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8해,신시배달5919해 단기 4354해,서기 2021해, 대한민국 102해(나뉨 73해),

양양오산리선사유적/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댓글 0

환국시대/고고학

2019. 7. 24.

양양오산리선사유적(襄陽鰲山里先史遺蹟)선사문화문화재 | 유적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   시도기념물.

 

양양 오산리 유적

분야선사문화유형문화재유적시대선사-석기지정기관강원도지정부류시도기념물지정번호제62호

정의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시도기념물.

 

개설

1977년 봄에 이 곳의 흙을 파다가 호수를 매몰,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다량의 석기·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조사팀이 모두 6차에 걸친 지표 조사를 실시했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3권의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었다.

내용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사구(砂丘)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사구는 쌍호의 북동 모서리 부분의 제방이기도 하다. 유적의 범위는 약 6,000㎡로 추정되는데, 이제까지 600㎡를 발굴하였다.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생토면까지의 깊이는 약 4.5m로, 모두 6개의 자연 층위가 나타났다. Ⅰ층은 청동기시대의 적갈색 무문토기·점토대토기·우각형손잡이, Ⅱ층은 첨저형 빗살무늬토기, Ⅲ층은 평저형 유문·무문양토기, Ⅳ층은 유물무포함층, Ⅴ층은 평저형 토기·융기선문토기, Ⅵ층은 유물무포함층이었다. 그런데 유적의 극히 일부에만 있는 Ⅰ층의 청동기시대층을 제외한 나머지는(Ⅳ층과 Ⅵ층은 유물무포함층)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청동기시대인 Ⅰ층은 암황갈색 점토층으로 두께는 약 40㎝이다. 이 층은 전체 유적 중 극히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유기물이 많이 섞여 있다. 적갈색 무문토기, 점토대토기 및 우각형손잡이가 출토되었다. 이들과 함께 채집된 목탄시료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2070∼1510년(수륜보정)의 연대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Ⅱ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20∼65㎝이다. Ⅰ층이 남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Ⅱ층이 표토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관계로 후세에 교란된 곳이 많다. 여기서는 서해안 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형태인 첨저형(尖底形)이 출토된다. 토기 표면에는 구연부 및 기복부에 시문한 것이 많은데, 양 부위에 서로 다른 문양요소로 시문한 것과 같은 문양으로 시문한 것이 있다.

 

전자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사격자문·조대문(組帶文) 등으로 시문하고 그 밑의 기복부에는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후자는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주체를 이룬다. 태토(胎土)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 석면(石綿)을 혼입한 것도 있다. 반출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자갈의 양단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가 있다. 이렇듯 토기·석기의 여러 특징에는 서해안과 공통점이 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Ⅲ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약 30㎝이다. Ⅱ층과는 두께 약 5㎝의 흑색 사질의 간층(間層)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있다. 토기의 기형은 예외 없이 평저형인데, 저부에는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들 토기에는 유문양토기와 전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문양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 많다. 유문양토기편 중에는 동부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유문양토기와 함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 한 개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하층인 Ⅴ층은 다시 7개의 소층(小層)으로 세분된다. 여기서는 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지름 6m 정도의 원형 주거지 안에는 70×70㎝ 크기의 사각형 노지(爐址)가 한두 개씩 있고, 다수의 평저형토기 및 소량의 융기선문토기, 그리고 돌로 만든 생활 도구류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형은 모두 평형을 기본으로 한다. 좁은 저부에 비해 몸체 부분이 넓은 발형토기(鉢形土器)가 대부분이며, 옹형(甕形) 또는 호형(壺形)의 토기도 있다. 시문은 구연부위에 국한하였다. 문양의 시문수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압날문(押捺文)의 경우 점문(點文)이, 음각문(陰刻文)의 경우 종위평행단선문(縱位平行短線文)이, 압날문과 음각문이 혼합된 경우 이들 두 문양 요소의 결합 형태가 각각 주체를 이룬다. 토기의 표면은 마연에 의한 조정으로 광택이 난다. 석기로는 결합식조침(結合式釣針)·톱·사각형석도·흑요석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어업 관련 도구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어업에 커다란 비중을 둔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Ⅴ층의 각 소층에서 채집한 목탄시료 7개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6000∼5000년 사이로 나와 이제껏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인다. 한편, 이 곳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를 형광 Ⅹ선 분석 결과 그 원석(原石)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그 곳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층서관계·출토유물·방사성연대 측정결과 등을 통해 오산리 신석기하층(Ⅴ층)은 한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신석기 문화 단계임이 밝혀졌으며, 동한 평저형 토기문화가 서한 첨저형 토기문화에 선행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서포항유적과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기원 해명 및 주변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력한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집필 (1996년)임효재|강성봉

관련 멀티미디어 (9)

  • 양양 오산리 유적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얼굴 모양 토기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추형 석기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돌괭이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발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석도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어구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숫돌

  • 양양 오산리 유적 출토 무문

 

출처;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C%96%91%EC%98%A4%EC%82%B0%EB%A6%AC%EC%9C%A0%EC%A0%81&ridx=0&tot=3129

 

 

 

오산리 유적(襄陽 鰲山里 遺蹟)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으로, 남한에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값으로는 최고치(最古値)를 나타내어 각광을 받은 유적이다. 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모래언덕(沙丘) 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쌍호??라고 불리우는 호수가 있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고 3권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 호수를 메우기 위해 모래를 파서 50m 가량 되는 언덕의 가운데 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약 6,000㎢ 범위의 유적지는 두 쪽으로 나뉘는데, 모래언덕의 동쪽부분이 오산리 A, 서쪽이 오산리 B지점이다.

 

오산리 유적은 6차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11기의 집터와 소할석 및 돌무지 유구 7기, 다량의 석기와 토기들이 드러났다. 퇴적층위는 6개로 구분되는데 1층은 암황갈색 찰흙층이며 청동기시대층이다. 2층은 황갈색 모래질층이며 서해안식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나 많이 교란되었다. 3층은 암갈색 모래질층이며 이때부터 납작밑토기가 나온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5층은 A?B지구에서 다 나타나며 7개의 색깔이 다른 층으로 세분된다.

 

1층은 적갈색 민토기, 덧띠토기, 결합식 쇠뿔모양 손잡이 등이 나오는 청동기시대의 층이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는 3360±180 B.P.로 나온 값이 있다. 2층(제 3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층으로서 서해안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 납작한 강자갈의 양쪽 끝을 떼어내어 만든 그물추 등이 나온다. 3층(제 2문화층)에서는 원형천막과 같은 임시시설의 굄돌로 생각되고 있는 석렬(石列) 1기가 확인되었으며, 토기?석기 등에서는 아래 5층(제 1문화층)의 출토양상과 거의 같다. 특이한 것으로는 흙으로 빚은 사람얼굴이 있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얼굴 모양을 상징한 예술품으로는 이 오산리의 것 이외에 동삼동의 국자가리비, 서포항의 뼈 조각품 등이 있을 정도로 희귀한 예이다.

 

제1문화층은 여러 층으로 세분되나 유물상으로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으로나 큰 차이를 찾을 수 없어 일괄로 서술한다. 모두 11기의 집터가 드러났는데 둥근꼴이며 집안에는 사각형의 화덕자리(爐址)가 1~2개씩 있다. 집자리는 대부분의 경우 바닥만 찰흙으로 다졌을 뿐 기둥구멍이나 벽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움집이 아니라 지상가옥이며, 맨바닥 위에 가운데로 기울어진 기둥을 세워 중앙의 받침기둥이 없이 엮어 지붕을 씌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9호 집자리 같은 경우 찰흙으로 다진 바닥이 아니라 화덕자리가 가장자리에 환형(環形)으로 깔리고 화덕자리에서 불에 탄 흙이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B-1호 집자리도 찰흙다짐이 없다. 집의 크기는 평균지름이 6m 정도이며 지름 3m 정도인 경우 저장고나 부속시설로 보고 있다. 집안의 작업공간 분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정한 범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소할석 및 적석유구 7기가 나왔다.

 

제1문화층에서 나온 석기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묶음낚시로서 70점(큰 것은 길이 10㎝정도)이 나왔으며 그밖에 그물추, 돌도끼, 돌칼, 화살촉, 돌창, 돌톱, 추모양 석기, 숫돌 그리고 돌감이 나왔다. 묶음낚시는 낚시 허리부분의 아래쪽이 급하게 휘어져 있고 이 부분에 바늘이 연결되어 낚시의 기능을 발휘하는 도구인데 동삼동, 서포항, 상노대도, 일본의 서북구주지방 등 바닷가의 조개무지(貝塚)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묶음낚시는 흔히 큰 물고기를 잡는데 썼다고 말해지며, 하나로 연결되는 낚싯바늘에 비해 물고기가 물렸을 때 분리되어 파손되지 않으며 또 낚시의 바늘부분은 뼈나 나무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이곳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추모양 석기는 윗부분에 줄을 맬 수 있도록 홈이 파이고 한쪽 면이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던지는 도구의 앞부분에 묶어 썼던 것이 아닐까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 계열로 성분분석되었는데 비교자료가 없다는 점에서는 성급한 결론이나, 적어도 신석기시대 교역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문화층의 토기들은 대다수가 납작밑(平底) 토기이며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조금 나왔다. 토기의 모양은 좁은 밑에 몸체가 매우 넓은 발형(鉢形)이 대부분이나, 독 또는 목단지도 있다. 무늬는 주로 입술 주위에만 베풀었는데 찍은 무늬(押捺文)가 가장 많고 새김무늬(陰刻文)일 경우에는 평행한 단선문이 베풀어지며 2가지 수법이 결합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식은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서포항 1?2기층과 통한다. 토기 겉면을 갈아서 윤이 나는 토기가 많다.

 

오산리 유적 발굴의 첫째 의의는 서포항 유적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서 중요한 신석기시대 유적을 찾아내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재까지로는 오산리 유적이 한국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이러한 납작밑의 찍은 무늬 위의 제3문화층에서 서해안식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들이 나와 이른바 동한식(東韓式)의 오산리토기가 서한식(西韓式)에 선행함을 알아낸 점이다. 넷째 오산리 유적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잡을 때 이는 현재 북한의 시기구분과 근접한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석기시대의 상한을 B.C. 6000년으로 상향조정하고 있으며 미송리 유적과 더불어 북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 유적의 하나로 꼽히는 서포항과 오산리 유적과의 문화적 유사성은 진작부터 지적되어 오던 바이다.

 

오산리 유적은 서쪽과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한천산 줄기의 계곡이 갑자기 평탄해지는 낮은 개활지의 사구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강한 바람이 부는데, 이러한 입지가 오산리의 층위와 연대문제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퇴적층의 기본 토양은 고운 모래(fine sand)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적에는 매우 강한 바람이 규칙적으로 불어오고 있으니 오산리의 층위는 계속 교란되거나 재퇴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유적의 층위와 시기구분을 확신할 수 없는데, 한편 방사성탄소연대값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나와 논의의 소지가 크다. 이러한 문제는 유물의 편년과 절대연대측정, 자연지리적 환경에 대한 퇴적학, 지질학적 고찰 등을 아우른 종합적 연구를 통해 해결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 유적의 연대에 대해 제1문화층의 여러 층에서 채집한 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10개의 탄소연대 값이 나와 있는데 1호 집터의 7120±700 B.P.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대부분의 연대들이 7000~6000 B.P. 사이에 나오고 있다.

 

참고문헌

오산리 토기의 연구(김장석, 서울대학교석사학위 논문, 1991),

오산리유적 1?2?3(서울대학교박물관, 1984?1985?1988)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출처;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592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학포길 33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중의 한 곳이다.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호숫가의 모래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977년 농경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모래언덕을 파서 이 호수를 매립하던 중 발견되어, 1981년부터 6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하여 14기의 원형집터와 소활석 및 돌무지 유구, 다량의 석기와 토기를 발굴하였다. 특히 흙으로 만든 인면상은 신석기 시대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상징한 예술품으로 희귀한 예로 일컬어진다. 

 

또한 출토유물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오산리 유적지가 B.C. 6000년 경의 유적으로 확인되어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유적지로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기원 해명 및 동아시아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어 사적394호로 지정되었다. 

 

내부 전시실에는 국내 최초로 실물크기의 선사유적 디오라마 모형을 이용하여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고 영동지역의 선사문화 유물을 전시하였다. 유적전시실은 도입부, 개관, 오산리선사이야기, 오산리 발굴유물 이야기, 남대천 이야기, 맺음 등 6개로 나누어 관람하게 되어 있으며 마지막의 맺음 부분에서 토기조각 짝맞추기등 체험을 통하여 선사 시대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출처;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1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