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8)] 동북방 유목민 제국 요·금·원·청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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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역사학자 김기협의 ‘오랑캐의 역사’

2020. 7. 4.

202006호(2020.05.17)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8)] 동북방 유목민 제국 요·금·원·청의 흥망 

농경·유목 융합형 오랑캐, 10세기 이후 중원 지배 

 

수·당, 돌궐·위구르 몰락하자 중원·오랑캐 모두 강력한 패권 사라져
‘잡식성’ 선비·거란·여진·몽골, 중원문명 빠르게 흡수해 안정적 통치

 

사하라 사막의 캐러밴 행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캐러밴 상인들을 거론하지 않고 인류의 문명 발전을 이야기할 수 없다. / 사진:세르게이 페스테레프

 

 

30년 전 강의실에서 중국사를 가르칠 때 가장 기본 도구는 개설서(통사)였다. 미국산으로 페어뱅크와 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 일본산으로 미야자키의 [중국사], 그리고 중국(대만)산으로 부낙성의 [중국통사]가 번역본이 나와 있어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위해 보다 근래에 나온 개설서를 보고 싶어서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신중국사(China: A New History)](2006 증보판)를 구해 읽고 있다가 지금까지 본 개설서와 아주 다른, 그리고 내 작업에 적절한 참고가 되는 책을 만났다. 발레리 한센의 [열린 제국(The Open Empire: A History of China to 1800)](2015)이다. 2000년에 나온 초판은 1650년까지를 살핀 것인데 2015년의 증보판에 1800년까지를 다루는 한 개 장을 덧붙였다.

중국 서쪽과 북쪽, 문명사적 의미의 차이 없어

‘부산물혁명’ 이론으로 유명한 영국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1946~2006). / 사진:클레어 셰라트

 

 

[열린 제국]의 첫 번째 목적은 ‘왕조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역사서술에서 왕조사인 ‘정사(正史)’가 워낙 압도적인 중요성을 누렸기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도 왕조사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문헌자료 중에 정사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래 고고학과 인류학 등의 연구를 통해 획득한 비(非)문헌자료와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난 문헌자료가 이제 새로운 시야를 어렴풋이나마 열어줄 만큼 분량이 되었다. 한센이 이 새로운 자료를 활용해서 정치·남성·이념 위주의 왕조사를 넘어 사람들의 실제 생활 모습에 접근하려 애쓴 것은 중국사 연구의 오랜 편향성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로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이 책의 가치를 크게 보면서도 중국사 공부하는 이들에게 입문서로 권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상식을 뛰어넘는 관점을 세우는 데 너무 몰두해서 그런지 상식에 미달하는 오류가 너무 많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시대구분에서부터 한계가 드러난다. 제1부 “중국의 발명”(기원전 1250~기원후 200), 제2부 “서쪽을 바라보며”(200~1000), 제3부 “북쪽을 바라보며”(1000~1800)의 3개 부로 구분해 놓았는데, 제1부는 ‘중화제국’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제국이 아직 자리가 덜 잡힌 약간의 시기 포함)를 다룬 것이므로 그 이후와 크게 나눠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제2부와 제3부 사이에는 구분의 의미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중국사의 전개에서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동쪽은 바다에 막혀 있고 남쪽은 농업 확장, 즉 화하(華夏) 확장의 방면이었는데 서쪽과 북쪽은 모두 유목민의 활동 영역이었다. 한(漢)나라 때의 흉노 이래 몽골계·돌궐계 등 여러 계통 유목민들이 중국 서북방의 초원지대에서 활동했고, 형편에 따라 북방에서 서방으로, 또는 서방에서 북방으로 옮겨 다닌 일도 많았다. 중국의 서쪽과 북쪽 변경은 모두 유목민의 세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센이 서쪽과 북쪽 사이의 차이를 크게 보는 것은 초원지대의 바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북쪽의 초원지대 너머에는 동토지대뿐인 반면 서쪽으로 초원지대를 지나가면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이 있었다. ‘서쪽 시대’에는 유목민의 세계 바깥에 있는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북쪽 시대’에는 유목민과의 관계에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 두 시대를 구분하는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한센은 불교의 역할을 중시한다. 후한(後漢) 말 받아들인 불교가 송(宋)나라 초까지 성행한 사실을 놓고 중국이 서방으로 열려있던 시기로 규정한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의 성행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중국사를 크게 구분하는 근거로 삼는 데는 무리한 감이 있다. 인류 문명은 온대지역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 큰 문명권들은 동서(東西)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중국문명권에서 보자면 다른 주요 문명권은 모두 서쪽에 있었다.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한다면 불교문명권·이슬람문명권·기독교문명권과의 관계가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육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와 해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그런 문명사적 의미의 차이가 없다. 중국이 서쪽을 바라봤다고 한센이 말하던 시기의 끝 무렵에 가서야 해상운송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 서방과의 접촉에서는 육로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육로, 즉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조건에 계속해서 큰 작용을 한 것은 중국의 서방에서 북방에 걸쳐 활동하던 유목민이었다.

전통시대 중국인들은 유목을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의 모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유목은 문명 발전의 한 측면이었다. 식물을 길들여 식량자원을 확보한 것이 농경이라면 같은 목적으로 동물을 길들인 것이 목축이었다. 다만 식물이 동물보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어서 확보할 수 있는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농경이 문명의 주축이 된 것이다.

목축이 유목의 형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농경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다. 영국 고고학자 앤드루셰라트(1946~2006)는 ‘부산물혁명(Secondary Products Revolution)’을 이야기한다. 초기의 목축은 식량으로서 고기를 얻는 데만 목적이 있었는데, 기원전 3000~4000년대에 털·사역력·운송력 등 부차적 용도가 개발됨으로써 목축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기는 유목사회 내에서 소비되지만 다른 부산물들은 인근의 농경사회에 제공하고 곡식 등 여러 가지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목축의 대형화에 따라 유목의 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가축 떼가 커짐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초지가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초식동물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가축을 관리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이다. 이동 방식은 여름에 높은 곳으로 갔다가 겨울에 낮은 곳으로 돌아오는 수직형과 여름에 북쪽으로 갔다가 겨울에 남쪽으로 돌아오는 수평형이 있다. 알프스와 안데스·히말라야 산지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동목축(transhumance)은 수직형 이동 방식이다. 동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에서는 수평형 이동 방식이 널리 행해졌다.

농경민의 유목사회 침략과 약탈이 더 많았다

유목 생활을 하는 키르키즈인들의 이동형 가옥인 유르트. 키르기즈인들은 840년 위구르제국을 침공해 붕괴시켰다. / 사진:니나라

 

 

농경지대가 크게 자라나지 않은 문명 초기에는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이 뒤얽혀 있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까지 ‘중원(中原)’에 뒤섞여 있던 ‘오랑캐’가 아직 진행 중이던 농업화의 단계를 보여준다. 전국시대에 중원의 농업화가 완성되면서 북방에 장성(長城)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유목이 행해진 곳은 강우량이 농경에 부족한 초원지대였다. 춘추시대까지 중원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던 오랑캐의 대부분은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으로 전환해 ‘화하(華夏)’에 흡수되었고 일부가 외곽의 산악지대와 초원지대로 옮겨가 유목사회를 이루었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잉여생산이 작기 때문에 내부의 생산관계만으로는 계층과 직업의 분화가 활발하지 않고 대규모 정치조직을 키워낼 동력도 없었다. 생산 활동과 생활을 함께 하는 부족이 조직의 확실한 단위였고, 부족 간의 연합은 느슨한 형태에 그쳤다.

유목사회에 부족을 넘어서는 정치 조직이 자라난 것은 농경사회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농경사회가 영토국가로 조직됨에 따라 물자의 교환에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게 되자 그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조직의 동기와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약탈도 물자 교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기록에는 유목민의 농경사회 약탈이 많이 남아있지만, 농경민의 유목사회 침략과 약탈이 더 많았다. 기록이 농경사회의 특기였기 때문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일어난 흉노제국을 ‘그림자 제국’이라 한 것은 진·한(秦漢) 제국의 통일에 대응해 일어난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목민의 제국이 나타나자 셰라트가 간과했던 유목사회의 부산물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무력(武力)이다. 유목사회는 그 생활방식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흉노제국을 격파한 이래 당(唐)나라 때까지 유목민 기마병은 중국의 모든 무력충돌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왕조를 공격하는 쪽에서든, 방어하는 쪽에서든.

당나라 때 돌궐과 위구르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한 밑천은 그 무력이었다. 무력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오랑캐의 흥기를 막는 데는 당나라의 부탁이 없거나 보상이 충분치 않아도 자발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만주 방면의 거란과 여진이 9세기 중엽까지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당나라보다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위구르 제국의 붕괴는 참으로 허망했다. 840년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자 8세기 중엽부터 근 백년간 천하를 호령하며 고도의 번영을 누리던 제국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야만족이던 키르기즈는 제국을 넘겨받을 생각 없이 재물의 약탈에 그쳤고 위구르 잔여세력도 제국의 재건에 나서지 않았다. 일부 세력이 서남쪽의 실크로드 방면으로 옮겨가 오아시스국가를 유지한 정도였다.

이 허망함의 원인을 위구르 내부 사정보다 당나라 사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구르의 번영은 당나라와의 관계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화려한 도시 카라발가순은 자체 생산기반 없이 당나라에서 끌어들인 재물로 만들어낸 철저한 소비도시였다. 한 차례 파괴를 겪자 도시를 재건할 자원이 위구르에게 없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재물을 착취할 여지도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통제력이 줄어들어 북중국 일대는 절도사 세력의 할거 상황이 되었다. 각 지역의 조세징수권이 절도사들에게 넘어갔다. 중앙정부의 재정 수입은 남중국 일대로 한정되었고, 착취의 강화에 따라 9세기 들어서는 남중국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30년대 돌궐제국이 무너질 때 위구르가 바로 당나라에 접근한 것은 당나라가 지불 능력 있는 고객이었기 때문이었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무너질 때는 당나라와의 거래관계를 물려받겠다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제국’을 투영시킬 중화제국의 실체가 흐려진 것이다.

중화제국 실체 흐려지자 ‘그림자 제국’ 무너져

중국 베이징 수도박물관이 소장한 요나라 시대의 목우(木偶). / 사진:바벨스톤

 

 

남북조시대에 중원의 북방에서 널리 활동하던 유목민 유연(柔然)이 치밀한 정치조직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북중국의 오랑캐국가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통일이 이뤄질 무렵에 돌궐이 유연을 몰아내고 유목제국을 세워 수·당 제국을 상대하다가 위구르가 그 뒤를 이은 것인데, 이제 위구르제국이 무너지자 북방의 유목제국이 사라졌다. 당나라가 이 시기에 용병으로 활용한 돌궐의 일파 사타부(沙陀部)가 당나라가 망한 후 5대 중 후당(後唐)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때의 사타부는 유목민이 아니었다. (사타부는 당나라 황실의 성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당’을 자칭한 것이다.) 북방의 제국이 사라진 틈새에서 동북방의 거란(契丹)이 일어섰다.

농경민을 초식성, 유목민을 육식성으로 본다면 중원 동북방의 오랑캐는 잡식성이었다. 농경· 유목, 그리고 수렵·어로 등 다양한 산업이 혼재했다. ‘산업다각화’가 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자급자족에 좋은 조건이었지만 외부세력과의 경쟁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농경사회에게는 생산력에서 뒤졌고 유목사회에게는 전투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급자족의 경향 때문에 대규모 조직의 동기도 약했다.

5호16국의 혼란 속에서 이 지역의 선비족(鮮卑族)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농경사회에도 유목사회에도 강한 세력이 없던 ‘틈새’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틈새 속에서 선비족의 모용부(慕容部)는 호·한 2중 체제를 개발했고, 탁발부(拓跋部)의 북위(北魏)는 그 체제를 북중국 전역으로 확장했다. 토머스 바필드는 이 2중 체제가 선비족의 잡식성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한다.

수·당 제국과 돌궐·위구르 제국 시대에는 혼합형 오랑캐를 위한 틈새가 존재하지 않았다. 거란은 6세기 초부터 동북방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농경제국이나 유목제국에 눌려 지내는 입장을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했다. 잡식성 세력의 억압에는 농경제국과 유목제국의 이해가 일치되었다. 695년 당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이 큰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돌궐(제2제국)이 거란의 진압에는 당나라와 협력한 일도 있었다.

당나라의 쇠퇴와 위구르제국의 소멸로 혼합형 오랑캐를 위한 틈새가 또 한 차례 나타났다. 840년 위구르제국 멸망 후 그에 눌려 지내던 여러 세력이 자라나는 가운데 하나가 거란이었다. 거란이 그중 특출한 성과를 거둔 조건을 그 흥기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거란은 초기에 8부(部)가 느슨한 연맹을 맺고 있었다. 이 느슨한 연맹을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그 흥기의 관건이었다. 일라부(迭剌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907년 연맹의 수장인 가한(可汗)에 취임했다가 임기제의 그 자리를 종신직으로 만들고 916년에 이르러 ‘거란’의 국호를 내걸었으니, 907년 아보기의 가한 취임이 거란 통일의 고비였다고 볼 수 있다.

일라부의 패권이 아보기의 조부 때부터 산업 기반을 확장한 데 있었다고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설명한다. 아보기의 조부 때라면 위구르제국 멸망 직후의 시기다. 거란 8부 중 서남쪽 모퉁이,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일라부가 농업을 확장하고 야금·직조 등의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나라와 위구르제국의 통제력이 굳건할 때라면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바필드는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오대사기(五代史記)]를 인용해서 아보기가 농업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소금의 독점권을 발판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169~170쪽) 거란 내부에서 일라부의 패권이 중국 농경사회와의 인접성에 기인한 것처럼 거란이 요(遼) 제국 건설에 성공한 이유도 같은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진족의 금나라, 요나라보다 중국화 빠르고 철저

중국 시안(西安) 대안탑(大雁塔) 부근에 있는 현장 조각상. / 사진:데이비드 캐스터

 

 

초기부터 남정(南廷)과 북정(北廷)을 함께 둔 요나라의 2중 체제는 농경과 목축을 포괄하는 혼합형 국가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유목민의 부족사회 질서를 보존한 북정은 다른 유목세력의 도전을 물리치는 군사력을 담당했는데, 936년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면서 요나라의 농경지역이 장성 이남으로 확장됨에 따라 경제력을 담당한 남정의 비중이 자라났다.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진(女眞)의 금(金)나라는 요나라보다 북중국의 영토를 크게 늘리면서 요나라의 2중 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여진도 거란과 같은 혼합형 산업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승계가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란과 여진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완전히 서로 다른 종족이었을까?

중국 주변 제 종족의 이름은 중국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기록을 남긴 중국 주류 사회의 인식이 현실과 맞지 않는 상황이 많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족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있고 같은 종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있다. 숙신(肅愼)과 말갈(靺鞨)과 여진(女眞)은 대략 같은 범위의 종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각 시기 중국사회의 인식이 연결되지 못해서 시기마다 다른 이름이 쓰인 것이다.

숙신과 말갈을 여진의 조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호(東胡)와 선비(鮮卑)를 거란의 조상으로 볼 수도 있다. 흉노제국이 일어서기 전에 몽골고원 동쪽 초원지대는 동호의 영역이었다. 흉노에게 격파된 후 동호의 일부가 오환(烏桓)과 선비 등 작은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흉노제국이 무너질 때 선비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흩어진 흉노 무리들이 선비로 모습을 바꾸는 정황이 그려져 있다. 선비족이 초원의 주류가 되는 상황에서 주변 세력들이 그에 포섭되는 것이다.

숙신과 말갈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가리키는 범위가 막연했다. 우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도 나타나는 시기와 위치가 들쑥날쑥한 것이 중국의 지칭을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북쪽 일대에 많이 나타나지만 한강 상류 유역 등 남쪽에서도 나타난다. ‘말갈’이란 이름만 갖고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데는 의문이 있다.

10세기의 여진도 범위가 막연하다. 여진 중에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은 부류를 숙(熟)여진, 낮은 부류를 생(生)여진으로 구분했다고 하는데, 거란으로부터 동쪽과 북쪽에 있는 종족을 모두 ‘여진’으로 부르다가 그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됨에 따라 구분하게 된 것 같다. 여진 중에는 발해(渤海) 유민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일반 거란인보다 문화 수준이 높더라도 피정복자로서 억압받았을 것이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보다 북중국의 통치 영역을 늘렸을 뿐 아니라 문화와 제도 전반에서 중국화가 더 빠르고 철저했다. 거란인보다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백지처럼 쉽게 중국 문화를 흡수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중국에서 멀수록 문화 수준이 낮았으리라는 선입견에 얽매인 것으로 보인다. 거란과 여진은 대체로 비슷한 문화 수준과 산업 형태를 갖고 인접 지역에 어울려 있었는데, 발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갈라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훗날 여진족이 청(淸)나라를 세울 때 그 일대의 여러 종족이(거란의 후예 포함) 만주족(滿洲族)으로 통합될 수 있던 것과 같은 공통분모가 만주 지역의 오랑캐들 사이에는 10세기 무렵에도 있었을 것 같다.

왕조사 너머 문명교류·계급 차원서 중국사 볼 필요

실크로드 길목에 있는 캐러밴서라이 유적. 캐러밴서라이는 여행자들이 쉴 수 있도록 길가에 만든 일종의 여인숙이다. / 사진:파이어스피커

 

 

중국사에서 3세기에서 10세기까지는 종래의 시대구분에서 대개 ‘중세’로 여겨진 기간이다. 발레리 한센은 이 기간을 ‘서쪽을 바라본(Facing West) 시대’로 설정해서 그 앞의 ‘중국을 발명한(Inventing China) 시대’, 그 뒤의 ‘북쪽을 바라본(Facing North) 시대’와 구분했다.

거듭 밝히거니와 나는 이 구분에 수긍하지 않는다. 중국의 서방과 북방은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결된 ‘유목민의 세계’였다. 한센이 ‘서쪽을 바라본 시대’를 말한 것은 서역 바깥에 있던 인도 문명권과 페르시아 문명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른 거대문명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좋은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가 수긍하지 않는 까닭은 그 관계가 10세기 이전에 비해 그 후에 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0세기 이후에 바뀐 것이라면 유목민이 중국의 중원을 요·금·원·청의 안정된 왕조로 통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농경사회와 유목사회 사이에 중국문명권 내에서 일어난 변화다. 다른 거대문명권과의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조너선 스카프가 전통시대 중국사 서술의 ‘계층 편향성’을 지적한 일을 앞에서 언급했는데, 이 편향성은 바필드나 한센 등 다른 유목사회 연구자들도 모두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중국의 주류 지식인과 역사가들이 ‘중화’의 관점에 얽매여 역사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측면은 파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부터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의 발전으로 그 편향성을 보정할 근거가 많이 확충된 것이 반가운 일이다. 그 덕분에 유목사회의 역할에 관한 이해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페르시아 등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편향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중앙아시아를 통한 육상 교류에 비해 동남아시아를 통한 해상 교류의 실상을 밝히기가 어려운 문제다. 유목민과의 관계는 왕조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기록이 많은 반면 남방의 해상 교류에 관한 기록은 훨씬 적다는 것이 또 하나의 편향성이다.

거대문명권 사이의 교류는 장거리 교역의 필요성에 좌우된다. 중국문명은 농경사회의 높은 생산성을 발판으로 경제력을 크게 키워 장거리 교역의 조건을 갖추었다. 교역의 비용을 감수할 만한 사치품의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경제력의 기반이 농업생산력이기 때문에 해로보다 육로의 개척에 나서기가 더 쉬웠다. 사막과 고산준령을 지나는 육로, 실크로드가 오랫동안 해로보다 큰 역할을 맡았던 이유다.

중국의 농경지대가 남중국해 연안의 푸젠(福建)·광둥(廣東)·광시(廣西) 지역까지 확장된 것은 4세기에서 12세기까지 꾸준히 진행된 일이다. 이 지역의 경제력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을 때, 교역에 대한 지역 자체의 수요가 자라나면서 해상교역의 본격적 발달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7세기에 당나라가 들어선 뒤 해상교역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해로의 발달 단계를 어렴풋이나마 보여주는 자료가 승려들의 여행기다. 여행이 힘들던 시절 먼 곳까지 움직인 사람 중에는 세 가지 대표적 부류가 있었다. 상인, 군인, 그리고 종교인. 종교인 중에는 다른 부류 사람들에 비해 넓고 깊은 관찰력과 기록 남기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문명권 거리, 바닷길 통해 빠르게 좁혀져

여행기록을 남긴 중국 승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현장(玄奘, 602~664)이다. 그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가 [서유기]에 활용되어 더욱 유명세를 탔다. 그는 629년 장안을 떠났다가 645년에 돌아왔는데, 왕복이 모두 육로였다. 그런데 다음 세대의 의정(義淨, 635~713)은 673년에서 695년까지 인도와 동남아시아 몇 곳에 체류했는데 왕복에 모두 해로를 이용했다.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에 체류 중이던 689년에 필묵(筆墨)을 구하기 위해 광저우(廣州)에 잠깐 다녀간 일이 있다는 것을 보면 해로여행이 무척 쉬워진 것 같다.

여행기록을 남긴 최초의 중국 승려 법현(法顯, 334~420)의 경험과 대조가 된다. 법현은 399년에 동진(東晋)을 떠나 인도에 갔다가 412년에 돌아와 [불국기(佛國記)]를 남겼는데, 그 돌아오는 길이 여간 험하지 않았다. 상선을 타고 스리랑카를 떠났다가 폭풍도 만나고 해적도 만나고 심지어 선원들의 살해 위협까지 겪었다고 한다. 마지막 항해도 광저우를 목표로 한 배가 수십 일간 표류했다가 식량이 다 떨어질 무렵 겨우 육지에 닿았는데 알고 보니 칭다오(靑島) 부근이었다고 한다. 스리랑카를 떠난 지 꼭 1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 시대에는 아직 해로여행이 위험할 때였는데 법현이 고령이어서 육로를 취할 기력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해로를 취한 것 같다.

인도 승려 선무외(善無畏, Subhakarasimha, 637~735)도 고령으로 해로여행을 했다. 그는 80세가 되던 716년에 인도에서 장안으로 왔다. 의정과 선무외의 활동 시기에는 해로여행이 안전하고 편안해진 모양이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혜초(慧超, 704~787)는 청년기인 720년대에 인도를 여행했는데, 돌아온 길은 육로가 분명하지만 간 길은 분명치 않다. 떠나기 전에 광저우 지방에 있었으므로 해로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의정은 광저우에서 파사(波斯) 상선을 타고 인도로 갔다고 하는데, ‘파사’를 페르시아로 보는 데 의문이 있다. (마이클 하워드의 [Transnationalism in Ancient and Medieval Societies(고대와 중세 사회의 국제활동)](2012) 232쪽에도, [Wikipedia] “Yijing” 조에도 모두 그렇게 되어 있다.) 7세기 후반에 페르시아 상선을 인도·중국 항로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앙드레 윙크의 [Al-Hind, the Making of the Indo-Islamic World(알-힌드, 인도-이슬람 세계의 형성](2002) 48~49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시기에 말레이반도의 한 지역이 중국에서 ‘파사(波斯)’라는 이름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상선이 중국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이슬람 정복(Islam Conquest)’ 뒤의 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페르시아 배가 말레이반도까지 오고 그 지역 주민들이 중국으로 중계무역을 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상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 해서 ‘파사’란 이름이 붙게 된 것 아닐지. 유리 공예품 등 파사 상품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파사가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못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서북방의 유목민과 실크로드 방면에 비해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관계나 해로 개척 과정에 관한 중국의 역사기록이 적고 현대 학계의 연구도 적다. 해상활동을 경시하던 대륙국가의 전통이 가져온 편향성이다. 그러나 문명권들 사이의 거리가 바닷길을 통해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몽골의 유라시아 정복이 시작되기 전에 문명권 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해상활동을 파악할 필요가 크다. 몇 권 책을 서둘러 주문하고 있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출처;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0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