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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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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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출현~1만년전/현생인류-만주와 한반도

2019. 12. 18.

 

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 기자 입력 2019.12.03. 06:03 

[경향신문]

청주 소로리 2토탄층에서 확인된 볍씨. 연대는 대략 1만2000~1만5000년전으로 측정됐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조충소기(彫忠小技)’ ‘우인절적 국제대완소(愚人節的 國際大玩笑).’ 한 중국 고고학자(류지이·劉志一)가 2003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대략 1만5000년전으로 연대측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내뱉은 촌평이다.

■조충소기, 국제적대완소?

‘조충소기’는 ‘벌레를 새기는 보잘 것 없는 솜씨’라는 뜻으로 남의 글귀를 토막토막 따다가 맞추는 서투른 재간을 일컫고, ‘우인절적 국제대완소’는 ‘만우절(우인절)의 국제적인 웃음거리’라는 뜻이다. ‘벼농사의 시원=양쯔강(양자강) 유역’설을 믿어온 중국학계가 ‘벼농사의 기원=청주 소로리’라는 소식이 들리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아무리 중국학자라 해도 명색이 고고학자라는 이가 자국의 학술지 논문에서 ‘한국 학자들이 국제적으로 장난쳤다’는 등의 원색비판을 서슴치않은 것은 과연 올바른 태도였을까.

■‘비닐이 나왔다는 거야’ 뒷담화의 후유증

비단 중국학계만이 아니다. 1997년 11월 우연치않게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위기와 함께 시작된 충북 청원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은 시작부터 파란만장했다. 100일에 맞춰진 발굴기간에 쫓기던 조사단 중 충북대 발굴지역에서 심상치않은 유물이 나왔다. 그곳에서 확인된 2매의 토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에서 127톨의 볍씨와 곤충화석, 그리고 각종 식물자료를 찾아냈다. 그런데 볍씨 등이 집중 출토된 확인된 토탄층의 연대측정결과가 놀라웠다.

미국의 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과 서울대 가속기질량분석시스템(AMS)연구실에 같은 시료를 교차검증을 의뢰했더니 자그만치 1만2890년전~1만4090년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국내 주류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뭐 ‘벼농사의 기원=중국’설을 믿어온 국내 학계에서도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1만5000년전 이전의 볍씨가 한반도 청주에서 나타났다는 소식에 당황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발굴 자체에 대한 회의감은 도에 지나쳤다. 문화재를 처음 담당한 필자의 귀에 들렸던 수근거림도 기가 막혔다. ‘들었어? 소로리 유적의 토탄층에서 비닐이 나왔다는 거야.’

무슨 말인가. 고고학 발굴조사는 안정적인 층위에서 이뤄져야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데 1만5000년전 볍씨가 출토됐다는 토탄층에서 비닐이 나왔다면 층위가 뒤집어졌다는 뜻이고, 현대의 볍씨가 비닐과 함께 토탄층에 혼입되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수근거림은 소로리 유적을 근본부터 불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시대 유적이든 선사시대 유적이든 ‘비닐이 섞여나왔다’는 이야기를 나온다면 그런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비닐’ 이야기가 나왔을까.

소로리 볍씨의 성격을 두고 몇가지 의문점을 던진 논문(‘청원 소로리 토탄층 출토 볍씨 제고’, )을 쓴 안승모 전 원광대 교수도 ‘비닐설의 유포’를 완곡하게 비판했다. “발굴 당시 볍씨가 출토된 구역에서는 3.3m 깊이로 토목공사를 위해 주변 저지대를 매립한 인위적인 성토층이 있었다”는 것이다. 안승모 씨는 “아마도 ‘비닐’ 운운한 이는 이 성토층에서 나온 비닐을 토탄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좋게 말해 착각이지, 나쁘게 말한다면 악의적인 공격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공격이 통한 탓인지 1998년 문화재위원회는 볍씨가 출토된 ‘토탄층의 보존안’을 일축했다. 요즘으로 치면 근거없는 악플(비닐 운운)로 죄없는 사람(유적)이 죽는 꼴이 된 것이다. 안승모씨는 “그때 제대로 보존해서 조사했더라면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런 판국이니 필자 같은 비전문가는 ‘비닐’ 이야기 때문에 소로리 유적을 백안시할 수밖에 없었다.

■토탄에 박힌 볍씨의 연대

하지만 소로리 유적의 토탄층 연대측정 결과는 층위상 안정적이다. 가장 오래된 시기층인 밑부분 토탄층은 1만6890년전이고 그 위부터 1만6340년전~1만4090년전~1만3750년전~1만2890년전~9510년전~8800년전 등의 순서이다. 볍씨가 가장 많이 나온 2토탄층의 연대는 1만2500년전~1만4820년전이었다. 맨밑부터 위까지 시기가 차근차근 올라간다는 것은 지층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의미한다. 즉 현대에 제작된 비닐이 1만5000년전의 토탄층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볍씨’가 1만5000년전에 쌓인 토탄층에 혼입될 수 없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으니 토탄층에 박힌채 출토된 ‘고대볍씨’ 그 자체의 연대측정이 필요하다고 권유했다. 이에따라 조사단을 이끈 당시 이융조 충북대 교수(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는 ‘토탄에 박힌 볍씨’를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AMS연구실에 보냈다. 그 결과 1만2550년전(토탄)과 1만2520년전(볍씨)이라는 연대가 나왔다. 이것은 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결과(토탄 1만2900년전, 유사벼 1만2500년전)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융조 교수는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소와 애리조나대와 서울대 AMS 연구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국내외4개 연구기관에서 흙과 볍씨, 토탄 등을 시료로 해서 교차검증해보니 동일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이는 토탄 퇴적 층위가 매우 안정적이며, 볍씨들이 바로 그 원위치에서 출토되었음을 일러주는 것이다.

■1만5000년전 자포니카

그렇다면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는 요즘의 볍씨와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서울대 허문회 교수(2010년 작고)는 소로리 출토 볍씨(127톨)을 분석한 결과 기원벼(18톨)와 유사벼(109톨)로 나누었고, 기원벼를 다시 자포니카형(17톨)와 인디카형(1톨)로 구분했다. 허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졌던) 고양 가와지 볍씨(5200년전)와 크기 및 모양이 비슷하며 현재 재배종에 비해 벼알의 어깨쪽이 약간 좁고 가운데에서 끝쪽으로 약간 굵게 보인다”는 관찰기록을 남겼다. 이미 이 시대에도 이른바 자포니카형, 즉 단립형 벼를 선호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융조 교수는 “사람들의 입맛이 작은벼(자포니카형)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이미 가와지 1형(5000년전)과 2형(3000년전) 볍씨에서도 보인다”면서 “소로리 볍씨 단계에서 이미 작은벼(자포니카형)에 대한 기호현상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벼의 진화과정과 연결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해석했다. 이융조 교수는 “또 볍씨의 DNA 구조를 분석해봤더니 소로리벼는 야생벼에서 잡초벼, 인디카, 자포니카 등이 분화되는 원시형 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소로리 볍씨는 현대벼와는 완전히 다른 그룹이다.

■1만5000년전 구석기인의 벼수확 흔적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이른바 ‘소지경(小枝莖·줄기에 붙어있는 부분)’의 관찰기록이다.

곡물의 순화, 즉 야생→재배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변화는 야생형에서는 벼알이 완전히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지만 재배벼에서는 그대로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레 떨어진 부분 즉 탈립면에는 원형의 매끄러운 흔적이 남는다. 반면 순화형 벼의 경우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달려있다가 인간의 수확행위로 잘리게 된다, 그 경우 잘린 단면은 매우 거칠게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 박태식 박사(농총진흥청 작물시험장)이 소로리 볍씨 가운데 소지경 분석이 가능한 볍씨 13톨을 분석했더니 그중 4톨에서 아주 유의미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즉 소지경이 매우 울퉁불퉁 거친 상태로 잘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도구로 수확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침 볍씨가 출토된 문화층에서는 사용흔적이 관찰되는 홈날연모가 나왔다.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사람들이 이 홈날연모를 써서 다 익은 벼를 수확한 뒤 먹을거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볍씨가 토탄층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그렇다면 소로리 볍씨는 1만2000~1만5000년전 인간의 먹이얻기로 남겨진 유체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볍씨가 출토된 시대의 기후는 어땠을까. 볍씨가 많이 출토된 2토탄층의 화분 분석 자료는 ‘상대적으로 온난 습윤한 저습지에 형성된 토탄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나무분석 자료를 봐도 오리나무-밤나무 류의 낙엽활엽수가 주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던 알레뢰드/뵈링 간빙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뽕사관의 산물인가?

이 ‘소로리 볍씨’는 국내 주류 학계의 냉대와 외면 속에 발굴·연구자인 이융조 충북대 교수 등의 동분서주로 국제학계에 알려졌다. 2003년 BBC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가 발견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과학자들이 소로리에서 가장 오래된 순화벼(domesticated rice)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소로리’ 관련 기사는 이후 르몽드 등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융조 교수에 따르면 고고학 개론서인 <Archaeology> 제4판(2006년)에 ‘중요한 식량과 짐승종들이 처음으로 순화된 위치’가 담긴 세계지도를 첨부하면서 ‘한반도 청주 부근에 쌀그림’을 표시해두었다. 그 책에는 ‘최초로 순화된 동식물과 전세계 문화발전 편년표’를 작성하면서 ‘벼=한국 1만3000년전’이라 했다.

과문한 필자는 ‘청주 소로리 볍씨=세계 최고(最古)의 재배벼’라는 주장이 100% 옳은지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소로리 볍씨’의 연구·발표 단계에서 ‘검증이 완료되지 않는 가설단계의 내용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시쳇말로 ‘국뽕 사관’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소지경’과 관련해서도 탈립면(잘린 부분)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인간의 수확행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하는 주장도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짐승이 볍씨를 따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벼농사의 기원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려면 고고학적으로 연속적인 성과물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소로리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약점도 있다. 즉 중국의 경우 소로리와 비슷한 연대의 벼 유적인 중국 후난성(湖南省) 유찬얀(玉蟾岩) 동굴을 비롯해 허무두(河姆渡) 유적(7000년전)까지 벼농사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만5000년전(소로리)와 5000년전(고양 가와지) 사이에 무려 1만년의 공백기가 있다. 소로리 단 하나의 에피소드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벼농사의 기원·발전을 언급할 때 하나의 약점일 수 있다.

1만5000년전 무렵이면 지금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육지로 붙어 있었다. 따라서 소로리 벼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양쯔강 유역 등지에서 동물(철새)이나 사람(수렵민)에 의해 운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관련, 이융조 교수는 벼농사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국학자 옌원밍(嚴文明)의 ‘벼농사 다중기원설’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벼농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곳저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소로리도 그런 지역 중 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소로리 만이 벼농사의 기원지로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재배단계 초기 농경 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던 순화벼(domesticated rice)라고 해석되며 순화초기단계로 볼 수도 있다”고 밝힌다.

■소로리 볍씨의 과제

‘소로리 볍씨’를 정리해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일단 소로리 토탄층과 볍씨의 연대가 1만2500년전~1만5000년전으로 측정된다는 것이 눈에 띈다. 국내외 4개 기관(서울대·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오크론 연구소·애리조나주립대) 등에서 얻은 연대측정 기록이라 한다.

토탄층 연대가 미심쩍다 해서 토탄층에 박힌 볍씨 연대를 직접 측정했고, 그 결과가 같다면 믿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연대측정을 교차검증한 결과 각 층위별로 안정적인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로리 볍씨는 벼농사 기원논쟁의 차원을 떠나서도 그 자체, 즉 ‘1만5000년전의 볍씨’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소로리 볍씨’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그러나 정작 학술논문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사실상 단 한 연구자(안승모 전 원광대 교수)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저 뒷담화 수준이다. ‘소로리 볍씨’가 그렇게 미심쩍다면 안교수처럼 논문으로 제기해야 학문 하는 이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소로리 볍씨=1만5000년 전의 볍씨’가 맞다해도 과제는 남아있다.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찾아내는 것이다. 1998년 ‘소로리 토탄층의 보존’을 일축해버린 문화재위원회의 처사가 두고두고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청주시 소유지가 된 보존지역이 약간 남아있지만 다른 공장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토탄층 발굴은 쉽지 않다. 적어도 10~15m 이상의 깊이에 200㎡(10×20m) 면적을 발굴하기는 턱없이 좁다. 이융조 교수는 “폐교된 인근 소로분교를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소로리 주변 지역의 농지에 대한 학술발굴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또 안승모 교수는 “소로리와 비슷한 중부지역 토탄층에서 학술발굴이 계속 이어져서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닌게 아니라 달랑 소로리 한 곳의 자료 뿐이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소로리와 비슷한 환경의 다른 지역 토탄층들을 발굴해서 관련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만 보면 남의 발굴 성과를 두고 뒷담화만 할 게 아니라 볍씨와 벼농사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확보하는 것이 학자들의 자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일단 이렇게 정리해두고 싶다. 어느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1만5000년전 볍씨가 나타났다고 해서 백안시할 게 아니다. 다른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로리 단계의 토탄층 발굴을 해보고 나서야 이러쿵저러쿵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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