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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문암리 유적/[스크랩]고성 문암리유적(사적 4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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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3.

 

고성 문암리 유적(高城文巖里遺蹟)

선사문화문화재 | 유적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분야  선사

문화유형  문화재유적

지정기관  문화재청

지정부류  사적

지정번호  제426호

 

정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키워드

개설

사적 제426호. 이 유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추진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도에 실시한 고성군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 지대 남쪽사면의 사구(沙丘) 지대에 위치한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해안에 면해 있는 해발 41.9m의 야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文岩川)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으로는 약 400m 거리에 동해안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선사인들의 생활 근거지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3월 31일까지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분포범위, 층위와 형성과정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5개의 유물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서기전 6,000~3,000년)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노지(野外爐址) 등 다양한 유구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는 2002년 10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이루어졌다. 2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住居址) 3기(基),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등 8기의 유구(遺構)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결상이식(玦狀耳飾)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3차 조사는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실시되었고, 추가 정밀발굴조사가 2011년 7월 14일부터 2012년 7월 31년까지 진행되었다. 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耕作遺構)인 ‘밭’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밭 유구’는 ‘동아시아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괭이·뒤지개·보습·갈판·갈돌 등이 있고, 탄화곡물로는 조와 기장이 있다.

 

연대

토기와 석기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안정된 층위에서 뚜렷한 층서를 갖고 출토되었다. 그동안 층위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토기 편년(編年)을 보완할 수 있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유적은 크게 신석기시대 전기(前期)와 중기(中期)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 전기는 다시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전형적인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화층(Ⅷ층~Ⅵ층)과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혹은 원시무문양토기(原始無文樣土器)만 출토되는 문화층(Ⅹ층과 Ⅸ층)으로 나누어진다. 각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 유적의 시기는 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1단계는 순수무문양토기 혹은 원시무문양토기만 출토되는 단계이다. 기형(器形)는 발형(鉢形)이다. 내·외면은 긁기와 물손질로 정면처리하였고, 태토(胎土)는 석영과 장석이 다량 함유된 사질토를 사용하였다. 이런 토기는 청도 오진리의 바위그늘 유적과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가 출현하여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융기문토기는 Ⅷ층~Ⅵ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이며, 구연(口緣)은 직립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점토띠를 수평 방식으로 붙여 쌓아 올렸다. 문양은 횡융기문(橫隆起文), 횡융기문+삼각융기문(三角隆起文), 횡융기문+종융기문(縱隆起文), 종융기문 등 다양하다. 이와 함께 오산리식토기도 Ⅷ층에서부터 전 층에 걸쳐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옹형·접시형 등 다양하고, 바닥은 평평하다.

 

3단계는 융기문토기와 오산리식토기는 줄어들고,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능문(菱文)·삼각문(三角文)·횡주어골문·격자문(格子文) 등 다양하다. 이런 토기는 동해안지역에서 문암리유적 외에도 오산리유적, 지경리유적, 가평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런 토기의 변화단계로 보아 양양 오산리유적의 연대와 유사하거나 좀 더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오산리식토기 보다 이른 시기의 순수무문양토기 문화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오산리유적은 층위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호 집터 등 제1문화층에서 채집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결과, 대부분이 서기전 5,000년~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5,000년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어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물로 매장유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玦狀耳飾)이 가장 주목된다. 결상이식은 청도 사촌리유적과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바가 있었으나 발굴조사된 유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시기상으로는 기원전 5,000년 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된 경작유구인 밭의 하층에서 채취한 토양(모래)에 대한 OSL(광자극 루미네선스측정) 연대측정 결과가 약 5,000년 전(5,000±700 B.P.)이라는 연대가 검출되었다.

 

내용

이 유적은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규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까지 발굴조사에서 5개의 유물포함층과 당시의 생활면을 비롯한 3개의 문화층을 비롯하여 주거지 3기, 야외노지 3기, 목탄 및 소토유구 2기, 경작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住居址)의 평면 형태는 원형·말각장방형·장타원형 등 다양한 편이다. 규모도 다양한데, 크기가 대체로 4m 내외이다. 이 중에서 02-7호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770㎝, 너비가 450㎝를 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오산리 등 주변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주거지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한 경우(98-1호, 02-1호·5호·7호)와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98-2호)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주거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노지는 바닥면을 얕게 파고 주위를 할석으로 돌려 만들었고, 내부에는 목탄층이 퇴적되었다. 노지의 평면 형태는 원형 혹은 장방형이고, 노지의 지름은 1m 내외이다. 또한 주거지 외부에서도 야외노지 6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4기는 돌을 돌린 형식이고, 2기는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설식으로 재만 남아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원형·부정형·말각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수혈(竪穴)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의 깊이는 얕고,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02-8호 수혈의 규모는 길이 174㎝, 너비 92㎝, 깊이 14㎝를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 석부(石斧) 7점과 석영제 박편(薄片)과 함께 결합식 낚시바늘이 37점이 출토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매장유구는 추정 길이가 150㎝이고, 너비는 84㎝이며, 깊이는 12㎝인 말각장방형 토광묘(土壙墓)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 귀에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 1쌍을 포함하여 양 어깨 위치에 놓인 석부 2점과 머리맡의 소형 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2012년도 제3차 발굴조사에서는 경작(耕作) 유구인 ‘밭’이 상·하 2개 층에서 확인되었다. 상층 밭은 전형적인 이랑 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청동기시대 밭의 형태와 비교할 때 두둑과 고랑의 너비가 일정하지 않고 이랑이 나란하게 이어지지 않는 고식적(古式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랑의 규모는 평균 길이는 970㎝, 두둑 너비는 38~82cm, 고랑 너비는 40~90cm, 고랑 높이는 15~17cm이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밭의 일부를 파고 조성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 내부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600년~서기전 3,000년)의 짧은 빗금무늬토기편ㆍ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밭의 조성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밭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그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유물(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과 탄화곡물(조, 기장)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징

문암리유적은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5기, 매장유구 1기, 경작유구(밭)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전기의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낚시어구, 결상이식(옥 귀걸이) 등 다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밭은 석기(돌괭이, 뒤지개, 보습, 갈판, 갈돌 등), 탄화곡물(조, 기장) 그리고 곡물 토기압흔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던 신석기시대의 농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의

문암리유적은 기존에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오산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토기의 바닥면의 형태와 문양으로 보아 남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 토기제작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밭유구는 청동기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암리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밭유적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鰲山里遺蹟 (서울大學校博物館, 1984)

  • 『鰲山里遺蹟Ⅱ』(서울大學校博物館,1985)

  • 『鰲山里遺蹟Ⅲ』(서울大學校博物館,1988)

  • 「新石器時代」(安承模,『韓國考古學報』21,1988)

  • 「新石器時代 口脣刻目土器 小考」(任鶴鍾,『考古學誌』第10輯,1994)

  • 「隆起文(新岩里式)土器의 諸問題」(李相均,『湖南考古學報』3,1996)

  • 「軍事保護地域內 文化遺蹟 地表調査 槪報-江原道 高城郡篇」(金聖範·沈榮燮,『文化財』第30號,1997)

  • 「玦状耳飾と管玉の出現-縄文時代早期末·前期初頭の石製装身具セットの意義-」(川崎保, 『考古学雑誌』83-3,1998)

  • 『軍事保護地域內 文化遺蹟 地表調査 槪報-江原道篇』(國立文化財硏究所,2000)

  • 襄陽 柯坪里 (國立文化財硏究所, 2000)

  • 「문암리 유적(高城 文岩里 遺蹟)」(국립문화재연구소,『韓國考古學事典』,2001)

  • 襄陽 地境里 住居址 (江陵大學校博物館, 2002)

  • 「日本列島の玦狀耳飾の始原に關すゐ試論」(藤田富士夫,『繩文時代渡來文化』,雄山閣,2002)

  • 「중서부 신석기시대 편년에 대한 비판적 검토」(김장석,『韓國新石器硏究』5, 한국신석기학회,2003)

  • 「朝鮮半島出土の玦状耳飾について」(中山清隆,『玉文化』創刊号,2004).

  • 高城 文岩里 遺蹟 (國立文化財硏究所, 2004)

  • 「東アジアの玦飾の起源と拡散」(鄧聡 著·谷内美江子 訳,『環日本海の玉文化の始源と展開』,2004)

  • 「고성문암리선사유적(高城文岩里先史遺蹟)」(문화재청,『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史蹟篇)Ⅱ』,2006)

  • 「東北아시아 初期 新石器文化의 形成과 展開」(이동주,『문물연구』제10호,2006)

  • 江原文化財大觀 국가지정편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6)

  • 「고성 문암리유적(高城 文岩里遺蹟)을 통해 본 신석기시대 평저토기문화의 전개」(김은영, 『문화재』제40호,2007)

  • 「襄陽 鰲山里Ⅱ 遺蹟 道路擴張區域 發掘成果」(高東淳,『日韓新石器時代의 住居와 集落』, 2007)

  • 「高城文岩里遺蹟出土土器の年代測定結果と所見」(國本田大·吉田邦夫·김은영,『文化財』제40호,2007)

  • 한반도 중서부지역 빗살무늬토기문화 변동과정 연구 (林尙澤, 일지사, 2008)

  • 「고성문암리선사유적(高城文岩里先史遺蹟)」(문화재청,『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2010)

  • 「韓國 新石器時代 墓制의 檢討」(兪泰勇,『白山學報』88,백산학회,2010)

  • 「고성 문암리유적」(조미순,『중서부지역의 신석기문화』,한국신석기학회,2012)

  • 「동 ·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조기 토기 양식」(林尙澤,『韓國新石器硏究』24, 한국신석기학회,2012)

출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58 

 

 

 

문암리유적(高城 文岩里遺蹟)

 

사적 제426호.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1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은 속초–거진간 7번국도를 타고 북상하다 토성면과 죽왕면의 경계인 문암교를 지나 우측의 백도해수욕장 입구로 진입하면 좌측으로 문암1리 마을 북쪽에 바다쪽으로 해발 41m 정도의 구릉이 위치하는데, 구릉의 남쪽사면 끝부분에 위치한다. 유적은 북쪽의 구릉이 감싸 안고 있으며, 남·서편으로는 넓은 평야와 서에서 동으로 흘러드는 문암천이 있고 동쪽으로는 400m 거리에 동해가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는데, 1차 발굴조사를 하여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 및 야외노지 5기 등이 조사되었다. 2차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 매장유구(埋葬遺構) 1기, 야외노지 1기, 수혈 3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적의 층위는 10개층으로 나뉘는데 해일 또는 범람에 의하여 밀려와 유적의 전체를 덮은 5층(백색모래층)을 기준으로, 1∼3층은 중기의 침선문토기가 출토되며, 6∼10층은 무문양토기(無文樣土器),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 등 전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크게 구분된다. 7∼1층에서는 1차 조사 시에 발견된 주거지 2기, 야외노지 5기 등이 조사되었고, 이 층을 제거한 후 7∼2층에서는 2차 조사 시에 발견된 주거지 2기 매장유구 1기, 야외노지 1기, 수혈 3기가 조사되어 7층 내에서도 어느 정도의 층위가 구분된다. 9층에서 확인된 02–7호주거지는 7층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물과 달리 무문양토기만 출토되어 층위적 선·후 관계와 함께 출토 유물에서도 구분이 된다.

 

유적에서는 모두 5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으며, 대부분 바닥 일부만 남아 있으나 98–1호와 02–7호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 말각방형, 장타원형 등 일정한 형태가 아니며, 그 중 하층에서 확인된 02–7호주거지의 경우는 긴 장타원형 주거지이다. 주거지 바닥은 98–2호는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나머지는 불다짐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로는 노지가 확인되는데, 평면형태는 원형 내지는 장방형이다. 노지는 길이 1m, 너비 0.8m 크기이며, 얕은 토광을 파고, 가장자리로 돌아가면서 할석을 세웠으며, 02–7호주거지의 경우 노지내 소토에서 작은 골편들이 확인되었다. 유적에서는 4호수혈의 일부를 파괴하고 축조한 신석기시대 토광묘가 확인되었다. 동쪽으로 바로 인접하여 5호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으나 출토 유물과 토층상으로 시기차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의 동시기로 생각된다. 토광묘의 크기는 추정직경 1.5m, 너비 0.84m, 깊이는 0.12m 내외이며, 형태는 말각방형으로 1/3 정도가 남아있다. 유구의 장축방향은 남북방향이다. 출토 유물은 남쪽의 머리맡에 소형발형토기(小形鉢形土器) 1점과 귀에 착용된 결상이식 1쌍, 석부 2점이 출토되었다. 결상이식의 재질은 옥제품으로 각각 형태는 타원형과 원형이다. 타원형이식은 상단부 일부가 편평한 면을 이루며, 크기는 길이 3.4㎝, 너비 4㎝, 두께 0.7㎝, 트임부는 0.2㎝이고 구멍은 원형이고 지름은 1㎝ 가량의 원형이다. 원형이식은 둥근 곡선을 이루며, 크기는 길이와 너비 각각 3.6㎝, 두께 0.65㎝, 트임부 0.2㎝, 구멍은 0.9㎝ 정도의 원형이다. 토광묘 크기로 보아 신전장(伸展葬)하기에는 작은 편이고 귀에 착용한 결상이식이 일정한 간격에서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부산 범방패총에서 확인된 경우와 같이 상체는 펴고 다리부분을 ‘Ⅹ’자형 형태로 꼬아서 놓은 형태일 가능성이 있다. 출토 유물로 보면 신석기인들은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유물과 함께 평상시에 착용하였던 장식품을 함께 매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수혈이 3기 확인되었는데, 이 중 8호수혈은 다른 유구에 비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혈의 크기는 길이 1.74m, 너비 0.92m, 깊이 0.14m이며, 평면형태는 1단을 이루는 부정형이다. 수혈의 내부에서는 잘 마연된 석부 7점과 결합식조침 37점 등이 매납되어 석기 저장공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석기로 대별할 수 있으며, 이 가운데에 무문양토기의 수가 가장 많으며, 문양이 있는 토기는 전체적으로 오산리식토기(鰲山里式土器)가 중심을 이룬다. 또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물로 알려진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가 많은 수량을 점하고 있어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고, 인접지역에 위치하는 양양 오산리유적과는 거의 비슷한 유물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토기는 크게 3단계로 변화가 확인되고 있으며, 10·9층에 해당되는 1단계, 8∼6층의 2단계, 5∼1층의 3단계이다. 1단계는 압날·압인문토기를 포함한 유문토기와 융기문토기가 확인되지 않는 순수 무문양토기 단계이다. 2단계에 들어서는 압날·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가 출현하고 그 수량도 급격하게 증가하는 단계이다. 3단계는 압날·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는 꾸준히 출토되지만 그 수는 적어지고 침선문토기가 출현하는 단계이다.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된 무문양토기는 하층에서부터 상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있으나, 특히 9층과 10층에서는 무문양만 출토되었다. 무문양토기의 기형은 발형이며, 내면은 목판긁기와 물손질로 정면하였고, 태토는 석영과 장석이 많이 함유된 사질토이다. 융기문토기는 모두 42점이 확인되었고, 대부분 6∼8층 사이에서 출토되나 주로 7층에서 출토되는 2단계 토기이다. 토기는 시문방법과 문양형태에 있어서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 주는데, 기형은 발형토기이며, 저부는 평저, 구연은 직립하며, 구순은 면을 이루고, 점토띠는 수평방식으로 접합하였다. 이러한 기형과 제작방법은 융기문토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무문양토기와 압날·압인문토기, 주칠토기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일반적인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문양은 횡융기문, 횡융기문+삼각융기문, 횡융기문+종융기문, 종융기문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만 문양상 차이가 시기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8층과 6층에서 출토된 각 1점을 제외한 유물이 7층에서 집중되고 있고, 2개층으로 구분되는 7층은 하층의 경우, 한줄의 융기대를 전체 돌리거나 일정부분을 공백으로 주면서 각봉(角棒)과 환봉(丸棒)으로 눌러가며 마디같은 문양적 효과로 토기와 접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상층에서는 하층에서와 같이 각봉과 환봉을 이용하여 마디효과를 내는 것 뿐 만 아니라 각봉으로 상하 눌러 토기의 접착을 강하게 하였고, 대형화된 토기와 융기대나 융기선으로한 다양한 문양(다선의 횡융기문, 횡융기문+삼각융기문, 사선융기문, 횡유기문+종융기문, 종융기문 등)으로 분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융기문토기의 출토가 층위적으로 시간적 선후관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으나 시기 폭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압날·압인문토기는 모두 158점이 1∼8층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기형에서 고루 출토되었다. 기형은 발형토기, 심발형토기, 옹형토기, 접시형토기 등 다양하다. 저부는 평저이다. 구연은 직립과 외반된 것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서 직립된 구연은 내면의 구연부에 단을 이루는 유무에 따라 분류 할 수 있다. 문양을 제외한 제작방법과 기형, 태토는 무문양토기나 융기문토기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소형화된 접시, 접시형토기 같은 새로운 기종의 출현은 다른 토기에서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소형토기는 7–2층과 8층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되고 있으며, 7–1층에서는 토기가 대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7–1층의 시기에는 장기간의 거주로 어로와 채집을 통한 대형 저장용 토기가 필요했을 가능성을 포함한 생계형태, 7–2층은 토기이외의 출토 유물인 많은 낚시어구 등으로 보아 어로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어, 저장보다는 단시일에 소비하는 식생형태를 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압날문토기는 크게 5가지로 세분되는데 Ⅰ식은 자돌구로 평행점열문을 시문한 형태로 구연이 외반하거나 직립구연 내면에 단을 이룬다. Ⅱ식은 자돌구로 평행점열문과 단사선문이 결합된 형태로 수량은 극히 적다. Ⅲ식은 단사선문과 반죽관문이 결합된 형태로 발형과 심발형은 1점이지만, 옹형토기는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Ⅳ식은 반죽관문이나 죽관문을 시문한 형태로 6∼8층까지 확인되고 있고, 유적에서 가장 성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양은 대부분 1∼3줄까지로 한정되게 시문하였고 구연은 Ⅰ식과 같이 구연이 외반되거나 직립구연에 단을 이룬다. Ⅴ식은 다치구(다양한 문양 모두 포함)로 시문한 형태이다. 3·6·7층에서 확인되고 있어 다른 토기에 비하여 후기적 양상을 띠는 토기이다.

 

옹형토기는 대부분 파수가 달려있는 형태이며, 파수 중간까지 문양을 시문하였다. 토기는 지표에서부터 7층까지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긴 시간폭을 가진 유물이다. 문양은 구순에서부터 단사선문을 시문한 후 반 죽관문을 압날한 것, 반죽관문을 시문한 후 단사선문을 압날한 것, 구경에서부터 단사선문을 시문한 후 반죽관문을 압날한 것, 구경에서부터 반죽관문을 시문한 후 단사선문을 압날한 것 등 4가지로 구분된다. 옹형토기는 문양 및 기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층위상에서는 대부분 혼재된 양상을 띤다.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모두 274점이 출토되었는데 종류별로는 석부, 석촉, 석창, 마석, 지석, 석도, 석거, 결합식조침, 결합식작살, 결상이식, 골촉 등 다양하다. 석부는 전면을 마연한 마제석부가 대부분으로 7–2층에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02–8호수혈에서는 7점이 결합식조침과 함께 집중적으로 매납되었다. 석부의 형태는 인부로 갈수록 넓어지는 제형(梯形)과 일자형(一字形)을 이루는 장방형(長方形)으로 나뉜다. 석촉은 16점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유엽형과 일자형으로 구분된다. 유엽형은 전면을 마연하여 촉은 날카롭지만 기부(基部)는 편평한 형태고, 단면은 렌즈형을 띤다. 일자형은 날부분만을 마연하였으며, 길고 곧게 뻗어 날부분에서만 뾰족하게 처리한 형태로 단면은 편육각형이고, 선단부는 편평하거나, 만입된 형태이다. 결합식조침은 65점이 출토되었으며, 02–8호수혈에서만 37점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활발한 어로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침은 7∼9층에서만 출토되고 상층에서는 출토되지 않아 하층에서는 어로생활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결합식조침의 형식은 모두 ‘J’자형이다. 어망추는 15점이 출토되었으며, 평면형태는 타원형과 장방형, 원형 등 다양하며 대부분 양쪽 가장자리를 타격하여 홈을 만들었다. 결합식작살의 재질은 흑요석제와 규화석제이다. 흑요석제 작살은 많은 잔솔질을 통해 날을 세웠고, 상단의 촉은 3단을 양 측면의 촉은 4단의 날카로운 거치상을 이룬다.

 

동해안 중북부지역에서 확인된 문암리유적은 신석기시대 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압날·압인문토기, 침선문토기가 비교적 안정된 토층상에서 확인되어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오산리식토기, 융기문토기, 결상이식 등의 출토 유물로 보아 동북아시아의 주변지역과 전기 신석기시대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동순)

 

참고문헌

고성 문암리유적(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출처;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56&st_char=&sk=%EB%AC%B8%EC%95%94%EB%A6%AC%EC%9C%A0%EC%A0%81

 

고성 문암리 유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성 문암리 유적(高城 文巖里 遺蹟)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에 있는 석기시대의 유적이다. 2001년 2월 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26호로 지정되었다.

 

고성 문암리 유적(高城 文巖里 遺蹟)종목면적수량시대소유위치주소좌표정보

 대한민국의 사적

 

사적 제426호 

(2001년 2월 5일 지정)

60,722m2[1]

36필지[1]

석기시대

고성군

 

 

고성 문암리 유적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1번지 외

북위 38° 18′ 17″ 동경 128° 32′ 37″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목차

개요[편집]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1번지에 위치한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대의 남쪽사면 사구(沙丘)위에 형성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며, 인근에는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98년 12월부터 '99년 3월까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체 유적 중 약 200여평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5개의 유물 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 노지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발굴유구와 출토유물로 볼 때 국내 최고의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 오산리 유적(B.C.6000∼3000)과 연대가 비슷하고 최하층에서 발견된 유구는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 이동:  문화재청고시제2015-63호,《「고성 문암리 유적」 문화재구역 조정 및 지형도면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8531호, 50면, 2015-06-12

참고 자료[편집]

고성 문암리 유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크랩]고성 문암리유적(사적 426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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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dapsa.kr/blog/?p=40597#res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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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죽암면 문암리에 있는 선사유적지(사적426호)이다. 발굴.조사결과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유물들이 포함된 문화층과 주거지, 야외 노지, 경작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전기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 낚시어구, 옥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경작지인 밭은 돌괭이, 뒤지개 같은 석기들과 탄화곡물 등으로 추정해왔던 신석기시대 농경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인된 신석기시대 농경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아무르강과 동북3성,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은 거의 없지만 사적으로 지정된 중요한 유적지로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자연환경 등을 살펴보는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쪽으로 400 m 떨어진 구릉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유적이 있는 고성 죽왕면 일대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석호인 영랑호와 송지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지가 넓은 지역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어로와 농경생활을 같이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관동팔경 중 한곳인 청간정이 인근에 있다.

고성 문암리유적(사적 426호). 양양 오산리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BC 5,000 ~ 3,000년경) 신석기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3차 발굴.조사(2010~2013년) 당시의 모습이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 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인 ‘밭’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안내문.

발굴.조사 당시 모습. 여러곳에 흙을 쌓아 놓고 발굴작업 중임을 표시하는 장애물을 설치해 놓고 있다.

주거지 등 유구가 확인되는 곳으로 보이는 발굴 현장.

마을 텃밭에도 발굴.조사를 위해 울타리를 세워 놓았다.

마을 주변 농경지 여러곳에 발굴.조사를 위해 울타리를 세워 놓았다.

이곳에서 출토된 돌칼. 농경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는 반달모양 돌칼과는 약간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결합식작살, 1.강원 고성 문암리, 2.복제품,  어로생활을 주로 했던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작살이다. 자루에 노끈을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바리, 신석기시대, 강원 고성 문암리,

덧무늬토기는 기원전 6,000~4,000년 무렵에 사용된 것으로 겉면에 진흙 띠를 엇붙여 무늬효과를 낸 것이다. 남해안의 여러 조개더미에서 빗살무늬토기층 아래에서 출토되고 있어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덧무늬 토기는 강원도 고성, 양양 등 동해안과 전남 여수 등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봐서는 해안가에서 어로생활을 하던 신석기인들이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멀리서 보이는 문암리유적.

문암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

마을 남쪽 백도항으로 가는 길. 유적지에서 3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 사람들이 어로생활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백도항.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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