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두루미 2020. 8. 13. 09:39

무주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아문예대학 수필 창작 수요반 정성려

 

 

 

함께 하고 싶었다. 기다리던 그날이 오늘이다. 수필창작 수요반 문학기행에는 참석한 적이 없어 아쉽기만 했었다. 그래서 바쁜 중에도 어렵게 시간을 냈다. 혹시라도 그 언제처럼 마음이 변할까봐 차량지원까지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번만큼은 꼭 참석하겠노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장마도 끝나지 않은 터라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려있었다. 어디에 비를 쏟아 내려고 그러는지, 구름의 이동이 빨랐다. 아침까지 가랑비가 오락가락 했다. 기대했던 문학기행을 망칠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또 쳐다보는 병아리처럼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까봐 우산도 챙겼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여유 있게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고 출발했는데 출근시간 때라서 생각과는 달리 차가 밀려 5분 늦게 도착했다. 수업시간에 지각하여 발자국소리를 죽여 가며 맨 뒷자리에 슬그머니 앉을 때처럼 부끄럽고 미안했다. 다른 문우님께서 차량 지원을 하겠다고 하셔서 내 차는 주차해놓고 몸은 편하게 출발했지만 내가 제일 젊기에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마음도 잠시 정다운 문우님들과 문학기행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한성덕 목사님의 차에 교수님과 여섯 명이 함께 탔다. 수업시간에도 출석보다 결석을 더 많이 했기에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문우님들과도 서먹서먹하고 어렵기만 했었다. 문학기행은 참말로 좋은 것이었다. 운전을 하시면서도 유머스런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분위기를 살려 준 덕에 높기만 했던 벽은 허물어지고 편해졌다. 오늘의 선택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무주는 가까워졌다.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걸려 있던 검은 먹구름은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실은 차가 무주에 들어서면서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주는 우리를 기다렸던 것일까? 무주에 도착하니 먹구름도 슬그머니 높은 산을 넘어 자리를 옮겨 비켜가고 있었다. 한 목사님 고향도 무주라고 하셨다. 고향에서 목사님이 오신 것을 알아 본 모양이다. 목사님은 고향인 무주에 오니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셨다.

“왼쪽을 보세요. 오른쪽 저기 보이시지요?” 하시며 무주에 관한 해설을 한 곳이라도 놓칠세라 쉬지 않고 해주셨다. 수마가 활퀴고 간 흙더미의 흔적들이 산 아래 군데군데 남아있어 마음은 짠했지만 넓은 냇가의 시원한 물소리는 기분을 동심으로 돌려놓았다. 우리 문우님들 중에는 무주가 고향이고 무주와 연관된 분들이 많았다.

“아마 훌륭한 분들이라서 선생님들이 오신 것을 알고 먹구름이 피하는가 보네요.

활짝 웃으며 분위기는 업이 되었다.

 

전라북도에도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두운 줄 모른다더니 먼 곳만을 추천하여 여행을 다녔거늘 가까운 전북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도 몰랐다. 아니 농촌이 고향인 터라 반딧불 제를 한다 해도 흔한 곤충으로만 생각하고 어릴 적 많이 보며 컸기에 그냥 관심밖이었다. 곤충박물관을 관람하며 준비하고 꾸며 놓는 과정에 많은 노고가 있을 것 같아 연신 감탄사가 나왔다. 반디 랜드의 많은 곤충들이 모형이 아닌 진짜라는데 더 흥미가 진진했다. 어린 손주들 생각이 났다. 공부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음에 전주에 내려오면 데려오고 싶었다.

 

많이 웃어서일까?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12, 점심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아침 식사도 잘 먹고 왔는데 기분이 좋으면 소화도 잘 되나 보다. 미리 예약된 식당으로 이동하여 차려 놓은 상을 보니 푸짐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태권도원의 모노레일은 신기 그 차체였다.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기울임도 없이 편안하게 전망대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무주는 아름다웠다. 짙푸른 경치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들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그림처럼 느껴져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작은 카메라 안에 찍힌 경치는 더 아름다웠다. 정말 자연은 신비로웠다.

 

1시간쯤 걸리는 무주에서 전주까지 돌아오는 길은 젊은 날의 추억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곽창선 선생님의 입담에 끌려 한 목사님에 이어 나도 젊은 날의 추억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십팔 세 소녀로 돌아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쏟아냈다. 그 어느 하늘아래 잘 살고 있을 그때의 첫사랑.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그 총각을. 아마 지금쯤 그 총각도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게다. 한참 웃다보니 저녁 식사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이럴 때는 시간이 더 잘 간다. 아쉬웠다.

 

내가 수필쓰기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잘 한 건지 새삼 느낀 날이다. 무주에는 한 건물 안에 김환태 문학관과 최북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주 출신 문학평론가 김환태 선생님은 36세에 작고 하셨다고 했다. 한참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하셨지만 글을 쓰셨기에 죽어서도 그 이름이 책으로 남아있다. 또 그 이름도 오래오래 불려지고 있지 않는가? 내 이름도 수필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열심히 글쓰기에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오늘은 많이 보고 깨달아서 행복한 날이었다.

(2020. 8. 12.)

 
 
 

카테고리 없음

두루미 2020. 8. 12. 08:49

따가운 시선

한성덕

 

 

가슴아린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따갑고 싸늘하고 썰렁했다. 그런 분위기여서 멍때림이 강했었나? 동공은 힘을 잃고, 초점은 분산되었으며, 가슴은 두려움(?)으로 콩닥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나의 느낌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그곳의 분위기였는지 첫 미팅에서 가졌던 소감이다.

은퇴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나이로든지 법이 정한 기한이든지 시차만 다를 뿐이다. 은퇴 없이 살 것을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은퇴하면,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남아있는 시간을 생각하며 ‘성공적인 인생’이란 무엇인지 정의해 볼 수 있다. 나는, 그 남아있는 시간들을 ‘삶의 전쟁’이라 표현하고 싶은데 본질에서 너무 멀고 거창한가?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해 보는 소리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훌륭한 교육, 안정된 가정, 신체적 정신적 건강, 그리고 좋은 취미 등을 말이다. 그러면 성공이고 행복한 건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의 소중함이 절실했다. 일이 없는 은퇴처럼 무료하고 허전하며, ~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일을 찾아 나섰다.

단짝친구 중에 목사요, 대학교수가 있었다. 사회학자로서 복지에 관한 강의를 전담했는데, 막 태동한 요양보호사 강의까지 맡았었다. 앞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며, 사회복지학과에 나를 강제(?)로 등록시키고 요양보호사까지 하라던 친구였다. 그야말로 억지 춘향이었다. 사회복지사는 2년 과정이지만, 요양보호사는 초기여서 어렵지 않게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때가 20088월이었다. 그 뒤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으니 소위 ‘장롱자격증’이었다. 그 단짝친구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요양원을 인수했다. 그리고 2018년이 되었다. 핸드폰 문자로 ‘우리부부를 가르쳤으면 좀 써 먹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소식이 날아들었다. 둘이 한 팀인데, 짝으로 일하던 부부가 갑자기 그만 두었으니 우리가 와서 그 일을 맡으라며 빨리 오라고 했다. 농담이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또 한 번 억지로 끌려갔다. 한 달만 한다는 게 넉 달을 하고야 말았다.

참 기막힌 일이 생겼다. 나는 65세에 목회에서 조기은퇴 했을 뿐인데, 그 친구는 65세에 세상에서 은퇴했다. 심장 수술을 한지 두 달 만에 천국으로 갔으니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한쪽 날개를 잃은 슬픔이 밀려들어, 3개월여 동안 일을 할 수가 없어 우울증환자처럼 어리벙벙하게 지냈다. 아버지를 잃고, 31살 된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정말로 소중한 친구였음이 실감났다. ‘나도 이러한데 사모는?’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2017년 은퇴이후, 아내의 찬양사역으로 살아왔다. 허나 ‘코로나19’ 때문에 찬양사역이 막히면서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다. 결국은, 단짝친구 사모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일자리를 간청했다. 나를 잘 알기도 하지만, 그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어려웠던 때를 생각했음인지 오라는 게 아닌가? ‘직장인’이 된다는 설렘과, ‘일’을 하게 되었다는 벅찬 감격에 나만의 춤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원장을 비롯해서 모든 직원들이 여성인 요양원에, 남자이면서 목사가 사회복지사로 끼어들었다. 금남(?)의 집에 남자 하나쯤은 좋은데, ‘왜 하필이면 목사야?’ 하는 생각에 부러 따가운 시선을 던졌나? 입이 뽀로통하고 심기가 뒤틀린다 해도 생계가 다급한데 망설일 여지도 생각도 없었다.

따가운 시선일랑 가슴에 묻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을 시작했다. 습성 상, 결단하기까지는 고민에 번민을 거듭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일처럼 하는 게 나의 장점이다. 이제 시작했으니 보드라운 시선으로 반기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 날까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할 일에 충실하리다,

(2020. 8. 5. )

 

 

 
 
 

카테고리 없음

두루미 2020. 8. 12. 07:08

‘코로나 19’가 준 교훈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며칠 전 우체국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들른 우체국에서는 얼굴을 아는 직원이 깜짝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외국에 나가 사는 아들딸에게 간단한 물품과 엄마가 열심히 써서 책으로 묶은 수필집을 보냈다.

아들은 십년 넘게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사니 우체국을 통해 적어도 일 년에 서너 차례는 여러 가지 물품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영주권이 나오고 직장을 얻은 뒤로는 조금 뜸했다. 핀란드 에스뽀에 살고 있는 딸에게는 처음 보내는 물건들이다. 딸내미는 그곳에도 다 있으니 힘들게 보내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이번에 수필집과 함께 아이들에게 줄 과자 몇 개와 미역을 챙겼다. 특히 미역은 그곳에서는 아주 귀한 식품으로 특별한 사람들만 먹는 것이란다. 그래서 구하기도 어렵고 막상 구했어도 값이 워낙 비싸니 엄두도 못 낸단다.

먼저 아들에게 보낼 것들을 우체국 상자에 넣고 주소를 써서 건네고, 딸에게 보낼 물건을 막 포장하려는데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내심 불안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더니 핀란드는 *EMS를 보낼 수 없단다. 그러면서 배로는 보낼 수 있다며, 두 달이 걸릴지, 석달이 걸릴지 아니면 넉달이 걸릴지도 모른단다. 직원이 다시 여기저기 연락하여 알아보더니, premium EMS는 가능한데 식품은 절대 안 되고 책만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포기하고 나왔다. 서글펐다.

몇 년 전 사위와 아이들이 먼저 핀란드로 갈 때 서운하여 눈물 짖는 나에게 ‘엄마, 언제든 마음 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 그만 울어!’ 하며 딸내미는 나를 달랬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이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국경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나라 안에서도 통행에 제한을 두었다. 물론 항공기도 뜨지 않았다. 연초에 나도 핀란드에 가려고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가 취소했었다.

그러니 외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마스크라도 챙겨 보내 주고 싶어도 보내지 못했다. 이제는 가고 싶다고 어느 때나 갈 수 있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 19’ 탓이지만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코로나 19’의 유행을 많은 사람들은 무차별한 개발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그리고 삼림 훼손 등 환경 파괴나 세계화 흐름을 적절하게 막지 않으면, 언제든 또 다른 *펜데믹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어찌 어찌하여 ‘코로나 19’를 막았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언제 또 역습을 당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이 된 것 같다. 단지 외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가지 못한다거나 보내고 싶은 물건을 보내지 못해서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것은 차라리 애교로 넘길 수 있다. 전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던 지역까지 벌채가 이뤄지면서 질병을 옮기는 야생동물과의 접촉도 늘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전염병을 전 세계로 확산 시키고 있다.

오늘도 우체국에 다녀왔다.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서 근무하고 있는 조카에게 작은 꾸러미를 보내기 위해서. EMS상자를 찾는 나에게 직원이 어느 나라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 왔느냐는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미국도 하와이에는 보낼 수 없단다. 다행히 미국 본토라는 말에 상자 안에 들어 간 물품들을 확인했다. 요즈음에는 비 대면으로 물품이 전달되기에 전화번호는 꼭 적어야 된다며 여러 차례 강조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지 구촌 시대가 열렸다며 세계여행자유화 바람이 일고, 일부 대학생들 간에는 학교 다니는 사이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가거나,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모임에서도 해외여행은 옛날 서울에 다녀오는 것 보다 더 쉬웠다. 일 년에 한 차례는 외국여행을 다녀와야 되는 양, 휴가철만 되면 공항이 붐비고 연휴가 조금만 길어도 외국으로 여행을 가야 되는 듯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도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처럼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은 보고 싶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었다.

이제는 겸손을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자연은 정복하거나 지배해야 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야 하는 지혜를 배워야겠다. 이제라도 무분별한 개발을 멈추고 예전처럼 조금은 불편하지만 소박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준 커다란 교훈이려니 싶다.

(2020. 8. 10.)

 

 

*EMS : 우체국 국제 특송

*펜데믹(pandemic) :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 유행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