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큐ㅌ1★ 2011. 4. 23. 10:40

목포 북교동 옛 신안군청

 

"사실상 100년 만에 신안군청이 제대로 생긴 겁니다."
전남 신안군이 오는 2011년 4월 25일 목포 북교동에서 신안 압해도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분군(分郡)된 이후 목포시 북교동에서 둥지를 튼 지 42년 만에

'압해도 신청사 시대'를 연 것이다.
박우량(朴禹良·56) 신안군수는 19일 "1902년 목포지역에 무안을 관할하는 관청이 생겼고, 이후 분군(分郡)돼 신안군이 생겼으니 진짜 '신안청사'는 이제서야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교동 신안군 군청 앞에 '구 청년회관'이다.

순수 지역민들의 자본으로 지어진 건물로 일제강점기의 목포청년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1924년 4월부터 회관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해 남교동 땅 1백평을 대지로 사들였고, 건평 57평의 석조건물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925년 3월 낙성식을 가졌다. 

 

2002년 9월 국가등록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이시기 목포청년회관은 일개인의 집이 아닌 목포청년들의 지덕함양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부 창립식이 1927년에 이곳 청년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각종 소작쟁의 운동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활용되는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보금자리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각 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목포에서는 1920년 5월 9일 목포청년회가 조직되는 것을 시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창립총회에서 이들은 창립목적을 '지육(智育)과 체육(體育)의 향상 발달'을 도모함에
있다고 밝혔는데, 임원 구성을 보면 목포청년회는 당시 목포의 '유지' 내지는 '중산청년층'의
모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포청년회는 주로 계몽적인 강연회를 열었고, 노동야학회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활동사진대라는 것을 조직하여 동경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전국 각지 순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목포 지역에는 기독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목포수양회, 목포여자수양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이들 청년단체들도 주로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등을 통하여 계몽활동을
펼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청년운동에 대한 반성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1924년 9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무산청년회(無産靑年會)가 목포에도 조직되었는데,
기존의 청년회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성격의 청년회가 또 하나 조직된 것으로 그 주요 구성원이
강석봉, 배치문 등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진보적 인물들이 적극 참여 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니다.

이시기부터 목포의 청년운동은 중산청년층의 목포청년회와 신진청년층의 무산청년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양립해서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27년부터는 각계 각층을 통일한 대중적
청년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하에 단일 단체인 목포청년동맹이 결성되면서 목포청년운동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청년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목포청년회관 건물이 수행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연맹이 해체되고, 사회운동의 침체적 시기를 맞아 이 청년회관은
주인 잃은 건물로 한동안 방치되게 됩니다.
소설가 박화성 선생은 헐어진 청년회관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해서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1943년 팔봉 김기진(八峰 金基鎭) 선생 등이 주동이 돼서 『조선 청년(朝鮮 靑年)』이란
잡지가 발간되었다가 총독부로부터 발행 중지를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그 창간호에 박화성(朴花城)선생의 『헐어진 청년회관』이란 단편소설이 실렸다가
전문 삭제되어 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박화성 선생은 그의 작품 속에서 말하기를
"이 집속에서는 날로 때로 열리는 각종 합법단체의 삶을 요구하고 해방을 부르짓는 외침이
얼마나 힘있게 흘러 나왔든가? 각 단체 주최의 학술강연이나 사회문제 강의는 얼마나 자주
있었든가? 청년들의 공동의 집이요, 그들을 가장 옳은 길로 인도하며 가르치든 위대한 사명을
가졌던 이 집의 오늘의 헐어진 이 몰골의 비참함이여" 라고 표현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청년회관의 역할이 어떠 했는지와 이후 청년운동이 침체되면서 폐건물로 방치되었을 때의
안타까운 상황을 엿볼수 있습니다.

건물자체로 볼 때는 석조 단층의 단순한 구조이고, 크게 주목되는 점이 없어서,
그동안 이 건물의 문화재적 가치가 그리 높이 평가를 받지는 못했는데, 이 건물의 가치는
외형적인 면보다 역사적인 면과 목포의 정신사적인 면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식민정책을
위해 세운 건물들이지만, 이 건물만큼은 목포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목포사람들의 모금운동을
통해서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이 더 아끼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유산임을 말해줍니다.

-- 목포대  최성환교수님 글에서 발췌함>>

 

광복 후에는 임마누엘 교회로 사용되었다.

천년회관 주변의 옛건물들이 수명을 다하여 철거되고 있으나 석조로 지어진 청년회관은 여전히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목포시가 2007년부터 총 7억원을 들여 보수하고 내부를 공연시설로 리모델링한 뒤 남교 소극장으로 이름을 지었다. 건물은 지상 1층, 건축연면적 297㎡이고 객석 90개를 갖췄다.
남교 소극장에서는 2011년 4월 2일부터 12일까지 목포시립연극단의 ‘잘 자요, 엄마’ (마샤 노먼 작)를 매일 한 차례 무대에 올렸다.

 

사진:  현 남교소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목포청년회관'

 

  서울 YMCA회관
<<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서울YMCA회관은 '대한중앙기독교청년회관'이라는 이름으로 1908년 12월 완공됐다. 강당, 운동실, 교실, 도서실, 공업실습실 등을 갖춘 3층짜리 회관이 종로 한복판에 세워지자 매천 황현은 "그 집의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과 함께 남과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외국어직업교육, 스포츠 보급 등 청년문화운동의 요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중요한 강연회, 연설회 등이 열린 공론의 공간이기도 했다. 최남선의 회고에 따르면 이상재, 안창호, 윤치호 등 국내명사는 물론이고 비행가 오빌 라이트, 미국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W J 브라이언 등 서양의 명사들도 이곳에서 강연을 했다.

2004년 발간된 <서울YMCA 100년사>는 식민지 시기의 YMCA를 "만남의 광장이요, 동서 교류의 현장이요, 토론과 논단의 장소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1927년 2월 최초의 좌우합작운동이었던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린 곳도 서울YMCA회관이다.

1908년에 세워진 서울YMCA회관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1967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영친왕이 직접 썼다는 '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學館(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과 '一千九百七年'으로 기공 연도를 적은 초석만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은 "우파 기독교 인사만 이용했을 것이라는 오해와 달리 이 회관은 사회주의자, 가톨릭 인사 등 다양한 세력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식민권력은 식민지인들에게 '광장'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서울YMCA회관은 다양한 집회와 토론이 열렸던 밀실 속의 광장이었다"고 말했다. 

 

자료출처 : 한국일보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