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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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적석목곽분 주인은 선비모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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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신라(사라,사로)

2009. 10. 18.

신라-가야 적석목곽분 주인은 선비모용씨
고구려군에 쫓긴 1만 5천 선비군대의 경주유입과 가야.일본으로의 이주
윤복현 저널리스트
1.흑해연안에서 한반도.일본열도까지 분포된 적석목곽분과 금장식문화

가야와 신라.일본의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유럽지역의 스키타이.아시아 흉노문화와 동일함으로 이들은 본래 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에서 발원한 유목민들임을 알 수 있다.

 

북만주 초원지역에서 시작되는 아시아 유목민들을 그리스에서는 스키타이,중국에서는 흉노(선비.돌궐.몽골)라 불렀다. 스키타이.흉노.선비.몽골.돌궐(터키).거란 모두 족속이름만 다를 뿐 동일 혈통의 아시아 유목민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단고기]때에는 단군조선시대에는 단군천황의 남동생들이 진조선(진한)의 제후국들에 해당하는 몽고리(몽골).흉노.선비 등 군장이나 대인, 또는 왕으로 임명되기도 했기 때문에 단군천황의 후예들이기도 하다.이 초원세력이 유라시아 초원을 무대로 5호16국, 신나라, 수나라,당나라,터키,헝가리 등 많은 나라들을 건설하면서 중국과 유럽을 지배했던 것이다.

▲ 샤먼 모자들 시베리아 에네트족 무당모자(좌),카자흐스탄 이씩고분 출토 모자(우):신라금관의 기원은 시베리아 샤먼문화임을 알 수 있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산악지대에 정착한 이유로 적석총(피라미드)구조인 부여(고구려.백제/백제초기 온조세력은 적석총이였으나 구태세력이 백제를 장악한 후에는 산동지역의 동이족들의 무덤양식을 한반도 토착무덤양식과 융합시킨 마조선인들의 전방후원분으로 변경)매장구조와는 달리 초원을 배경으로 이동생활을 해야 하는 유목민들의 매장구조인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금장식의 경우 시베리아 지역의 먹이감이 되는 사슴.하늘과 통한다고 보는 생명수(신단수)을 상징화한 동북아 시베리아 지역의 샤먼왕관을 더 화려하고 세련되게 금장식으로 치장한 왕관들과 금장식구들,그리고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사람의 피나 동물의 피를 담아서 마셨다는 각배, 그리고 청동동복, 제사용 그릇토기 등입니다. 스키타이족의 활동무대였던 흑해연안에서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남부, 그리고 일본열도에 분포되어 있다.
 
▲ 시베리아 무당의 모자들 예니세이 무당 모자(좌), 오스티악 무당 모자(가운데),부라이트 무당모자(오른쪽) : 신라금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 스키타이 금관들 흑해북안 출토 샤르마트 금관(왼쪽),샤바르칸 탈리아테떼 금관(오른쪽):신라 금관 세움장식과 유사하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800년에 유럽에 출현한 아시아 유목민들인데, 아마도 만주초원세력(수유족=흉노=스키타이)이 서방으로의 진출은 단군조선의 권력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즉, 21대 소태단군천황이 강력한 기마군대를 보유한 수유족 출신의 좌현왕 서우여를 단군으로 찜하여 승계시키려고 했는데, 또 다른 강력한 기마군대를 보유한 고구려의 선조가 되는 고씨족의 우현왕 색불루가 이를 취소하라고 소태단군천황에게 요구하고 이를 소태단군이 거부하자, 백악산 아사달(장춘)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단군천황에 오르니 이 때가 기원전 1,200년경이다.

▲ 좌로부터 알타이 지방의 이시크 고분에서 출토된 기원전 5~4세기.신라장식과 동일하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이 때 반색불루세력인 수유족(=기자족) 세력이 단군조선의 직접통치(진조선의 통제를 받는 제후국)에서 벗어나 몽골초원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형성한 후에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니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스키타이족이요, 일부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니 흉노족이라 봅니다. 흉노제국이 망하고 선비제국이 형성되었다해도 결국 유목세력이니 흉노나 선비나 몽골이니 돌궐(터키)나 결국 같은 유목 한국인들이요,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백인들과 혼혈족(투르크.위그르족)으로 형성되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유럽을 지배한 터키제국을 형성했다.

흉노.선비족이 단군조선의 통치구조인 선우를 중심으로 좌현왕과 우현왕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2.선비모용씨 전연의 고구려 공격과 선비족의 한반도 남부 유입배경

흉노제국은 선우 묵특때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묵특 사후 흉노족은 북흉노와 남흉노로 양분되자, 한나라는 북중국의 남흉노와 몽골지역의 선비족과 에니세이강 지역의 정령으로 하여금 북흉노를 공격하도록 이간질을 하니 바로 한족들이 자주 사용했던 전법인 이이제이(한족들의 표현으로 오랑캐로 하여금 오랑캐를 공격하여 제거하는 분열책)였다.

결국 선비족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승리한 댓가로 북흉노족을 흡수하고 북흉노땅을 차지하게 되어 단석괴라는 선우때는 흉노제국과 맞먹는 선비제국을 건설하여 북방의 패자가 된다. 이 당시 북흉노족의 일부가 서쪽으로 다시 이동하여 게르만족을 로마제국영역으로 몰아가 결국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게 되니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비족의 선우 단석괴가 죽자 선비족은 양분되어 선비족의 일부인 모용씨족의 경우 북중국 지역에 전연을 개국한다. 전연은 전연아래 한족국가 동진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를 324년에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고구려는 끝내 항복하지 않고 환도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환도성은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지고 초토화된 상태였고, 미천왕의 무덤도 도굴된 상태였다. 미천왕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를 볼모로 잡아가고 5만의 고구려인들을 압송해 가서 고구려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해야 했었다.

결국 고국원왕은 사신을 보내어 신하국이 되겠다고 하니 왕비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전연은 모용황의 손자 모용위가 왕으로 있을 때 숙부 모용수가 동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용위가 모용수에 위협을 느껴 모용수를 죽으려 하자, 모용수가 티벳계 나라 전진으로 도망가 전진군대로 쳐 들어와서 멸망을 시키고 나라를 개국하니 후연이다. 후연은 모용수의 막내 아들 모용희가 폭군정치를 하자, 한족출신 풍발이 고구려 출신 고운(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왕으로 세우니 북연이다. 북연은 결국 선비족 탁발씨의 나라 북위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결국 인과응보에 따라 고구려를 공격했던 선비족의 나라 전연은 결국 내분과 분열과 동족인 선비족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북위(北魏)의 중흥군주 효문제(孝文帝:재위 471~499)의 황후는 고구려 출신 고씨이다.고구려 출신 문소황후의 아들인 북위(北魏)의 세종 선무제(宣武帝:재위 500~515)는 즉위 직후 고구려에 있던 외삼촌들을 부른다.세종은 문소황후의 부친 고양(高?)에게 내렸던 발해공(渤海公)이란 작호를 고조의 장조카 고맹(高猛)에게 세습시킨다. 세종은 고조에게 평원군공(平原君公), 고현에게 징성군공(澄城君公)이라는 작호를 하사한다. 고조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영이부(領吏部),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에 오른 후 세종의 고모인 고평공주(高平公主)에 의해 상서령(尙書令)에 추천된다. 세종은 효문제의 동생인 함양왕(咸陽王)이 역모에 걸려 죽자 재산을 모두 고조에게 주어 물적 토대를 삼게 한다. 고조에게 비판적인 ‘위서’는 “고조는…붕당을 결성해, 자신에게 붙는 자는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시키고, 배척하는 자는 대죄(大罪)에 빠뜨렸다”고 적었는데, 이는 고조가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이런 북위에게 있어 고구려는 부모국(선우)였고, 고구려의 간접 통치국가나 마찬가지였다.이런 북위가 백제 동성황제때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중원지역을 백제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3-4세기 경주.김해.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고구려군에 쫓겨 동해안 루트를 따라 내려온 흉노족을 흡수한 선비족(모용씨)이다. 김일제세력역시 흉노족이나 이미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족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적석목곽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단지, 김일제세력인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했으나 급진적 개혁정치로 지방 호족들의 반감을 사서 15년을 버티지 못하고 후한의 광무제에게 무너지자, 몰살을 피하여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따라 한반도 동남부지역으로 들어와 변한과 진한을 무너뜨리고 신라와 가야를 개국했다.

선비족의 나라 전연의 모용황은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5만의 군대로 고구려를 먼저 공격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북쪽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아우 고무에게 4만의 기마부대로 막게 하였으나, 모용황은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와 고구려는 환도성을 빼앗기고 고국원왕의 왕비가 붙잡혀 가는 등 고구려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공격해 온 1만5천명의 선비족 기마부대는 미아가 되어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을 따라 신라로 들어와서 권력을 장악하니 내물왕때다. 동해루트는 이수연의 [북사]를 통해서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고구려군의 일부가 동해안을 따라 신라로 들어와 신라가 강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증명된다.

 

내물왕때부터 소지왕때까지 146년 동안은 유목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호화스러운 금장식으로 치장하는 반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왜군의 공격을 수도 없이 받게 되어 나라가 풍전등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지증왕 시대부터 개혁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즉,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인 순장의 숫자를 수백 수십명에서 수십명으로 금지시키고 6부(사로6촌에서 기원)가 소유하고 있는 군대를 국가차원으로 일원화하는 병부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씨를 모씨(이름:모진)에서 김씨(김원종)로 바꾼 법흥왕때부터는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게 되어 신라를 강한 나라로 만드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신라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이 4세기 이전이라면 가야(금관가야) 김해지역의 대성동 고분은 4세기 이후 고분으로 신라에서 이주해 온 선비족의 고분들이다. 가야지역으로 이주해 온 배경에는 신라의 권력을 장악한 선비족 사이에 본국 전연으로 귀화할 것인가? 아니면 신라에 정착하여 살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다 결국 정착하려는 세력이 신라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본국으로 귀환하자는 세력은 결국 추방당하는 꼴이 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추방된 선비족들이 가야와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세력을 키운 후에 신라를 자주 공격하게 되니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왜군의 신라공격과 신라의 구원병 요청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신라를 공격한 왜군은 대마도와 일본열도에 정착한 선비족들이라고 해야 한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한반도 서남해 해상세력과 일본열도 세력을 <왜>로 기록했다고 보면 된다.

3.산동지역에서 해로따라 한반도로 이주해 온 한족화된 김일제 세력

한나라의 토벌전 때 한나라에 투항한 사람이 흉노의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다. 김씨 성은 한무제가 금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성이라고 한다.

『한서』「흉노전」의 주석(註釋)을 보면 제천금인은 원래 흉노의 지성소(至聖所)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기원전 215년, 지성소를 진시황제에게 점령당하자 그 서북쪽에 자리잡은 휴도왕의 우측 땅으로 옮겨 휴도왕이 '제천금인상'을 모셨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무제가 휴도왕이 모셨던 '제천금인'을 상기시키는 김씨 성을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에게 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일제는 한무제에 충성을 다 하였고, 반란세력으로터 한무제를 구하기도 하여 중국역사에서는 이민족 중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인물로 기록하고 한무제 무덤옆에 묻히는 영광을 안았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김일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려 했으나 김일제는 이를 사양했다. 한무제는 임종시에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그에게 내렸다. 『한서』에 그 당시의 일이 적혀 있다.

『무제가 죽기 전 김일제를 포로로 했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불렀다. 곽광이 물었다.

“만약 폐하께서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누가 후사가 되겠습니까?”
"그대가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자신이 김일제 보다 못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했다. 김일제 또한 자신이 외국인이며 곽광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겼으며 다시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로 봉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후(侯, 투후)를 계승했다. 김일제는 사망한 후 무제의 능인 무릉(茂陵)의 공신으로 배장(陪葬)되었는데 그의 묘는 현재 서안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섬서성 홍평현 남위향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그러나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 8∼23)을 건설하는 와중에 대격변을 겪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며 김일제의 동생인 윤(倫)의 5대손 탕(湯)이 가야로 들어와 김씨 시조인 김수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휴도국의 왕자인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은 신(新)을 건설한 왕망(王莽)이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제 세력은 한나라 권력세력이 되어 김일제 증손자 이모부가 되는 왕망이 주도하여 기원 8년에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하였으나 급진적인 개혁정치로 호족들의 반발을 사 15년만인 기원23년에 흥한의 기치를 내세운 후한의 광무제에게 멸망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을 개국할 때 북방기마민족의 천손임을 자부하는 김씨 일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한서』〈왕망전〉에도 나와있다. 그런데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혁신적인 개혁조치를 추진하다가 단 15년 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게 멸망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래 북방 기마민족인 김일제의 후손들은 일부는 해로를 따라 한반도로 다른 일부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또다른 일부는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망명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고 살았으며 또 일부는 서방으로 진출하였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해로지역인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신나라 왕망시대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 고대 중국과 한반도,일본을 잇는 고대 동북아시아 해양항로  ©윤복현 저널리스트

김알지 설화배경은 BC19년~80년 탈해왕 시기다. 탈해왕 때 중국 산동지역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김일제 세력들이 망명을 해 왔다는 이야기 된다. 신나라가 망한 시기가 기원 23년이니까 딱 맞아 떨어진다. 이들 김씨 세력이 선비족이 신라 땅에 유입되기 직전에 김알지 직계후손 미추왕 때 드디어 신라왕에 오르니 최초의 김씨왕이다.
 

 
4.결론-신라의 기반 선비족(법흥왕때부터 김씨로 성을 바꾼 모용씨)

정리하면 신라는 일본처럼 여러세력으로 구성된 복합국가다.

즉, [후한서][삼국위지-동이전][한단고기]기록내용처럼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마한땅으로 들어와 마한왕에게 거주지를 분양받아 경주지역에 마을을 형성한 사로6촌(6부의 기원)세력과

부여에서 이주해 온 박혁거세 세력,

그리고 신나라가 망한 이후 멸족을 피하여 해로를 따라 유입된 김일제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쟁과정에서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을 따라 유입된 흉노계 선비족이다.

 

그리고 강력한 기마군대로 내물왕때 신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모씨 성에서 김일제세력의 김씨 성으로 바꾸고 김일제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하여 본국으로 귀환할 수도 없는 당시 시대상황을 전제로 신라권력내부에서 본국(전연)의 거점지역인 초원으로의 귀환과 신라정착이라는 문제를 놓고 대립갈등하다가 결국 신라에 정착하겠다는 선비세력에 밀린 본국귀환세력이 가야와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세력을 형성한 후에 정착하자는 선비세력을 자주 공격하니 광개토태왕비문에 신라를 수없이 공격했다는 <왜>로 기록된 배경이다.

 

따라서 미추홀은 김일제.김알지 직계후손이 맞으나 내물왕때부터는 경순왕때까지 실제 성씨는 김씨 성이 아니라 김씨 성으로 둔갑한 모씨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김알지 족보내용의 실체는 법흥왕때부터 모씨에서 김씨로 바꾼 모용씨의 후손 김인문이 자신을 김씨 족보에 집어 넣고 한나라 투호 김일제로부터 족보계산을 하여 기록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 김수로왕도 이름이 '모류지'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 호족들에게 시해당한 백제의 문주왕부터 동성왕까지 성씨가 모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시기로 선비족이 경주지역으로 유입된 324년보다 훨씬 이전 시기로 신나라가 말한 이후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김일제 동생의 후손이 맞다고 할 수 있고,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에서 일본열도에서 건너온 곤지왕의 아들 동성왕이 선비족일 이유가 전혀 없으니 기록된 내용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오류라 할 것이다.

 
그러나,분명한 사실은 신라.가야.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324년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 흉노계 선비족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선비족이 3-4세기 경주.김해.일본열도지역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이며, 신라와 가야지배자들이며,백제세력이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열도를 지배한 세력들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배경은 당나라가 바로 신라와 마찬가지로 선비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백제의 맹공으로 신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태에서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을 때 연개소문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 연합군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여 연합정권을 세우고자고 2번이나 제안할 때 김춘추가 거부한 진짜 이유라 할 것이다.

선비족의 나라 신라가 동족인 선비족의 나라 당나라를 공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사입력: 2009/09/25 [00:35]  최종편집: ⓒ pluskorea

출처; 플러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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