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스크랩]고려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폭하

댓글 0

남국/고려(고리)

2020. 5. 5.

출처;다음 블로그 조작, , 축소된 대한 강역

http://blog.daum.net/elpaso57/8113438

고려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폭하

조작도 - 1832 년 청국에서 간행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일본으로 가져가 1865 년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위 황조일통여지전도에 보이는 만灣은 지금의 란하 최하류이며 준왕조선 시기인 서기전 195 년 경부터 요동군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의 대요수와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합쳐진 후의 물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조선의 서북쪽 국경선은 대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쪽 끝 지역을 흐르는 란하의 동쪽 지역에 있었다.

 

추정도 - 요수.개사수.고려 시기 압록강(서압록)

 

 

위 황조일통여지전도에 적색 실선으로 x 표시한 것과 같이 황하는 한 시기 대요수였으며 거란.요국 시기에 황하로 개칭되었는데 <청사고/지리지>에 의하면 발원지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청 직예성 승덕부 적봉현 북쪽을 지나 승덕부 조양현으로 흘러야 한다. 또한 한 시기 현토.요동 2 개 현을  염난수였었고 거란.요국 시기에 요하로 개칭된 물길의 하류로 흘러들어야 한다. 그런데 황하 중.하류를 동쪽으로 수평으로 뻗어 흐르는 물길로 조작하여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로 표시하게 되면 일반인들은 황하를 지금의 서요하로, 요하를 지금의 요하라고 속게 되는 것이다.     

 

고지도 - 1621 년 명국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위의 명국 지도에 청색으로 추기한 와 같이 요하는 발원지에서 오로지 남쪽으로만 흐르는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였으며 이러한 정황은 아래와 같이 조선에서 간행된 <백산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 - 조선 영조 26 년(1751)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가칭 <백산도>

 

 

 

한편 영액하는 한 시기 현토군 고구려현에 있는 요산에서 발원한다는 요수이며 청 시기에는 이 요수를 더 세분하여 설명하였는데 북쪽에서 발원하는 영액하와 남쪽에서 발원하는 소자하가 흥경을 지나 무순 남쪽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성경 심양 치소인 승덕현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결국 고려의 압록강은 청 시기의 渾河일 수 밖에 없고 이 혼하는 요하 하류로 흘러들어 갔다. 

 

추정도 - 서기전 75 년 시기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현토군 위치

 

 

 

이러한 연유로 <삼국유사/흥법>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해동고승전>에 순도와 아도가 북위에서 왔다는 것은 잘못으로, 사실은 전진에서 온 것이가. 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의 안민강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송경 흥국사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가 있으랴.

 

위 설명에서의 안시성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요하의 최하류 지형을 설명한 것이 분명한데 일연은 아마도 이리저리 전해지는 전언을 의심하지 않고 믿은 결과 저러한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의 도읍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어느 구석에도 요하가 바다.灣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한 한 시기 요동군의 속현인 안시현 부근의 안시성이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압록의 다른 이름이 요수이며 안시성이 요수 북쪽에 있다는 설명으로 보아 일연은 최소한 고려 당시의 압록강이 안시성 북쪽에 흐르는 요수라고 인식한 것은 확실하다. 비록 고려의 압록이 요하 본류는 아니지만 요하 동쪽 지류인 혼하일 수 있다는 당시의 지리인식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라 본다. 

 

결국 현재의 한국사학계의 통설인 고려의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라거나 요즘의 인하대고조선연구소의 주장처럼 지금의 요하가 고려 시기 압록강으로 불렸다는 주장은 일본이 한국고대사를 공간적으로 축소시키기 위해 조작한 헛소리에 불과하며 식민사관 지리의 아류들일 뿐이다.

 

추정도 -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고려 국경선

 

 

추정도 - 인하대고조선연구소가 주장한 고려 국경선

 

 

 

 

 

 

1088 년 9 월 고려 선종은 태복소경 김선석을 遼나라에 파견하여 그들의 각장 설치계획 파기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는데 서신에 나타난 개사수는 요국과의 국경선이였고 고려에서는 압록강 또는 안민강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 문제를 재삼 제기하는 것이 비록 예절에 어긋나는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지난날 보낸 글월에서 우리나라 전체 백성들의 의사를 이미 밝혔고, 여러 번 보낸 사절을 통하여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원을 묵살하니 어찌 다시 말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다행히 당신처럼 공정한 임금을 만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심정을 말하노니, 삼가 돌이켜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집정하였을 때에 책명을 보내 관작을 주었으므로 황태후의 성덕을 칭송하고 공물을 보냈더니 우리의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 동부는 우리의 영토로 확정했던 것이다.

 

또한 귀국 성종의 통화 12 (994)에 예방사절을 보냈을 때에 정위 고량이 다음과 같은 천보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국왕 왕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동경 유수 소손녕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9 월 초에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10 월 상순에 벌써 준공했다고 하니 당신은 특출한 재능으로 모든 사물에 정통하며 우발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에 멀리 공물을 보낸다. 금번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 지방에 있는 장정들을 모아 중요한 나루터에 성책을 쌓음으로써 광막한 들판에 침입하는 도적들을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며, 현 정세에 매우 적절한 조치다. 더군다나 저 여진이 제때에 황하를 입음으로써 나의위신에 눌려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책 수축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여 양국의 영원한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 조서의 간곡한 내용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우리의 대신 서희가 국경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귀국의 동경 유수 소손녕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상의함으로써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서 모든 성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공진을 압록강 구당사로 안문에 파견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이 되면 내성에 들어가 자면서 귀국의 힘을 입어 점차 좀도적이 제거되고, 그 후부터 경비를 하지 않아도 변방 정세가 더욱 좋아졌다. 아직 성종의 조서에 먹도 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젯일 같은데 갑인년(1014)에는 하천에 선박을 비치하여 통로를 열었고, 을묘년(1015)에는 우리 고을 성내에 들와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을미(1055)에는 궁구란자를 설치하고 정자를 만들었다가 병신년(1056)에 우리의 요구에 따라 철거하고 우리에게 보낸 조서에는 <기타 세세한 문제도 일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또 임인년(1062)에는 의주,선주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제기한 즉 기존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 설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인년(1074)에 또 다시 정융성 북쪽에 새로 탐수암을 설치하니 우리가 이것의 철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시설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나라가 대대로 귀국을 성의껏 대접하였고, 해마다 사절과 공납을 보냈으며, 몇 번이나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탐수암,성책,다리 등 일체 시설을 철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새로운 시장을 설치하려고 하니, 이는 귀국 선대 임금들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때문에 수천리 길을 우리 사신이 계속 오가며 90 년 동안 가져다준 공납도 보람없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새로 조상의 뒤를 이은 이래 우발으로서의 임무를 감가 지키면서 나의 성의를 다하려는 이때, 어찌 사소한 이속을 도모하기 위해 그같은 시설을 경영하고 있는가? 영토가 귀국과 연결되어 있어 선린정책을 쓰려고 약속하였지만 이 좁은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글월을 빈번히 띄웠는데도 당신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위로는 하늘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바라건대 당신은 지방 관리들의 잘못된 의견을 물리치고 우방의 중대한 관심사를 고려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자기 생업에 안착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경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호의를 잊지 않겠다.`

 

이 편지를 받은 거란은 김선석에게 답신을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 회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장 설치를 정지하라는 항의서한을 여러 번 받았다. 이 같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할 까닭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에 적당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아직 설치할 기일도 정하지 않았으니 부디 안심하고 성의를 다할 것이며, 심각한 의구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가기 바란다.`

 

거란은 이 편지를 보낸 후 고려 조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 2천 마리, 수레 23 대, 말 3 필을 보내왔다.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245쪽 박영규/들녘

 

이 개사수는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정확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1 동명성왕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숙종 정축 2년(1097)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요나라 임금이 고려에 보내는 공식 문서에서 고려의 국경이 북으로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요나라에서 용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어딜까?바로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부입니다. 그 외에 고려나 요나라에서 용천이라고 부를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예종 정유 12년(1117) 포주를 의주(義州) 방어사(防禦使)로 고치고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갑오일에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그 표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압록강 일대는 신라의 옛 지역으로서 조상 때부터 우리 나라의 관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엽의 소퇴로 인하여 요나라에 침략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만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귀신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쳐 부술 때 금나라에서는 고려가 요나라에 빼앗긴 보주(保州)를 고려에 돌려줍니다. 이 보주를 포주 또는 파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고려는 이 보주를 회복하여 다시 의주로 이름을 바꿉니다.이 의주를 찾고난 후 백관이 예종에게 올린 표문에 압록강 일대를 고구려의 옛지역이라고 하지 않고 신라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신라의 영토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니하(泥河)까지라는 요사(遼史)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

 

 

조선의 압록강은 아래 모사도의 청룡하였고 고려의 압록강은 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사도 - 현 중국지도 하북.요녕성 지역의 물길 지형만을 드러낸 모사약도

 

 

 

위 모사도에 표시된 물길 명칭은 현재의 중국전도 표시이고 이는 1934 년 일본의 꼭두각시 만주국에서 란하 이동의 모든 물길과 지명들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조작한 지도를 그대로 습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1911 년 멸망한 청국의 지리는 중국의 25 번째 정사라는 <청사고/지리지>에 아래 추정도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정도 - 청국 직예.봉천.길림.흑룡강성 위치와 봉천성에 속한 부.구 위치

 

 

 

즉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압록강은 청국의 봉천성 봉황직예구 동쪽에 흐르는 지금의 청룡하였던 것입니다. 

 

아래는 조선 시기 제작된 고지도인데 지도 제목이 없고 백두산 지역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백산도`라 칭하겠습니다.  

 

고지도 - 영조 26 년 (1751)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칭 백산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지도웹검색서비스 /각국도/산해관.요동.흥경.오랄.영고탑

                http://www.dlibrary.go.kr/Map/HISM_ViewerFrame.jsp

 

고지도 - <백산도> 확대

 

 

위 백산도에 묘사된 요하와 그 발원지인 `요수원` 표시와 같이 1750 년 대의 요하는 백산대맥의 서북쪽 끝 지역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오로지 남류하였던 물길입니다. 저 요수원 지역의 지형은 지금의 요하처럼 중류 지점에서 약 2000 여 리 길이의 서요하가 흘러올 수가 없는 지형이며 지금의 서요하는 위 백산도에 명확하게 표시되었듯이 1750 년 대에는 조선과 청국 공히 흑룡강으로 인식하였고 그 흑룡강의 하류 곧 지금의 요하 하류는 바다로 인식되었습니다.

 

1750 년 대 요하는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해룡부 서안현과 창도부 요원주 기록과 같이 본류격인 동요하는 서안현에 위치한 고열눌와집 전심호에서 발원하여 서류.서북류하다가 극심극등기 지역에서 흘러오는 서요하와 차로특기에서 흘러오는 신요하와 요원주에서 합쳐진 후 대략 남쪽 방향으로만 흐르다가 봉천성의 봉천부.금주부 사이를 거쳐 갑자기 강폭이 넓어져 생긴 灣만으로 들어갔고 이 灣만은 남쪽으로 약 300 여 리 넘게 이어진 후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과 진황도 사이의 발해 해안선에 닿았던 것입니다.

 

결국 위 <백산도>가 묘사한 범위의 지형은 당연히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과 같고 산해관 위치나  주변의 지형지세도 중국전도에 표시된 지금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아래와 같은 곳이였습니다. 

 

 

 

고려나 조선 시기의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라는 주장이나 고려의 압록강과 조선의 압록강이 같은 강이였다는 주장은 모두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 교육 내용일 뿐입니다.

 

일본 명치왕군부는 조선 정벌과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고 영구히 하려고 부단히 획책하던 중 조선 역사를 왜소한 역사로 만들 방책으로 고대 2000 여 년의 역사를 신화.전설이라 몰아붙치고 조선의 역사는 중국인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며 깍아내렸습니다.

 

지금은 많은 대한인들이 저러한 시간적 역사 축소에 대해서는 공분하고 있지만 공간적 역사 축소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대한인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즉 앞의 글들에서 이미 조선의 압록강이 위 모사도에 표시된 청룡하이고 신채호가 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고 했는지를 논증하였지만 역시 많은 이들이 란하.청룡하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며 더우기 고려 시기의 압록강이 조선 시기의 압록강보다 더 북쪽에 있었다고 하면 고려의 압록강은 커녕 조선의 압록강 주장까지도 믿지 못한다고 할까봐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고려 시기의 압록강은 거란.요국의 동경 요양부 요양현 동쪽에 흐르는 혼하의 중상류였고 요양현 부근은 하류였으며 아래의 권근의 진정전과 같이 고려 말 명나라 주원장이 설치하려 했던 철령위 위치가 고려의 강역이였고 북쪽 국경선 지역이였고 그곳에 고려의 압록강이 흘렀습니다.

 

권근의 철령.쌍성 관련 진정전 陳情箋

 
신(권근)은 아룁니다.

홍무 21 년 2 월 15 일에 배신 문하평리 설장수가 경사에서 돌아오니, 호부에서 발행한 성지를 공경히 받들었습니다. `그 철령의 이동.이북.이서가 원래 개원에 속한 것이니 소관 군민은 그대로 요동에 붙이도록 하라.`하였으니 신은 일국의 신민과 더불어 놀랍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러러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

말씀하신 철령 이북은 문.고.화.정.함 등의 여러 주를 지나 공험진에 이르기까지는 자고로 본국의 땅이였는데, 요 건통 7 년에 동여진사람들이 난리를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므로 예왕이 요국에 고하고 토벌하기를 청하여 군사를 보내어 잃은 땅을 회복하게 됨에 함주.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원나라 지정의 초기 무오 년간에 이르러 몽고 보지관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수복할 때에, 본국 정주 반민 탁청과 용진현 사람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면서 지금 조정의 요동 함주로 부근인 심주에 쌍성현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으므로,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하여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잘못 일컫고, 조휘를 쌍성총관으로 탁청을 쌍성천호로 삼았는데, 지정 16 년에 이르러 원조에 주달하여 상항의 총관.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되게 하여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고 있사오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침삭당했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로에 속한 것이니, 그대로 요동에 붙이게 하라는 명을 공경히 받들어 보았으나, 이 철령의 산은 왕경과 겨우 3 백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원문  http://cafe.naver.com/manchuria/716

 

결국 주원장은 고려의 쌍성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 리 내외 떨어진 요하 강변으로 철령위를 옮겨 설치했습니다.

 

<명사/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홍무 21 년 3 월 옛철령성에 설치. 26 년 4 월 옛 은주땅으로 옮김. 곧 지금의 치소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고 남족에는 범하 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옛 철령성이며 고려와 경계다. ... 남쪽으로 도사(요양현)까지는 240 리 떨어져 있다.

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 二十六年四月遷古嚚州之地 卽今治也 西有遼河 南有泛河 又南有小淸河 俱流入於遼河 ...

東南有奉集縣 卽古鐵嶺城也 接高麗界 ... 南距都司二百四十裏

 

 

고려의 북쪽 국경은 요동에 있었고 평장사 서희의 당당한 외교로 소손녕을 굴복시켜 거란에게서 빼앗은 강동 6 주 흥주.철주.통주.용주.귀주.곽주도 요동에 있었던 고려의 압록강 동쪽에 있는 땅이며 아마도 철주가 철령이 있었던 곳이며 쌍성이라고도 불리고 총관부가 설치되었었고 후일 화주로 불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도 - 아래의 흑색 실선 내 지역이 조선도가 묘사하는 범위

 

 

 

화주 또는 함주를 영흥 혹은 함흥이라고 비정하며 몽고.원국이 설치한 쌍성총관부 위치도 지금의 대한반도 함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꺽어 식민지배를 쉽게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조선역사의 축소조작질 끝에 나온 쓰레기 결론일 뿐입니다.  

 

즉 1258 년 몽고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것은 철령 이북 지역을 관장하려는 목적이였는데 지금의 함흥을 쌍성 또는 화주라고 비정하려니 철령 또한 그 부근에 있어야 하니 지금의 강원도 북계에 철령이 있었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고려.조선 시기의 요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이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의 압록강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요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시기의 압록강이든 지금의 압록강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송.요 시기 곧 고려 시기의 요하가 지금의 란하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지도입니다.

 

고지도 - 송.요 시기 간행된 <지리도>의 요수 표시 지역 확대도, 가칭 지리확대도

 

 

 

참고도 - <한서/지리지>부터 <요사/지리지>까지의 기록과 대조하여 지명을 보충.추기한 것

 

 

 

위 지리확대도와 같이 소요수와 소요수 동쪽에 보이는 거란.요국의 동경 요양부 위치는 산동반도 정북쪽 내륙 지점인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강안지역이였고 지금의 란하가 송.요 시기의 요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요하(소요수 표시) 동쪽에 `고려신라여진발해4속지지`라는 표시와 같이 그 지역 일부는 고구려 강역이였으며 동시에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신라의 서쪽 끝 경계였으며 동시에 고구려 유장인 고조 대조영이 건국한 震진 곧 발해의 남경 남해부가 설치된 곳이였습니다. 아래는 이러한 상황을 기록한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에 속한 요주耀州 본문입니다.

 

耀州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貉領.기泉.尖山.巖淵 皆廢 戶七百 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

요주...본래는 발해 초주였으며 초산.맥령.기천.첨산.암연현 등 5 개 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모두 폐현되었다. 호 수는 700 호이며 요주는 해주에 예속.통제를 받는다. 동북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해주가 있으며 속현은 하나로 암연현을 설치했는데 (암연현의) 동쪽 경계 바깥은 신라 땅이다. 옛 평양성은 암연현 서남쪽에 있고 (옛 평양성에서?)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위와 같이 요주 암연현 동쪽이 백제 땅을 차지한 신라 경계였고 당시의 고려 압록강은 서압록으로 동경 요양부 치소가 설치된 요양현으로 흘러드는 혼하였으니 `4속지지` 동쪽에 표시된 압록과 신라국계는 부정확한 표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그 압록은 고려가 아닌 조선 시기의 압록이였습니다. 

 

한편 거란.요국은 진국을 멸망시킨 후 한 시기 현토군 서개마현을 흐르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이며 진국의 서경 압록부 가 설치되었고 진국에서는 압록강이라 부른 물길을 요하로 개칭하였고 고려는 서쪽으로 거란.요국과 접경하였기 때문에

고려의 국경선인 압록강은 염난수 동쪽에 흐르며 염난수로 흘러드는 한 시기 현토군 고구려현을 흐른 요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압록강을 요하.안민강으로도 불렸다는 <삼국유사/흥법>의 묘한 기록이 있었던 것입니다.   

 

추정도 - 고려 시기 서.동압록.파저.청천.대동.저탄.한강 추정지

 

 

 

추정도 - 아래의 적색 사각형 지역은 지리확대도가 묘사하는 범위

 

 

 

위의 `지리도`와 1527 년 명나라 정약증이 편찬한 <주해도편>에 실린 아래의 `여지전도`를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고지도 - 여지전도

 

 

위 여지전도에 표시된 조선은 지금의 발해 북안 지역이며 같이 표시된 요하.심양.압록강도 지금의 발해 북안 내륙에 있었습니다. 대한반도 중앙으로 천도한 조선으로서는 그곳이 서북 강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신라라 표시된 지역 곧 지금의 대한반도에는 조선의 도읍 한양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