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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실크로드를 가다](10) 험준한 대흥안령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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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009. 4. 10.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10) 험준한 대흥안령을 넘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경향신문 
 
ㆍ영마루에 올라, 동이 조상의 발자취를 좇다

오늘은 해지기 전에 대흥안령이란 큰 산맥을 넘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일행은 물론, 내몽고자치주 주도 후허하오터의 여행사에서 파견된 현지 안내원이나 기사도 이 길은 초행길이다. 말로만 듣던 대흥안령, 고도쯤은 책을 통해 알고 있지만,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지, 돌파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길 상태는 또 어떠한지 전혀 막막하다. 그저 지도책에 눈도장을 찍으면서 물어물어 갈 수밖에 없다.

 


중국의 둥베이(東北) 지방과 몽골을 가르는 대흥안령 산맥은 생각보다 완만하다. 사진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커얼친 초원의 양떼들.


시내 중심을 약간 벗어나자마자 어마어마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새로 일어서면서 길도 6차선으로 훤칠하게 뚫려 있다. 이 호젓한 변방 산간 지대에 이렇게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앉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제 잠자던 대흥안령이 용틀임을 하나 보다. 시내를 벗어나자 커얼친(科爾沁) 초원이 눈 모자라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 초원은 이미 평평한 초원이 아니라, 서쪽으로 점차 경사도를 높여가는 산간 초원이다. 평균 400~500m 갈 때마다 고도는 1m씩 높아지니 완만한 산길이다.

10월 하순에 접어든 초원은 추색이 완연하다. 여름내 짙푸르게 자라던 녹초는 이제 누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랑잎은 우수수 길가를 덮는다. 가을걷이를 막 끝낸 들판은 한산하다. 이삭 줍는 아낙네들만이 가끔 눈에 띈다.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에 메마른 옥수수 잎사귀가 가볍게 사박거린다. 여기는 옥수수가 주작이라서 마을마다 무연한 옥수수 밭에 에워싸여 있으며 옥수수 대를 산더미처럼 싣고 다니는 마차나 트럭이 길을 메운다. 기적을 울려도 산더미는 막무가내다.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덕분에 늦가을의 마을 정취를 흠뻑 맛봤다. 집집마다 마당이며 지붕 위엔 빈 틈 없이 거둬들인 황금빛 옥수수 이삭을 널어 말린다. 온통 옥수수 세상이다. 올해는 풍작이라서 농부들의 얼굴이 환하다. 옥수수 밭 사이사이에는 해바라기가 마치 기하학 무늬를 새겨 넣은 듯 가로·세로로 줄지어 서 있다. 꽃은 이미 시들어 떨어지고 탐스러운 씨가 알알이 영글어가고 있다.

근 3시간을 달리자 초원 분위기는 차차 사라지고 산기(山氣)가 감돌기 시작한다. 저만치 달려오던 기차도 이제 칙칙폭폭 가쁜 숨을 몰아쉰다. 산이 가까워 옴을 예고한다. 여기는 고도 700m의 대흥안령 입산 어귀인 수무거우(樹木溝)읍이다. 읍치고는 제법 크다. 길 양 옆에는 식당들이 즐비하고 병원 간판도 보이며, 기중기로 건축자재를 나르는 모습도 눈에 띈다. 차량들은 산행 채비에 분주하다. 우리 일행도 만일에 대비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보충했다. 다들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사람들처럼 들떠 있다. 눈길을 산쪽으로 돌리니 중턱에 방목을 금지한다는 ‘금목’(禁牧)이란 흰 글자가 또렷이 보인다. 아마도 지금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이 푸른 초원의 사막화를 막기 위한 조처가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는 느껴질 정도로 길은 고도를 높인다. 한참 달려서 정오쯤 탸오허무(桃合木)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했다. 지도에는 이 지명이 길 왼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표기돼 있으나, 지금은 여기 길가로 옮겨 왔다. 유목민들의 집단 이동이다. 현대에 와서 유목민들이 농경지나 산업지를 찾아 삶터를 유동에서 정착으로 옮기는 일은 어디서나 자주 일어난다. 보금자리를 초원의 바오(包)에서 벽돌집으로 옮긴다. 탸오허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러나 벽돌집 사이사이에는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바오가 옹기종기 끼어 있다. 전통과 현대의 공존이다. 좋든 싫든 이런 공존은 얼마간 지속될 것이다. 이주 유목민이라서 그런지 이곳 주민은 거개가 넓적한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진 전형적인 몽골인들이다. 새 삶터에는 소학교도 생기고 상점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대흥안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트럭. 가을걷이한옥수수대를 산더미처럼 실었다.

 

이곳을 갓 벗어나 5리도 채 못 가 포장길은 끊기고 흙길이 나타난다. 띄엄띄엄 포장 흔적이 보이지만 땜질에 불과해 차는 시속 20km도 못 내고 자주 기우뚱거리고 허우적댄다. 차 안에서 엉덩방아만 찧다보니 고도에는 전혀 무감각이다. 이제나 저제나 우람한 산봉우리 같은 것을 만날까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시저리무쑤무(西哲李木蘇木)에 당도했다. 해발 1200m로 이 산길에서는 정상이다. 산은 산이되, 가파로움이 없는 무덤덤한 산이다. 오히려 탁 트인 펑퍼짐한 초원이다. 대흥안령, 높고 험준한 태산인줄로만 알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이럴 때를 두고 ‘태산 명동에 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고작 쥐 한 마리뿐이다)이라고 했던가. 다들 뜻밖이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알고 보니, 이 ‘태산’에 관해 재대로 깨우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는 중국 동북의 서북방에 자리한 구릉성 산계 전체를 흥안령이라고 불러왔으나, 청나라 때 러시아와 국경을 긋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맺은 후부터는 러시아 경내에 있는 흥안령은 ‘외흥안령’(러시아어로 스타노브 산맥), 중국 경내의 흥안령은 ‘내흥안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내흥안령은 대·소 흥안령으로 나뉘었다. 한편, 이 산계는 알타이 산맥(몽골어로 西金山)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동금산’(東金山)이라고도 하며, 석백(錫伯, 소수민족)어로는 진아린(金阿林, ‘흰 산’)이라고도 부른다. 대흥안령은 헤이룽장(黑龍江, 아무르강)이 크게 구부러진 부분의 남쪽에서 발원해 몽고고원과 동북 대초원의 경계를 이루며 남하해 내몽고자치구 중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음산(陰山)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흥안령이라고 하면 이 대흥안령을 지칭한다. 이에 비해 소흥안령은 대흥안령의 북단에서 갈라져 헤이룽장과 쑹화장(松花江)의 분수계를 이루며 동북 방향으로 뻗어간다.

‘녹색보고’라고 하는 이 대흥안령의 남북 길이는 1200㎞이고 동서 너비는 200~300㎞로서 면적은 약 8만5000㎢에 달한다. 면적의 74%는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으며, 그 속에 진귀한 400여종의 동물과 10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큰 산치고는 의외로 높지 않다. 평균고도가 1250m쯤이며, 가장 높은 산이래야 2000m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고구려 기마대군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 산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목재를 실어 나르는 몇 갈래의 철로가 산 중턱까지 닿아 있다. 한온대 대륙성 기후로서 평균 온도는 영하 2.8도이며 중국에서는 가장 추운 곳으로서 영하 52.3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북단 오로도스족이 사는 자그마한 ‘북극촌’은 ‘불야성’으로 유명한데, 하지를 전후해서는 하루에 무려 스무 시간이나 해를 볼 수 있는 백야가 계속되어 관광객이 폭주한다. 20여개의 크고 작은 강을 품고 있으며, 연평균강수량은 700㎜에 이르러 나무나 풀이 자라는 데 적격이다. 주로 몽골계와 퉁그스계의 24개 민족이 목축업과 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산속의 인구는 54만명(2005)을 헤아리며. 오늘은 3개 현과 4개 구로 나눠 행정관리하고 있다.

대흥안령 정상의 시저리무쑤무마을.

 

지금은 비록 행정적으로 내몽고에 속해 있지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나 종족적으로 보면 이 산맥은 영락없이 둥베이(東北)와 내몽고를 포함한 몽골 전체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이제 그 영마루에 서 있노라니, 넓디넓은 둥베이 땅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면서 숱한 상념이 꼬리를 물고 솟구친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삶터였고 활동무대였으며, 오늘은 또 국경을 맞대고 그 속에 200만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땅, 둥베이는 결코 우리에게 낯설지도 않은, 또 낯설 수도 없는 땅이다. 도대체 이 땅은 우리에게 무엇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까.



우선, 우리는 둥베이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낸 공동 주역이다. 지금 중국 학계는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랴오허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창조자는 동이족으로 못박고 있다.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동이족은 황하 이동 지역에서 북상한 황제의 후손 들이란 엉뚱한 주장을 펴고 있지만, 사실 동이족(동쪽의 오랑캐)의 본향은 산둥성 이북을 포함한 둥베이 지방이며, 고구려의 조상인 예맥이나 숙신은 거기에 삶의 뿌리를 박고 우리의 민족사를 터준 종족이다. 이미 발견된 바위그림이나 적석총, 청동기 등 여러 가지 상관성 유물에서 보다시피, 랴오허문명은 우리의 동이 조상들이 공동 참여해 만들어낸 문명이다. 우리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인연을 맺고 있는 은나라의 동이(상)나 탁발 선비(북위),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만족(청) 등 둥베이의 여러 민족들은 일찍이 여섯 차례나 황허 문명의 주역인 화하족(華夏族)들이 할거한 중원지역을 정복해 무려 중국 역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400여년간에 걸쳐 이민족 을 통치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발해 때 헤이룽장성 일대에서까지 벼 재배를 성공시켜 옥수수나 수수, 콩 같은 잡곡밖에 모르던 둥베이인들에게 쌀밥을 선사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둥베이산 쌀은 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황량특미’(皇糧特米)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오늘 전국 면적의 50분의 1밖에 안 되는 지린성이 식량 생산에서 전국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그곳에 우리 동포들이 집중돼 옹골차게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작고한 저우언라이 총리도 말하다시피, 조선족 선열들은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투쟁에서 목숨 바쳐 둥베이를 지켜냈으며, 40년대 해방전쟁에서도 불후의 위훈을 세웠다.

다음으로, 둥베이는 우리의 고대 역사와 문화가 피어난 터전이다. 고조선과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 그리고 해동성국 발해가 이 땅에서 발호(跋扈)했던 것이다. 차제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 때문에 우리의 민족국가인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 아픔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의 교과서적 통념을 벗어나 우리로 하여금 의아스럽게 하는 것은 신라가 지린성을 거쳐 남하했다는 일설이다. 178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명을 받은 한림원이 편찬한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신라의 선조인 박씨 일족은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을 거쳐 계림(현 지린시)에 정도했다가 한반도로 남하함으로써 신라의 서북 강역은 오늘의 지린성 오랍(烏拉)이라는 것이다. 우리 학계 일부에서도 신라가 다른 곳에서 경주 일원으로 옮겨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동북과 신라의 어떤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은 아닌지 일고를 요하는 설이라 하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편향을 함께 지양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중국이 주장하는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 고조선에서부터 발해까지의 우리 민족사를 저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비현실적이며 복고주의적인 ‘고토회복’ 운운이다. 역사는 후세에 의해 임의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며, 변화하는 현실의 연속이다.

끝으로, 둥베이는 우리와 북방이나 서역을 이어준 징검다리다. 초원과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이곳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졌으며, 그 길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했다. 그래서 둥베이와 한반도에서는 북방이나 서역과의 교류를 입증하는 유사 유물이 적잖게 발견된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징검다리의 서경(西境)에서 대흥안령을 관통하는 초원의 길을 더듬고 있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출처; 경향신문 2009.4.8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4081522085&code=9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