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공 상희 2011. 8. 1. 17:33

부활에 대한 예화모음

 〈성구와 금언〉

  ★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 : 21).
  ★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 6).
  ★ ……주께서 과연 살아계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 : 34).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 : 14).
  ★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고전 15 : 3∼6).
  ★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 :25).
  ★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칼바르트).
  ★ 인간들의 최후 목표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칼바르트).
  ★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는 결코 완전히 멸절되지 않는다.  악한 자는 다시 일어나 처벌을 받을 것이며 선한 자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어거스틴).
  ★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옥스포드의 H·P·A Major).
  ★ 바울의 케리크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들을 의미 심장한 종말론적 정황에서 선포한 것이다(C·H 따드).

 〈실 화〉

  ★ 대영백과 사전은 예수 부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부활 직후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남녀 약 120명이 예수님에 대해 가진 바 공동의 확신과 공동의 기대와 공동의 태도를 통해 그들이 하나의 종교적 집단에 결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몇 명 앞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충분히 들었다.
  그들은 간절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무한한 능력으로 속히 오신 것을 기대하는 신앙의 태도를 지켰다.
  그들의 강한 확신과 진실함을 박해로서 시험되었고 그들의 확고 부동함으로 입증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의 종교적 특질은 헌신과 자기 희생과 예수님에 대해 자기들의 이기심의 마지막 장벽까지 일소해버린 강한 의무감으로 증명되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가졌고 열심히 그것을 전파했으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 미국의 유명한 백화점 왕 죤·와나 메이커옹이 한 번은 필라델비아에 있는 그의 교회 주일학교에 참석하였던 한 동양인이 말하기를 공자나 예수 그리스도나 다 같은 도덕적 인류의 선생이요 사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기는 다만 공자의 도를 따르는 유교를 믿을 뿐이라고 하는 말을 듣던 와나 메이커옹은 정색을 하며 동양에서 온 그 젊은이를 향하여 하는 말이 "공자는 역시 죽었으나, 예수는 무덤에서 다시 나신 것이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부활신앙을 고백하였다.

  ★ 로마사의 저자 토마스 아놀드는 그가 옥스퍼드대학의 현대 사학과 주임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에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에 대한 그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그 증거를 내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논증 가운데서 긍정적인 논증으로 구별해 낸다는 것은 아주 유익한 일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재판정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을 처리 하듯이 매우 신중하고 철저하게 부활을 조사하여 왔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만족스러운 답을 얻기 위하여 여러번 조사를 시도하였다.
  나는 여러해 동안 다른 시대의 역사에 대하여 저자와 기록들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기적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보다 더 완전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 역사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월간 목회에서).


 
 부   활

 <성구와 금언>

  ★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을 거짓으로 드러냈다고 가정 해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으로 돌아 갔을 것이요. 만일 그랬더라면 예수의 부활은 송두리째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해 가면서도 부활을 입증하였다(파스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결론이 없는 복음일 뿐아니라 전혀 복음이 될수 없다(렘세이 교수).
  ★ 나는 여러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토마스 애놀드 옥스퍼드대학교수).

 <실 화>

   ★ 무신론의 장해물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경과 길버트 웨스트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해물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바울의 변화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반증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말하기를 "우리는 더 이상 이 같은 반대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뿐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네."라고 고백하였다.

 

부활절 계란 풍습에 대하여
부활절 계란 풍습은 기독교 풍습이 아닙니다.
부활절을 easter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사도행전12:4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물론 다른 영어 성경에는 이 날을 passover로 정정해서 쓰고 있지만 킹제임스(흠정) 번역에서만이 easter로 쓰고 있습니다.
번역되면 유월절로 번역이 되어야 함에도 어떻게 부활절로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절하고 easter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달걀은 이방여신 easter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종교에서 이 여신이 큰 달걀에서 부화했다고 하여 이날을 기념한 것입니다.
이 신의 이름은 아스타르테-이스터라고 합니다.
바벨론에서는 달걀에 색칠하는 것을 거룩한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염색한 달걀을 거룩한 제물로도 사용을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부활절이라는 날에 행하는 색칠한 달걀을 먹는 풍습은 원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습관이었습니다.
대영백과사전 easter 항 부분에 보면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으로 봄 축제 동안 달걀을 색칠하고 먹는 습관이 있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까지로 소급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풍습은 절대로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의 풍습이나 축제가 아닙니다.
원래 카톨릭에서 이방 종교의 풍습들을 기독교의 상징적인 때와 맞추어서 사용하던 습관들이었습니다.

카톨릭백과사전 5권 227쪽 부활절(easter)항을 보면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순절 동안 달걀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활절의 즐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붉게 물들인 달걀들을 부활절 상위에 갖다 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기도문을 보면 "오! 주여 우리가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의 이 피조물 달걀들을 축복하여 주의 종들에게 건강이 좋은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이것을 먹겠나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달걀 풍습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교 풍습에 불과하고 그것을 카톨릭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집단이 예수님의 부활을 빙자해서 기독교를 오염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계란이 부화해서 병아리가 되는 식의 어설픈 부활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상징해서도 안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부활을 왜곡시키는 일은 더 더욱 있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시는 부활의 주님
내가 자라던 때 부활절은 결코 성탄절만큼 재미나지 않았다. 성탄절에는 갓 베어온 전나무와 쿠키를 굽는 향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고 특별히 포장된 선물 꾸러미들이 쌓여 갔으며, 성탄절 당일은 사촌과 숙모들, 삼촌들이 모이고 웃음과 얘기들이 넘쳐나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잔칫날이었다.
반대로 부활절은 단조로워 보였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내가 형제들과 함께 교회에 갈 때 옷을 차려입는 새로운 ‘부활절’ 조항을 제외하면 여느 때와 똑같았다. 맏이인 나는 언제나 넥타이를 매었는데, 몸이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다. 예배당의 백합들은 외부에서 구입된 것들이었다. 예배 중의 음악은 발표를 위해 뽑힌 최고의 가수들이 부르는 성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언제나 템플티룸(Temple Tea Room)에서 부활절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곳은 종업원들이 청바지가 아닌 정장 차림을 하고 테이블엔 하얀 린네르 보가 깔린 시내의 유일한 식당이었다. 부활절과 성탄절 모두가 특별했지만, 부활절은 훨씬 더 격식이 있었다. 나는 집으로 가서 넥타이를 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부활절 이야기를 읽으며 기뻐한다. 나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편안한 마음으로 성 요한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있다. 넷째이자 마지막 복음서에 있는 부활에 대한 이 이야기는 좀더 특별하다. 그러나 이 특별함은 여러분과 내가 생각하듯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도 고기잡이를 떠났다(?)
우리에겐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한 형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주고, 먹는 것을 실천하는 기독교 생활방식 전통이 남아있다. 형태와 내용을 많은 부분 성경에서 따온 이 전통은 성찬예식에 명백히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세계의 부엌과 장작불 둘레에서 배고픔에 의해서든 습관에 의해서든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식사 때 표현되고 재현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과 함께 잡수신다. 이 설정에는 강조점이 있으며 주목할 만하다. 이 일곱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두 번씩이나 주일날 연이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인 갈릴리에 돌아와 있다.
마태에 의하면, 그 이전에 그들은 사도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가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가르쳐”(마 28:19~20). 그리고 지금, 원래의 11명 가운데 7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옛 어업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최근에 예수님께 들었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내고 있다. 왜? 왜 그들은 그렇게도 빨리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왜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아덴으로 가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하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왜 그들은 기운이 절로 나서 당장 가려고 안달하거나 열심을 내지 않는가? 왜 갈릴리에서 꾸물대고 있는가?
본문에 분명한 해답이 없는 데 대해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자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수년 동안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의 고기잡이를 떠나는 것과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 왜 손을 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하고 싶다.


몸이 부활할 때까지 영혼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하나님
의 양자가 된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낙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
함께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는 죄수에게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42∼4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
신이 떠나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 저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면 주께서 다시 와서 저희를 주께로
영접하여 주께서 계신 곳에 저희도 있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
음 14:1∼3).
성경은 믿음을 따라 죽은 이들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때 하늘에 있는 본
향을 사모했다고 말씀합니다(히브리서 11:13∼16).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앞서간 성도들을 가리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표현합니다(히브리서 11:33∼12:1). 하늘 나라에서는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찬양하
며 경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요
한계시록 7:9∼17).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
의 보좌로부터 흘러나 길 가운데로 흐르는데 강 좌우에는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시키는 생명 나무가 있다고 말씀합니
다. 거기에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
서 주를 섬기며 주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밤이 없고 등불과 햇
빛이 필요 없는 그 곳,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한 그 곳에서 성도들이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한계시록 22:1∼5).

영혼이 낙원에 간다면 몸의 부활이 왜 필요합니까?
성경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종말이 이르면 우
리 몸은 부활합니다. 우리는 그 때 신령한 새로운 몸을 덧입게 됩니다(고린도
전서 15:42∼49). 몸을 떠난 영혼이 낙원에 혹은 천국에서 지낸다면, 그리고
영혼이 우리 자아(自我)의 정체(正體)라면 왜 구태여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하
는지 의문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의문에 대하여 시원스럽게 답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영혼의 불멸을 말하나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입
니다. 죽음 저편의 세계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으로서는 아무 것
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
로 죽음 저 편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 있어서 영원한 삶이 실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은 피안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보증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실한
증거요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그리스
도가 누리시는 영광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로마서 8:15∼17). 그러므
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
리도 사망을 이기고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
는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42 ∼44). 그것은 우
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광의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
은 죽음에 대한 은유(隱喩)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죽은 자가 장차 깨어
일어날 것임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몸이 잠자는 동안 영혼은 영광의 세계에
이른다는 사실과 마지막 날에 몸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사실, 이 두 사
실을 우리는 서로 조화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개념을 빌려 이해한다면, 죽음 저 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현 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사물을 관찰
하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우리는 죽음 후의 세계, 즉 차원이 다른 세계의 것
을 추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께는 하루가 처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고 말씀합니다(베드로후서 3:8). 이 세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나 저
세상에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영혼과 몸이 죽음으로 결별하고서부
터 부활로 해후하기까지의 경과는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영원에 속한 현재입니
다(시편 90:4)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수많은 고난의 현장 그들의 부활은 언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부활한 것이 너무 기뻐서 믿지 못할 정도(누가복음 24장 14
절)였다.반면 무덤을 지키던 병사와 제사장,장로,총독은 부활이 두려워 거짓소문을 퍼뜨렸다.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
게 나타나 기쁜 소식을 확인해주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부활한다면 누구에게 먼저 나타날까.세상에서 실패하고 낙담해있는 사람일수록 예수를
만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서울 구로동 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는 올해 고난주간을 금식으로 버텼다.국내에 체류중인 재중동포(조선족)들을 향한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단식 시위다.정부가 불법체류 외국인과 고용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재중동포들
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재중동포 1000여명은 지난 26일 서경석 목사가 무기한 단식을 하고 있는 조선족교회에서
1000개의 촛불을 켜고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서목사에겐 부활절이 지나도 고난주간이 계속될 것이다.

이들 조선족의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3성에선 지금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려고 북한을 탈출해온 ‘불법 체류자’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지난 14일 탈북민 25명이 주중 스페인대
사관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 남은 5만여명의 탈북민들은 언제 중국 공안이 들이닥
쳐 자신들을 북한으로 송환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대테러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지난 27일 지진이 일어났다.지진이 발생한 나린 지역의 군사령관은 “헬기를
타고 피해지역을 둘러봐도 온전하게 버티고 서있는 가옥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서 “주민들은 폐허 속에서 가족을 구하거
나 시신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나린 지역의 아이들은 잿더미와 시체 위에서 부활절을 맞아야 한다.

골고다의 고난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고난이 클수록 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게 부활의 약속이
다.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6만명이 모이는 것을 비롯해 전국에서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월드컵 승리’라는 주
제 아래 모여 예배를 드린다.오늘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기억하는 성도라야

 

부활절 남북 공동기도문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
죄악과 죽음의 어둔 밤을 지나게 하시고 새 아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분단의 비극과 아픔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을 미켜 주시고, 우리고 하여금 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 아침의 나라 사람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해돋는 땅에서 반만년 동안 오손도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난 반세기는 전쟁과 분열, 불의와 억압, 고난과 탄식의 세월이었습니다. 같은 동족이며 형제자매이지만 서로를 잘모른 채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서도 서로를 그리워하게 하시며 하나될 날을 기다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주의의 죽음의 세력들은 우리 민족을 무덤 안에 가두어 놓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시작되는 새 역사와 새 창조를 믿게 하셨습니다.

어둠의 사람들은 이 어둠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하나님은 소망의 새아침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

우리 민족이 통일된 나라로 부활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자유와 평화의 나라, 사랑과 정의의 새나라로 태어나게 하시옵소서.

이른 새벽, 예수님을 만나러 나갔던 여인들처럼 우리 민족에게도 하나되는 부활의 아침에 새옷 입고 춤출 날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원산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평양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구상에서 흩어져 사는 온민족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하나되는 부활의 새아침을 속히 앞당기시옵소서.

부활의 종소리가 온땅에 크게 울려퍼지는 이 날, 우리 모두 부활절의 사람들로 생명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만방에 외치고, 민족 부활의 희망을 전파하게 하시옵소서.
부활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부  활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 : 52).
  ★ 만일 죽은 자가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 : 13).
  ★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 : 18). 

  ★ 현시대는 부활의 시대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해서 구속받은 성도의 부활로   끝맺는다(싸우어).   
  ★ 나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 까닭에 영생도 믿는다(맥카엘).
  ★ 나는 하나님의 만물의 창조를 믿는 이상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처녀 탄생도 의심치 않고   믿는다(파스칼).
  ★ 우리들의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성서에 기록할 것 뿐 만 아니라, 봄철에 하나 하나의 청엽   위에 이를 기록했다(루터).
  ★ 예수 부활을 부인하려고 종교 재판을 여러번 하였고 자기 재산을 전부 소비하였고 그러나      최후에는 예수 부활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역사가 끄린).
  ★ 인생의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후 다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증 보다 더 확실한 것 만한 것이 없고 또한 만족한 증거를 갖고 공평된 조사가 이해할 만한      명백한 증거도 이상 없다(아놀드 박사).

  ★ 1967년 8월 29일 프랑스 앙주에서 생긴 일이다.
  이 고장의 소방대장 피자니는 심장의 고동이 멎고 의사가지 사망진단을 내렸는데도 죽은지 30시간이 지나서 되살아났다.
  그는 저 세상에 가서 자신의 출생비밀까지 봤다고 한다.
  피자니는 언짢은 기분으로 소방서에 출근하였다.  휴식실에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비상벨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울렸다.
  왱 ― 피자니는 소방차에 타자 화재현장인 20층 건물 위로 올라갔다.
  피자니는 익숙한 솜씨로 고가 사다리로 오르자 소방호수의 키를 잡고 줄기찬 물을 뿜어냈다.
  그런데 웬일인지 빌딩 화재가 진화되어 고가 사다리에서 내려오는데 머리가 멍청해지며 눈앞의 빌딩이 빙그레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악! 피자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15m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단단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시궁창에 떨어져서 안도감을 가졌으나 절명이었다.   
  의사의 진단은 응급 가료할 것도 없이 죽었다고 하였다.
  부모들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아들의 사망된 것을 확인하고 통곡을 하고 입관까지 하였다.
  그 이튿날도 한 참 울다가 들어보니 관속에서 "이봐요, 좀 열어 주어요 답답해요"하고 소리가 들렸다.
친척들이 놀라서 겁이 났으나 관을 열어 보니 죽었던 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의사의 진단에 죽음을 확인한 아들이 일어나다니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피자니의 볼을 쓰다듬어 보고 팔을 잡아 당겨 보고하였다.
  더구나 부모들은 깜짝 놀라게 한 것은 피자니가 죽음의 세상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점이었다.
  메마른 나무가 무수했고 하늘과 땅이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옆에는 오색의 꽃이 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재 부모님은 자기 부모님이 아니라. 부모님은 자기를 낳아놓고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저승에 가서 보았기 때문이다.

  ★ 인키만 전투에서 한 병사가 총에 맞았는데 겨우 기어 그의 부대에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부 대원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펴진 채로 놓여 있는 피로 물든 성경을 꼭 붙든 채로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 한 손에는 성경을 꼭 붙든 채로 들려 있었는데 한 손으로는 요한복음에 부활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있는 구절을 정확히 찾아서 손가락으로 더듬어 내려가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 병사의 시체는 국군 묘지에 장사되었고 그의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 주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 회교도와 기독교도
 
오래 전에 어떤 한 회교도가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는 너희 기독교도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교도가 아라비아 맥카에 가면 모하메드의 분묘를 볼 수 있지만 너희 예루살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기독교 신자는 말하기를 기독교와 회교가 다른 것은 바로 그것이다. 마호벳은 죽어 썩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 승천한 것이다.

  ★ 1976. 8. 5 이영원 성도 장례식을 했는데 그 가족 중에서 꿈에 그 무덤이 짝 갈라지더니 그 묘에서 학이 나와 금빛 찬란한 새로 변하여 하늘 나라로 올라갔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었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이라고 대답했다.

  ★ 일본에서도 죽은 지 28시간만에 되살아나서 저 세상 얘기를 TV에서도 대담을 시청하며 인간을 놀라게 하였던 일이 있다.

  ★ 부활을 꿈으로 본 선교사
 
몽고에서 선교하다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던 외딸을 잃고 그를 무덤에 장사 지낸 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놀라운 꿈을 꾸고 그의 슬픔이 일시에 사라졌다.
  꿈속에서 그 선교사가 자기 딸의 무덤 앞에 어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빛나는 광채 속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첫번째 긴 나팔소리가 들리니 모든 성도들이 무덤이 뒤흔들리면서 열리고 두번째로 나팔소리가 들리니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 묘 앞에 서고 세번째 나팔소리가 들리니 순식간에 성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사랑하는 자기 딸도 그들 틈에 있음을 생시처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일시에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져서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계속하여 복음 증거를 하게 되었다.

 

제목:부활의 기쁜 소식
마 28:6; 행 4:2; 빌 3:10, 11; 살전 1:10

카우만 부인이 느긋한 마음으로 시카고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집의 열려진 창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림이보였다. 부인은 그림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이상한 힘에 묶인 것처럼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문득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껴 돌아보니 한 소년이 정신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 그림이 소년의 넋을 붙잡고서 놓지 않는 듯한 느낌을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부인은 대견한 생각이 들어서 소년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물었다.
"얘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아니?""그럼, 할머니는 모르고 계십니까?"
소년은 부인이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놀라움에 가득 차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그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 저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로마 군인이고, 울고 있는 저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저 병사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부인은 그 그림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얼마만큼을 갔을 때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와서는 말했다.
"할머니, 제가 가장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이렇게 달려왔어요."

제목:부활의기쁨

몇년전 어떤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설교를 하면서 자기의 4살난 꼬마에게 십자가 사건에 대해 얘기했던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꼬마는 슬픈얼굴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죽으셨나요?" "그렇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라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세상에, 그럼 예수님은 지금은 저를 사랑하실수 없겠군요" 그러자 아버지는 그 순간 부활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가 부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에게 기쁘게 말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실수 있으시단다. 그 이유는 셋째날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지. 그분은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 하신단다."


제목:부활의몸

독일의 시인 괴테는 말하기를 “죽고 다시 산다는 도리를 알기까지 너는 아무래도 처량한 나그네이다”라고 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근거는 무너지고 인간이 순수하고 덕스런 삶을 살게 하는 동기들이 없어져서 결국 세상은 향락과 퇴폐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사람을 자제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고상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부활 신앙이 없어질 때 그 다음의 교리는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의 교리가 기독교와 함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교리인가를 인식할수 있게 된다. 고대에서는 하늘의 형체들의 빛을 색으로 표시했는데 해는 황금색, 달은 은색 또는 녹색, 화성은 적색, 수성은 청색, 목성은 오렌지색, 금성은 백색, 토성은 흑색 등이었다. 이렇게 별들의 색깔이 다르게 표현되듯, 그들의 영광도 다르다고 한다. 그들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표현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이렇게 하늘의 형체들의 영광이 다르듯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창조된 땅의 형체들이 다르고 하늘의 형체들이 다르며 또 그들의 영광도 다르듯이 우리의 현재의 몸과 장차 부활한 몸이 다를 것을 강조해준다. 또 부활의 몸의 영광도 다를 것을 시사해준다.


제목:부활의 소식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야안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제목:부활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인도의 전총리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제목:부활의 역사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다.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스펄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스펄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보냈다.
이틀 후 부활주일.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제목:부활의 영광

미국 보스톤 교외에는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은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다. 수치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속에 들어가 칼을 갖고 오기는 했으나 그만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천막에 들어와서 칼을 바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홀로 지켜본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시체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읍니다.'라고 결단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골든 코넬 신학원이다. 아울러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다.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No cross, No crown -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수 없다.'


제목:부활절 계란 그림의 유래

부활절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은 유럽에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을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전쟁에 나간 후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산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친절로 생활했다. 부인은 이 친절에 보답하려고 부활절을 즈음해,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계란에다 로자린드 집의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말을 써 넣었다.
이 계란을 받아든 한 소년이 병든 군인을 보고 잘 간호해 준 다음, 계란을 주었는데 이 군인은 그 계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란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그 군인의 가훈이었고, 그 군인이 바로 로자린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인은 수소문 끝에 자신의 부인과 다시 만났다. 그 이 후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 부활절 주일에 색계란이 선물로 나눠지게 되었다.


제목:부활절 인사
롬 10:15; 요일 1:5; 행 2:31

러시아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시에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서로 인사하면서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하는 풍습이 있다.
모든 사람이 부활절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사람이 마음속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갖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웃이 이미 부활을 알고 있더라도 상관없다. 그는 가서 다시 그에게 부활을 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자에게 익숙해져서 모두가 기쁜 소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안에 사는 사람이 된다면 종교를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말이 될 것이다.(브룩스)


제목: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리게나
행 1:22; 고전 15:20; 벧전 3:21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로부터 자기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때 그 기독교인은 재빨리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통에 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인가!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 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J. Trevor Davies)

 

귀한 자료 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