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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속의 만주]10. 일제하 만주이주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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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29.

[韓國史속의 만주]10. 일제하 만주이주와 독립운동

입력 : 2004.03.10 18:19

 

한말~일제하 만주는 빈곤에 시달리던 소작농한테는 꿈과 희망의 땅이었다. 1860년대 이래 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척박한 농토를 근근이 부쳐먹던 농민들은 광활한 만주벌판을 향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 이미 만주땅에는 2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한국인 이주민한테 만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만은 아니었다. 진달래 피는 봄철까지 매섭게 불어대는 지독한 찬바람은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수토(水土)가 맞지 않아 풍토병에 쓰러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인간의 자취가 닿지 않은 황무지 개간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억척같이 일을 해 옥토를 만들었고, 만주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해 퍼뜨렸다.

 

만주는 민족의식, 애국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잊을 수 없는 지역이다. 한말 이후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불어넣어주는 일이 급선무였다. 애국지사들은 이천만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뜨거운 혈루를 흘리게 하는 데 역사 이상으로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주벌판에 자리잡았던 웅혼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뿐만 아니라 만주는 골짜기마다 독립군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독립운동의 기지였다. 일제는 통감부, 총독부를 설치해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독립운동을 국외에서 펼쳐야 했다. 만주는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중국당국의 통치력도 미약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미 1906년에 북간도 룽징(龍井)에 서전서숙이 세워진 이래 여러 민족학교가 세워져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나라를 잃은 뒤에 북간도에는 간민회가 만들어졌고, 러시아 국경선에 가까운 왕청현 라자구에 비밀사관학교가 세워졌다. 1910년대에 가장 규모가 크고 3·1운동 이후까지 지속된 독립운동 기지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였다.

 

그렇지만 독립운동 앞에는 험악한 암초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국인과 중국 당국은 우리 이주민과 망명자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토지도 주택도 팔기는커녕 임대조차 꺼렸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가 한국인을 앞장세우거나 한국인 독립운동을 트집잡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독립지사들은 활로를 뚫기 위해 변장운동을 벌였다. 우리 복장 대신 중국인처럼 입고 중국인처럼 살아 중국인들이 신뢰하도록 하자는 운동이었다. 중국말 배우는 것이 급선무여서 중국어학습운동도 벌였다.

 

독립지사들은 때로는 역사의 ‘변장’도 고려했다. 박은식이나 이상룡, 김교헌 등은 만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조가 우리와 같다는 주장도 했고, 금나라·청나라를 세운 여진이나 요나라를 세운 거란이 우리 민족과 같은 종족이라고 역설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는 우리 동포의 삶과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이상룡, 이회영 등은 중국 정부에 우리와 중국인의 조상이 같으니 와신상담할 곳이 이곳이 아니냐고 호소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이주민사회는 한껏 뜨거워졌다. 1919년 3월에 북간도 룽징, 서간도 삼원포 등지에서 잇달아 만세시위가 터졌다. 신흥무관학교가 세 군데로 확대되었고,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다.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여러 차례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했다. 일제자료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24회나 있었다.

 

이 시기 이주민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북간도 독립군은 훌륭한 무장을 갖추었다. 불안을 느낀 나남 19사단 소속 일본군은 1920년 6월 두만강을 건너 추격했으나 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한테 참패했다. 독립전쟁 서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전투는 그해 10월에 있었다. 혼춘사건을 조작해 국경을 넘은 일본군 가운데 이즈마(東正彦) 소장이 거느린 5,000명 내외의 병력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청산리 백운평,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던 바, 독립군은 같은 시기 타국의 독립전쟁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독립전쟁에 패배한 일본군은 10, 11월에 북간도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선인촌을 찾아다니며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1922, 23년쯤부터 독립운동단체는 군사활동과 함께 행정·생계·교육 등의 자치를 병행하였다.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도 이루어져 1923년에는 참의부가, 다음해에는 정의부가 조직되었고, 1925년에는 북만주지방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결성되어 3부시대를 열었다.

 

1931년 일제 관동군이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자 항일무장투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강력한 관동군과 대항하여 싸우는 데는 빨치산의 유격전이 유리했다. 일부 독립군은 만리장성 너머로 들어갔고, 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은 1932년에서 1934년에 걸쳐 유격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사후에도 이홍광부대와 연합하여 싸우다가 1938년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했다.

 

항일 빨치산 가운데에는 최용건·김책·허형식·최현 등이 거느린 부대도 활약을 했으나, 김일성부대가 유명했다. 김일성부대의 명성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북간도·백두산 일대에서 주로 전투를 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특히 성공적인 국내 진공작전이었던 1937년 보천보전투는 동아일보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김일성부대는 1940년 백두산기슭 홍기하전투에서 마에다부대를 궤멸시킨 얼마후 대부분이 소만국경을 넘었다.

 

만주는 농토를 빼앗겼거나 땅이 없는 소작농 이주민한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또 만주는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웅장한 고대사와 관련해 대단히 상징적인 지역이었다. 특히 만주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기지였고,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잊을 수 없다.

 

〈서중석/성균관대교수·역사문제연구소장〉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3101819011&code=210100#csidxee6e73eab6f2e038e88675741296e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