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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8. 2. 05:20

황소를 몰고 온 남자

 

 

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사실 그는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미성이별로 없는, 불뚝성질을 지닌 사람이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위에 두 살 터울의 두 손위 누이를 둔 이다. 그리고는 자기로부터 내리 일곱 명의 동생을 둔 이다. 그는 한 가정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그 좁디 좁은 초가삼간에서, 양친을 포함해서 열 두 명이 마치 올챙이처럼 오글오글 살던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래도 맏이라고, 중학교에라도 보내야겠다고 느꼈던 그의 양친. 그는 며칠간 학교에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그는 양친께 무릎을 꿇고,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고해 바쳤다. 애늙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부지요, 어무이요, 저는 마아- 더 이상 학교 안 갈랍니더. 동생들 가운데 똑똑한 녀석이 있다면 .

그는 양친을 도와 농사를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군대를 가게 되었다. 통신병과였다. 월남전에 차출되었다. 그 곳 전쟁터에 가면 죽을 줄로만 알고, 파병열차 안에서 창을 깨고 탈영을 했다. 군법회의에 부쳐져, 즉형(卽刑)에 처해질까,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양친에게 구원(救援)의 편지를 보냈다. 무지렁이인 그의 양친은 소 팔고 전답 팔아 돈을 만들어, 브로커를 앞세우고, 그를 구출하려고 들었다. 자수(自手)라는 과정을 통한 것이라, 일정 량의 영창신세만 져도 될 것을, 브로커의 농간에 넘어가서 . 당시 세상물정을 몰랐던 점은, 그의 조무래기 동생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했던 그. 그는 자기 모친이 심지어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니면서, 어렵게 어렵게 찾은 규수와 군말 않고 혼인을 하였다. 자칫, 똥차에 밀려 세단이 못 나아갈까 동분서주 애쓴 그의 모친의 덕분이기도 하다. 그 많은 손아래 시누이와 시동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댁 부모님의 권유에 군소리 않고 시집을 온 긴 생머리의 아가씨야말로 천사였다. 그랬던 그가 무슨 영문인지, 고향집을 떠나겠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골몰스런 새댁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촌처남이 짱짱하게 나간다는 안양이라는 신도시로 갔다. 그의 양친과 그의 아우들은 몹시 못마땅하였다. 새 식구가 들어와서 그를 꼬드겼을 것이며, 힘든 시집살이에서 탈출구로 그곳을 택하였을 거라고.

아주 나중에 그의 아내를 통해 안 일이지만, 그곳에서 그의 생활은 썩 좋지가 않았다. 그곳에 새로운 도시가 들어서자, 모래야 자갈이야 건자재가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개울에 널려 있는 것이 모래이고, 그는 시골에서 익힌 대로, 소와 우차(牛車)를 이용하여 그 모래를 실어다가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총각시절부터 성질 더럽게 뿔질하는 황소도 잘 다루던 사람이다. 소위, 뜬 소조차도 그의 손에 닿으면, 금세 온순해지곤 하였다. 막상 배운 것도 없는 그는, 그곳에서 갯가 모래를 실어다 팔면서 지냈던 모양이다. 한 마디로, 돈이 아니 되는 그 짓을 했다. 오히려 시골에서 그의 양친은 그들 신혼부부한테 생활비를 매월 부쳐주곤 하였다. 대체, 그는 그 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막걸리가 늘 말술[斗술]이었고.,. 타락 아닌 타락으로 이리저리 치달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이 자탄(自歎)과 자학(自虐)에서 비롯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한테 그 많은 동생들이 없었더라면 . 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한 두 해. 어느 날 해는 저물었는데, 시꺼먼 물체가 골목을 지나 집 마당에 들어섰다. 그처럼 큰 황소를 본 적이 없다. 소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우차(牛車)에서 내린 텁수룩한 사내.

아부지, 저 맏이 경택이시더. 저 왔니더. 안양에서 삼륜차(三輪車 ; 당시 삼륜차가 반짝 있던 시절이다.)에다 소와 달구지를 싣고 왔는데요, 노귀재에서 차가 탈나서 .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물차가 탈이 났으면, 그 차주(車主)가 차선책을 강구하여 주었을 것이다. 그 노귀재라면, 영천과 청송의 경계지점에 있고, 거리가 도대체 얼마인가? 하루 종일 구루마를 황소에 달고 왔다는 말이렷다. 그의 손에는 손수 만든 삼지창(三枝槍)도 들려 있었다. 어둠이 내려, 강도 등을 만나면, 평소 그의 말처럼, 배창자를 단번에 찌를 만반의 준비도 갖추었다는 뜻이다. 당시 나는 어렸지만, 이런저런 정황을 미루어서라도, 그가 노자(路資)까지 떨어져서, 실제로는 보다 더 먼 곳에서부터 그 황소가 끄는 구루마를 타고 왔으리라 짐작된다. 가족 그 누구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날 이때까지 그 때의 진실을 캐물은 이도 없다. 그는 돌아온 탕아(蕩兒) 자체만으로도 양친으로부터 그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늘어져 누운 황소는 그 이튿날 원기를 회복하였다. 후일 녀석은 소 품평대회에서 특등상을 받아, 그의 아버지를 한껏 기쁘게 하였다.

그가 바로 나의 백씨(伯氏). 그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그날 이후 초막골 경택이는 지고는 못 가지만 마시고는 간다.는 그 말술의 신화(神話)도 그만 접었다. 그 골초가 무슨 작심으로 담배도 뚝 끊고 말았다. 참말로 무서운 집념이다. 두 살 터울이니, 나로부터 출발하여 잠시 역산(逆算)해 본다. 근택 57,영택59,말자 62,춘자 64,고인이 된 봉자 66, 정택 68, 본인인 경택 70. 그러니 어느새 그는 70 노인이다. 그는 그의 양친이 동생들 양육하고 치송(治送)하느라, 임하댁이나 송강댁 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고리대금을 꿔 왔던 것을 뼈아프게 여겼던 모양이다. 고향에 가면, 자랑스럽게 말한다.

동생들 보게나. 이젠 저 임하댁 토지 내가 죄다 샀어. 그리고 송강댁 토지도 다 샀는 걸.

한마디로, 그는 맺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한데도, 여태 이 아우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를 구두쇠라고만 쑥덕댔다. 맏이의 살이가 넉넉해야 그 집안이 평화로워진다는 것도 최근에야 깨닫게 된다.

나의 백시(伯氏)는 연세 덕분이지는 모르지만, 전에 없이 자상해졌다.

초롱이 애비 보게나. 사실 형 없는 이만치 불쌍한 사람도 없다네. 동생들은 형이 하자는 대로 그저 따라만 하면 되지만 .

맏이의 애로점을, 나는 죽었다 깨어 나도 모를 것만 같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어디 저 멀리에서만 찾을 수 있는 지혜일까? 내리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4년제 대학을, 그것도 국립대학을 나온 이는 열 남매 가운데 나뿐이다. 참으로 축복이다. 게다가, 수필작가로서 그 이름까지, 내 어머니의 말마따나 조선팔도에 떨치고 있으니 .

황소를 몰고 온 남자!

당신께도 무척 감사 드리나이다. 형보다 나은 아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나이다. 주말 설 명절에는 꼭 찾아 뵐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소를 그렇게 몰고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번에는 꼭 여쭤 볼 것입니다.

 

* 이 글은 인터넷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 작품/논문>미발표작 ; http://www.kll.co.kr)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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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8. 1. 10:36

[김학 행복통장(82)]

미국 손자 동윤이가 안겨준 행복

김 학

“♩♬♪♫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 (이하 생략)”

연일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늘이 대서(大暑)인데도 비가 내려서 그런지 날씨는 시원하다. 아침마다 윤항기의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들어서인지 행복한 일들이 잇따라 이어지고 있다.

작은아들 김창수 박사가 보이스톡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윤이가 샌디에이고 시가 주최한 바이올린경연대회 초‧중리그에 출전했는데 출전자 120명 중 2등으로 입상하여 상금 3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더 반갑고 고마운 일은 동윤이가 그 돈으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컴퓨터를 뒤져서 동윤이가 선정한 안동찜닭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7월 22일 오전 11시 반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택배 배달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동윤이가 주문한 안동찜닭이 점심시간에 맞추어 배달된 것이다. 놀랍고도 신기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식당에 주문하여 끼니때에 맞게 음식이 배달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일찍이 서울에 사는 큰아들이 월급날이면 매달 전주의 맛 집에서 음식을 주문하여 따뜻한 음식을 먹게 해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미국에서도 음식을 주문하여 먹게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도 기뻐하며 밥상을 차렸다. 안동찜닭은 영양가도 높고 맛도 좋았다. 더구나 양이 많아서 우리 내외가 한 끼에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손자가 돈을 벌었다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손자손녀 여섯 명 중 큰손자와 큰 외손자는 둘 다 고등학교 1학년이고, 두 손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며, 미국손자는 9월이 되어야 중학생이 되고, 둘째 외손자는 초등학교 5학년이기 때문이다. 이들 여섯 명의 손자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저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얼마나 행복할까? 벌써부터 가슴이 뿌듯하고 행복할 것 같다.

지금도 빗방울이 초록색 나뭇잎들에 떨어지고 있다. 나뭇잎들이 세수를 한 것처럼 깨끗해 보인다. 털수건을 건네주며 얼굴을 닦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202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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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0. 8. 1. 05:50

건강 유지를 위해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신팔복

 

 

 

 

의사들은 금연과 금주를 권한다.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내가 금연한 지는 15년이 넘었다. 이젠 흡연에 대한 생각은 없고 그저 무덤덤해졌다. 담배를 끊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소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호기심에 한 모금 빨아보았는데, 어찌나 독하던지 눈물이 나고 머리가 핑 돌았다. 갑자기 몽롱해지며 어지러워 침을 흘리며 쓰러졌다. 순간 담배에 익숙한 친구들은 키득거렸다. 그걸 보려고 나를 속인 것을 전혀 몰랐다. 도대체 이렇게 독한 것을 왜 피울까 싶었다.

 

흡연은 키도 안 크고 기억력도 나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피우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2학년이 되면서 사교로 조금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 인이 박였고, 강의가 끝나고 나면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밥 먹은 뒤레 생각났고. 변소에 갈 때 생각이 나서 꼭 피웠다. 출근하면 의자에 앉아서 한 대를 피웠다. 사무실 책상엔 누구나 재떨이가 있을 정도로 흡연자가 많았다. 재떨이를 선물하거나 보루(board의 일본식 발음) 담배를 선물하는 경우도 많았다.

 

60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는 담배 농사가 큰 수입원이었다. 담뱃잎을 수확하고 난 다음 끝물을 따서 말린 담뱃잎(황색 연초)을 목침 위에 대고 몽글게 썰어서 쌈지에 넣고 다니면서 꺼내 피웠다. 담뱃대에 담배를 다져 넣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였다. 담뱃진으로 막혀버린 할아버지 담뱃대를 마른 띠풀을 밀어 넣고 훑어내어 청소해 드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좋아하셨고, 그 대가로 팽이를 깎아 주어서 친구들과 가지고 놀았다. 담뱃대를 쓰지 않고 종이에 말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전매청에서 생산하는 봉초와 권련이 순하고 질이 좋아 사다 피우는 사람들이 차츰 늘었다.

 

담배는 그냥 끊을 수가 없었다. 의지가 약하면 중도에 실패한다. 나도 두세 번을 실패했었다. 좋아하는 등산을 하는데 가슴이 뻑뻑하고 숨이 찼다. 오랜 세월 담배를 피워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제는 끊어야겠다고 큰맘 먹고 약국에 들러 금연 패치를 사서 붙였다. 가장 문제가 된다는 3일을 그럭저럭 보냈다. 힘든 1주일도 어렵게 넘겼다. 이제부터 패치를 붙이지 않고 의지로 버텨내기로 했다. 찌든 중독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단단히 각오를 했다. 체내 니코틴 양이 줄어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담배가 생각났다. 특히 밥을 먹고 난 뒤에 생각나는 담배 맛은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숟가락을 놓자마자 이빨을 닦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흡연 욕구를 잊으려고 마음을 딴 데로 집중시켰다. 출근해서도 담배 냄새가 나는 휴게실은 가지 않고 물을 마시며 참았다.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맥없이 서성거려지고 생활에 활기가 떨어졌다. 무기력하고 우울해졌으며 짜증스럽고 신경질이 많아졌다. 다음 3개월이 문제였다. 다시 피어볼까 하는 약한 마음이 들 때도 많았다. 아니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하고 거듭 다짐했다. 참았던 시간이 아까워 다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다. 그 뒤 6개월, 1년을 넘기며 꾹꾹 참았다.

 

흡연을 그만두고 나니 친구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너무나 구수했다. 연기를 맡아보려고 가까이 가면 코끝을 스치는 담배 향이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도 했다. 드디어 2년을 넘기고 나서부터 담배 연기는 역겨운 냄새로 변했다. 자연히 흡연 자리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 뒤부터 술자리에서도 담배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완전히 금연에 성공했다. 항상 나약했던 내가 이런 결단을 내렸다니 스스로 대견했다. 참 잘한 일이었다. 가래가 없어지고 숨이 차지 않아서 좋았다. 주머니가 깨끗하고 공중으로 날리는 헛돈이 들지 않았다.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술은 내가 좋아해서 끊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건강검진을 받고 신장의 여과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혈압약을 장기간 복용하는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신호란다. 아직은 크게 나쁜 편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다. 젊었을 때 건강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술을 많이 마신 게 탈이었다. 뼈도 오래 쓰면 닳아지는데 내장기관이라고 그냥 있었겠는가? 그래서였는지 종아리와 눈꺼풀에 부종이 생기고 뒤쪽 허리 부분이 뻐근할 때가 많았다. 신장은 몸속 노폐물을 걸러주고 삼투압을 조절해서 항상성을 유지해준다. 또한 호르몬을 분비하여 생리를 돕고 우리 몸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하수관 역할을 한다.

 

병원에서는 혈압관리를 잘하고, 맵고 짠 음식을 삼가며 특히 탕약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철저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함부로 많이 먹으면 과다한 배출량으로 신장에 무리가 따른다. 간과 함께 침묵의 장기로 알려져 있는데, 간처럼 재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고장이 나면 이식 이외에는 딴 방법이 없다. 그러나 남의 장기가 어찌 제 것만 같겠는가? 투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건강을 위한 일이니 술도 끊어야겠다. 맘을 단단히 먹지만, 술을 끊기는 담배보다 더 어렵다. 좋은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자리에는 술이 꼭 따른다. 인간사의 일상이 아닌가? 잘 먹던 술을 바라보고 있기가 매우 어렵다. 몸에 밴 습관이라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곧바로 후회하고 입술만 적시고 만다. 이젠 술을 안 먹는 사람들의 좋은 생활을 알아보고 그 길을 따라야 할 것 같다. 생활 습관이 달라지는 일이라 어렵겠지만, 건강 유지를 위해서 꼭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2020.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