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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⑤'닮은 꼴' 조선·고려 정종, 왕릉 보존상태는 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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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고려(고리)

2020. 4. 16.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⑤'닮은 꼴' 조선·고려 정종, 왕릉 보존상태는 판이

등록 2020-02-01 06:00:00  |  수정 2020-02-24 11:14:23

 

조선 후기부터 전혀 관리되지 않아
옥수수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방치
잘 보존된 조선 왕릉과 비교돼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5회. 서경(西京) 천도 시도하다 좌절한 정종의 무덤 안릉(安陵)


혜종이 945년 사망하자 그해 9월에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인 왕요(王堯)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 3대 임금 정종(定宗)이다. 그러나 그는 949년 재위 4년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종은 동생 왕소(王昭)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제석원(帝釋院)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왕식렴(王式廉, 태조의 사촌 동생)이 사망한 직후의 일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두 사건을 연결해 정종의 사망에기록되지 않은 흑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정종은 고려 도성의 남쪽에 안장됐다. 현재의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이다. 능호는 안릉(安陵)이다. 후에 첫 번째 왕비인 문공왕후가 부묘(廟)됐다. 안릉동이라는 이 곳 지명은 안릉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20대 신종의 무덤인 양릉(陽陵)이 있다.

[서울=뉴시스] 서쪽에서 본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安陵) 전경. 능 위쪽까지 옥수수밭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정종의 안릉(왼쪽)과 현재 안릉의 모습.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표식비가 없어진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북한은 안릉을 보존유적 552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지만 1910년 안릉 사진과 비교해 보면 묘역 주변의 나무들이 거의 다 베어졌고, 바로 옆까지 옥수수밭으로 개간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비석(위 왼쪽 사진의 맨 오른쪽에 있는 비석)도 사라졌다. 다만 1995년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봉분을 세우고, 두리뭉실하게 병풍석을 둘러쳤다. 이 때문에 원래 있던 12각 병풍석의 원모습을 알 수 없게 됐다.

안릉의 묘역은 3단으로 직선거리는 31.5m이다. 1단은 한 변의 길이가 20m인 정방형이며, 거기에 봉분과 병풍석시설, 난간 부분, 돌짐승조각상(돌사자) 등이 모여 있다. 2단은 1단보다 높이가 30m 낮으며 크기도 길이 17m, 너비 6.5m로 1단에 비해 좁다.   

3단은 길이 17m, 너비 5m이며 2단보다 20m 낮다. 오랜 세월 자연적인 피해와 인위적인 파괴로 1단과 2단만 석축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고, 정자각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최근 사진을 비교하면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표식비가 없어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 뒤쪽 전경. 안릉 주변이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고, 언덕 너머로 고남협동농장의 살림집들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의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도굴되고 훼손된 무덤 칸

197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무덤 칸(묘실)을 발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덤 칸은 완전히 지하에 있고, 봉분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무덤 칸의 크기는 남북 길이 347cm, 동서길이 343cm, 높이 240cm이다.

무덤 칸의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동, 서, 북쪽의 세 벽은 돌로 쌓고 회미장(석고로 벽을 마감)을 했으며 남벽에는 문틀을 겸하는 2개의 큰 판 돌을 세웠다. 천장은 한 단의 평행 고임 위에 3장의 판 돌을 동서로 올려 놓았다.

무덤 칸의 중심에는 큰 화강암을 잘 다듬어 만든 관대가 놓였다. 그 위에서 정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 조각이 일부 발견됐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고려자기와 금동자물쇠, 은 장식품, 청동 제품, 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청자꽃모양 바리와 청자 잔대는 고려청자 초기작품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여러 차례 도굴을 당해 중요 유물은 없었지만 무덤 칸 바닥에서 금은 부스러기 등이 나왔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고구려 벽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무덤 칸의 벽화다.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동쪽 벽의 풍경화와 남쪽 벽의 건물 그림, 천장의 별 그림이다. 동쪽 벽에는 푸른 왕대와 꽃나무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고, 천장의 별 그림은 붉은색으로 둥글게 그렸다.

별과 별 사이는 굵은 선으로 연결해 별자리를 표시하였다. 원래 28수의 별자리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여섯 개의 별뿐이라고 한다. 이런 별 그림은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아쉽게도 무덤 칸 내부 사진을 입수하지 못했다.

[서울=뉴시스]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남아 있는 석물들. 난간 석주와 동자 석주, 석수 등이 원래 자리에서 봉분 주변으로 옮겨져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남아 있는 사자상의 석수(오른쪽)와 봉분 주변의 난간 석주, 조선 후기에 세운 표식비 받침돌. 1910년대까지 왕릉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 비는 없어졌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이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세운 표식비. 현재 보존유적 552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경 천도 시도하다 단명(短命)

 「시무 28조」를 고려 성종에게 바쳐 정치 개혁을 이룩한 최승로(崔承老)의 회고에 따르면, 정종은 즉위 초반에 밤낮으로 좋은 정치를 위해 노력하여 밤에 촛불을 켜고 신하들을 부르기도 하고, 식사 시간을 미루어가며 정무를 처리했다. 정종이란 묘호(廟號)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고려 3대 정종은 조선의 2대 왕으로 같은 묘호를 받은 정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약하고, 친동생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는 상황에서 여러 측면에서 닮은 꼴 행보를 보였다.

우선 두 왕은 모두 왕권 강화를 위해 천도(遷都)를 시도했다. 고려 정종은 개경의 왕족과 호족을 견제하고,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지 세력인 왕식렴의 근거지인 서경(평양)으로 천도하려 했다. 이에 관해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정종이 도참(圖讖)을 믿어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다고만 서술했다. 정종의 서경 천도 준비는 많은 노역 수요를 발생시키고 개경 주민을 서경으로 이주시켜야 하는 등의 부담 때문에 반대가 컸고, 결국 정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서경 천도는 중단됐다. 조선 정종도 왕권 강화를 위해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으로 천도했으나 사망 후 다시 한양으로 도읍지가 옮겨졌다.

또한 두 왕은 모두 재위 중에 동생에게 양위(讓位)했다. 고려 정종은 재위 4년만에 동생 왕소에게, 조선 정종은 재위 2년만에 동생 이방원(李芳遠)에게 왕위를 넘긴 것이다.

두 왕은 묘호가 같아서인지 능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현재 조선왕릉 중 2개의 능이 휴전선 이북에 존재한다. 하나가 정종의 무덤인 후릉(厚陵)이고, 다른 하나가 태조 이성계의 정비이자 정종의 모친인 신의황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이다.

두 왕릉 모두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이들 두 왕릉은 고려 정종의 퇴락한 안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서울=뉴시스] 드론으로 촬영한 조선 2대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의 무덤인 후릉 전경.  후릉은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 황해남도 개풍군 백마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고, 정자각은 사라졌지만 혼유석, 장명등, 석수 등이 거의 원형 형태로 보존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사진9>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 백마산 능선에 자리 잡은 신의황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 전경. 정자각을 비롯해 조선 시대 왕릉의 요소들이 모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실권이 거의 없어 ‘허수아비 왕’이라고 불린 조선 정종과 달리 고려 정종은 훗날 최승로로부터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왕권강화책으로 천도를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단명하게 된 화근이 됐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인 모양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