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신석기시대 농경(新石器時代 農耕)/가축사육(家畜飼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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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시대/고고학

2020. 10. 9.

신석기시대 농경(新石器時代 農耕)

사전적 의미에서 농경은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행위이고, 농업은 땅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한 동식물을 길러 생산물을 얻어내는 산업이다. 농경에서는 식물만 포함하고 농업은 동식물 모두가 대상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농경과 농업은 앞의 사전적 의미와 다소 다르게 정의되고 있으며,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정의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첫번째는 신석기시대 시작부터 농경이 있었다는 입장으로, 북한에서는 전기의 괭이농사에서 중기에는 보습농사로의 발전단계까지 상정하고 있다. 괭이농사는 뒤지개나 괭이로 땅을 뒤지고 거기에 씨나 뿌리를 심는 원시적인 농사를 말하며 유적에서 발견되는 괭이, 뒤지개 같은 도구들과 낟알이나 열매를 가공하는 갈판·갈돌을 증거로 삼고 있다. 아울러 항구적인 정주생활과 관련되는 움집과 대형 토기 및 저장구덩이의 출현도 농경과 관련된다고 본다. 또한 당시의 밭은 화전으로 일군 것으로 추정한다. 중기부터는 새로이 나타난 돌삽과 돌보습을 근거로 보습농사를 상정하고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짓는 발전된 농법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후기에는 보습농사를 바탕으로 곰배괭이가 호미로 이용되면서 김매기가 진행되었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기본적 입장이다.

 

두번째는 신석기시대는 수렵채집과 어로생활로 생업을 영위하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앞에서 언급된 괭이, 보습, 뒤지개 등의 농기구는 농경도구가 아니라 식물뿌리를 캐거나 땅을 파는데 이용된 굴지구(堀地具)로 파악하며, 갈판도 도토리 등의 야생 식료를 가공하는데 이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기존에 보고된 조 등의 낟알도 재배종이라는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세번째는 절충적 입장으로 신석기시대 전기 후반이나 중기부터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아 조와 기장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단순히 재배식물이 존재한다고 하여 당시 사회를 농경사회로 보지는 않으며, 생업경제에서의 비중을 기준으로 신석기시대를 수렵채집경제, 청동기시대를 농업경제로 파악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상기한 여러 관점은 농경의 고고학적 증거, 재배식물의 출현 시점과 전체 생업에서의 비중, 농경의 정의에 대한 연구자의 입장 차이와도 맞물려 있다. 과거에는 수렵·채집과 농경, 획득경제와 생산경제란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신석기시대를 연구하였지만 지금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기적 모델을 선택하면서 농경의 정의 또한 바뀌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고든 차일드(Gorden V. Childe)는 식물재배종과 가축의 출현을 신석기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수렵채집과 농경을 대립적, 불가역적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뒤이어 브레이드우드(Robert Braidwood)가 식량 생산을 농경과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수렵채집의 식량획득과 농경의 식량생산이란 이원적 사고방식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이에 대한 생태학적, 진화론적 모델이 출현하면서 수렵채집과 농경이란 단순한 이분법보다 생업 차원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변하였다. 또한 농경, 농업, 원경, 재배, 순화처럼 사람과 식물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용어에 대해서도 학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순화를 모든 생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생적, 공진화(共進化)의 개념으로 파악한 린도스는 순화를 일반적인 환경에서 인간에 의한 야생식물의 확산과 보호라는 우발적 순화, 인간에 의해 변형된 환경에서의 재배와 길들이기라는 전문적 순화, 농업생태에 존재하는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식물의 추가적 진화를 동반하는 농업적 순화로 구분하였다. 포드는 농경이란 용어에 내재된 개념적 모호함을 배제하기 위하여 식량채집과 식량생산의 개념을 수용하고 후자를 재배와 순화의 2단계로 세분하였다. 또한 식량생산의 방법으로 원초적 농경·원경·경작지(field) 농경의 세 단계를 설정하였다.

 

해리스(Marvin Harris)는 사람과 식물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야생식물 채집과 생산(소규모 경작), 재배(체계적 경작), 농업(농사)으로 이어지는 진화론적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의 모델은 사람과 식물 사이의 상호작용이기에 생태적이며, 순화에 관련된 과정과 농업 출현의 결과가 생물학적, 문화적 변이에 작용한 선택의 산물로 추정되기에 진화론적이다. 그는 원초적 농경이란 모호한 용어를 배재하기 위하여 재배를 ‘체계적인 토지 개간 및 경작과 미순화(undomesticated) 작물 파종의 결합’으로 정의하였으며, 농업은 순화작물의 재배에 한정하였다. 해리스의 모델에서는 연속적인 전이과정을 상정하면서도 순화종의 출현을 농경 설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야생종에서 순화종으로의 전이는 야생맥류 재배 실험에서 보듯이 수십, 수백 년 정도의 단기간에 형성될 수도 있지만 벼나 아메리카 기원의 작물이 증명하듯이 수천 년에 걸친 장기간의 과정일 수도 있다. 또한 재배라는 용어 자체를 야생종 재배에 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해리스 본인 스스로도 순화를 수렵채집과 농업의 경계로 삼던 기존 견해를 철회하고 야생종에서 순화종으로의 점진적 전이를 상정한 수정 모델을 내놓는다. 여기에서 식물성 식량 생산은 야생종이 우세한 단계(소규모의 개간/경작, 대규모의 개간/경작)와 순화종이 우세한 단계로 구분하고 농업은 후자에 한정하였다.

 

스미스는 재배에는 경작과 개간의 의미도 포함되며, 원경은 일반적으로 향신료, 꽃, 과수, 채소 등을 정원에 소규모로 재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원초적 농경이란 용어도 여전히 야생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 농경이란 용어 사용 자체가 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들 용어가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전이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대신 포드와 마찬가지로 식량생산을 식량획득에 대칭되는 용어로 채택하고, 식량생산 단계에서 순화종에 대한 의존도가 30∼50%를 넘어서는 농경사회 이전의 단계를 저차원(low?level) 식량생산 단계로 지칭하였다. 그러면서 저차원 식량생산의 중간지대는 수렵채집사회나 농경사회의 부수적 단계가 아닌 독자성과 영속성을 지닌 제3의 지대로 파악하였다. 구석기시대와 후빙기의 수렵채집민은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어 양자를 동일한 수렵채집사회로 통합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이다. 스미스의 중간지대를 벗어나는데 소요된 시간, 즉 농경사회로의 전이 기간은 북미 동부는 4000년, 멕시코에서는 6000년, 근동은 3000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전이과정에 대한 명칭에는 견해가 다르지만 해리스와 스미스 모두 생업에서 순화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단계를 ‘agriculture’로 지칭하였다. 후자는 농경으로도, 농업으로도 번역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재배식물의 경작 자체를 농경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학문적 용어로서의 ‘agriculture’는 농업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즉 순화된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를 농경, 작물이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된 시점의 집약 농경을 농업으로 지칭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면 순화된 식물 재배가 시작된 한반도 신석기시대는 해리스의 재배 단계, 스미스의 저차원 식량생산 단계에 해당되며 순화된 식물의 재배라는 의미에서 농경이란 용어도 사용할 수 있다. 반면 농업이나 농경사회는 청동기시대부터 출현하였다는 절충안을 끌어낼 수 있다.

 

최근 일본 학자들은 재배의 하위 개념으로서 원경과 농경을 상정하면서 원경은 각각의 식물이 증식, 관리되어 개개로 수확되는 토지이용 시스템, 농경은 집합적인 동시에 대량의 시스템으로 정의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반도 신석기시대와 일본 조몬시대의 작물 재배는 원경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경이란 용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용어가 아니라는 약점이 있다. 해리스는 원경이란 용어를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과도기적 명칭으로 사용하는데 반대하였다. 원경은 농경과 동일시될 수도 있고, 소규모 정원 재배와 대규모 논밭 재배를 구분하기 위한 농업 시스템의 독특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농경 기원의 이차적 지역이다. 요서지방에서 기원전 6000년기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던 조와 기장이 이후 요동을 거쳐 돌따비(돌보습)·연석과 함께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중서부지방에서는 기원전 4000년기 전반, 기타 지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의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조·기장 재배가 광범(broad?spectrum) 경제의 한 부분으로 실시되었다. 부산 동삼동패총·진주 상촌리유적 등의 동남부, 아산 장재리 안강골·시흥 능곡동 유적 등의 중서부 모두 조와 기장이 동시에 검출된 것을 보면 기존에 조만 보고되었던 서북한의 궁산문화 유적에서도 조, 기장이 같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장이 기원전 4000년기 후반부터 출현하는 러시아 남연해주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기장 중심의 잡곡 재배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잡곡이 재배되었어도 당시 사회는 수렵채집사회의 구조에 머물러 있어 농경사회로 지칭될 수는 없으며 농경도구의 분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잡곡 재배의 채용 또는 농경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미진하며, 기후변화, 인구증가, 주민이동, 사회 복합성 증가 등을 복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산, 김포의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 일산 토탄층 출토의 횡주어골문토기와 김해 농소리패총 출토 이중구연토기의 태토에서 검출된 벼의 식물규산체, 옥천 대천리주거지에서 밀, 보리와 함께 발견된 탄화미를 근거로 늦어도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한반도 서해안으로 도작이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식물규산체 분석의 신뢰성, 벼 자료의 후대 혼입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어 벼 유체에 대한 직접적인 방사성탄소연대가 수반되지 않는 한 이들 자료를 신석기시대 도작의 증거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전문적인 식물고고학자가 분석한 유적에서는 조와 기장만 검출되었을 뿐 이들보다 낟알 크기가 훨씬 큰 쌀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즐문토기의 압흔분석에서도 볍씨자국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작물은 교류나 교역의 산물로 출현할 수도 있어 벼 유체의 존재가 도작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도작은 결정적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존재 여부에 대한 결론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안승모)

 

참고문헌

신석기시대 생계방식의 변천과 남부 내륙지역 농경의 개시(송은숙, 호남고고학보8, 호남고고학회, 2001),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의 전이 과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준정, 영남고고학28, 영남고고학회, 2001),

남한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김장석, 한국고고학보48, 한국고고학회, 2002),

한국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농경 연구의현상과 과제(안승모, 한국신석기연구10, 한국신석기학회, 2005),

식물유체에 기초한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한 관점의 재검토(이경아, 한국신석기연구10, 한국신석기학회, 2005),

園耕과 繩文農耕(宮本一夫, 한국신석기연구10, 한국신석기학회, 2005),

동아시아 정주취락과 농경출현의 상관관계(안승모, 한국신석기연구11, 한국신석기학회, 2006),

한반도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의 수용과 문화 변동(임상택, 선사농경연구의 새로운 동향, 사회평론, 2009)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출처;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02

 

 

가축사육(家畜飼育)

가축사육은 신석기시대 생업경제의 일환으로써 식물재배와 함께 농경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러나 농경의 기원, 또는 농경의 시작을 설명할 때 식물재배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서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가축사육과 식물재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가축사육이 먼저라는 설과 둘째, 식물재배가 먼저라는 설, 셋째, 농사지을 때 축력을 이용하고 짐승의 배설물을 비료로 쓰기 때문에 양자가 동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등의 주장이 있는데 현재까지 나타난 자료를 보면 짐승사육이 먼저이다. 즉 개는 약 B.C. 11000년 무렵부터, 그리고 양은 자위 헤미샤니다르 유적에서 역시 B.C. 11000년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으나, 식물재배의 경우 이보다 많이 늦어져 보리나 아마씨가 B.C. 7000년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였을까 하는 데 대한 설명은 식물재배의 기원에 대한 해명만큼이나 막연하고 어려운데, 갱신세 말기에 구석기인들의 지나친 사냥(overkill)으로 동물들이 자체 증식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이들을 길들이는 데 착안하였을 것이라는 설, 고든 차일드의 건조설(oasis설)로부터 파생되는 근접설(propinquity)-기후건조로 인해 오아시스 주변에 근접하여 몰려든 동물과 인간의 친화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등이 제시되는 정도이다.

 

짐승사육 가운데 가장 명백한 예로는 ??개(犬)??를 들 수 있다. 개는 중동지방을 포함한 몇몇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선조는 늑대(Canis lupus)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최초의 개 사육 증거는 B.C. 11000년 전의 중동지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초기의 개가 가축으로 이용되었는지 사냥용으로 이용되었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양은 식량으로 가장 먼저 사육되었던 동물로서 B.C. 11000년부터 사육되었다. 양과 비슷하게 식량으로 이용되는 것이 염소인데 이들은 항상 두 종류 가운데 하나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양과 염소는 사육된 이후 결정적인 형질상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히 뿔과 털에 있어 그 변화가 심하다. 서남아시아에서 B.C. 7000년 무렵부터 이들을 집중적으로 사육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육된 소의 선조는 커다란 야생 첫소(Bos primigenius)이다. 이 동물은 유럽, 서남아시아, 북부 아프리카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소에 대한 최초의 사육 증거는 B.C. 7000년 경 남동 유럽에서 나타난다. 서남아시아에서는 B.C. 6000년부터 나타나므로 이것만은 중동지방 보다 유럽 쪽이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식량으로서 중요한 돼지 역시 B.C. 7000년경 후반부터 길러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사육돼지의 야생종(Sus scrofa)은 미대륙을 제외한 세계 거의 전 지역에 걸쳐 널리 분포한다. 어린 야생돼지는 매우 길들이기 쉬워서 인간과 동물이 친화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 곧잘 인용된다. 미대륙에 있어서 가축사육의 예는 구대륙과 뚜렷이 다르게 독자적으로 나타난다. 짐승사육의 예는 보잘 것 없으며 야마?알파카 등의 신대륙 짐승들은 대부분 식용으로보다는 주로 축력을 이용하기 위해 길러졌다. 다만 작은 개(small dog)는 B.C. 3000년경 멕시코 계곡에서 사슴의 남획으로 인한 식량자원 고갈을 해결해 준 중요한 단백질의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남미지역에서 B.C. 3500년 경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해 준 것이 기니 픽(guinea pig)이다.

 

조류는 사육되어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해 준 것 중에서 비교적 소홀히 다루어진다. 닭은 B.C. 6000년경 중국이나 태국?버마 접경지대에서 처음으로 사육되었다고 한다. 칠면조는 기원 전후에 중남미에서 독자적으로 길러지기 시작했다. 기니 파울(guinea fowl)은 아프리카에서, 워터 파울(water fowl)은 동아시아에서 널리 길러졌다. 거위 사육은 이집트 신왕조 무렵부터라고 한다. 수레를 끄는 짐승으로는 말, 낙타, 당나귀, 남미의 야마와 알파카, 티베트의 야크 등이 있다. 말은 B.C. 4000년경 러시아 남부에서 사육되기 시작하였으며 낙타는 남 아라비아에서 B.C. 3000년경, 당나귀는 B.C. 3500년경 중동지방에서, 그리고 야마는 B.C. 4000년 전 페루에서 출현하였다. 이들 짐승들은 후기에 가면 고기 이외에도 젖과 털 등을 제공해주었다. 애완용으로 기르는 짐승 중에 대표적인 것은 고양이인데 B.C. 6000년경 중동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가축사육의 예는 이렇게 많고 다양하나 한국 신석기시대의 가축사육 예는 많지 않다. 가장 보편적인 예로는 개의 사육이 있는데 서포항 유적에서 보면 개별 집자리의 불땐 자리 옆에서 개뼈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궁산, 농포동, 수가리, 연대도 유적 등에서도 개뼈가 나타나 가장 많이 길렀던 짐승으로 보인다. 신석기 후기에는 무산 범의 구석에서 나타나는 집돼지뼈를 가지고 돼지 사육도 주장되고 있으나 범의 구석에서 보자면 여전히 야생 돼지가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가축사육이 가장 먼저 시작된 중동지방에 있어서도 사냥의 중요성은 여전히 지속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신석기시대에 가축사육이 시작되었으나 야생짐승 사냥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인 것이다.

 

참고문헌

The Oxford Companion to Archaeology(B. Fagan edit., 1996),

문명의 발생(찰스 레드만 지음, 최몽룡 옮김, 민음사, 1995),

Last Hunters and First Farmers(Price & Gebauer edit., 1995),

Transition to Agriculture in Prehistory(Gebauer & Price, 1992),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Archaeology(A.Sheratt edited., 1980)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출처;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0019