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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 옛집굴뚝43] 경북 경주② 양동마을 옛집 굴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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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0.


마루 밑 '쌍굴뚝', 이것은 파격이다

김정봉 입력 2019.11.30. 11:30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43] 경북 경주② 양동마을 옛집 굴뚝(1)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경주를 적시고 북으로 내달린 형산강은 경주 안강에 이르러 동북으로 방향을 바꿔 포항으로 흘러간다. 안강평야를 재원으로 안강에 양동마을이 들어섰다. 형산강 줄기에 들어선 제일의 조선마을이다. 하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씨족마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 양동마을 안골 정경 서백당이 있는 안골 정경이다. 여러 겹 능선과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라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골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 김정봉
 
두 성씨의 집성마을, 양동마을
 
양동마을 생김새는 독특하다. '勿'(물)자 모양으로 뻗은 설창산 네 줄기 능선과 골짜기 따라 집들이 들어섰다. 주로 양반계급의 종가나 기와집들은 지대가 높은 곳에 들어섰고 일반 민가나 외거노비의 초가집들은 골짜기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여기까지 양동마을 중에 북촌에 해당하고 설창산 앞산 성주산 줄기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다. 앞산, 뒷산, 산등성, 골짜기 가리지 않고 산주름 따라 집들이 꽉 들어찬 엄청난 마을이다. 마을을 구석구석 다 둘러볼라치면 몇날 며칠을 여기서 보내야 한다.
 
▲ 양동마을 정경 낙선당에서 수졸당뒷동산 쪽을 바라다본 정경이다. 골짜기를 비집고 초가집이, 능선을 타고 기와집들이 들어섰다.
ⓒ 김정봉
   
마을의 생성과정은 마을 생김새보다 더 복잡하다. 양동마을은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두 성씨의 씨족마을이다. 고려말 여강이씨 이광호가 양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손자사위 유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손씨 손소(1433-1484)가 유복하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눌러앉았다.
 
다시 이광호의 5대손인 이번(1463-1500)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려 두 성씨가 양동마을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중기까지 결혼풍습은 '시집가기'보다는 '장가들기'여서 처가마을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은 하나 이상히 볼 필요는 없다.
 
이후 손씨집안에서는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을, 여강이씨 집안에서는 이번의 장남 회재 이언적(1491-1553)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우재는 회재의 외삼촌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인 회재에게는 스승이나 다름없었지만 인물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난 인물이었다. 우재와 회재 이후 두 집안의 후손들이 벌고 벌어 양동마을에서 양대 문벌을 형성하였다.
 
두 집안의 집짓기 경쟁
 
한마을에 두 집안이 몰려 살다보니 서로 협동하고 혼맥을 맺는가 하면 두 집안 사이에 라이벌의식이 있어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는 집짓기경쟁으로 나타났다.
손씨집안 집들로 종갓집 서백당이 있고 살림집으로 관가정과 낙선당이 있으며 정자로 수운정과 서당 안락정이 있다. 이씨집안의 주요 집들로 종갓집 무첨당, 살림집으로 향단, 수졸당고택, 이향정고택, 두곡고택, 근암고택, 상춘헌고택이 있으며 서당으로 강학당과 심수정 정자가 있다.
 
▲ 서백당  안골에 입향조 손소가 지은 월성손씨 종가다. 조선 초에 지어진 몇 안 되는 집이다. 우재와 회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집이다.
ⓒ 김정봉
    
▲ 무첨당  여강이씨 종가의 큰 사랑채 격의 별당이다. 조선중기의 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김정봉
 
두 집안의 경쟁 심리는 집 짓는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손씨집안 손소는 1458년 마을 제일 깊숙한 안골 언덕에 대종가 서백당(書百堂)을 지었다. 이어 이씨집안은 서백당 구릉너머 물봉골 동쪽언덕에 무첨당(無?堂)을 지어 이씨집안의 종가로 삼았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동산이 물봉동산으로 물봉동산 자락에 두 집안의 인물 우재와 회재는 관가정(觀稼亭)과 향단(香壇)을 지었다. 두 종가에 이어 지은 살림집이다. 관가정은 우재가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향단은 1540년대에 회재가 짓고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줘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두 집은 양동마을 살림집의 백미로 뽑힌다.
 
건축가 김봉렬 교수는 관가정은 장식이 거의 없이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며 예술적 사조로는 고전주의적 건축물이라 했고 향단은 화려하고 개성이 넘치는 낭만주의 건축물로 조선시대 살림집 중에 독창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비탈면에 들어선 향단은 만개한 연꽃처럼 화려하여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 향단  마을 어귀 비탈에 지어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잘 띈다. 과시적이며 개성이 넘치고 독창적이고 화려한 집이다.
ⓒ 김정봉
 
향단을 지을 즈음 손씨집안은 1540년경 서백당 옆에 낙선당(樂善堂) 고택을 지었다. 손소의 셋째아들 손숙돈이 분가하며 지은 집이다. 천석꾼 집답지 않게 평대문에 기단을 낮게 한 겸손한 집으로 양동마을에서 제일 고졸한 맛이 난다.
 
이에 대해 이씨집안은 17, 18세기에 봇물의 물살처럼 빠르게 살림집을 선보였다. 1616년 안골서쪽 언덕에 수졸당고택을 짓고 1695년에 이향정고택, 1730년에 상춘헌고택, 1733년경에 두곡고택, 1780년경에 근암고택, 1840년 사호당고택을 차례로 지었다.
 
경쟁에서 정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씨집안이 1560년경 마을에서 제일 큰 심수정을 짓자 손씨집안은 1580년 우재의 손자 손엽이 마을 북쪽 끝 으슥한 곳에 수운정을 지었다. 두 집안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주산 자락에 손씨집안은 1776년 안락정을 짓고 이씨집안은 백년 뒤 1870년경 강학당을 지어 두 가문의 후손을 양성하였다.
 
월성손씨 집안의 절제된 굴뚝
 
손씨집안 굴뚝은 한옥조형의 근간을 이루는 은둔과 겸손, 배려의 고전적 원리가 지배한 절제된 굴뚝이 많다. 관가정 사랑채 굴뚝은 그 중 하나다. 기단을 자세히 보면 시커멓게 그을린 여러 개 구멍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궁이와 굴뚝이다. 굴뚝 중에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나란하게 있는 되돈고래 굴뚝이다. 청백리 집주인의 품성에 어울리는 절제된 굴뚝이다.
  
▲ 관가정굴뚝  높다란 사랑채기단에 검박한 되돈고래 굴뚝을 설치하였다. 청백리인 집주인의 검소한 성품이 엿보인다.(관가정은 공사중이어서 마을전시관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 김정봉
 
되돈고래 굴뚝은 수운정에도 있다. 수운정 정면 아래에 아궁이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굴뚝이 숨은 듯 붙어 있다. 수운정은 수운청허(水雲淸虛)에서 왔다. 잡된 생각이나 욕심을 버려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수운정 뒤꼍 토방에 있는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굴뚝은 수운청허의 마음 그대로다.
  
▲ 수운정 굴뚝 수운정 뒤꼍은 자잘한 멋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수키와 두 개를 포개 만든 거북머리 닮은 굴뚝이다.
ⓒ 김정봉
   
▲ 서백당 굴뚝 담에 딱 달라붙어 있어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집에서는 군더더기 취급당한다.
ⓒ 김정봉
 
손씨집안은 굴뚝을 감추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굴뚝을 감쪽같이 담에 붙여놓아 정말 찾기 어렵다. 집주인이 '짓궂게' 보일 정도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서백당 집에 굴뚝은 그저 군더더기에 불과했나 보다.
 
낙선당 굴뚝은 손씨집안 굴뚝이라도 좀 다르다. 원리원칙에 순종하여 절제를 하였지만 개성이 넘친다. 눈에 거슬리지 않은 평대문 아래에 연노랑 굴뚝이 있다. 양쪽 연구(煙口)가 살짝 튀어나와 사람을 보고 눈만 깜박거릴 뿐 달려들지 않는 순한 개 모양 굴뚝이다.
  
▲ 낙선당 굴뚝 평대문에 어울리는 순한 개 모양의 굴뚝이다.
ⓒ 김정봉
 
여강이씨 집안의 독창적 굴뚝
 
여강이씨 굴뚝은 과시적이거나 독창적이다. 우선 두곡고택 마루 밑에 있는 '쌍굴뚝'은 파격이다. 향단을 지은 선조의 낭만적 사고를 이어 받았는지 집주인은 미적 감성을 발휘하여 독창적인 굴뚝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다녀보았어도 이런 종류의 굴뚝은 처음 보는 것이다.
  
▲ 두곡고택 굴뚝 마루 밑에 숨겨 놓았지만 이 고택의 굴뚝은 개성이 강한 쌍굴뚝이다. 향단을 지은 낭만적 사고가 후손으로 이어진듯하다.
ⓒ 김정봉
 
근암고택 사랑채굴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집 사랑채는 보기 드물게 안채 담 밖에 떨어져 있다. 이는 집주인의 남녀유별 생활관이 작용된 결과로 보인다. 집주인의 두둑한 배포를 과시하며 사랑채 한가운데 곧게 서 있는 굴뚝은 이곳이 남성공간임을 세상에 밝히고 있다.
 
무첨당 굴뚝도 평범해 뵈지 않는다. 대충 마무리 하지 않고 항아리로 연가(煙家)를 만들어 멋을 냈다. 향단 굴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 있는 위치가 기가 막히다. 독창적이고 과시적이며 화려함을 추구한 향단에 어울리게 남보란 듯이 굴뚝을 향단 맨 위 후원언덕에 세웠다.
 
▲ 근암고택 사랑채굴뚝 전체적으로 집은 소박하나 사랑채굴뚝은 대단히 과시적이다.
ⓒ 김정봉
    
▲ 향단굴뚝 검박함과 거리 멀고 과시적이며 독창적인 향단에 어울리게 숨기지 않고 굴뚝을 후원 언덕에 세워놓았다.
ⓒ 김정봉
 
두 집안의 굴뚝은 남의 눈을 의식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랄까, 손씨 집안은 남의 눈을 의식하여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굴뚝을 만들어도 절제하고 야단스럽지 않게 만든 반면, 이씨 집안은 대체적으로 과시적이면서 독창적이며 개성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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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관가정은 공사중이어서 관가정 굴뚝 사진은 마을전시관사진을 재촬영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