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20. 1. 15. 14:09

  전화번호를 지우며


                                                                                   오인모


 


 


 


 아침에 신문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물었으나 대답은 없고, 울먹이는 소리만 난다. 전주에 사는 둘째여동생이다. 익산 ㅇㅇ조카가 조금 전 패혈증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조차 제대로 못하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아, 이런 경우를 두고 청천벽력이라고들 하는구나! 나는 갑작스런 젊은 조카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멍한 채 벽만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레 전 통화를 했었는데 그 때 조카는 너무 명랑하고 힘차보였다그런 조카가 죽다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이는 분명 요절夭折이다. 57세인데 요절이라 표현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요즘 기대수명이 82.7세로 100세 시대, 120세를 겨냥하고 있는 터이니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1900년대 초 기대수명이 50세 안팎인 그 시절, 사람들은 시인 소월素月의 죽음을 요절이라고 했다. 그 때 소월의 나이 32세였으니 그 때와 현재를 비교하면 조카의 나이는 너무 젊다. 그래서 그의 부음은 비보다. ㅇㅇ조카는 형님의 큰아들로 나로서는 장조카이며 집안의 장손이고 씨 종가의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조카는 회사 사원으로 근무하는 평범한 중년의 가장이며 누구의 자손으로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가 하는 일이 기특해 나의 충격은 컸다. 집안의 시제 일이라던가 대소사를 주관하며 집안의 애경사는 다 챙길 뿐 아니라 대신 참여하기도 한다. 형님(조카의 아버지)20여 년 전에 세상을 뜨시고 그 후 조카 나이 30대 후반부터 홀어머니의 일까지 두 집 일을 맡아야 하니 일인 3~4역을 한 샘이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장조카인데다 나이가 들면서 대면하는 일이 잦다보니 어울리는 일이 참 많았다. 천진스런 그의 얼굴 모습이 떠오르며 소소한 추억거리들이 하나하나 봉긋봉긋 삐져나온다.


 조카는 명절이나 집안 대사에 미쳐 참석하지 못 할 때는 늦게라도 우리 부부를 불러낸다. 작은 아버지 일 끝냈으면 어서 오세요. 판 깔았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이는 명절 때 모이면 의레 시작하는 윷이나 고스톱 꾼을 모집하는 유인책이다. 우리 부부는 대개 뿌리치지 못하고 서둘러 동참해서 한 나절 시끌벅적 요란을 피우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거나 어떤 때는 큰댁에서 머물고 다음날 오기도 한다. 조카는 또 농작물 수확기에는 직접 그가 거둬드린 고구마나 옥수수 등을 가져가라고 하면 우리는 겸사겸사 큰댁을 방문한다.


 고향 큰댁은 정읍의 외곽 북편에 있어 전주와는 4~5십분 거리다. 우리 형제자매는 9남매로 한 때는 명절 뒤에 다 모이면 조카들까지 합해 30여 명이 넘을 때도 있다. 명절이란 게 여느 댁이나 바쁘고 일손이 많이 가는 연중 큰 행사이지만 한 때 우리 고향 큰댁은 종가 어른들과 그 자손까지 모여 여러 날 동안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은 핵가족 시대에 편승해서 이래저래 자기네 가족끼리 명절을 지내버려 옛 전성기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하지만 아직도 큰댁은 다섯 조카 가족이 다 모여 북적대니 옛날 그 분위기를 되살리는 듯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조카들도 성장해 그들만으로도 집안이 풍성해지니 명절 때 고향 방문이 뜸해지고, 부모님 기일에나 겨우 참석하는 편이다.


 한 번은 추석절 성묘 길에서 장조카가 작은 아버지도 집을 마련해야죠. 이 근처면 되겠는데요?” 했.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싫다고 했다. 여기서 집이란 죽은 뒤 들어 갈 가묘假墓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때 나는 화장을 해서 납골당이나 아니면 물에 뿌려 흔적 없이 날렸으면 했다. 이것은 나의 바람이지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후 본인의 장례문제는 자식이나 유족들 혹은 시신을 처리할 종사자들의 마음에 달려있기에 그것만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말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화장을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장묘문화에 대한 반발에서도 아니고, 유교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또한 아니다. 그냥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는 장례절차를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나의 사후 시신 처리이기 때문이다.


 조카와 나는 화장과 가묘 얘기를 여럿 있는 가운데 진지하게 했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고 그의 어머니, 나로서는 형수씨의 가묘가 형님 묘소 곁에 마련되었다. 가묘는 참배까지는 않지만 성묘 때는 봉분을 정돈하고 벌초를 하노라 정성을 다하고 있다. 나는 어느 날 성묘 길에 형수씨의 가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죽은 자의 무덤과 산자의 무덤 경계에서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내가 훗날 언젠가 죽어 시신이 납골당에 안치 되거나 어느 한적한 강가에서 바람결에 공중분해될 것이라 생각하니 생이란 참으로 부질없고, 보잘 것 없고, 무상한 것이라 여겨졌다.


 조카가 세상을 떠나고 난 지금, 그와 각별하게 지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와 더 좋은 추억을 남기고, 더 즐거운 시간을 가져주고, 작은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을 조금이라도 더 했어야 할 것을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조카는 느닷없는 죽음으로 유언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이란 유족들의 황당함은 물론 장례절차나 시신처리 문제 등을 단시간 내에 결정해야 하는 난제가 따른다. 그래서인지 조카의 시신처리는 화장을 해서 지금 납골당에 봉안되어 있다. 죽기 전 고인의 뜻을 기렸는지 아니면 유족들의 의견을 모아 화장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생전 그의 장묘문화 인식에 대한 성향으로 봐서는 매장 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조카가 죽은 지 수개월이 흘렀다. 이제 수기한 전화번호부에서 조카의 이름이 적힌 전화번호를 지우고, 다음으로 휴대전화에 입력된 주소록의 이름을 삭제하기 위해 키를 누르니 연락처를 삭제 하겠습니까?”라고 문자가 뜬 뒤취소” “삭제두 단어가 나온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삭제키를 눌렀다. 나는 생각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마지막 관계를 끊는 것은 결국 통신 단절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