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17. 1. 5. 06:16

나의 비망록

– 2016년 우리 집 10대 뉴스 -

신아문예대학 수요수필반 김효순

또 세밑이다. 지난 한 해, 곶감 빼먹는 마음으로 아끼면서 살았다. 하루해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는 날은 급히 가야할 데가 있는 사람처럼 새들이 울기 전부터 시작하는 날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2016년을 남겨두고 2017년으로 옮겨가려는 이 순간, 나는 갓난아기를 집에 두고 길 떠나는 엄마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손자 김도윤과의 만남

큰딸은 7월 3일 새벽에 전주시 평화동 세나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손자 김도윤을 낳았다. 사위와 함께 분만 대기실에 앉아서 그 녀석을 기다리던 순간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의학이 발달해서 아기를 낳는 일이 그리 위험한 일이 아니라지만 내 딸이 수술을 받는 일이 아닌가. 손에 쥐고 있던 단주가 땀에 젖을 만큼 긴장되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탯줄을 막 자르고 목욕도 하지 않은 도윤이가 찡그린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런 도윤에게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위의 표정을 보니 울컥해졌다. 무사히 출산한 딸이 기특하고 감사했다.

이제 도윤이가 이 세상에 와서 여름과 가을을 지내고 겨울을 맞고 있다. 품에 꼭 안으면 뭉개질 것처럼 연약하던 녀석이었는데…. 어제는 보행기를 타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옹아리를 해댄다. 참 예쁘다. 내 손자라서 그럴까?

둘, 손녀 씽씽이와의 만남

결혼한 지 두 해를 넘긴 작은 딸 소담이가 잉태를 했다. 아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은근히 조바심을 내던 터였다. 나도 기뻤지만 본인들의 기쁨은 훨씬 크리라. 주변 친구들이 현대 과학의 혜택을 받아서 회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갈등이 깊어가던 차 손녀 씽씽이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어미인 소담이의 입덧이 심해 근 두어 달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다. 몸무게가 6킬로그램이 줄어드니 얼굴에서 커다란 눈만 휑하니 도드라져 보였다. 병가 원을 내고 6주 이상 학교에도 못 나갔다. 두 차례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임신 중반기를 넘어가 가끔 구토를 하지만 먹을 수는 있다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씽씽이는 효녀인 모양이다. 지인의 딸은 출산하러 가기 전날까지 구토를 했다는데….

셋, 작은 딸 혁신도시 입성

중인동에 신혼집을 마련했던 소담이가 시내와 떨어져서 외진 곳이라고 싫증을 내던 터였다. 자연과 벗 삼아 채전을 가꾸면서 사는 일이 젊은 그들에게는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밤이 되면 반짝반짝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 도심의 얼굴이 더 친숙한 그들은 어둠과는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부교사인 그들은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혁신도시 호반리젠시빌 아파트로 이사를 감행했다. 바로 길 건너 우미 린 아파트에는 큰딸이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한편 ‘이것은 내 집이 아니라 은행 것’이라고 그들은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많은 융자금을 등에 짊어진 그들의 모습 위로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혹이 오버랩 된다. 내가 부자가 아니어서 안타까운 순간이다.

넷, 베트남 다낭 여행

아빠 회갑이라고 딸들이 보내 준 여행이다. 나는 그들을 특별히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지 못한 무능한 어미였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떠나지 못했고 ‘끓인 국이 식지 않을 거리’에서 소시민이 되어 살고 있다. 또, 은행이 마련해 준 자기 집의 융자금을 갚느라고 그들은 개미가 되었다. 아빠 회갑이라고 그 개미들이 내미는 두툼한 봉투를 받자니 오히려 내 손이 부끄럽고 가슴은 짠해졌다. 하지만 어쩌랴. ‘딸들아, 우리는 사람인 것을.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다섯, 남편 임성규의 회갑잔치

무창포, 겨울 바닷가에 다녀왔다. 추위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낭만을 즐기기 위해서 벌인 일은 아니지만, 그림 같은 펜션 한 채를 빌렸다. 그리고 그 곳으로 내 친정 동기들을 불러 하룻밤을 보냈다. 남편의 조촐한 회갑연을 핑계로 친정 남매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맏이인 내가 채 마흔 살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마저 하늘로 떠나보낸 우리는 굳이 형제모임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아버지와 두 어머니의 기일과 추석·설 명절이면 큰 동생 집에서 자연스레 남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딸들이 제안을 했다. ‘아빠 회갑잔치도 할 겸, 큰 외삼촌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모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이 행사는 초등교사인 작은딸이 주관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지켜보기는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고. 우리 내외가 그 펜션에 도착하니 ‘언제나 청춘! 인생은 육십부터. 임성규 박사님의 회갑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펄럭이며 우리를 환영했다. 먼저 달려온 사위들이 걸어 놓았을 것이다. 큰딸 내외는 싱싱한 생선회를 사러 대천 항으로 나갔다고 했다.

석양에 바닷물이 붉게 물들어 갈 무렵,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을 끝으로 일곱 남매들이 모두 모이니 펜션의 방 안은 반가운 환호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화려한 축하 꽃바구니의 도착과 함께 조촐한 회갑잔치의 막이 올랐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이층 케이크에 불이 붙여지고, 주인공인 남편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회갑연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사위들은 연신 고기를 구워 나르고 빈 술병이 자꾸만 늘어갔다. 그에 비례하여 웃음소리가 한없이 높아져 가는 밤, 바깥에서는 파도가 철썩철썩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남편의 감사 인사에 이어서 동생들이 답사를 했다. 그가 우리 친정에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막내여동생은 ‘그날 하얗게 긴장했던 청년 형부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큰 남동생은 지난 사십여 년d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큰 나무 같은 매형 그늘에 기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노라고 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작은딸이 마련한 행운권 추첨 이벤트였다. 행운권으로 뽑은 상품은 오늘의 주인공인 남편이 반드시 증정식을 하고 우리 큰 사위는 인증사진을 남겼다. 그러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포장을 풀어서 상품을 확인하게 하였다. 포장지는 허술해도 제법 쓸모 있는 물건이 나오는가 하면, 초등학생인 조카는 나이키 운동화 상자를 뽑아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 속에서 욕실 슬리퍼가 나오자 그 녀석은 울상을 짓고 이를 지켜보던 다른 가족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1등 경품은 백화점 상품권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우리 자매들에게 친정어머니가 되어준 큰 동생댁이 뽑았다. 그러자 우스갯소리 잘하는 넷째 여동생이 ‘여기 우리 친정아버지도 와 계시는가 봐.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만 챙기신다.’고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하지만 그 상품권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큰 동생댁이 그것을 셋째 여동생 뒷주머니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 장면을 나는 보았다. 농촌 아낙네가 되어 까매진 얼굴로 나타난 시누이가 안쓰러워 그랬을 것이다.

노래방에 들렀다가 모두 불콰해진 얼굴로 나오니 바닷바람이 오히려 시원했다. 오늘의 마지막 이벤트는 밤하늘에 폭죽을 쏘아 올리는 일이었다. 폭죽은 까만 하늘 위로 한없이 날아올라가서 아름다운 별이 되었다. 그 별을 바라보면서 모두 각자의 소망을 비는 일에 몰두한 것일까. 잠든 바다처럼 그들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여섯, 우리 부부·동생 둘과 떠났던 태국 골프 여행

세상에는 골프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우리 부부가 허물없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스개 삼아 하는 말이다. 우리 형제 2남 5녀 중 골프를 하는 두 남매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서 태국으로 골프 여행을 떠났다. 남편이 경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해서 성사된 일이었다. 칸차나부리 근처에 있는 불루사파이어와 니찌꼬리조트에서 7박 8일 동안 지냈다. 그 때 쌓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달콤한 과일향의 뒷맛이 느껴졌다.

올해 회갑을 맞은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마흔 살을 갓 넘긴 막내 동생은 고등학교만 졸업한 직장인이다. 그런 그들이 필드 위에서는 환상의 하모니를 보여 주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은 울타리 안에서만 허용되는 유머러스한 나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골프를 했던 남편도 ‘참으로 흐뭇하고 따스한 시간’이었노라고 했다.

많은 운동 중의 하나인 골프는 때로는 이렇게 삶의 달콤함을 선물하기도 한다. 골프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서울을 오갈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도 음료수 한 병 사 먹지 않았다는 친정아버지에게 기대어 우리 일곱 형제 중에서 다섯은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 두 사람이 그들이다. 막내 동생은 싱글플레이어의 경력도 있다고 했다.

일곱, 80대 타수에 진입한 나의 골프

2001년 남편이 미국 피츠버그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었다. 그 때 골프에 입문했으니 구력으로만 따지면 나는 꽤 실력 있는 골퍼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골프 타수는 좀 체 줄지 않는다. 운동에 전념할 만큼 삶의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겨우 동반자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솔직히 나에게 골프는 썩 재미나는 운동은 아니다. 한동안 골프채를 놓아버린 적도 있었는데 퇴직 후 남편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다시 골프에 입문했다.

이번에는 꾸준히 연습을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던가. 드디어 올해는 내 스코어 카드 앞자리에 8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제야 골프 치는 재미를 느끼게 되면서 좀 잘 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틈나는 대로 거실에서 퍼팅 연습에 몰두하는 나를 보면서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참 내, 김효순이가 무엇인가를 한 번 해보겠다고 저렇게 용을 쓰는 거 처음 보네.”

돌이켜보면, 무식해서 용감했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가기 전에 골프 레슨 한 달 받은 실력으로 필드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언 7번으로 똑딱 볼만 치다 갔으니 드라이버나 우드는 잡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공은 어쩌다가 한 번 떠서 날아가고 대부분은 땅볼로 굴러 다녔다. 그래도 새벽이면 남편과 둘이서 집 근처 카네기 멜론대학 뒤에 있는 퍼블릭 골프장에 나갔다.

밤새 이슬이 내려 촉촉해진 잔디밭에서는 부지런한 노루가족들이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부부를 만나면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걸어서 골프코스를 한 바퀴 돌고나면 그때서야 햇살은 배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그 햇살을 받으면 영롱한 보석으로 변신하던 이슬방울들과 민들레꽃 노란빛이 어제 일인 듯 눈에 선한데, 손꼽아 보니 아주 오래전 일이다.

여덟, 딸과 함께 2박 3일

막내딸 소담이 여름방학을 맞아 상원사로 떠났다. 딸이 좋아하는 참외를 얼음바구니에 담고 과자까지 챙기고 나서니 설렘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이다.  

출근 시간을 피하려고 동트기 전에 출발하니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딸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장거리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인데 좋은 친구와 떠나는 여행 같았다. 문막휴게소로 들어갔다. 딸은 도너츠를 나는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서 옷 파는 매장을 휘 둘러보기도 하면서 한가로움을 즐겼다.

상원사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나니 점심공양 시간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배식 그릇에 남아있던 마지막 두부부침을 집어 담으면서 마주보고 웃었다. 우리 뒤에 있던 사람은 못 먹은 음식이다.

방에서 한숨 돌리고 중대 사자암을 지나 적멸보궁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체력이 약한 딸은 왕복 4킬로미터의 경사진 산길이 꽤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적멸보궁에서는 넓죽 절을 하더니 자기 지갑 안에 있던 지폐를 털어서 보시를 한다. 그 모습이 제법 간절해 보였다. 내려오는 길, 자그마한 다람쥐들이 우리와 눈을 맞추었다. 마치 사람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저녁예불에 참석했다. 예불이 딸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으리라. 예불 문을 낭송하면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절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영리한 딸은 눈치껏 잘 따라했다. 반야심경 독송이 끝나고 문수보살 정근이 길게 이어지자 슬그머니 법당을 빠져 나갔다.

그런 딸의 뒤를 좇아서 나도 법당 문을 나서니 정갈하게 비질한 자국이 마당에 그득하다. 하늘가(家)에서는 붉게 물든 구름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한갓진 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기가 느껴져 방안으로 들어왔다. 밤 9시에는 소등해야 하는 산사의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날 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잠에 취했던 편안한 밤이었다.

다음 날 새벽 4시, 도량석을 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눈을 떴다. 후다닥 눈곱만 떼고 새벽예불이 시작된 법당으로 갔다. 신 새벽 예불에도 참여하는 딸이 내심 대견스러웠다. 예불을 마치고 법당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오대산 봉우리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들은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은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옛길을 걷기로 했다. ‘선재길’이라 불리는 이 오솔길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길을 나섰던 선재동자에게서 빌어 지은 이름이리라. 9킬로미터의 산길을 세 시간 동안 걸었다. 졸졸졸 노래 부르는 계곡물소리와 친구인 듯 마음이 통하는 딸과 함께 걷는 길은 아름다웠다.

월정사의 점심공양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배식 판에 음식을 받아들고서 또 마주보고 웃었다. 속세에서 고기를 즐겨 먹는 딸이 절간에 와서는 쌀밥에 나물 반찬을 달게 먹었다.

상원사에서 이틀 밤을 묵고 우리는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우리 집 문 앞에 나를 내려두고 딸은 자기 집으로 갔다. 나는 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기가 부릉거린다. '엄마와 동행한 여행길, 몸과 마음이 참으로 편안했노라.'는 문자메시지였다.

아홉, 《수필과 비평 9월호》에 실린 나의 수필

수필과 비평사에서 원고 청탁을 받았다. 내가 등단하여 수필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 동안 써 놓았던 글 중에서 9월- 초가을 느낌이 살아나는 글을 골라서 보냈다. ‘가을 문턱’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수필가가 되고나서 수필전문지에 처음 실린 글이다. 많이 써봐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데 천성이 게으른 나는 글 쓰는 일에서도 그 버릇은 못 버리는 것 같다.

열, 영화 그리고 음악과 그림

본래 나는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툴다. 나이를 먹어가니 점점 사람과 어울리는 기회가 드물 뿐 아니라 내 쪽에서 시들해지기도 한다. 이른바 혼놀족(혼자 노는 사람)이 되어 간다.

전주 독립영화관의 정기후원회에 가입했다. 얼마간의 후원금을 내면 일반인보다 천원을 할인해 준다. 큰돈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우대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쨌든 한가할 때나 관심이 가는 영화를 찾아서 극장에 가곤했다. 사람과 만나는 일이 썩 수월하지 않을 때 영화 속에서 인생을 본다.

전주시립교향악단의 후원회원이 되어 매월 시향연주회에 다녔다. 교향곡 전곡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서 행복하다.

벌써 4년째 문인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올해는 포도와 모란, 능소화를 그렸다. 이제 겨우 붓끝의 감각이 느껴지고 먹물의 농담 조절을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보니 나의 지난 2016년은 참 좋은 나날들이었다. 아마 나의 2017년도 날마다 좋은 날일 것 같다. 아주 젊은 것은 아니지만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가까운 인연들이 평안하니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날마다 108배를 하면서 내 마음을 성찰하다 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으로 살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20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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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보 잘보갑니다
오늘도 좋은하루되세요(^^) 화이팅 하시고 (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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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유의하세요(^^) (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