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용비어천가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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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 겨레 지음(1)(한글지음)

2015. 12. 15.

역주 용비어천가(한글 번역문)

용비어천가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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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용비어천가 한글 시가 원문

·이° ·애 :사·샤。·을° :여·르시·니

우리° ·에 :사·샤。·을° :여·르시·니

한글 번역

주 태왕이 빈()에 사시며 큰 제업()을 여셨도다.

우리 시조께서 경흥()에 사시며 큰 왕업을 여셨도다.

시가 주해

경원()은 옛 공주()이니, 간혹 광주()라 일컫는다. 오랫동안 호인()의 점거지가 되었는데, 고려 예종 때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진()을 설치하여 방어사(使)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 7년에 능침()이 있는 까닭으로 경원도호부()로 승격하여 별호를 추성()이라 하였다.

오늘에는 그 지역을 나누어 경흥도호부()라 하고 함길도()에 소속시켰다. 경흥()은 오늘날의 명칭에 근거하여 쓴 것이다. 아래 문장의 여러 도()·주()·부()·군()·현()의 명칭 또한 이런 유가 많다.

는 편안함이오, 의 음은 니 처음이며, 는 큼이니, 『서경()』 「무성()」에 이르기를, “태왕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업의 자취를 열었다.”고 하였다.

은 거주이며, 과 통용하니 큼을 말한다.

『주 태왕이 빈에 사시며 큰 제업을 여셨도다』 주해

주나라의 선조 후직의 이름은 기()이다.

주(周)는 나라 이름이니,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의하면, 옹주(雍州) 경내의 기산(岐山) 남쪽에 있다.

후직(后稷)은 관명이다. 후(后)는 작위와 봉토(封土)를 소유한 자의 호칭이다. 직(稷)은 오곡(五穀)의 으뜸이기에 이로써 농관(農官)의 명칭을 삼았다.

기(棄)의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原)이니, 강원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원비(元妃)이다. 그녀가 어느 날 들녘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서 기쁜 마음에 그 발자국을 밟았는데, 발자국을 밟은 후 곧 태기가 있어 만 1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 생각하여 산골짜기에 버렸는데, 지나가는 말과 소들이 아이를 밟지 않고 피해 갔으며, 다시 숲속에 버리자 때마침 모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으며, 또다시 개천 얼음 위에다 버려두니 새떼들이 날개를 펴서 아이를 덮어 주었다.

강원은 이를 신비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마침내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게 되었다. 애당초 그 아이를 내다 버리려 했다는 이유에서 기(棄)라 명명하였다.

어릴 때부터 의젓하게 대인()과 같은 큰 뜻을 품어,

屹은 魚乞切이니 드높은 모양이다. 巨는 ‘크다’이다.

장난하고 놀 적에도 삼과 콩을 심어 가꾸기를 좋아하여 삼과 콩 등이 무성했는데,

戱는 香義切이니 해학(諧謔)이다. 好는 거성이니 아래도 이와 같다. 種은 朱用切이니 ‘심다’이다. 樹는 ‘심다’와 같다. 麻는 곡식의 한 이름이니 씨앗은 식용으로 쓰고, 껍질은 베를 짠다. 菽은 式竹切이니 콩이다.

후일 어른이 되어서는 마침내 농사짓기를 좋아하여 토양을 잘 살펴 토양에 알맞은 곡식을 심고 잘 거둬들이니, 백성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옛적에 20세가 되면 관례를 치렀다. 관례를 치르는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이다. 관례를 치르지 않은 이는 모두 동자(童子)라 한다. 相은 거성으로 ‘본다’는 뜻이니, 아래도 이와 같다. 稼는 居訝切이며 穡은 所力切이니 씨앗을 뿌리는 것은 稼, 거둬들이는 것을 穡이라 한다. 則은 또한 ‘본받음’이다.

요임금 그 말을 전해 듣고 등용하여 농사()를 삼으니,

요(堯)는 당나라 임금의 이름이니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아들이다. 이끌어 가르침을 사(師)라 한다.

온 나라가 그의 덕을 입어서 공로가 있으므로 순임금이 기를 태국()에 봉하고 후직()이라 일컬었으며 별성을 희씨()라 하였다.

순(舜)은 우나라 황제의 이름이니 고수(瞽叟)의 아들이다. 邰는 他來切이니 나라 이름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태(邰)는 지금의 경조부(京兆府) 무공현(武功縣)에 있다.”라고 한다. 姬는 居之切이다.

후직의 발흥은 요·순·우임금 때인데 모두 훌륭한 덕을 쌓았으며,

陶는 徒刀切이며, 당(唐)은 요임금의 나라 이름이다. 요임금은 처음 당나라 제후였다가 후일 천자가 되어 도(陶)에 도읍을 정하였기에 도당(陶唐)이라 하였다. 우(虞)는 순임금의 성씨인데, 천하를 소유한 후에 국호로 삼았다. 하(夏)는 우임금이 천하를 소유한 후에 붙인 국호이다. 令은 ‘선하다’는 뜻이다.

후직이 죽은 뒤에 그 아들 불줄()이 뒤를 이었으나,

卒은 끝마침이고, 窋은 都律切이다.

불줄이 말년에 하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자 직관()을 버리고 농정()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하(夏)에다 후(后)와 씨(氏)를 덧붙여 말한 것은 순임금은 황제요 우임금은 왕(王)이기 때문이다. 후(后)를 덧붙여 쓴 것은 황제와 구별하기 위함이며, 씨(氏)를 말한 것은 그 선조의 나눠진 바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순(舜)·우(禹)는 모두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기에 순(舜)은 우씨(虞氏), 우(禹)는 하씨(夏氏)라 하였다. 일설에는 우임금이 임금으로부터 군위(君位)를 전수받았기에 하(夏)에 후(后)를 덧붙여 썼다고도 말한다. 去는 口擧切이니 없앰이다. 하(夏) 태강(太康)이 나라를 잃고 후직의 관직을 폐지한 채 다시 농사에 힘쓰지 않음을 말한다.

스스로 그 벼슬을 잃고 융적()의 땅으로 숨어 들어가 살았다.

실기관수(失其官守)는 후직이 관직을 잃었음을 말한다. 竄은 七亂切이니 숨음이다. 狄은 간혹 翟으로도 쓰니 동쪽을 이(夷), 남쪽을 만(蠻), 서쪽을 융(戎), 북쪽을 맥적(貉狄)이라 한다. 불줄이 벼슬을 잃고 하나라를 떠나 기산(岐山) 빈곡(邠谷)[유곡(豳谷)]으로 옮겨 갔는데, 서쪽으로는 융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적과 가까웠다.

불줄이 죽은 뒤에 그 아들 국도()가 섰고,

鞠은 居六切이다.

국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 공유()가 섰는데, 공유는 융적의 땅에 살면서도 다시 후직의 농정을 일으켜 백성이 부를 누리게 되었고, 좋은 땅을 살펴 빈곡에 나라를 세웠다.

復는 扶又切이니 아래도 이와 같다. 豳은 悲巾切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의하면 옹주(雍州)·기산(岐山)의 북쪽, 원습(原隰)의 들판이다.

공유의 9세손 고공단보()가 다시 후직과 공유의 유업을 닦아 덕망을 쌓고 의리를 행하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임금으로 받들었다.

부자가 서로 대를 이은 것을 1세라 한다. 고공(古公)은 대왕(大王)의 본호(本號)이다. 亶은 多旱切이며, 父의 음은 甫이니 단보는 태왕의 이름이다. 혹자는 태왕의 자(字)라 말하기도 한다. 戴는 丁代切이니, 대지(戴之)는 그를 사랑하여 추대함이다.

고공이 빈곡에 살 때 적인이 침략해 오자

대체로 출병(出兵)에 있어 죄를 성토하여 정벌하는 것을 벌(伐), 군대를 잠입시켜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침(侵)이라 한다. 적인침지(狄人侵之)는 훈육(獯鬻)과 융적(戎狄)이 침략해 옴을 말한다.

가죽과 폐백으로 섬겼지만 침략을 피할 수 없었고, 개나 말로 섬겼지만 면할 수 없었고, 주옥으로도 섬겼지만 면할 수 없었다.

皮는 범·표범·순록·사슴 따위의 가죽이며, 幣는 毘祭切이니 비단이다.

이에 백성의 원로들을 불러 놓고,

屬의 음은 燭이니 모임을 말한다. 耆는 渠伊切이니 다다름이다. 노경(老境)에 다다름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의하면 60세를 기(耆)라 한다.

“적인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땅이다. 내 들으니 군자는 사람을 살려야 할 땅으로 인해 도리어 백성의 목숨을 해칠 수는 없다 하니,

땅은 본디 만물을 길러 사람들을 살게 하는 곳인데, 오늘 토지를 두고 다투어 백성의 목숨을 죽인다는 것은 백성을 살려야 할 땅으로 인해 사람이 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대들 대부(: )는 어찌 임금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하였다.” 하고,

자(子)는 남자에 대한 통칭이다.

마침내 가속을 거느리고 빈곡을 떠나 칠()·저()의 강을 건너고 양산()을 넘어 기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여 거주하자

속(屬)은 노비와 친속이다. 渡는 徒故切이니 건넘이다. 漆의 음은 七이며, 沮는 七余切이다. 칠(漆)·저(沮)는 두 강줄기의 이름이니 빈(豳) 땅에 있다. 踰는 容朱切이니 ‘넘다’이다. 양산(梁山)은 옹주(雍州) 호치현(好畤縣) 서북쪽에 있다. 邑은 도읍을 마련함이다. 岐는 翹移切이니, 기산(岐山)은 천주산(天柱山)이라고도 하며, 봉상부(鳳翔府) 기산현(岐山縣) 동북쪽 10리에 있다.

빈곡 사람들이, “고공은 어진 사람이니 버릴 수 없다.” 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노약자를 이끌고 저자에 가는 것같이 그를 뒤따랐으며 이웃 나라에서까지도 고공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추종하는 자가 많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함을 仁이라 한다. 擧는 ‘잡아끌다’이며, 모두를 말한다. 携는 玄圭切이니 ‘잡아 이끌다’이다. 市는 上紙切이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이다. 市란 믿어 의뢰한다는 뜻이니, 노인과 어린이를 보살핌에 그들이 의뢰하게 되어 궁핍하지 않음을 말한다. 如歸市는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찾아옴을 말한다. 旁은 蒲光切이며 傍과 통용하여 쓰니, ‘인근’을 말한다.

이에 고공이 융적의 풍속을 없애고,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짓고 고을의 경계를 설정하여 백성을 살게 하고, 국호를 ‘주()’라 하였다. 그가 곧 태왕[]으로 추존받은 것이다.

貶은 悲檢切이니 억제하고 덜어내는 것이다. 築은 張六切이니 다지는 것이다. 郭은 光鑊切이니, 안쪽에 있는 것은 성(城), 바깥에 있는 것은 곽(郭)이라 한다. 城이란 담는다는 뜻으로 사람과 만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郭이란 ‘드넓다’라는 의미로 드넓은 곳이 성 밖에 있음을 말한다. 邑別居之는 경계를 구별하여 촌락[邑落]을 만든 것이다. ‘주(周)’라는 땅에 도읍을 정한 까닭에 비로소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대왕(大王)의 大의 음은 ‘泰’이다. 『중용(中庸)』 제19장에서는 “무왕은 노년에 이르러 천명을 받았으며, 주공은 문무의 덕을 이루고 태왕과 왕계를 왕으로 추존하였다.”라고 하였다.

『우리 시조께서 경흥에 사시며 큰 왕업을 여셨도다』 주해

처음에 목조가 전주에 살았는데,

은 莫六切이라. 태조가 즉위한 후 황고조(皇高祖)를 추존하여 시호를 목왕(穆王)이라 하고, 비(妃)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였다. 익법(謚法)에 의하면, “덕을 널리 펴고 의(義)를 지키는 자에게 목(穆) 자를 쓴다.”고 하였다. 태종은 목왕의 존호를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효비(孝妃)의 존호를 효공왕후(孝恭王后)라 하였다. 왕후는 천우위(千牛衛) 장사공(長史公) 숙(肅)의 따님으로 본이 다른 이씨이다.

전주는 본디 백제 완산군인데, 견훤이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태조가 그를 무찌르고 전주로 개정하였으며, 본조 태조 원년에는 완산부로 개정하였고, 태종 13년에는 전주부로 개정하였다. 별호는 승화(承化), 또는 완산(完山, 견성(甄城))이며, 그 산진(山鎭)은 건지산(乾至山)이다. 전라도 경계 내에서 가장 큰 고을이며, 예속된 고을은 6개군 10개 현이다.

관기()의 일로 지주()와 원한이 있었다. 지주가 해코지를 해 오자 목조는 강원도 삼척현으로 옮겨 갔는데 그를 따르려고 이주한 백성이 170여 호가 되었다.

는 巨綺切이니 음악을 하는 여인이다.

태수를 지주(知州)라 한다.

은 乞逆切이니 원망하거나 사이가 멀어짐을 말하며, 틈이다. 물건에 틈이 생겼을 때 이를 유극(有隙)이라 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한이 생겼을 때도 틈이 생겼다고 말한다.

당시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전주에 부임하여, 목조가 총애하는 기생을 탐내어 이 때문에 틈이 생겼다. 이에 지주(知州)가 목조에게 화풀이를 하자 목조가 지주에게 항변하니, 지주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군사를 동원하여 목조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목조는 이 사실을 알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갔다.

徙는 想氏切이니 옮겨 가는 것이다.

본조는 국토를 팔도로 나누었는데, 곧 경기·충청·경상·전라·강원·황해·평안·함길도이다. 강원도는 본디 예맥 땅이었으나 후일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때에 영동을 삭방도(朔方道)라 하다가 후일 다시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로, 다시 강릉도(江陵道), 강릉삭방도, 또다시 강릉도, 삭방강릉도, 또다시 강릉도로 개정하였다.

영서는 춘주도(春州道), 또는 동주도(東州道)라 하다가 교주도(交州道)로 개정하였는데, 공양왕 원년에 영동·영서를 하나로 합하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였고, 본조 태조 4년에 처음으로 강원도라 하였다. 도내의 가장 큰 고을인 강릉과 원주의 이름을 빌려 도명(道名)을 붙인 것이다.

삼척현은 본디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 항복하여 주(州)로 격하되었고, 후일 삼척군으로 개정되었는데 고려시대에 다시 척주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삼척현으로 강등되었다. 본조 태조 2년에 목조의 외향(外鄕)이라는 이유로 삼척부(三陟府)로 승격되었고, 태종 13년에는 도호부로 개정되었다. 별호는 직주(直珠)이며 산진은 갈야산(葛夜山)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큰 고을로 1개 군 1개 현을 거느리고 있다.

훗날 신임 안렴사와 목조 사이에 지난날의 숙원(宿)이 있었다.

관직의 임명을 제(除)라 한다. 무릇 除는 구관(舊官)을 버리고 신관을 취함을 말한다.

按은 밝힘이오, 廉은 살핌이오, 使는 거성으로 사신이다.

고려 초기에 도마다 안찰사를 두었는데, 후일 안렴사로 개정하였다.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여 출척[黜陟: 관리의 채용과 파면]을 시행하였지만, 품계가 낮은 관리가 이를 맡았다. 또 제찰사(提察使)로 개정되었다가 신창(辛昌) 때에는 관찰사로 개정하였으나 공양왕이 다시 안렴사로 개정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는 또다시 관찰사로 개정하고 양부(兩府)에서 파견하였다.

宿은 평소이며, 嫌은 賢兼切이니 마음에 편치 못함의 뜻이다.

신임 안렴사는 지난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산성별감이다.

목조는 그가 부임한다는 말을 듣고 식구를 데리고 바닷길을 따라 함길도 덕원부로 옮겨 갔는데 170여 호가 또다시 모두 그를 따랐다.

挈은 詰結切이니 ‘거느리다’의 뜻이다.

함길도는 본디 고구려 옛 땅이었다.

고려 성종 때 경내를 10도로 나누면서 동계(東界)를 삭방도(朔方道)라 하였으나, 함주(咸州) 이북 지방은 동여진에게 빼았겼는데, 예종 때에 윤관이 동여진을 몰아낸 뒤 9성(九城)을 쌓았다.

고종 때 조휘(趙暉), 탁청(卓靑) 등이 배반하여 화주(和州) 이북 지방은 원나라에 예속됨에 따라 원나라에서 쌍성총관부(雙城㧾管府)를 설치하였다.

공민왕 5년에 다시 되찾아 동북면(東北面)이라 하였으며, 본조 태종 13년에는 영길도(永吉道)로 개정하였고, 16년에는 함길도로 개정하였다. 이는 도내의 가장 큰 고을인 함흥(咸興)·길주(吉州) 두 고을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덕원부는 본디 고구려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신라 때 정천(井泉)으로 개정하였고, 고려에서는 용주(湧州), 그리고 의주(宜州)로 개정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는 의주군(宜川郡)으로, 우리 전하 19년에는 덕원으로 개정하였고, 27년에는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별호는 의성(宜城) 또는 동모(東牟), 또는 춘성(春城)이라 한다. 산진은 반룡산(盤龍山)이다.

얼마 후, 원나라에 귀의하여

원 태조는 성이 기악온씨(奇渥溫氏)이고,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며, 본래 몽골 부족이었다. 40여 개의 국가를 무찌르고 마침내 서하(西夏)·서역(西域)을 평정한 후, 연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태종 2년에는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조 지원(至元) 8년에 이르러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였는데, 이는 『주역(周易)』의 건원(乾元)의 뜻을 취한 것이다. 16년에는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오동[]으로 옮겨 가니,

斡은 烏括切이다. 오동[斡東]은 지금의 경흥부 동쪽 30리에 있다. 무릇 지명을 씀에 있어서 한자로 통용되기 어려운 것은 정음(正音)을 사용하였으며 인명과 직명 또한 모두 이에 준하여 썼다.

원나라 조정에서 목조를 5,000호의 다루가치[]로 삼았고, 동북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심복하였다. 왕업의 일어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所)는 처소다. 원나라 제도에 의하면 외관으로 대개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그 고을의 우두머리를 삼았지만 일정한 품계는 없었다

이상은 제3장이다.

※ 이 콘텐츠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1612년(광해군 4)에 간행된 만력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역자 박창희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http://book.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네이버 지식백과] 용비어천가 제3장 (역주 용비어천가(한글 번역문), 2015. 3. 5.,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51890&cid=56822&categoryId=56822&expCategoryId=56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