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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조국'은 광복군 여군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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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남)한국

2007. 9. 15.

'해방 조국'은 광복군 여군을 외면했다

<한국일보 2007년 9월 11일>

 

입력시간 : 2007/09/11 14:26:30 
수정시간 : 2007/09/11 14:39:04


광복군 최초 여군 오희영 3代 항일투사 가족의 불행한 말로

 

할아버지의 항일정신과 부모님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한국 광복군의 당당한 여군 '오희영(吳嬉英)'.  조국을 잃은 설움을 해방투쟁으로 승화한 한국의 당당한 여성 오희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국권회복의 일념을 품고 의병항쟁에 뛰어든 오인수 의병장의 친손녀이자 만주와 중국 일대를 누비며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한 오광선 장군의 장녀이다.   또 '만주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어머니 정현숙은 군 자금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의 후방사업에 여념이 없었고, 여동생 오희옥은 선전공작원으로 활동하는 등 그의 집안은 보기 드물게 항일투사 가족의 면모와 3대로 이어지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희영은 1939년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동생 오희옥과 함께 입대한 뒤 중국 류저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투쟁을 위한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오희영은 이후 김구의 임시정부를 따라 충징에 도착한 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전선에 나가 직접 적들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여군에 입대했다.   그가 배치된 부대는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로, 적의 점령지역에 잠입해 공작거점을 마련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포섭해 광복군 지역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오는 이른바 '초모공작'을 수행했다.   사지에서 이뤄지는 초모활동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으나 오희영이 소속된 제3지대는 초기 8명에서 1945년 6월에는 180여명에 달하는 인원을 확보, 명실공히 광복군의 단위부대로 발전했다.

 

 

오희영은 같은 부대에서 열살이 많은 선배 동지 신송식과 사랑을 맺어 김구 주석의 주례로 열아홉살에 결혼식을 올린 뒤 김구 주석의 비서 겸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오희영과 가족들을 반기지 않았다. 독립군 장군이던 아버지 오광선은 해방 후 국군에 편입돼 육군 대령을 역임하다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67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셋방집에서 만성 폐결핵으로 타계했고, '만주의 어머니'로 불리던 어머니 정현숙은 궁핍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 1992년 지하셋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 남편 신송식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정에서 광복군을 제외시키고 개인 자격만 인정하자 국군에 들어가지 않다 결핵으로 숨졌다.   광복군의 당당한 여군이던 오희영. 그는 귀국 후 6남매를 낳았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단한 삶을 영위하다 막내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못해 자궁암으로 1969년 2월17일 향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오희영은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고, 남편과 함께 국립 현충원에 합장됐다. 거친 역사의 격랑에서 한치도 비켜서지 않은 채 온몸으로 헤쳐나간 오희영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한편 경기도는 오는 13일 용인 문화예술원에서 '한국광복군 오희영 재조명 심포지엄'을 열어 친동생인 오희옥 여사를 초청, 오희영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기사제휴] 수원=CBS노컷뉴스 고영규 기자

midusyk@cbs.co.kr

 

<한국일보 2007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