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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마지막 회)] 고구려와 튀르크 잇는 ‘미싱링크’ 킵차크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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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전원철의역사거꾸로읽기,異論의 역사

2020. 7. 4.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마지막 회)] 고구려와 튀르크 잇는 ‘미싱링크’ 킵차크 칸국 

동아시아(요나라 vs 금나라) 대전쟁이 낳은 연합왕국(키멕 칸국)의 쿠데타 

 

내몽골에서 이주한 ‘옥리백리 씨’ 가문이 칸으로 등극
칭기즈 칸 침략 이후 루시·불가리아·이집트 등지로 서진

 

칭기즈 칸 기마부대를 재현한 몽골군 병사들이 초원을 달리고 있다. 1223년 키예프 공국과 연합한 킵차크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칼가 강 일대에서 몽골군과 결전을 벌인다. / 사진:AP/연합뉴스

 

 

지난 호에선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남건(男建)의 행적을 살폈다. 남건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唐)의 포로가 됐다가 금주(黔州)로 유배 간다. 오늘날 티베트 남쪽 운남 지방을 가리킨다. 그로부터 약 70여 년이 지난 743년, 카자흐스탄 이르티시 강 유역에서 새로운 칸국이 세워졌다. ‘타타르 칸의 아들 샤드(Shad)’가 세웠다고 알려진 키멕(Kimek) 칸국이다.

여기서 [튀르크멘 계보] [소식의 장식] 등 튀르크·페르시아 계열 역사서들이 공통으로 지목하는 샤드의 정체는 바로 남건의 직계 후손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고구려 지배계층의 계보가 중앙아시아 무대로 옮겨간 셈이다.

사서에 따르면 타타르의 친척 7명이 함께 나라를 세웠다고 전한다. 타타르(Tatar)를 비롯해 이미(Yimi)·예막(Yemak)·킵차크(Kipchak) 등 7개 부족이 연합해 나라를 이뤘다. 각 부족은 연맹 내에서 나름의 자주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도자는 중앙에서 지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경 역사서인 [세계강역지(Hududal-‘Alam)]를 보면 “키멕 칸국에서 ‘킵차크 왕(Malik)’을 지명했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12세기 들어 상황이 반전된다. 외부에서 키멕 칸국을 가리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튀르크·페르시아 사서뿐만이 아니다. 명나라 때 쓰인 [원사(元史)]에서도 ‘흠찰국(欽察國)’이란 이름으로 부른 기록이 나온다. 한자어 ‘흠찰’을 페르시아어로 발음한 말이 ‘킵차크(Kipchak)’다.

키멕에서 정변이 일어나다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오늘날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에 구축한 귀주성.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을 막아낸 현장이기도 하다.

 

다만 한국에선 킵차크 칸국에 관해 대략의 정보도 찾기 어렵다. 몽골 제국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킵차크 칸국’과 이름이 같은 탓이다. 이때의 ‘킵차크 칸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칸이 1242년 세운 나라다. 중앙아시아 북부부터 서쪽으로는 흑해 인근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이 나라의 주요 무대가 ‘다시티 킵차크(Desht-i Qipchaq, 킵차크 초원)’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일 뿐, 킵차크족이 경영해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다.

이 중앙아시아 일대 초원에 ‘킵차크’라는 이름이 붙은 연원이 바로 이번에 살펴볼 킵차크 칸국이다. 서방 사서에서는 ‘쿠마니아(Cumania)’ 혹은 ‘다시티 킵차크’라는 지역명으로 대신 부르기도 한다. 독자들이 손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원인 ‘위키피디아’에선 ‘쿠만-킵차크 연합(Cuman-Kipchak confederation)’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한나라를 가리키는 다름 이름이다. 그 영토는 불가리아와 러시아 우랄 강변, 그리고 ‘루시’로 불렸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국 동쪽 지구에까지 닿았다.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13세기 초 몰락할 때까지 적어도 4세대 120여 년 정도 이 지역에 존속한 것으로 평가된다.

키멕 칸국의 일부였던 킵차크 칸국이 그 국명을 대체한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튀르크·페르시아 사서에서도 기록돼 있지 않은 탓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11~12세기 대규모 이주로 킵차크족의 인구가 늘면서 통치 집단으로 올라서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역사적 대변동은 2가지다.

하나는 10세기 발해 멸망으로 인한 대규모 이주다. 원래 동쪽의 고구려 땅에서 기원한 ‘오구즈 칸’의 시대에 하나의 종족으로 태어난 킵차크족은 당시 국경이 없이 넓은 초원으로 이어졌던 만주에서 몽골리아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땅을 전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킵차크라는 종족명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티무르 술탄 울룩벡 쿠라곤(Ulug‘bek Ko‘ragon)이 집필한 사서 [사국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구즈 칸이 서방원정을 가는 도중 한 지휘관이 전사했다. 마침 그 지휘관의 아내는 임신한 상태였다. 이 여인은 말라 비틀어져 구멍이 뚫린 나무 ‘쿠복(kubok)’ 안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 오구즈 칸은 이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고 ‘고목’ 안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킵차크’이라는 족칭을 줬다고 한다. 모든 킵착인은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킵차크’의 어원이 된 튀르크어 ‘쿠복’은 곧 한자어 ‘고목(枯木)’의 튀르크어 발음이다. 처음 부족을 이룰 때만 해도 자신의 나라 없이 제국의 정복 전쟁에 동원됐던 셈이다.

그러던 중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다. 당시 거란은 서북쪽으로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쪽으로도 여러 차례 원정을 갔다. 이 와중에서 많은 부족이 서북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 가야 했다. 이때 킵차크족 역시 유이민 대열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짙다.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230여 년 뒤인 1126년경, 금나라가 거란을 서북으로 쫓아낸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고려의 16대 국왕 예종(재위 1105~1122년) 대에 벌어진 사건이다. 금태조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일어나 거란의 요나라를 무너뜨렸다. 그 결과 요나라의 마지막 칸인 천조제(天祚帝)는 포로가 된 끝에 한반도의 함경도 지방에서 생을 마쳤다. 이때 거란 잔당은 자신이 예전에 만주에서 몰아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자신들이 서북의 중앙아시아로 도망가야 했다.

부족 대이동 낳은 금-요 전쟁

몽골군이 킵차크 칸국을 침공한 경로. 지도 왼쪽 상단 흑해 일대가 킵차크 칸국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때 요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9대손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잔당을 이끌고 오늘날 몽골과 동투르키스탄(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그리고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도망가서 ‘카라키타이(Karakitay)’를 세운다. 한자식 이름으로는 ‘흑요(黑遼)’ 또는 ‘서요(西遼)’라고 한다. 얼마 후 서요는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진출한다. 참고로 야율아보기는 페르시아어로 ‘콸지 아보키(Khualji Aboki)’로 부른다. 발해 왕가 성씨인 ‘걸씨(乞氏)=대씨’와의 연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동방에 남아있던 킵차크인의 일부도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키멕 칸국의 7개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킵차크족과 합류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킵차크인들의 수와 세력이 불어나자 키멕 칸국의 한 부락으로 ‘소(小) 왕(칸)국’을 이루었던 지위를 벗어나 주도적 위치로 올라섰을 것이다.

[원사]는 이때 키멕 칸국으로 넘어온 무리를 ‘흠찰국왕(欽察國王)’ ‘옥리백리(玉裡伯裡) 씨(氏)’ 가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1310년경 라시드 웃딘은 [역사모음]에서 이를 ‘킵차크 울비를릭(O’lbirlik) 씨’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 ‘흠찰국왕’ 가문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원사]와 [역사모음] 등 동·서방의 사서에 풍부하게 기록돼 있다.

우선 이 가문의 씨족 명을 한자로 쓴 ‘옥리-백리(玉裡-伯裡)’가 단서다. 이는 당시 만주어를 한자 소리로 옮겼을 때 ‘옥(玉)’이 ‘구(guu)’인 점을 참조해 보면, ‘구리-부리(Guri-Buri)’다. 이는 오늘날 우리말로 ‘구려(句麗)-부려(夫餘)’로 읽을 수 있다. ‘부려’는 부여를 지칭하는 다른 소리다.

[역사모음]은 이를 ‘울-비를-릭(O’l-bir-lik)’ 씨로 기록했는데, 튀르크인들은 자주 어두 자음 ‘G-’를 빼고 페르시아 문자로 그 소리를 쓴 점과 ‘-lik’은 ‘-씨’에 해당한다는 점을 볼 때, ‘울-비르-(O’l-bir-)’도 ‘구리-부려’로 해석할 수 있다.

흠찰국왕 가문의 기원에 관해 [원사]는 원 성종과 무종 때 활약한 인물 ‘토토합(土土哈, 1237~1297)’의 일대기를 기록한 ‘토토합 전(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토합의 선조는 원래 (오늘날 내몽골 지역) 무평(武平) 북쪽 절련천(折連川) 안답한 산(按答罕山) 부족이었다. 쿠추(曲出, 곡출)이 부족을 이끌 때 서북(西北)의 옥리백리 산(玉裡伯裡山)으로 옮겨가 살면서 그로 인해 씨(氏)를 삼았고, 그 나라를 흠찰이라고 했다. 그 땅은 중국에서 3만여 리 떨어져 있고, 여름밤은 매우 짧고 해가 잠시 졌다가 다시 뜬다. 쿠추는 소마르나(唆末納, 사말납)를 낳고 소마르나는 이날축(亦納思, 역날사)을 낳아 세세대대로 흠찰국왕을 지냈다.”

“우리는 같은 부족에서 나왔다”

페르시아 사서 [역사모음]에 등장하는 호라즘 샤 제국의 황후 ‘타르칸 카툰’(왼쪽 둘째). 몽골군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 기록에 따르면 킵차크 칸국 태조 쿠추(曲出)는 원래 만주에 이어지는 내몽골 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킵차크 지역에 있는 옥리백리 산으로 이동해 정착하면서 그 산 이름을 따 자기 성씨로 삼았다. 그러나 다른 사서와의 비교를 바탕으로 할 때 그는 자기 성씨를 따라 자기가 정착한 산에 ‘옥리백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원사]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흠찰국왕 가문의 다른 성씨는 ‘바야우드(Bayaud, 伯要兀, 백야올)’ 씨다. 이는 오구즈칸의 증손자인 ‘바야트(Bayat)’와 소리가 같다. 이 ‘바야트’씨는 우리말로는 부여-고구려-백제-발해 왕가의 공동 성씨인 ‘부여 씨(夫餘 氏)’의 옛 소리인 ‘바야티’가 튀르크어를 거치며 변형된 결과로 이해된다.

두 번째 단서는 슬프게도 킵차크 칸국의 마지막 순간에서 찾을 수 있다. 금나라 말기인 1207년경, 칭기스 칸이 자신의 숙적인 ‘메르기드(篾儿乞, 멸아걸, 말갈로 추정) 족’의 족장인 후투(火都, 화토)를 쳤다. 그러자 후투는 서쪽의 킵차크 칸국으로 도망가 비호를 요청했다.

이 때 킵차크 칸이었던 이날칙은 흔쾌히 그 무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칭기스 칸은 후투를 생포하기 위해 수베데이(速不台, 속불태)와 제베(哲别, 철별) 군대를 파견한다. 이 날칙은 당시 카자흐스탄 서부 카프카스 산맥 일대의 알란(Alan)인들과 동맹해 몽골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자 수베데이 일행은 이날칙에게 후투를 순순히 넘기라고 경고한다. 이때 그들은 이날칙에게 “잊지 마라. 우리는 하나의 부족(部族)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킵차크 국왕 가문의 뿌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수베데이는 칭기스 칸의 몽골 부족과 킵차크 부족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실을 지적하면서 킵차크 왕가가 카프카스 지역의 알란 인들과 맺은 동맹을 끊도록 설득한 것이다. 그 결과 킵차크는 알란 인들을 버리고 몽골과 연합해 알란 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몽골은 킵차크 칸국을 역시 정복한 뒤 킵차크 왕가와 백성을 원나라로 데려왔다. 이들은 원나라에서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1285년에 원나라에서 태어난 킵차크 왕가 후손 ‘엘테무르’는 훗날 고려 기황후의 남편이 되는 ‘토곤 테무르’의 친위대장을 지낸다. 엘테무르는 토곤테무르가 원 혜종으로 즉위할 때인 1333년 때까지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단, 1207년 칭기스 칸이 킵차크를 정복할 당시 킵차크 왕가 모두가 몽골에 항복하진 않았다. 킵차크의 소(小) 칸이었던 ‘칸 쿠텐(Khan Köten)’ 아래 일부 킵차크인들은 루시 지역의 키예프 대공국으로 도망갔다. 킵차크인들은 이미 1100년대부터 루시와 교류해온 터였다.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등지에서 발견된 아시아인 외모의 킵차크인 석상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키예프 공국도 몽골에 맞서 싸울 지원군이 필요했기에 이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다. 그중 하나가 갈리시아의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로, 그는 킵차크 칸 쿠텐의 사위가 된다. 결혼 동맹을 맺은 킵차크와 키예프 므스티슬라프 3세(Mstislav III of Kiev)는 1223년 5월 31일, 오늘날 우크라이나 도네츠크(Donetsk)의 칼가 강에서 몽골군을 만나 일대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싸움은 결국 몽골군의 결정적 승리로 끝나고 만다.

패배한 ‘쿠텐(Köten) 칸’은 잔당 4만 호를 이끌고 이번에는 헝가리로 도망갔다. 헝가리 왕 벨라 4세(King Bela IV)는 그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조건 하에 살 땅을 제공했다. 그러나 쿠텐이 살해되자 그들은 헝가리를 떠났다. 쿠텐 사후 킵차크 잔당은 불가리아로 가서 ‘테르테르(Terter) 왕조’를 세웠다. 이들은 적어도 43년간 불가리아에서 군림했다. 일부 역사가는 그 뒤에 이어진 불가리아 왕조도 그 씨족의 후손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페르시아 사가 주즈자니(Juzjani, 1193~13세기)가 남긴 기록 역시 킵차크 왕가와 우리 민족의 연결고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주즈자니는 킵차크 칸국 서남쪽 이웃나라 호라즘 샤 제국(1077~1231)의 6대 호라즘 샤 알라앗딘 무함마드의 어머니 ‘튀르칸 카툰(TürkanKhatun)’의 출신을 소개한다.

‘코스모폴리탄 고구려인’의 족적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작품 ‘1808년 5월 2일: 맘루크의 돌격’(1814). 이슬람 정예병인 맘루크가 스페인 민중 봉기를 진압하고 있다.

 

주즈자니는 그녀가 ‘킵차크 칸 아크란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는 호라즘 샤 제국의 섭정 황후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다가 몽골군에 체포돼 생을 마감한다. 또 호라즘 샤 제국 마지막 술탄의 전기를 쓴 안나사비이(?~1249)도 마지막 술탄의 할머니인 그녀가 ‘캉클리(Kankli)’ ‘예맥(Yemek) 씨족’에 속하는 바야트 가문(Bayaturugh) 소속 잔키시 칸(Jankish Khan)의 딸’이라고 기록한다.

‘캉클리’ ‘예맥’ ‘바야트’는 차례대로 국명과 종족, 그리고 씨족 이름을 나열한 것이다. 이를 고구려 말로 환원해 보면 ‘캉글리’ ‘예맥’ ‘부여’에 해당한다. 나아가 ‘잔키씨 칸’은 ‘진국씨(震國氏) 왕(王)’에 대응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발해는 원래 건국 후 15년 간 발해가 아니라 ‘진국(震國)’이라는 국명을 썼다.

왜 발해가 등장했을까? [원사]에서 킵차크 칸 쿠추(曲出)의 가문이 내몽골을 떠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간 것은 대략 거란이 금나라에 망한 1126년 직후였다. 당시 거란 황가는 대대로 발해의 마지막 국왕 대인선 가문의 여인들을 황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쿠추가 서방으로 가기 전 원래 살던 내몽골 적봉(赤峰) 땅은 대인선이 살던 임황(臨潢) 지역이다. [요사]는 이 사실을 잘 기록해 뒀다. 발해 왕가의 유민들이 킵차크의 일원으로서 키멕 칸국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몽골의 공격으로 흩어진 킵차크인들 중 일부는 동유럽에서 용병, 노예전사로 활약했다. 동명의 영화로도 소개된 바이바르스(Baybars) 등 다른 킵차크인들은 노예상인에게 팔려 이집트로까지 갔다. 그들은 이집트 왕의 사유물로 간주되는 호위대인 ‘맘루크(Mamalik)’의 일부가 되었다.

호라즘 샤 제국 역시 몽골군에게 대패, 5대 술탄 무함마드와 그 아들인 마지막 술탄 잘랄잇딘이 차례로 살해당했다. 이 가문의 왕자 출신인 쿠투즈(Kutuz)는 킵차크의 바이바르스에 앞서 노예의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이집트 말릭(국왕)에게 튀르크 노예로 팔려가 ‘맘루크’이 됐다가, 그 신분에서 오히려 이집트 술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무렵 이집트에 팔려온 바이바르스는 쿠투즈에 이어 이집트 2대 맘루크 술탄이 된다. 1250년부터 3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린 맘루크 왕조의 시작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계보는 500여 년에 걸쳐 점차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해석을 해봄직하다. 멸망 이후 돌궐에 의탁했던 유민들은 중앙아시아와 이집트, 나아가선 동유럽에까지 진출해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모든 튀르크인의 선조’라 불리는 오구즈 칸을 시작으로 호라즘 샤, 오스만 튀르크 등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제국을 일궈나갔다. 온고지신이라 했던가. 코스모폴리탄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깃들어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역사 거꾸로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첸전쟁 당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하는 등 유엔 전문 기관에서도 일했다.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몽골제국의 기원, 칭기즈 칸 선대의 비밀스런 역사] 등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출처;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9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