끊으며 벧아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어버려, 아람 백성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하시겠다는 심판의 선포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5절)이기에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소식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부르짖음을 외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아니합니까? 온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이런 나라에서 주님의 부르짖는 소리,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합니까? 이 세상의 나라들만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닮아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마저 이런 모습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상관없이 자기들의 기호와 취미 따라 모이고 있다면 이것이 심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16-17절. “봉독” 아모스서에는 이스라엘이 최종 심판이었지만 신약에서는 교회가 먼저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모스 1:6-12  죄와 심판  2003. 5. 28.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붙였음이라 7 내가 가사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거민과 아스글론에서 홀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음이라 10 내가 두로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12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북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 심판을 목표로 하면서 주변 국가들의 죄악과 심판까지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목록은 한두 가지나 서너 가지인데 다메섹, 가사,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까지 모두 서너 가지 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 번, 네 번 거듭하여 짓는 죄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질적인 것이며 쌓이고 쌓여서 나오는 죄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평소에 착한데 어떤 경우에 한두 가지 죄악된 행위가 나오면 이것은 이미 그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심판을 받지 아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의 결과인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심판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로마서 1장에 의하면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유다나 이스라엘 백성은 버려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나 이스라엘이 당하는 일들로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이 도구로 쓰이는 것입니다.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죄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와 벌이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변 국가들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본문이 누가복은 13장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 몇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은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 죽은 그들이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도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죄가 없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지진과 전염병과 난리와 흉악한 인간의 범죄들이 날마다 터져 나오는 이 땅위에서 무엇을 보아야 인간이 전적인 죄인인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 2천 7백 년 전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들의 죄의 모습이나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세를 사는 우리를 위하여 경계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그 구체적인 죄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6-8절은 블레셋에 대한 내용입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이 나옵니다. 사사기에 자주 나오는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가드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이들 다섯 성읍이 블레셋으로 불립니다. 사사기에서 보면 가장 많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나라가 블레셋입니다. 이 블레셋이 지금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러면 이 블레셋의 서너 가지 죄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시면 인신매매입니다. 오늘날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신매매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에돔으로 팔아넘기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인신매매 시장이 형성되었기에 이곳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다른나라 사람들도 잡아 갔지만 유대사람들을 잡아가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가사에 불을 보내고, 아스돗과 아스글론에서 홀 잡은 자와 그 거민을 끊어버리고 에그론과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역사상 그렇게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9-10절은 두로에 대한 죄와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로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고 합니다. 인신매매는 블레셋과 같은 죄목인데 두로는 그 형제의 계약을 파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로는 다윗과 솔로몬시대 때에 성전에 쓸 나무를 공급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식량과 기름을 받아간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를 파기하고 자국의 이익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에돔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로 성에 불을 보내서 그 궁궐들을 불사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오늘 세상에도 다반사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인신매매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로잡아가서 장애자로 만들어 거리에서 앵벌이하게 하는 일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사채를 쓰게 하고서 담보로 자신의 신체를 잡아두고서는 결국 이자가 원금보다 더 많아지니 몸이 팔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파기는 개인간이든 국가간이든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이 늘 일어나고 있는 이런 세상이 어찌 심판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우리는 당장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이들과 다를 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환경과 여건이 그렇게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 악이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언제 그런 모습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의 죄악에서 살펴보면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이웃에 대하여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돔의 힘이 더 강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튼튼한 요새 같은 곳에서 살면서 그들의 힘을 믿고 살았기에 교만하였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에 속국이 되기도 하였지만 늘 이스라엘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죄악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여 분을 끝없이 품었다고 합니다. 이 에돔 족속은 야곱의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시에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을 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2:1-7절입니다. “봉독” 출애굽시에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준 기업은 한 발자국도 내어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돔 족속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월이 지나서 자기들이 강하여지자 교만하여져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에 입었던 긍휼을 잊어버리니 이제는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죄악을 더욱 세밀하게 고발하고 있는 오바댜서를 봅니다.

 

 

 

오바댜 10-14절입니다.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에돔이 야곱에게 포학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동정하고 위로하기는커녕 방관한 것입니다. 방관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도망가는 유대인들을 가로 막으며 그 대적에게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돔의 죄악입니다.

 

 

 

결국 온 세상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받은 사람, 언약을 받은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언약과 상관없이 드러나는 자기들 스스로 정한 악과 선이라는 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을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끼리는 그러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자기들이 살아가는 개인이나 단체에 얼마나 이익을 주는가를 진리의 척도로 삼고 있는 것이 인간의 정신상태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무조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잠시 이방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여 자기들의 잘못을 책망하시기는 하시지만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편이 되어주시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생각마저 죄로 인하여 틀린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국을 차례대로 심판하여 나가시면서 결국 유다와 이스라엘까지 죄를 지적하며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언약을 중심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야곱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이루심에 대하여 반발하는 자들의 악을 드러내시면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고 오해하고 자기들 방식으로 이루어 가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것들을 부수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드디어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22-23절입니다.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ㄱ)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모두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들이 잘 났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유도 모르면서 미워함으로 율법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까? 이를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심판의 기준은 이제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는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주님의 은혜를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모스 1:13-2:5  배은망덕(背恩忘德)  2003. 6. 4.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14 내가 랍바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리바람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15 저희의 왕은 그 방백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방백들을 저와 함께 죽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1)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을 목표로 죄악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먼저 주변 나라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과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다메섹, 두로,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이 빙 둘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메시지 순서로는 다메섹,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를 보면 북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관계가 먼 곳에서부터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지난주까지 다메섹, 블레셋, 두로와 에돔의 죄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메섹과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자주 쳐들어온 나라들인데 비하여 두로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의 계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아서 에돔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로 성에 불을 보내어 살라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다는 것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그야말로 이스라엘과 쌍둥이로 태어난 족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 에돔 족속을 출애굽 시에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긍휼을 잊어버리고 노가 항상 맹렬하여 그 분을 끝없이 품었기에 역시 불을 보내러 사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그 긍휼을 잊어버리고 분을 끝없이 품고 있다는 것은 에돔과 같은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배은망덕’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제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는가 보시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은혜를 배신하고, 베푸신 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아 놓고서도 백 데나리온 빚 진자에 대하여 끝없이 분을 품고서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자에 대하여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지 아니하면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이러한 기준에서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돔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긍휼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끝이 없었기에 이들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고발들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목표로 가는 것이며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를 표적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인이 언제오더라도 깨어서 맞이하는 종은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내용인 암몬과 모압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살아남은 롯의 자녀들입니다. 롯의 두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온 족속이 암몬과 모압입니다.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이 암몬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신명기 2:9,18-19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모든 족속들이 간담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모두 벌벌 떨고 있는데 에돔과 암몬과 모압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었기에 점령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은 점령하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모스 1:13-15절입니다. 암몬 족속이 자기들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길르앗 지역의 아이밴 여자들의 배를 갈랐다는 것입니다. 길르앗 지역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한 땅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암몬 족속이 배은망덕하게도 전에 출애굽 시에 자기들이 보호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기들의 영토를 더 넓히고자 길르앗 지역에 쳐들어가서 잔인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에스겔 25:1-7절에서도 이들의 죄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3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4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붙이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 진을 치며 네 가운데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실과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찌라 5 내가 랍바로 약대의 우리를 만들며 암몬 족속의 땅으로 양무리의 눕는 곳을 삼은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7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붙여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 끊어 버리며 너를 열국 중에서 패망케 하여 멸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돔 족속이 유다가 망할 때 좋아하였기에 심판을 받는 것처럼 암몬도 유다가 망하는 일에 좋다고 하였기에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에스겔 25:8-11절을 봅니다. "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변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10 암몬 족속 일반으로 동방 사람에게 붙여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으로 다시는 이방 가운데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11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모압과 세일이 유다 족속도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여도 다른 나라들과 별 다를 바 없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의 발락 왕은 출애굽 시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아니하신 백성을 발람 선지자가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주하려고 하니 오히려 축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떠나가면서 한 가지 계략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여 저주를 받게 하는 것으로써 모압에서 축제를 열면서 이스라엘의 남자를 초대하여 함께 우상숭배하고 음란한 짓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의 신전에서 먹고 마시고 모압 여인들과 함께 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경을 보호하셨는데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받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압에 대하여 아모스서에서는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아모스 2:1-3절에 보시면, 에돔 왕의 뼈를 불살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대 동양의 풍속은 죽은 자의 무덤이나 시체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불살라 회로 만들었다는 것은 복수와 증오의 극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적되는 에돔의 죄는 한 가지 뿐입니다. 그러나 서너 가지라는 것은 이러한 죄악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한번만의 죄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람을 부른 일과 미인계를 써서 바알에게 복속되게 한 것과 이들의 교만함들이 다른 선지서에 고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심판을 받는데 모압에 불을 보내어 그리욧 궁궐들을 살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고 방백들을 저와 함께 죽이리라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몰아가면 결국 어디로 향하는 것입니까? 유다와 이스라엘입니다. 세상에 이런 은혜를 입은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너만 알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너희만 알았다고 아모스 3: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심이 유다이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포하기에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먼저 언급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아모스 2:4-5절입니다. "봉독" 이들의 죄악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며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심판의 기준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의 심판을 받고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고 망하는 것을 그들은 이유도 모르고 망하는 것이며 물론 양심의 고발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율법만큼 밝히 드러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망하는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것은 이방나라들도 알 만큼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거짓 것들, 즉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우상이란 그들의 마음의 탐심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궁궐들이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동일하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모르고서 오히려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모든 창조의 은혜를 노아의 언약에 의하여 누리고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와 사람의 모양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경배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고서도 그 구속의 은혜마저 저버린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자기들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세상 전부가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으로 우리를 조명하여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새로운 유다 백성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서도 잊어버리고 그저 자기 기분만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3-24절을 봅니다. "봉독" 본 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찍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그의 인자하심에 거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도 찍히는바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그 인자하심을 무시하고 사는 것, 아직도 거짓 것들을 섬기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자기의 탐심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회개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모스 2:6-16  예언하지 말라  2003. 6. 11.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9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 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1-2:5절까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하여 왔습니다. 다메섹을 시작으로 가사, 두로, 에돔, 암몬과 모압, 그리고 유다까지 그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하여 왔습니다. 이들의 죄악의 고발하는 순서는 일반적인 잔인함과 포학함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얼마나 많이 입었는가를 기준으로 점점 좁혀 오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죄악의 고발과 심판의 선포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과 상관없이 행하는 포학과 잔인한 행위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과 연관하여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심판받아 망하는 것이고, 율법 없는 자들은 율법 없이 심판받아 망하니 온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율법 없이 심판당하는 죄악의 특징 중에 두 번이나 나온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신매매입니다. 사람들을 잡아다가 에돔에 팔아버린 죄악을 블레셋과 두로가 행한 것입니다. 지난주 주일 오후에 출애굽기 중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네 가지 범죄 중에 인신매매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어제 밤 뉴스를 보니 여대생을 납치하여 1억을 요구하고 그 돈을 경찰에 알리지도 않고 범인들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범인들은 돈을 받고서 그 여대생을 살해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 일어나는 이러한 죄악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다르더라도 그 죄악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죄악은 두 가지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 없이 행하는 포학과 잔인함과 함께 율법을 범하는 죄악까지 한꺼번에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의 목록을 봅니다. 목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죄악이 가득하여 그 열매로 나오는 것들이지만 이러한 죄악의 목록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로 들려져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이것은 뇌물을 주고받으면서 불의한 재판을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의인이나 가난한 자나 빚을 지게 되면 무조건 팔아넘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신 율법을 이들은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보다 더 큰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신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를 팜' 가난한 자들이 빚을 지게 되면 도저히 갚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리의 이자를 물어야 하는 형편이 되면 아주 조금 빚을 내었지만 갚을 능력은 없는데 이자만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율법으로 명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율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탐욕은 이런 기회를 오히려 이용하여 계속하여 치부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빚을 갚지 못하고 헐값에 저당 잡힌 물건이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집도 땅도 그렇게 넘어가고 나면 나중에 빚 대신에 사람이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입니다. 어느 정도 가격에? 신 한 켤레 가격에 가난한 자를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카드 빚 몇 백 만원 사채로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몸이 팔려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대로만 한다면 이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보다 그들은 눈앞의 이익이 더 커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례를 열왕기하 4:1절에서 보겠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 시대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이 아합입니다. 이 때에 한 선지자의 생도 중의 한 아내가 엘리사에게 부르짖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엘리야의 후계자가 엘리사인데 이들을 따르는 선지학교의 생도들이 얼마나 가난하였는지 도끼도 한 자루 없어서 빌려와서 나무를 찍다가 연못에 빠지고, 먹을 것이 없어서 들외를 따다 국을 끓였는데 쓰서 먹지를 못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중 선지자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왕궁의 호의를 받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사를 따르던 선지자가 죽어버렸으니 그 아내와 두 아이가 빚에 쪼들린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러자 그 빚 때문에 채주가 자기 아이들을 종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먹고 살다가 빚을 진 것이지 무슨 투기하다가 빚을 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 되지 아니하는 빚인데 그것으로 아이를 종으로 잡아가려고 하는 현상이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기적을 일으켜 빚을 갚게 하였습니다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나라의 꼴이 어떤지를 알만하지 않습니까?

 

 

 

7절입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하고 돌보라는 말씀은 이미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가난한 자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을 힘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이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를 들자면 다윗이 왕이었을 때-이때는 물론 남북으로 분열이 되기 전이지만-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살해한 후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을 비유로 책망을 합니다. 무슨 비유입니까? 아주 부잣집에 수많은 양이 있는데 그 많은 양들을 놓아두고 가난한 자의 집에 가족처럼 지내는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어떻게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그런 놈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같습니까? 자기는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7절의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입니다.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한다는 것은 단지 가난하여 힘없는 자들만의 길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며 겸손하여서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데도 그들의 길마저 굽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악한 짓을 하기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들조차 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그런 것 아니냐? 너만 잘 났느냐? 무얼 그렇게 하나님 하면서 사느냐? 하면서 길을 굽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자가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녀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창녀에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몸을 파는 창녀이기 보다는 그 당시 바알을 섬기는 이방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방의 제사란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먹고 마시며 뛰어노는 것입니다. 마치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먹고 마시며 뛰어노는 것처럼 놀면서 신전의 여사제들과 집단 혼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신들을 흥분시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한 한 창녀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심각한 범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악을 인하여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죄를 짓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창녀에게는 가지 않는다고 하여도 바알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바알숭배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주님께서 약속한 나라는 간 곳 없고 바알에게 지배당하고 싶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니 무엇이 다릅니까?

 

 

 

8절입니다.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는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스라엘에 우상을 섬기는 단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금 이상한 나무만 있어도 그곳에 단을 쌓을 정도입니다. 그러한 단에서 전당 잡은 겉옷을 돌려주지 않고 깔고 앉아서 벌금으로 거두어 들인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율법에서 가난한 자들이 겉옷을 전당 잡히더라도 저녁에는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옷이 밤에는 이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율법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선지자가 외치고 있으면 이 선포를 듣고 있는 자들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귀를 막고 고함을 지르며 저런 놈을 없이하라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마치 스데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귀를 막고 돌로 치는 것처럼 이들도 선지자의 외침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봅니다. 선지자를 일으키고, 나시르 사람을 세웠건만 오히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나시르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먹이고.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왜 이렇게 사느냐고 외친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망하리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에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우리만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7:10-17절입니다. "봉독" 궁중 선지자 아마샤가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를 고발하면서 예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샤를 향하여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괴롭더라고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면 살 것인데 예언하지 못하게 하니 회개할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아마샤를 저주한 것입니다. 엄청난 저주입니다. 그 아내는 창기가 되고, 자식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그 땅은 다른 사람에게 나뉘어 질 것이고, 아마샤는 더러운 땅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엄청난 저주가 선포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은 아직도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긍휼을 막아버리는 아마샤를 그대로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 2:9-12절을 봅니다. "봉독" 백향목처럼 높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한 아모리 족속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심어 놓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너희 자녀들 가운데 나시르 인과 선지자를 일으켰으나 그들조차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하고 한 것입니다.

 

 

 

너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무얼 그렇게 심하게 말하느냐며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결국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상기시키는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하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만 하지 심판이나 재앙을 선포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다 아는 사이끼리 왜 그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께 망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좋습니까? 부모와 처자식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릴 만큼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 좋습니까?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 과연 좋은 말씀으로 들립니까? 아니면 그런 예언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는 챙기고 싫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가 어떤 죄인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만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주님의 예언을 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2:13-3:8  들으라  2003. 6. 18.

 

 


13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15 활을 가진 자도 설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16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 3:7절의 말씀을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이 말씀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시한부 종말론이었던 ‘다미선교회’에서 이 말을 많이 사용하였고, 지금도 자기들이 무슨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은 아모스가 외치는 이스라엘의 심판이 아모스 자기의 사사로운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노아 홍수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시고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무려 120년간의 기간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시면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선지자들의 경고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고서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경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여야 할 약속의 땅에 은혜는 간 곳이 없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압박하고 그들의 작은 소유물까지 탐을 내어 빼앗아가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살 때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또한 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는데 어느새 그 은혜를 망각하고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13-16절입니다. “봉독”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한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이 한두 번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하는데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가 누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리에 누르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약한 자를 얼마나 힘으로 눌렀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누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들이 외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이들을 얼마나 압제하는지 결국 북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빨리 달음질하는 자, 강한 자, 용사, 활을 가진 자,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으며 용사 중에 굳센 자도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목록들이 모두 이 세상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들이 주님의 심판을 결코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 날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평생 수고하며 애쓰며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아모스 선지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3:1절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제일 첫 단어가 ‘들어라’입니다. ‘들어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4:1절에서도 들으라고 합니다. 바산의 암소들아, 들으라고 합니다. 5:1절에서도 들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들으라고 하는 내용이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는 내용입니다.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도 때로는 저 설교는 치는 설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치는 설교를 하지 말고 좀 위로하고 좋은 말로 하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쳐서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지자 하고 싶어서 선지자를 하였다면 사람들을 좋게 하여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자기의 세력을 확보하고 힘을 가지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채찍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여 당나귀를 몰고 가듯이 축복과 저주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여 가면 될 것입니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면서 거기에서 떨어지는 떡 고물로 배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는데 어찌 다른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같은 유대 랍비는 선지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에 어떻게 죄악된 현실을 보면서 거짓 평안을 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들으라고 외치는 것입니까?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1절 하 반절부터 2절까지입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이것이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쳐서 외치는 이유입니다.

 

 

 

신명기 4:32-40절을 봅니다.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34 어떤 1)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37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창조이후 하늘 아래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께서 친히 불 가운데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모스서에서는 지금은 가나안 땅에까지 인도하여 들여놓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쳐서 외치는 것은 자기 혼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 두 사람이 뜻을 합하여야 함께 길을 가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4절에서, 사자가 잡은 것이 있어야 부르짖는다는 인과율을 가지고 지금 자신의 부르짖음이 여호와의 부르짖음이라고 합니다. 5절에서, 그물을 쳐 놓아야 새가 잡히고 새가 잡혀야 그물이 뛰는 것처럼 지금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는 것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전쟁의 나팔소리가 나면 백성들이 두려워하듯이 여호와의 허락이 없이 어찌 성읍에 재앙이 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재앙이 임박한 것은 여호와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이러한 심판은 언제나 경고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란 이상한 날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심판에 대한 소식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심판의 소식은 계속 증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고 썩어지고 없어질 것만을 바라보는 자들은 결국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는 것처럼 지금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아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8절에서,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는가 하는 것이 아모스 선지자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바로 앞부분에서 이스라엘에 선지자와 지혜 있는 자와 서기관들을 부지런히 보냈으나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과연 이 선지자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로 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날 옛적의 이야기로 들리고 있습니까? 물론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미 계시가 다 밝혀졌고 이제 성령께서 성도에게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심은 성경을 떠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그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뜻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물론 구약에서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만 신약에서는 이제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계십니까? 선지자가 외치듯이 그 부르짖음과 탄식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엇이 잘못 되었나? 나는 잘 하고 있는데 왜 그러는가 하면서 의아해 하십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옛날부터 행하던 습관대로 시간 되면 예배당에 나왔다가 시간 마치면 그저 덤덤하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3:14-22절입니다. “봉독”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그저 자기만족에 빠져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하여 내었으면 좋겠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고 눈 먼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심을 내고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두시지 말고 주님과 제대로 동행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모스 3:9-15  증거하라  2003. 6. 25.

 

 


9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절에서 들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한편 설교의 계속입니다. 이제는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배신하였는지,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여호와께 듣고 증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13절에서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즉 증거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임의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10절, 11절, 12절, 13절, 15절에서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엄중한 심판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끔씩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일들이 있었으나 그러나 곧 또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기는 좋아하여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기는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30:8-14절입니다. “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1)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2)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13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길인데 오히려 배척함으로 이들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들이 패역하고, 거짓말 하고,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지를 기록하여 후세에 영영히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3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구름 아래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이 현재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들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무언가 되었다, 옳다고 여기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심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3:9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을 어느 곳에서 광포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스돗과 애굽에 광포하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의 죄악과 불순종을 다른 나라들에게 광포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적도 없는, 그래서 그들 마음대로 악을 행사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성읍보다 더 요란하고 포학한 사마리아 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집에서 조용히 매를 들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동네에 내어 놓고 수치와 창피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께로 돌이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만이 아니라 온갖 재앙을 보내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더라는 것입니다.

 

 

 

4:6-11절을 봅니다. “봉독” 기근을 보내고, 재앙이 오고, 염병이 임하게 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린 것처럼 하여도 그래도 돌아오지 아니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3:10절을 봅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으며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힘을 가지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약탈하여 자기의 궁궐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선지자의 외침은 ‘소귀에 경 읽기’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레미야 13: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3:11-12절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더 이상 심판을 지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면에서 대적을 일으켜 그들의 힘을 쇠하게 하고 그 궁궐들을 약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자가 양을 잡아먹고 나서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의 사람들이 심판을 당하고 겨우 조금 남은 자가 건짐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성읍이 정치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종교의 중심지인 벧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으로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힘의 논리만 지배하는 그런 정치적인 사마리아 성읍을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방향을 벧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중심보다 종교적인 중심이 더 최종적인 심판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이란 언제나 제사의 의미가 상실되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의 희생의 덕분으로 살아가는 그 정신상태를 잊어버리면 제사 자체도 이방의 주술과 같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벧엘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자기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돌베개 하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야곱에게 하신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에서 돌베개를 기초로 단을 쌓고 나중에 돌아오게 하시면 다시 전을 짓겠다고 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에도 동일하게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금송아지에게로 옮기게 한 곳이 벧엘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벧엘을 가만히 둘 수가 있겠습니까?

 

 

 

3:14-15절입니다.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예언은 이미 초대왕 여로보암 왕 때에 예언되었고(왕상13:1-3), 요시아 왕 때 성취가 된 것입니다(왕하23:15-16). 이러한 내용들을 왜 증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 기록하여 두었습니까?

 

 

 

오늘 우리를 위하여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하고 악한지, 도대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반역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바가 인간의 악함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렇게 외침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지적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를 얼마나 이루어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기에 내가 너만 알았다고 그렇게 선택하시고 구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복음의 다리 역할을 예언자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에 비추어 그들의 죄악 됨을 처절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어떻게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지를 보게 하시면서 새로운 약속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그 한계와 인간의 불가능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언약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처절하게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던 아모스 선지자도 결론에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움을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여호와는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어떤 회개에의 요청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최종 형태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외침은 바로 뒤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몰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동안 자기의 힘과 노력과 애씀으로 자기가 주인인 삶은 회개하고 이제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회개하는 자들은 적은 숫자입니다. 아모스 시대에 사자가 삼키고 나서 두 다리나 귀 조각이 남는 것처럼 오늘날도 회개하는 자들은 적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도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주님을 더 이상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제 내가 예수를 믿고 새롭게 거듭났으니 이제 우리가 더 선하고 좋은 일들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구상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나는 내 실력과 노력으로는 선한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그에게서 모든 것을 공급받아서 사는 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 곧 그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회개는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분께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장차 재림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러한 증거들은 왜 예수님이 오셔야 하셨으며,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야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에서, 모세의 율법을 폐하고도 두세 사람의 증인을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밝고 자기를 거룩하게 하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는 받을 벌이 얼마나 더 중한가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의 궁과 벧엘이 다 결딴나리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3:15).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자는 결딴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4:1-13 예비하라 2003. 7. 2

 

 


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찌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13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2절에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도 준비를 합니다. 그 사람이 왜 온다고 할까? 반가운 만남일까? 아니면 힘든 만남일까를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 거북한 만남이라면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고자 하여도 피할 수 없는 만남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그 만남이란 산 자나 죽은 자가 다 한번은 만나야 하는 주님의 심판대 앞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누가 알겠습니까만, 알든 모르든 성경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네 하나님 만날 예비를 하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주어지는지를 보면서 우리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은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를 주님께서 만나 주셨다면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더불어 살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가 보자는 것입니다. 그날이 기쁨의 날이 될지, 아니면 슬피 울며 통곡하게 될지를 이스라엘을 통하여 미리 보는 것입니다.

 

 

 

3:2절에서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선택하시고 사랑하셨건만 그들의 행위는 어떠한지를 아모스 선지자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기존의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그 죄악으로 인하여 쫓겨나고 멸망당한 그 족속들과 똑 같은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기초가 애굽의 종살이 하던 곳에서 나온 것을 기억하게 하시면서 율법을 주셨는데도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한 것입니다.

 

 

 

1절입니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남자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압제하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장에게 술을 가져와서 우리로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기득권들의 학대와 압제를 말하는 것이지만 바산의 암소라고 하는 것은 바산의 좋은 목초지에서 살이 찐 암소들을 빗대면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력자가 아니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보실 때는 꼭 같은 것입니다. 주일 학생이 기도시간에 옆 친구가 눈뜨고 장난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떻게 보았을까요? 자기는 실눈을 뜨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특별한 계층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기를 항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건 사고 뒤에는 여자들이 있다는 말처럼 바산의 암소들이 자기 가장에게 술을 가져다가 마시게 하라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삼손이 딤나에서 수수께끼를 내고서 답을 알아맞히면 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하였을 때 그 동네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 되었던 자를 협박하여 비밀을 알아내고서 답을 합니다. 그때 삼손이 너희가 내 암송아지를 밭 갈지 아니하였으면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아내를 암송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를 움직여 수수께끼의 비밀을 알아 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없이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라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데 주 여호와 자기의 거룩한 이름을 두고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두고 맹세를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크고 영원하신 분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면 그것이 최종적인 권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로 저주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갈고리와 낚시로 사람들이 끌려가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갈고리로, 물고기들이 낚시로 끌려가듯이 그렇게 사로잡혀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이 무너지고 그들이 하르몬에 던져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지금까지의 죄악이 사회적인 죄악이라면 이제는 종교적인 죄악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악과 종교의 악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는 것이 여호와의 법을 어기는 것이면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한 죄악들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제도까지 우상숭배와 종교적인 형식과 외식으로 치우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벧엘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만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제일 처음 밟았던 땅입니다. 이곳에서 할례를 행하면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 버렸다고 해서 길갈이라는 이름을 지은 곳입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이곳에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침마다 희생을, 3일마다 십일조를, 누룩 넣은 것으로 수은제를 드리며 낙헌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선지자가 아주 조롱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너희가 드리는 것은 너희 좋으라고, 너희 기쁘라고 하는 것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열린 예배’ 또는 ‘예배 갱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위기로 만들자고 하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분위기 좋은 공연장에 온 것처럼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사람들 기분 맞추기입니다. 그래 놓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잘 하고 있노라고 스스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알맞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이 심판의 소식이 없이 무슨 복음이 선포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되면 이제 우리가 죽었구나! 심판이구나! 어찌할꼬! 하는 탄식과 절망 속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것은 자기들의 기쁨과 자기들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지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뒷전입니다. 혹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자기의 사상과 생각을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열 사람이 모이면 열 사람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 중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의견을 내고 하나가 되고 뜻이 맞아진다면 그것은 공동의 적이 생겼을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자기의 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데 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함으로 언제나 예수님보다는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한다고 하는 것이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다 빠질 수 있는 함정인 것입니다.

 

 

 

이 정도에 이르렀다면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그러나 심판 중에도 주님께서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것은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선지자들의 이러한 선포를 보면서 매를 들고 울면서 치시는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이사야 1장에서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를 들고 때리시는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매를 맞고 맞아서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돌아오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수한 번제와 성회와 분향을 바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4:6-11절입니다. 기근으로 양식이 없고, 비가 오지 않고, 풍재와 깜부기 재앙을 내리고, 염병이 돌고, 칼에 자녀들이 죽는데도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뜨려지는 가운데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어도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33-40절을 봅니다. “봉독” 이미 솔로몬이 다윗의 언약을 따라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재앙들이 일어나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주님께서 돌이켜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킨 자가 없었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4: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온갖 재앙을 통하여서도 그들이 주님께도 돌이키지 아니하시니 이제는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엄청난 재앙들이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엄청난 심판의 행위가 있을 것이기에 여호와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경고적인 재앙과 심판들에는 어느 정도 긍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주님의 나타나심에는 모든 것은 최종 확정이기에 그때를 대비하여 지금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거짓된 안전이나 거짓된 확신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그 약속대로 드디어 메시야가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란 선지자들이 그렇게 고발한 힘과 권력을 더 보태어 주는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중심에 통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는 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13절처럼 창조주가 되시고, 자기를 계시하셨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며, 높은 데를 밟으시는 분, 즉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맞이할 예비를 하면서 사는 자가 복 있는 성도입니다.

 

 

 

 

 

아모스 5:1-3  슬픈 노래  2003. 7. 9.

 

 


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1절에서 선지자가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유명한 애가는 예레미야의 애가입니다. 성경 한권이 아예 ‘애가’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왜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까? 솔로몬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노래,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왜 선지자들은 애가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의 등장 시기는 주로 왕정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따라 왕 한 사람이 잘하면 백성들이 복을 받고 왕 한 사람이 잘못하면 백성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게 되면 선지자들이 나와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외침은 책망과 심판의 선포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켜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배척할 뿐입니다. 말로 해서 안되니 때려서라도 돌이키려고 여러 가지 재앙을 선포합니다. 직접 재앙들이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맞고 맞아서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는데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때려서도 돌아오지 아니하는 이들의 결국은 심판뿐임을 보고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살길이고 생명의 길인데 이들이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자기들은 주께로 돌아와 있다고, 주를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서 자기 정당화와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험을 치러놓고서 발표가 나지 않았는데 자기는 합격하였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합격 아니면 불합격입니다. 스스로에게 다짐과 확신을 한다고 해서 떨어진 사람이 합격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떨어 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합격하여 있는 사람은 합격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시험을 치르고 나면 한두 문제 틀린 것으로 시험을 다 망친 것처럼 여기는데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한두 문제 맞추어 놓고서 모든 문제를 다 푼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행함과 확신과 체험이 주님께로 돌이킬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역대하 18장에서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길르앗 라못을 치는데 함께 하자고 합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하여 물어보니 선지자들 400명이 모두 이긴다고 합니다. 확신과 기도응답의 증거물까지 들고 나옵니다.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이런 무기를 만들어 가지고 가면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이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하자 아합 왕이 자기에게 좋지 않게 말하는 선지자가 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고, 그 사람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아합 왕을 죽이기 위하여 거짓말 하는 영이 선지자들에게 들어가서 거짓말을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미가야의 뺨을 치는 것입니다. 아합 왕이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400명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다가 적군이 변장하고서도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서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확신에 차 있기에 선지자는 슬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보고서 자기 확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데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아서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심판 받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기도응답과 표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주장과 이론이 틀림없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아무리 돌아오라고 외쳐도 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소식도 자기들은 예외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확신의 무서움입니다. 도저히 돌이키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모스 5:4-5절을 봅니다.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곳은 이스라엘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들입니다. 벧엘과 길갈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는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던 곳이며 이삭과 야곱에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까지 가려면 남쪽 유다를 지나서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곳이 이미 우상숭배와 함께 행하여지는 혼합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을 찾는 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서 17절까지가 하나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대칭구조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일 가운데 부분이 8절과 9절입니다.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심으로 슬픈 노래(1-3, 16-17), 여호와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4-6, 14-15), 범죄행위(7, 10-13), 창조와 섭리, 심판을 하시는 주 여호와(8,9)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부분을 보면서 함께 대응 구절을 보면서 그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슬픈 노래.


1-3절입니다. 슬픈 노래는 아주 간단합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자기 땅에 던져져서 일으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처녀로 봅니다. 이 처녀가 엎드려지고 던져져서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일으킬 사람도 없이 된 것입니다.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떤 누구도 일으켜 세울 자가 없으니 슬프다는 것입니다. 외쳐도, 때려도 돌이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6-17절의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광장에서, 거리에서, 포도원에서 애곡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나라가 부강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6:1절에 보시면 사마리아에 거하여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에서 우승하여 유명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부강함과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 또한 열심입니다.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고, 절기를 지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울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미리 알기에, 미리 보는 선견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20-26절을 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고린도전서 7:29-31절을 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면 선지자들이 왜 울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열심이란 누가 감히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어미 닭이 새끼를 품듯이 그들을 품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원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슬픈 노래를 지금 예수님께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여호와를 찾으라.


4-6절과 14-15절입니다.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살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부지런히 여호와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길갈과 벧엘과 브엘세바까지 가면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절기도 지키고, 희생제사도 드리고, 찬양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금송아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을 마음에 품고서 여호와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여도 돌이키지 아니하면 오히려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주일성수를 잘하고 십일조를 잘하고 다른 봉사도 잘 하는 사람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대부분 화를 내거나 아니면 좀더 열심히 하라는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알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회개가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래된 자기 신앙체계와 자기 확신에 붙들려 있기에 그것이 전부인양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보면서 나는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야 나만큼 성경을 알고 있나, 나만큼 열심이 있나 하면서 남과 비교하고 있다면 주님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 혹시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자가 있는가 하고서 선지자는 외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다는 법칙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서 보상해줄게, 한다거나 미안하다고 한다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까? 용서를 하여야 하는 사람이 회개한다고 무조건 기계적인 용서를 하여야 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도 사망사고일 경우 합의하지 않으면 구속이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무슨 회개하고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긍휼히 여기는 것은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공로를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 믿어 주었으니, 또는 나 회개 하였으니, 또는 나 무엇을 하였으니, 하는 것들이 나올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찾는 태도요 자세인 것입니다.

 

 

 

3) 범죄행위.


7절과 10-13절입니다. 공법을 쓴 쑥으로 변하게 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고 있습니다.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밟고 부당한 세금을 취하면서 자기들은 다듬은 돌로 된 집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 살지 못할 것이며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율법의 저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열심히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국 바람을 잡은 것처럼 헛된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는 지혜자가 잠잠한 것입니다. 지혜자가 선지자라면 잠잠하지 말고 외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간 상황에서는 지혜자가 잠잠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잠잠하신 것처럼 잠잠한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잠언서에서는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심판인 것입니다.

 

 

 

4) 주 여호와.


8절과 9절입니다. 별들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바알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기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 헛된 것이며 오직 주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이들이 알라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 것도 바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요 다스리는 분이시오 심판주가 되시는 분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와 결론이 비슷합니다. 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위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주의 자리에 등극하셔서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장차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참으로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 없어질 것들에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선지자는 미리 보는 자였습니다. 오늘날 미리 보는 자는 유일하게 성도입니다. 미리 본다는 것은 성경의 계시를 알고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영원하지 아니합니다. 주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고 있지 않고 썩어질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을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이 세상을 보면서 울어야 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아모스 5:14-20  살기 위하여  2003. 7. 16.

 

 


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삽니다.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왜 사느냐는 질문을 보류해 두고서 사는 것입니다.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는 살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위법을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위법을 행하다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먹고 살기 위하여 그랬다고 합니다. 위법을 하면 잘못인줄 알지만 이러지 아니하면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하면 동정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다른 회사와 상대적으로 훨씬 월급이 많아도 데모를 하고, ‘주 5일 근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동아일보의 어떤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하여 책을 읽은 사람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자살을 하고나자 그 남편이 그렇게 슬퍼하였답니다. 그러나 그 슬픔보다 자기의 발에 종기가 생긴 것이 더 큰 고통이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육체적인 고통과 말로 인한 상처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디다. 육체적인 고통이야 시간이 지나고 나아지면 잊어지지만 말에 대한 상처는 잘 나아지지 아니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말에 대하여 주의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다가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결국 자기 몸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 철학들이 결국 몸에 대한 담론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 몸, 내 존재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 편하면 다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정황에서 나오는 삶이란 자기 존재를 유지, 발전시키는 쪽으로 산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본능입니다. 위험이 닥치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본능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의 기준을 자기 존재에다가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상관이 없고 다른 분의 뜻이 이루어지면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이 죽음으로 자기가 속하여 있는 집단이 이익이 될 경우입니다. 자기 하나의 희생으로 자기 조직이 산다면 자기는 비록 죽어도 그 조직이 존재하는 한 자기는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기념하고 동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이 회사이든, 국가이든 결국 자기 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삶의 정황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삶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산다는 것을 생각하고자 하면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에서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업이 어렵게 되거나, 병이 들거나, 곤란한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살기 위하여 해결을 하고자 합니다. 이 방법 저 방법 찾아보다가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구나! 사는 길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구나! 내가 좀더 착하고 바르게 살자, 악하게 살지 말자,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자는 것도 결국 자신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설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리는 것은 선이고 자기를 죽이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산다는 말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에서는 살기 위하여 종교를 찾고 신을 찾는다면 성경에서 살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죽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신데 단지 말씀하신 내용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길입니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되는데 말(馬)도 의지하지 말고, 권력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사람의 힘이나 말의 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니 누가 이러한 말씀을 믿겠습니까? 자기들의 손에 잡히는 재물과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지 여호와를 찾으려고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모스 시대에 선을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착취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기에 땅 자체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땅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짐을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보호를 말하면서 그들이 옛날에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것입니다. 이미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어서 그들의 사회구조가 바알의 정신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겨서 그렇게 복을 받고 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모스 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가 이렇게 잘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헛된 믿음과 확신으로 살고 있으니 선지자들의 돌아오라는 외침이 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처럼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자기 나라가 그렇게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1-11절을 봅니다. 남쪽 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전 앞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면서 이곳에서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면서 제물을 드리고 경배하는 것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고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면서 안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함께 하시니 이렇게 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대국이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야고보서에서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심판을 쌓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시대나 이 시대나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스스로 자기의 소유를 믿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서 살아가겠습니까?

 

 

 

이 시대가 경쟁의 시대입니다. 천재 한 명이 천 명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교가 평준화되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민족사관학교’나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가려면 그곳에 가기 위한 학원이 따로 있고 그 학원에 시험 쳐서 떨어지면 그 학원에 가기위한 학원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쟁사회 속에서 평준화해서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교회도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알의 사상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 우리 교회 잘된다고, 우리나라 잘된다고 하는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시대에도 아모스의 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7:10절입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로보암 시대에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모스 선지자는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지금 형편을 보고서 슬피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 돌아오는 길은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성문은 재판하는 자리인데 이곳에서 조차 불법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뇌물을 받으니 공의가 사라지고 긍휼도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기 원한다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길이 그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혹시 긍휼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시기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사는 방식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물론 직장을 그만두고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저 나의 존재의 영속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넉넉함이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끝끝내 그들은 돌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통곡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모든 광장에서, 모든 거리에서, 모든 포도원에서 울리라고 합니다. 경제가 잘 돌아갈 때 광장과 거리와 포도원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넘쳤을 것입니다. 포도원은 큰 재산입니다. 그리고 포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즐거움이 이제는 통곡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심이 그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18-20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고 있을 만큼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고, 희생 제사를 드리고, 찬송을 하면서 영광을 돌린다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임하시는 날에 자기들은 구원을 받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심판뿐입니다. 사자를 피하였는데 곰을 만나고 곰을 피하여 겨우 집으로 돌아와 벽에 손을 대는 순간 뱀에게 물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주님께로 돌아와 있습니까? 살기 위하여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주님을 구하고 있습니까?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살기 위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죽고자 하겠습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나는 죽노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는 모습입니다. 살기 위하여 주님을 쫓는 모습입니다.

 

 

 

 

 

아모스 5:21-27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2003. 7. 23.

 

 


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고 있습니까?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또 하나의 자기들만의 이상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예언하였기에 더욱 그들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지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 날이 오히려 심판이 날이 되어버렸음을 아모스 5:18-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캄캄한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어버렸습니까?

 

 

 

5:21-23절을 봅니다.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노래, 비파 등이 다 나옵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모든 날과 달과 절기를 다 잘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잘 드렸습니다. 찬양까지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하라고 하였으니 자기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절기도 잘 지키고 제물도 잘 바치고 찬양도 잘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 나라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궁중 선지자들의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절기, 제물, 찬양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만이 아니라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다른 선지자들도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절기를 따라 제사를 지내러 오는 무리들에게 그곳이 성전이라고 믿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억울하게 하고 학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사지내려고 성전으로 오는 것은 그러한 악을 더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보다 인자를 사랑하고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과 조심스럽게 동행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모스 시대에는 북 이스라엘 안에서 온갖 불의와 학대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은혜는 사라지고 바알의 경제체제가 자리 잡아 버린 것입니다. 나라가 온통 이러한 모습인데도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친다고 마음이 든든하고 안일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모이고, 헌금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면 신앙생활 잘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작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이 외형적으로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을 가지고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고 복을 받으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21-26절입니다.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번제나 희생을 요구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절기는 지키고 제물을 바치고 찬양대를 조직하고 악기까지 동원하여 노래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율법의 규정으로 절기와 제물과 다른 헌신을 요구하였지만, 그들의 몸은 강제규정에 의하여 행하였지만 마음은 멀었던 것입니다. 결국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거듭 거듭 반역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선지자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5:25절을 봅니다. 광야 40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절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희생제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할례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우상을 함께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지적은 이스라엘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결국 자기를 위한 우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을 지적하고 나선 선지자들의 결국이 어떠한지는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절기와 제물과 봉사를 잘하고 있으니 이러한 경제적인 풍요와 나라의 안정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이 견딜 수가 없는 말입니다.

아모스 7:10절입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궁중 선지자인 아마샤가 아모스를 향하여 예언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말로 인하여 이 땅이 견질 수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행하여 온 모든 것이 전부 부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형식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모방하고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이미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서 만들어 섬기고 있었기에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우상을 지고 다메섹 밖으로 잡혀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지고 가야할 백성들이 우상을 지고 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가 시행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아니하였고 그러한 말씀을 견디지도 못하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지만 여호와라고 하고 그 우상의 전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절기를 따라 제물을 바치고 노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이러하지 않습니까? 우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찬양대나 교사로 봉사하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잘한다고 목사가 말하고 사람들이 말하니 자기도 잘하고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여서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의무적인 것을 하고나서 내 마음대로 살기 원함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혹시 저주가 임할지 몰라서 방지책으로 하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더 심각한 것은 이제 복음을 들었다면서 오히려 모이기를 힘쓰지도 아니하고 헌금도 전보다 적게 하고 봉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유 한다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인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듣기 전에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잘 하였거나 지금 안하거나 간에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그것은 전부 자기를 사랑하는 우상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 섬겨온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도 결국 그 반대급부로 나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종교입니다.

 

 

 

이러한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스데반 집사가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사도행전 7:40-44절입니다.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 집사의 이러한 설교를 듣고서 사람들이 이를 갈면서 돌을 들어 스데반 집사를 쳐 죽인 것입니다. 성전을 고수하며, 그들의 잘못된 하나님 섬김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이 최종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라는 말에 견딜 수 없어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말씀에 의하여 드러나게 되면 어떤 자세입니까? 마음에 찔려 회개합니까? 이가 갈립니까?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지못해 행하는 모임과 헌금과 봉사이겠습니까?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임을 아는 것이겠습니까?

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임을 아는 것입니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기에게 나오는 것이 선한 것이 없음을 알기에 혹시 선한 열매들이 나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혈과 육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이기에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그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자기를 자랑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시편 51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아모스 6:1-14  허무한 것  2003. 7. 30.

 

 


1 화 있을찐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2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5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7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9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10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11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13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 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살면서 제일 바라는 바가 무엇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 없이 든든한 수입원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아닙니까? 그러면 마음에 안정도 되고 평안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시면 안일하고 마음이 든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 허무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안일하고 든든하면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허무한 것들이며 허무한 것들을 기뻐한 까닭에 심판을 당한다는 내용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시면, 먼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라고 말합니다. 시온은 남 유다를 말합니다. 시온을 먼저 말하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들을 거론함으로 남이나 북이나 그들이 마음 든든하게 여기며 안일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망은 정치 종교 경제계의 상류층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먹고 살기도 바쁘기에 마음이 든든하거나 안일한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도 심판에서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도 역시 그 삶의 목표와 방향이 안일함과 든든함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이 든든하게 여기는 이유는 종교적인 선택의식입니다. 열국 중 우승하여, 라는 말씀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다른 나라를 치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 당시에는 사마리아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부요함으로 인하여 더욱 마음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안정이 있다면 어지간한 어려움은 극복을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안정감과 함께 경제적인 부요까지 주어지니 얼마나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러한 거짓된 안정감, 헛된 안정감으로 마음 든든해하는 자들에게 그 뿌리를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2절에서 갈레와 하맛과 가드에 가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곳이 이스라엘 보다 낫거나 땅이 넓으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강한 부족이라도 너희보다 못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너희도 헛된 것으로 힘을 삼고 있으면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나 개인이나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영원한 흥함이나 망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흥망성쇠에 있어서 불안해하기도 하고 든든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주님으로 인하여 평안하며 든든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헛된 것을 자기의 힘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으로 기뻐하고 있다면 흉한 날이 곧 닥칠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선지자들의 선포를 우습게 여기며 흉한 날이 멀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안일하고 지금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욱 그들은 사치와 방종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니 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는 종교적인 안정감마저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까?

 

 

 

4절입니다. 좋은 집과 좋은 가구를 갖추고 삽니다. 상아로 침대를 만들어 누우며 고기는 가장 좋은 어린 양과 우리의 송아지 고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단지 배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고 맛있는 음식으로 골라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면 그다음에 찾는 것이 더 맛있고 더 멋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송아지 고기란 방목하여 기르는 것보다 육질을 더 좋게 만든 비육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치를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겠습니까?

 

 

 

5절입니다. 문화적인 욕구입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느냐면서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밥을 먹어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우아한 클래식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그런 곳에서 먹는 것입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자존심이 높다고 하지만 그러나 졸부라도 돈 많은 사람들이 밥 먹고 술 마시는 곳에 분위기 띄우기 위하여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제는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여흥을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 것입니다.

 

 

 

6절입니다.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는 것은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되지만 대접이란 여호와의 성막에 사용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드린 그릇과도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접으로 술을 마시면서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기름을 몸에 바름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름은 감람기름 정도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귀한 기름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여호와께 향으로 드리기 위한 기름을 사람들이 사용하기 위하여서는 제조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22-38절에서 거룩한 기름과 향을 여호와를 위하여 사용하고 사람이 바르거나 향을 맡기 위하여 제조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귀한 기름을 꼭 이와 같은 방법을 제조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귀한 기름을 그들에게 바른 것은 자기들을 한껏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찬양도 영광도 자기들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살면서 무엇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요셉의 환난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 요셉의 환난에는 근심도 없이 자기들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환난이란 지금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차남으로 북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환난에는 관심이 없이 자기들의 든든한 배경으로 인하여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환난은 실제 요셉을 형들이 종으로 팔아버렸던 사건과 지금 사마리아의 상황과 같은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하여 물 없는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굶어 죽으라는 것이지요. 그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한 채 형들은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창37:25). 그러다가 상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종으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형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당할 즈음에 깨닫게 됩니다. 자기들이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 근심하지 아니하고 외면하였던 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2:21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 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지금 사마리아의 현실이 이러한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은 호의호식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신음 중에 지내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형제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들은 호화롭게 사치하고 연락하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주 소수의 특정 계층만이 아닙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11절에 보시면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큰 집을 가진 자는 더 큰 집을 목표로 하였을 것이며, 작은 집을 가졌으면 역시 더 큰 집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으니 요셉의 환난에는 근심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의 환난에 근심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하여서도 그들은 안일하게 대처한 것입니다. 무언가 든든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된 확신과 잘못된 종교적 관습에 의하여 자기들은 심판을 당하지 아니하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연 우리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활의 걱정 없이 마음 든든하게 안일하게 살아가보나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책망으로 인하여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지만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아모스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책망을 받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엇을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까? 남편의 직장이 든든하지 못하고, 하는 사업이 든든하지 못하여 불안합니까? 이런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요셉의 환난이 마음에 들어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마음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아모스가 이상야릇한 삶을 얼마나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는지 눈에 선하지 아니한가? 이런 말들 속에서 그는 탐욕스러운 삶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 삶의 방탕성을 꼬집어서 질책하고 있다. 너는 과식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끼니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셨다. 너는 각양각색의 과자를 먹었으나 그분은 마른 빵 한 조각도 과분한 정도이셨다. 너는 좋은 포도주를 골라 마시면서도 그 분이 목말라 하실 때에 냉수 한잔도 그분께 드리지 아니하였다. 너는 부드럽고 오색실로 수놓은 침대 생활을 하나 그 분은 추위와 더불어 운명해 가신 것이다. 설령 탐욕스럽지 않은 깨끗한 잔치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호된 비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네가 필요한 이상으로 행동을 하는 한 너는 어차피 그 분의 필요까지 채워드리지는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분의 것을 가지고 사치 생활을 하다니!”

 

 

 

자기들은 호의호식 하면서 요셉의 환난에는 근심도 없고 관심도 없는 자들에게 결국 심판이 임할 뿐입니다. 7-11절까지 혹독한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사로잡혀 갈 것이며 그러므로 안일과 권태로 기지개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쳐질 것입니다.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모두 대적에게 붙여질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연이어 내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이 결딴나는 것입니다.

 

 

 

12-14절에서, 이러한 심판이 임하는 것에 대하여 한 번 더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들이 바위 위에 달리며 소가 어떻게 바위 위를 갈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도 지금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우리의 뿔은 우리의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변개하면서 자기들의 만족과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며 다른 민족을 쳐서 복종시킨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취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의 뿔’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취하여 얻은 성읍의 이름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들의 소득과 자기들의 영광과 권세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취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모르는 것이며 교만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앗수르에 의하여 완전히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래도 밥 먹고 옷 입고 살고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고 사는 것이, 물론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도 몇 사람 있지만, 과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요셉의 환난을 외면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정당하게 벌어서 정당하게 마련하였다고 하여도 요셉의 환난에 근심하지 아니하였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애쓰고 힘써서 마련한 것들이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가지고 복을 받았니 안받았니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허무한 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를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책망이 바로 우리를 향한 책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한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허무하지 아니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허무하지 아니하는 나라는 예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욥이 시험을 받을 때에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며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아니 하시나이까?(욥7:17-19) 라고 탄식한 것처럼 성도로 하여금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허무한 것을 피하여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9절을 봅니다. “봉독” 주님께서 얼마나 완벽하게 조치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썩어질 것을, 허무한 것을 피하게 하시고자 여러 가지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여러 가지 시험이 닥칠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었던 재산이 손해가 날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와 같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속이고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벽하게 자기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영원한 나라를 기업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처럼 아무것도 없더라도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마음 든든하고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 7:1-9  선지자의 중보  2003. 8. 13.

 

 


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2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3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5 이에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여로보암 2세 때의 북 이스라엘은 최고의 안정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괴롭히던 나라가 이스라엘 북쪽의 다메섹이었는데 이 다메섹을 앗수르가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앗수르 북쪽의 신흥세력인 아라랏에 공격을 받았기에 북방의 영토를 지키기 바빠서 남쪽인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서는 소강상태였습니다. 이럴 때에 북 이스라엘이 영토도 넓히고 안정된 가운데서 사치와 교만과 우상숭배가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걱정이 없다고 하면서 안연히 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눈에는 그것이 거짓된 안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라가 좋다고 하는데 혼자서 아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게 되었다고 울고 있는데 선지자는 좋다고 하는 사람들로 비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 그대로 먼저 알고 먼저 보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 계시의 말씀을 증거하면 자기를 괴롭히니 증거하지 아니하겠노라고 하면 속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는 백성과 하나님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지금의 상황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평안하고 좋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도층이나 부유층에 관한 상황이고 가난한 자들은 얼마나 학대를 받고 있는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은 이미 이방의 종교인 바알의 정신이 백성들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세 가지 환상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환상입니다. 1-3절의 내용인데, 왕이 풀을 벤 후에, 라는 것은 왕의 목초지에서 풀을 베고 거두어들이고 나서 다시 풀이 움돋아 오를 때에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어버린 것입니다. 주로 목축을 하는 자들에게서 풀을 메뚜기들이 다 먹어버리면 망하는 것입니다. 황충이란 메뚜기 종류로 봅니다. 그러면 메뚜기들이 풀만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정도로 날아오면 모든 푸른 것이라고는 다 갉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엘서 1:3-4절입니다.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이 차례로 나옵니다. 모두 메뚜기 종류로 푸른 것을 갉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이 애굽에서 쏟아진 메뚜기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로 재앙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서 기도한 것처럼 성전을 향하여 회개하고 기도하여야 하는데 이들은 나름대로의 성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섬기고 있는데 남쪽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 중의 재앙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6:1절 말씀처럼 열국 중에 우승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안일한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메뚜기 떼가 오듯이 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핍박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백성들의 죄와 돌이키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모스 선지자 혼자서 중보의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야곱의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라면서 간구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십니다. 이 환상과 기도의 응답대로 앗수르가 쳐들어 왔습니다. 물론 여로보암 왕 때에 쳐들어 온 것은 아니지만 므나헴 왕 때 앗수르 왕 불이 공격해 왔는데 므나헴이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환상이 4-6절입니다. 불로 징벌하시는데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도 아모스 선지자는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면서 간구를 합니다. 선지자가 심판의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아는 고로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것도 돌이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가 왕 때에 반 앗수르 정책을 펴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이 쳐들어 와서 호세아를 왕으로 세우고 물러갑니다. 그러니 완전히 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풀을 먹어 치우는 황충처럼, 바다와 육지를 불로 살라버리는 것처럼 앗수르가 두 번에 걸쳐 침략하였지만 완전히 망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모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환상에서는 중보가 없습니다. 세 번째의 환상은 7-9절인데, 다림줄이 보인 것입니다. 다림줄이란 벽이나 기둥이 제대로 세워졌는지 알아보는 추가 달린 실인 것입니다. 이 다림줄은 건물을 세울 때도 사용하지만 헐어버릴 때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모스 선지자가 다림줄의 환상을 본 것은 이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는 더 이상 중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처럼 다림줄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베풀어지는데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며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소라고 하는 그 산당들과 왕의 집인 궁궐까지 쳐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심판입니다. 종교적인 중심의 성소와 왕의 궁이 망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아모스의 중보의 간구가 없는 것입니다. 드디어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와서 완전히 점령함으로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다림줄로 우리의 모습을 측량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5:22-31절을 봅니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벨사살 왕이 저울에 달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측정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입니까?

 

 

 

시편 62편입니다.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찌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무언가 믿을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무엇으로 보존하겠습니까? 그저 날마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입김보다 가볍기에 심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로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조차도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중보적 역할을 보고자 합니다. 선지자는 미리 보는 고로 중보의 간구를 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대속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중보를 합니다만 그러나 자기 같은 한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고 예언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의 사역을 다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만이 아니라 친히 제물이 되심으로 중보의 간구를 하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중보의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12:24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선지자의 중보적 역할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은 환호하였지만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자랑할 때 그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핍박한 그 핍박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온 것입니다. 인간들의 반역의 최종적인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들의 좋은 분위기 다 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암7: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주님 앞에 나온 자들은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자신의 미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주여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는 이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저가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오직 나의 피난처는 주님 당신입니다, 하는 이런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를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아모스 7:10-17  견딜 수 없는 말씀  2003. 8. 20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15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을 북 이스라엘의 궁중 선지자요 벧엘의 제사장인 아마샤가 모반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마샤가 아모스를 왕을 모반하는 자라고 고발함으로 아모스 선지자를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란 언제나 여호와의 율법을 가지고 백성을 통치하여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자기의 욕심대로 통치를 하면 선지자들이 고발하게 됩니다. 선지자들의 고발을 받으면 왕은 회개하지만 그 고발을 받지 아니하면 선지자를 핍박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왕들이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아니한 것입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의 성전과 그 제도를 모방하여 벧엘과 단에 성전을 짓고서 그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왕의 임의대로 제사장을 세우는 지경에 있기에 왕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하여도 그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왕들의 권세아래 아부를 하면서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 궁중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왕과 그 체제에 우호적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백성과 나라를 축복하시리라고 늘 거짓 평안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늘 평강을 말하고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아모스 선지자를 보면 아모스는 모반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샤가 여로보암 왕에게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때에” 이 때란 아모스 선지자가 환상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말하는 때라고 봅니다. 세 가지 환상이란 황충과 불과 다림줄이었습니다. 황충과 불의 심판은 아모스의 중보로 인하여 돌이켜 주셨지만 다림줄은 그대로 시행이 되는 것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소식을 들을 때에 아마샤는 나라를 해롭게 하는 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 고발의 내용은 여로보암이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가리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아모스 선지자가 다림줄의 환상이후에 한 말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고 하였는데 말을 조금 바꾸어 여로보암 왕이 칼에 죽으리라는 말로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아모스의 그 모든 말을 인하여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샤가 이렇게 고발하면서 자신이 충성하는 자이고 아모스가 모반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마샤는 자신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다고 하면서 아모스를 고발하지만 그러나 아마샤는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게 함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하는 자이지만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을 위하여 오히려 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비록 남 유다 출신이지만 북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주님의 계시를 환상으로 보고서는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면서 중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5:4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가 심판을 외치는 것은 그들로 살길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재앙들이 닥친 것은 여호와를 찾게 하기 위함인데 그러나 이러한 여호와를 찾을 기회마저 거짓된 평안과 축복으로 막아나서는 것이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을 모반하는 것은 아모스가 아니라 아마샤 자신이 왕을 모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왕에게 충성된 자요 아모스는 왕을 모반하는 자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여호와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체제와 자신의 기득권의 안정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단체의 안녕과 발전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지 여호와의 뜻에는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름은 무엇으로 부른들 그 속 내용에는 자신들의 안정과 발전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 이 시대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께 충성되고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하는 아모스의 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꼭 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모든 사고방식과 체제를 성경은 공격합니다. 여호와가 주 이심을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증거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주이심을 알리시고 이제 신약에서는 그 여호와의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시고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무릎이 예수님께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진노가 급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가 속한 단체의 안녕과 발전을 위하여 주는 신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것은 아마샤의 충성과 다를 바 없는 거짓된 충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외침은 지금도 이 땅이 견딜 수 없는 메시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면 우리 교회 잘되기는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싫어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관심이 없고 자신이 돈을 내고 마음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교회라는 단체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싫은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싫은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발전된 자아상을 보이고자 한다면 오직 예수님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7:12-13절입니다.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에서 밥이나 먹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에 대한 최고의 모독입니다. 단지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하여 선지자 역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너는 남쪽 유다 출신이니 그곳에 가서 선지자 노릇하고 여기서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왕의 성소요 궁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기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부교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담임목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옳게 전한다마는 그러나 그런 말은 네가 개척을 하거나 담임이 되면 그렇게 하고, 이곳은 내가 너에게 월급을 주고 있으니 나를 도와서 내가 하는 목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그만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겠지만 그런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관심이 없고 오직 우리 교회 잘되기만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마샤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선지자들의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견딜 수 없는 말씀으로 인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회개하든지 돌로 치든지 하는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계속된 선지자의 행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얼마나 견딜 수 없어 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사건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을 한 곳만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2:9-14절입니다. “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참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싫었는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 마음을 합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기고 율법을 잘 지킨다는 이들의 마음이 평소에 무엇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정체를 다 드러내어 버리니 견딜 수가 없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 땅이 얼마나 견딜 수 없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좋습니까? 견딜 수 없어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면 믿음이 아주 좋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해주니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나의 주관이나 선입견으로 취사선택하지 아니하고 받는다면 그 말씀은 견딜 수 없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든지 돌을 던지든지 하는 것이 사도들에게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아모스를 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포한 말씀을 인하여 견딜 수 없어 하는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너는 남쪽 유다에서나 가서 밥 벌어 먹고 살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자신의 선지자직과 그 말씀에 대한 거부의 결과를 말합니다.

 

 

 

14-15절입니다. 자신은 선지자도,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합니다. 양떼를 따르고 뽕나무나 재배하던 자라고 합니다. 뽕나무란 우리처럼 누에를 기르는 뽕나무가 아니라 무화과의 일종으로 열매를 위한 나무입니다. 그런 농부인데 여호와께서 예언하라고 하셔서 예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할 마음도 없었고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여호와께서 시키시니 말하지 아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여호와께 받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기에 아마샤가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그의 아내는 창기가 되고, 자녀는 칼에 죽고, 그의 땅은 줄 띄워 나누어 질 것이고, 그는 더러운 땅에서 죽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저주처럼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여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다른 행위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간의 고귀하고 순수하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말씀을 받고 믿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아모스 8:1-10  여름 실과  2003. 8. 27.

 

 


1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2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아모스의 네 번째 환상입니다. 그동안 황충과 불과 다림줄의 환상과 그 의미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환상인 여름 실과 한 광주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고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고, 아모스는 여름 실과 한 광주리라고 대답을 하자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여름 실과’라는 히브리어의 단어와 ‘’이라는 단어가 발음상 비슷합니다. 여름 실과는 ‘카이츠’이고 끝은 ‘케츠’입니다. 왜 여름 실과와 끝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발음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심판이 무르익었음을 여름 과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기에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 심판은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고 시체가 많아서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의 궁전에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정치 경제적인 안정으로 인하여 마음이 든든하여 노래를 지절거리고 있지만 그러나 곧 그 노래가 변하여 곡이 될 것이라고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정말 분위기 망치는 사람입니다. 한참 노래 부르고 흥이 나 있는 잔칫집에 와서는 잔칫상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의 눈에는 여름 실과 곧 끝이 임하는 것이 보이기에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절거리는 노래 소리를 그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심판을 받아 즐비한 시체더미들이 처처에 버려지는 상황이 보이는데 어찌 함께 노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래 일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점치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장래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6:13에서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자기 백성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래 일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장래 일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14절).

 

 

 

그 날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불에 타 없어질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아모스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장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아모스 선지자가 보는 시각처럼 그 끝을 보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이러한 시각이 생겼습니까? 말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에도 오고 수요일까지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시는데 과연 무엇이 보입니까? 주님의 약속하신 그 끝이 보이십니까? 여름 장마철에 썩어져 나가는 여름 과실처럼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썩어서 내어 버려야 할 것을 귀한 것처럼, 썩지 아니할 것처럼 끌어안고 있다면 그 썩어질 것과 함께 내어버려지지 않겠습니까?

 

 

 

왜 그러한 끝이 이르게 되었습니까? 4-6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고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 때문입니다.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이 생긴 것은 북 이스라엘이 이미 바알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에 따른다면 경제정의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업으로 받은 땅을 사고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경작권을 팔수는 있지만 언제나 되무를 수가 있고 친척이 물러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희년 때에 자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미 바알의 경제구조가 북 이스라엘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오늘날 이 땅에서처럼 일어나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과 자비는 간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음이 든든한 이유에 대하여 전에 보았습니다. 경제적인 안정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무도 이행하기에 마음 든든해 한다는 것입니다. 월삭은 매월 첫째 날을 안식일처럼 제사도 지내고 쉬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날이 달의 첫날이면 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빨리 가게 문 열어 장사해야 하는데 언제 월삭이 끝나고 언제 안식일이 끝나는가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창원에서도 두 곳에서 월삭예배라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압니다. 한 곳은 제가 직접 주보를 보았고 한 곳은 어느 가게 사장이 월삭예배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일요일도 예배드리고 월삭에도 나가기는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참석할까요? 언제 월삭과 안식일이 끝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술 더 뜨지 않습니까?

 

 

 

월삭이나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있지만 돈벌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고 거짓 저울로 속이는 것입니다. 사들이는 됫박은 크게 만들고 파는 됫박은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되의 크기는 꼭 같아도 그 안을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울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울 한 눈금만 속여도 그것이 많을 경우에 자기 이익으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이 율법적 요구에 의하여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시장바닥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기적인 장사만이 아니라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고 신 한 켤레 가격으로 궁핍한 자를 산다는 것입니다. 잿밀을 팔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4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는 자들아, 5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 하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 하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6 등겨까지 팔아먹어야지. 힘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 종으로 부려먹어야지" 하는 자들아.”

 

 

 

이방인의 나라도 아닌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그 마음을 바알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공산주의 아래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 드는 것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황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7절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영광이란 여호와 자신의 영광으로 맹세하시는 것인데 왜 야곱의 영광이라고 하셨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야곱은 자기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을 속이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지금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저희들의 소위를 영영히 잊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야곱의 영광으로 맹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위를 영영히 잊지 않으시고 갚으시는 것을 인하여 땅이 떨며 그 가운데 거민이 애통할 것이며 온 땅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리라고 하십니다. 땅이 떤다는 것은 아모스 1:1절에서 지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듯이 엄청난 두려움과 재앙이입니다. 나일 강이 홍수로 범람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가공할 두려움으로 떨 수 있는 심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9-10절은 이미 5:18-20절에서 예고하였던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5:18-20절을 봅니다. “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이러한 여호와의 날의 심판은 5장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그들의 제사와 절기지킴과 노래 소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역겨운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상황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와 절기지킴과 찬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되는데 그것은 즐거워해야 할 절기가 애통으로, 모든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여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로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로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소식이 아모스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간 것입니다.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하고 사기를 치고 속이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를 섬긴다고 월삭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속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을 보고서 왜 그랬느냐고 판단하거나 그러니 망하였지! 라고 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습니까? 오늘도 그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바르게살기운동’을 하기도 하고, 경제정의를 실현하여 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이루어낸 역사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공동체라고 하여도 인간의 죄악은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내려왔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선지자는 끝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구약의 남은 자들이요 신약의 주의 택한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징조를 보면서 그 끝을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말하고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여름 실과가 무르익어 썩어지듯이 그 끝이 다 되었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살지 아니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끝을 보기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성상가 옆에 과일가게 아저씨가 커다란 참외를 검은 봉투에 담더니 길에 있던 쓰레기도 주워서 함께 담는 것을 어제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였는데 썩은 모양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보입니까?

 

 

 

 

 

 

아모스 8:11-14  말씀의 기갈  2003. 9. 3.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여름 실과 한 광주리의 환상을 통하여 끝을 계시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끝이 무엇임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여러 모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아모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재를 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 중에 수많은 재앙들이 선포되었습니다. 불을 보내어 궁궐들을 사르리라고 하시고, 적이 침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구하려 비틀거리며 찾고,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로 곡식들과 과일들을 다 먹게 하시고, 전염병과 칼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재앙들은 돌아오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기들은 제사장이 있고 단과 벧엘에 제단이 있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악기로 노래하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샤 같은 제사장이 나라와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마음 든든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북 이스라엘에 황충과 불과 다림줄과 여름 실과의 환상을 통하여 그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황충과 불의 심판은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리까? 하면서 중보를 하자 그 심판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다림줄의 환상과 여름 실과의 환상과 9장에서 마지막 환상인 기둥머리를 치시는 것에서는 더 이상의 돌이킴이 없습니다. 심판이 그대로 시행될 뿐입니다.

 

 

 

그러면 여름 실과 환상을 통하여 그 끝이 이르렀음을 계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온갖 재앙들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끝에 나타나는 재앙입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도 갈수록 그 강도가 세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이신 환상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더 심각하겠습니까? 그래서 9장에서는 그 악인들을 일일이 찾아 심판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그 끝에 이른 재앙, 그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1절입니다. 한 날이 이를 것인데 여호와께서 기근을 땅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 날이란 심판의 날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망하는 때가 되는 것이며, 오늘날에는 종말의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지막 심판이란 여호와의 말씀의 부재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이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거두어 가 버리면 그것이 심판이요 끝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완전한 끝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돌이킬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가버리면 그것은 끝입니다.

 

 

 

인생의 호흡이 그 코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흙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호흡을 취하여 가버리시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숨, 여호와의 바람, 여호와의 기운, 여호와의 말씀이 거두어져 버리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끝이요 세상의 끝이요 종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버리면 그것이 끝이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이 닥친 것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된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갈이 닥친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던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는 그들에게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하여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그것이 환난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에스겔 7:1-6절.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4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5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6 끝이 났도다, 끝이 났도다, 끝이 너를 치러 일어났나니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26-27절입니다. “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27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끝났다는 말씀과 함께 그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과 은이 있으면 물과 양식을 살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금과 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사고파는 행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날이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자에게 재앙이 이르기에, 사고파는 것이 의미가 없기에 은과 금도 쓰레기처럼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의 재앙이 무엇입니까?

26절에서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 율법이 없어지며 장로에게 모략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두어져 버렸기에 그제야 구한다고 허둥대어도 더 이상 말씀을 구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끝에 이른 심판이요 재앙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도 종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구약에서 종말의 현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들은 종말 안에 살고 있습니다. 끝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재앙이 무엇이겠습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재앙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온 세계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굶어죽어 가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이 지구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라들마다 나누어 먹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비용의 절반만 들여도 세상에 굶어죽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서로 군비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욕심으로 인하여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을 사는 성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찢어주신 그 말씀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12-13절을 봅니다. 온 사방을 말씀을 찾아 구하나 구하지 못합니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찾아도 찾지 못한다면 노약자는 더더구나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 날의 재앙이라면, 지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재앙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서도 이것을 재앙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루만 굶어도 먹을 것 생각밖에 나지 않는 우리의 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지 않아도 잘만 버티는 우리는 이미 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말씀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기들의 취향 따라 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귀에 즐거운 소리를 찾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이것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가버리시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맹세하여야 하는데 이들이 찾아가서 맹세하는 것은 우상들에게 맹세한 것입니다. 부지런히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구한다고 사마리아로, 단으로, 브엘세바로 다녔지만 그들이 섬긴 것은 금송아지였습니다. 그것들을 섬기면 나라도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평안하고 든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안일한 자들이 든든해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들로 든든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냈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기갈입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바울 사도가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과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하면서 아주 엄중한 권면을 하고 있는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마나 얼마나 개성이 강한지 모두가 자기들의 취향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로 교회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좋아하는 사람,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 전도를 좋아하는 사람, 구제와 선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교회상이란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있는 교회를 선호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부족하면 교회가 뭐 이래 하면서 불평을 하든지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 갈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방향은 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러한 인간들에게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까? 유대인의 메시아상도 아니고, 이방인의 메시아상도 아닙니다. 유대인은 꺼려하고 이방인은 미련스럽게 보이는 십자가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과 요구를 부수어 버리는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6절입니다.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모든 이론을 파하여, 교만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말씀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주여 부수어 주옵소서!

 

 

 

 

 

아모스 9:1-10  마지막 환상  2003. 9. 10.

 

 


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3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5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6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다 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오늘 말씀은 아모스가 본 마지막 환상입니다. 그동안의 환상은 황충, 불, 다림줄, 여름 실과의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환상은 상징적인 환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단 곁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고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를 살육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거나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단 곁에 주님께서 서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단은 일차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벧엘에 있는 단으로 봅니다. 여로보암 1세가 벧엘에 단을 세웠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 단의 멸망을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3:1-5절입니다.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여기서 예언된 것처럼 남 유다의 요시아 왕 때에 이 제단이 무너지고 거름더미가 됩니다. 그러나 단지 북 이스라엘의 단만이 아니라 남쪽 유대의 단도 무너질 것을 함께 말한다고 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지만 남 유다의 죄악도 동시에 고발하고 있기에 예루살렘의 단들도 무너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9장 마지막 부분에 여호와께서 남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제단이라도 하나님을 배반하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9:5-7절입니다.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예루살렘의 성전 제단과 문지방이 언급됩니다. 그곳에 서신 주님께서 심판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이든 남이든 주님께서 반역한 자들에게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고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완벽하게 추적하여 잡아내시는지 아모스9: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을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그 곳에서 취하여 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부란 하늘과 대조되는 곳입니다. 흑암의 곳이며 잊음의 땅이며 무덤입니다. 이런 곳에 피한다고 하여도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은밀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어도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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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음부란 무덤과 동일시되기에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어도 찾아내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거기서 취하여 내겠다고 합니다. 음부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음부가 내려가는 것이라면 하늘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높은 곳에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대조적인 방법으로 갈멜산 꼭대기와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은 동굴들이 많아서 사람이 피하고자 들어가면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는 것입니다. 바다 밑에 피하여도 뱀을 명하여 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사로잡혀 가도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하시며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는 피할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도망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심판인지 산과 바위가 자기에게 무너져 가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인간의 상황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요한계시록에서 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렇게 심판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알고 믿고 있습니까?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만물이 주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속이고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이란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노출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어떠한 조건으로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 9:5-6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단지 심판만이 아니라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면 천지를 녹이고 만드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여호와시라고 하십니다. 언약하시고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온 세상을 자기 뜻대로 만드시고 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부당하다고 할 자도 없으며 심판을 피할 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 범죄를 7-10절에서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7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스 족속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스 족속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의 피부색이 그들의 능력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죄악에 익숙한 백성이 돌이키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3:23절.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선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악에 익숙하기에 그것을 스스로 돌이켜 주님을 찾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블레셋을 갑돌에서, 아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 아람을 하나님께서 세우시기도 하고 망하게도 하시는 분이심을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여 놓았지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나 아람처럼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심판 이유는 10절입니다.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평안을 말하였습니다. 특히 지금 북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종교의 안정을 누리고 있는 시기입니다. 우상을 섬기지만 단과 벧엘에서 종교행사를 하고 있고, 국제 정세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돌아가서 영토를 넓히고 경제가 부흥되니 그들은 축복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엄청난 착취를 당하고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음 든든하게 여기고 살면서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아모스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본 단의 기둥 머리를 쳐서 멸하시는 이 환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고 마음 든든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하여 혹시 든든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바람이며 안개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와 열심들입니까? 우리는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과연 주님보시기에 합당한 것들입니까? 어느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여기에 우리 자신이 해당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범죄하였습니다. 우리가 죄 짓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죄하였기에 당연히 진멸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 아니하라고 하십니다.

 

 

 

왜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북 이스라엘이 다 범죄하였기에 다 진멸되어야 하는데 왜 야곱의 후손은 온전히 멸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다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를 여호와께서 체질하시듯이 체질하여 한 알갱이도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택한 자를 불러 모아서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운다는 11절의 말씀이 사도행전 15장에서 성취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다시는 자기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지극히 마땅한 자들임을 인식하고, 대신 희생당하신 주님의 택하심과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조상의 은덕도, 자신의 공덕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아모스 9:11-15  말씀의 성취  2003. 9. 17.

 

 


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그 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15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태풍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들을 새로 지으려면 철거를 하고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구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빈터에 건물을 세우는 것이라면 철거하는 노력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은혜 아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기존의 인간을 완전히 철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인간을 철거해내어야 하는 것이란 인간의 그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 행함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서진 잔해들처럼 걸리적거릴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여받은 사명은 예레미야 1: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 주시면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지금 태풍피해를 입은 곳을 새롭게 건설하려면 이런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열방 만국을 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먼저 시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설하며 심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친 것은 기존의 모든 것들을 부수는 것입니다. 종교도 삶도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게 하고 그곳에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거짓된 확신에 붙들려서 스스로 속지 말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선지자를 배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잘못되어 있는지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볼 때에 그것은 우상숭배며 혼합종교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벧엘과 길갈에 가서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들이 기뻐하는 바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5:4-5).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는 그러한 제사와 노래를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아모스 5:21-23절입니다. “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제사하면서 속으로는 언제 월삭과 안식일이 끝나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길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고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울을 속이고 나쁜 곡식을 섞어 팔면서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그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아모스가 하나님의 나팔로서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말하며 회개치 아니하면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황충으로, 불로, 다림줄로, 여름 실과로, 성전의 기둥 머리를 침으로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고를 받고서 회개는커녕 오히려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반역자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데 그것은 말씀의 기근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인하여 피곤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헛된 것을 의지하는 자들은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피하고 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디라도 다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산꼭대기 동굴에 숨어도, 하늘에 올라가도, 음부에 들어가도, 바다에 들어가서 피하여도 어디든지 다 찾아내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그곳에서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지를 만드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숨을 곳이라고는 어디라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만국을 체질하여 곡식을 체질하듯이 하겠지만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찾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고 심판을 통하여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심판을 통하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하지 않고서 스스로의 의로나 조건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심판을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자기 대신 심판을 당하신 분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4절에서 흰옷 입은 큰 무리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 심판 받으심으로 흘리신 그 피로 씻고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일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온 열방 중에 남은 자를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9:11절입니다.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옛적과 같이 세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막강하였던 그 나라가 무너진 장막, 무너진 초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듭 반역하여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가 버리고 왕위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심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시면서 주님의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시 세우시는 것은 다윗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다윗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를 경외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7:10-17절입니다. “봉독” 사사 때나 사울 왕처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반역으로 다윗의 장막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사라지지 아니합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8-11절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길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일하시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새롭게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옛적과 같이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옛날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아니라 히브리 원문은 영원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하고 무너지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여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힘이나 의로 나온 백성들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뿌림을 입고서 나온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 가운데서 남은 자와 이방인 가운데서 택함을 입은 자들로 구성이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에돔의 남은 자와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에돔만이 아니라 만국을 그의 기업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시편 2: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야기와 열방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세상은 철장으로 질그릇 부수듯이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시기에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여호와의 말씀이 다 그 아들에게서 성취가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면 그 날이 어떻게 영화로울지를 그림처럼 그리고 있는 내용이 13-15절입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데 얼마나 풍년이 들었는지 수확을 끝내기도 전에 씨를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며 사로잡힌 백성은 돌아오고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포도원들을 심고 거두고 마시며 그 본토에 심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뽑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적군에게 약탈당하고 전쟁으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약속은 그야말로 천국의 생생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15절에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유대의 남은 자들과 이방인 중에서 택한 자들이 함께 모여서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성취를 사도행전 15:12-18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떤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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