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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10. 20. 05:42

단짝 친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우철

 

 

 

전화기를 들고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아내가 부러워진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전화를 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세세한 이야기까지도 “그래그래, 맞아.” “잘했어!” 서로 공감하며 맞장구도 쳐준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사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진심을 주고받으면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가까운 이웃끼리 속내를 털어놓으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스트레스도 말끔히 사라지니 말이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했다. 세월이 빠름을 이르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반세기, 그간 소식도 없던 동창들이 하나둘씩 고향을 왕래하면서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정도 환경도 다 알 수는 없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 함께 즐거워했다. 유유상종이라 했듯이 각별히 마음이 가는 친구가 있다. 전주 평화동에 사는 고원은 우리집과 불과 10여 분 거리에 살고 있었으니 성향도 비슷해서 단짝친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옆에 두고 붓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비록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지만 한학을 많이 하신 조부님 밑에서 초등학교 졸업 이전에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두율, 효경 등 한학을 두루 섭렵했으니 초․중․고 과정을 불과 9년에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적 기량은 고등학교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2년때는 시를 쓰며 학생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교지를 만들었고, 시화전도 이끌었다. 학보 편집주간을 맡아 학교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누군가 조금만 밑받침 해 주었더라면 큰 인재가 되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의 분복이려니 싶다. 친구는 지난 7월 자서전 “고원문집”을 발간했다. 8백여 쪽 분량으로 평생동안 모은 시, 산문, 가정의례는 물론 효문화에 이르기까지 후학들이 읽어야할 가례집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흔적과 종가를 이루려는 선대의 발자취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우선 그의 문집에 있는 시 한 편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莫言何經路 살아온 길 어떠냐고 묻지를 마시게

失杖盲人惶 지팡이 잃은 장님처럼 허둥거렸소

夜深逢絶璧 깜깜한 밤에 절벽을 만났으니

唯願免不具 오직 바라기는 불구자 면하기를

 

생업에 늘 바쁘고 허둥대며 사는데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언제 이처럼 글공부를 하며 대작을 이루었을까?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친구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난 10월 초에는 세 친구(고원, 석담, 우경)가 고향의 자랑인 강천산 모 팬션에서 만났다. 자연히 문집의 내용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구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글을 통해 알기 마련이다. 글 속에 그의 생각과 흔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와 축하를 보내며 하얀 밤을 지새웠다.

 

나는 직장을 은퇴한 이후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수필이 심심치 않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평생을 직장에만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혼자서도 무렴하지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틈이 날 때마다 묵향에 젖어 붓글씨도 쓰며, 지나온 흔적과 생각을 수필로 엮어보기도 한다. 때로는 친구 고원과 만나 담론을 나누며 등산을 즐기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나의 행복한 노후려니 자부하며 산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고, 수필을 쓰며 나의 생각과 흔적이 문자화 되었을 때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빈부나 귀천은 하늘의 분복으로 생각할 일이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늘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자고 다짐해본다.

 

이제 노년에 이르러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는 나이다. 나이가 들면 건강이 제일이란다. 지인들을 만나면 함께 식사할 수 있고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 그게 기쁨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하며 멋지게 살아온 단짝친구를 노년에 만났으니 자주 회우하며 세상담론도 나누며 살아가리라.

(202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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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10. 19. 11:57

23. 2,30대의 반란

이인철

 

 

코로나19가 종식단계에 들어서는가 했더니 긴 연휴 끝에 서울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하게 번졌다. 학생들의 개학이 연기되고 서민들의 정상영업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였다. 더구나 코로나는 전염성이 강해 방역에는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정작 수천 명의 클럽 출입자들은 신고를 꺼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소위 20-30대의 반란이다. 이로인해 방역당국이 그토록 우려했던 조용한 전퍄가 전국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국민들이 왜 그토록 지금까지 정상적인 삶까지 포기하면서 그렇게 노력해왔는가? 코로나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나로 인해 이웃까지 피해를 주는 사회의 공공 악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층들이 느끼는 생각은 어른들의 세계와는 달랐다. 더구나 방역당국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정작 확진자가 발견됐지만 자기에게 불리한 동선은 숨기면서 전염은 더욱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인천의 한 학원강사.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숨긴데 이어 직업까지 무직으로 거짓말을 하는 등 무려 20차례 이상 거짖말을 하는 바람에 방역당국의 초기대응이 늦어지면서 얼마나 전국적으로 걷잡을수 없는 혼란에 빠뜨려졌던가? 이로인해 초,중,고 학생만도 4십여 명이 넘고 7차 전파까지 초래하면서 거의 9십여 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는 결국 구속돼 재판에 넘겨지고 나서야 평생을 사죄하면서 살겠다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겪어야할 당연한 사회적 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극성스런 학부모들의 내자식 사랑이 더불어 사는 삶과 단절을 초래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나만 출세하기 위해 어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는 극단적인 출세주의와 특권의식이 얼마나 공공의 삶을 해치던가? 자유는 있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현상이 얼마나 공동체적사회를 망가뜨리던가?

공교육이 무너지면서 사회교육이 부재한 젊은층들의 인식구조가 사회에 얼마나 무서운 파장을 가져오는지 모른다. 배려는 없고 증오와 복수만이 전부인 양 떠들어대는 극우와 극좌들의 원하는 세상이 바로 이런 것인자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때다.

전두환 군부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하면서 국민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정권 대신 또다시 군부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이변을 낳았다. 물론 양김의 단일화가 실패한 원인도 있었지만 여론의 흐름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한 가지 사건이 연상된다. 전주역 광장에서 노태우 대선후보의 연설이 시작된 어느날이었다. 군사정권의 반대를 외치던 대학생들이 경찰과 유세장입구에서 서로 대치하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때 데모대를 진압하던 백골단원 한 명이 넘어지자 바위덩이같은 큰돌로 백골단원의 머리를 향해 내려치려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대 전국으로 전파를 타면서 부터였다.

백골단은 군사정권 당시 학생시위자와 시위군중들을 체포하고자 구성된 하얀색 헬멧을 쓴 사복경찰이다. 왜 백골단원이 넘어졌고 그 20대가 경찰관의 머리를 돌로 내려치려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여론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분명한 사실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공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사회의 공공질서를 해치는 어떤 행위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꼼꼼이 살펴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또하나의 교훈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202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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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10. 19. 09:15

어머니의 3년 상()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경자년(庚子年)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은 탈상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 즉, 시묘살이를 하여 생전의 불효를 뉘우치며 명복을 빌었다. 나는 그런 효자는 못되고 3년 동안 그날 하루는 우천도 불문하고 외국 여행도 삼가며 간단한 주과포(酒果脯)로 삭망성묘(朔望省墓: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아뵘)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 나에게 부모님 산소는 종교적 장소다.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교회나 절을 찾아서 속죄하고 경건한 심신을 가다듬듯 나 또한 목적은 같고 절차나 방법이 다를 뿐이다.

 

나의 어머니는 5년간 악성 골다공증으로 병원에 계셨다. 말년에는 기력이 쇠진하여 의식은 있어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셨다. 우리 어머니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대학 친구는 자네는 그래도 어머님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위안과 희망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비록 병석에 누워계시지만, 살아계신 어머니 자체를 부러워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운명 직후 잠깐은 귀는 그대로 열려있다고 믿는다. 운명 직전에 어머니는 자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마지막 입술과 목울대의 작은 움직임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때 자손들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마지막 삶을 마감하고 떠나가시는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불효했던 사연을 사죄하고 모두 다 잊으시고 가시라며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의 두 눈가에는 알아들으셨다는 뜻인지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간의 모든 희망은 살아있을 때뿐이다. 이제는 부모에게 불효했던 후회는 땅을 치고 통곡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간의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검은 장막은 서서히 내려지고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어머니는 생전에 불교의 익산지역 신도회장을 역임하셨다. 그래서 제례 의식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셔서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낼 때는 예법이나 예절에는 전통불교제례를 고수하고 있다. 어머니는 조상님들 제삿날 제수는 어머니가 시장에 가셔서 일일이 손수 고르시고 장만하셨다. 나와 동생들은 집 안팎을 쓸고 닦는 일과 어머니 뒷일을 돌봐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나와 동생들이 하고 있다.

 

제삿날 우리 집은 아침부터 철질하는 냄새와 불땀 좋은 마른 솔가리 타는 연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나와 동생은 제사 후에 오랜만에 먹어볼 색다른 제사음식에 신이 났다. 어머니가 조리하시는 옆에서 도와드리면서 음식 부스러기가 나와도, 조상님들이 제사 시간에 잡수시기 전까지는 자손이 먼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다른 그릇에 모두 담으시고 뚜껑을 덮어 놓으셨다. 나와 동생은 참았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쪼르륵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늘이 3년 상()이 되는 날이다. 참으로 인생은 허무하고 덧없다.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어서 오라 하시면서 물 묻은 손을 행주치마에 닦으시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신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셔 제사음식 만드는 모습이 아른거려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우리 형제는 7남매이다. 부모님 제사 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제일 멀리 살고 항상 직장생활에 바쁜 막내 매제에게 고맙다. 제수 준비는 동생은 삼색실과를 중심으로 모든 과일을 전담하고, 나는 나머지를 준비한다. 제사상 병풍은 내가 사자소학 효행 편에서 글귀를 따서 불효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먹을 갈고, 한 자 한 자씩 써서 만들었다. 제사 때는 펼쳐 세운 병풍 문구를 항상 속으로 읊조리며 순간이나마 반성하고 있다. 어머니 삼년상 제례가 끝났다. 나는 축문과 지방을 떼어서 대문 밖에서 마지막 소지(燒紙)로 부모님을 배웅해드렸다.

 

현재 부모님 제사를 모시는 집은 우리 형제들이 낳고 자란 그 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제례에는 장남이 사는 곳에서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어머니 3년 상 제례를 모시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내년부터는 내가 사는 전주에서 부모님 제사를 모신다고 선언하고 부모님께도 그렇게 아뢰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전 고향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전주에서 모시는 것을 서운하시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아실 테니까 너그러이 받아 주시리라 믿는다.

 

언제인가 부모님 상() 후에 일본에 갔다 온 적이 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치솟더니 하얀 구름 위를 떠서 날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고 들었다. 비행기 창문 밖을 아무리 살펴봐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은 보이지 않고 하얀 구름바다 위에 비행기만 미끄러져 날아가고 있었다. 오늘 어머니 제삿날에 그 구름이 또 몰려와 석양에 붉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은 구름 나라인 것 같다. 입추와 백로가 지나서인지 밤에는 서늘하다. 아래 동생은 농사지은 수확물을 올망졸망 나누어 묶어놓고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다. 아내와 제수씨는 제수 음식을 분배하여 이 집 저 집 차에 실어 놓는다. 내일이 출근하는 월요일이라 먼데 사는 동생들부터 빠져나가기에 바쁘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집안이 금세 절간처럼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다. 아마도 부모님 생전에 명절 때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의 부모님 심정을 내가 맞고 있다. 제일 마지막 부모님 집 마당을 빠져나와 전주 집으로 향하는데 앞의 가로등이 뒤로 계속 밀려가는 모습에 옛날과 현재가 바뀌듯 만감이 교차했다.

(2020.9.13.-음력 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