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평※

두루미 2020. 2. 1. 08:54
  김학 수필의 키워드(1)/윤재천 교수 [현대비평] - 김학  
 


등록일 2007-05-05 11:06:26
조회수 2206회
김 학 수필의 키워드(1)
- 떠돌며 추슬러 곧게 세우는 글로의 수도(修道)

                  윤 재 천(중앙대 명예교수,계간 창작수필 발행인)


 글은 자기의 근원적 존재와의 대면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창작이 다른 언어작업과 다른 면모다. 결국 도달하는 곳은 자연이며 순리이고 포장되지 않은 진실이다. 밖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소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의 삶’이 누구의 삶에도 있고, 있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잘 입증하기 위함이 작가 작업의 근본취지이고 목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만큼 진리에 근접해 있는 것은 없다. 그 면에서 문학은 철학이나 역사보다 더 가치 있는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 김 학의 글은 무엇보다 현실에 충실하고 있다. 그가 그만큼 순리를 인정하며,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써서 산 사람이기에 그렇다. 고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각별한 것이 이를 입증해주는 예다. 한마디로 요약해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충실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의 감상 소회를「떠돌며 추슬러 곧게 세우는 수도(修道)」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모처럼 얻은 황금 같은 휴가가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다. 제11호 태풍 세실이 빼앗아간 나의 휴가다. 연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린 날이 있었는가 하면, 비가 내리다 해가 뜨다 하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무덥고 구름 낀 날도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하염없이 빨래줄 같은 빗줄기를, 옥구슬 같은 빗방울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이면 내 대신 선풍기가 휴가를 즐겼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로 말끔히 세수를 한 뜨락의 초목들이 마냥 푸르렀다. 물놀이를 하다  밖으로 기어 나오는 하동(河童)들같이 싱싱해 보였다.
                                            - 「물처럼 사노라면」중에서

  물의 미학이다. 사람과는 달리 사사로운 것을 얻어내려 곳곳에 끼어들어 천박한 속성을 드러내지 않는 ‘물’에 대한 찬양이다. 사람은 자연을 통해 공존의 질서를 배울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며 무위(無爲)의 실천자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이것은 물뿐만이 아닌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만 사람들이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왜곡된 삶을 꾸려가고 있기에, 자연의 권 외에 존재하는 별개의 존재처럼 보일 뿐이다.

  자연의 덕은 사방에 가득하여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언제나 그들의 진면목과 대면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거나 스스로 눈감아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물처럼 사노라면」은 우리 고향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글로 볼 수 있다.

 인위적(人爲的)인 것은 한낱 조작에 불과하다. 진심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을 위해 ‘애 쓴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자연스러움에 순종하는 것만이 정도(正道)이고 가까이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임에도 억지로 무엇을 만들어 향해하려 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삶의 귀감으로 삼아도 좋다.

 작품과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연의 진의를 살펴 그를 선양하기 위함이다.

  가시고기의 자식 사랑은 차라리 숙명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부성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에 비기면 나의 자녀 사랑은 부끄러울 뿐이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나는 아빠로서 그 정도밖에 한 일이 없다. 내가 그것을 내세워 자식 사랑이라고 우긴다면 가시고기가 웃을 일이다. 한낱  미물인 가시고기가 정말로 성자(聖者)처럼 우러러 보였다.

  저들 가시고기는 어떻게 그런 부성애(父性愛)를 체득했을까? 서당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닐 테고, 학원이나 개인교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어떻게 배웠을까.
                                                - 「아빠 가시고기」중에서

 가시고기는 부성애(父性愛)의 표상이다.  흔히 부모사랑이라고 하면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가시고기의 경우엔 예외다. 수놈이 쏟아놓은 정액을 암놈이 품어 부화시켜주곤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부화과정을 통해 깨어날 알들을 위해 아버지가 될 가시고기는 주변을 배회하며 지느러미를 흔들어 산소공급을 해주거나 다른 어종에게 알을 먹이로 내주지 않기 위해 불침번을 선다.

  이를 입증케 하는 것은 알이 부화하는 동안 아버지 가시고기는 식음을 전폐하고, 알이 어린 가시고기로 태어날 즈음에는 주검이 된다. 이는 어린 가시고기의 첫 번째 먹이로 자기 몸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아버지로서의 자기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했나를 뒤돌아보며, ‘가시고기’를 떠올리고 있다. 이 작품도 개체의 고유한 본능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그것이 갖는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 인간의 모범적 선례로 삼아 배워야 할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애써 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게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일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혼상대를 고르려거든 비가 억수같이 주룩주룩 쏟아지는 날 우산을 함께 받고 걸어보는 것도 좋다. 그때엔 우산대를 자연스럽게 남녀가 번갈아 가면서 잡을 일이다. 우산 잡는 자세 한 가지로 백년해로의 대상을 고른다는 것은 단어(單語) 하나를 보고 작품 전체를 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라고 웃어넘길지 모르나, 적어도 이기적인 사람인가, 이타적인 사람인가의 여부는 짐작할 수 있다. 연인들이 비 오는 날 따로따로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모습은 아름답지가 않다. 한 개의 우산 속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며 걸어야 어울린다. 우산, 그것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사랑의 밀실이니까.
                                - 「우산, 그 사랑의 밀실(密室)」중에서

 기상현상에 따른 비만이 비는 아니다.  삶의 곳곳엔 무수한 ‘비’가 존재한다. 갑자기 닥친 환난속의 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들어가는 생명을 부활시키는 생의 에너지의 비도 있다. 비와 함께 연결시켜 그 내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 ‘우산’이다. 많은 비가 퍼붓는다고 해도 이를 막아낼 우산만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모두가 갖춰진 완전한 삶은 세상에 흔치 않다. 결핍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삶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지우산(紙雨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우산을 드는 몸가짐에서 인간성에 대한 언급을 하며, 조선개국 초의 우의정 유 관의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우산의 덕목을 소개하고 있다.

  글의 가치는 작가가 소재를 어느 곳까지 움켜내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의미를 인정받게 되며, 상상의 힘이 그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것에 의해 사회는 점차 안정을 찾아 순화되기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노력은 정치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작가 김 학의 노력과 그 예지는 범상하지 않다.

  세월은 곱던 어머니의 얼굴에 강보다 넓고 깊은 주름을 파놓았고, 별처럼 빛나던 어머니의 눈엔  짐스러운 안경을 드리웠으며, 석류같이 싱싱하던 치아를 틀니로 바꾸어 버렸다.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소리가 온 누리에 메시아의 음성인 양 울려 퍼지던 기미년에 태어나신 어머니. 3월의 목련마냥 꿈을 예비하던 열일곱에 동갑인 아버지와 중매결혼을 하신 어머니. 시집살이 석 삼년을 지나, 가까스로 부부의 정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하던 서른하나에 홀로 되어 소복을 입으신 어머니. 청상의 핏빛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6. 25를 만나 시아버지마저 흉탄에 여의어야 했던 어머니. 상복에 땀내가 배기도 전에 돌 지난 유복녀까지 날리고도 눈물을 삼켜야 했던 어머니.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비극을 디딤돌처럼 밟고 살아오신 분이다.
                                                  - 「사모곡(思母曲)」 중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늘 강이 흐른다.  ‘안타까움’이라는 물이 흘러가는 강이다.  이 ‘안타까움’의 물살을 혹자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또 어떤 이는 매몰찬 말로 그 존재를 무화(無化)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두 경우 어떠한 상황이든지 속내는 쓰리고 아프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고, 그 아픔이 너무나 커 감당할 수 없어서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가슴이 아픈 부모가 자식에게 회초리를 대는 경우와 다르지 않고, 부모에게 무모한 심술임을 알면서도 풀어놓을 수밖에 없는 자식의 투정을 통해 서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마음은 눈물이며, 더 없는 효심이다. 이 마음이 ‘사모곡’을 낳게 했다. 누가 어떤 말로 위로해도 부질없는 일에 불과하다. 순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눈물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게 흉악한 일들이 주변에 빈번해져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무엇보다 늙고 병들어 제 몸 하나 추스릴 수 없는 사람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일이 지상이나 TV화면에 보도되는 것을 듣고 볼 때마다 사람들은 절망하곤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폄하하며 전락시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온탕에 들어가 몸을 담근다. 따뜻한 물이 목까지 감싸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의 나래를  편다. 옛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업료를 제때에 내지 못하여 교실에서 쫓겨났던 중학교 시절의 일이며, 명절 무렵이 되면 쇠죽솥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하던 일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 슬며시 눈을 떠본다. 노, 장, 청 3대가 서로 등의 때를 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잡힌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70대 할아버지의 등은 50대의 아들이, 또 그 아들의 등은 20대의 손자가 밀고 있다.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표정들이다. 이들 3대의 얼굴이 닮았다. 세월의 흔적만 다를 뿐 윤곽이 너무도 비슷하다.
                              - 「목욕탕, 그 인생의 탐구장」중에서


 작가가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고 있는 삼부자를 목격하고 쓴 글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화다. 요즘은 이런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저마다 바빠서다. 아니면 그럴 수 있을 만한 애정이 시들어가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가정 해체가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개 부부중심의 한 가정은 30년을 주기로 해체되고, 다음 대가 한 가정의 주축이 된다. 그러나 요즘엔 뿔뿔이 흩어져 30년은 옛말이 되고 있다. 현대인의 골 깊은 고독감은 여기서 연유된다. 진정한 신뢰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글의 제목을 ‘목욕탕, 그 인생의 탐구장’이라고 했다. 삶의 성패 여부와 현재의 상황을 목욕탕에서 짐작할 수 있어서다. 벌거벗은 몸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승 연구가 김두하(金斗何)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팔순을 넘긴 김두하 할아버지는 60대 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장승과 벅수를 답사하여 무려 1,200쪽에 이르는「장승과 벅수 연구」란 독보적인 책을  쓴 분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문헌 600여 권을 독파하였을 뿐 아니라 한글 맞춤법을 전문가 수준 이상으로 익혔고, 웬만한 원서는 사전을 들추지 않고도 술술 읽을 정도로 영어공부를 했다고 한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노인인구가 급격히 불어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가정에서도 자녀를 위한 투자는 아까워하지 않지만 부모에게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 「아름다운 도전」중에서

 정부에서는 노인인구 증가에 대한 심각성과, 그 대책에 대해서 방송을 지속적으로 내보냄으로써 오히려 노인들을 음지의 한쪽 구석으로 내몰며 주눅들게 한다. 거세되어야 할 골칫덩이 집단으로 규정해 발붙일 곳조차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런 세인들의 인식을 치유할 방법을 노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예로 작가는 검정고시를 통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는 송순동 씨와 장승 연구가 김두하 씨를 예로 들어 그들의 노익장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그 운명의 마감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것은 삶의 시간조차 죽음의 상태로 몰고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을 연장하려면 몰라도, 죽음을 준비하느라 삶의 시간조차 그 안에 투입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다운 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전’에 뜻을 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

  한낱 숫자의 무게에 위축이 되어 짓눌린 삶을 사는 것은 노예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무능력자를 양산하는 일에 급급한 정책은 시정되어야 한다.

 이른 새벽, 어둠을 밟고 동네 앞산 인후공원에 오르면 만나는 노인들이 있다. 젊음을 바쳐 일하고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들이다. 어떤 노인은 건강이 부실하여 지팡이에 의지하는가 하면, 어떤 노인은  정정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기도 한다.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산에 오르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느릿느릿 걷는 노인도 있고, 젊은이 못지않게 기운차게 걷는 노인도 있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이 노인들에게서 나는 낙엽냄새를 맡는다. 인생의 황금기를 소진해 버린 노인과 한여름의 푸르름을 상실해 버린 낙엽의 가는 길은 어디인가. 그들의 목적지는 뿌리이리라. 뿌리로 가는 여정일 것이다.
                                          - 「뿌리로 가는 긴 여로」중에서

 앞 작품의 연장이라고 보아도 좋은 글이다. 작가가 정년의 문턱에 서 있을 때 적은 글이라 감상이 주축이 되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진리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마음에 따라 과정과 결과가 좌우된다는 의미이다. 누구에게나 노년 때 할 일이 있고, 또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다만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 높이 비상(飛上)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희망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은 노인들의 하루하루이지만 우울하지도 않고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노후의 기간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무기로 무장할 때 우리 삶의 시간은 그만큼 연장될 수 있다.

  몇 년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어진 과정에 충실했느냐 하는 것이 몇 배 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글을 읽는 일에 소홀한 세대이긴 하지만 이들에게 읽게 하고픈 것은 그만큼 이 글이 주는 의미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청년이 사랑에 흠뻑 빠졌더란다. 그 청년을 사랑의 포로로 만든 아가씨는, 외모는 빼어나게  아름다웠지만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를 가진 처녀였다. 그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사랑에 눈 먼 그 청년은 마침내 자기 어머니의  심장을 빼앗아 그 처녀에게로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심장이 그 청년의 손에서 빠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이렇게 말을 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 「예나 이제나 모성애는」중에서

 작가의 지극한 효심을 다시 만나게 하는 작품이다.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위대한 힘의 근원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 행해지는 일은 모두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예외가 아니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다. 작가가 이 글의 제목을 ‘예나 이제나 모성애는’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그만큼 절실히 확인하고 있어서다. 그런 면에서 위에 발췌해 놓은 예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를 얻어 자기 소유로 묶어놓으려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고, 그런 일에 눈먼 자식도 기꺼이 용서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여자인 어머니의 덕목이다. 이것은 여성이 지니고 있는 야누스적 속성인 - 양면성이다.  이 점은 셰익스피어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 강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어머니니라.”
이것이 그 예다.

  ‘여자’와 ‘어머니’는 무엇이 다른가. 마음에 품은 사랑의 차이다. 얼마만한 사랑을 가슴에 안고 있는가에 따라 여자로 남아있을 수도 있고, 어머니로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내성을 지니고 있기에, 여자로서는 근접조차 할 수 없다.  이 점이 어머니의 위대한 면모다.

 내가 조선왕조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철저한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날의 신여성들이야 까무라칠 일이겠지만, 남성 입장에선 당연히 그때가 그리울 수밖에.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서방님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그 시절의 삼종지례 (三從之禮)가 얼마나 그럴 듯한가 말이다. 어떤 사내가 연구했는지 참 기막힌 착상이다.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의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이 옭아맨 솜씨가 아주 노련하다.

 요즘은 아침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남편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아내로부터 핍박받으며 사 는 남편이 불어나는 요즘이고 보니 당연히 옛날이 그리울 수밖에. 더구나 황혼이혼(黃昏離婚)이 늘고, 퇴직한 남편을 낙엽처럼 여기는 세태임에랴.
                                          - 「조선시대가 그리워」중에서

  조선시대는 오늘의 현실과 달리 법도가 명확해, 이를 지킴을 생명과 같이 여기던 때였다. 노사분규도 없었고, 인권을 침해받았다고 해서 주인을 사법기관에 고발해서 분란을 일으킨 일도 없었다. 고개 숙여야 할 땐 기꺼이 그렇게 했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소릴 질러대며 항의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운명에 순종했던 시대가 조선조 때다.

 그러나 이때는 나름의 멋과 낭만이 있었다. 이것이 지나쳐 비현실적인 일이 자주 발생하여 결국 5백년 만에 망하긴 했지만, 그 멋으로 인한 그 시대의 가치는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나름의 긍지로 살아있을 것이다.

  현실은 이전에 비교하지 못할 만큼 편리하고 풍족해졌지만, 긍지가 없는 때다. 사는 것이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마지막으로 걷어들일 보람도 없는 시대다.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른 후에는 저마다 허무한 삶의 현실로 인해 절망하여 전전긍긍하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어떤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작가가 늙을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며 젊을 때보다 몇 배 더 빛나는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뒤죽박죽 질서가 없는 때인가를,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감자탕교회는 한 달에 1억 원 이상의 헌금이 모이지만 교회 통장엔 잔고(殘高)를 백만 원 이하로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기획하는 일에 바로바로 쓰고, 그 집행결과는 주보와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것이다. 여느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건물을 크게 신축하여 성전으로 삼을 법하건만 J목사는 그런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셋방살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캄보디아에 광염대학교를 세웠고, 개척교회와 해외선교, 북한동포 지원은 물론 국내외에 광염교회를 2020년까지 백 개 설립하려는 꿈을 갖고 추진 중이란다. 무엇인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 「감자탕교회 이야기」중에서

 삶은 크게 두 형태로 살필 수 있다.
 하나는 현실적 난관을 타개할 목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구함으로써 풍요한 미래를 보장받으려고 하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삶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인 것에 스스로 초연함으로써 정신적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삶의 모습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른 만큼 어느 하나를 지정해 그것에만 정진한다면 하나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다.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가 종교와 예술이다. 이 둘은 물질적 유혹에서 의연해야만 그 실천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현실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명상적이고 내세추구적인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감자탕교회 어느 과부 여신도가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겠다고 했을 때,
 “교회는 분명 집사님의 전 재산을 받았습니다. 집사님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그 재산은 이미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이제 그 재산은 어제의 그 재산이 아닙니다. 이후 이 재산은 하나님께서 서울광염교회를 통해 집사님께 주신 선물입니다.”
며, 여신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희사금 전액을 다시 돌려준 것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 예가 된다. 이런 글이 교회를 깨우치고, 예술의 근본을 변화시킬 때 우리의 미래는 밝은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다.

  위의 글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교가 타락해 민중의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반전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울과 사진은 그 기능이 사뭇 다르다. 거울은 현재의 나를 보여 주지만 사진은 과거의 나를 보여 준다. 거울은 현재요, 사진은 과거라는 이야기다. 하기야 1초 전도 과거라 하지 않던가. 과거의 나를  보고 싶거든 사진첩을 펼쳐 볼 일이요, 현재의 나를 보려거든 거울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미래의 나를 헤아려 보려면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될 듯싶다. 얼굴의 윤곽이 닮은꼴이 아니어도 상관할 바 없다. 부모님이 불행스럽게도 일찍 타계(他界) 하셨다면, 이웃집 노인의 얼굴을 살펴 보아도 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인생역정이란 대동소이한 과정을 밟게 마련이니까.
                          - 「거울을 보며, 인생을 배우며」중에서

 우리 주변에서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일이 자행되고 있다.
 누구도 입 찬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노인에 대한 박대의 실상을 청취, 시청하다보면 너무 심각할 만큼 두렵기까지 하다. 맹자의 말에 따르면, 도덕이 무너져 인육(人肉)을 먹고 먹히는 상황이 자행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세상의 끝에 몰려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작품은 불우한 할머니를 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성 요셉의 집’ 이석순 원장의 선행에 대한 소개도 겸하고 있다. 남의 어머니들 - 버림받아 내버려진 사람들을 모셔다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이 낸 사람이 아니고는 재미삼아 한두 번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 말 그대로 ‘천륜(天倫)’의 사이가 아닌가. 끊으려고 해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아닌가. 이것을 무참히 끊어버리는 상황이 되었으니,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매정한 사람인가. 말할 용기도 나지 않는 시대를, 변명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마침내 긴긴 겨울이 가고, 희망찬 새봄이 왔다. 봄은 나목(裸木)으로 하여금 잎새와 꽃을 피워내게  했다. 꽃이 피고 향내가 퍼지니 벌, 나비가 찾아오고, 참새도 날아와 쉬어간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물을 뿌려주며 나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의 하루일과는 시작된다. 전지가위로 수형을 잡아주기도 하고, 거름을 주며 나무의 건강을 보살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무의 보호자로서 나름대로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내 키보다도 훨씬 웃자란 세 그루의 향나무는 나의 간절한 소망을 거둬  들이지 않았다. 같은 상록수 계통인 주목이나 금송과는 달리 건강미가 없어 보였다. 푸른빛이 누렇게 변해 가는 것이었다.
                                        - 「뜨락의 나무를 가꾸며」중에서

  자연의 조화를 이룬 삶의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한 작품이다.
  어느 별천지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아 부러움까지 자아내게 한다. 생명에 대한 존귀함이 이런 생활을 통해 자연히 우러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꾸며’ 산다는 것은 종류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삶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는 국민을 가꿀 생각을 하지 않고, 교육은 피교육자를 상대로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으니 곳곳에는 부실한 곳이 널브러져 있다.

 마음이 없으니 손재주가 좋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도 그렇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 또한 예외일 수가 없다. 마음은 저마다 콩밭에 가 있으니 헛손질을 하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세 그루의 향나무는 앓던 이처럼 무참하게 뽑혀지고, 그 자리엔 다시 건강한 향나무가 심어졌다. 죽은 향나무를 뽑아내는 인부들의 삽질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 이 정도는 되어야 인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하루아침에 산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그것을 밀어버리고 빌딩을 세우는 성급함 속에서 과연 무엇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는가.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몇 년 전 희수잔치를 걸판지게 한 어느 재벌 회장은 나이 한 살을 더 보태더니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선언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허나 그 역시 나무랄 일은 아니려니 싶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했을 때의 나이가 70이 넘었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창작했을 때가 80세였으며,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대 성전의 원개’를 설계한 나이가 80세였다니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독일의 안과의사인 히르슈베르크는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에스꼬리알 궁에 소장돼 있던 중세 아랍인 의사들의 원고를 읽기 위하여 85세 때부터 아랍어 공부를 시작하여 결국 그 원고를 통독하고 나서 7권으로 된「안과 의학사」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지 않던가?
                                    - 「나이테 하나 더 그려놓고」중에서

 유한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시간을 연장해 조금이라도 더 생명체로서의 즐거움을 즐기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욕망인 만큼 박수를 보낼 일이다.

  짐승도 그렇고 사방에 널린 풀꽃도 예외가 아닌데, 인간에게 흉이 될 수 있나. 일회밖에 부여받지 못한 생의 기회에다, 그 시간이 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오히려 눈물겹기까지 하다.

  작가가 열거해놓은 것처럼 나이에 굴하지 않고 의욕적 삶을 꾸려 인류를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적잖음도 그런 노력이 남긴 결과이다. 오래 살기 위해 애를 태우고 몸을 혹사하는 일보다는, 이에 덧붙여 나름의 꿈을 키워 가꾸는 일도 그만한 가치를 더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수필평※

두루미 2020. 2. 1. 08:15
김학 수필의 키워드(2)/윤재천 [현대비평]
 


등록일 2007-05-12 10:58:56
조회수 2365회
 

나이테 하나 더 그려놓고 해야 할 일은 의욕을 충전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현 정권에서 노인들을 위해 대단한 일이나 할 것처럼 제시하는 대책이 겨우 돈 몇 푼 손에 쥐어주고 전철이나 공짜로 타게 하는 정도다. 노인들은 장차 사회발전의 골칫거리니 그 정도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 같아 씁쓰레할 때가 많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회의 주역으로서 기여한 세대임을 인정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기에, 분위기 쇄신을 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린애 취급을 하거나 밀려나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라고 내버려두면 그들은 폐기물처리장에 쌓아놓은 악취풍기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춘향골 남원이 관광의 보고(寶庫)라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영국의 노팅검 성이    나 베로나 그리고 네덜란드의 오슈와 견줘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곳이 바로 춘향골 남원이기 때    문이다. 베로나에 줄리엣의 무덤이 있듯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산기슭에는 춘향의 무덤이 있다. 오    슈에 달타니앙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듯이 춘향의 무덤 앞에는 ‘만고열녀 춘향지묘(萬古烈女 春香之    墓)’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노팅검 성에 로빈후드의 동상과 박물관이 있듯이 광한루원에는 춘향    사당과 춘향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네며 월매집도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고,    광한루 누각도 옛 모습 그대로다. 한 번 건너면 부부간의 금실이 좋아진다는 오작교(烏鵲橋)는 선남    선녀들의 발자국에 밟혀 이끼가 벗겨져 있고, 삼신산(三神山)의 대바람 소리에서는 이 도령과 춘향    의 밀어를 엿들을 수 있다.


                                                                     - 「꿈속의 춘향전」중에서




  고전소설 춘향전의 세계적인 보급과 이를 캐릭터로 한 상품을 보급하기를 우회적으로 제안하는 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알리기 위한 노력에 소홀하고, 돈벌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에서 맨 뒤에 ‘상업’을 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만들어 파는 일은 돈을 밝히는 일이고, 점잖은 신분에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기피해왔던 것이 그동안의 통념처럼 되어 있었다. 이것이 대물림해온 가난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던 우리가 근대에 들어와서 무역대국으로 급성장한 것을 보면 만만찮은 저력을 가진 민족임에 틀림없다. 


  남북한 모두 정치가 국가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기에 정상적인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애정이 부족하고 이기적 욕망이 과다해서다. 못난 구석을 덜어내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을 텐데, 해본 적도 없고 할 능력도 없이 설쳐대고 있으니 갈수록 난장판이 되어가는 현실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에 대항하는 태도도 이에 맞춰 변해야 한다. 꿈에서까지 열망을 드러내고 있는 소시민의 열정을 감안해서라도 개혁적인 자기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자기 변화’란 위정자의 쇄신적인 태도를 말함이다.




   농경사회 시절에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노인들은 더불어 성공과 실패    의 경험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많은 교훈을 줄 수가 있었다. 그 교훈이 소득    과도 연계가 되었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보탬이 되었으며, 원활한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에는 노인들이 항상 존경의 대상으로서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    르다. 노인들은 가정에서도 즐비한 가전제품 하나 마음대로 동작시키지 못한다. 행여 고장이나 나지    않을까 저어하여 작동을 꺼린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새롭게 개발된 갖가지 기기(器機)들이 등장하    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그러니 후배들이 손을 빌릴 수밖에 없고, 선배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다.


                                                                  - 「그것이 알고 싶다」중에서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부족하지 않은 노후인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이르는 글이다. 삶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야 할 말이며 존재에 대한 자신의 확인이다. 존재론적 확증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욕을 상실해 생각조차 좌초되고 만다. 가치론이나 방법론은 이를 전제로 해서 가지를 뻗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존재론의 확증 -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물자의 출현 현실에서 다가가 조작하여 그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대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딜레마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한발 한발 자연으로의 귀의를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나름의 특별한 재주가 있어 문명의 이기들을 잘 이용하여 그 혜택을 맘껏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의 예이고 대부분은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일에 스며들 듯 빠져든다.


  역리(逆理)보다는 순리(順理)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스스로 현실에 순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는 버리는 시대란다.


   모시기가 싫어서, 해외이민을 가려고 노부모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양로원이나, 기도원에    다 버리기도 하고, 관광지의 복잡한 길거리에다 버리기도 한단다. 구로지감(劬勞之感)을 잊은 채 쓰    레기 버리듯 부모를 버린단다. 부모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대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석    가모니의 가르침은 불경 속에서 낮잠을 자는 것일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고 깨우쳐 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나날이 늘어가는 교회의 신축공사장에 매몰되어버린 것일까. 자    식을 길러보면 부모의 노고를 알 수 있다는 유교의 교훈을 현대에 통용될 수 없는 구두선(口頭禪)일    까.


                                                             - 「버릴 줄만 아는 사람들」중에서




  챙겨 지니기보다 버리는 일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생활공간이 이전에 비해 협소해진 것이 그 이유다. 전에는 허드레 한 물건을 따로 모아놓을 수 있는 광도 있고, 당장 쓸 필요가 없는 것은 따로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버리는 것을 낭비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좁고 짜여진 공간에서 생활하다보니 자연히 변해, 핵가족화 된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놓았다.


  핵가족은 부부중심의 가족체계이다 보니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버려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흔히 노인문제의 발생이 이런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면 제도에 손질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전의 가족체계로의 복귀가 가능한 일일까. 또 한번의 부작용에 따른 난리를 피워야만 약간의 기대나마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일은 쉽지 않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며 형성된 것이 오늘의 가족체계인 만큼 다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않는 한, 전과 같은 가족체계로의 전환은 확보할 명분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는 진정한 정(情)의 회복 - 완전한 복구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정을 끈으로 해서 결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세계 도처에서 가는 천 년을 정리하는 해넘이(日沒) 행사와 오는 천 년을 맞이하는 해돋이(日出)     행사로 떠들썩하였다. 열정적인 사람들은 해넘이 축제를 거쳐 해돋이 현장으로 달려가, 장엄하게 동    녘에서 떠오를 새 천 년의 첫날 아침 해를 우러르며 소원성취를 빌었을 테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안방에서 가족과 더불어 ‘세계로 열린 창’인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새 천 년 맞이 축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배고파하는 북녘동포를 잠시 잊고, 들뜬 축제와 더불어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태양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을 그늘 없이 햇볕으로만 출렁거리게 할 수는 없다. 양    지는 음지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새 천 년에도 이러한 이치가 달라지지는 않을 줄 안    다.


                                                                      - 「사람 같은 놈」중에서




  여기서의 ‘사람 같은 놈’은 ‘개’를 가리킨다.


  그만큼 개가 영특함을 말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원래 개는 늑대 과에 속하는 야성(野性) - 수성(獸性)이 강한 짐승이었으나 사람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는 사이 본성이 순화되어 사람과 친숙해져 그 선호에 있어 1위를 차지하는 애완동물이 되었다.


  개는 사람들의 삶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보호 아래 생활하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 단적인 예가 ‘개 팔자’라는 말이다. 지나칠 만큼 보살핌을 받아 사람보다 오히려 삶의 질이 나아져 이를 풍자 하는 말이다. 요즘같이 사람 사이의 존재하던 정이 강퍅해져 서로 등을 돌리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개는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작가는 개의 행동이 의리 없는 사람보다 몇 배 더 인간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전북 임실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의견(義犬)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개는 ‘사람 같은 놈’의 증표로 삼아도 부족하지가 않다. 술에 취해 쓰러져 불에 타 죽을 위기에 몰린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을 살린 점에서 그렇다. 이는 인간의 이기적인 작태를 비난하기 위한 힐난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선 언제 어디서나 독기를 품고 대들거나 힘입어 살던 상대를 궁지로 밀어 넣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다.


  


  오늘은 실로 반 년 만에 되찾은 일요일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목욕탕에 다녀오니 심신이 나른하     다. 느긋한 기분으로 낮잠을 즐기고 나니 점심 식사를 하란다. 세상이 온통 내 것인 양 살맛이 난     다. 그동안 나는 왜 이러한 여유를 잃고 서성거려야 했던가. 담배 한 개피를 빼어 물고 눈을 지그시    감으니 지나온 나의 발자국들이 돌이켜진다.




   소일거리를 찾으려고 눈동자를 굴린다. 책상 위에는 여기저기서 우송되어 온 동인지와 월간 문예    지들, 그리고 시집과 수필집, 평론집들이 즐비하다. 저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며 아양을 떤다.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산 의자왕의 기분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법도 하다. 문득 책 더미 속에서 나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게 있다. 몇 해 전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친구 J로부터 얻은 역사책이     다.


                                                            - 「역사의 강물을 굽어보며」중에서




  한때, 국사를 강의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역사관을 피력하는 글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이 도를 잃고 있어 파문이 일고 있는 때라, 시의적절 함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다. 무역대국이나 국제행사 유치니 하며 들떠 지내는 동안 우리는 약소민족으로 걸어온 역사를 잊고 있었고, 그런 불행한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세계 3위의 대국이 될 것이니 하면서 소도 웃을 얘기만 늘어놓았으니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내실에 충실해야 하는데도,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우선 위정자의 그릇됨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아무리 멋을 내려고 해도 결과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그 이유를 붙여 상황을 추슬러 보려고 해도 신망을 잃은 위정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의 제1장이고, 역사를 통해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머리로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 내려가야 그 진의에 도달할 수 있다. 지성이 아닌 감성으로 정복해야 할 것이지만, 우린 연대나 외우고 어느 위정자 뒤엔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는 데만 주목하고 있다. 역사의 정상적인 역할이 진행되도록 힘을 모아 길을 열어갈 때, 비극의 수레바퀴는 멈춰질 수 있다.




   여름이 오면, 나도 아이들처럼 고향에 갈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고향의 정, 조상의 숨결, 어린 날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니 어찌 기다려지지 않으    랴. 한 여름에도 손이 시리던 호연정 그 옹달샘의 물맛은 시방도 변함이 없을까?


   고향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눈을 감으면 고향의 산하가 앨범처럼 펼쳐지고, 고향 사투리    가 귀에 잡히면 잊고 살던 고향의 그리운 얼굴들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선다. 꺼지지 않는 불씨    처럼 고향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기 마련이다.


                                                                - 「해마다 여름이 오면」중에서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발이라는 말이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산중에까지 몰려들면서 우리는 실향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움이 없어지고 기다림이 메말라 곳곳에 앙상하게 널브러져 있는 형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고향은 이름만 다를 뿐 비슷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논길 사이엔 시내가 흐르고, 그곳엔 물고기가 살아 삶의 지루함을 잊게 해주었으며, 젊은이들보다는 늘그막의 어른들이 그늘진 자리를 차지하고 한담으로 날을 지내게 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뜻을 피력하여 그 말이 두려워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프라이버시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들이 들먹거리면서 그동안 모였던 자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담의 높이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고향을 멀리하게 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외로움을 절실히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여름이 와도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휴가나 휴식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해외로 나가 벙어리로 떠도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고향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중국에서 공자님은 상점의 간판 하나 읽을 수 없으실 줄 압니다. 간판에 쓰여 진 한자(漢     字)가 옛날 공자님께서 사용하시던 그 시절의 그 한자가 아니라니까요. 어디 상점의 간판만 그런 줄    아세요? 관공서의 공문은 물론이요, 신문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컴퓨터와 갖가지 저술(著述)들마저     모두 간소화된 한자를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공자님이라 하더라도 재교육을 받지 않으면 그    중국 사회에서 적용하기 어려울 게 뻔해요. 어쩌면 문맹(文盲)으로 낙인이 찍히실 지도 모르겠던 걸    요?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 「공자님, 존경하는 공자님」중에서




‘공자님, 존경하는 공자님’이라는 제목으로 편지글의 형식을 빌어서 쓴 작품이다.


  어제의 공자는 오히려 중국 사람에겐 잊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요즘에 와선 조금씩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그들에겐 영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의 공자는 유별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글이 작가 김 학의 작품이다. 곳곳에 그를 기리는 애틋함이 배어있다. 이런 문화적 열정이 오늘의 한국을 떠받치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 힘을 응축시켜 방향만 잘 잡아 나가면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작가 김 학의 글은 공히 그 나름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근원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 출산된 잎이고 줄기며 가지들이다. 이는 그가 좀처럼 호기(豪氣)를 부리지 않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예다. 그것이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아서이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다. 물 흘러가듯 흐르는 글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만을 적시며 흐르는 맹물로서의 물줄기가 아니다. 자신의 가슴에 남아 있던 앙금을 지우려는 듯 풀어헤치며 흐른 물이기도 하고, 그리웠던 것을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도도히 흘러가는 물줄기에서 그의 글은 탄생되었다.


  작품이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큰 물줄기를 만들어낼 작가임에 틀림없다.         


                  






 
 
 

※수필평※

두루미 2019. 8. 12. 15:01

<문경근 제2수필집 발문>

교육자에서 수필가의 길로 접어든 노 문사(老 文士)

-常川 문경근 제2수필집 『이따금 시시하게』출간에 부쳐-

수필가 金 鶴




1. 수필가 常川 문경근의 살아온 길


“행복은 어느 날 대박 나듯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수필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작은 기쁨들이 모이고 쌓이면 언젠가 행복이라는 아담한 동산을 이루리라 믿는다. 그걸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수필을 쓰고 있다.”

常川 문경근이 두 번째 수필집 『이따금 시시하게』의 머리글 말미에 써놓은 다짐이다. 常川은 믿음직한 수필가다. 언제나 바느질 하듯 꼼꼼하게 수필을 빚는 솜씨가 독자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常川 문경근은 1947년 부안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정읍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다. ‘부안 출신 정읍시민’인 셈이다. 常川 문경근의 아버지 문완식은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서예를 익혀 노년에는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등 한학(漢學)과 서예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분이다. 아버지의 그 재능을 물려받은 常川 문경근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고, 노후에는 수필가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는 지아비 문완식(음 1925.1.14.-1992. 9.2.)과 지어미 박유자(음 1925.5.22.-2018. 9.2.)가 함께 유명을 이어가는 거처입니다. 두 분은 같은해 세상에 나오셨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명한 가을날에 흐릿한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묵향(墨香)을, 어머니는 들꽃 향을 품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불운한 시대와 불의를 못견뎌하시는 아버지를 감싸 안으셨고, 아버지는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시는 어머니를 보듬으셨습니다. 서로 경애하고 의지하며 진솔한 사랑을 펼치셨고, 움켜쥐지 않아도 행복을 얻는 지혜를 남기셨습니다. 불초 다섯 자식들과 그들의 많은 자손들이 두 분의 사랑과 은혜를 기립니다.”

常川 문경근 5형제가 2018년 가을에 부모 기리는 마음을 이렇게 이 돌비에 담아 세웠다. 5형제의 효심과 우애가 잘 드러나 있다.

常川 문경근은 아내 김정숙과의 사이에 3녀1남을 두었다. 출가한 이 자녀들은 모두 한 시간 거리 안에 살고 있어서 常川 문경근 부부의 노후가 외롭지 않아 보인다. 노마드시대에 모든 자녀가 이렇게 가까이 산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常川 문경근은 평생을 학교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으로서 초중고대학 시절을 학교에서 보냈고,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교사로서 여러 학교를 거쳐 2010년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정년퇴직을 했으니 평생 학교만 드나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常川 문경근은 일찍이 정년퇴직 때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란 첫 수필집을 출간한 적이 있다. 그리고 9년 만에 두 번째 수필집 『이따금 시시하게』를 선보이게 되었다.

常川 문경근은 2013년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에 나오면서 정식으로 수필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번 두 번째 수필집『이따금 시시하게』는 제대로 수필공부를 한 뒤 쓴 수필들이어서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常川은 성씨가 文씨라서 그런지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세월이 가니 이렇게 두 번째 수필집을 출간하여 수필가족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게 되었다.

常川 문경근은 정년퇴직을 기점으로 그 전반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고, 그 후반은 수필가의 길을 걷고 있다. 常川 문경근 집안의 가훈은 아버지가 내려주신 ‘진솔(眞率)’이다. 그 가훈 ‘진솔’은 그가 추구하는 수필과도 인연이 깊다. 수필은 진솔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常川 문경근의 아버지는 아들이 수필가로 대성할 걸 내다보고 ‘진솔’이란 가훈을 남겨주셨는지도 모른다.

常川 문경근은 65편의 수필을 여섯 장으로 편집하여 제2수필집『이따금 시시하게』를 꾸몄다.


2. 常川 문경근 수필의 맛과 멋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따라서 수필가의 다양한 체험은 매력적인 수필을 빚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이다. 또 수필은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히는 문학이라고도 했다. ‘인간미를 보여줄 흥미나 자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평론이나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수필은 쓸 수 없다.’고 한 김광섭의 명언에 귀를 기울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가 常川 문경근은 수필의 적장자가 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골의 노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常川 문경근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의 제2수필집 『이따금 시시하게』목차를 보면 호기심을 끄는 제목들이 많다. 그만큼 제목을 잘 뽑는다는 뜻이다. 제목이 좋아야 독자의 눈길을 끄는 법이다. 참신한 제목이 많다. 작명 공부를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65편의 수필 제목 하나하나를 살펴보아도 적당히 선정한 것 같은 제목은 하나도 없다.

나이 들어 시시해진다는 것은 유년과의 접선이자, 동심과의 교신이라 자위한다. 그 순간만은 어릴 때처럼 순수 속으로 빠져든다. 복잡한 세태에서 한 발 물러 서 있는 듯 가뿐하다. 이런 나를 보고 애들 같다며 핀잔을 준다 해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시시해 지는 건 아니다. 늘 자질구레하면 어른 대열에서 밀려날까 염려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기는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대충 지내는 무지렁이는 아니니, 그리 불쌍하게 보지 말라며 혼잣말로 다독인다.

「이따금 시시하게」중에서

이따금 동심으로 돌아가 사는 화자 자신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늘 어른스럽게만 살려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발상이 참신하다. 산책을 하다가 만난 유아원 어린이에게 어른스럽게 “몇 살이니?”하고 묻지 않고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몇 짤이니?” 하고 혀 짧은 소리로 물으면 역시 그 아이도 “네 짤” 하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게 ‘동심과의 교신’ 방법이라는 이야기다. 초등학교에서 평생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한 습성이 몸에 밴 게 아닐까 싶어 미소를 자아낸다.

常川 문경근은 수필가답게 무엇이나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의 수필은 공감을 자아내고 감칠맛이 느껴진다.

피난길, 타관살이, 허기, 전염병…. 이런 단어들만으로도 가슴이 저리다. 그런 내가 일흔 고개를 넘어섰다니, 이건 결코 행운이 아니다. 이런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산책길의 어린나무들이 어찌 예사롭게 보이겠는가? 이웃의 큰 나무들이 어린 나무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공존의 영역에 들어온 어린 생명을 가상스럽게 여기듯.

「유목幼木 앞에서」중에서

6‧25를 거치며 위태로운 삶을 살아온 자신이 부모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게 칠순 고개를 넘어온 것과 어린 나무가 큰 나무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것을 대비한 게 절묘하다.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조차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않는 화자의 묘사가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常川 문경근의 수필은 제목이 명징하고 서두가 산뜻하다. 「아내의 외박」이란 수필도 제목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침에 눈을 뜨니 옆자리가 휑하다. 옆에 있어야 할 아내가 안 보인다. 일찌감치 일어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내도 덩달아 잠을 깨곤 했는데, 호젓하면서도 뒤척거렸던 어젯밤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래, 자고 온댔지. (중략) 커튼을 젖히니 밤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첫눈치고는 제법 내렸다.

「아내의 외박」 서두

친정 오라버니댁 김장을 도와주러 간 아내의 이야기다. 오랜만에 세 자매가 만나 친정에서 김장도 돕고 추억담도 늘어놓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밤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엮어 놓았다.

가수는 목소리가, 화가는 색채감이 좋아야 하듯이 수필가는 문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 수준 높은 수필을 빚을 수 있는 법이다. 고정관념이란 굳은살을 떼어내면 자주 보던 사물들도 새롭게 보이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에서의 낯설게 하기다.

아내가 딸네 집에 간 지 사흘째다. 나의 혼밥도 그 기간만큼 이어졌다. 반찬은 몇 가지 만들어놓고 갔으니 밥만 지으면 된다. 된장찌개는 총각시절 친구들과 여행할 때 익혀둔 솜씨가 요즘도 녹슬지 않았다. 아내의 도움 덕에 맛도 한 단계 높아져 이 요리만은 자신이 있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며 밥을 먹어도 간섭할 사람이 없다. 그야말로 룰루랄라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혼밥도 이 정도면 그리 허접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혼밥은 무심해」 중에서

화자는 혼자 밥을 먹으면서 혼자 사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푸성귀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서 함께 식사를 하면 아들의 밥숟갈에 조기를 발라 얹어주시던 어머니의 추억을 회상한다. 가슴이 먹먹한 추억일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벽 한가운데 걸린 액자와 마주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손수 쓴 가훈과는 벌써 20년 넘는 아침대면이다. 자주 대하다보니 획 하나하나의 모양새까지도 눈에 익숙해졌다. 요즘은 그 액자 속의 가훈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이 많아진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에 이르러서일까?

「아버지의 서탁書卓」서두

‘진솔(眞率)’이라는 가훈은 화자의 가족들에게 바르게 살라는 일깨움을 준다. 화자는 이 가훈에 눈이 머물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더불어 어머니가 연상된다. 이 가훈은 부모와 자신을 이어주는 소통의 통로다.

다른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잡초들이 요즘 들어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옆 공터의 잡초들이 슬금슬금 키를 키우고 몸집을 늘리더니 이젠 제법 풀밭의 구색을 갖추었다. 고추가 주인이면 고추밭이라 이름하고, 콩이 임자면 콩밭이라 불리듯, 풀들이 주인 행세를 하니 풀밭이라 해도 좋겠다. 도심都心이라는 특별한 위치 때문인지 이 풀밭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다.

「마지막 가을」서두

수필가 常川 문경근은 모든 일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수필가의 기본자세다. 산책길에서 만난 잡초에게서 정감을 느낀다. 화자가 만난 이 땅에는 곧 빌딩이 들어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할머니의 셋방살이 고구마농장도 올해가 끝일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지막 가을 앞에서 화자는 짠한 마음에 젖는다. 이 수필을 읽는 독자도 작가처럼 애잔한 마음을 갖게 되려니 싶다.


3. 수필가 常川 문경근의 앞날을 위하여

수필의 길은 끝없는 수도의 길이다. 그러니 자기의 글이 늘 미완성이라 생각하고 구도자의 자세로 겸허히 글을 빚는다면 언젠가는 자기가 기대하는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강조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이란, 평생을 걸려 ‘나’라는 집을 짓는 과정과도 같다. 그 집이 완성되면 인간은 무덤으로 들어가고, 그 집은 작가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

常川 문경근은 한국 수필문단의 큰 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이미 다듬어진 문재를 바탕으로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수필창작에 몰두하면 존경 받는 수필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버린다고 추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사진을 더 많이 찍게 되고, 그 사진들은 인터넷에 저장된다. 추억은 쌓이고 쌓여 사진으로 탑이 된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常川 문경근은 더 많은 수필을 빚어서 잇달아 제3, 제4의 수필집을 선보여 주기 바란다. 수필은 인류에 대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해서 쓰는 글임을 마음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 그래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